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08/11/30 굴밥
  2. 2008/11/29 휴.. (1)
  3. 2008/11/29 강의
  4. 2008/11/28 그릇
  5. 2008/11/27 설마 삼겹살
  6. 2008/11/27 무술감독
  7. 2008/11/25 문장의소리
  8. 2008/11/24 들을 귀가 있는 사람
  9. 2008/11/21 얼마나 행복해?
  10. 2008/11/20 촛불과 지식인들 2.5 - 꿈을 잃어버린 세상의 풍경
  11. 2008/11/19 128 x 185
  12. 2008/11/17 이랜드
  13. 2008/11/15 좌파의 주식 투자
  14. 2008/11/15 내 제목
  15. 2008/11/14 이런 게 좋다
  16. 2008/11/13 춤추는 글
  17. 2008/11/13 동병상련
  18. 2008/11/12 우리의 친절한 살인극, 루머
  19. 2008/11/11 누드 시위
  20. 2008/11/10 고래요, 고래!
2008/11/3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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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강의 후 전라도에서 넘어온 친구들과 시인 박남준 형 집에서 일박. 정겹고 왁자하게 놀다 새벽녘에야 잠들었는데 중간 중간에 나가본 지리산의 밤하늘은 별이 어찌나 많은지 서로 부딪힐 듯하더라. 느지막한 아침, 박남준 형이 만들어준 굴밥.

2008/11/30 12:42 2008/11/30 12:42
2008/11/29 11:29

좋든 싫든 나와 고래는 인과관계를 갖는다. 말하자면, 나 때문에 고래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지만 나 때문에 고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잡지의 발행인과 잡지가 이런 관계를 갖는 경우도 참 드물 것이다. 그래서 고래에게 가장 좋은 내 선택은 내가 이른바 '진보 개혁' 진영의 사람들에게 원만한 이미지를 갖는 것일 게다. 그러나 고래 창간 이후 내 활동이란 "개혁은 진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내내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왔다면 지난여름 촛불엔 앞뒤 볼 것 없이 나를 실었어야 했지만 역시 그렇지 못했다. 촛불에 대한 내 견해는 대중들의 이명박에 대한 분노는 전적으로 존중하되, 그 분노가 '이명박만 없으면'으로 해소되어버리는 반동적 흐름은 반대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두 견해가 서로 상충되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내린 내 선택은, 우리 안의 대운하, 어른들은 왜 그래 같은 우회적인 소수의견을 내고는, 남은 기간은 평범한 촛불의 일원으로 그 분노의 열기에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열기가 식고서야 촛불과 지식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내 의견을 내고 있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촛불기간엔 '왜 이 중요한 전선에 찬물을 끼얹느냐'는 반감을, 촛불의 열기가 식고나선 '촛불 땐 대체 뭘 했다고 잘난 척이냐'는 비아냥을 얻고 있다. 규항넷 방문자수가 절반으로 떨어지고 당연히 고래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감지되었다. 고래 동료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순 없다"라고 말했지만, 고래의 항해를 훼방했다는 자책감을 없애긴 어렵다. 
스무 살 이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안 만나고, 하고 싶지 않은 일 하지 않으며 낭인처럼 살아오다, 고래 발행인 노릇을 하고부터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나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면서 꽤나 애써왔는데, 그게 참 어쩔 수 없는 지점이 있다. 휴..

2008/11/29 11:29 2008/11/29 11:29
2008/11/29 01:58

12월 3일 오후 4시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내가 <노동자 자녀교육 대안은 없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는데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오시길.
영등포 민주노총 건물 9층. 02 2670 9222~3

2008/11/29 01:58 2008/11/29 01:58
2008/11/28 22:09

한겨레 칼럼을 쓰기로 했다. 씨네21은 6년을 쓰면서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한겨레와 한겨레21은 내 글의 내용을 못견뎌하는 데가 있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상관없이 쓰곤 했지만, 이젠 조금은 염두에 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음식들을 상에 차리더라도 각각의 음식을 어느 그릇에 놓는가는 다를 수 있으니..

2008/11/28 22:09 2008/11/28 22:09
2008/11/27 20:25

내려가면서 뒤풀이는 횐가요 묻는 외계에게 그럼 부산인데 회지 설마 삼겹살이겠어, 했는데 강의 후 따라 간 뒤풀이 장소는 삼겹살집이었다. 들어가면서 정승호 동지(부산민노총 교육부장)가 삼겹살 괜찮으시죠 하기에 웃음을 참으며 예 했다. 술잔이 오가고 분위기가 편안해질 무렵 오면서 했던 일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뒤집어진다. 결국 2차를 횟집으로 갔다. 주인이 진보신당 당원이라는 싸고 푸짐한 횟집이었다. 왁자한 노총각 노동자들에 이번에 고래주주가 된 강화정 형에 뒤풀이는 내내 편안하고 유쾌했다. 오늘 정동지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장난기가 생겨 답장 머리에 적었다. 삼겹살 잘 먹었습니다.

2008/11/27 20:25 2008/11/27 20:25
2008/11/2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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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KTX에 앉아 경향신문에 큼지막하게 실린 얼굴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어린이잡지 발행인이라는 놈이 무슨 무술감독처럼 생겼네..'
2008/11/27 08:39 2008/11/27 08:39
2008/11/25 20:28

김애란 작가가 진행하는 문학방송 '문장의소리'에 출연한 '소설가' 조대연. 다 좋은데.. 조중사는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얼굴이 왜 저럴까. 이렇게 말하면 사돈 남 말한다고 할 사람 많겠지만.^^  문장의소리 듣기.

2008/11/25 20:28 2008/11/25 20:28
2008/11/24 09:48
예수가 말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유식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지 그 말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 혹은 가슴으로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는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닙니다.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 말을 이해하고 느끼는 건 물론이려니와 삶에 새겨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들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습니다. 사람이 현명함을 얻지 못하고 진리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는 게 적고 공부가 적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래서입니다. 사람은 대개 마음의 귀, 마음의 눈을 닫고 살아갑니다. 예수가 말한 “들을 귀”란 마음의 귀, 진리의 방문을 기다리는 맑은 마음입니다. (강의에서)

2008/11/24 09:48 2008/11/24 09:48
2008/11/2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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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창간 5주년 설문조사를 다룬 경향신문 기사에 댓글들이 좀 달렸다. 인터넷 댓글을 거의 안보는 편이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달라보인다. 솔직하고 씁쓸하달까. '아이들 교육문제'는 단지 '아으들 교육문제'가 아니라 오늘 지배체제의 정수다. 이게 멀쩡한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바보로 만들어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우파는 물론 개혁파도, 심지어 좌파의 대부분까지 그렇다. 이 병을 고치는데 내 온힘을 다할 것이다. 자세한 설문조사 결과는 고래 60호에 실려있으나, 따로 자료가 필요한 분은 기꺼이 보내 드린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고민과 실천들에 널리 쓰이길 바란다.(02 333 4201 편집팀 장진아) 설문조사 작업에 전문가로 참여해 고생한 김용석, 박찬석, 안상평 형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2008/11/21 18:20 2008/11/21 18:20
2008/11/20 14:54

(지난 글에서 “다른 세상을 꿈꾸자”고 했으니 ‘다른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순서겠지만, 그에 앞서 우리가 왜 꿈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잠깐 이야기할까 한다. 그래서 ‘3’이 아니라 ‘2.5’다.)

우리는 꿈이라는 단어를 전혀 다른 두 가지 뜻으로 쓰곤 한다. 하나는 전혀 쓸모없는 망상의 뜻으로, 다른 하나는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뜻으로. 이 글에서 꿈은 전적으로 후자의 뜻이다.

사회적 꿈, 즉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사회적 태도를 이상주의라고 한다. 이상주의는 더 나은 세상을 지향하게 하며, 기존 현실을 비판하고 변혁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현실 속에 담겨 있는 다음 세상의 표징들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상주의는 사회진보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이상주의가 무작정 좋은 건 아니다. 지나친 이상주의는 현실적 조응력을 잃고 소수 지식인들의 관념놀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친 이상주의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사회,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생각을 중단한 사회, 모든 사람이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회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80년대의 한국사회가 지나친 이상주의의 시절이었다면, 90년대 이후는 반대로 이상주의가 빠르게 사라져가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8년에 이르러 한국은 이상주의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의 공세와 우경화의 바람으로 이상주의의 퇴조가 세계적인 흐름이라지만, 이렇게 이상주의가 무작정 혐오되는 사회는 찾아볼 수 없다.

혐오는 가히 히스테리에 가깝다. 이상주의는커녕 현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맥락을 밝히려는 태도조차 “80년대식 낡은 태도”, “비현실적 거대담론” 따위로 매도당하곤 한다. 대체 무슨 사연이 이런 삭막하고 어리석은 풍경을 만든 걸까?

80년대 초까지 절차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에 머물던 한국의 지식인과 청년들은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선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변혁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80년대 말 자신들이 동경해마지 않던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이 무너지는, 그것도 인민들에 의해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그들은 ‘내가 대체 뭘 한 걸까’하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사람이란 자기가 온 열정을 바쳐 한 일에 좌절할 때, 일이 그렇게 된 원인과 이유를 자신의 문제로부터 찬찬히 성찰하고 살피면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언제나 아주 적다. 결별한 연인이 결별의 원인을 상대에게서만 찾으려 하듯, 사람이란 문제의 원인을 자기 밖에서 찾으려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좌절의 상처는 그 사람의 정신 속에 옹이 박혀 남아 내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한국의 80년대에 변혁운동에 투신했던 지식인과 청년들이 그렇다. 그들이 자신의 미숙함과 관념성을 성찰하고 현실사회주의의 공과를 분석하며 사회진보의 전망을 다시 모색했다면 그들 자신에게나 한국 사회에나 얼마나 좋았겠냐만 그런 사람은 아주 적었다. 대개는 자기혐오에 젖어 80년대를 청산했다.

어떤 사람들은 도사의 얼굴을 하고 ‘세상이 변하려면 사회구조가 아니라 내가 변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론의 부족이 원인’이었다며 유럽의 최신 이론을 수입하는 데 열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대담론 위주의 운동이 문제’였다며 소액주주와 시청료 문제에 몰두하기도 하고, 또 어떤 뻔뻔한 사람들은 운동으로 얻은 이름을 팔아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에 전념하는 ‘시민’이 되었다.

살아가는 양태는 다양했지만 그들의 정신에 크게 남은 자기혐오의 흉터는 같았다. 그리고 그 흉터는 그들로 하여금 한 가지 사회적 태도를 공유하게 했다. 바로 좌파적 상상력에 대한 혐오,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다.

어떤 사람들은 80년대 이상주의자들이 90년대 이후 한국 최초의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들로 등장하면서 많은 유익을 가져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평가를 전적으로 부인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유주의가 고전적 의미에서 자유주의의 건강성을 갖지 못한, 즉 전근대적 속박과 암흑을 깨부순 해방 정신으로서 자유주의가 아니라, 심각한 자기혐오에서 잉태된 병든 자유주의였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처럼 정신적인 갈피를 찾을 수가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우편향의 사회에선, 자유주의자의 양식만으로도 선거 때 진보정당 후보를 찍는 정도의 실천은 가능하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서 그런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예는 고종석이다) 그 자유주의가 병든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이런저런 개혁운동과 대형 시민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활동을 ‘달라진 세상의 진보’라 강변하면서 좌파를 아예 존재조차 부인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도 그 병든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선거 때만 되면‘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우파 후보를 찍는 자칭 좌파들도,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급진적인 사람은 모조리‘쓸모없는 인간들’로 깎아내리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좌파들도 마찬가지다.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는 이른바 ‘계몽’에 대한 혐오로도 나타난다. 그들은 말한다. “대중을 지도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다.”그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80년대에 자신이 했던 계몽운동이 바로 그랬기 때문이다. 80년대에 그들은 ‘우매하고 불쌍한 민중을 깨우치고 지도하여 해방’시키려 했다. 그들은 80년대를 청산하면서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라는 자기혐오의 부록으로 계몽에 대한 깊은 혐오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계몽의 진정한 의미가 사회적 최면에서 깨어나는 것, 즉 제가 사는 세상의 얼개를 파악하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우뚝 서는 것이라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계몽이 필요한 세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그 구조와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쏟아지는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 인터넷의 분방한 소통 속에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걸 다 보고 말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실은 지배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대졸자가 차고 넘치는 사회에서 무슨 놈의 계몽이냐’는 사람도 있지만 그놈의 한국의 대학이라는 곳이 사회적 안목을 키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곳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대졸 성인은 사회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에서 좋게 보아도 프랑스나 독일의 중학생을 넘지 못한다. 계몽은 분명히 필요하며, 문제는 ‘계몽의 방식’이다.

진정한 계몽은 80년대처럼 지식인이 민중을 대상화하여 지도하고 영도하는 일이 아니라, 지식인이 대중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제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조선노동자가 배를 만들고 교원노동자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부가 농사를 짓듯 지식인은 ‘지식노동’을 하는 것이다. 지식 노동의 요체는 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회의 구조와 본질을 인문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혹은 문화 예술적으로 해명하여 사회에, 즉 다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사실 계몽에 대한 혐오는 지식인들이 현실의 구조와 본질이 명백히 해명되는 걸 두려워하는 심리의 반영이기도 하다. 현실의 구조와 본질이 해명되면 이상주의에 대한 병적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사회적 태도가 더 이상 정당하지 않게 되며, 그걸 기반으로 하는 피상적이고 즉자적인 싸움, 이를테면 미친 극우 인사들 따위와의 싸움을 사회진보의 주제인양 말하며 살아가기도 곤란해진다. 그래서 그들에게 계몽은 일종의 금기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희망을 잃게 된 건 ‘이명박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이상‘불가능한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난 얼굴로‘이명박은 물러나라’ 구호를 외치다, 휴대폰으로 학원 빠진 아이 야단치는 게 우리의 꿈인가? 이명박을 물리치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사람을 다시 부르는 게 우리의 꿈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꿈을 되찾을 때, 비로소 우리 앞에 희망도 생겨날 것이다.(계속) (프레시안)

2008/11/20 14:54 2008/11/20 14:54
2008/11/19 12:46

예수전도 안상수 선생이 디자인을 한다. 내가 애초 주문한 사항은 “손에 쥐기 좋은 작고 통통한 책, 노인이 불편하지 않은 글자 크기” 였다. 어지간히 뜸을 들이시더니(^^) 며칠 전 판형에 대한 의견을 보내왔다. 구텐베르크 성서의 비례를 축소한 판형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그는 구텐베르크상의 2007년 수상자이기도 하다. 안선생의 설명.

예수전.판형  

가로     세로  
430       620  mm       b42
128       185  mm 
100       144  mm       루트2.비례
 
구텐베르크.판형..
구텐.성서를.일명.
<B42>라고.합니다.
무슨.폭격기.이름.같은데.
그건.아니고.
BIBLE-42의.준말입니다.
42는.42행.
글줄이.42줄이라는.뜻..
42행.성서라는.별칭으로.통합니다.
 
그런데.이.비례가.
루트2.비례입니다.. 아름답다고.정평이.난..
....
이후.종이.재단의.경제성을.감안.
가로를.46판.크기에.맞추어.계산해.내면.
그것이.
128+185밀리.
 
손안에.들어오는.
큼지막한.글자에.어울릴만한..
2008/11/19 12:46 2008/11/19 12:46
2008/11/17 10:33
분석은 사회진보연대의 것이 꼼꼼하니, 나는 개인적인 소회나 한 토막.

강의를 한번 했었는데, 집행부에 계급 이야기와 예수 이야기 중에서 고르라고 했더니 계급이야기를 골랐다. 지나고선 예수 이야기를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박성수라는 사람의 악행은 그의 비뚤어진(한국에선 보편적인) 기독교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신앙이 예수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걸 그들에게 들려주었어야 했다. 또 기회가 있겠지. 어떻든 고생들 많이 하셨다. 존경을 보낸다.
2008/11/17 10:33 2008/11/17 10:33
2008/11/15 13:43

시골의사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을 알 것이다. ‘불쌍한 이웃’에 대한 눈물이 똑똑 떨어질 만한 글을 쓰면서 동시에 주식 투자의 대가로 활동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대단히 분열적이라고 느끼지만 그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는 좌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투사의 얼굴로 삼성과 싸우던 참여연대 장하성 씨가 장하성 펀드로 귀결한 것을 두고 실망했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그의 두 행동이 일관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좌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그런 ‘양심적인 우파들’이 좌파로 여겨지다 보니 근래는 좌파진영에 있으면서 주식이니 펀드니 하는 걸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이따금 보곤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비난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든다. ‘굳이 왜 좌파를 해, 그냥 양심적인 우파하면서 살지.’ 라고 조용히 말해주고 싶어진다. 마침 이정환이 이 문제에 대해 짤막한 글을 썼더라. 그는 상당한 내공을 가진 경제 전문기자이거니와 나보다 훨씬 더 현실주의적인 경제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 내 말이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는 사람은 그의 말을 곰곰이 들어보길.

이정환의 글 보기.


2008/11/15 13:43 2008/11/15 13:43
2008/11/15 02:45
레디앙에 들어가 보니 제목을 진보-보수, 학부모 이름으로 '대연합' 이라고 붙여놓았다. 글의 내용을 잘 드러내는 제목이긴 한데 영 ‘내 제목’ 같지 않아 어색하다. 나는 칼럼 제목을 짧고 단순하게 붙이는 습관이 있고, 제목이 반드시 내용을 함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왜 연재를 시작할 때 ‘제목을 바꾸지 말 것’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뭐라고 바꿀지 조금은 궁금했던 걸까? ㅎ
2008/11/15 02:45 2008/11/15 02:45
2008/11/14 11:31

옥섭에게 “갈 수 있을지 아직.. 어떻든 공연장 미어터지길”이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형님, 꼭 오셔야 해요. 긴히 의논할 일이 있는데 이걸 보셔야 이야기가 돼. (중략) 다른 일정 포기해주세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웃으며 “알았네, 갈게.” 했다.

나는 이런 게 좋다. 아군끼리의 논리적 비약이.

2008/11/14 11:31 2008/11/14 11:31
2008/11/13 18:26

채만식의 ‘탁류’가 흐르던 군산이란 대처에서 인력거 두 대가 와야 춤추러 갔던 최고의 예기(藝妓). 아들 때문에 춤을 접었지만 김제만경 너머까지 파다한 춤 소문 때문에 곡절 끝에 명무전에 나서야했다. 무심히 꺼낸 빈손이 공기의 결 속으로 스며들었고, 촉축한 선율에 결로되어 손끝에 춤이 뚝뚝 떨어졌다. 그가 ‘얼룩’으로 알고 숨겨온 춤은 찬란한 ‘문양’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옮겨담을 도리가 없는 춤, 발견되자마자 부스러져 망실되어가는 유적 같다. 아니 벌써 풍화되어 다 날려버려 한 줌 밖에 없다. 하여 매 순간이 소매를 부여잡고 보내는 몌별(袂別)처럼 시리다. 강호제현이시여! 장차를 장담 못하는 춤이기에, 부디 왕림하셔서 ‘시간의 증인’이 되어주시길 앙망하나이다.

진옥섭이 쓴 장금도 춤 공연 홍보 글.
춤을 홍보하는 글이, 아예 춤이다. ㅎ

2008/11/13 18:26 2008/11/13 18:26
2008/11/13 11:40

지금 중학 2학년인 딸이 다섯 살 때인 98년부터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간간히 쓰긴 했지만, 교육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02년께부터였다. 어느 날 나는 깊은 의문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사람으로 키워지고 있는가, 상품으로 키워지고 있는가?’의문이 고민이 되고 고민은 다시 번민이 되어 결국 ‘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고래가그랬어>를 만들게 된 사연이다.
개가 제 새끼를 개로 키우고 원숭이가 제 새끼를 원숭이로 키우듯, 사람이 제 새끼를 사람으로 키우는 건 자연스럽게 이어져온 인류의 전통이었다. 제 아무리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아비라 해도 제 어린 자식에게만은 “동무들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 전통이야말로 인류를 유지해온 힘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아무리 망가져도, ‘사람으로 키워진’ 새로운 인간들이 끊임없이 공급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인류의 전통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보수적인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적이라는 부모도 제 아이에게“동무들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라고 말하지 못한다. 물론 아이가 아주 어릴 땐 다르긴 하다. 그들은 아이가 공부보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누구보다 많은 체험학습신청서를 학교에 제출해가며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 쯤 되면 그들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고,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급기야 보수적인 부모들과‘대통합’을 이룬다.
물론 그들은 ‘정말 이래야만 하나’ 고민도 하고 그 일로 부부 갈등도 벌이고 아직은 대통합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 민망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도 갈등도 민망함도 빠르게 사라져간다. 대통합에 참여한 사람들이 확연한 절대 다수가 되면, 뒤집어 말해 여전히 대통합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극소수가 되면 민망함은 공격적인 태도로 뒤바뀌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이를 희생시켜서야 되나?”나 역시 몇 해 전 후배에게서 들었던 말이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살풍경은 끝이 없다. 몇 달 전 전교조 어느 지회 강의에서 한 교사가 내게 질문했다. “전교조 교사가 자기 아이 과외 시키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 교사가 질문의 형식을 빌려 동료를 비판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외를 하는가 안 하는가로 나눌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에둘러 답변을 했지만 씁쓸함을 감출 순 없었다.
그 얼마 후 울산에서 만난 50대 노동자는 막막한 얼굴로 말했다. “고등학생 중학생 둘인데 녀석들 필수과목 과외 시키는 돈이 만만치가 않아요. 그 돈을 대느라 제 삶이 월급구조를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가 여느 평범한 50대 노동자라면 그 이야기가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울산에서 그 연배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좌파 노동자고, 게임에 빠진 고등학생 아들과 ‘생산하는 삶과 소비하는 삶’에 대해 토론을 할 만큼 특별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정도의 사람이 그토록 막막해 하는 문제라면, 그건 더 이상 서로 정색을 하고 비판하거나 정죄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 문제를 ‘우리 모두가 함께 앓고 있는 병’으로 인정하는 게 옳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진보적인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이 제 아이 교육문제 이야기만 나오면 석연치 않은 얼굴을 하거나 막막해만 하는 풍경이 지속되어서도 안 된다. 이 문제를 계속 덮어두고서 무슨 놈의 진보와 운동을 말할 것이며, 설사 말한다 한들 그 진보와 운동이 무슨 놈의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이젠, ‘우리 모두가 함께 앓고 있는 병’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자. 그리고 동병상련의 정으로 함께 고민하며 토론을 시작하자. 곧 갈피가 잡히고 대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레디앙)

2008/11/13 11:40 2008/11/13 11:40
2008/11/12 10:30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몸을 죽이는 방법과 정신적으로 죽게 만드는 방법. 루머는 후자를 대표하는 방법이다. 말하자면 루머는 살인의 일종이며, 루머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만큼 길다. 전통사회에서, 혹은 전통적으로 루머의 희생자는 대개 기성 사회의 권위를 거스른 사람들이었다. 남성의 권위에 도전한 여성, 파시즘의 권위에 도전한 예술가를 제거하기 위해 루머가 사용되었다. 남성의 권위에 도전한 여성을 ‘사생활이 문란한 여성’으로, 파시즘의 권위에 도전한 예술가는 ‘사회를 위협하는 빨갱이’로 만들면 매우 용이하게 죽일 수 있었으며, 죽이지 않고도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루머의 희생자를 떠올려 보자. 그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다. 흔히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 일컫는다. 그러나 성서나 역사서 어디에도 그가 창녀라는 흔적은 없다. 곡절은 이렇다.
예수의 12제자는 모두 남자들이지만 그건 공식적인 차원의 명단일 뿐,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은 여성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사회였다. 남성 제자들은 처음에 여자를 같은 사람으로 대하는 스승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고 기독교가 가부장적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여성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악의적으로 배제된 인물이 예수와 가장 가까웠고 예수 최후까지 함께 했으며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걸 발견한, 말하자면 제자로서의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막달라 마리아다. 남성 제자들은 ‘마리아는 창녀’라는 루머로 간단하게 그를 ‘2천년 동안’ 제거한다.
루머의 소재와 내용은 그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며 계속 변화한다. 파시즘에서도 벗어나고 가부장적 권위를 비롯한 이런저런 기성의 권위도 빠르게 해체되어가는 오늘 세상에서 루머라는 살인극의 주요한 대상은 대중의 주목으로 명예와 부를 획득하는 사람들, 즉 대중문화의 스타들이다. 대중은 스타를 먹여 살리지만 동시에 스타의 밥줄을 끊고 죽이기도 한다. 스타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살의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처럼 인터넷 공간이 지나치게 과열된, 온 나라 사람들이 전날 밤 인터넷에서 생산된 쓰레기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괴상한 사회에서 그 이중성은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중과 스타 사이에 벌어지는 이 기괴한 살인극 역시 기성의 권위, 즉 기성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세상에서 대중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삶이란 무엇인가? 제 노동의 수고에 정당한 대가를 돌려받지 못하며, 그렇다고 노동을 통해 충분한 자아실현을 하는 것도 아니며, 늘 같은 고단한 일상을 지속하지만 아무런 꿈도 꿀 수 없는 삶, 이다. 그런 삶에서 끊임없이 스트레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그 스트레스의 향방에 따라 그 사회의 향방이 결정된다.
그 스트레스가 분노로 발전하여 대중의 노동과 수고 덕에 영화로운 삶을 지속하는 소수의 사람들(이른바 ‘지배세력’)을 향해 폭발하는 순간을 우리는 혁명이라 부른다. 그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화로운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대중들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관건인 셈이다. 대중문화는 그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대표적인 배출구다. 그리고 그 배출구에서 대중문화의 스타들이 이따금씩 사체로 발견되는 건 그 배출구의 성능 향상에 그리 나쁘지 않다.
이쯤 되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만하다. “나는 그 살인극에 얼마나 참여했는가?” 우리는 최진실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루머를 만들어냈다는 한 여성에게 “살인자”라 욕을 퍼붓는다. 그러나 그 여성이 그 이야기를 혼자만 떠들고 다녔다면 최진실 씨가 무슨 그리 고통을 느꼈을까? 그 살인극을 완성한 건, 최진실 씨가 제 목숨보다 아끼던 두 아이마저 두고 가게 만든 건, 누군가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악의없는 얼굴로 다른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전한 바로 우리다. 루머는 우리의 친절한 살인극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이슈검색어’는 이렇다. “바네스피살 유덕화주리첸 하늘웃기네 주지훈장윤주 디기리현역 신승훈유노윤호 손담비몸값 손숙조성민 유아인 최진실모친심경...” 새로운 살인의 냄새가 느껴지는가? (보그)

2008/11/12 10:30 2008/11/12 10:30
2008/11/11 01:11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강의석의 누드 시위를 비난했다는 이야기를 지난번 아내에게서 처음 들었고 그 후 몇몇 사람들에게서 더 들었고 오늘 또 후배에게서 들었는데, 내 반응은 늘 같았다. “미친 새끼들.” 선호하든 안 하든, 강의석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누드 시위는 이른바 유행과 격식이라는 몸 가리개로 유지되는 문명사회에서 주요한 시위방법 가운데 하나다. 중요한 건 ‘누드’나 ‘강의석’이 아니라 그 시위가 시위였는가, 말하자면 그 시위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존중할 만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2008/11/11 01:11 2008/11/11 01:11
2008/11/1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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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노동절엔 아예 공식 어린이 행사로 결합하기로..ㅎ
2008/11/10 23:07 2008/11/10 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