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에 해당되는 글 41건

  1. 2010/07/19 각별한 의미
  2. 2010/07/17 소감들
  3. 2010/07/16 우리 시대의 반공주의 (1)
  4. 2010/07/16 어린이 영화캠프 초대
  5. 2010/07/14 다솔이 (1)
  6. 2010/07/12 분향소
  7. 2010/07/11 고릴라 아빠
  8. 2010/07/11 트위터 재개
  9. 2010/07/11 음색
  10. 2010/07/10 나는 자유주의자가 좋다
  11. 2010/07/10 김세균의 법정 특강
  12. 2010/07/10 논쟁과 싸움
  13. 2010/07/09 정상범주 안에서
  14. 2010/07/08 사교육 탈출 프로젝트
  15. 2010/07/07 이제 됐어?
  16. 2010/07/05 점심 준비
  17. 2010/07/04 개념있는 물건
  18. 2010/07/02 최정우
  19. 2010/07/02 그러지 말길
  20. 2010/07/02 고단한 세상
2010/07/19 18:05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추천사. 게으름을 피우다 결국 강연 투어 중에 넘기느라 만족스럽지 않은 글이 되어버렸다. 지난번에도 한번 그랬는데.. 다시는 그러지 말자 다짐.)

기독교 성서에는 두 가지 신이 등장한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신, 즉 모세의 신은 권위적이고 질투가 많은 존재다. 신은 제 명령을 잘 따르면 기뻐하고 상을 주지만 어기면 크게 화를 내며 벌을 준다. 자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나 사회에 대해선 아예 어떤 사회인가 어떤 사람인가와 무관하게 차갑고 잔혹하다. 모세의 신은 자신들이 신과 계약을 맺은 유일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젖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타적인 민족 신이다. 예수는 신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누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며 우리와 대화하려 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모세의 신이 행여 화를 낼까 두려워 엎드려 눈치를 살펴야 하는 권위적인 아버지라면 예수의 신은 마주보며 대화하고 위로받고 의지할 수 있는 엄마다. 예수를 통해 신은 비로소 인류 보편의 신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가 종교체제를 갖추고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말하자면 예수의 정신을 잃어가면서 기독교의 신은 서서히 모세의 신으로 회귀한다. 특히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의 신은 대개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자와 부자의 신으로 군림해왔다. ‘이스라엘 민족’이 차지하던 자리를 ‘기독교 체제’가 대신했을 뿐.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수많은 불의와 참혹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부시의 신, 이명박의 신의 이름으로.
대체 신은 어떤 존재인가? 동학을 비롯한 한국의 민간 사상과 종교에서 신관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신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부에서 절대적인 힘으로 우리를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존재한다. 신을 섬긴다는 건 지금 나를 뒤덮어버린 이런저런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 내고 본디의 나로, 신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은 곧 신의 모습이다. 신은 내 안에 존재하듯 다른 모든 ‘내 안’에도 존재한다. 신을 섬긴다는 건 곧 이웃을 내 몸처럼 섬기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그대로.
그런 신관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오면서 모조리 미신으로 치부되고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종교가 진정 종교적인 것들을 말살하는 기막힌 상황은 서양세계와 그 정신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이후 매우 일반적인 상황이 되었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종교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 대해 정당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진정 종교적인 것들을 말살하는 종교에 대한 반감은 당연하지만, 그런 반감이 진정 종교적인 것에 대한 무작정한 부정으로 비약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선 안 된다.
그러나 많이 배우고 젠 체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거나, 심지어 그런 어리석음을 부추겨 세속적 명성을 얻고 책을 팔기까지 한다. 이 책이 “디치킨스”로 한데 묶어 비판하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그 가장 ‘저명한’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은 종교가 뭔지 제대로 모른다는 점에서 그들이 비판해마지 않는 사람들, 즉 진정 종교적인 것들을 말살하는 사람들과 같다. 테리 이클턴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통찰과 유머가 넘치는 필치로 그들의 무지와 오만을 차근차근 폭로한다.
이글턴은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애초 의도하지 않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좌우분별이 없는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과 한국이다. 두 나라에선 극우 성격이 짙은 보수주의가 우파, 자유주의 우파가 좌파라 불린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의 지배계층과 교육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우분별이 없으니 좌파의 존립이 어렵고 좌파의 힘이 적으니 좌파가 맡아야 할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은 더욱 공공연하게 무시된다. 이 책은 좌가 뭐고 우가 뭔지, 왜 오래 전에 폐기된 것으로 알려진 좌파적 상상력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 또렷하고 깊이 있는 식견을 제공한다.
이글턴은 잘 알려진 사회주의자인데 사회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역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일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핵심 메시지는 상당 부분 겹쳐진다. 기독교 신앙은 ‘사회주의 이상’의 것이지 ‘사회주의에조차 못 미치는’ 어떤 게 아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눈을 환히 밝혀주는 책이다.


2010/07/19 18:05 2010/07/19 18:05
2010/07/1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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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강연장에 도착해보니 탁자 위에 내 글을 복사한 종이가 한 장 씩 놓여 있었다. 이채로운 풍경이라 잠시 멈칫 하는데 지회장 교사가 말했다. “선생님 그거 뒤집어 보세요.”  뒷면엔 그가 근무하는 고등학교의 아이들이 글을 읽은 소감들이 적혀 있다. 반마다 다니며 아이들에게 읽히고 소감을 받았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교사에게 부탁하여 모두 가지고 왔다.

2010/07/17 22:04 2010/07/17 22:04
2010/07/16 12:55

자유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다름'에 대한 포용력이다. 자유주의는 심지어 자신의 사회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를 적대하고 넘어서려는 사회사상인 사회주의마저 포용한다. 의아하게 들릴수도 있겠지만,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적 상상력의 기반이다. 한국의 반공극우 파시즘시절처럼 자유주의가 없는 사회에는 사회주의적 상상력은 존재하기 어렵다. 씨도 안 남기고 모조리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즉 한국 사회에 자유주의가 번성하기 시작한 이후, 대중적 장악력을 잃은 반공극우 세력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말살하는 건 누구인가? 바로 포용력을 모르는 자유주의자들, 배타적 자유주의자들이다. 사회주의적 상상력이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짓’이며 ‘80년 운동권의 화석’이며 ‘계급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한 때 사회주의자들이었기에 그들은 주장은 대중들에게 조갑제 같은 고전적 반공주의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설득력을 갖는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사회주의적 상상력에 대한 ‘시민 일반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를테면 ‘양극화가 문제’라는 말은 누구나 하면서 ‘계급’이라는 말은 ‘철지난 이야기’라 반응하는 우스꽝스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양극화’라는 말은 ‘계급적 격차가 심해진다’는 말이다)
이젠 그들 덕에 더 이상 굳은 얼굴로 빨갱이를 때려잡지 않아도 빨갱이들은 자연스럽게 대중들에게서 고립되고 고사해간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이나 모순 따위 말들은 부인되진 않지만 현실성 없는 말들도 치부되고 돈을 행복의 척도로 아는 돈귀신 들린 부모와 교사들에 의해 아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워지며, 그 모든 변화의 귀결로 사회는 좀더 온전한 자본의 세상으로 변해간다. 우리가 지난 10여년 동안 목도한 그대로.
배타적 자유주의자들은 민주당이나 참여당 같은 이른바 자유주의 정당과 그 언저리에 넘쳐난다. 배타적 자유주의자들은 반공극우 세력과 적대적이지만(둘은 정권을 놓고, 혹은 KBS나 MBC를 누가 장악하는가를 놓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 ‘자유 시장을 수호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말살’한다는 점에서 같다. 말하자면 배타적 자유주의자들은 반공극우세력의 충실한 사회적 계승자들, 우리 시대의 반공주의자들이다.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진보정당과 그 언저리에도 배타적 자유주의자들이 출몰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좌파연하는 자유주의자’라 표현한 바 있는데, 사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말하든 좌파라 말하든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주목하는 건 그들의 '다름'에 대한 배타성이다. 자신보다 왼쪽의 사회적 상상력을 모조리 “닭짓”(진중권의 표현)이라 매도하는 그들의 배타성,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반공주의 말이다.

2010/07/16 12:55 2010/07/16 12:55
2010/07/16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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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부산국제어린이영화제 어린이영화캠프에 공부방 어린이들을 초대합니다.
자세한 안내 보기.


2010/07/16 02:02 2010/07/16 02:02
2010/07/14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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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문과 보영의 딸, 다솔이. 아기 땐 참 과묵했는데 이젠 온갖 표정 연기에 ‘공옥진 춤’까지 구사하는 세 살짜리 아가씨가 되었다. 밥상에 앉아선 야채부터 집어 먹고, 제 아빠 품에 안겨 그네를 타다 그네 끈이 풀려 함께 떨어지자 세상에, 그러더라. “아빠 괜찮아? 아빠 괜찮아?” 머리는 외할아버지 작품.


2010/07/14 07:45 2010/07/14 07:45
2010/07/1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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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문수수님 분향소.
쓸쓸하더라..
시내 계신 분들 잠시 들러보시길..

2010/07/12 10:45 2010/07/12 10:45
2010/07/11 10:15
예수식 사회주의자.. 퍼커셔니스트.. 자전거라이더.. 칼럼니스트.. 고래가그랬어 발행인.. 시장의 자유를 반대하며 개인의 자유를 옹호합니다..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단호합니다..

트위터 프로필을 만들어 보았다. "예수식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 넣었는데 나를 잘 표현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뒤의 세 문장은 그대로 내 세계관이자 실천관이다. '전 모터바이크 라이더'와 '고릴라 아빠'를 넣을까 하다가 일단 뺐는데 종종 수정 보완할 생각이니 일단 이 정도로. '고릴라 아빠'는 단과 건이 어릴 때 나에게 붙인 별명인데 그들이 가장 좋아하던 '괴물 놀이'(내가 화난 괴물이 되어 두 팔을 벌리고 으아~ 하며 둘을 좇고 둘은 비명을 지르며 이방저방으로 책상 밑 장롱 속으로 숨고 하던)에서 유래한 것. 이제사 밝히자면, 아이들만 재미있어 한 게 아니라 나도 꽤 그 놀이를 즐겼다. 사로잡힌 김건의 머리를 무는 시늉을 하다 놀이에 감정이입된 내 이빨에 의해 머리통에 살짝 자국이 나서 그들의 엄마가  "당신 독자들은 이런 줄 정말 모를 거야" 혀를 끌끌 차며 웃은 일도 있었고 아래층에서 항의받은 건 부지기수.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항의하는 사람도 아이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아니라 아빠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떠들게 하는 소리였으니 심경이 좀 복잡했겠구나 싶다.


2010/07/11 10:15 2010/07/11 10:15
2010/07/11 03:30

예정보다 좀 앞당겨 트위터 재개.
천천히 가보기로..

2010/07/11 03:30 2010/07/11 03:30
2010/07/11 01:36
아르코대극장에 최정우가 라이브로 음악을 맡은 무용공연을 보러갔다. 작곡은 좋았고 맑고 몽환적인 기타도 좋았다. 퍼커션은 섬세했는데 베이스와 스네어 드럼 음색이 다른 악기들과 조화롭지 않아서 아쉬웠다. 베이스는 어쿠스틱을 썼어야 했고 스네어는 잔향이 남도록 좀더 카랑카랑하게 튜닝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마치고 그 이야기를 했더니 웃으며 내일 공연에서 반영해보겠단다. 반영하든 못하든 그런 의견을 웃으며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2010/07/11 01:36 2010/07/11 01:36
2010/07/10 16:49

의도적인 오독의 결과 혹은 그 악영향이겠지만, 근래 자유주의에 관련한 내 의견이 자유주의자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자유주의자에 대한 적대감을 갖긴커녕 오히려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를 경직된 좌파보다 더 좋아한다. 내 주변만 해도 좌파보다 자유주의자가 훨씬 더 많다.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유주의자이되 좌파를 그리고 좌파의 필요를 존중할 줄 아는, 양식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주의자가 좋다. 나는 다만 좌파를 존중할 줄 모르는 오만한 자유주의자를 좋아하지 않으며(좌파인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를 굳이 존중할 이유가 있는가) 좌파연하는 자유주의자는 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2010/07/10 16:49 2010/07/10 16:49
2010/07/10 16:28
어쩐지 가고싶더라니. ㅎ

법정 특강.
법정 특강 전문.

2010/07/10 16:28 2010/07/10 16:28
2010/07/10 15:54

진중권 씨가 씨네21인가에다 또 ‘의견’이 아니라 ‘성질’을 드러내는 글을 쓴 모양이다. 나름 평화로운 주말을 위해 아직 읽진 않았지만 링크되어 흘러 다니는 글의 토막들을 보니 역시 그 꼴이다. 진보신당 게시판에다 그런 걸 적는 거야 꼴이 사납긴 해도 못본 체 넘어갈 수 있지만 멀쩡한 매체의 지면을 그런 식으로 사용해서야 되겠나. 진중권 씨는 늘 논쟁을 싸움으로 만들어 대응할 의욕을 잃게 만든다. 알다시피, 토론과 논쟁은 지식인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지식인의 논쟁은 사적인 싸움이나 동네 양아치들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좌우 없이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양식이 있다. 지식인의 논쟁은 여러 사회성원들을 대변하여 사회적 의견을 교환하고 그 성과를 다시 사회성원들에게 제공하는 매우 공적인 차원의 일이다. 사적인 싸움이나 동네 양아치들이 해도 ‘치사한 인간’ 소리를 듣는 ‘인신공격’과 ‘사실관계 뒤바꾸어 선동하기’를 지식인이라는 자가 주요한 논쟁 기술로 사용해버리면 이건 큰 문제다. 물론 그런 기술이 극우 꼴통들에게 사용될 때는 적어도 우리끼린 양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건 사회적 의견을 교환하는 논쟁이 아니라 ‘이미 그 꼴통들을 반대하고 경멸하는 사람들끼리의 카타르시스’(요 몇년 새 진중권의 ‘좌파활동’의 거의 전부이기도 한)이니 말이다. 그러나 청년들의 민주주의 의식은 날로 높아 가는데 오히려 진보정치의 영향력은 날로 위축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신문에 기고한 의견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다. 해서, 이번엔 충분한 대응을 할 생각이다. 아마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할  것 같다. 진중권 씨의 의견을 경청하고 내 의견을 내는 일, 그리고 끊임없이 논쟁을 싸움으로 만드는 그의 습성을 다스리는 일.


2010/07/10 15:54 2010/07/10 15:54
2010/07/09 14:31
후배(그 일을 내게 알려준)가 이번 글이 트윗 세계에서 반향이 크더라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걸 특별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애들이 얼마나 많이 죽는데..” “넌 기자니까 워낙 별의별 일을 다 봐서 그렇지. 물정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 “그래도 그렇지..” 그의 말마따나 트윗 세계에서 꽤 많은 반향이 있었고, 보론 삼아 몇 자 적어본다.
현재 한국의 자살율이 OECD 1위라는 건 다 알 것이다. 한국의 자살율은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 통계청 통계가 아닌 경찰청 통계는 그보다 훨씬 높아서 경찰청 통계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이 OECD 자살율 1위가 된 건 이미 98년이다. 한국사회가 이른바 본격적인 신자유주의화를 시작했다는 그해다. 그리고 한국에선 자살이 사고사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감안한다면 한국의 자살율은 가히 독보적인 1위인 셈이다. 가슴 아픈 일은 자살이 현재 15~24세 청소년 사망원인 가운데 1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특히 아이들의 자살은 주요 매체에 거의 보도가 되지 않는다. 사연이 없어서 기사거리가 안 되어서가 아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끊는데 사연이 없겠는가. 보도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른바 ‘베르테르 효과’, 즉 모방 자살 현상 때문이다. 정부에서도 '자살보도 권고기준'이라는 걸 만들어 언론사에 보도 자제를 요구하고 있고 언론사 스스로도 무절제한 보도가 반사회적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는 편이다. 그런데 정작 베르테르 효과가 가장 높은 유명 연예인 자살은 빠짐없이 보도가 되는 이유는 그게 그런 부정성을 불식할 만한 기사거리라 여겨지고, 앞서 말한 권고 기준의 '유명인'에 대한 내용이 애매한 것도 그 원인으로 지적된다. 아주 간혹 아이들의 자살이 보도된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엔 “외고생 또 투신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명문대 진학률이 상위권인 D외고 학생 2명이 한 달 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라는 꽤 구체적인 기사가 실린 적도 있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으며 그게 개인적인 이유를 넘어 모든 아이들이 겪고 있는 지옥 같은 현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다. “이제 됐어?”는 한 아이가 제 엄마에게 남긴 말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우리에게 남긴 말이다.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잘살게 하겠다’는 이 어리석은 대열에 아이를 참여시키고 있는 한 그 아이는 바로 내 아이이며 그 엄마는 바로 나다. 내 아이는 아직 살아있다고 혹은 나는 아직 아이가 없다고 해서 남의 일로 생각하는 건 지성적이지 않다. 그래서 나는 후배가 말한 ‘특별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보다는 ‘연예 가십기사’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 마음에 걸린다.
다른 사람이 겪은 아픈 일에 대해 ‘정상 범주’ 안에서 반응할 줄 아는 것은 우리가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2010/07/09 14:31 2010/07/09 14:31
2010/07/08 13:08

오늘 저녁 광주에서 강연이 있는데 전체 제목이 사교육 탈출 프로젝트다. 지금 보니 김종철 선생도 하셨고.. 강사 일곱이 갈래가 있어 보인다.  김종철, 김상봉, 김규항이 한 갈래를 이루고..

2010/07/08 13:08 2010/07/08 13:08
2010/07/07 15:18

교육문제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정현 신부님이 그랬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중고생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가 갈수록 어렵더라고요. 걔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못 알아듣겠고 걔들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즘 아이들 어릴 때부터 생활하는 걸 보면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부들은 농사는 정직한 거라고 말한다. 땀 흘려 수고한 만큼 결실을 얻는다는 뜻이다. 시기에 맞추어 꼭 해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라도 빠트리면 어김없이 농사를 망치게 된다. 교육이란 게 농사와 같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에, 열 살 무렵에, 열다섯 무렵에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걸 하나라도 못하고 넘어가면 그 상흔은 일생에 거쳐 남는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연령대 아이들이 꼭 해야 할 일은 ‘노는 것’이다. 제대로 놀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정신적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 된다. 대개의 아이들이 어머니가 저녁 차려놓고 ‘잡으러 다닐 때까지’ 놀던 시절에 자란 내 또래에도 어떤 사정 때문에 제대로 놀지 못한 사람은 겉보기엔 멀쩡해도 인성이나 대인 관계에 반드시 문제가 있다. 특히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면서 스스로는 모르는 사람을 보면 십중팔구 어릴 때 제대로 못 논 사람이다.
그런데 2010년의 한국의 초등학생 가운데 제대로 노는 아이가 있던가? 어지간한 집은 저녁까지 교육 좀 시킨다는 집은 밤늦게까지 학원을 돈다. 세계화가 어떻고 국제경쟁력이 어떻고 하지만 거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이 따위로 생활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뿐이다. 도무지 사회에 미래가 안 보인다 탄식들 하지만 한국엔 분명한 미래가 하나 있다. 이대로라면, 10년 후 한국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든 청년들로 가득 찬다는 것이다.
지난번 얼핏 적었듯 내가 ‘대학을 꼭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내 딸과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한 이유도 그래서다. 두 아이는 공부를 곧잘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일류대학에 갈 수 있는가 없는가와는 별개로 그에 이르는 20여 년이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준다는 사실을 고려했다. 요컨대 나는 그들이 유리한 학벌과 경제적 안락을 가진 로봇으로 자랄 가능성보다는, 소박하게 살더라도 정상적인 인성과 감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해가 다르게 부자의 아이들이 외고와 일류대를 채워가고 있다. 하긴 영어학습지 하는 아이와 방학이면 두어 달씩 미국에서 살다오는 아이가 경쟁을 하고 있다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앞서가는 아이들도 역시 사람인지라 대가를 치른다. 근래 서울의 부자 동네엔 잘 꾸며진 아동심리상담센터와 소아정신과가 부쩍 눈에 띈다. 아이들의 정신 건강과 성적이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생각이 그곳 엄마들에게 일반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이가 심리상담을 하고 정신치료를 받는 일은 학원을 다니고 과외를 받는 일과 같다.
얼마 전 한 외고생이 제 엄마에게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투신했다. 유서는 단 네 글자였다. “이제 됐어?” 엄마가 요구하던 성적에 도달한 직후였다. 그 아이는 투신하는 순간까지 다른 부모들이 부러워하는 아이였고 투신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런 아이였을 것이다.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이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 아이들은 끝없이 죽어 가는데 부모들은 단지 아이를 좀 더 잘 살게 하려 애를 쓸 뿐이라 한다. 대체 아이들이 얼마나 더 죽어야 우리는 정신을 차릴까? (한겨레)


2010/07/07 15:18 2010/07/07 15:18
2010/07/0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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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부엌. 점심 준비하는 외계(뒤)와 광현.

2010/07/05 12:09 2010/07/05 12:09
2010/07/0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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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브레스의 '배드 에듀케이션'. 아이가 쇠사슬에 묶인 채 핵폐기물, 독극물, 도화선에 불붙은 폭탄 등이 쌓인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다. 구입하고 보니 외계도 구입했단다. 외계는 웃으며 ‘날짜를 피해가며 입을까요’고 하고 나는 ‘어때서, 고래 유니폼 삼으면 되지’ 하고. 하여튼 이런 개념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흐뭇한 일.

2010/07/04 14:15 2010/07/04 14:15
2010/07/02 14:41
최정우는 미학을 전공한 연구자이자 번역가, 평론가, 무대음악 작곡가, 록 기타리스트 등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다. 작년에 어느 문학지 편집진과 만난 자리에서 처음 만났는데 비슷한 데도 많고 잘 통해서, 금세 뭔가 재미있는 걸 함께 해보기로 작당이 되었다. 두 가지를 진행하고 있다. 하나는 2인조 프로젝트 밴드, 또 하나는 ‘문화 지형도’를 주제로 한 공동 저작. 그의 말로는 꽤 근사한 게 나올 것 같다는데.. 하여튼 타고난 한량이면서 본의 아니게 ‘비장한 지사’로 살아가는 나로선 조금이라도 본색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길 기대. ㅎ

2010/07/02 14:41 2010/07/02 14:41
2010/07/02 14:14

혼자 도덕군자인 체 해! 지는 뭘 그리 잘했는데! 따위 말은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적 갈등에서도 삼가는 말인데 명색이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공적 논쟁에서 그런 말을 사용한다는 건 피차 너무나 민망한 일이다. 긴 말 할 것 없이, 그러지 말길.

2010/07/02 14:14 2010/07/02 14:14
2010/07/02 12:16

내가 자유주의자로 사는 걸 나쁘다고 했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어 거듭 설명드린다. 강준만이나 고종석 같은 분들을 보더라도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로 살아가는 건 얼마나 근사한가. 내가 비판하는 건 자유주의자로 사는 게 아니라 자유주의자로 살면서 좌파연하는 것, 자유주의적 활동을 좌파 활동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건 사회에 해를 준다.
비유해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상점을 하는 걸 누가 탓하겠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만드는 것도 그들의 일이다. 그러나 상점을 교회라 주장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교회에 그리고 사회에 해를 주게 된다. 지금 한국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가. 교회를 가장한 상점들 때문에 제대로 된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큰 욕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교회와 기독교 신앙이 사회에 끼칠 여러 좋은 영향들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가.
80년대 한국의 좌파들은 90년대 들어 대거 자유주의자로 변신했다. 대형 시민운동,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정치권 등으로. 그들의 변신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스무 살 때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변신에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나는 좌파였지만 이제 양심적인 자유주의자로 살기로 했다’고 말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대부분 제 변신을 ‘새로운 진보’라 주장하고 ‘달라진 세상의 좌파 활동’인 양 행세했다. 그들의 주장은 그들을 ‘좌파’라 불러주는 극우세력(망막에 빨강 매직을 칠한 꼴통들)의 도움 아래 대중들에게 거의 전적으로 먹혀들었다. 그들이 좌파 노릇을 하니 진짜 좌파는 그 정체성 자체가 부인되었고, 그 덕에 좌파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았는가. ‘비판적 지지’니 ‘사표론’이니 따위로 민노당과 진보신당도 얼마나 억울한 꼴을 많이 당했는가.
그런데 이제라도 그걸 사회적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을 그 지경에 몰아넣은 자유주의 세력과 구분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려 애를 쓰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또 하나, 내가 ‘이명박과 싸우지 말고 자유주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했다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내 이야기를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인지 부러 뒤틀어 트집을 잡는 것인지 알 순 없지만, 한 번 더 말하면.. 나는 이명박과의 싸움은 자유주의자에겐 ‘목적’이지만 좌파에겐 ‘기본’이라는 것이다. 이명박과 싸움만 하는 건 자유주의자고 이명박 싸움을 기본으로 자유주의자와 싸우는 게 좌파라는 것이다. 좌파가 뭔가? 자본주의와 싸우는 사람 아닌가?
따지고 보면 아무 특별할 게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다. 자유주의는 나쁘고 좌파는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는 자유주의자라 말하고 좌파는 좌파라 말하자, 그걸 어기면 사회에 큰 해를 준다, 그런 이야기이니. 우리는 아무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가 매우 특별하게 받아들여지는 고단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2010/07/02 12:16 2010/07/02 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