'2013/11'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3/11/28 세바예
  2. 2013/11/26 병행한다
  3. 2013/11/25 남자들
  4. 2013/11/23 정말 고맙습니다
  5. 2013/11/23 김영갑 갤러리
  6. 2013/11/23 쑥스러움
  7. 2013/11/21 좋은 일, 나쁜 일
  8. 2013/11/21 따뜻하고 예쁜 달력 사세요
  9. 2013/11/18 감동
  10. 2013/11/15 소설
  11. 2013/11/12 싸움인가 기생인가
  12. 2013/11/11 고래가그랬어 120
  13. 2013/11/07
  14. 2013/11/07 요조-김규항 봇
  15. 2013/11/04 브로큰 애로우
  16. 2013/11/04 맞춤
  17. 2013/11/03 트위터의 해악
  18. 2013/11/02 치 2
  19. 2013/11/01
2013/11/2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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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예'가 나왔다.
앞으론 두어 달에 한권씩 단행본을 낼 계획. 응원을! ㅎ

2013/11/28 14:55 2013/11/28 14:55
2013/11/26 14:15
이택광은 자기계발 담론은 산업화 초기에 힐링은 산업화 이후에, 라고 이야기하고 서동진은 산업화 이후에도 그 둘이 동시에 진행된다고 이야기했다는 걸 읽었다. 물론 서동진이 맞다. 생각해보면, 개인적인 일이든 사회적인 일이든 ‘병행하는 것을 선후로 나누는 오류’는 무시로 일어난다. 오늘 사회진보의 파탄도 결국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가 시급하니 신자유주의 문제는 후순위라는 생각의 결과이며, 교육의 파탄은 스펙을 위해 성장을 후순위로 두는 강박의 결과 아닌가. 거의 모든 것은 실은, 병행한다.
2013/11/26 14:15 2013/11/26 14:15
2013/11/25 10:15
옛 남자들은 여자와의 관계에서 부담을 지면서 그 이상으로 부담을 지우는(구속하는) 태도였다면 요즘 남자들은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 부담을 지우지 않는 태도가 보인다. 부담을 지면서 지우진 않는 남자들은 언제나 출현할까.
2013/11/25 10:15 2013/11/25 10:15
2013/11/23 18:39
'내재화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주제의, 어제 민주노총 제주본부 강연은 세 시간을 넘어섰다. 두어 번 '너무 길어지는데 괜찮으냐' 묻기도 했는데 마칠 무렵 한 노동자 왈. "말씀이 워낙 실제적이고 알아듣기 쉬우니까요." 정말 고맙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강연을 해서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그보다 고마운 말이 또 있을까.
2013/11/23 18:39 2013/11/23 18:39
2013/11/2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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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 갤러리엔 되도록 혼자 가길 권한다.
제2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훅 불어오는 아픔을 느끼려면.

(뒷마당의 풀꽃)
2013/11/23 17:57 2013/11/23 17:57
2013/11/23 10:22

얼마간 쑥스러움이 있는 사람에게 호감이 간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차기만 한 사람은 내면의 공포에 비명을 지르고 있거나,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라 느껴진다.

2013/11/23 10:22 2013/11/23 10:22
2013/11/21 23:30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는 법이지만, 좋은 일엔 반드시 나쁜 일이 수반되고 나쁜 일엔 반드시 좋은 일이 수반된다. 그리고 사람은 대개 좋은 일에 수반되는 나쁜 일을 통해 좀더 나빠지며, 나쁜 일에 수반되는 좋은 일을 통해 좀더 좋아진다.
2013/11/21 23:30 2013/11/21 23:30
2013/11/2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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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1 00:04 2013/11/21 00:04
2013/11/18 12:20
며칠 전 정태춘, 박은옥 공연을 보다가 ‘리철진 동무에게’와 ‘92년 장마 종로에서’ 두 곡에서 눈물이 났다. 함께 본 친구는 공연 후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듣던 시절이 떠올라 회한에 젖게 된다고 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태춘, 박은옥뿐 아니라 다른 음악도 그 음악을 즐겨듣던 시절과 그 시절의 감동을 아무리 생생하게 기억한다 해도 그 기억이 현재 감동으로 전이되진 않는다.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나와 음악의 ‘대면’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나에게 감동적인 음악은 지금 이 순간 감동적인 음악이다. 
2013/11/18 12:20 2013/11/18 12:20
2013/11/15 14:38
ㅊ 작가는 만날 때마다 나에게 소설을 써볼 것을 권한다. 난 있는 것을 들여다볼 줄은 알아도 당신처럼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재주는 없다고 하면 그건 소설에 대한 편견이며 오히려 그 점에서 다른 걸 쓸 수 있을 거란다. 나는 물론 고맙다, 생각은 해보겠다고 대답한다. 재미있는 건 이 대화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그런 대화가 있었다면 다음엔 '생각해봤는가'라고 묻고 '생각은 해봤는데..'든가 '써보기로 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그는 다시 나에게 소설을 써볼 것을 권유하고 나는 또 처음과 비슷한 대답을 한다. 결국 며칠 전 그에게 '써보겠다' 했다. 지금까지 내 글은 어떤 사람이 한 말이나 글, 활동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소설은 그 사람 자체를 다룰 수 있다. 사실 내 눈길이나 촉수는 그쪽에 훨씬 집중되어 있긴 하다, 언제나. 바로 그런 이유로 아주 오랫동안 소설을 써볼 것을 권해온 친구도 있고. 여하튼 써보기로.(혹은, 써보는 것과 쓸 수 있는 건 다르니 편히 생각하기로.ㅎ)

2013/11/15 14:38 2013/11/15 14:38
2013/11/12 02:37
“통진당 해체하려는 박근혜가 무서워!” 친구의 문자 메시지에 장난기를 섞어 답한다. “주사파가 위험하다 생각하는 걸까 이정희에 대한 순수한 응징일까.” “순수한 응징! ㅎㅎ” “나름엔 얼마나 힘들겠어. 아버지 같았으면 간단하게 처리했을 텐데 민주화가 되어놔선 명분 만들어야지 여론 살펴야지. 공화정에서 살아가는 공주의 애환이랄까.” “얼씨구.” “농담을 늘어놓은 건 이명박을 통해 박근혜를 통해 정체성을 구성하는 우리의 습성이 못마땅해서야. 남 욕으로 우릴 정당화하는 것 그만하고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전망을 이야기하자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좌파가 ‘진보’의 이름으로 반이명박 운동에 참여하게 된 건 대략 이런 정조였을 게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보면서 정권이 바뀐다고 세상이 쉽게 바뀌는 건 아니구나 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을 보니까 정권에 따라선 세상이 완전히 망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 이명박은 충분한 악(惡)이었지만 동시에 추(醜)였기에 그의 말과 행태는 좌파들을 그야말로 환장하게 만들었다. ‘이명박이 한국 사회를 30년 전으로 만들었다’는 식의 말은 과장이었지만(물론 이명박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다. 그러나 사회를 30년 전으로 만들려면 ‘30년 전 수준의 국민’이 필요했다.) 그의 추악한 행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거개의 좌파가 반이명박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명박에 치를 떨고 이명박 욕하기로 하루를 보내는 일이 거듭되면서 반이명박 운동은 자기 내용을 잃고 ‘이명박 욕하기 누가 누가 잘하나’ 잔치가 되어갔고 운동의 주도권은 이명박에게 넘어갔다. 반이명박 운동의 열기는 전적으로 이명박이 얼마나 문제를 제공해주는가에 달리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명박이 반이명박 운동의 실질적 리더가 된 것이다. ‘모든 건 가카덕’이라는 김어준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복종은 존경의 태도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경멸의 태도로도,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반이명박 운동으로서 진보는 대략 세 단계로 무너졌다. 첫째, ‘이명박이 왜 당선되었는가’를 화두로 하는 사회적 성찰이 사라졌다.(누구든 이명박만 욕하면 손쉽게 정의와 진보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왜 성찰이 필요한가.) 둘째, 모든 사회 문제, 심지어 이전 자유주의 정권에서 그대로 이어져온 문제까지도 이명박 탓이 되면서 현실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분석이 사라졌다. 또한 모든 토론과 담론이 이명박 욕하기로 귀결하면서 모든 토론과 담론은 이명박 수준으로 하향평준화했다.(고작 이명박 따위를 욕하는 데 무슨 진지한 토론과 담론이 필요한가.) 셋째, 그런 당연한 귀결로 진보의 다양하고 진지한 대안과 전망들이 사라졌다.(‘닥치고 정권교체’외엔 다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소리로 치부되었으니.)

그런 진보가 선거에서 이기긴 어려웠다. 진보 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에 투표한 대중에게 실망을 토로했지만 관점을 바꾸어, 대중은 왜 진보에 투표해야 했을까. 자신들의 10년 집권 역시 실망스럽긴 매한가지였던, 아무런 반성도 없이 오로지 이명박에 대한 대중의 반감만 이용하여 도덕적 우위와 희망을 말하는, ‘이명박 욕하기’를 ‘박근혜 욕하기’로 바꾸는 것 말곤 달라진 것도 전망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대중은 왜 투표했어야 할까. ‘이명박도 싫고 이명박 욕만 하는 놈들도 싫은’ 대중의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었을까.

결국 오늘 진보에 남은 건 한 개의 앙상한 구호뿐이다. ‘최소한의 상식.’ 최소한의 상식이 위협받을 때 최소한의 상식을 지키는 건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상식을 말한다는 건 최소한의 상식부터 회복하자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것 말곤 내세울 게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오늘 진보는 최소한의 상식부터 회복하자고 말하지만 실은 그것 말곤 내세울 게 없다. 그런 진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적이 최소한의 상식을 파괴해주기만 기다리는 것이다. 진보는 지배체제가 바라는 ‘민주화 이후 진보의 이상적인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진보당, 전교조, 전공노... 다들 말하듯 박근혜 정권의 어두운 그림자가 심상치 않다. 여론을 살펴가며 계획한 바를 실행해나가는 치밀함과 과단성이 이명박과는 격이 다르다. 진보에 성찰과 자기 내용과 전망이 없다면, 이명박을 ‘쥐’라고 욕한다고 달라진 게 없었듯 박근혜를 ‘댓통령’이라 조롱하고 ‘독재자’라 욕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반이명박 운동이 ‘이미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에 머물렀듯 반박근혜 운동은 ‘이미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에 머물 것이다. 반이명박 운동의 실제 리더가 이명박이었듯 반박근혜 운동의 리더는 박근혜일 것이다. 욕하고 조롱하기야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욕하고 조롱하기 전에 차분한 질문이 필요하다. 진보는 박근혜와 싸우고 있는가 박근혜에 기생하고 있는가.(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3/11/12 02:37 2013/11/12 02:37
2013/11/1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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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자의 머리, 염소의 몸통, 뱀의 꼬리를 한 괴물이야. 하나의 몸에 서로 다른 것들이 섞여 있지. 재미있거나 심심하거나 정의롭거나 비겁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고래처럼 말이야. 여기에 사는 키메라는 어떨까? 상상은 동무들의 몫!"(표지 그림을 그린 이정호 작가의 말)

2013/11/11 15:33 2013/11/11 15:33
2013/11/07 12:39
어제 저녁 의논할 일이 있어 몇몇 친구들이 고래 사무실에 모였는데 마치고 맥주를 했다. 일하는 엄마인 친구가 다른 일하는 엄마(근래 회사 일이 많이 힘들어 한계치에 닿은)에게 말했다. “내가 행복해야 내 아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절로 고개가 끄덕끄덕. 나 역시, 특히 엄마들 대상 강연에선 늘 하는 이야기지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어찌나 새삼스러운지. ‘공감대’라는 게 좋은 건 사람이 띠를 이루기 때문이다.(공감대에서 대(帶)는 ‘띠’라는 뜻이기도.) 
2013/11/07 12:39 2013/11/07 12:39
2013/11/07 12:20
'내 문제를 미루기 위해 제도정치 트윗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지적한 것이긴 하지만
묘하게도 트위터에 대해 적은 직후 구글 알리미가 '요조-김규항 봇'을 알려왔다.


요조? 요조와 나의 조합이 희한하게 느껴졌는데(사람들이 나에게 고정관념을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바로 그 이유로 그 고정관념에 구속되어 있다) 몇 개의 글들을 훑어보니 꽤 조화롭다. 이를테면 이어지는 두 글. "결혼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이다. 제도에 나를 끼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래서 축가도 잘 안 하는데.."(요조) "위험의 범주가 삶의 추가 선택이 아니라 본디 요소라 생각한다. 사람은 조금은 위험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고 말이다."(김규항) 두 글은 '제도와 삶의 범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봇을 운영하는 이가 예민한 편집자라서 요조와 나의 글 가운데서 이런 조합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이야기하는 방식이나 공간이 다르면  같은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라 생각하곤 한다.
2013/11/07 12:20 2013/11/07 12:20
2013/11/04 20:53
지난주 심야 고속버스에서 노트북으로 오랜 만에 짐 자무쉬의 데드맨(1995)을 보다 닐 영의 그런지 필 가득한 막막한 기타 소리에 새삼 꽂혀선 닐 영 앨범들을 다 꺼내 하나씩 듣고 있다. 오늘은 브로큰 애로우(1996). 현재 내 정조에 맞기라도 하는 걸까. 아, 좋다.
2013/11/04 20:53 2013/11/04 20:53
2013/11/04 17:21
기억의 몽타주(류동민),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한윤형), 행복 스트레스(탁석산). 친구가 근래 재미있게 읽었다며 보내준 몇 권의 책. 기차나 버스로 지방 돌아다닐 때 가벼우면서도 개성있는 책들이 아쉬웠는데 셋 다 맞춤인 듯.
2013/11/04 17:21 2013/11/04 17:21
2013/11/03 22:47
오랜 만에 만난 친구가 말하길 내가 트위터를 그만둘 즈음 자기도 그만 두었단다. 그는 그만 둔 이유를 몇 가지 이야기했는데 대체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트위터를 열심히 하던 사람이 트위터를 그만 두는 건 매일 잠깐씩이라도 절이나 기도를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유익을 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물론 사람들이 그토록 트위터에 열중하는 이유는  외로워서, 위로받고 싶어서(친구가 있는 느낌을 갖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해악(이라고까지 표현해야 싶긴 하나 해악이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선 두 가지만 들면,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게 된다는 점(사람은 되도록 말수를 줄이려 노력하는 편이 심리적으로나 지적으로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내 생각을 가다듬기보다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찾는 데  몰두하고 또 몰려다님으로써 생각하는 힘이 점점 약해진다는 점. 물론 이건 트위터만의 해악이라기보다는 SNS, 한국 SNS 전반에서 나타나는 해악이기도 하다.
2013/11/03 22:47 2013/11/03 22:47
2013/11/02 05:32
두 시간 후 만난 김단에게 물었더니 맥주는 안 먹고 치킨만 먹겠다는 뜻이었단다. 나는 주종을 안 가리는데 김단은 소주를 고집하는 편이다. 김건과 셋이 술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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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2 05:32 2013/11/02 05:32
2013/11/01 22:40
김단이 새로 사귄 남자친구를 데려온다고 해서 같이 한잔하자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혼자 온단다. "아빤 이미 치맥이 잔뜩 땡겨졌으니 니가 대신 먹어 그럼" 하니 이런 답이 왔다. “ㅎㅎㅎㅎㅎ치ㅎㅎㅎㅎㅎ”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치맥의 치인가 혀를 차는 치인가.



2013/11/01 22:40 2013/11/01 2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