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09/04/29 삐끗
  2. 2009/04/29 공부도 적성이다
  3. 2009/04/28 만사를 제쳐두고
  4. 2009/04/28 인터뷰이
  5. 2009/04/26 다솔이네
  6. 2009/04/24 선물
  7. 2009/04/24 만납니다
  8. 2009/04/23 나눔
  9. 2009/04/23 진정 현실적이어야
  10. 2009/04/22 나눔의 얼굴
  11. 2009/04/22 정의, 포퓰리즘..
  12. 2009/04/21 소박한 행동
  13. 2009/04/21 좋은 건
  14. 2009/04/20 프로필
  15. 2009/04/19 노동자를 위한 냉수마찰
  16. 2009/04/19 감회
  17. 2009/04/17 한 걸음이라도
  18. 2009/04/16 끝까지
  19. 2009/04/16 예수전
  20. 2009/04/16 잘 놀아야
2009/04/29 17:49
어제 오전에 허리를 삐끗했는데 저녁에 돌베개 식구들과 예수전 뒤풀이를 강행했더니 도져버렸다. 오전 내내 꿈쩍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 세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일어나 동네 한의원에 가서 침 맞고 다시 누워있다. 내일 예수전 강의는 휴강하기로 했는데 주말에 지리산 친구들과 하기로 한 ‘비공식’ 출판기념회가 문제. 그때까진 낫겠지. 그나저나 오늘 집회는 꼭 나가봐야 하는데.. 그래야 사람인데..
2009/04/29 17:49 2009/04/29 17:49
2009/04/29 11:36
이상한 건 한국의 부모들은 공부도 적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 여기에서 공부는 물론 국수사과니 영어니 하는 학과공부를 말합니다. 우리 애는 운동은 영 소질이 없어라는 말은 해도 공부는 영 소질이 없어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죠. 그래서 다들 하는 말이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요, 입니다. 아이가 공부에 소질이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공부가 아닌 다른 데 소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부에 소질이 없다고 해서 2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2류 인생을 만드는 건 바로 부모들입니다. 공부가 적성이 아닌 아이를 억지로 족쳐서 이도저도 아닌 스무살 짜리를 만들어놓고야 마는 우리들 말입니다. (강의에서)
2009/04/29 11:36 2009/04/29 11:36
2009/04/28 15:23
용산참사 100일 범국민 추모제

4월 29일 저녁 7시
시청앞 광장
만사를 제쳐두고
나오시길..
2009/04/28 15:23 2009/04/28 15:23
2009/04/28 15:19
인터뷰이 추천 받습니다.
2009/04/28 15:19 2009/04/28 15:19
2009/04/26 00:07
해문과 보영, 그리고 그들의 딸 다솔이가 왔었다. 해문과 새벽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상하는 일들을 꺼내 의견을 주고받고,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모조리 이명박 탓으로 돌리는 진보적인 부모들 이야기에선 둘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가며. 다솔이는 낳고 처음 봤을 때도 “이 녀석은 수련을 좀 하고 나온 것 같은데?” 농담했었는데, 역시 좀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덤덤해 보이지만 매우 예민한 감성이 느껴진달까. 하긴 그 어미 아비를 보면 왜 안 그렇겠는가, 싶다.

2009/04/26 00:07 2009/04/26 00:07
2009/04/24 14:53
장필순과 함춘호가 CCM 앨범을 냈다. “그는 항상 내 안에 있네”. 타이틀은 전형적인 CCM 앨범의 느낌이지만 내용은 많이 다르다. 진정 종교적인 건 더 이상 종교적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차분히 그리고 기품있게 보여준다. 아픈 후배에게 선물하기로..

2009/04/24 14:53 2009/04/24 14:53
2009/04/24 14:20

5월 19일 저녁
합정동 벼레별씨 카페에서
독자분들과 만납니다.

도란도란
위로가 오가는 시간이길..

신청은 여기에서

2009/04/24 14:20 2009/04/24 14:20
2009/04/23 16:27

“나눔은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나눔은.. 내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행동입니다.”

2009/04/23 16:27 2009/04/23 16:27
2009/04/23 09:18
어제 저녁 민노총 서울지역본부에서 학부모 모임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강의했다. 이야기를 좀 오래했다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두 시간이 넘게 혼자 떠들었다. 동행한 외계에게 “내가 미쳤나봐” 했다. “부모들이 현실이 주는 불안에 짓눌려서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잃은 것 같다, 현실 현실 하지만 믿기힘들 만큼 비현실적이고 맹목적이다, 매 맞는 여성이 남편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면서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는 모습이랄까, 부모들이 좀더 현명해져야 진정 현실적이어야 한다.” 뒤풀이 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한 말.
2009/04/23 09:18 2009/04/23 09:18
2009/04/22 17:02

그런데 이미 저녁때가 되자 그분의 제자들이 다가와서 아뢰었다. "이곳은 외지고 이미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해산시켜, 주변 농가와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제각기 사게 하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여 "여러분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오" 하시니 제자들은 그분께 "저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을 사다가 그들에게 먹도록 주라는 말씀입니까?" 했다. 그러자 그분은 그들에게 "여러분이 빵을 몇 개나 갖고 있습니까? 가서 보시오" 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알아보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했다. 그러자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 푸른 풀(밭)에 패를 만들어 자리잡게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조를 짜서 자리잡았다. 그러자 그분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양하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또한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셨다. 42 그리하여 모두 먹고 배가 불렀다. 43 그리고 빵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으며 남은 물고기도 모았다. 44 그런데 먹은 이들은 장정만 오천 명이었다.(마가 6:35~44)

‘오병이어’의 이적. 예수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명(“장정만 오천명”이라 적혀 있다)을 배불리 먹였다는 복음서의 유명한 에피소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에피소드가 과학적 사실인가를 두고 부질없는 논란을 벌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에피소드에서 과학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먹어도 먹어도 음식이 솟아난 걸까? 아니면 손톱만큼씩 뜯어 나누어 먹은 걸까? 중요한 건, 아무리 모자라는 것이라도 함께 나눌 때 모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이른바 ‘나눔’에 대한 우리의 알량하고 가식적인 생각을 부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한다. 그 생각은 다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환원된다. 많은 부모들은 제 아이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욕망을 ‘부자가 되어야 불쌍한 사람을 많이 도울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적선이나 자선이 금세 굶어 죽을 사람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하지만, 연민에만 그칠 때 나눔은 사람을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쇼에 머물게 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쇼에 참여함으로써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에 자신의 안온한 삶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불편을 씻어낸다. 그리고 부자들은 재 재산의 극히 일부를 내놓고 온 세상의 칭송을 받으며 세금을 감면받는다.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불의한 사회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더해질 때 비로소 그 최소한의 꼴을 갖춘다. 나눔은 어떤 사람은 쉬엄쉬엄 일하면서도 천상의 안락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종일 뼈 빠지게 일하고도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눔은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현실에 닿아있다.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나눔은 단지 공정한 사회에 머물지 않는다. 나눔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노력이자 행동이다. 나눔은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이며, 그래서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할 때 모두 함께 풍요롭고 만족할 수 있음을 우리 삶의 이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나눔은 세상의 그 어떤 변혁운동보다 더 근본주의적이며 급진적인 운동이다. 오병이어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바로 그 사실을 장엄한 풍경으로 보여준다.
당신에게 나눔의 얼굴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나눔을 설파하는 사람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저리는 굶고 병든 아이의 얼굴을 실은 홍보물을 당신에게 내밀며 그 아이가 당신에게 꼬박꼬박 감사의 엽서를 보낼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불쌍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의 역할 분담은 바뀌지 않은 것임을 보장하는 하고많은 나눔 단체들의 얼굴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기만 한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그 얼굴에 나눔의 또 다른 얼굴, 혁명보다 더 사납고 성난 얼굴을 보태는 게 좋겠다. (한겨레)
 

2009/04/22 17:02 2009/04/22 17:02
2009/04/22 07:15

정의의 인터넷식 단순화, 그리고
난무하는 포퓰리즘이 사람들을 더욱 미궁으로
몰아넣는다.

한정호, PD수첩은 시사고발이 아니라..

2009/04/22 07:15 2009/04/22 07:15
2009/04/21 22:40

이번 일은 처음부터 목수정이 아니라 정명훈에게 집중되었어야 했다. 이명박도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조갑제 같은 파시스트나 할 소리를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예술가’가 했으니 난리가 나도 크게 나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떻게 된 놈의 게 새벽 한시에 약속도 없이 갔다느니 처음부터 거절할 줄 알고 갔다드니 저명한 예술가에게 무례했다느니 따위 모자란 소리들이 본질을 압도해버렸다. 극우파들이 레디앙 게시판에서 인해전술을 벌인 게 아니라면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원래 글보다는 해명 글이 더 문제라고?  해명 글은 목수정이 아니라 정명훈이 썼어야 했다. 해명 글이 문제가 아니라, 해명 글을 쓸 이유가 없는 사람이 해명 글을 쓰게 된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상황은 전적으로 좌파마초들과 얼치기 좌파 논평가들이 만든 것인가?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행동했어도 그렇게 되었을까? 다들 ‘목수정이 맞는 말 했는데..’ ‘이상하네 좌파들이 왜저래..’ 중얼거리며 혀나 끌끌 차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경이 된 것이다. 때론 방관처럼 결정적인 공범도 없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행동해야 한다. 당장 인터넷 논객으로 변신하거나 밤의 주둥아리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또 이런 일을 봤을 때 혀만 끌끌 차고 있지 말고 이치에 맞는 댓글 하나씩이라도 달자는 말이다. 별게 아닌듯 싶지만, 그런 소박한 행동이 모여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내가 뒤늦게 끼어든 이유를 궁금해들 하는데, 싱겁게 들리겠지만, 몰랐다.^^ 언젠가 얼핏 말한 이유로 이따금씩 아예 시사를 끊고 산다. 중요한 건 알고난 후다.)

2009/04/21 22:40 2009/04/21 22:40
2009/04/21 10:08
진짜 좋은 건, 좋으면서도 좋은 걸 굳이 의식하지 않을 땐 마치 없는 것처럼 편안한 것이 아닐까. 내 경우 음악으로 말하면, 말러의 아다지오들, 산울림의 초기곡들, 김두수, 그리고..
2009/04/21 10:08 2009/04/21 10:08
2009/04/20 10:53

예수전에 실린 프로필. 전에 것보다 양도 늘고 좀더 친절해졌다. 프로필을 읽다보면 나와 내 글에 대한 묘사에서 영 멋쩍긴 한데, 책에 실리기 전에 내 검토를 거쳤으니 멋쩍어하는 것 또한 멋쩍은 일이다. 이번 프로필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은 내가 어떠어떠한 사람들 편에서만 글을 쓴다, 는 부분. 편향만이 나를 안도케 한다.

1962년생. 전라도에서 태어나 직업군인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떠돌며 지역갈등이나 계급구조, 대중의 습속 따위 사회 문제에 대해 많은 정서적 자극을 받았다. 1980년대 초 한신대를 다니며 나름의 사회의식을 갖게 되었고, 예수를 만났다. 1990년대 초까지 서울영상집단과 민중문화운동연합에서 활동했다. 1998년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소재와 얽히고설킨 현실의 본질을 꿰뚫는 직관, 그리고 비판과 성찰이 공존하는 그의 글은 꾸준히 독자들의 공감을 사 왔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은 글의 내용과 별개로 읽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그의 글이 비타협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가 정직하게 일하면서도 인간적 위엄을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 편에서만 글을 쓰기 때문이다. 2000년 홍세화 진중권들과 함께 극우 집단주의와 싸우는 사회문화 비평지 '아웃사이더'를 만들어 편집주간을 지냈고, 2003년엔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워지는 한국 아이들을 응원하는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만들어 발행인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B급 좌파」와「나는 왜 불온한가」등이 있다. 아이들과 이야기하기, 자전거, 타악기 연주를 좋아한다. 교리속에 화석화된 예수를 되살려내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끌어내고자 하는 이 책은 그가 오래전부터 가장 힘써 고민해 온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책이 수많은 '나의 예수전'으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2009/04/20 10:53 2009/04/20 10:53
2009/04/19 02:58
얼마 전 트랙백을 따라갔다가 발견한 글.
고등학교 2학년이란다.
좋은 교사를 만난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노동자를 위한 냉수마찰
2009/04/19 02:58 2009/04/19 02:58
2009/04/19 00:02
오래 공을 들인 책이니 감회가 있을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하다.
어느덧 책과 내가 하나가 되어버린 걸까?.. ㅎ
2009/04/19 00:02 2009/04/19 00:02
2009/04/17 16:25

한 독자가 “여전히 개혁의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글을 읽히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돼먹지 못한 소리'라는 글이다. 그래 이런 걸 썼었지, 하며 읽어 보니 그의 말대로 도움이 될 것도 같다. 링크하니 읽어들 보시길. 아울러 관련한 글 몇 개도 눈에 들어오는대로 링크하니 역시 읽어들 보시길. 아울러 이 블로그의 검색창에서 ‘노무현’ ‘유시민’ '개혁' 등을 치면 관련한 꽤 많은 글을 읽을 수 있다. 글이 쓰인 시점과 현실에서 일어난 일의 시점을 비교해가며 읽는다면 오늘 사유의 가닥을 잡는 데 좀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젠 되풀이만 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한 걸음이라도..

'네 이념대로 찍어라'  '돼먹지 못한 소리'  '개혁이냐 개뼈냐'  '선택'  '숭고'  '미래'

2009/04/17 16:25 2009/04/17 16:25
2009/04/16 15:46
나는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제 말만 지껄이는 사람하고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토론의 기본을 넘어 사람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소싯적엔 그런 사람에겐 말을 멈추고 주먹을 날리기도 했지만(물론 남자일 경우 ㅎ), 나이를 먹고 이른바 지식인 노릇을 하고부터는 그럴 수도 없는지라 일절 대꾸를 안 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오래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0분토론에 나갔을 때 잠자코 앉아있기만 했던 것도 그래서였고, 그 시끄러웠던 ‘페미니즘 논쟁’ 때도 나는 내 의견만 내고 거의 가만 있었던 것도 그와 관련이 있고, 근래 일로 말하자면 지난번 디워 건도 마찬가지다. 오독(독해력이 부족해서든 고의적이든 상관없이)을 기반으로 한 의견엔 대꾸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내' 블로그에 종종 덕지덕지 걸린 그런 오물들이 불쾌해서 지워버리거나 막아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생각을 좀 바꾸려 한다. 좋든 싫든 적어도 한국의 인터넷 세상에서 그런 오독이 일반화되어버렸다는 것, 이번 목수정 씨 일에서 보듯 이젠 좌파 진영도 전혀 예외가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온몸을 점령한 암세포가 결국 뇌에까지 침투하는 형국이랄까. 어쩌겠는가, 한심스럽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개입할 수밖에. 시점은 목수정 씨 문제부터, 논의가 남아 있는 한 끝까지.

혹시 '목수정 씨 일'이 뭔지 여전히 모르는 분은 이것부터 보시길.
경악! 음악가 정명훈이 쏟아낸 말들

2009/04/16 15:46 2009/04/16 15:46
2009/04/16 03:3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고한 모든 분들께 감사..
2009/04/16 03:31 2009/04/16 03:31
2009/04/16 03:00
화요일 새벽에 출발 진주, 하동, 상주, 대구를 도는 1박 2일의 강의 투어를 마치고 방금 돌아왔다. 1박은 악양에서 했는데 밤새 친구들과 놀았다. 잠을 거의 못 잤고 1,500킬로미터를 운전했는데도 그다지 피곤하지 않은 걸 보면 사람은 역시 잘 놀아야 한다. 상윤이 그랬다. "우린 너무 놀 궁리만 하는 건가?" "자네들이 옳아. 다들 나중에 잘 놀아 보려고 아둥바둥 살다가 결국 한번도 제대로 못 놀아보고 인생을 마치는 걸." "형 말이 맞네."

2009/04/16 03:00 2009/04/16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