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2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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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산기슭 유나방송에서 열린 임의진 신보발매 공연. 연주자와 공연장의 상관성은 참 중요하다. 그게 잘 맞으면 연주는 물론, 그다지 재미없는 멘트마저 ‘빵빵 터지는’ 일치감이 형성된다. 그런 공연장이었다(라고 말하려니 지난 고래밤이 생각난다. 밴드 공연하기엔 그럭저럭 괜찮지만 이야기 콘서트 형식의 공연을 하기엔 매우 부적절한 공연장이었다). 기타와 우크렐레, 멜로디언은 마이크를 썼지만 나는 마이크를 쓰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까혼에 마이크를 달면 음향 쪽과 소리를 튜닝해야 하는데 어딜 가든 사람들 번거롭게 만드는 걸 꺼려하는 성격 탓에 늘 만족스럽지 않은 채 하고 만다. 리허설 때는 소리가 좀 울렸는데 객석이 차니 적당한 소리가 났다. 옷을 입은 사람만큼 자연스러운 흡음재도 없다. 주인공인 임의진은 물론 게스트와 연주자 모두 편안한 공연이었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진행을 맡은 스님의 ‘내빈 소개’. 세상에서 이미 충분히 대우받는 사람들을 수행자가 다시한번 추켜세우는 건 애석한 일이다. 수행은 세상의 흐트러진 조화를 회복하는 일이지 흐트러진 세상을 좇는 일은 아니다. (왼쪽부터 곽우영, 임의진, 나, 인디언수니. 김두수 형은 따로 무대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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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2 17:02

(오늘 저녁 진행하는 고래정치학교 3강 강사인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강의 개요. 한국에서 선거의 주요한 기능은 대다수 인민들로하여금 '그들의 정치'를 '우리의 정치'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번 선거는 MB라는 전무후무한 악한 캐릭터에 야권의 지리멸렬로 판세가 더욱 아슬아슬해지면서 한국적 선거 본연의 기능을 더해가는 중이다. 이갑용의 이야기는 그런 혼란 속에서 현명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원제는 '민주노총을 살리고 싶다'.)


2009년 연말, 노동운동 얘기를 담아 쓴 <길은 복잡하지 않다>를 펴낸 후 주위 반응이 재미있었다. 현대중공업 동료들은 그 시절 얘기를 읽으니 새삼스레 옛 생각이 나고 우리 얘기가 기록돼 나오니 기쁘다고 했다. 책의 곳곳에서 실명 비판을 한 민주노총이나 울산의 우파 조직에 대한 글을 두고는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혹시 소송이 들어오지는 않았느냐고 염려해주는 이도 꽤 많았다. 이 정도로 신랄하게 실명을 거론한 글을 읽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염려들을 감수하면서 실명 비판을 고수한 건 주례사 비평이나 공자님 말씀으로는 민주노총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절실함 때문이었다.

출판기념 행사에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출신 전직 청와대 비서관이 찾아왔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정권에 대해 임기 내내 비판적이었고,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 또한 진짜 진보와 민주주의를 위해 지난 두 정권의 계급적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고 쓴 터라 뜻밖이었다. 그는 내게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잘못했다. 비정규직 문제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해보려 애썼지만 결국은 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권력의 운영에 참여했던 사람이 직접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이 잘못되었고 우리가 잘못했다라고 말하는 걸 나는 처음 들었다.
물론 대중을 상대로 한 공개 발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한 말이지만, 나는 이런 솔직한 시인과 사과가 노동자에게 직접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더 많이, 더 공개적으로 사죄해야 한다.
그들은 두 대통령의 죽음을 접하고 서울 시청광장과 빈소를 찾아 눈물을 흘렸던 노동자의 마음을 과연 알고 있을까? 가해자가 한 번만 미안하다고 말해준다면 진심으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피해자의 심정, 노동자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눈물을 무조건적 애정으로 착각한 그들은 또다시 오판을 하고 있다. 지금 반이명박 연대, 반한나라당 연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난 10년 정권의 주역들은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

잘나갈 땐 남남이더니 권력을 빼앗기고 나니 ‘우리’ 탓을 한다. 언제 우리가 그들과 ‘우리’였던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그렇게 반대한 비정규직법을 날치기한 정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고, 평택 대추리의 평화로운 들녘을 미군에 내주고, 국가보안법을 살려두고, 한나라당과 우리가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연정을 제안했던 정권. 비정규직 1천만 시대를 열어젖힌 정권. 진보·개혁 세력의 반대 따위 안중에도 없던 정권이 이제 빼앗긴 권력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라고 오히려 협박을 한다.
  
이들이 이렇게 오만할 수 있는 건 과연 무엇 때문일까? 그건 민주노총과 진보 정당 안에 자기의 뜻에 충실하게 앞장서주는 ‘조직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으로 협박하면 언제든 한편이 되어줄 ‘유사 진보’들. 나는 ‘묻지마’ 연대에 앞장서고, 노동자를 죽였건 어쨌건 한나라당만 아니면 된다고 또다시 혹세무민하는 우리 안의 ‘박쥐’들이 있는 한, 이들의 오만함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노동운동 안의 박쥐들과 참 많이 싸워야 했다.
이들은 끝없이 정부를 사랑했고 투쟁을 방해했다. 노동자로서 사랑할 만한 정권이었다면 문제되지 않았겠지만, 지난 10년 민주정부는 노동자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의 자리와 권력을 이용해 노동자 투쟁을 막았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우리가 뽑았으니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 그래도 다른 정권보다 낫다, 우리와 말이 통한다, 어차피 못 막을 일이라면 그래도 이 정권이 낫다’였다. 그들이 끊임없이 내부에서 흔들기를 하는 바람에 민주노총은 싸움의 근육을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좋은 자리를 찾아 떠났다.

“우리를 공격하고 김대중 정권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정권의 품으로 날아갔다. 언론연맹 위원장은 몇 달 후 자신의 사업장인 KBS 부사장으로, 민주노총의 부위원장과 사무총장을 했던 사람은 민주당의 국회의원으로, 민주금융연맹 위원장은 산재의료원 감사와 이사장으로, 화학연맹 위원장은 노동부 4급 서기관으로 화려한 변신들을 한다. 이들이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에 협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자리들은 없었을 것이다. 민주노총보다 정권을 더 사랑했던, 아니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해서 노동자들의 고통을 팔아 자신의 안락을 채운 이들의 변신은 그래서 무죄가 아닌 유죄다. 문제는 지금도 노동운동 안에는 이런 변신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길은 복잡하지 않다에서 발췌)

이들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총의 조직 권력이 중앙 집중의 간선제에, 산별연맹 중심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구도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 민주노총은 동맥경화에 걸려 있다. 지난 2010년 1월 28일 열린 임원 선거에서도 확인했듯, 한 정파 소속의 후보들이 거의 싹쓸이하는 선거, 입으로만 정파의 해악을 욕하면서 결국 그 구도를 바꾸려는 시도는 구조적으로 막힌 조직, 그게 민주노총의 현주소이다.

20년 넘게 노동운동을 하면서 처음 10년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후 10년 이른바 민주정부를 겪으면서 ‘진보의 기준’은 바로 ‘노동자를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운동이 탄압받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는 없으며 그건 진정한 민주주의일 수도 없다.

우리가 어떤 정권에 대해 민주적이냐 아니냐를 가늠할 때 그 기준으로 그 정권이 과거 어떤 일을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현재 그 정권이 어느 계급의 이익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국민회의 또는 민주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당임을 자처했지만, 그들의 정책이란 아무리 급진적으로 해석해도 중도우파,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때론 시장경제조차 억압하는 독재정권과 만났을 때 이들이 일시적으로 민주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 이들은 노동자의 편일 수 없다. 지금처럼 경찰력을 동원한 아류 독재정권이 집권한 상황에서 노동자가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용산 개발이 시작된 건 현 정권 때가 아니었고, 기륭이나 이랜드 투쟁은 지난 10년 동안에 일어난 투쟁이란 것을. 개발·건설·재벌 자본은 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국민회의·민주당·한나라당 역대 어느 정권과도 변함없이 동거를 했다. 다만 편안한 동거였느냐, 조금 불편한 동거였느냐 하는 작은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길은 복잡하지 않다에서 발췌)

역설적으로 노동자에게 다시 없는 악법인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는 김대중 정권 때 도입되었고, ‘비정규직법’은 노무현 정권 때 도입되었다. 지금 이슈가 되고있는 제주의 해군기지와 한미 FTA의 체결에 권력을 집중한 민주당 정권이었다. 누가 뭐래도 두 정권 모두 반노동자 정권이었지만, 우리의 잘못 또한 그들 못지않게 크다. 1998년 정리해고법 도입 때 민주노총의 상층 관료들은 그 법안의 도입에 합의를 해주었고, 심지어 그들 가운데 일부는 민주노총과 진보 정당에서 아직도 잘 살고 있다. 2006년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될 때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무기력했고, 비정규직의 희망이 되어주지 못했다. 정권 탓도 있지만 두 법안으로 고통받는 노동자에게 사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염치없는 조직인 것이다.

잃어버린 염치를 다시 찾아야 하는 지금, 2010년 지방 선거를 치르며 모든 민주·진보 진영의 대단결을 주장하는 소리를 고장난 녹음기처럼 말했었다. 두 전직 대통령이 남기고 간 민주주의와 진보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대중 배우기나 노무현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말하는 강좌가 연이어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진보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두 대통령을 되새기기도 한다. 그리고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노동자들이 만든 민주노동당은 없어지고 국참당(열린 우리당)과 당을 합치더니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결정하고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공갈을 친다.
그러나 나는 성찰과 반성을 통한 진보로 나아가지 못하고, 칭송과 숭배를 통한 세 모으기와 당선만을 목적으로 뭉치는 저들의 시도들이 불편하기만 하다.

벽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라던 대통령은 벽에 대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도록 노동자를 가두었다. 노동자의 연이은 분신을 두고 “죽음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한 대통령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역대 최대 노동자 구속 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신했던 두 정부에 따라 배울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민주주의인가? 너무나 가혹한 질문인가? 불편한가? 더 그래야 한다. 이 물음에 답하지 않고, 이것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우리가 되돌려야 할 과거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이명박은 오히려 쉽다. 이명박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쁜 적이니까. 그러나 10년 동안 우리는 담벼락에 소리 지를 자유와 근육을 잃었다. 외부의 폭력 탓도 있지만, 내부 검열과 비난으로 위축되고 무기력해지면서 체념이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더 무서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힘든 싸움인지는 잘 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실수를 하고 실패를 경험했다. 우리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이 내부의 적들에 대한 평가와 반성, 처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게 바로 정파의 득세였다. 처벌은커녕 권력을 잡은 정파들은 있는 사건마저 쉬쉬하며 덮어버렸다.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 그들이 보호하려 한 조직은 민주노총이 아닌 자신들의 정파 조직이었다. 민주노총의 재정위원회 비리, 수석부위원장 비리, 조합원 성폭력, 반조직 행위 등 수많은 대형 사고들이 정파 관료들의 담합으로 묻혀버렸다. 이들의 계급의식 부족, 출세 지향, 비리, 투쟁 회피 등은 여전히 민주노총 안에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으며 민주노총의 위기 또한 계속되고 있다. 그 정파 관료들의 실체와 이들이 문제를 덮어온 과정에 대해 나는 솔직하게 기록했고 말해왔다. 그게 민주노총을 살리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겐 민주노총 살리기가 절실했다.

민주노총은 누가 뭐라 해도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하고 소중한 조직이다. 민주노총의 위기는 한국 진보운동의 위기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을 살리는 일은 민주노총만의 문제가 아니다. 욕이라도 좋으니 민주노총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고 지켜봐주었으면 한다. 미움보다 더 무서운 건 무관심이듯, 민주노총 죽이기보다 더 두려운 건 이명박 시대, 아무런 존재감도 없는 민주노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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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단체의 회의나 토론회에서 혹은 집회에서 종종 그를 만나곤 한다. 얼마간 뜸하다 만난 그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싶을 만치 말도 행동도 차분했다. 물어보니 지금이 제 모습이고 전에 에너지가 넘치던 모습이 ‘조증’ 상태였단다. 그는 해고 후 스물한명의 동료 노동자들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떠난 동료들이 겪었던 고통을 역시 겪으며 제 전투를 수행 중이다. 그 죽음들을 만들어낸 거대한 구조를 밝히는 노력과 그 거대한 구조 앞에 무방비 상태인 노동자들의 일상과 문화를 일구어내는 숙제는 그 전투의 중요한 일부다.
 

김규항=동료 노동자들을 떠나보내면서 그 죽음에 대한 보도자료를 쓰는 일을 해왔는데요.
 
이창근=힘든 일이었어요. 특히 “또 한 번의 죽음”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게 힘들었어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세상의 대답은 없고 죽음은 자꾸 늘어가고. 나중엔 이걸 더 많이 알리기 위해 이렇게 써야겠다 저렇게 써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제 감정에 충실하게 되더군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눈물이 납니다”라고 썼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김규항=단지 그 상황에 연대하는 활동가가 아니라 그 상황의 당사자라는 점이 고통을 배가시켰을 것 같습니다.

이창근=죽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면 조금 나았을까요. 이상하게도 다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나중에 겁이 나더라고요. 근조 플래카드나 검정으로 도배된 풍경들, 이런 게 세상에 상황을 알릴 수는 있겠지만 그걸 보는 해고자나 희망퇴직자에겐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만장기 들고 이런 게 점점 싫어지더군요.
 
김규항=쌍용차에서 유독 죽음이 많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창근=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가 보도자료를 쓸 때 자살 방법이나 상황을 너무 자세히 묘사했나 하는 생각까지 해봤죠. 그런데 쌍용차는 누적된 게 있어요. 상하이로 넘어가고 분명히 기술 유출하고 먹튀했는데 법적으로 해도 안되고 파업해도 다 작살나고 어용노조가 다 덮고 넘어가고 하면서 쌓이고 쌓인 울화통이 있는 거죠.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죽은 분들은 파업 때 마지막까지 싸웠던 사람들이 아닌 경우가 많아요.

김규항=싸운다는 건 이기고 지는 것과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우뚝 세우는 체험이죠. 그 체험이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하구요. 죽은 분들도 많지만 해고 노동자들이 가족 관계나 삶 전반에 고통을 겪는 걸 많이 봅니다. 그걸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라고만 보긴 어려운데요.

이창근=경제적 어려움을 다들 겪지만 그 문제만은 아닙니다. 해고되고 나니까 가족 관계, 교육 문제를 비롯해서 모든 게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민주노총에서 금속노조에서 교육도 참 많이 했는데 대체 살아가는 것과 관련해서 무슨 교육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김규항=아이가 있지요?

이창근=일곱 살짜리 아들이 있습니다. 파업하고 감옥 갔다가 나왔는데 어느 날 경찰 놀이를 한다고 해요.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 녀석이 시위 진압하는 전경들처럼 낭심 가리개를 만들어서 차고 있더라구요. 의자나 물건들로 바리케이드를 쌓아놓고. 화를 잘 안내던 아이인데 자꾸만 화를 내고. 안되겠다 싶어서 놀이 치료하는 곳에 데려갔는데 한 달 동안 계속 고함만 지르더군요. 토해내는 거죠. 아찔했어요.

김규항=무심코 넘어갔다면 결국 나중에 더 병리적으로 드러났을 테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해고되고 개인적으로 달라진 건 뭔가요.
 
이창근=구속되었을 때 참 많은 사람들이 구속자들을 지지하고 후원하는구나, 세상이 이렇기도 하구나 새삼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싸우는 대상의 너머가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해고 노동자들이 또 집회도 많고 해서 많이 걷거든요. 그러면서 전보다 많은 생각도 하게 되고요. 이명박 정권을 넘어선 체제의 구조에 대한 고민도 늘고요. 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나와의 차이 같은 게 공장에 있을 땐 또렷했는데 나와서 같이 투쟁하다보니 많이 극복된 것 같아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완전히 없어지진 않는 것 같아요.

김규항=정규와 비정규. 자본이 만들어놓은 골인데 정리해고되고 싸우는 노동자조차 그 골이 사라지지 않으니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뒤집어보면 정리해고라는 공식적인 삶의 파괴 이전에 이미 노동자 일상과 문화가 파괴된 상태라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쳇바퀴 돌 듯 일상을 보낼 땐 잘 모르지만 그 일상에서 떨어져나가는 순간 알게 되는.
 
이창근=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생활이라는 게 그런 대로 안정적이잖아요. 그래서 멀쩡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더라는 거죠. 어떻게 웰빙을 즐길 건지가 아니라 내가 일하며 어떻게 살 건지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할 건지 이런 게 전혀 없더라는 거죠. 교육 문제만 해도 만약 우리가 공동체적인 활동을 하면서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는 교육을 고민하고 시도해왔다면 똑같이 맞아도 데미지가 달랐을 거예요.

김규항=노동운동이 뭐냐, 노동해방이 자본가처럼 잘 먹고 잘사는 거냐라는 질문이 사라졌어요. 우리가 구조적 가난과 싸우지만, 더 많이 소비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상품이 되어 경쟁하지 않아도 충만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면 자본가처럼 살아야 한다는 목표밖엔 없게 되죠. 자본은 그런 욕망을 이용해 정규직을 체제내화하고 비정규를 배제하면서 손쉽게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고요. 연이은 죽음이 사회적으로 알려질 만큼 알려졌지만 또렷한 해결의 실마리는 안보입니다.

이창근=쌍용차 문제가 연이은 죽음의 문제로 고착화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쌍용차는 부침의 역사거든요. 여기 팔리고 저기 팔리고 그러면서 2000년 초반 1만명이 넘던 노동자들이 이젠 4000명이니 잘려나간 6000명이 그 동안 쌍용차를 유지시킨 근거였던 셈이죠. 그런 과정에서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이 오히려 주목받지 못했다는 후회가 있습니다.
 
김규항=파업 투쟁과 살인적인 진압이 이 문제의 시작은 아닌데요.

이창근=민주당이 이 문제의 책임당사자죠. 노무현 정권 때 쌍용차 매각을 진행했죠. 당시에도 먹튀 논란이 많았는데 강행했던 거잖아요. 이런 사실에 대한 민주당 쪽의 반성이나 기조 변화 같은 게 없어요. 정동영 의원이 현장에 와서 계속 뭘 하더라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그런 이유가 있죠. 당시 산자부 장관이라든지 당사자들이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매각 당시 세 개 은행에서 매각대금이 나왔는데 그게 진짜인지부터 시작해서 따지고 밝혀야 할 게 참 많거든요. 그런데 이걸 이명박 정권의 폭력진압에서 시작한 문제, 죽음의 문제, 안타깝고 불쌍한 문제로만 몰아가는 건 해결을 요원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규항=저도 이런 소리가 지겨울 정도입니다만, 쌍용차뿐 아니라 근래 주요한 사회 문제들이 하나같이 노무현 정권이 벌이고 이명박 정권이 마무리하는 일들이죠. 며칠 전 한명숙 대표가 제주 구럼비에 가선 이명박 정권의 책임을 물으며 비난하더군요.

이창근=평택 대추리 때 마지막 날 저도 있었어요. 진압 작전 이름이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던가요. 그 때 군대가 투입되어서 우리를 밤새 두들겨 패서 끌고 갔죠. 그걸 강행한 국무총리가 한명숙씨였어요.

김규항=그런 그들이 멀쩡한 얼굴로 이명박 정권의 일인 양 욕할 수 있는 건 그들에게 또 속아주고 심지어 희망을 걸어주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이창근=민주당이 정말 해결의지가 있으면 몇몇 의원들이 다닐 문제가 아니라 당 차원으로 끌고가서 국정조사단을 만들었겠죠.

김규항=민주당이 사실 철저하게 반노동자적인 당이다보니 예외가 되는 의원, 현장을 자주 찾고 함께하는 의원은 상대적으로 미화가 되는데요. 좀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정치인은 개인적 선행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죠. 정치인이 할 일은 개인 활동을 통해 다른 정치인이다, 좋은 정치인이다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당에서 정치적 의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싸워야죠. 그러면 여론도 가만있진 않을 것이구요.
 
이창근=아쉽게도 거기까진 못가는 것 같아요. 쇼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당내에서 적극적인 전투를 했으면 좋겠어요.
 
김규항=쇼인가 아닌가, 사람의 내심은 알 수 없고 굳이 따질 필요도 없죠. 이건 연애가 아니라 정치니까. 정치인에게 정치인으로서 할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건 너무나 타당한 것입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의 상태가 안 좋아지는 시점에 맞물렸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창근=파업 당시에도 많이 느꼈는데요. 말은 총자본과 총노동의 싸움이라고 했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는 걸 봐야 했죠. 김진숙씨 싸움과 희망버스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밑에서 밀고 올라왔으면 민주노총이 더 조직하고 밀어붙여서 한진 문제를 해결하고 정리해고 문제를 사회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거든요. 민주노총이 제 구실을 못하니까 결국 정치권에서 적당히 마무리해버렸죠.

김규항=우리 사회는 좌파 정치랄까 노동자 서민들의 삶을 대변하는 정치가 의회정치에 없다시피하다보니 의회 밖의 정치, 운동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해왔어요. 민주노총은 그 중요한 결실이고 담지자이기도 하죠. 이석행 전 위원장이 민주당 비례대표로 나선 일로 시끄럽습니다.
 
이창근=예사로 볼 문제가 아니죠. 민주노총 지도부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자기고백을 한 것 아닌가, 포기를 공식화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일에 대한 민주노총 논평이라는 게 딱 세 줄인가 그랬어요. 위원장 사퇴 이후 어떠한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번 일 역시 개인적인 정치적 판단일 뿐 민주노총과는 무관하다, 끝. 어이없는 일이죠.
 
김규항=거액의 손배소가 걸려있잖아요. 쌍용차 사측에서 노조 간부와 대의원 140명을 상대로 50억원, 경찰이 파업 참가자 103명을 상대로 20억원, 메리츠화재에서 141명에게 110억원.

이창근=저도 그렇고 다들 출소하고 나서 한동안 그 문제에 진을 뺐어요. 집도 다 가압류 들어오고 이걸 어떡해야 하나 걱정들이 많았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이건 못 갚는 거예요. 방법이 없어요. 에이, 잡아가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그러니까 마음은 편해졌어요. 마음이 편해졌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우리로선 미루어놓은 큰 산이죠.

김규항=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손배소는 근래 어느 사업장에서나 애용되는 자본의 무기인데, 우리가 지키는 법이라는 게 얼마나 자본의 편인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기도 하죠. 대화하다 보니 해고 후 노동자 문화 쪽에 관심이 많아진 것 같군요.
 
이창근=노동자들, 특히 대공장에서 컨베이어 타는 사람들의 문화라는 게 정말 앙상해요. 일하고 마치면 술 먹고 노래방 가고. 우리 이야기는 언론에서 안 다루어준다고 투덜대면서 신문도 잘 안 보고 책도 안 보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상태론 위기가 닥치면 큰 일일 뿐 아니라 늘 해오던 싸움도 밀릴 수밖에 없어요.
 
김규항=80년대 활발했던 노동자문화 운동은 노동자들의 일상이 소비적 시민문화에 포섭되면서 지속적으로 쇠락하거나 협소한 시위문화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죠. 근래 보면 새로운 흐름이 생겨나고 있는 게 감지되기도 해요. 그러면서 옛 문화를 무작정 깔보는 우려스러운 경향도 종종 보이구요.
 
이창근=희망버스 때 다들 새로운 시위문화의 발랄함 유쾌함을 얘기하는데 기존의 시위문화에 대해선 아예 경멸을 하더라구요.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생각하는 희망버스는 실사구시였어요. 해왔던 것을 조금씩 바꾸고 보태고 하면서 새로운 걸 만드는 거였거든요. 시위문화라는 게 무거울 땐 무거워야 하고 발랄할 땐 발랄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김규항=그런 진통들이 건강한 노동자 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해요. 국제적으로도 이른바 ‘신좌파’ 문화라는 게 구좌파의 문제들에 대한 부정에 집착하다보니 엉뚱하게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부응해버린 경향에 대한 비판들이 근래 있습니다. 발랄함이 무거움을 경멸하는 경향을 비판했지만, 여러 매체에 기고도 하고 늘 아이패드를 끼고 다니는 ‘신식 노동자’인데요.

이창근=시위 아이디어랄 것까진 없지만,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긴 해요. 파란 잔디 위에서 5000명이 모여서 조용히 책을 읽는 거예요. 주제가 만일 삼성 비판이라면 삼성 문제와 관련한 모든 책과 자료들을 다 모아서 앰프나 확성기는 일절 쓰지 않고 조용히 그걸 읽는 거죠. 저놈들이 정말 아파하는 일을 함께 해보는 거죠.
 
김규항=수천 명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여 밤새 레이브파티를 하면서 한국 어른들을 불편하게 하는 광경을 생각한 적이 있는데 다른 듯하지만 비슷한 이야기군요. 발랄하게 그리고 무겁게, 조용하게 그리고 시끄럽게 함께 걸어갑시다.
 

2012/03/19 14:02 2012/03/19 14:02
2012/03/19 14:02

‘노동과 문화는 하나다’ ‘현장에서 배운다’는 말은 급진적 경향을 가진 문화활동가라면 누구나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걸 실제로 체화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고 체화한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것은 한 활동가의 문제를 넘어 문화이론가와 예술가 사이의 문제, 문화운동과 주류노동운동 사이의 문제와 중첩되어 있다. 신유아 역시 그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문제를 해결한 한 사례가 되어가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일단 현장으로 와보라.’


김규항 = 문화활동가로서 처음 맡았던 일이 뭐였나.
 
신유아 = 2005년에 문화연대에 들어가 선배 활동가들을 따라다니며 물건 나르고 음향 설치 돕고 보조 노릇을 하며 배웠다. 평택 대추리 투쟁 때 서울에서 매일 촛불문화제를 진행했는데 그게 내가 맡은 첫 번째 일이었다. 뮤지션들과 미술가들과 사회원로들을 섭외하고 조직하고 기획하고.
 
김규항 = 코스콤 투쟁 때 농성장을 바꾸는 작업을 했었는데.
 
신유아 =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 요청을 해와서 여의도 농성장에 갔더니 사람이 혐오감을 가질 만한 분위기였다. 성황당 같은 느낌에 노숙인들 느낌에. 여의도 한복판이 얼마나 ‘삐까번쩍한가’. 농성이란 게 사람들에게 내용을 알리고 소통하는 것이기도 한데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농성장을 전시장으로 만들자, 사람들이 편하게 와서 그 내용을 볼 수 있도록 해보자 해서 미술가들을 섭외했다. 작가들만 작업한 게 아니라 조합원들이 함께했다. 앉아서 선전물만 나누어주던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기 공간을 만들어가니 너무 즐거워들 했다. 반응도 좋았다. 지나쳐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유심히 보고가기 시작했다. 그 경험을 통해 문화활동가로서 나름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김규항 = 공공미술이라는 게 큰 빌딩 앞에 세워둔 수천 수억짜리 조형물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소통하는 매개가 되는 것이라면 성공적인 공공미술 작업이었다. 용산 참사현장에선 1년을 꼬박 있었다.
 
신유아 = 아침 일찍 텔레비전을 켰는데 화면에 자막이 나왔다. 너무나 놀랐고 일단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날부터 출근을 현장으로 했다. 문화예술인들과 모여서 기자회견을 열고 뭘 할 것인가를 궁리했는데 공연 같은 건 적어도 몇 달 동안은 현장 정서상 하기가 어려웠다. 억울한 현장, 시커먼 현장, 눈물의 현장이었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 일을 사회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내가 가진 모든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는 건 물론 송경동 시인이나 이윤엽 작가의 네트워크까지 동원했다. 활동에서 의지도 열정도 좋지만 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하구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구나 깨닫게 되었다. 네트워크는 활동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또다른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그 자체가 활동이 된다.

김규항 = 긴 시간 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활발하게 결합했다. 비결이 있었는가.
 
신유아 = 전에는 대개 기획을 다 해놓고 예술가들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용산은 예술가들을 힘닿는 데까지 모아서 뭘할지를 함께 고민했다. 전에는 예술가들이 반농담으로 ‘내가 도구야’ 타박도 했는데 이젠 너나없이 ‘이건 인디뮤지션 누구를 하면 좋겠다, 여긴 미술가 누가 하면 좋겠다’는 식으로 함께 하니 활력이 생겼다.

김규항 = 예술가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고 또 저마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모으니 활력이 넘칠 수밖에. ‘쓰레기 예술가, 재활용 예술가’라는 별명도 용산에서 붙은 건가.
 
신유아 = 현장에서 쓰고 난 혹은 버려진 것들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용산에선 집회 때 바닥에 깔개로 쓴 스티로폼들이 있었는데 그걸로 뭘 할까 고민하다 꽃 모양으로 파서 남일당 건물 펜스를 꾸몄다.

김규항 = 용역들이 가만 있지 않았을 텐데.

신유아 = 처음엔 와서 보고 가고 하더니 작업이 점점 커지니까 위협을 하기 시작했다. 용역들은 현장이 자기네 거라고 생각하니까 ‘왜 우리 물건에 손을 대는가’ 식으로 시비를 걸어왔다. 내 차를 펑크 내기도 하고 밤길 조심하라고 위협도 하고. 현장에 있을 땐 그나마 괜찮았지만 집에 다녀올 때는 많이 불안했다.

김규항 = 그렇게 애써 만든 작업들이 결국 사라지는 게 아깝진 않나.

신유아 = 공공의 것이 되고 예술 작품으로서 존중되었으니 소멸되어도 아깝진 않다.

김규항 = 스무살 무렵에 다니던 교회 전도사가 수련회에 드럼을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갔다가 교회에서 쫓겨날 뻔 한 적이 있다. 당시 밴드음악은 사탄의 음악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교회는 낙원상가 드럼가게의 고객이 되었다. 문화적 변화엔 진통이 있기 마련인데.
 
신유아 = 처음 활동할 무렵엔 현장에서 민중가요가 아닌 대중가요를 틀면 반감이 컸다. 그런데 만날 투쟁가요만 틀어놓으면 연대하고 싶어도 부담스러워 연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인디뮤지션들이다. 그런데 인디뮤지션들의 음악과 가사엔 투쟁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소망이 다 담겨있다. 두 문화가 서로 천천히 스며들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김규항 = 시위 현장이라는 게 늘 평화로운 건 아니니 익숙지 않은 뮤지션들에겐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신유아 =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일 때 경찰이 치고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사전에 제지하거나 마치고 치거나 하는데 광화문에서 한번은 한창 연주하는데 경찰이 무대로 난입했다. 그 밴드는 지금도 공포가 있다고 한다. 현장에 왔다가 분위기가 살벌하니 연주 5분 전에 포기하고 간 밴드도 있었다.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섭외할 때 현장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김규항 = 김진숙 농성 100일차 129일차에 예술가들이 85호 크레인 앞에서 작업을 한 건 희망버스의 교두보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유아 = 그게 희망버스의 교두보라는 생각을 하고 간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경찰 조사를 받는데 경찰이 그게 희망버스의 사전 조직작업이 아니었나 다그치는데 비로소 ‘아 그렇구나’ 생각이 들었다.

김규항 = 그때 예술가들이 신명나게 작업하고 노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신유아 = 김진숙씨가 워낙 높은 데 있으니 밑에서 뭘 해도 잘 안 보였다. 플래카드 작업을 하고 내려다보이는 데서 놀고 오자였는데 조선소여서 철 폐품들이 굉장히 많았다. 용접 설비도 다 있어서 조각하는 작가가 그걸 끌어모아 밤새 ‘85’를 만들었다. 129일차 때는 영상 작가들과 가서 크레인에다 영상 쏘고 역시 밤새 놀았다.

김규항 = 운동에서 문화적인 감성을 갖는다는 건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신유아 = 집회든 행사든 말은 누구나 참여를 환영한다고 하지만 장애인 운동하는 분들이나 소수자운동하는 분들의 연대는 불편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장애나 소수자활동가들이 연대하기 불편한 점이 있다는 건 그들의 싸움에 대한 연대도 활발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노동운동 쪽에 그런 경향이 많아서 늘 현장에서 그걸 염두에 두고 고민하는 편이다.

김규항 =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나 소수자운동 활동가들처럼 잘 싸우는 사람들이 없고 그들처럼 신념이 또렷한 사람들이 없다. 워낙 열악한 상황이다보니 성찰적이기까지 해서 참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며칠 전 콜트콜텍 대법원 판결이 나왔는데 ‘신나는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결합해왔다.

신유아 = 콜트콜텍은 알다시피 기타를 만드는 공장이다. 보통의 경우는 뮤지션들에게 연대를 요청할 때 뭐하는 공장인지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이 경우엔 다들 선뜻선뜻 연대했다. 콜트콜텍을 안 써본 뮤지션이 없었다.

김규항 = 노동자들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신유아 = 노동자들은 악기를 만들지만 공연하는 사람들을 접한 적은 없었다. 뮤지션들이 연대하고 함께 하니 그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뮤지션들도 내가 사용한 악기가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만들어졌구나 되새기며 즐거워했다.
 
김규항 = 악기 만드는 공장이니 뭔가 다를 것 같지만 자본주의라는 게 그런 정체성과 노동의 정서적 연결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체제 아닌가. 정작 기타를 만들 땐 몰랐다가 정리해고를 당하고 투쟁하면서 자신의 노동이 무얼 만들어내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니 참 역설적이다.
 
신유아 = 기타를 만들지만 기타를 칠 줄 아는 노동자가 없었다. 그런데 투쟁을 하면서 밴드도 만들고 이젠 공연을 할 정도다. 싸움이 어떻게 귀결되는가와 별개로 그들의 삶에 작은 기쁨과 힘이 된 것 같아 참 좋다.

김규항 = 늘 현장과 결합하니 지사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비장하게만 보일 수도 있는데 한편으론 어떤 예술가나 작가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작업해온 것 같다.

신유아 = ‘너무 힘들겠다’ ‘정말 고생한다’는 말을 늘 듣고 살고 또 그런 면도 없진 않지만 현장에서의 순간순간들은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었다. 잘 아는 노동운동가가 자기들 운동의 내부나 상층조직과 사업을 벌일 땐 진행이 너무 더디고, 진행하다가 폐기되는 경우도 많은데 문화적인 연대 사업을 하면 진행도 빠르고 역동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더라. 장난스럽게 젠체하며 ‘노동과 문화는 사실 하나야’라고 말해주었다.
 
김규항 = 문화 예술인들도 결국은 문화노동자 혹은 예술노동자라는 걸 운동 진영에서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업적인 예술가들, 주류사회의 유명한 예술가들의 천문학적 작품료는 당연시하면서 정작 진보적인 문화 예술인들에겐 다른 태도를 보이는 건 아쉬운 일이다.
 
신유아 =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큰 조직에서도 비용책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거나 책정 자체를 안하는 경우가 많다. 토론회 같은 걸 하면 사회자나 발제자에게 비용 책정이 되는데 공연에 참여한 사람에겐 ‘재능후원’이 강요되는 건 잘못된 일이다. 그렇다면 존중의 태도라도 가져야 하는데 공연 출연자에게 시간이 부족하다며 발언을 못하게 한다든가 하는 일도 흔하다. 사실 상업성을 지향하지 않는 문화 예술인들은 가장 어려운 상황의 노동자들보다 더 어려운, 말 그대로 굶으며 예술하는 사람들이다. 바뀌어야 한다.
 
김규항 = 희망버스 때 시위문화가 바뀌었다라는 평가들이 나왔고 여러 신선하고 의미있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가 기존의 시위문화는 무조건 낡고 폐기해야 할 것으로 비약하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신유아 = 과거의 방식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그것만 고집하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방식을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문화적이지 않다. 문화가 만나고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 과정 또한 문화가 아닐까.
 
김규항 = 이른바 ‘진보적인 문화이론’이라는 게 유럽의 68혁명에 시원을 대고 있기도 하고 또 조금 짓궂게 말하자면 68 이후 유럽의 좌파들이 현실적 변혁이 어려워진 자신들의 처지를 문화이론의 현학성이나 난해함으로 드러내는 경향도 있고 해서 68같은 경험도 없고 이론적 배경도 없는 우리 사회에선 난해한 데가 있다.

신유아 = 문화이론이 난해한 건 사실이다. 그나마 나는 제대로 학습을 하고 활동을 시작하지도 못했는데 거꾸로 현장에서 모든 걸 배웠다. 활동 속에서 그 난해한 이론들이 ‘아, 이런 이야기였나’ 되새겨지고 깨우쳐지는 경험을 종종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내가 정연한 이론을 가진 사람이기보다는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여지면 좋겠다. 그래야 원칙을 말하고 대의로 행동하는 데 불편이 없으니.

김규항 = 치밀하고 신중하게 활동을 준비하는 것과 현장의 실천성을 조화시킨다는 건 언제나 어렵다.

신유아 = 요즘 그런 고민을 한다. 깜냥에 그래도 경험이 쌓이고 이력이 붙었다고 몸을 움직이기 전에 고민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이다. 예전엔 일단 느끼면 현장으로 뛰어들고 현장에서 고민하면서 실천했다. 이젠 고민을 많이 하다 보니 실천이 더디어진다.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활동에서 시간이라는 건 따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 말이다.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 문화 예술계에서 활동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일단 현장에 와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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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14:01

1980년대와 1990년대 노동운동 쪽 전단과 인쇄물 속의 삽화와 만화를 도맡다시피 했던 만화가 이은홍은 지금 충북 제천 월악산 아래 시골 마을에서 산다. 농사를 짓지 않고 어린이 역사만화 작업을 하며 살지만 동네사람들과 아주 사이가 좋다. 인터뷰하러 간 날은 마침 ‘영화 감상회’ 날이었다. 이은홍은 한 달에 한 번 DVD를 고르고 프로젝터를 빌려서 동네사람들과 영화를 보고 논다. 그는 그의 말마따나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마을에 빌붙어” 잘살고 있다.
 

김규항 = ‘깡순이’ 캐릭터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노동운동 만화 작업을 꽤 오래 했다.
 
이은홍 =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1984년에 노동현장에 들어갔다. 거창한 노동운동을 계획한 건 아니고 공장 노동자로 살면 적어도 현실 앞에 부끄럽진 않을 것 같았다. 공장에 다니다 발을 다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서노련에서 만화 청탁이 왔다.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그것 때문에 보안사에 끌려가 당하기도 하고 ‘노동’이 붙은 온갖 곳과 작업을 했다. 2000년에 그만두었으니 15년가량 한 셈이다.
 
김규항 = 그만둔 이유는 무엇인가.
 
이은홍 = 민주화가 되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하는데 노동자 입장에선 대통령 얼굴만 바뀌었지 다른 게 없었다. 만화의 내용도 같을 수밖에 없었다. 삐라 한 장만 갖고 있어도 잡혀가던 시절엔 그걸 그리는 나도 의미가 컸는데 대공장은 얼마, 작은 노조는 얼마, 원고료나 따지고 있자니 이건 운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구나 싶었다.
 
김규항 = 운동인가 아닌가는 운동의 모양이 아니라 사회에 영향을 주는가의 문제이니 지칠 만도 했다. 이젠 아이들을 위한 역사만화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이은홍 = 1995년에 사계절출판사의 ‘역사신문’ 작업에 참여하게 되어 선사시대부터 작업을 해나가는데 역사라는 게 참 재미있는 거더라. 역사란 결국 사람들이 먹고살아온 이야기 아닌가. 그 시스템이 몇 천년 동안 소수의 지배계급과 대다수의 사람들로 나뉘어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김규항 =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역사의 정보나 지식을 아는 게 아니라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다. 아이들과는 역사에 대해 어떻게 소통하는가.
 
이은홍 = 아이들 상대로 역사 강연 같은 걸 하면 ‘너희들이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을 말해보라’고 한다. 태정태세문단세부터 시작해 연속극에서 본 인물들 하며 대략 150명이 쏟아져 나온다. 그걸 칠판에 받아 적고 아이들과 분류를 한다. 왕이 70~80명, 장군이나 관료가 30~40명, 학자와 문화예술인 몇 명. 150명 중 120~130명이 지배계급인 것이다. 그리고 남녀를 갈라보면 모조리 남자다. 아이들은 놀란다. 그러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착하게 나눠먹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평등이 중요하고 역사란 그걸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김규항 = 역사만화 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뭔가.
 
이은홍 = 돈에 대해, 화폐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데 돈이 자본이 되고 자본주의가 되는 데 이르면 쉽지가 않다. 아이들에게 자본주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큰 숙제다. 아이들에게 되도록 선을 가르치고 싶은데 자본주의는 선이 아니라 악이다. 부모들이 이미 몸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란 경쟁 속에서 개별화되어 남을 파괴하고 나도 파괴되는 체제라는 걸. 그런 걸 아이들에게 잘 설명하려면 공부도 더 해야 하는데 워낙 게으르게 사니 자꾸만 미루어진다.
 
김규항 = 지난 역사를 파악하는 건 쉽지만 현재 역사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법이다. 시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을 자기동일시하고 모든 문제를 이명박에게 돌리기 시작한 이후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은 마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은홍 = 노동자 민중 입장에서 노무현이 이명박보다 덜하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애써 외면하고 덮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다. 체제와 시스템을 보지 않고 인물만 보려 하는 건 역사의식이 아니라 팬덤현상이다. 노동자 민중이 잘 먹고 살아가는가가 역사의 핵심이고 현실의 핵심이다. 성숙한 시민이란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떻게 하면 더 고루 잘 먹고사는가를 고민하며 함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김규항 = 평범한 시민이 건강한 역사의식을 갖기엔 이 체제가 주는 불안감이 너무 크다.

이은홍 = 진보적인 지식인과 언론이라도 그런 고민을 하고 담론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거의 안 보인다. 우리 역사는 어두운 셈이다.
 
김규항 = 촛불집회 같은 걸 보면 어떤가.
 
이은홍 = 도시에 살고 있으면 자주 나갔겠지만 그게 어려우니 인터넷으로 본다. 보고 있으면 미안하고 눈물이 난다. 그래서 차마 끄질 못하고 밤을 새워 본다. 그런데 촛불을 든 사람들을 온전히 믿진 않는다. 특정한 정치인에 대한 인격적 사랑이나 모독으로 체제에 대한 고민을 치환해버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안하고 눈물나고.
 
김규항 = 말씀대로 지식인과 언론의 책임이 크다. 귀촌한 지 9년째인데.
 
이은홍 = 지금 스무살인 아들이 ‘똥을 퍼도 좋으니까 시골에서 학교 다니고 싶다’고 한 게 시작이었다. 아내는 드물게 단단한 사람인데도 도시에서 정상적으로 아이 교육을 하며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아파트에서 10여년을 살았는데 나랑 마주치면 장난치고 인사하던 똘망똘망한 아이들이 고학년 되고 중학생 되면 하나같이 동태처럼 되어버렸다. 늦은 밤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큰 가방 메고 눈은 게슴츠레해가지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내 아이도 저렇게 되는구나 싶어 앞이 캄캄했다.
 
김규항 =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은홍 = 내가 누렸던 10대의 즐거움과 행복을 적어도 그만큼은 주고 싶었는데 핵심은 시간이었다. 뭔 짓을 하든 제 몫으로 쓰는 시간을 보장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려가 살 곳을 알아보러 다니던 어느 날 시골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비가 왔다. 아이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종이컵에 받아가면서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노는 거였다. ‘저거다. 종이컵 하나만 있으면 저렇게 놀 수 있구나.’
 
김규항 = 시골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려 애쓰는 게 현실이다.

이은홍 = 이 동네의 내 또래들이, 말하자면 마지막 농부들인데 요즘은 소농은 다 죽고 정부 정책도 대농 위주라 수입이 도시 사람들 부럽지 않은 경우도 꽤 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일해 번 돈이 아이들 도시로 보내는 데 다 들어간다. 술자리에서 아이들 걱정을 같이한다. 그런데 난 ‘너희 아이들의 미래가 밝지 못하다, 졸업하고 대부분 비정규직이 되는 암울한 현실이다’ 이렇게 차마 말을 못하겠다. 오히려 동네 친구들이 우리 아들 걱정을 스스럼없이 한다. ‘대학도 안 가고 어떻게 사냐’고.

김규항 = 그런 불안감은 정도 차이일 뿐 대안교육을 하고 대학입시에 올인하지 않는 부모들도 다를 바 없는데 정말 불안하지 않은가.

이은홍 = 작년엔가 다들 하도 불안해하니 나도 불안해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내 아들이 가진 스펙을 정리해봤다. 그야말로 엄청났다. 나보다 기타 잘 치지, 컴퓨터도 도사지, 좋은 친구 내 10대 때보다 더 많지, 주변에 좋은 어른들 많지. 내가 걔보다 나은 건 현찰을 좀 더 갖고 있는 것 하나더라. 그리고 아들이 음악을 하겠다는 게 정해져 있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도대체 내가 뭘 불안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김규항 = 스펙을 그렇게 정리한다면 생각들이 달라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펙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이은홍 = 그런 스펙이 문제라기보다 그런 스펙을 쌓는 이유가 문제다. 경쟁하기 위해서 아닌가. 내 친구와 내 이웃과 경쟁하기 위해서. 99%가 서로 연대하고 돕는 시스템을 궁리해도 모자랄 판에 상대를 죽이고 내가 사는 시스템으로 가면 어떡하나.
 
김규항 = 아이를 경쟁에 밀어넣는 게 잘못된 것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편한 얼굴도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이젠 교실에서도 집에서도 경쟁은 그저 선이다. 그걸 수용하지 않는 ‘고래가 그랬어’도 종종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충고를 듣곤 한다.

이은홍 = 경쟁이 사회 원리라면 굳이 인간 사회라고 할 게 있는가. 짐승들의 사회도 그보단 낫다. 불안을 없애려면 체제에 대한 고민을 함께해야 한다. 계급에 대한 고민이라든지 지배체제의 변화라든지.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인물만 보면서 개별 차원으로 해결하려 하니 불안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김규항 = 아들이 홍대 인디씬에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만일 자리 못 잡고 몇 년 후에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어떨까. 실패했다고 말할 사람도 많을 텐데.
 
이은홍 = 성공인가 실패인가의 기준은 내가 행복한가이다. 음악으로 뜨고 대박나서 돈 많이 벌고 유명해져도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꽝이다. 만일 도시에서 활동을 접고 오면 밥값은 하게 해야지. 이 동네엔 일손이 부족해서 밥값 할 것 많다. 나머지는 아들이 알아서 할 문제다. 친구들과 술먹고 놀면서 가끔 당구도 치고 그렇게 살면 된다. 사실 나는 은근히 그런 상상을 한다. 아들이 면사무소 옆에 작은 가게라도 하나 열어서 기타작업도 하고 노래도 만들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하는 모습. 부담이 될까 싶어 한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김규항 = 불안한 게 아무것도 없나.

이은홍 = 얘가 밥먹고 뒷자리를 깔끔하게 처리 안 한다든가 제 옷가지나 잠자리를 정리 잘 안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불안하다. 남하고 어울려 살면서 남에게 피해주고 욕을 먹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잔소리를 해서 가르쳐야 하는데 잔소리하면 싫어하니 어떻게 해야 하나 싶고.

김규항 = 대학 진학은 고려한 적이 없나.
 
이은홍 = 권유한 적이 있다. 아이가 공식 학력은 중졸인데 ‘검정고시 보고 대학에 가는 것 고려해봐라, 아빠 고향 친구들 보면 대학 안 나왔다고 평생 열등감 갖는 경우도 있더라.’ 그랬더니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고,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자기가 대학 가겠다면 당연히 존중할 것이다. 중요한 건 자기 필요와 판단이다.
 
김규항 = 마을 사람들과 참 좋아 보인다. 귀농이나 귀촌한 사람들 중엔 마을과 겉도는 경우도 많다. 손님은 거의 외지 사람들이고 만날 자기들끼리 어울려 어려운 말로 대화하고.
 
이은홍 = 집단의 이념이나 공동체성 내세워서 끼리끼리 귀농·귀촌하는 건 뉴타운과 다를 바 없다. 나도 오래전엔 그런 식의 생각을 했지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농촌 마을이라는 게 크든 작든 적어도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일단 마을에 빌붙어 산다는 생각을 하는 게 마땅하다. 마을을 위해서 뭔가를 하겠다, 바꾸어보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제국주의고 이명박이다. 1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 나를 살게 해주었으니 내가 마을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부터 궁리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살면 동네사람들과 안 좋을 일이 뭐 있을까.

2012/03/19 14:01 2012/03/19 14:01
2012/03/07 14:32
대전_예수전_0305
2012/03/07 14:32 2012/03/07 14:32
2012/03/06 09:06

2003년 10월, 고래가그랬어 창간호가 세상에 나왔어. 그러고 보니 창간호를 보던 초등학교 6학년 동무들은 벌써 스물한 살이 되었네.

삼촌이 고래가그랬어를 만들기로 마음먹은 건 한국 어린이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야. 뭐가 불쌍하냐, 한국 어린이들이 못 먹고 못 입는 나라 어린이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하냐고 할 사람들도 있을까? 한국 어린이들이 모두 잘 먹고 잘 입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이 잘 먹고 잘 입는다고 행복한 건 아니잖아. 사람이 행복하려면 자유와 인권이 필요해. 그런데 한국 어린이들의 자유와 인권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어.

삼촌은 군사독재 시절에, 자유와 인권이 온통 무시되던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냈어. 학교는 학교라기보다 나쁜 군대 같았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명령하고 벌주기 일쑤였지. 하지만 학교 다녀오면 우린 오후 내내 마음껏 뛰어놀았어. 군사독재가 물러가고 민주화가 되어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이 훨씬 높아진 오늘 동무들의 생활은 어때? 마음껏 뛰어놀긴커녕 저녁까지 혹은 밤늦게까지 힘들게 학원을 돌잖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믿는 어른들이 갑자기 늘었기 때문이야. 어린이들의 자유와 인권은 마음껏 뛰어노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아이들의 자유와 인권을 빼앗게 되었지. 참 슬프고 이상한 일이지? 삼촌이 잡지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사람이 행복하려면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걸 아무도 어린이들에게 알려주지 않게 되어버릴까 걱정했어.

생각보다 많은 어린이들이 고래가그랬어를 좋아해 주었고 또 생각보다 많은 이모 삼촌들이 응원했어. 고래가그랬어는 100호를 낼 만큼 튼튼해졌어. 더 재미있고 근사한 고래를 만들어갈게. 그리고 하나 더. 한국 어린이들의 생활을 바꾸는 운동을 벌여갈 계획이야.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놀며 저마다의 꿈을 꾸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운동 말이야. 정체가 궁금하지? 곧 동무들도 알게 될 거야. 어른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하는 운동이거든.

고래가그랬어 200호가 나올 때쯤엔 창간호를 보던 6학년들은 마흔 살이 넘네. 고래를 보고 자란 아이가 고래를 보는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는 거야. 근사하지? 그땐 어른들도 어린이들도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으면 좋겠다. 꼭.


고래를 만들었던, 그리고 만드는 이모 삼촌들을 대신하여
발행인 삼촌 김규항 씀

2012/03/06 09:06 2012/03/06 09:06
2012/03/06 08:44

고래는 인간을 사랑해요.

고래는 꿈이 크지만 거만하지 않고 소박하고 온순하죠.

고래는 모두의 마음속 깊은 심해에까지 가보고 싶어요.

고래는 동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제일 좋아해요.

고래는 단순하지만 멀리까지 가는 소리의 파장을 가졌죠.

고래는 아직 가보지 못한 바닷속 세계가 있어 외롭지 않아요.

고래는 어두운 바닷속에서도 겁내지 않고 살 수 있어요.

고래는 천천히 멀리 가는 것을 좋아하는 미지의 여행자

이런 나와 동무들이 오래오래 함께 해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오랜 동무

고래는 이 평화로운 지구와 함께

먼 훗날까지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답니다.

귀를 기울여 보세요.

지구의 자전과 같은 울음소리가

노랫소리가 들리죠.

난 늘 여러분 곁에 함께 있어요.

(송경동, '고래가그랬어' 100호 축하시)

2012/03/06 08:44 2012/03/06 08:44
2012/03/06 07:48
100호_표지그림 copy
고래야. 고래야.
상상의. 숲에서.
마음껏. 뛰어놀아라..

안상수 선생이 만들어주신 고래 100호 표지 이미지 세 개와 붙이는 말. 아래는 완성된 표지. 눈 부분은 구멍을 뚫고 내지에 눈알을 인쇄했다. 눈알의 방향을 좌로 하느냐 우로 하느냐를 두고 현선, 서림 들과 장난섞인 논쟁을 했는데 알아서들 하라고 했으니 결과는 책이 나와봐야 안다.ㅎ

100_표1
2012/03/06 07:48 2012/03/06 07:48
2012/03/03 11:43

고래동무를 신청할 때 '사연'을 적는 란이 있다. 가지각색의 이야기들이 있지만, 아이가 태어난 걸 기념하는 사연들은 아무래도 좀더 눈에 들어온다. 어제 올라온 사연엔 '고래를 함께 하고 싶어요'라는 표현이 있다. 고래하다. 언젠가는 신조어가 될지도.ㅎ

저는 고래아기입니다.
2012년 2월16일 태어났어요.
보다 많은 형,누나와 고래를 함께하고 싶어요.

2012/03/03 11:43 2012/03/03 1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