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9 22:33

(곽노현 씨 일에 대해 오늘 트위터에 적은 메모들)

지킬것은 개인 곽노현이 아니라 교육감 곽노현의 정책임을 기억해야. 보수세력의 곽노현 공격은 개인이 아니라 정책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도. '곽노현을 믿는다'식의 감상적 대응은 그들이 원하는 것.

개인 곽노현의 잘못으로 그의 정책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나, 곽노현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개인 곽노현을 싸고도는 사람들이나 어리석긴 마찬가지. 곽노현과 연애하는가? 그는 교육감이고 그의 정책은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중의 것.

교육감 곽노현과 정책을 지키고 싶다면 정당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오세훈이었으면 이랬을 걸 곽노현이니 저런다면 대중은 '이편이나 저편이나 매한가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곽노현을 대중에게서 고립시키고 잃는 지름길.

2011/08/29 22:33 2011/08/29 22:33
2011/08/29 11:56

(4차 희망버스 독립문공원 토론에서 한 말.)

‘자본주의 사회에는 정리해고와 비정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적 발상이다’라는 말은 무식하고 악의적인 말입니다. 그런 말은 자본주의 사회가 미국이나 한국처럼 막나가는 시장의 자유가 판치는 사회 한가지뿐이고 사회주의는 우리가 반공 교육에서 배운 전제적 공산주의 사회 한가지뿐이라는 걸 전제로 합니다. 자본주의가 그런 거라면 자본주의를 넘어서야겠지요. 그러나 사회주의까지 안 가더라도 지금 지구상의 나라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사회지만 천차만별입니다. 서유럽 사회나 나아가 북유럽 사회는 자본주의지만 노동자들이 우리보단 훨씬 더 인간적인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의 자본가들은 한국의 자본가들보다 선진적이고 교양이 있어서 노동자들에게 그렇게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자본의 속성은 어디나 같습니다. 자본의 태도가 달라지는 건 노동자들의 강력한 연대가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까르푸나 발레오 자본이 프랑스 현지에서와 한국에서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른 건 그래서입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자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본이 국가의 비호 아래 제멋대로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고 비정규화할 수 있는 힘입니다. 희망버스가 그걸 바꾸어내고 있습니다. 희망버스에 참여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김진숙의 문제는 내 문제다.” 시민들이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다른 노동자의 싸움이 곧 내 싸움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거대한 변화가 희망버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말합니다. “내 아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노동자로서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돈이 사람의 가치를 정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교육은 미래의 노동자들을 일찌감치 머슴으로 길들이려는 자본의 전략입니다. 희망버스는 그 사실을 환기합니다.

2011/08/29 11:56 2011/08/29 11:56
2011/08/2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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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6 10:19 2011/08/26 10:19
2011/08/25 12:00

(8월 16일, 금속노조 대회의실에서 있었던 '희망버스 토론회' 발제문)

희망버스 계획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2006년도에 있었던 멕시코 사파티스타 농민해방군이 6개월 동안의 행진을 거쳐서 멕시코시티에 입성하는 광경을 떠올렸습니다. 그 행진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스키마스크를 쓴 총을 든 인텔리 남성인데, 이에 반해 우리 김진숙 동지는 해고 공장 노동자이면서 대학을 다니지 않았으며 여성이지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분상으로 김진숙 동지가 훨씬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데(웃음)  지성적 면모로 말한다면야 김진숙 동지도 이미 확인된 바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분입니다.
 
저는 왜 ‘희망버스’인가 라는 주제에 대해, 그러니까 버스는 버스인데 왜 희망을 주는 버스인가에  대해 여섯가지 제목을 붙여 짤막짤막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 번째는 교감, 두 번째는 시위 문화, 세 번째는 시민과 노동운동의 조우, 네 번째는 삶의 치유, 다섯 번째는 진보의 길 찾기, 여섯 번째는 자신감의 회복 이렇게 제목을 붙여봤습니다.

1. 교감
첫 번째 교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존 노동운동의 시위문화하면 일반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머리띠를 두르고, 조끼를 입고, 남성적이면서, 딱딱한 운동권 언어를 사용하고, 또 지도부와 대오로 상징되는 군사문화 분위기 같은 것들이 먼저 연상됩니다. 이런 시위문화가 옳으냐, 그르냐 혹은 바람직하냐, 바람직하지 않느냐를 떠나서 시민들 특히 청년세대들과 일정한 정서적 괴리감과 거부감마져 주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듭니다. 저는 희망버스를 통해서 이런 부분들이 많이 극복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고공농성이라는 싸움의 형태는 잘 아시다시피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노동운동의 시위 방법 중에서도 가장 지사적이면서 극한적 분위기의 싸움으로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일반 시민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면에서는 더욱 더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김진숙 동지의 경우에는 트위터를 통해 방울 토마토를 키우는 이야기 같은 일상적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성적 온화함과 지사적 결기를 아주 잘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유지되는 김진숙 동지 특유의 유쾌함과 부드러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면서 시민들과 소통과 교감에 성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교감을 확산시키고 김진숙 씨와 세상을 연결시켜 준 것이 바로 희망버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시위문화
두 번째는 새로운 시위, 싸움의 문화와 관련되는 부분 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희망버스는 깔깔깔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름이 나타내듯이 기존의 무슨무슨 운동본부나, 명망가들을 지도위원으로 세우고 조금은 권위적인 분위기의 조직문화를 벗어나서 수평적이면서 자율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그래서 새로운 싸움의 문화가 꽃피는 조건을 바로 이 ‘깔깔깔’ 이라는 희망버스 기획단이 만들고 있지요. 거기에가 촛불 시위에서 맹아가 생겨 용산이나 두리반, 마리에 이르는 장기투쟁 공간에서 시민과 청년문화가 결합된 새로운 시위문화의 성과들이 희망버스에 결합되고 영향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희망버스를 자신들의 일상과 분리된 특별하고 지사적인 싸움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의미와 재미를 주는 소풍같은 것으로 여겨지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희망버스는 3차까지 진행되었고, 1차는 700여명, 2차는 1만 여명, 3차는 1만 오천명 정도 인원들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1차 700여명은 활동가나 선진적인 시민들이 중심이었다고 한다면, 2차 1만명은 기존 시위문화와 새로운 시위문화가 병존하는 모습을 보였었고, 세 번째 1만 오천명이 모인 3차 희망 버스에서는 새로운 시위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점점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혹시라도 오해를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서 덧붙이자면 기존의 시위 문화나 노동운동의 시위문화가 무조건 잘못되었기 때문에 폐기하고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희망버스에 처음 참여한 시민들은 기존의 시위문화에 거부감이 들더라도 무작정 폐기해야 할 구습으로 생각하는 건 잘못입니다. 오랫동안 싸원온 저 사람들 덕에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감사의 마음과 존중심을 갖는 게 인간적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희망버스에 참가한 시민들이 기존에 꺼리던 말들 예를 들어 동지, 투쟁, 침탈 같은 말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모습이 많아지는 있기도 하고, 기존방식의 일방적인 폐기라기보다 새로운 시위문화를 함께 짓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시민과 노동운동의 조우
세 번째는 시민과 노동운동의 조우입니다. 90년대 들어서 한국사회의 주류 사회운동은 민중운동에서 ‘민중’이 ‘시민’으로 바뀌면서 시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도언론 개혁이라든가, 소액주주 문제라든가 이런 개혁적인 의제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상대적으로 노동 의제라든가 계급적 의제는 소외되었지요. 사실 시민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나 시위, 파업에 대해서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자본의 선전에 현혹되어 심지어 ‘밥그릇 투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지하철이 파업을 하면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것은 내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자기들 밥그릇 싸움이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린다든가 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희망 버스를 통해서 시민들은 자신이 바로 노동자라는 것, 그리고 노동문제는 내 문제, 내 아이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재인식하고 연대의 의미와 기쁨을 맛보는 거대한 노동학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시민, 다시 말해서 노동자인 자신의 현실과 현실의 변화를 위한 운동과 조우하고 그 운동의 주인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고, 이것은 매우 변혁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삶의 치유
한국 대중들의 삶은 김대중 정권부터 본격화되었다고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 자본화 15년 여 동안에 대단히 지리멸렬해진 게 사실입니다. 돈과 경쟁,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강박과 불안은 소박한 신념, 작은 삶의 원칙들마저 스스로 다 무너지고, ‘그래도 현실이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말로 지극히 파편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민들이 자신과 비교했을 때 비할 수 없는 극한 현실에 있는 김진숙 동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유쾌하게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는 걸 보면서, 자신의 지리멸렬함이 무색해지고 역설적으로 자신의 강박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소비하고 소유함으로써만 존재를 증명하는 사회에서 그것을 못하는 불안감과 고통, 또는 못하게 될까봐 번민하던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게 도대체 뭐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매우 오래간만에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돈이 아니라 사람, 경쟁이 아니라 연대의 기쁨과 사는 맛을 회복시켜주는 치유의 여행으로서의 희망 버스였다는 것입니다.

5. 진보의 길 찾기 
지금 현재 이명박 정권과 대립하고 있는 세력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보개혁세력’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진보와 개혁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진 세력이 합쳐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개혁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노동과 관련한 현실의 실제 장본인들이기도 합니다. 책임을 가져야 될 사람들이기도 하구요. 그들이 집권한 10년 동안 반노동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정리해고법이라던가 기간제법이라던가 파견법 등이 법제화 되었습니다. 정리해고법은 김대중 정권 때에 만들어졌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기간제법과 파견법은 노무현 정권 때에 만들어졌고,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된 시기도 바로 그 시기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현실적인 책임과 원인을 이명박 정권에게 돌리면서 개혁세력이 ‘재집권 플랜’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지요. 그들 말을 빌면 ‘진보집권 플랜’입니다.
현재 개혁세력의 희망 버스에 관한 태도를 보면 대체로 두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치인들에게서 도드라지는 태도로 희망버스를 지지하거나 참여하고 적어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개혁세력의 학계 일각에서 보이는 것인데, 근래의 김대호씨나 김기원씨가 대표적이죠. 이런 견해들이 사회적으로 말썽이 낳기도 했는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리 해고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있는 것이다, 정리 해고는 97년 이전에도 존재했지 않았는가‘ 이런 식의 논리들입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이 이런 말을 해서 굉장히 욕을 많이 먹기도 했지만 사실 이 이런 말들은 그 세력의 정체성과 생각을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괜히 우리가 ’신자유주의 정권‘이다, ’삼성 공화국‘이다 이런 식의 말을 했던 것은 아니지요. 물론 지금 그들은 집권했을 때 하고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권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 그래서 굳이 자신들의 정체를 책임있게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개혁세력에 대해서 우리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정치인들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3차 희망버스 때에도 부산 현장에서 개혁세력 정치인들의 연설에 시간을 할애한 것에 대해서 군중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고 희망버스 기획단 홈피 게시판에도 그런 의견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정한 정치인을 거명해서 안됐지만 지금 현재 개혁 정치인 중에서 그래도 가장 낫다고 분류되는 분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면, 정동영 의원 경우엔 일각에서는 자기 지역구의 전북고속 문제라든가 이런 문제를 분명하고 책임있게 해결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쇼를 벌이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비판이 부당한가, 심한가, 정당한가를 따지기 전에 이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 분명히 해야 할 노력들이 있는 것이지요. 자신들이 집권했던 10년 동안에 반노동자 정책으로 일관한 부분, 이런 현실을 만들어낸 부분, 그런 부분들을 자신의 지역구에서부터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한진과 이명박 정권만 비판할게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민주당과 개혁세력의 친자본적이고 반노동자적인 성향에 대해서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한 싸움을 해낼 때 비로소 연대하고 존경받을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개혁세력의 재집권 플랜이 이른바 진보집권플랜으로 선전되는 기만적인 상황이 억지되고, 기존에 존재하는 혹은 앞으로 존재할 수 있는 진보적 경향과 가능성을  견인하는 역할을 희망버스가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악을 막는다’는 미명하에 극우적 자본정권(이명박 정권)과 개혁적 자본정권(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쳇바퀴 돌듯이 자본의 체제를 유지하며 미궁을 헤매는 상황에서 정권교체를 넘어서는 진정한 사회 변화의 길을 찾도록 하는 기운을 희망버스가 불어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희망버스에서 개혁세력을 배제하자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이 희망버스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현명하게 꾸려나가자는 말씀입니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제가 답답한 마음에 농담을 한 말씀 드리자면 근래 보면 이명박 비판을 진보의 중심 주제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런 상황에 민망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명박을 욕하는 것은 진보의 주제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일 뿐이지요.(웃음) 그것은 조금이라도 진지하고 사회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본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우리가 더 진지하고 의미 있는 변화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태도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진보의 주제가 이명박 비판이 되어버리면 개혁세력의 재집권 플랜에 우리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애석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6. 자신감의 회복
희망 버스가 희망 버스 기획단의 활동가들조차도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고 할 정도로 전 사회적인 울림을 주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지요. 이것은 대단히 특별한 상황입니다. 아까도 말씀이 나왔던 김주익 열사는 현 정권과 비교해서 그래도 낫다는 노무현 정권 때 김진숙 동지가 싸우고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사회적인 반향이나 어떤 메아리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명박 정권 하에서 같은 공간에서 시작된 싸움이 이렇게 전 사회를, 우리 사회를 넘어 세계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사실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비롯해서 주요한 사회 변화들이 제도정치 안에서 일어났던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도정치에서 여도 야도 해결 못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결국엔 터져 나와서 길거리에서 인민들의 직접 행동에 의해서 해결되었던 것이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에너지와 가능성들이 거기에 걸맞는 정치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진보정치로 승화된 것이 아니고 ‘최악을 막아야 된다’는 미명하에 그런 문제를 만든 장본인들, 즉 개혁적 정치세력에 다시 흡수되는 악순환을 보여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부분이 우리 사회를 계속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저는 1만 오천명이 버스를 타고 부산에 모였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이지만 사실 1만 오천명이라는 숫자 자체로 본다면 제도정치에서는 그렇게 의미있는 숫자는 아닙니다. 정권 교체는 커녕, 한 개 지역구 의원을 당선시킬 수도 없는 그런 숫자지요. 그러나 이 1만 오천명이 비현실적인 주제를 가지고 함께 외칠 때 진보개혁이라고 일컬어지는 제도정치를 전부 합해놓은 것보다도 더 큰 사회적 울림을 주었다는 것은 시민들이 기존 제도정치에 계속 동원되고 매달리는 악순환을 벗어나서 우리의 정치를 우리가 만들 수 있다, 다른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씨앗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희망버스는 일반 시민들과 고립되거나 괴리를 보이던 운동문화를 바꿔내고, 시민이 자신이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현실과 현실을 바꾸는 운동과 비로소 조우하고 그 운동의 주인이 되는 출발점이면서, 돈과 경쟁에 내몰리다보니까 지리멸렬해진 삶을 치유하는 모습들, 우리의 미래를 계속 악순환과 미궁에 빠뜨리는 정치적 기만을 폭로하는 단초, 다른 세상이 가능하고 그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것이 아주 소중한 성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문제점들도 있습니다. 지적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지요. 그러나 다행인 것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과 ‘희망 버스 기획단’의 활동가들이 지도부로서의 태도가 아니라 제안하고 심부름꾼을 자임하면서,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태도로 계속 성찰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희망 버스의 여러 가지 결점들, 보완해야 할 점들이 계속 보완 되고 발전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유래 없는 자본의 왕국에서 고통 당하는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희망의 씨앗을 만드는 버스의 역할을 계속 해나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8년 김진숙 동지가 어느 연설에서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노동자들에게 남의 일은 없습니다. 장애, 비정규, 이주 노동자, 성적 소수자 등을 노동 운동 내에서 차별한다면 자본의 차별을 어떻게 극복하겠습니까.”

저는 김진숙 동지의 말을 이어 ‘시민은 모두 노동자들이며 노동자들에게 남의 일은 없다’는 것을 함께 되새겨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희망버스를 제안하고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비없세와 희망버스 기획단 활동가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낼 것을 제안합니다. 고맙습니다.(끝)

2011/08/25 12:00 2011/08/25 12:00
2011/08/25 10:30

아무리 멍청한 정치인도 어제 같은 결과가 나오면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정도의 센스는 있는 법인데 그마저도 안하니 오세훈은 멍청함과 오만함이라는 두가지 악덕을 겸비한 사람인 것 같다. 이런 경우의 오만함은 멍청함의 다른 표현일 뿐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오세훈은 민변 출신 변호사에 시민운동 쪽에서 활동한 요즘 말로 '강남좌파' 출신이다. 이미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난 오세훈을 욕하는거야 누구는 못할까. 중요한 건 제2의 오세훈을 알아보는 밝은 눈. 찬찬히 보면 보인다.

2011/08/25 10:30 2011/08/25 10:30
2011/08/24 15:36

지리멸렬. 오늘 한국에서의 삶을 이보다 더 또렷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수십년 동안의 싸움으로 이룬 민주화가 막무가내식 시장주의의 침입으로 이어지면서 시작된 일일 게다. 슬프게도 민주화운동의 전설적 투사이던 대통령과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이던 대통령이 정리해고법과 파견법, 기간제법을 만들며 그 선봉에 섰다. 비정규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많아지고 정규직 노동자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교육은 한낱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정으로 변했고 아이들은 더 이상 어른들에게서 인간의 삶에 대해 배울 수 없게 되었다. 돈과 경쟁에 대한 강박과 불안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해온 삶의 소박한 원칙들마저 무너뜨렸다. 인생에 관한 한가지 이야기만 남았다. ‘현실이 어쩔 수 없지.’

그런 지리멸렬한 삶에 불현듯 질문을 던진 건 버스다. 지난겨울부터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부산 영도의 조선소 크레인에 올라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 노동자에게 가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버스.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극한 현실에 있지만 오히려 더 당당하고 유쾌하게 인간적 위엄을 갖고 살아가는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현실이 어쩔 수 없지’만을 되뇌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소비와 소유로만 존재를 증명하는 사회에서 그것을 못해서 혹은 못하게 될까 봐 번민하던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있던 질문을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게 뭘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들은 1박2일의 버스여행에서 돈이 아니라 사람, 경쟁이 아니라 연대의 기쁨으로 치유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동자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25년 전 극우독재가 물러났을 때 했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와 함께 밀어닥친 시장주의의 파도는 ‘국민’들로 하여금 노동자임을 발견하게 하는 게 아니라 단지 ‘국민’을 ‘시민’으로 바꿔 부르게 만들었다. 사회운동의 주류가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바뀌고 극우언론 문제나 소액주주운동 같은 개혁적 의제가 부상하면서 노동 문제나 계급적인 의제들은 ‘구식 운동’으로 밀려났다. 시민이라 불리는 노동자들은 노동 문제를 남의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내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일상의 불편을 툴툴거리거나 자본의 선동에 귀 기울였다. ‘꼴사나운 노동자 놈들!’ ‘저게 다 밥그릇 싸움이지!’

그러던 사람들이 고공농성의, 노동운동 가운데서도 가장 극한적인 싸움으로 여겨지는 싸움의 주인공과 친구가 되었다는 건 정말이지 희한한 일이었다. 버스가 그 희한한 일을 만들어냈다. 버스에서 사람들은 말했다. ‘김진숙의 문제가 내 문제고 내 아이의 문제이기도 한걸요.’ 시민이라 불리는 노동자들이 비로소 제 현실과 현실의 변화를 위한 운동과 조우하고 그 운동의 주인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히 치러진 새로운 역사의 서막이었다.

8월27일, 네 번째 희망버스의 행선지는 서울이다. 이번엔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 대부분은 노동자로 살아갈 게 아닌가. 그런데 아이들은 노동자는 부끄러운 삶이라는, 행복은 돈으로 사는 것이라는 거짓말을 배우며 시들어간다. 노동자로 살아갈 아이들에게 노동자는 부끄러운 삶이라고, 행복은 돈으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건 일찌감치 아이들에게서 인간적 긍지와 자존감을 거세하여 온순한 머슴으로 만들려는 자본의 전략이다.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우선, 이번 희망버스를 우리 아이들의 살아 숨쉬는 노동학교이자 치유의 놀이터로 만들어보자. 꼭 그렇게 해보자. (한겨레)

2011/08/24 15:36 2011/08/24 15:36
2011/08/23 11:14
어느 사회나 부자들은 보수적인 경향을 띤다. 많이 가졌으니 당연히 세상이 변하길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특별히 계급의식을 갖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계급적이다. 한국의 부자는 그중에서도 발군이다. 한국에서 부의 형성이라는 게 일제 부역질과 박정희 이후 면면히 이어지는 부동산투기가 기반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근래 무상급식과 관련한 한국 부자들의 반응은 그들의 동물적 계급의식을 또한번 드러낸다. 그들은 무상급식이 단지 아이들 급식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로 가는, 즉 부자가 세금을 많이 내는 게 당연한 사회로 가는 관문임을 간파하고 그걸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부잣집 아이가 왜 공짜밥을 먹는가’라는 식의 간교한 말까지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오세훈은 일찌감치 그런 부자들의 열망을 등에 업었다. 그는 아마도 대통령이 되려면 부자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부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서민들, 즉 가장 다수의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도 철저한 부자의 대변자임에도 ‘내가 대통령되면 잘살게 해줄게요’ 서민들을 속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복지를 말(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하는 것도 물론 그런 맥락에서다. 그런데 오세훈은 대놓고 부자의 행동대장을 자임하고 나섰다. 만에 하나 내일 투표에서 이기더라도 대통령으로 가는 길은 스스로 막아선 셈이다. 참 멍청한 사람.
2011/08/23 11:14 2011/08/23 11:14
2011/08/17 16:00

제주 예수전. 내일부터 3주 동안 목요일 저녁 강의하고 4주째는 이미 예수전을 수료한 사람들(대부분 육지 사람들)과 함께 '나의 예수전'을 나누며 먹고 마시는 일정이다. 강의는 1. 예수와 기독교 2. 예수와 사회 3. 예수와 영성으로.

2011/08/17 16:00 2011/08/17 16:00
2011/08/17 10:50

이따금 이런 경우가 있다. 중요한, 그러나 내가 그냥은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을 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경우 말이다. 발제를 맡은 덕분에 희망버스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희망버스의 가장 큰 의미는 ‘시민이 자신이 노동자임을 발견하고, 노동운동 즉 자신의 운동에 주인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발제문은 녹취를 풀어 다시 올릴 생각이다. 토론회의 전체 얼개를 담은 오마이뉴스 기사.

2011/08/17 10:50 2011/08/17 10:50
2011/08/09 14:04
유시민이 ‘계급과 계층을 뛰어넘는 정치’를 말한 모양이다. 계급과 계층이라는 말은 그 자체에 뛰어넘을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으니 말이 안 되는 말이고 그래서 유시민스러운 말이다. 유시민의 말이 안되는 말, 궤변에 대해 처음 쓴 게 2003년에 쓴 '개혁이냐 개뼈냐'였는데 참 한결같다. 계급과 계층이 존재하는 한 정치는 인정하든 하지 않든 '계급적'일 수밖에 없다. 계급과 계층을 뛰어넘는 정치, 국민적 화합, 국익 따위 말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정치가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 쓰는 거짓말일 뿐이다. 유시민은 근래 ‘대중적 진보정치’를 표방하고 있다. 그런데 진보정치란 '계급과 계층을 뛰어넘는 정치'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과 서민 계층을 행복하게 하는 정치', '노동자 계급과 서민 계층이 행복해야 모든 계급 모든 계층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정치'다. 유시민이 진보정치를 하겠다고 하면서 계급과 계층을 뛰어넘는 정치를 말하는 건 그의 진보정치 지향이 정치적 책략임을 보여준다. 알다시피 그가 진보정치를 말하는 이유는 지난 지방선거의 패배로 개혁세력에서 지분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분확보에 성공했다면 물론 그는 진보정치에 대해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유시민은 늘 그래왔다. 만에 하나 유시민이 계급과 계층을 뛰어넘는 정치를 하고 싶다는 게 진심이라면 방안이 있다. 계급과 계층을 철폐하기 위해 싸우는 급진주의자가 되는 것. 그럴 게 아니라면 그만 하는 게 좋겠다. 유시민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지식소매상'일 때가 가장 좋았다.
2011/08/09 14:04 2011/08/09 14:04
2011/08/08 17:14
대개의 어린이 책은 부모가 아이에게 권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래가그랬어는 아이가 부모에게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받은 편지.

안녕하세요?
미국에 사는 00이(10) 엄마 정00이라고 합니다.
미국서 자라온 아들이 이번에 여름방학을 맞아 합천에 있는 자연학교 캠프를 다녀왔는데
거기서 <고래가그랬어>를 재미있게 읽었다며 신청해 달라고 합니다. 
1년 정기구독 신청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잡지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1/08/08 17:14 2011/08/08 17:14
2011/08/0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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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지난 밤 후배 딸아이가 재운 인형과 카메라(아래)를 발견하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평화의 풍경은 이제 인형과 기계에나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2011/08/08 08:34 2011/08/08 08:34
2011/08/04 17:26
'고래 이야기콘서트'를 두달에 한번 진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레프트이펙트가 연주도 하고 게스트를 불러 관객과 함께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는 콘서트다. 근래 이야기콘서트, 북콘서트가 많이 생겼는데 '명박이 욕하기 쇼'를 넘어서는 걸 보기 어려운 건 아쉬운 일이다. 고래 콘서트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기운을 충전하는,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 통찰과 참여한 사람들이 동지애로 충만한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고래 동료들의 생각. 한국에서 그런 콘서트가 가능할까? 이젠 가능할 때가 된 것도 같다. 빠르면 9월부터 할 생각이다. 좌파시민행동(가칭) 역시 9월 초에 발기인 모임을 하고 본격 진행한다. 그나저나 좌파시민행동, 가칭이긴 하지만 이 비호감형 이름이 발기인들에 의해 어떤 호감형 이름으로 바뀔지 무척 궁금하다.ㅎ
2011/08/04 17:26 2011/08/04 17:26
2011/08/04 16:43
고래 안상평 팀장 기사.

대기업서 잃은 내 삶, 작은 출판사로 옮겨 되찾았죠

2011/08/04 16:43 2011/08/04 16:43
2011/08/03 19:03

제주 예수전 안내 글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강연료 때문에 참여가 힘드신 분들이 계시면, 아래 메일로 따로 연락주세요." 예수전은 늘 그래왔다. 돈 없다고 참여 못한대서야 그게 무슨 예수전인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 편안하게 연락하시길.

8기 예수전(제주) 안내 보기

2011/08/03 19:03 2011/08/03 19:03
2011/08/02 08:58

‘어떻게 하면 아이와 잘 소통할 수 있는가?’ 부모들(이라고 적지만 엄마들. 한국의 아빠들은 교육의 실제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을 대상으로 한 교육 강연을 하면 꼭 나오는 질문이다. 내 교육 강연이라는 게 ‘성적 올리기 비법’ 따위와는 동떨어진, 아이를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교육 현실을 넘어서는 일과 관련한 이야기들이라 청중들도 교육 문제에 대해 시류를 거스르는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많다. 질문은 대개 내 글에 적힌 아이와의 소통 이야기를 근거로 한다. 물론 사실을 가감 없이 적은 것이지만 나 역시 아이와의 소통에서 실수할 때가 있고 ‘망설이지 않고 사과하기’를 나름의 보완책으로 삼는 처지다. 어쨌거나 그간의 내 체험과 이런저런 사례들을 보며 느낀 걸 적어본다. 이른바 ‘민주적인 부모가 아이와 소통에서 빠지기 쉬운 두어 가지 함정’.

첫째 함정은 이른바 민주주의의 절차와 내용의 괴리다. 민주적인 부모들은 당연히 아이와 소통도 민주적으로 하려 애쓰는 편이다. 문제는 이 민주적인 소통이 절차만 민주적인 경우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바람직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는 그 결론으로 대화를 몰고 가는 것이다. 소통의 권위와 논리적 능력에서 부모는 아이를 압도하기 때문에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니, 부러 제어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그렇게 가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우리 사회, 즉 민주주의의 절차는 회복했으되 여전히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빼앗기고 억압받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닮은 데가 있다.

둘째 함정은 아이가 판단하고 선택할 만한 정보나 식견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의 의견을 무작정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은 아이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제 교양이나 사회의식을 아이에게 대상화하는 자기애적 행동인데 생각보다 해악이 크다. 이를테면 내 친구 녀석은 교육 현실에 관한 신문 칼럼에 엄청 감흥을 받은 어느 날 밤 제 초등학교 오학년 아들을 앉혀놓고는 ‘피시방 가는 시간 자율적으로 할 수 있지?’라고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라면 또 모를까 남자아이가 ‘할 수 있다’고 하지 ‘하기 어렵다’ 하겠는가. ‘아이가 이상해졌어!’ 석 달 후 녀석의 집에선 소란이 벌어졌다. 석 달 동안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하며 센 게임만 해댄 아이가 결국 사고와 인지 능력의 위기를 맞았던 것.

두 함정은 언뜻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 첫째를 피하려면 둘째로 빠질 것 같고 둘째를 피하자니 첫째로 흐를 것 같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향하거나 시도하되 정작 민주주의의 주인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결국 둘은 하나다. 민주적인 부모 노릇은 권위적인 부모 노릇보다 훨씬 어렵다. 권위적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어버이연합 수준의 패악 질을 일삼는 경우만 아니라면) 자연스레 부모와의 차이에 적응하게 되지만, 민주적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워낙 가르치고 설파한 게 있어놔서 ‘남들 앞에선 훌륭한 체하면서 실제론’ 하며 크게 상처받기 십상이다. 상처는 진보적인 어른들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아이의 사회의식 형성에 장애를 일으킨다.

두 번의 민주정권이 기대와는 달리 인민들을 배제하는 정치로 일관하여 결국 인민들로 하여금 이명박 정권을 불러들이게 만든 상황은 민주적인 부모들이 아이들 앞에 직면한 상황이기도 한 셈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사회적 소통이든 아이와의 소통이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존경이 살아 숨쉬려면 민주주의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늘 되새겨져야 한다. 다짐의 마음으로 모질게 말하자면, 주인이 빠진 민주주의는 좀더 교활한 방식의 독재일 뿐이다. 지금 여기, 민주주의의 주인은 누구인가. (한겨레)


2011/08/02 08:58 2011/08/02 08:58
2011/08/0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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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레프트이펙트 올림픽홀 공연 동영상.
첫번째 곡 앞 부분이 잘린 게 아쉽지만, 웃는 모습이 담긴 건 나름의 수확이랄까.ㅎ
(해상도를 360에서 720 HD로 조정해서 보시길)

1. 기억 속으로


2. 19번지 블루스



2011/08/01 15:16 2011/08/01 15:16
2011/08/01 09:16

친구가 보내온 문자 메시지.

“다 좋았는데 몇몇 직업정치가들의 찬조연설은 참으로 민망했어요. 그들은 유령 뻔뻔한 유령이었어요. 이 국면을 만든 그들이 허공에 대고 나쁜 놈 나오라고 외치다니요. 유령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지요. 희망버스는 부디 이 뻔뻔한 유령들의 무임승차를 웃으며 뿌리쳐야 해요.”

2011/08/01 09:16 2011/08/01 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