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08/09/27 당연히 김진호
  2. 2008/09/26
  3. 2008/09/25 이거야 원
  4. 2008/09/24 정성들여
  5. 2008/09/24
  6. 2008/09/22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야
  7. 2008/09/20 뽀뽀
  8. 2008/09/05 더 중요한 일 (1)
  9. 2008/09/05 오탈자
  10. 2008/09/03 진보란 무엇인가?
  11. 2008/09/02 추석 선물은
  12. 2008/09/02 공영방송 (3)
  13. 2008/09/02 드디어
  14. 2008/09/02 가구
  15. 2008/09/01 국익
2008/09/27 20:44
예수전 원고의 학문적 감수는 이미 예수전 작업을 시작할 무렵 김진호 목사에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땐 그와 면식도 없었지만 ‘당연히 김진호’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그에게 원고를 보냈고 그가 오늘 1차분을 보내왔다. 그는 최근의 신학적 성과에 비추어 오류이거나 오류라 여겨질 수 있는 곳을 파랑 글자로 표시하고 녹색 글자로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워낙 바쁜 데다 몸도 편치 않은 상태라 들었는데 그 정성에 혼자 한참동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답장 끝에 이렇게 적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나머지 의견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2008/09/27 20:44 2008/09/27 20:44
2008/09/2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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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주 전 타이어에 박힌 녹슬고 구부러진 못. 모처럼의 라이딩을 망친 이 못을 여태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건, 깊이 박혀서일까, 추레한 몰골 때문일까..
2008/09/26 10:44 2008/09/26 10:44
2008/09/25 15:26
현실사회주의가 패망한 건 그게 사회주의라서가 아니라 전제정이었기 때문이다. 전제정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혹은 다른 무슨주의든 상관없이 망하게 되어 있다. 부르주아들과 자본 진영에선 당연히 그걸 ‘사회주의의 패망’이라고 대중들에게 주장하고 선전해왔다.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가 세계에 해악만 끼친 건 아니다. 만일 현실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 나라들엔 복지라는 게 애당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른바 ‘사민주의’라는 자본주의에 이식된 사회주의 시스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며 ‘사회주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바보들은 그 맥락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사민주의(민노당, 진보신당 등)가 여전히 기를 못 펴는 가장 큰 이유는 우파의 공격이나 모략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 세력이 지나치게 약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그 바보들이 소망하는 대로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사라져버린다면, 다시 말해서 사민주의가 한국에서 가장 극좌 세력이 된다면 한국에서 사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0’이 되는 것이다. 아마 ‘유시민 대통령’ 정도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이념이란 본디 자기보다 왼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오른쪽은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제 이념이 현실이 되길 바라는 사람이 가져야할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나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 존중하고 나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 혐오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바보들은 존중해야 할 사람들은 혐오하고 혐오해야 할 사람들에겐 보기 불편할 만큼 관대하(거나 유착되어 있)다. 그러면서 만날 제가 세상에서 제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좌파란다. 이거야 원.

2008/09/25 15:26 2008/09/25 15:26
2008/09/24 08:28
촛불의 열기가 조선일보 보던 사람을 경향이나 한겨레를 보게 하는, 말하자면 극우에 무감하던 사람이 ‘자유주의’라는 우파 본연의 교양을 얻게 되는 성과가 있었지만, 그 후폭풍으로 진보적 열기가 광범위하게 식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도처에서 그렇고, 심지어 고래도 신학기라고 생각하기 어려울만치 신규 구독신청자가 적다. 어쨌거나 촛불은 그 열기만큼이나 냉정한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면 전반적인 후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조금씩이라도 오버 안 한 사람이 없다보니 다들 머쓱한 분위기지만 그럴수록 겸허하고 정직한 평가와 성찰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대한다. 나 역시 글을 하나 쓸 생각인데, 주로 두 가지 오버에 대해서다. 하나는 ‘군중의 대규모 출현’만 있으면 그 정체성이나 배경은 제쳐두고 이성을 잃고 호들갑을 떠는 한국 인텔리들의 오랜 습성. 사실 이 문제는 사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매듭을 짓고 넘어갔어야 했는데(당시의 호들갑을 담은, 그러나 즉시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 책만 몇 권이던가!) 그렇지 못했다. 또 하나는 ‘현실적인’, 혹은 ‘합리적인’ 좌파를 자처하는 몇몇 자유주의자들의 행태. 이건 지난번 언급한 진보신당 내 상황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들의 방자한 행태는 촛불을 거치며 결국 도를 넘어서버렸다. 그들의 방자함이야 그들 스스로 책임질 인격의 문제지만 사회적 해악이 문제다. 오체투지 중인 수경스님에게 약속한 글이기도 해서, 정성들여 써볼 생각이다.

2008/09/24 08:28 2008/09/24 08:28
2008/09/24 08:19

예수전 머리말에, 혹은 그 옆 어딘가 눈에 잘 띄는 곳에 ‘일러두기’를 달 생각이다. 내용은 ‘인민’과 ‘하느님’(‘하나님’이 아닌)이라는 말에 대해, 그리고 그 말을 굳이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말은 말일 뿐이지만, 말이 세상을 만들기도 한다.

2008/09/24 08:19 2008/09/24 08:19
2008/09/22 13:45
지난주엔가 최규석에게 읽고 같이 뭘 구상해보자고 예수전 원고를 보냈는데, 어제 확인해보니 아직 안 읽었단다. 예수라는 소재가 영 당기지 않는 것이다. 사실 내가 예수전을 쓰는 걸 반가워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왜 저런 걸 쓰는 걸까 마땅치 않아 하거나 심지어 저 사람은 도사들 욕하더니 자기가 이제 도사가 되려나, 변혁은 접고 결국 종교로 귀의하려는 건가, 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한국에서 예수라는 이름은 망가질 때로 망가졌다.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예수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사람일 거라 짐작할 수 있어도 그렇다고 딱 정반대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최규석에게 웃으며 말했다. “예수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야. 알고 보면 정말 반하고 말 걸. 나를 믿고 한번 읽어봐.” 말을 마치고 생각해보니 이건 대단한 루머에 휩싸여 만인의 욕을 먹는 동시대의 어떤 사람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형국이다. 하긴, 예수가 그런 사람이다.
2008/09/22 13:45 2008/09/22 13:45
2008/09/20 10:47

창간 5주년 선물을 뭐로 할까 고민 고민했는데(돈은 없으면서 뭔가 근사한 선물을 마련하고 싶은 욕심에) 임의진 목사가 단번에 해결해주었다. 이름 하여 ‘어깨춤 삼촌의 고래별 여행’. 1번 트랙 고래 소리부터 시작하여 예쁘고 아기자기한 노래들이 가득하다. 흔쾌히 곡을 싣게 해준 이모 삼촌들과 폴리폰에 5천 고래의 뽀뽀를 전한다.^^

1. 안녕! 고래별
2. Twinkle Twinkle Little Star (반짝반짝 작은 별)/ The Harmonica Pocket
3. 두꺼비 (한국 동요 & 소규모 아카시아 글, 곡) /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4. Bury it Deep (깊게 묻었어요)/ Anna Ash & Family Tree
5. Pigogo (공작새)/ The Children of Agape Choir
6. Blanca Navidad (화이트 크리스마스)/ Andres Alen & 쿠바 어린이 합창단
7. The Mermaid (인어) /Dan Zanes & Festival Five Folk
8. Fais Do Do (잘 자라 아가야)/ Lisa Loeb & 아이들
9. 여리디 여린 (임의진 시, 곡)/ 임의진
10. (시낭송) 따뜻한 얼음 -어린 물고기들에게 (박남준 시)/ 박남준
11. 따오기 (한국 동요 & 2절 김두수 시)/ 김두수
12. Tears in Heaven (천국의 눈물, 에릭 크랩튼 곡)/ Bartosz Lamparski 기타
13. 雪に消える(눈 속에 사라지네)/ Kicell
14. Little Jasmine (작은 자스민꽃)/ LiPing Hudson
15. Imagine (상상해 보세요, 존 레논 곡/ 임의진 우리말 옮김)/ 인디언 수니

2008/09/20 10:47 2008/09/20 10:47
2008/09/05 20:45
출산이 임박한 살구가 제 생각에 아마도 편하게 지낼 마지막 주말인 내일 가까운 예수전 식구들을 집으로 불러 밥도 먹고 놀기로 했단다. 이것저것 밀린 일들 때문에 심란하긴 하지만 나도 아이들 데리고 가기로 했고 다 모이면 족히 열댓은 넘을 것 같은데 그 중 외계가 고래 만화 얹는 작업 때문에 못 올 것 같다고 했단다. 아까 사무실에서 외계에게 웃으며 말했다. “와야지. 좋은 사람들하고 모여서 노는 게 고래보다 더 중요한 일이야.”
2008/09/05 20:45 2008/09/05 20:45
2008/09/05 20:33
아래 ‘진보란 무엇인가’는 작은책에서 수고하여 보내준 녹취원고를 분량만 좀 줄여서 거의 그대로 올린 것이라 오탈자나 비문이 없지 않다. 어제 어느 분이 굳이 지적을 해서 두어 개는 고쳤는데 ‘이따금은 이런 날것 그대로의 글도 올려야지’ 하며 올린 것이니 그냥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말을 듣는다는 느낌으로 너그럽게 읽어주시길.ㅎ
2008/09/05 20:33 2008/09/05 20:33
2008/09/03 10:03

생태운동하는 분들은 진보는 없다고도 합니다. 물질적 발전을 진보라고 보는 관점에서지요. 그러나 제 생각엔 그런 관점 자체가 폐기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관점을 전제로 진보는 없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보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저는 진보란 사회가 더 행복해지는 것이라 대답하겠습니다. 그런데 극소수의 지배계급과 대다수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회가 행복해진다는 것은 대다수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행복을 가지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대다수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혁을 통해서 주어지겠죠. 사회 구조가 확 바뀌어야 하니까 근본적으로. 그중에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른바 국익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전체의 이익, 이런 개념이 한국 사회에 지나치게 횡행한다는 것이죠. 국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급간의 모순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 사회 성원의 전체에 해당하는 공통된 이익이나 공통된 손해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FTA가 한국에 큰 손해를 가져다 준다고 얘기하지만 이건희 씨 같은 사람은 훨씬 이익이죠. 대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는 거죠. 그러니 FTA가 한국에 어떤 이익이 있는가, 미국에 어떤 이익이 있는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기만적인 것입니다. 또 요즘에 󰡐양극화󰡑란 말은 정말 아주 개나 소나 하는데 󰡐계급󰡑이란 말을 하면 󰡐에이 80년대 얘길 하고 있어?󰡑 이런단 말이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양극화란 말은 계급적 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것이잖아요.
국익이라는 건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입니다. 우리는 󰡐노동자의 이익󰡑,󰡐농민의 이익󰡑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합니다. 그런데 지배계급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배계급의 이익󰡑,󰡐극소수 부자의 이익󰡑 이런 식으로 말했다간 당장 난리가 나겠죠? 그래서 지배계급은 어느 시대에나 자신의 이익을 󰡐국익󰡑,󰡐우리나라의 이익󰡑,󰡐우리 민족의 이익󰡑 따위로 표현하는 겁니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식의 기만에 빠져 있고 계급적 갈등이나 억압을 느끼다가도 뭐 월드컵 같은 것 벌어져서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 하고 나면 전 사회 성원이 󰡐우리는 하나󰡑 이런 식으로 통합돼 버리는 거죠. 그게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데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국익이란 실은 거짓말이며 오로지 계급의 이익만 존재한다는 걸 되새겨야 합니다.
계급을 한 개의 수직선으로 표현해 볼까요. 맨 꼭대기가 최상층 계급, 그리고 맨 아래가 최하층 계급이라 치지요.
그러면 좌우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 계급 수직선을 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린 것입니다. 왼쪽은 좌, 오른쪽은 우죠. 그리고 맨 왼쪽은 극좌, 맨 오른쪽은 극우입니다. 극좌는 최하층 계급의 이익을 타협없이 지키려는 태도라 할 수 있고 극우는 최상층 계급의 이익을 타협 없이 지키려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극좌는 확 뒤집어엎으려는 것이고 극우는 아무런 변화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이죠.
한국 사회는 해방 후 50년 동안 우파 정치만 존재해 왔습니다. 공화당, 민정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극우파와 신민당, 평민당, 열우당, 민주당 같은 좀 자유주의적이거나 개혁적인 우파들로만 이어져 왔죠.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극우파와 자유주의적인 우파가 각각 우파(보수), 좌파(진보)를 자임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지금까지 한국 정치가 지배계급의 이익만 일방적으로 대변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젠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곳을 선택해도 군사독재 시절처럼 잡아가지 않지만 여전히 정치하면 우파 정치 안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사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은 한국에선 제일 좌파 정당이지만 냉정하게 보면 중도좌파, 어떤 정책에선 그냥 중도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인민들은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지나치게 온건해서 계급의 이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불만을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뭔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죠. 이런 모든 게 지배계급이 우리에게 심어 놓은 허위 의식들입니다.
사회 변혁과 관련하여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는 87년 이후에 진행된 민주화의 실제 더 중요한 내용은 자본화였다는 것이죠.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것이 말하자면 70년대 중후반부터 국제적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국가 권력이 경제를 꽉 틀어쥔 딱딱한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될 수가 없죠. 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시키기 위해서는 민주화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혹시라도 오랜 기간 동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분들을 폄훼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거기 참여했던 사람이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 포섭의 준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한국의 사회운동 세력이나 진보 운동 하는 분들은 국제적인 세계 자본주의의 이런 변화에 대해서 경계 의식이 굉장히 적었습니다.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면 저절로 좋은 사회로 계속 진행할 거라는 낭만적인 믿음이 있었죠. 그리고 80년대 후반에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그나마 반자본주의적인 운동을 하던 세력들이 많이 쇠퇴 했고, 그러면서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자본화가 별 장애 없이 진행이 된 거죠. 신자유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구제 금융 이후, 김대중 정권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민정당이나 한나라당 같은 세력과 정치적으로는 분명히 구분되는 세력이지만, 이 신자유주의 자본화라는 논지에 있어서는 사상 동지적인 관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노무현 씨가 한 3년 전에 한나라당에 합당을 제안하면서 󰡐한나라당과 우리 간에 실질적인 정책 간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고 말한 적이 있죠.
그런데 우리는 대개 민정당, 한나라당은 우파, 김대중 노무현은 좌파 이런 식으로 구분해 왔죠. 좌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민노당부터 출발하는 것인데, 계속 한나라당은 우파 김대중 노무현은 좌파, 조중동은 우파 한겨레는 좌파, 이런 식의 왜곡된 이념 구도 속에서 신자유주의 자본화는 점점 더 빠르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정치적 민주화를 내세운 사회 경제적 신자유주의 자본화, 그걸 이른바 󰡐개혁󰡑이라고 부르죠. 그러나 개혁은 지난 10년 동안 언제나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한국 사회는 정치나 사회 문화의 면에서 노동자 인민의 이익은 거의 반영되지 않는 구조인 것이고 오늘의 이 상황, 복잡하고 고된 이 상황은 그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행복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촛불 시위, 많이 나가보셨죠? 제 둘째 아이가 지금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아이입니다. 여러분들 초등학생들이 이명박 싫어하는 거 잘 아시죠?(웃음) 엄청나게 싫어합니다. 광우병하고 관계가 없이 처음부터 싫어했어요. 그런데 이 녀석이 며칠 전에는 뜻밖에 약간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더군요. 갑자기 밥 먹다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아빠, 근데 어른들이 이명박 대통령으로 뽑은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왜 이명박 욕만 해? 어른들은 왜 그래?󰡓
󰡒그러게.󰡓
어른의 한 명으로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하는 애들이 또 있니?
󰡒응, 우리 반에 여러 명.󰡓
지각 있는 사람이 촛불이나 광장의 열기에 100% 감흥에 젖을 수 없는 이유가 그겁니다. 지각 있는 사람은 자기의 책임이 포함된 어떤 나쁜 일이 벌어졌을 때 두 가지 행동을 동시에 하게 되죠. 그 상황에 대해서. 비판과 분노, 자신에 대해서 반성과 성찰. 그런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번 5, 6월의 촛불과 광장의 의미는 그런 기운이 없습니다. 사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뽑힌 이유는 참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라서가 아니라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뭔가 짭짤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이명박을 뽑은 것이지요. 그래 놓고선 우리 새끼 광우병 고기 먹이려고 하는가 다들 들고 일어나는 건데 이걸 민주화 운동에 비견하거나 위대한 항쟁이라고 말하는 건 사실 민망한 데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국 사회가 성찰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많이 변했습니다. 그걸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른바 교육입니다.
이명박 씨가 0교시, 학교 자율화, 학교 서열화 하니까 양식 있는 많은 분들이 󰡐이명박이 아이들 다 죽인다󰡑 하고 비판을 했는데, 글쎄요 이명박이 갑자기 애들 죽이기 시작했나요? 이미 애들은 우리 손에 다 죽어가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미 고등학교로 보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새벽 두 시에 집에 들어가는 수준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얼마나 나은가요? 저는 박정희 정권에 태어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박정희가 죽었는데 초등학교 때 거수 경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구호가 󰡐건설합시다󰡑였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녔지만 하교 후엔 우리는 군사 파시즘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 오후 세 시 쯤에 소재가 정확하게 파악되는 아이는 병든 아이거나 아니면 징계 중인 아이였죠. 그렇게 아이들이 놀면서 건강하게 자랐는데, 지금 보십시오. 오후 세 시에 초등학교 아이가 한 30분 정도 행적이 안 밝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30분이 뭡니까? 15분만 행적이 안 밝혀져도 이제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상이 험해서 아이를 보호한다, 이런 면도 있지만 실은 아이들의 스케줄이 그만큼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 거죠. 다들 그러니 이상한 줄 모르지만 사실 아이들이 하루를 이렇게 보내는 사회는 지구상에서 한국뿐입니다. 이런 가공할 아동인권탄압이 없지요. 애들을 이렇게 키우던 사람들이 이명박이 0교시 뭐 어쩌고 하니까 갑자기 화를 내면서 이명박이 애들을 죽인다고 하면 정작 애들이 볼 때는 우리가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대운하도 마찬가집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100%가 대운하에 반대할 겁니다. 그런데 밤늦은 시간에 두 시에 길게 늘어선 수십 대의 학원 버스들, 그 안에 생기 잃은 낯빛으로 실려 가는 아이들, 그게 대운하가 아니고 뭡니까? 저는 그 대운하가 경부 대운하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거대한 대운하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운하에 자기 아이를 󰡐아이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 실어 보내면서 이명박의 경부 대운하를 정색을 하고 반대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개혁을 외치던 지난 10년 사이에 작은 이명박들, 작은 이건희들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군사 파시즘은 말입니다, 사람을 때리고, 고문하고, 폭압하고, 잡아가고, 죽이고 그렇게 다스리죠.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사람이 상대를 존중하게 되나요? 그런 폭압 속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고개 숙이고 눈치 보면서 살지만, 속까지 변하는 건 아닙니다. 위험하고, 겁이 나니까 숙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자본화가 무서운 것은 내 스스로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군사 파시즘은 폭력과 억압으로 우리를 다스리지만, 자본화는 우리한테 욕망을 심어 주어서 우리가 그 욕망을 좇게 만들고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과 영혼을 송두리째 변질시킴으로써 지배하는 것이죠.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의 가치관과 일하는 사람들의 가치관. 자본의 가치관은 뭐냐 하면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잘살고, 이런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뭐냐 하면은 그것을 오히려 불편해하면서 좀 더디게 가더라도 같이 가고 싶어하고, 자기보다 좀 더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연대하고 싶어하고, 이것이 일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성원들을 가만히 보시면은 거의 대부분 자본의 가치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일단 커야 성공한 교회이고, 사람을 평가할 때도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게 절대적 기준이죠. 그래서 젊은 여성들은 자기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들 성형 수술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그러는거죠. 요즘 아이들을 장래 희망 중 가장 많은 게 뭔지 아세요? 연예인입니다. 물론 옛날에도 가수나 배우가 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건 자기 재능이나 취향과 관련된 것이죠. 지금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아이들에게 심어 준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연예인이 자유롭고 편안하면서도 물질적으로도 아주 잘 나가는, 근사한 삶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가. 다 아이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진짜 우리가 행복한가 가까운 예를 하나 들어 보죠. 여러분들 주변에 고등학생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들이 엄마한테 어떻게 하는지 가만히 보십시오. 굉장히 함부로 합니다. 적대감 같은 게 있어요. 사춘기의 반항이 아니라 아주 일관된 그런 게 있습니다. 엄마는 청춘을 바쳐서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왜 아이들은 고등학교 정도 가면 엄마에게 저렇게 함부로 하는가? 이유는 하나입니다. 지금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코치와 선수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트 체육에서 중요한 것은 경기 성적일 뿐이죠. 코치가 선수를 붙들고 󰡐경기 성적도 중요하지만 그거보다는 스포츠인으로서의 태도와 인간미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어요? 안 그래도 과도한 훈련으로 심신이 녹초 상태가 된 그 선수한테.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아이와 엄마 사이에 인간적인 존경 같은 건 갈수록 사라지는 겁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헌신하는데 아이 입장에서 엄마는 경기 성적에만 매달려 자신을 관리하고 괴롭히는 냉혹한 코치일 뿐이죠. 지금 이런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애를 쓰고 고생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인 것처럼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이명박, 작은 이건희인 우리에게 성찰 없는 분노는 카타르시스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되어 있는 거니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이명박 씨는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군사 쿠데타로 억지로 집권한 사람이 아니라, 이른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서 압도적인 표차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이명박을 비판하고 욕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과 욕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이명박이 생각하는 행복, 이건희가 생각하는 행복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 다를 게 없다면 어떤 분노나 싸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겁을 내더라고요. 이를테면 내일부터 권정생 선생님처럼 그렇게 사는 것으로. 왜 그런 극단적인 상상을 하면서 겁을 내는지 저는 이해가 안 가요. 사실 그것은 그렇게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욕망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죠. 권정생 선생님은 인세 수억 원이 통장에 들어오지만 한 달에 20만 원 가지고 사셨다, 우리 시대의 성자다.
이런 거를 우리는 잘 알고 모든 사람이 권정생 선생님처럼 산다면 그처럼 훌륭한 세상은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 세기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하는 특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늘 흔들리고 욕망도 있고 속물적인 즐거움을 가지면서 또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지금 고속 인터넷과 최신 휴대폰이라는 족쇄를 차고 살고 있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서 되새겨 볼 수가 없어서 그렇지 대단히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라 세계가 다 이런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저녁까지도 학원을 돌고, 고등학교의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새벽 두 시에 들어오고, 핸드폰이나 엠피쓰리, 운동화, 이런 걸 가지고 아이들이 행복을 느끼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장래 희망이 없거나 아니면 거의 모든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연예인인 이런 사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괴상하고 비정상적인 상태가 우리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서 당연한 일인 양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다르게 살자는 것은 내일 아침부터 권정생 선생님의 삶으로 이전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괴상하고 비정상적인 삶에 한번쯤 브레이크를 걸고 되새겨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게 정말 행복한 건가? 내가 애들 이렇게 키워서 10년 후, 20년 후에 나하고 아이들하고 인간적으로 믿고 진정으로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아이는 정말 고마워할까?
이렇게 계속 가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명박 욕만 할 게 아니라 이런 생각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진보라는 것은 󰡐행복하자, 잘살자󰡑는 것입니다. 진짜로.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믿고서 인생을 소모시키거나 더욱더 고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진짜 행복하자, 더 잘살자는 것입니다. 올바르고 정의롭기 때문에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짜 더 잘살고 더 행복해지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기를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저 자신에게 정중하게 제안합니다.

2008/09/03 10:03 2008/09/03 10:03
2008/09/0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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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2 20:47 2008/09/02 20:47
2008/09/02 18:32

KBS가 공영방송이지 좌파방송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본/지배계급과 긴장을 이루는 방송”이라고 한 거죠. 좌파방송은 “자본/지배계급과 싸우는 방송”이죠.

(한 KBS 피디와 정연주라는 글을 두고 한 대화에서)

2008/09/02 18:32 2008/09/02 18:32
2008/09/02 10:34

소멸이 나왔다. 뒤표지에 실린 내 추천사의 마지막 문장(아래 빨강 부분)이 편집 실수로 날아간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번역도 매끄럽고, 두툼한 게 보기만 해도 좋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베른하르트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한국 인텔리들의 무딘 지성을 방증하는 일이라 생각해왔는데 이번엔 어떨지 궁금하다. 근래 지젝을 많이들 읽던데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지적 자극으로 말하자면 베른하르트가 한 등급 위다. 1쇄가 빨리 소멸되어 아예 새 추천사를 붙일 수 있길.ㅎ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지성이란 실은 혐오를 기반으로 한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지적인 것들의 축적도 지적 행동의 조합도 아닌 ‘세계에 반응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말했듯 여느 사람들이 제 앞의 문제에만 반응할 때 지성을 가진 사람은 세계의 문제에 반응한다. 그래서 지성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심지어 혁명에 투신하는 순간에도, 혐오를 품고 있게 마련이다. 나는 베른하르트에게서 지성의 한 정점을 본다. 그는 우파로 하여금 제 속물성을 자인하게 하며, 좌파로 하여금 제 이상의 결핍을 보완하게 한다."

2008/09/02 10:34 2008/09/02 10:34
2008/09/02 09:37

저는 어제 이사를 했습니다.
방에 가구가 없어서 짐 정리가 어려워요. ㅎㅎ

그래도 가구는 되도록 들이지 마세요.
가구야말로 자유로운 삶의 적. ㅎ

2008/09/02 09:37 2008/09/02 09:37
2008/09/01 17:42
우리는 노동자나 농민들이 ‘노동자의 권리’ ‘농민의 이해’를 소리 높여 외치는 걸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해를 어떻게 외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들이 “재벌의 이해” “부자의 권리”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 난리가 나겠지요. 그래서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해를 주장하되, 좀 더 듣기 좋게 주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국가 전체의 이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국익’말입니다. (이랜드 노조 강의에서)
2008/09/01 17:42 2008/09/01 1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