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같은 7일도 있고
7일 같은 7년도 있다.
인생이란..
'2011/09'에 해당되는 글 15건

소파에 누워 생각에 잠긴 레아. 이따금 녀석이 저러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오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포악함과 어리석음을 떠올리면서 현명함과 평화는 이제 고양에게나 존재하가 싶은 생각도 든다. 레아가 이집에 살게 된 데는 얼마간의 사연이 있다.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원래 단과 건의 고양이는 얀이라는 녀석이었다. 작년에 단과 건이 몇 달 지방에 머물렀다. 워낙 다들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집이라 얀이 며칠씩 혼자 있는 경우가 많게 된 셈인데 아는 분이 얀을 맡아주겠다고 했다. 고양이를 여럿 키우는 분이라 안심하고 얀을 맡겼다. 가을에 아이들이 돌아와 얀을 찾으려 했더니 좀 희한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얀을 맡아준 분이 다른 집에 다시 얀을 맡겼고 그 집 아이가 얀과 정이 들어서 못 헤어지겠다는 것. 단 건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아이에겐 잘못이 없으니 고민스러운 상황이었다. 두어 주 간간히 눈물 바람도 하면서 고민하던 둘은 결국 결론을 내렸다. ‘그 아이가 우리보다 어린데 정든 고양이와 헤어지게 하는 게 잔인한 일이고, 얀을 그렇게 좋아한다니 얀이가 그 아이와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단 건은 그렇게 얀을 떠나보냈다. 그 얼마 후 처음 얀이를 맡았던 분이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시로 새끼 고양이를 구해 보내주었다. 단 건은 ‘레아’(스타워즈의 등장인물)라고 이름 붙였다.

(경향신문에 시작한 인터뷰 꼭지 '김규항의 좌판' 첫 인터뷰이는 시인 송경동이다. 근래 인터뷰를 많이한 편이라 다른 사람을 할까 싶기도 했으나 다른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인터뷰이라고 생각했고 결과도 그랬다. 송경동, 그는 오늘 한국의 정신적 리트머스 시험지다. 진보적이라 자처하면서 그의 말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의 진보와 나의 진보의 차이는 무엇인지 찬찬히 생각해보길 권한다, 아니 부탁드린다. 이 꼭지가 얼마나 갈 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제도신문에서 처음으로 '좌빨 인터뷰 지면'을 구현해낸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초고는 150매 가량인데 신문엔 30매로 줄여 실렸다. 나중에 책으로 내게 되면 50매 정도로 다시 정리할 생각.)
김규항 = 이곳에 갇혀 지낸 지 얼마나 되었나.
송경동 = 석 달쯤 지났다. 공식 수배 상태가 된 건 두 달 좀 지났다.
김규항 = 어찌 보면 송경동이 갇혀 있는 건지, 세상이 갇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송경동은 해방되어 있고 밖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사람들이 자본의 감옥, 체제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송경동 =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말씀대로 많은 사람이 자본 감옥에 갇혀서 또 생존의 감옥에서 매달려 힘들게 살아간다. 이런 세상에서 육신은 좀 묶여 있을지 몰라도 심적으로나 양심적으로는 혼자 놓여나서 산다는 게 오히려 미안하고 과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김규항 = 자본주의가 워낙 자기파괴적으로 가다보니 자본가들마저 자본의 감옥에 갇힌 시절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 내내 부자나 지배계급의 특징은 유한함이었는데, 이젠 새벽부터 밤늦도록 정신없이 바쁜 게 이른바 잘나가는 부자들의 상징처럼 되었다.
송경동 = 더 많이 소외받은 사람들이다. 현실에서는 자본의 과실과 혜택을 거머쥐고 살지만, 그 때문에 공동체가 무엇인지, 사람들 간의 유대와 연대가 어떤 건지, 낮은 곳과 손잡는 연대가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뜨거운 것인지를 잃은 사람들이 아닌가. 부를 유지하려면 초인적으로 바쁘고 다른 사람들의 삶과 노동을 빼앗느라 폭력적이기까지 해야 하고.
김규항 = 당신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한국의 진보운동은 전통적으로 학생운동을 기반으로 해왔는데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운동 엘리트들은 대부분 자유주의 진영으로 넘어간 반면 김진숙, 이갑용, 송경동을 비롯해 여전히 현실에 대한 지적 통찰력을 잃지 않고 활동하는 이들을 보면 오히려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이 많다. 진정한 엘리트란 뭔가, 지성이라는 게 뭔가라는 질문을 해보게 된다.
송경동 = 난 거기에다 소년원 출신에 일용노동자 출신이니 운동진영뿐 아니라 사회 계급적으로도 가장 천한 사람인 셈이다. 그런 것들이 한때는 열등감이나 불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조건들이 오히려 나를 더 지혜로울 수 있게 했다. 인간의 모든 문명은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만들어지고 노동 과정을 통해서 모든 경험이나 지혜가 나오는 것 아닌가.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노동은 삶에 대한 통찰,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에서부터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김규항 = 그런 조건이 실제 현실에서 열매 맺기는 쉽지 않은데.
송경동 = 노동하는 사람일수록 자본에 복속된 기계로, 시간 노예로 살아야 하는 사회다보니 자본이나 이데올로기의 억압 구조가 그런 지혜와 경험을 다 죽여버려서 실제론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학교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들이 유기적 지식인으로 성장해야 아름다운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김규항 = 그런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셈인데, 계기가 뭐라고 생각하나.
송경동 = 운동진영에서 꿈이나 이상, 다음 세계에 대한 확신 같은 게 사라져 버린 것에서 시작된 것 같다. 1980년대나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 사람만 만나도 혁명을 이야기하고 변혁을 이야기하고 전체 세계를 이야기하고 그랬잖은가. 그런데 1990년 동구가 몰락하면서 다음 사회에 대한 전망을 상실한 상층 활동가들에게 남은 건 작은 꿈뿐이었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이나 이런 곳들도 조합원 만들기만 남았다. 그러다보니 절차적 민주주의 내에서, 의회제도 내에서의 조그마한 지분 확보를 통한 뭐, 이런 꿈으로 자꾸 가다보니 사람들이 망가진다. 개개인의 진정성을 넘어 구조나 상황이 자꾸 그러니까 사람들이 작아지는 거다. 우리 정파가, 내 편이 어느 정도 지분을 가져야 하고 나는 어떤 자리 정도를 가질까, 이런 걸로 되다보니 사람들이 키워지고 길러지고 다시 재탄생되는 과정들이 없어져 버리고 관료적이고 기계적이고 수직적인 문화들만 남게 된다. 과거의 단병호 같은, 이갑용 같은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노동운동가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다.
김규항 = 1990년대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꿈이 사라지면서 꿈을 조정한 운동으로서 대형 시민운동이나 이런저런 개혁운동들이 각광을 받게 된다. 그런 운동에도 의미가 있고 달라진 현실에 운동이 조응하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꿈이나 이상을 달라진 현실에서 펼치는 게 아니라 꿈이나 이상을 폐기해 버리는 거다.
송경동 = 어떤 때는 암적 존재로까지 이야기하더라. ‘1980년대 구좌파 아니냐, 돈키호테가 아니냐. 잘못된 입장과 세계관으로 사람과 세상을 망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나도 노동문학을 했지만 1990년 초반부터 노동문학이라는 말이 싹 사라진다. 노동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살해당한 셈이다.
김규항 = 꿈이나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배제되고 진보라 불리는 사람들이 진보를 막아서고 있는 형국이다.
송경동 = 현실 사회주의 패망으로 인한 충격은 이해하지만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신자유주의 흐름이 본격 시작되고 민주화로 생긴 두 정권이 그에 앞장서면서 진실이 다 드러나지 않았는가. 우리 삶은 초국적 자본의 먹이로 그대로 노출되고, 노동 유연화니 뭐니 해서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가 900만명에 이르고, 이런 상황에서도 꿈이 사라진 운동을 말한다는 건 잘못이다. 그런 운동은 대안이 될 수가 없다. 자기 꿈의 한계 때문에 사회적 꿈을 제한하자고 주장하는 건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양심적인 게 아니다.
김규항 = ‘야만의 시대에 맞선 송경동’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런데 그 야만이 이명박 정권을 말한다면 당신을 제대로 이해한 걸까.
송경동 = 나는 한 대통령이나 정권하고 싸우고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 사회적 노선들과의 투쟁과 저항이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5년 단위의 정권으로 잘라서 대응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어발 하나 자른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싸워야 되는 건 하나의 정권이나 이명박이라는 대통령이 아니라 제도정치권에 광범위하게 그리고 한국 사회에 전반적으로 이식되어 있는 신자유주의 입장과 노선과 그 세력들이다.
김규항 = 희망버스는 특정한 정치운동이 아니어서 여러 사람들이 연대하게 된다. 신자유주의 매파는 없지만 신자유주의 비둘기파라 할 만한 사람들은 많이 참여하는데 불편한 마음은 없는지.
송경동 = 지금 희망버스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내고 격화되면서 정치적 입장에 따라 빠질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리해고가 이렇게 자행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900만명에 이르는 상황은 어느 당을 지지하는가 이전에 사회적 학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이런 질문이나 문제가 사회화되는 순간 여기에 동승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매번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편하게 생각한다.
김규항 = 전태일 이후 민주적 노동운동이 생존권 투쟁을 기반으로 발전해온 거는 당연한데 노동자 계급의 가치관이나 긍지 같은 게 형성 안 된 건 치명적인 문제다. 나 혼자 잘사는 것보다는 더불어 사는 게 더 멋진 거라는 생각, 우리가 자본가들보다 좀 어렵고 불편하지만 인간적 가치 면에선 월등하게, 훨씬 훌륭하게 살고 있다는 긍지 말이다. 그런 게 없다보니 최소한의 생존권을 넘어선 노동자들의 싸움도 여전히 임금투쟁에 집중되고 연대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노동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셈인데.
송경동 = 어느 순간부터 경제적 관점에 다들 매몰되었다. 경제동물이 되었다고 욕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다 자기 삶 속에서 주체가 되고 다른 삶을 찾아나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하고 있지만, 동시에 정규와 비정규의 경제적 차이에 매몰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대안도 그렇게 매몰된다. 다른 운동이 필요하다. 자꾸 조합원만 만들려고 하지 말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해 나가야 한다.
김규항 = 그런 면에서 희망버스는 어떤 희망의 씨앗을 만들어내고 있다.
송경동 = 희망버스가 2차에서 합법주의의 틀을 넘었다. 어느 사업장에서든 노사가 도장찍고 나면 끝이다. 얼마 전 발레오공조 코리아도 합의서 쓰고 나니까 끝인 거다. 특이하게 그 벽을 희망버스가 넘었다. 이 합의는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재고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 불법주의, 비합법주의는 폭력투쟁을 하자는 걸로 이해되는데 합법주의를 넘어서야 된다는 건 자본의 법과 질서, 저들이 쳐놓은 상상력, 관습, 행동양식 이런 걸 넘어서는 거다. 모든 사고와 의식과 상상력과 문화와 행동 양식들까지, 예를 들어 사랑하는 방식까지. 이걸 넘는 상상력과 행동들, 당당함과 용기들. 변혁을 꿈꾼다면 그 벽은 늘 넘어서야 한다. 그게 변혁운동의 운명이기도 하고.
김규항 = 자본진영은 최근 들어 거시적인 변화를 시작하고 있다. ‘안철수 현상’이라는 것도 기존의 보수가 수구나 꼴통보수라고 불리면서 청년이나 중간층 시민들에게 더 이상 소구력이 없다보니 합리적 보수로 변화하는 시대의 표징이기도 한데, 그런 큰 흐름에 대응하는 진보진영의 질적 변화가 필요하다.
송경동 = 나는 제도정치권 일에 많은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다. 역사는 10년, 20년, 몇 십년 단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결국 차선과 차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가져야 하는 건 스타 정치인 몇 명을 만들어내고 또 하나의 상징과 우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각 개개인의 조화롭고 자유로운 발전과 개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자유로우면서도 존경받는 개인들이 어떤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협동하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과 실천이다. 그런 단단한 바닥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다.
김규항 = 현실을 변화시킨다는 게 워낙 암담하게 느껴지니까 조바심이 나고, 또 전엔 꿈이나 이상을 가졌지만 이젠 적당히 체제 안에서 진보인사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그러다보니 사회진보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비판적 지지니 정권교체를 위한 연합이니 하는 걸로 해소되어 버린다. 실은 그거야말로 자본의 지배 전략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으니 희망은 여전한 셈이다. 당신은 활동가이기 전에 빼어난 시인이기도 한데 근래엔 서정시는 쓰지 못하고 추모시를 도맡아 쓰고 있다. 참 힘든 일이기도 하고…. 일종의 굿을 하는 것인데.
송경동 = 추모시를 쓰면 앞뒤 일주일은 완전 망가진다. 일종의 무당이다. 시가 안풀리면 갑자기 괴팍해지고 곤두서거나 몸이 폐허가 될 정도로 만취하거나. 그런가 하면 때론 길거리에서 20분 만에 써내야 할 때도 있다. 추모시 읽다가 마이크를 두 번이나 집어던졌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 돌아가신 분 앞에서 분노한 얼굴로 시를 읽고 있는 나 자신이 참담한 거다. 투쟁의 목숨값은 분명히 했나, 그러지도 않고 나는 폼을 잡고 추모시라고 이런 걸 읽고 있나. 사람이 죽기 전에 더 싸워야지 이런 생각을 한다.
김규항 = 사람들, 특히 진보적인 중간층 인텔리들은 어떤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비’하기도 해요. 권정생 선생 타계 후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었잖아요. 그 말엔 저 사람은 성자고 나는 사람이니 저 사람처럼 살지 않겠다는 뜻과 그래도 나는 저런 사람을 존중하고 의미를 이해하는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죠. 그건 실은 개인적 풍경이 아니라 불온하고 위험한 사람이 갖는 불온성과 위험성을 중화시키는 체제의 작업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은 원했든 안했든 저명인사가 되어가는 상황인데요.
송경동 = 나로선 굉장히 위험한 상태라고 본다. 예를 들면 내가 ‘현장에 있는 유일한 시인’ ‘노동운동과 결합하는 유일한 시인’이라는 말을 개인적으로 듣는 게 기분 좋아지는 순간, 아마 내가 썩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저명해져야 되는 사람들이 있다. 용산 싸움을 예로 들면 60여명이 망루에 올라갔는데 거기에는 자기 지역이 아닌데도 올라간 수많은 전철연의 철거민이 있었다. 그 새벽 망루에 올라갔던 평범한 사람들, 그 순간 인간적 연대와 유대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들. 저명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다.
김규항 = 우리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새기고 존경할 줄 알 때 우리가 꿈꾸는 세상도 우리에게 올 것이다.
이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진보이거나 적어도 자유주의자이겠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수의 처지에서 세상 돌아가는 걸 살펴보자. 단박에 위기감을 느낄 것이다. 청년 세대와 중간층 시민들은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수구 혹은 꼴통이라는 딱지가 붙은 기존의 보수에 더 이상 현혹되지도 설득되지도 않는다. 물론 여전히 보수 진영엔 수구와 꼴통 딱지에 걸맞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구보수’가 위협하는 건 자유주의자들이 늘 떠들어대듯 우리가 아니라 보수 자체다. 부와 사회적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가졌기에 여전히 위세당당하지만 보수의 성채는 몰락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머리가 돌아가는 보수라면, 이를테면 윤여준 같은 보수의 책략가라면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청년 세대와 중간층 시민들을 포섭할 수 있는 보수, 이른바 ‘합리적 보수’로의 변신이다. ‘안철수 현상’은 그런 거시적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드러낸다.
사실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한 환호엔 거품이 있다. 우선 ‘성공한 시이오(CEO)’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시이오에서 물러날 무렵까지도 안철수연구소의 백신은 유명세는 있으되 전문가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후 미국 유학과 교수 이력에서도 그다지 특별한 건 없다. 그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보수도 진보도 아닌 소박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다. 이를테면 그는 “나는 노동자라는 말이 편안하지 않다. (중략) 이 말에서는 상하간의 계층 구분, 분리 의식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성공한 시이오이자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겨도 될 만한 능력과 경륜을 가진 지도자로 여겨진다. 그의 과장되고 미화된 이력들이 기존의 정치에 질릴 대로 질린 대중들의 ‘메시아 대망’과 절묘하게 조응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라는 인물이 어떤가 혹은 안철수가 윤여준과 어떤 관계인가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안철수 현상이 한국 보수가 ‘합리적 보수로 재무장’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시대의 표징이라는 사실이다. 안철수는 한나라당을 비난했다가 다음날 번복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와 한나라당과의 관계도 중요하지 않다. 보수 재무장의 목적은 한나라당이라는 기존 틀의 존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무장의 목적은 한껏 높아진 시민의식을 포섭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진보적 변화, 즉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착취의 구조 자체가 변화하는 걸 차단하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보전하는 지속가능한 보수 정치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부시 정권(미국의 구보수)과 천양지차로 다른 느낌을 주면서 사상 최고의 빈곤율을 기록하며 부자들의 천국을 운영하는 오바마 정권은 그 생생한 모델일 수 있다.
구보수 세력은 결국 도태될 것이고, 구보수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게 유일한 존재 이유인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은 일시적 혼란에 빠지지만 재무장한 보수와 자신이 결국 다르지 않음을 받아들이며 이합집산하게 될 것이다. 대중 노선을 걷는다며, 이명박 정권을 심판한다며 자유주의 세력에 몸을 섞어버린 일부 진보정치 세력이 소멸하는 건 물론이다. 결국 큰 그림으로 보자면 한국 사회는 거대해진 신보수(재무장한 보수 및 자유주의 세력)와 새로운 진보가 대립하는 구도로 가고 있는 셈이다. 윤여준 같은 사람들이 보수의 재무장을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실천하듯 진보를 생각하는 진지한 사람들은 새로운 진보의 밑그림을 그리고 실천해야 하는 시점이다. 시대의 표징을 읽지 못하고 수구 꼴통 짓을 반복하는 보수가 보수의 걸림돌이듯, 만날 구보수 욕이나 반복하며 자유주의 세력의 재집권을 진보라 말하는 진보는 진보의 걸림돌이다.(한겨레)
'보수는 악인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글쎄다. 먼저 이렇게 되묻고 싶다. '현재 세상이 악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보수는 악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보수를 굳이 악이라고 할 건 없을 것이다. 보수는 '현재 세상을 지키려는 경향'이니.
오래 전(98년)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보수적인 교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
(어제 오늘 안철수 관련해 트윗에 쓴 글들. 언급된 대로 '보수의 자유주의 재무장', '신보수의 침공'에 대해 정리된 글을 쓸 생각이다. 중요한 건 미래. 미래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오늘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통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의 지성 사회는 그 둘에 대한 반감이 가득하다. 그걸 넘어서지 않는 한 우리는 쳇바퀴 속의 다람쥐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안철수를 존경하든 선망하든 개인의 선택. 문제는 그에게 '진보적인' 기대를 하는 경향입니다. 그건 적어도 그가 '정동영 만큼'은 뛰어다니고서야 가능해야지요. 현재로선 취임 전 오세훈보다 나을게 없는 인물. 오세훈도 민변 출신에 환경운동 한 사람이죠.
한나라나 조선일보 등 한국 보수의 정체성이 극우에서 자유주의로 변화하고 있는 건 안철수-윤여준 팀,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 특집 등으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순진한 선의가 통하는 시절이 아닙니다.
윤여준은 한 후보의 책략가를 넘어 보수의 책략가입니다. 그는 보수가 기존 스타일로는 젊은 세대와 중간층 시민들의 외면으로 서서히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걸 간파하고 매우 거시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지요. 이재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인물.
문제는 안철수가 아니라 '안철수 현상'으로 드러나는 보수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긴박한 정체성 재정립 상황이지요. 진보를 바라는 분은 진보의 정체성에 대해 되새겨 볼 때입니다. 순진한 선의나 현실론은 저들의 제물이기 십상.
안철수는 굳이 비교하자면 오세훈보다 문국현에 가깝죠. 보수세력이 그 몇년새 자유주의화하면서 '문국현 모델'까진 사용할수 있게 된 셈. 문국현의 당시 주목도는 기억들 하실 겁니다. 진보논객이라는 사람들이 지지 표명할 정도였죠.
안철수에 대한 '존경 현상'은 상당 경우 주체의 의탁으로 느껴집니다. 끝없이 고단하고 자기 존경이 불가능한 사회의 병리현상이지요. 좌파가 제구실 못한 죄가 큽니다.
안철수는 '한나라당은 안간다'고 하는데 그말은 '한나라당에 갈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말이기도. 워낙 몰상식한 놈들이 판치는 정치판이라 돋보일순 있으나 안철수의 보수적 정체성을 혼돈하는건 애석한 일.
'선한 보수'를 원한다면 안철수 고려할수 있겠지요.그러나 진보를 원한다면 안철수는 아니죠. 보수/진보는 선악이나 윤리가 아닌 계급, 어떤 계급의 삶을 반영하는가의 문제니까요.
아이를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거나 고급사교육으로 외고는 너끈히 보내는 사람들의 '선함'을 아이 동네학원 보내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옹호'하는 슬픈 풍경. 진보의 무능이 가장 큰 원인이고 넘어설 비전을 만들어야죠. 만듭시다.
(오늘)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건 정치하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부려 내 삶을 바꾸는 일. 내 삶을 바꿀 정치가 없다면 게중 나은걸 고를 게 아니라 거부하고 새로 짓는 일.
'안철수 프로젝트'는 예상대로 서울시장 양보 미담을 통해 대통령 선거로 점프하는군요. "노동자라는 단어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미담에 노동자가 감화될 건 없겠지요. 차분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가슴이 뜨거울수록 머리는 차갑게) 안철수에겐 두가지 선택만 있었죠. 1독자 출마 - 시장 당선 유력, 2단일화 양보 - 강력한 대선후보. 바야흐로 자유주의로 재무장한 신보수의 침공이 시작되었군요. 현명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한나라당 쪽에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은, 즉 일개 당을 넘어 한국 보수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만한 상황이죠
잘게 언급해온 보수의 자유주의 무장, 신보수의 침공 등에 대해선 담주초 한겨레 칼럼에 쓰겠습니다. 그 전에 안철수 어록 하나. "나는 노동자라는 말이 편안하지 않다. (중략) 이 말에서는 상하간의 계층 구분, 분리 의식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불편한 이야기하는 저역시 불편하답니다.^^ 10년 전에 쓴 '불편한 글'인데 이 글이 이후 상황과 관련지어 말이 되는 구석이 있다면 '지금 불편한 이야기'도 경청해주시길.
네 이념대로 찍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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