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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01 행복도 공부
2011/03/30 23:56
[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 인터뷰]
우리 사회 교육실태, 아이들이 겪는 현실에 대해?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가 최대한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행복의 기준이 많이 뒤틀려 있다. 신자유주의 자본화가 무서운 것은 사회 문제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본의 욕구와 가치기준에 물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게 다른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비교에 의한 불안, 그리고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이다.
노동자민중 대다수가 불안에 사로잡혀 아이들 교육에 대해 강박적으로 행동한다. 한국에는 교육은 없고 대학입시만 있다. 대학 안가면 죽는다는 불안감은 이해하지만 사실 대학 진학률이 90%에 이르는 지금은 대학 졸업장과 경제적 안정성은 대부분 상관관계를 잃었다. 다들 그런 계산은 없고 단지 불안감에 저녁까지 밤늦게까지 아이를 학원으로 돌리니 아이들이 뭐가 되겠나.
사람을 볼 때 조건과 껍데기만 보거나, 사람 사이의 유대나 공감, 만남을 통한 즐거움이 아니라, 뭘 가졌을 때나 가진 것을 불렸을 때 만족을 얻는다면, 그런 정서를 가진 어른이 된다면 어떨까? 진정한 사랑, 우정, 존경 그런 걸 나눌 줄 모른다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해도 진정한 행복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 교육문제도 운동과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개별로 있을 때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연대하고 투쟁해야 해결된다. 교육도 부모들끼리 모여 힘든 현실을 딛고 서로 위로하고 연대하며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아무리 불안해도 나보다 못한 사람들의 아이들도 생각해야 교육이 선다. 고래와 관련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고래동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내 아이가 아니라 공부방이나 지역아동센터에 고래를 구독해주는 것이다. 여자는 고래이모, 남자는 고래삼촌이라 부른다. 아이들이 후원자에게 이 책을 보게 해줘서 고맙다고 편지를 쓰거나 같이 사진찍는 건 안 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이 책을 볼 권리가 있다.
고래동무가 많이 부족하다. 민주노총 정규직 노동자들도 나서주시라. 다들 내 아이 경쟁 때문에 전전긍긍하는데 아예 경쟁은 생각도 못하는 형편의 아이들도 많다. 잡지 하나가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나보다 형편이 어려운 부모를 둔 아이들을 위해 한 달에 9,500원 정도 내는 건 의미있는 연대이고 매우 교육적인 일이 아닐까.
노동자의 아이 키우기에 대해?
아이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전 세대 인간들이 만든 세상에 살고 성장하면서 그 틀에서 인생을 보내야 한다. 부당하고 거대한 아동인권탄압이며 죄를 짓는 일이다.
민주노총 조합원들도 아이들 교육문제에서는 차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보수적인 부모들은 당연히, 진보적인 부모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잘못된 건 알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서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아이들에게 노동자계급의 긍지를 가르치며 키워야 한다. 노동자가 빼앗기고 짓밟혀 억울하고 불쌍한 이들만이 아님을, 저들의 호의호식은 일하는 이들의 땀과 노동을 착취한 것임을 분명히 하자.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아도 내 자식 앞에 떳떳하게 건강하게 사는 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긍지다.
아이가 가난한 부모 때문에 불편을 겪을 순 있다. 하지만 가난한 부모가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고 아이도 제 부모를 부끄러워 하며 제 부모의 가난 덕에 부자인 사람들을 선망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는 어떤 부모보다 당당한 부모들이다.
한국사회 노동운동의 현주소는?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민주노총에 의해 노동운동이 가로막혀 있다”는 평가가 있다. 이것이 바뀌지 않으면 진정한 노동운동은 소멸할 것이다. 노동자의 아이들이 자본의 가치관으로 교육받는 상황에서 10년만 지나면 임금인상투쟁을 하는 노동운동은 있겠지만, 세상을 바꾸는 노동운동은 존재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자본가들이 우리 몫을 빼앗아 호의호식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 한다. 돈, 물질적 풍요만을 좇는다. 전통적 공동체의식조차 사라지고 있다. 울산이나 거제의 대공장 노동자들은 주식을 안하는 사람이 드물고 부동산 보러 다니는 게 유행이다.
금욕적이고 남 생각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사람이니 당연히 돈과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내 생각을 하면서도 옆을 돌아보는 것이 진보의식이다. 나도 힘들지만 옆 라인에서 똑같이 일하며 내 임금의 절반밖에 못 받는 비정규직의 문제를, 나도 어려운데 저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를 고민해야 한다. 자본이 노동자를 정규와 비정규로 분리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하기를 피하면서 귀족노조니 뭐니 따위 소리들을 당당하게 부인할 방법이 있겠는가.
소위 개혁세력과의 연합문제를 다시 봐야 한다. 개혁세력은 보수와 진보의 중간에서 집권 전에는 인민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진보적 색채를 띠려 노력한다. 또 집권 후에는 체제안정을 위해 보수화된다. 이런 본능적 작동원리에 비춰볼 때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 등이 선거연합을 통해 집권한 다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송전탑과 크레인에 올라, 혹은 길바닥에서 농성하며 겨울을 났지만 그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특히 민주당이 장악한 전주에서 버스노동자들 파업 상황은 선거연합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를 미리 보여주는 시뮬레이션이다.
진보정당 통합 논란에 대해?
민주노총이 양당 통합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두 당의 당원이 아니라 함부로 말하기 어렵지만 통합이냐 독자냐를 말하기 전에 통합이냐 독자냐를 말할 만한 내용이 부족한 상태라는 게 문제인 것 같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진보정당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태다. 개혁세력의 2중대가 아니라 선봉대라는 사람도 있더라. 그런데 진보신당이 그걸 분명히 선을 그을 만큼 주체적인 진보성이나 계급성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통합으로 가든 독자로 가든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최근의 선거연합 논란에 대해?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싶고, 박근혜정권이 들어서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바꿔보려는 정서는 이해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특히 선거가 다가오면 기존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생략되고, 조야한 수준의 정치공약, 당장 눈앞의 현실만 봉합하는 공약들이 난무한다.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은 그래서 선거 때 더 단단해져야 한다.
노무현에게 진보적 기대를 했던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고 그 정체가 드러나자 “노무현이 대통령 되더니 변했다”고 했다. 자신들이 잘못 판단한 것은 반성하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만 욕했다. 가족 비리가 드러나자 지지율은 바닥을 쳤는데 노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번엔 그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가 이명박이 얼마나 잔혹한 놈인가 하면서 대통령 노무현과 정권도 훌륭했다고 했다. 이런 감상적이고 개연성없는 변화가 이른바 진보개혁진영 대부분을 차지하는의 압도적 흐름이었다.
노동자인민을 힘들게 하는 정치와 정책들은 이명박 정권이 새롭게 만들거나 시작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것들을 계승한 것이다. 중산층 지식인들 살기엔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이 하늘땅 차이지만 노동자 입장에선 그밥에 그나물이다.
그런 분명한 사실들을 덮고 무작정한 선거연합을 종용하고 주장하는 정서적 흐름이 압도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질문을 던지거나 문제를 제기하면 성실한 답변이나 토론이 아니라 ‘쓸모없는 비현실적 몽상가’, ‘80년대 화석’이라고 공격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무책임한 태도가 이명박 정권은 바꿔야 한다는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갖는다. 우리 사회 진보와 노동운동의 미래를 가로막는 사람들은 이젠 조선일보 같은 극우적 반공주의가 아닌 그런 자칭 진보들이다.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에 대한 반감을 사용하는 그들의 위세는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제 관심은 이 거대한 쓰나미가 지나간 후 진보적 자원과 가능성이 유의미한 수준 이하로 소멸해버릴까 하는 걱정이다. 한번의 선거나 정권교체에 목을 멜게 아니라 그런 역사적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가져야 할 운동의 중심성이라면?
사실 한국에서 유의미한 정치적 변화는 언제나 의회가 아닌 길거리에서 이뤄졌다. 촛불항쟁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의회와 제도정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상한 강박을 갖고 있다.
개혁세력이 이명박 정권 패악질로부터 인민의 삶을 방어하지 못하는 것은 집권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똑같기 때문이다. 노동정책과 경제적 관점 등이 모두 같다. 그들이 집권했던 10년 동안 충분히 확인한 일이다. 노동자 입장에서 노무현 정권은 이명박 정권과 다를 게 없다는 것, 그리고 개혁세력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역사적 기로에서 깊게 고민해야 한다. 이걸 부인하면 진보적 노동운동이라고 하긴 어렵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고 좌파였던 이들, 조금 덜 포악하게 신자유주의 자본화 흐름을 지지하는 사람들, 하지만 반노동자적 반민주적 반인간적인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세력, 그들이 극우독재세력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수용한다면 진보라고 할 수 없다. 진보는 어차피 자본과 보수 세력에 설득당하지 않으므로, 진보를 개혁세력에 흡수통합하는 건 자본이 노리는 효과적 전략이다. 신자유주의 원조세력과의 연대, 반노동자 세력과 연대하는 것이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고 노동자 삶을 낫게 할 수 있다는 희망 자체가 우리를 괴멸시킨다.
운동사회 정파 갈등에 대해?
사회진보 운동엔 여러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차이들이 건강하게 토론하고 연대함으로써 더 힘이 생긴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정파 갈등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 감정적인 상황, 적보다 정파가 다른 동지를 더 미워하는 상황일 것이다. 역사에서 보면 적들로부터 극심하게 탄압받으며 가열하게 싸울 땐 그런 갈등이 훨씬 적다. 싸움이 제대로 안 되고 쇠락했을 때, 싸움이 체제에 편입되면 그런 문제가 더 불거진다. 정파갈등은 우리가 싸우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 우리가 어떤 세상을 위해 운동하는지, 그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희미해졌음을 반증한다.
정파 때문에 우리 운동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운동을 제대로 안해서 정파가 그 모양인 것이다. 우리가 뭘 하는 사람들인지 노동운동의 목표와 장기적인 전략은 무엇인지 되새기지 않는다면 정파 갈등은 사라질 수 없다. 그리고 운동이 전체적으로 우경화하고 체제내화하게 된다. 선거연합에 대한 무작정한 호의는 사실 그런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최근의 복지논쟁과 진정한 복지?
북유럽에서 복지사회를 구현한 역사적 배경은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이다. 자본이 자기들 사회가 넘어가게 생겼으니까 사회를 유지하면서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것이 바로 사민주의다. 유럽에서 복지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라에 교양 있는 부자, 착한 부자들이 있어서가 아니다.
급진적으로 체제를 엎으려는 운동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좌파정치가 존재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지지하며 상당수 인텔리들이 그런 양식을 가졌을 때 실질적 복지가 이뤄진다. 자본의 속성은 다 똑같다. 얼마나 견제하고 투쟁하느냐에 따라 자본의 태도가 달라진다. 착한 부자, 착한 자본도 나오는 것이다. 복지는 시장 경제에서 수반하는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제도적으로 최소화하려는 제도다. 부자는 좋은 싫든 엄청나게 많은 세금을 낼 수밖에 없고 가난한 사람은 돈을 낸 부자에게 조아리지 않고 당당하게 혜택을 누리는 게 복지다.
우리 사회는 미국보다 더 흉악한 사회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은 미국식 혹은 유럽식사회를 앞두고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은 복지는 없이,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착한 부자의 기부와 자선, 그걸 고마워하는 불쌍한 사람들로 유지되는 사회다. 유럽은 미국보다 훨씬 복지가 안착됐다. 복지는 좌파정치의 성장에 의해서만 유의미해지는 것이고 개혁세력이나 선거연합이 말하는 복지는 비현실적인 거짓말일 뿐이다. 박정희나 비스마르크를 들먹이며 보수도 복지를 할 수 있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건 복지가 아니라 독재체제의 예외적 시혜정책이다.
민주노총의 정체성과 노동계급에 주어진 사회적 책무?
헌신적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민주노총이 뭐하는 곳인지, 목표는 무엇이며 어떤 세상을 원하는지 그런 질문들이 무색해졌다. 고민이나 토론도 별로 없어 보인다. 정체성과 목표가 없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어차피 그런 걸 이루기 틀렸다는 생각에 빠져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은 존중받을 수 없다. 민주노총이 전위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민주노총은 애초에 전위적 노동운동을 지도하는 운동체로 만들어지지 않았거니와 더 대중화되고 일반화된 상황에서 그런 조직으로 변화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비현실적인 짐을 풀어놓고 민주노조의 집합체라는 정체성으로 노동운동이 자본에 넘어가지 않는 대중적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위적인 조직은 그런 기반 위에서 얼마든 존재할 수 있다.
2011/03/28 14:29
2011/03/24 10:35
선거만 다가오면 '현실론'의 이름으로 역사의식도 사회의식도 생략한 조야한 정치공학에 매몰되는 경향이 우리 역사와 사회를 망가트린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오히려 더 단단한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2011/03/24 00:49
자본주의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시장과 경쟁을 기반으로 하기에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수반하는 사회체제다. 죽도록 일하다 죽어버린 다섯 살 아이의 부모가 자식의 고통을 멈춰준 신에게 감사 기도를 하던 초기 자본주의의 풍경은 자본주의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 자본주의가 그나마 사람이 살 수 있는 꼴을 갖게 된 건 인민의 삶을 반영하는 정치, 좌파정치의 성장 덕이다.
핀란드의 자본가가 인민들은 몇 만원 내는 자동차 범칙금을 수억 원을 내는 이유는 그 자본가들이 노블리스오블리제에 투철해서가 아니라 우파정치를 견제하는 강력한 좌파정치가 그런 가치기준과 제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파정치 일색의 한국은 건희니 몽구니 하는 막되어먹은 자본이 정치와 법과 공권력과 미디어까지 지배하며 왕처럼 군림한다. 좌파정치만 억제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의 왕국이다.
한국의 자본이 좌파정치를 억제하는 방법은 두 시기로 나뉜다. 극우독재 시절엔 좌파는 모조리 ‘간첩’으로 몰아 죽이면 되었지만 민주화가 되고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전직 좌파들, 즉 80년대에 열혈 좌파청년이었으나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넘겨 좌파적 신념은 접고 정치니 학계니 언론이니 문화계니 주류 사회에서 편히 살기로 한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우선 ‘내가 달라졌다’고 말하지 않고 ‘세상이 달라졌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가 달라진 세상의 좌파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조갑제 류의 간첩 사냥이 더는 먹히지 않는 인민들에게서 좌파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기막힌 말도 만들어냈다. ‘비현실적’이라는 말이었다. 90년대 내내 그들은 옛 친구들을 ‘80년대식 좌파 교조에 사로잡힌 비현실적인 인간들’로 만들면서 ‘달라진 세상의 현명하고 현실적인 좌파’로 성장해갔다.
그들이 처음 집권했을 때 자본은 일순 긴장했으나 이내 안심하게 되었다. 그들이 극우독재 세력과 철천지원수일 뿐 자본에는 매우 충직했기 때문이다. 집권 10년 동안 그들은 자본을 위해 다음과 같이 일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대규모 정리해고, 공무원노조탄압, 비정규직 400만명 증가, 한미FTA 강행, 미국 용병으로 이라크 침략전쟁 파병, 노사관계로드맵추진, 비정규직 악법 제정,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을 통한 투기자본(론스타, 상하이 자동차 등)의 먹튀 허용, 미군의 100년 주둔 평택미군기지, 새만금‧등 경제 위주의 상태 파괴, 원전건설추진, 경찰에 의한 노동자 농민 학살, 노동자 2천명 구속.
그 10년에 낙심한 인민들은 ‘우파고 좌파고 소용없고 경제라도 살리자’며 이명박에 표를 몰아주었다. 물론 이명박이 인민의 편 일리 만무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이젠 몸도 마음도 거덜이 난 인민들 앞에 선거를 앞둔 그들이 다시 찾아와 속삭이고 있다. ‘힘드시죠.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잖아요. 힘을 모아야죠. 이번엔 진짜 잘해드릴게요.’ 그리고 최근에 합류한 몇몇 전직 좌파들이 소리 높여 거든다. ‘세상이 변했잖아요. 이게 진짜 현실적 진보고 좌파에요.’ 인민들은 고단함에 젖어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이지만 짐짓 그 요사스러운 말들에 귀 기울이는 눈치다.
그들은 집권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이 집권하든 못하든, 한국의 자본은 드디어 영원히 좌파정치의 씨를 말릴 기회를 잡았고 천년왕국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과연 한국의 좌파들은 이 험악한 시절을 통과하면서 소멸하지 않고 좌파정치의 싹을 살려낼 수 있을까? 돈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향한 걸음을 지속할 수 있을까?(다음에 계속) (한겨레)
2011/03/22 09:23
어느 시대나 올바른 사회적 관점과 실천이란 단순하다. 지금 현실에서 가장 고통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회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점을 기반으로 가장 현명하고 현실적인 실천을 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어느 시대나 그런 관점과 실천은 그런 관점과 실천을 피하면서 여전히 올바른 관점과 실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중늙은이들'에 의해 '근본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라 선전되곤 한다. 과거의 이력에 의해 여전히 진보인사로 분류되는 그 중늙이들이야말로 사회진보를 막아서는 가장 강력한 고리다.
2011/03/18 14:45
(대개의 사람들에게 신은 우리 삶의 외부에서 우리 삶을 관장하는 절대적 존재다. 그런 신관은 종교를 사람을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구속하는 도구로 만든다. 그러나 부처도 예수도 그 따위 신은 없다고 했다. 부처는 "(그런) 신은 없다'고 했고 예수는 '신은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했다. 신관이 문제다. 아래는 예수전에서 신관神觀을 언급한 부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뭔가를 말하기 전에 하느님이 누군가,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말해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하늘은 땅과 분리된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였고, 하느님은 그 세계를 상징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늘이란 일정한 방향을 가지거나 어떤 분할된 공간이 아닌, 단지 지구의 대기권이거나 외기일 뿐이라는 걸 안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다고도 땅에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물리적 제한을 초월해 모든 곳에 동시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롯해 기독교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어 온 서양 세계에서 하느님은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곽에서 절대적인 힘으로 우리 삶과 세계를 마음대로 관장하는 존재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런 존재라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은 그가 자행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묵인 아래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하느님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세속적인 탐욕에 초탈하여 진지하고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누구보다 종교적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무신론을 선택한다. 오히려 세속적인 욕망과 이기심에 가득한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강퍅하게 주장하며 ‘주님, 주님’ 부르짖곤 한다. 과연 하느님은 이런 정신적 참극을 벌이게 하는 그런 존재일까?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성서는 첫머리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 1:27) 물론 여기에서 ‘모습’은 눈, 코, 입 같은 외적인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담아 지어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 지나치게 익숙해진 서양식 신관神觀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양 정신에서 특히 한국의 민간 사상과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신관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귀한 실마리를 준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세계의 외곽에서 우리를 절대적 힘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살아있는 하느님인 것이다.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을 자행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 속에서 함께 고통받는 분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이런저런 종교적 형식에 기대어 나를 초월적인 상태로 끌어올리는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지금 내 삶을 지배하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 내고 내 본디 모습으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명예나 세속적인 성공 따위에 대한 사랑을 나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삶을 끝내고 나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하느님은 내 안에 존재하며 또한 모든 다른 내 안에 존재한다. 내 아내에게도 내 자식에게도 내 부하나 노예에게도, ‘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모든 낯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존재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자 동시에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2011/03/14 13:52
목요일(17일)부터 시작하는 7기 예수전. 등록 취소한 분이 있어 자리가 난 모양입니다. 참여하실 분은 고래 송창국 팀장에게 연락주세요. lonekook@지메일닷컴 (02 333 3075)
2011/03/02 23:11
진중권 씨의 철인좌파의 딱지치기는 아쉬운 글이다. 진씨가 ‘김규항이 틀렸다’는 비아냥거림만 반복할 게 아니라 ‘김규항이 왜 틀렸는가’를 말했다면 모두에게 좀더 유익했을 것이다. 공적 논쟁은 사적 다툼과 다른 것이니. 어쨌거나, 진씨는 현재 개혁우파 세력과 일부 진보정치 세력이 진행 중인 선거연합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씨는 꽤 오랫동안 진보정당 활동을 하면서 이런 선거연합을 반대해왔는데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하긴 그는 몇 달 전 나와 진보정당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 뒤에 진보신당을 탈당하며 “다시는 좌파니 진보니 안 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부러 밝히자면, 나는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선거연합을 찬성한다. 중국 공산당은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원수인 국민당과도 연합했는데 그깟 이명박 정권교체를 위한 연합을 못하겠는가. 진씨는 말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시키는 것이다.” 내말이 그 말이다. 내가 문제 삼는 건 선거연합 자체가 아니라 지금 진행 중인 선거연합이 과연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선거연합인가 하는 것이다.
본디 연합이란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걸 전제로 정체성이 다른 집단과 힘을 모으는 전략적 행위다.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는 연합은 ‘연합을 빙자한 흡수통합’일 뿐이다. 극우세력의 집권(혹은 재집권)을 막기 위한 선거연합은 ‘비판적 지지’의 이름으로 지난 20년 동안 반복되어왔다. 처음이라면 모를까 20년을 반복한 일이라면 당연히 그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비판적 지지는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진보의 방법’이라 선전되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20년만큼의 진보’가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탄생, 그리고 진보정치 세력의 쇠락이다.
우리는 선거연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리석은 역사를 또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현재의 선거연합은 ‘정권교체’만 강조될 뿐 정작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물리적 방안이 없다. 정치는 냉혹한 것이다. 이런 선거연합은 개혁우파 세력의 집권욕에 진보정치의 자원과 가능성을 헌납하는 절차일 뿐이다. 그래도 이명박 정권보다야 낫지 않겠냐고?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이명박 정권에 대한 우리의 반감이 개혁우파 세력을 턱없이 미화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란 당장의 통증이 지나버린 통증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개혁우파 세력이 집권하면 세상이 어떨까는 전주를 보면 된다. 버스 노동자들이 86일째 추위와 폭력 속에 파업하고 있는데 민주당이 장악한 전주시와 전주시의회는 이명박보다 덜하지 않다. 법원이 합법 파업임을 인정했음에도 전주시와 전주시의회는 불법 파업으로 매도하며 자본가 편에 서왔다. 선거연합을 통해 진보정치를 구현한다는 민노당이 중앙당 차원의 논평하나 없다는 건 선거연합의 정체를 보여준다. 개혁우파세력이 집권한다면 전주의 상황은 전국의 상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집권했던 10년이 그랬듯 말이다.
그런 무작정한 선거연합을 ‘진보집권 플랜’이라 주장하는 게 양식있는 행동일까? 그런 선거연합을 진보라 부르면 제대로 된 선거연합을 모색하는 진보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순진보, 원조 진보라 할까? 진보가 참기름, 족발인가? 그걸 지적했더니 도리어 ‘진보를 전세 냈느냐’ ‘딱지를 붙인다’ 성을 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태도다. 그런 태도는 심지어 진씨 자신의 활동과도 배치된다. 지난 10여년 진중권 씨가 해온 활동이란 대개 ‘보수 행세하는 극우’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진보 행세하는 개혁’을 저리 옹호하는 풍경은 참으로 난감하다.(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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