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13/10/31 지난 10년 - 가설
  2. 2013/10/21 맹랑한 약장수와 어른들
  3. 2013/10/21 십이야
  4. 2013/10/16 경로
  5. 2013/10/16 영감님
  6. 2013/10/15 개별성
  7. 2013/10/15 대형교회
  8. 2013/10/12 근사한 쉼터
  9. 2013/10/12 풀뿌리 운동가들
  10. 2013/10/12 한 풍경
  11. 2013/10/09 체육 이야기
  12. 2013/10/08
  13. 2013/10/04 믿어주면
  14. 2013/10/03 낙관주의
  15. 2013/10/02 감탄
  16. 2013/10/02 신보
  17. 2013/10/01 불쌍한 아이는 없다
2013/10/31 07:53
(친구들이 ‘근래 조용한 것 같다’고 말하면 나는 웃으며 대꾸하곤 한다. “지난 10여 년간 자유주의 세력과의 전투에 패배했음을 깨끗이 인정하고 내 색깔을 찾아보려 해. 물론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런 ‘징병 상태’에선 내 색깔을 거의 드러낼 수 없었지. 타고난 아나키스트가 볼셰비키 사수대 노릇을 한 셈이랄까.” 관련하여 생각도 정리할 겸 몇 차례 단상을 적어본다.)

 
반이명박 운동이 한창일 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반이명박 운동을 주도하는 분들은 하나의 가설을 갖는 듯합니다. 이명박이 마치 다스 베이더처럼 ‘우리 세계의 외부에서 침입하여 순수하고 건강한 인민들을 괴롭히는 악한’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명박은 바로 그 인민들에 의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습니다. 이명박이 악한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이명박은 오늘 한국인들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에 ‘우리 안의 이명박’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몇 차례 글을 쓰기도 했다. 글들은 적지 않은 반발과 불편, 그리고 얼마간의 공감을 얻었던 것 같다. 그 들들의 논지에 대해선 여전히 별 변화가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나 역시 반이명박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과 결국 같은 모양의 가설을 가졌던 것 같다. 이른바 진보적 경향의 시민들이 자유 시장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제쳐두고 정치적 자유의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은 음흉한 자유주의 세력이 그들을 미혹했기 때문이라는 가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다. 혹은 절반만 사실이다. 이명박 당선이 신자유주의 공세 이후 자본주의에 한껏 포섭된 한국인들의 반영이듯, 진보적 경향의 시민들이 자유 시장의 문제를 제쳐두고 정치적 자유의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 자유 시장에 촘촘히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유 시장의 문제를 제쳐두는 건 단지 자유주의 세력이 그들을 미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를 파고드는 게 제 삶을 공격하는 일로 '여겨지기'(물론 그들 대부분은 크든 작든 자유 시장의 피해자들이며 자유 시장의 문제를 파고드는 게 실제로 제 삶을 공격하는 일은 아니다.)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최선은 ‘시급한 정치적 자유의 문제에 올인’하며 자유 시장의 문제는 ‘물론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후순위’로 제쳐두는 것이다. ‘사회구조와 사회성원은 서로 반영되는 유기적 관계’라고 말해왔는데 정작 내 싸움에선 그 절반이 생략되어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내 나름엔 언제나 ‘시급한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의 핑계가 늘 그랬듯이.

2013/10/31 07:53 2013/10/31 07:53
2013/10/21 23:18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초중고를 다 다녔다. 온 나라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기억난다. 신동우라는 만화가가 그린, ‘백억 불 수출 천불 소득’이면 다 행복하게 살게 된다고 적힌. 목표는 진즉 달성되었고 한국은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돈 벌러 오는 ‘부자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 시절보다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행복은커녕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산율,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인 죽음의 사회다. 어찌된 일일까. 여러 원인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주요한 원인은 역시 ‘자본주의적 행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봉건 사회는 사람의 사회적, 경제적 수준이 신분으로 정해졌기에 행복이 인생의 이유거나 목표일 건 없었다. ‘남보다 행복해지고 싶다’든가 ‘5년 후 지금보다 행복해야 한다’ 같은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든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균등의 사회’가 시작되면서 행복도 생겨났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실은 ‘새로운 신분사회’였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실은 신분 사회라는, 극단적 모순이 바로 자본주의에서의 삶을 비극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무한 반복되는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남과 내 행복을 비교하고(그래서 ‘내 행복’을 잃고) 미래의 행복만을 목표로(그래서 ‘오늘 행복’을 잃고) 살아간다.

자본주의이긴 하되 본연의 자유시장은 작동하지 않던, 독재 권력이 경제를 틀어쥐고 끌고나가던 시절 한국엔 그런 풍경은 만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행복’은 민주화가 되고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극단적 자유시장주의가 밀려들어오면서 본격화했다. 그 변화의 속도를 사람들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늘어만 가는 불안과 피로, 삶에 대한 허무와 회의에 어떤 이들은 삶을 포기했고, 대개는 아이를 낳길 두려워한다. 아수라장 속에 태어난 아이들은 옛 아이들처럼 밥을 굶어서가 아니라 ‘왜 살아야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자꾸만 스러져간다.

‘모든 한국인’의 현실은 아니다. 맨 꼭대기의 소수는 오히려 그 어떤 시절보다 안정적이다.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저희들끼린 박 터지게 싸우지만 그들 소수의 체제를 거스르는 법은 없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걱정은 사람들의 마음, 마음의 향방이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허무와 회의에 젖어버리면 뜯어먹을 게 없어지고, 만에 하나 허무와 회의가 방향을 틀어 ‘기왕 죽는 거 꿈틀하고 죽겠다’고 나오면 체제는 위기를 맞는다. 체제는 다양한 면역 장치들을 마련한다. 배울 만큼 배우고 사회의식도 있는 사람들에 대한 면역 장치는 체제의 특정한 흉물스러운 부분에 관심을 집중시켜 체제의 전모나 본질을 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5년 동안 한국 사회의 모든 사회적, 진보적 에너지를 '쥐잡기'에 쓸어 넣은 반이명박 운동이 그 예다.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청춘의 관리다. 그들을 순종적인 노예로 만드는가 체제의 위협으로 만드는가가 체제의 미래를 결정한다. 청춘에 대한 대표적인 면역 장치는 ‘약’이다. ‘멘토’ ‘힐링’ ‘긍정의 힘’ 따위의 이름이 붙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안과 피로, 허무와 회의를 청춘 자신에게 돌리게 하는 진통제이자 마약. ‘김난도’라는 약장수를 보자. 그는 진작부터 ‘최고의 소비 트렌드 전문가’라 불려온 사람이다. 말하자면 그는 소비자학 전문가이되 소비자의 편이 아니라 자본의 편에 선 전문가다. 이 사람이 청춘들을 모아놓고 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오늘 한국 청춘들의 현실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어왔던 일반적 현실’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제대로 놀지도 못한 채 20년을 고생해 대학을 들어가 한해 천만원이 넘게 바쳐가며 천신만고 끝에  졸업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건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다. 유럽 같으면 폭동이 일어나고도 모자랄 현실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놓은 기성세대 중의 한 사람이, 게다가 경쟁의 승자이자 체제 안의 전문가로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이 청춘들에게 해야 할 첫 번째 말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나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일까 진심어린 사과일까.

김난도를 비롯한 멘토라 불리는 사람들이 경쟁의 승자, 혹은 체제 안의 전문가라는 사실은 모든 걸 말해준다. 박경철은 단지 시골의사가 아니라 ‘최고의 주식투자 전문가’이며 혜민은 단지 승려가 아니라 ‘하버드출신 미국교수’라는 사실은 말이다. 경쟁의 승자, 혹은 체제 안의 전문가로서 그들은 청춘들에게 말한다. ‘태도를 바꾸면 얼마든 나처럼 될 수 있어.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네 안에 있는 거야.’ 그들 앞에서 청춘들을 내가 게을렀다고, 내가 긍정적이지 않았다고, 내가 세상의 아름다운 면을 보지 않았다고 자책한다. 약장수들은 그 대가로 거액의 수입과 명성을 챙긴다. 아무리 막나가는 장사꾼의 세상이라지만 참 맹랑한 약장수들인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근래 들어 기성세대 가운데 그 맹랑한 약장수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거나 꾸짖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안해할 줄 아는 어른들, 사과할 줄 아는 어른들이 말이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3/10/21 23:18 2013/10/21 23:18
2013/10/21 23:16
웹자보_1
2013/10/21 23:16 2013/10/21 23:16
2013/10/16 17:48
우리가 진정한 어떤 것들을 놓치는 감정의 경로는 적대감이나 반감이 아니라
꺼려짐이나 찜찜함 같은 것이다.
2013/10/16 17:48 2013/10/16 17:48
2013/10/16 07:25
워낭소리에 나온 영감님이 얼마 전 돌아가셨단다.
그 즈음 쓴 쪽글을 찾아 읽는다.

"나는 궁금하다. 지난 여름 내내 내 새끼에게 미친 소를 먹일 순 없다며 두눈 부릅뜨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한우라면 없어서 못 먹는다는 사람들이, 평균 수명의 곱절을 살며 죽도록 일해야 했던 한우 이야기에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대화도 소통도 모르는 남자와 혼인하여, 그의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먹이고 논으로 밭으로 소처럼 노동하며 인생을 다 보내야 했던 여성의 한 맺힌 푸념은, 그리 보조적이고 경박하게만 배치되어도 되는 건지. 자신과 소의 늙고 병든 몸을, 꿈쩍도 못하는 순간까지 부리고 또 부리는 사람에게서, 노동의 신성함과 우정을 느낀다는 사람들의 잔혹한 노동관과 우정이." (2009.3.)
2013/10/16 07:25 2013/10/16 07:25
2013/10/15 18:58
자본주의 사회는 이른바 ‘개인’의 사회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주의가 팽배할 뿐, 정작 개인의 개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과의 비교, 남들의 기준에 의해 내 가치를 결정하는 자본주의에서 삶은 모든 사람을 한낱 벽돌로 만든다. 극소수의 고급 벽돌과 얼마간의 중급 벽돌과 대다수의 저급 벽돌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회복하는 건 벽돌에서 인간이 되는 것, 개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 취향과 내 문화와 내 교육관과 내 인생관과 내 세계관과 내 연애의 기준을 가진 비로소 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2013/10/15 18:58 2013/10/15 18:58
2013/10/15 18:42
최악의 대형교회는 대형교회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소형교회다.
2013/10/15 18:42 2013/10/15 18:42
2013/10/12 15:17
사회연대 쉼터 인드라망이 정식으로 문을 연다.
공간이 워낙 좋고 준비한 사람들의 면면도 좋고
근사한 쉼터가 될 것 같다.

2013/10/12 15:17 2013/10/12 15:17
2013/10/12 14:18
풀뿌리 운동라는 말이 많이 오염되긴 했지만 지역과 마을에서 진지하고 건강하게(단지 ‘진지하고 건강한 얼굴로’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변화와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동시에 지향하는) 살아가는 풀뿌리 운동가들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풀뿌리 운동이란 언제나 곤란한 상황(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전적으로 배제하고는 지탱하기 어렵다는 점과 그 때문에 체제 내적인 운동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점)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적어도 순정한 상황에서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호감을 느끼게 된다.
2013/10/12 14:18 2013/10/12 14:18
2013/10/12 13:01
아이들이 기획사 음악에 휩쓸려가는 풍경과
인텔리들이 자유주의 기획에 휩쓸려가는 풍경은 많이 닮았다.
하긴, 한 풍경이니.
2013/10/12 13:01 2013/10/12 13:01
2013/10/09 15:55
어제 강연 마치고 뒤풀이에서 만난 고래삼촌은 체육학 공부를 위해 유학중이고 동행한 그의 여자 친구 역시 체육교사(국가대표 수영선수 출신이라 했다)인 ‘체육 커플’이었다.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내가 운동이나 격투기에 관심이 많은 걸로 아는데 구기는 무시하는 것 같다, 혹시 반동적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웃으며 말했다. “사회주의자 중에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구기를 좋아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취향의 결정은 아니었다. 나는 여느 아이들이 공을 갖고 놀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가 많이 아파서 늘 집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공놀이는커녕 구슬치기 딱지치기 한번 못하고 지내야 했다. 고백하자면 내가 ‘아이들이 제대로 놀아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는 데는 그런 내 ‘임상’이 담겨있다. 아이가 어릴 적 제대로 놀지 못하면 어떤 문제가 생긴다는 걸 나 스스로 잘 아는 것이다. 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그중 매우 사소한 일부일 뿐이다.” 그가 다시 물었다.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아이들에게 체육을 시키는 게 그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체육이 국가와 자본에게만 주로 사용되고 이용되어 오다보니 괜스레 우파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살피는 노력은 좌파나 이상주의자에게 오히려 더 적절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놀아야 하는데 단지 놀 시간을 준다고 해서 놀 수도 없는 상황이다. 놀이가 없기 때문이다. 전통 놀이를 이야기하지만 지금 아이들의 정서나 그들의 몸이 처한 환경으로 볼 때 일상에서 지속하긴 어렵다. 지금 아이들에게 좀 더 맞는 놀이를 고민하고 개발해야 한다. 체육과 체육학적 전문성이 매우 유익할 것 같다.”
2013/10/09 15:55 2013/10/09 15:55
2013/10/08 11:28


130911.상상력-강좌.웹자보
2013/10/08 11:28 2013/10/08 11:28
2013/10/04 16:52
‘4대강의 반격’을 다시 보다가
이 대사에서 가슴이 뭉클했다.

“불이익 감수하겠습니다.
고3 딸과 고1 아들만 아빠를 믿어주면 됩니다.”
2013/10/04 16:52 2013/10/04 16:52
2013/10/03 14:32
현실을 낙관적으로 보면 낙관주의고 비관적으로 보면 비관주의일까. 낙관주의는 비관적인 현실을 비관적으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비관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그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려 하며 스스로 희망의 주체가 되려는 태도가 낙관주의다. 비관적인 현실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것처럼 극단적인 비관주의는 없다.
2013/10/03 14:32 2013/10/03 14:32
2013/10/02 14:48
내 모든 글에서 120개의 글을 뽑아선 그와 비슷한 내용의 대체 혹은 함께 실을 만한 글을 글을 그 아래에 달고 다시 그것들을 주제와 유형별로 묶어놓은  변정수의 수정 원고를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놓고선 "일로 한 게 아니라 재미있어서 했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챕터 표제 비슷하게 쓰면 좋겠다고 표시된 것들.


감촉에 익숙해지면 향기를 잊기 쉽다. (2006.11.)

내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내 정치가 아니다. (2011.1.)

진정 종교적인 건 더 이상 종교적일 필요가 없다. (2009.4.)

세상의 오른쪽에 보수 부모들이 있고 왼쪽에 진보 부모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 가난한 부모들이 있다. (2011.4.)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2004.4.)
2013/10/02 14:48 2013/10/02 14:48
2013/10/02 13:47
장필순 신보가 나온 걸 몰랐다니.ㅎ
2013/10/02 13:47 2013/10/02 13:47
2013/10/01 11:08
‘아이가 행복한 세상’을 내건 어린이 잡지가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는 보기 어렵다는 모순은 창간 이래 고래가그랬어(이하 고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극심한 사회적 양극화 속에서 아이들은 학과 성적은 물론 문화적 환경에서도 해가 다르게 큰 격차를 보여 왔다. 2005년 어느 날 함께 고민을 나누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고래동무’라는 후원단체를 만들었다. “세상의 흐름을 당장 바꿀 순 없지만 고래만은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가보자. 부잣집 아이 중에 고래 못 보는 아이는 있어도 가난한 집 아이 중에 고래 못 보는 아이는 없게 하자.” 고래이모, 고래삼촌이라 불리는 후원자들은 2800여 곳의 공부방과 보육원 등에 고래를 보내고 있다. 한 곳 평균 30명이니 8만여 명의 아이들이 고래동무를 통해 고래를 받아보는 셈이다.

그런데 초기엔 고래이모나 고래삼촌이 항의를 해오는 일이 잦았다. 통장에서 후원금은 꼬박꼬박 빠져나가는데 후원받는 아이들에게서 아무런 피드백도, 하다못해 엽서 한 장 없다는 것이다. 항의는 다른 후원에서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었다. 한국의 어린이 관련 자선단체들은 후원받는 아이들의 적극적인 피드백이 일반적이다. 한 유명 여행 작가가 한참 홍보에 나섰던 자선단체는 직접 결연 방식이 아닌데도 아이에게 엽서를 쓰게 해서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얼마나 불쌍한 아이로 보이게 하는가, 아이가 얼마나 감동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엽서를 쓰게 하는가는 단체의 실적을 가르는 일로 여겨진다. 전엔 자선 단체 홍보물에 등장하는 아이 사진이 ‘아사 직전의 불쌍한 아이’가 대세였지만 근래 들어선 ‘맑고 큰 눈을 가진 불쌍한 아이’가 대세라던가.

사람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인 만큼이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일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도움을 주는 사람과 다름없는 자존감과 존엄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감을 해치거나 씻기 어려운 상처를 줄 수 있다. 형제 사이든 친구 사이든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받았는데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움을 준 사람은 상대가 배은망덕하다고 여기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 과정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런데 자선 단체를 통한 후원자와 아이는 왜 그리 미소와 감동만 가득한 걸까. 왜 아이는 사진이 찍히고 엽서를 쓰면서도 전혀 자존심 상해하지도 상처받지도 않는 걸까. 외양과는 달리 인간적인 결합도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자존심 상할 일도 상처를 줄 일도 없을 만큼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굶는 아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먹을 것까지 이악스럽게 차지한 소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가 적절히 분배되고도 그리 많은 아이를 굶겨 죽일 수밖에 없는 나라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꼴을 갖춘 어린이 잡지와 책을 공부방이나 도서관 등 아이들이 모이는 공공시설에 더도 말고 한권씩 비치하는 건 한국에서 당장에라도 실현 가능한 일이다. 필요한 건 단지 제정신을 가진 정부와 정책뿐이다. (비록 우린 단 한 번도 그런 정부를 가져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제대로 교육받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는 건 아이가 가진 당연한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뿐인데 감동할 이유도 감사의 엽서를 쓸 이유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 권리를 나라에서 마련하는가, 나라가 신통치 않아서 후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마련하는가는 매우 다른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어른들끼리의 일일 뿐 아이들이 부담감을 갖거나 책임질 이유는 없다. 초기에 피드백과 관련해 항의를 해오기도 하던 고래이모, 삼촌들도 소통과 토론을 통해 이젠 그런 생각에 다들 공감하고 있다.

자선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냉소해선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 역시 몇 곳의 자선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지만, 요즘 같은 경제 상황에서 달마다 꼬박꼬박 제 벌이를 헐어 내는 일이 어디 쉽기만 한가. 그러나 자선은 그 자체로 완성된 해결책이 아니다. 자선은 불공정한 사회구조와 제정신이 아닌 문화정책을 바로 세우는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하는 동안 고통 받는 아이들을 위한 긴급한 임시방편이다. 자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름답지만 자선의 구조는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자선의 구조가 아름답게만 묘사될수록 그 자체로 완성된 해결책이라 여겨질수록 아이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아 가는 불공정한 구조와 정책은 은폐되며 영속화한다.

자선의 목적은 ‘자선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불쌍한 아이’를 돕는 이유는 불쌍한 아이를 돕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쌍한 아이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쌍한 아이’는 이미 그른 말이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우리가 미안해해야 할 아이가 있을 뿐.(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3/10/01 11:08 2013/10/01 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