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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5/28 프레시안
  3. 2008/05/27 우리 안의 대운하
  4. 2008/05/23 수구반동 (1)
  5. 2008/05/21 서양식 골계 (1)
  6. 2008/05/20 인사
  7. 2008/05/20 채워주시길 (1)
  8. 2008/05/19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9. 2008/05/06 뒷담화
  10. 2008/05/03 오버
  11. 2008/05/01 변화
2008/05/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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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실제로 보는 것과 다름없을 만큼 근사한 고래 54호 eBook. 지난호부터 고래 인쇄를 맡고 있는 애즈랜드에서 만들어주었다. 감사드린다.

2008/05/29 10:00 2008/05/29 10:00
2008/05/28 08:59

프레시안에 칼럼을 쓰기로 한 게 3월인데 이제야 시작한다. 기자에게 "두주 한번 약속이 이행되길.ㅎ"이라고 적어 보냈다.

2008/05/28 08:59 2008/05/28 08:59
2008/05/27 01:53

- 386에게 보내는 편지

이명박 씨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은 광우병 소 문제가 불거지기 훨씬 전부터, 대통령 선거 운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미 그를 ‘명바기’라 부르며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고 희화화했다. 아이들 몇을 붙들고 왜 그리 이명박이 싫은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의 표현은 다양했지만 ‘논리 이전의 혐오’라는 점에선 일치했다. 나는 아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는 가지지 못한 어떤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금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은 93년생인데, 93년은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발한 해다. 아이들은 민주화 이후에 나고 자란 첫 세대인 것이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이른바 386들이다. 그들은 아이들과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군사 파시즘 치하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민주주의의 실제에 대해선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배우거나 익힐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비민주적인, 전근대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습속을 익히며 자라야 했다. 그럼에도 군사 파시즘의 폭압이 20대의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의 비민주적인 습속이 그들이 일사불란한 대열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습속은 군사 파시즘이 물러난 이후 그들을 무력하게 했다.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민들에 의해 붕괴하자 그들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그 붕괴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했고 낙심과 자괴감에 빠졌다. 그들은 일제히 역사를 접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90년대 이후, 30대가 된 그들은 두 가지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선 여전히 단호하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대해선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군사 파시즘과 싸워 물리쳤던 추억은 소중하게 간직하면서도  민주화 이후 도래한 거대한 자본화의 흐름엔 타협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속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여전히 한국사회의 전 세대를 통틀어 가장 지적이고 정의 지향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낳고 키운 아이들이 바로 촛불을 든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 역시 두 가지 모습을 가진다. 그들은 한국의 다른 모든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주체적인 개인이며, 권리의식이 높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딱할 만큼 소비문화에 물들어 있고 삶에서 돈과 물질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자본의 감성을 보인다. 영화 <괴물>에서 송강호의 중학생 딸(고아성이 연기한)은 그 전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아이는 유행에 처진 핸드폰을 아빠나 쓰라며 던져버리지만 동시에 부당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놀랍도록 주체적이다.

그 아이들이 오늘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들을 보며 한국 사회의 희망을 느낀다고 말한다. 물론 감동적인 광경임에 틀림없지만 현재로선 희망은 딱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절망이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휴대폰이나 운동화 엠피쓰리 따위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10대 마케팅’을 벌이는 자들에게 저주를!) 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장래희망이 없거나 이렇게 많은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연예인(은 아이들에게 자유롭고 안락한 삶의 전형이다)인 사회도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자정이 넘도록 학원을 돌며 경쟁 기계로 키워지는 사회도 지구상에 없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이들은 이명박이 없는,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는 좀 더 사악해진 사회에서 충직한 자본의 신민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불길한 예측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이들이 가진 절반의 절망은 전적으로 후천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아이들의 미래는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며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한국 사회의 미래는 다시한번 386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그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물론 그들 상당수는 이명박을 싫어하고 대운하를 반대하며 광우병 소에 분노하며 촛불을 든 아이들을 폄훼하는 조중동을 욕한다. 그러나 이명박을 싫어하고 대운하를 반대하며 광우병 소에 분노하고 조중동을 욕하면 정말 이명박을 반대하는 걸까?

아이들이 분노하는 0교시 문제니 고교서열화니 학교자율화니 하는 문제들을 보자. 그 문제들은 이명박이 시작한 게 아니다. 민주화 이후 좀 더 직접적으로는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한국사회가 급격하게 신자유주의적 체제로 돌입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 문제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이미 기초를 쌓았고 이명박 정권에서 ‘노골화’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노골화한 부분을 떼어내 반대하는 것으로 이명박의 교육정책을 반대한다고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문제의 핵심은 노골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는 가치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오늘 좋든 싫든 제 아이를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대열에 참여시키고 있다면 ‘이명박의 노골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명박 지지자’일 뿐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한다고 해서 이명박과 다르다고 생각할 건 없다. 미국산쇠고기 문제는 광우병이 염려되는 쇠고기를 국민에게 먹이려 한다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식 그리고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입장의 문제다. 미국산쇠고기 문제는 돈이 제일의 가치이고 경제적 효율이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신자유주의 가치관에서 나온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른 농축산물 수입 문제에 FTA에 이랜드 노동자 문제에 KTX 여성노동자 문제에 삼성노조운동 문제에 무심한 사람이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한다고 해서 이명박과 달라지는 건 아니다. 막말로 이명박 씨가 지금 야당 대표였다면 미국산 쇠고기를 찬성했을까?

경부대운하를 반대한다고 해서 다르다는 생각도 하지 말자. 오늘 한국의 양식 있는 사람들은 대개 대운하를 반대한다. 그러나 경부대운하를 반대하는 그들 대부분은 이미 제 안에 경부 대운하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파괴적인 대운하를 건설하고 있다. 밤늦은 시간 한국의 도시마다 길게 늘어선 학원 버스들, 생기를 잃은 낯빛으로 그 버스에 실려 가는 아이들. 그게 대운하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대열에 제 아이를 ‘아이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실어 보내는 사람이 경부대운하를 반대한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우리는 지금 가치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돈의 가치관과 사람의 가치관. 돈과 경제적 효율을 우선하는 가치관과 느리더라도 사람과 자연을 우선하는 가치관, 국가의 총경제(는 실은 지배계급의 경제다)를 중요시하는 가치관과 인민들의 경제를 중요시하는 가치관의 전쟁이다. 돈의 가치관의 정점에 이명박이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정점의 추한 외양에 거부감을 갖는다고 해서 우리가 사람의 가치관을 가지는 건 아니다. 아이들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대열에 불편한 시늉으로라도 결국 동참하면서 이명박의 좀 더 노골적인 교육정책엔 분노하는 모습, 제 안에 더 큰 대운하를 뚫어놓고선 이명박의 대운하는 반대하는 가련한 모습이 다라면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은 없다.

한 호흡 멈추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올바르기 때문에 정의를 좇기 위해서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자는 게 아니다. 진정 더 잘살기 위해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생각을 바꾸자는 것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따위 거짓말일랑 하지 말자. 다 내 욕망을 아이를 통해 구현하려는 것 아닌가? 행복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신통한 아이들, 삼성이니 에스케이니 하는 장사꾼들의 붉은 깃발과 국가주의적 선동에 태극기를 두르고 광장을 채우던 20대와는 전혀 다른, 오히려 사회현실을 고민하고 스스로 학습하고 연대하며 싸우던 부모 세대의 청년시절의 모습을 빼다 박은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아이들, 프레시안)
 

2008/05/27 01:53 2008/05/27 01:53
2008/05/23 23:49

대선에서 이명박을 찍지 않고 정동영이나 문국현을 찍었다고 해서 다른가? 이명박과 그들, 이른바 민주개혁 세력은 각기 군사 파시즘 출신과 민주화운동 출신이라는 데서 전혀 다르지만 이미 절차적  민주화가 기본적으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런 차이는 큰 의미는 없다. 이명박이 아니라 박정희의 아들(생리적 딸)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옛 정치적 권위주의로 회귀하긴 어렵다. 그들의 관심은 독재가 아니라 보다시피 시장주의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이른바 민주개혁 세력의 차이란 출신과 스타일의 차이(이명박은 좀 더 노골적이고 거칠다) 말고는 없다.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려 한다는 점에서 두 세력은 전적으로 같다.(노무현 씨는 이미 오래 전 ‘대연정’ 제안에서 두 세력의 정체적 차이는 없다고 확인한 바 있다) 그렇게 볼 때 이명박에 대한 실망을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로 연결하려는 행태는 참으로 어리석은, 참으로 수구반동적인 현실 인식이다.  (군산강연에서)

2008/05/23 23:49 2008/05/23 23:49
2008/05/21 10:15
천 페이지가 넘는 <The Left 1848-2000>을 책상 귀퉁이에 올려 두고 짬날 때 조금씩 읽고 있는데 소련 붕괴 즈음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요법 없는 충격.” 이런 건 분명 서양식 골계다. ㅎ
2008/05/21 10:15 2008/05/21 10:15
2008/05/20 23:16
지난번 댓글을 재개했다 닫고 방명록을 열었지만 그 역시 오늘 닫았다. 거듭 밝힌대로 내가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유는 이른바 ‘인터넷 소통’에 참여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글을 쓰고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 데 따르는 이런저런 제한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어떤 불필요한 부담도 가질 뜻이 없다. 진지한 인사와 의견들을 남겨준 분들에게 아쉬운 마음과 정중한 인사를 드린다.
2008/05/20 23:16 2008/05/20 23:16
2008/05/20 12:35
‘사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잡지’는 고래의 오랜 꿈이다. 아이들이 이용하는 모든 도서관과 공부방에 고래가 구비된다면 그 꿈은 이루어진다. 이젠 고래가 어지간히 알려졌지만 잡지 한권 선뜻 구독할 형편이 못되는 도서관과 공부방도 여전히 참 많다. 간혹 그런 곳에서 연락을 해오면 거저 책을 보내주곤 하지만 지금 고래 형편으론 모든 곳을 다 그렇게 할 순 없다. '고래동무'는 바로 그런 곳들에 고래를 보내는 운동이다. 이달에도 오백여권의 고래가 고래동무에 가입한 이모 삼촌들의 정성으로 아이들에게 보내졌다. 고꿈세에 분교도서관 100곳 채우기를 시작한 게 작년 6월이다. 애석하게도 아직 빈 곳이 남았다. 몰랐던 분들이 나머지를 채워주시길. ^^
2008/05/20 12:35 2008/05/20 12:35
2008/05/19 21:05

김건, 김현지(규일이 딸), 최정민(영식이 딸) 셋을 모아놓고 2주에 한번 글쓰기 공부를 하기로 했다. 글 쓰는 기법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학과공부와 게임문화에 포위된 아이들에게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는 방법으로 궁리한 것. 천천히 해나가면서 성과가 확인되면 더 많은 아이들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정리해볼 생각이다. 그 첫 시간. 말과 글은 어떻게 다른가, 글을 왜 쓰는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따위를 질문하여 셋의 입을 통해 정리해봤는데 결국 나올 이야기가 다 나오더라.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셋은 말했다. 생각이 많이 담긴 글, 생각이 깊은 글, 느낌과 감동을 주는 글, 진심이고 진짜인 글.

2008/05/19 21:05 2008/05/19 21:05
2008/05/06 00:10
지난해에 이어 금천체육공원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에 고래부스를 마련했다. 강재호, 이경석 작가가 아이들에게 캐리커처와 캐릭터를 그려주었다. 줄이 너무 길어 번호표를 배부하기도.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는 칠판을 세웠는데 처음엔 영 아이들이 다가오질 않는다. 문득 너무 양지인가 싶어 칠판을 돌려세웠더니 금세 아이들이 모여든다. 뒷담화는 역시 음지의 언어. ^^
2008/05/06 00:10 2008/05/06 00:10
2008/05/03 23:07
오랜 만에 100킬로 라이딩을 했다. 35킬로 즈음에서 미국인 하나가 앞에 나타났는데 가던 속도대로 가니 추월했다. 5분쯤 지났을까 씩씩거리는 소리가 다가오더니 내 옆에 붙는다. “안녕.” “안녕.” “내 자전거 바퀴는 29인친데 니 자전거 바퀴는 되게 작다.” “20인치다. 나도 얼마 전까진 26인치를 탔었다. 어디까지 가느냐.” “동두천까지 간다.” “미국인이냐.” “그렇다.” 따위 별 내용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녀석이 갑자기 나를 떼어놓으려는 듯 상체를 좌우로 세게 흔들며 페달을 밟아댄다. 라이딩을 하다보면 종종 있는 일이지만 대개 그러든가 말든가 내 페이스대로 가곤 하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장난기가 생겨(쇠고기 때문? ^^) 쫓아가선 추월은 안 하고 3미터 정도 뒤에 붙어 계속 달렸다. 녀석은 연신 뒤돌아보며 안간힘을 쓰기 시작하는데 녀석이 속도를 높이면 나도 높이고 느려지면 나도 줄이면서 계속 간격을 유지했다. 그렇게 30여분, 녀석은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허리를 곧추 폈다 하더니 동두천으로 꺾고 얼마 못가 길바닥에 퍼져버린다. 1킬로 가량 더 진행해서 속도계에 50킬로미터가 찍히는 걸 확인하고 돌아섰는데 녀석을 지나치며 인사를 하니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든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귀여운 녀석이다. 거기까진 그런대로 재미있었는데.. 본격 레이싱은 아니어도 본래 유지하려던 페이스는 오버한 터라 돌아올 때 영 힘들었다. 맞바람에 볕은 한여름인양 뜨겁고 앞바퀴 스포크에선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장난도 좋지만 다시는 오버하지 말아야지, 하여튼 언제나 미국놈이 문제란 말이야, 혼자 중얼거리며 낑낑 돌아왔다.ㅎ
2008/05/03 23:07 2008/05/03 23:07
2008/05/01 08:34

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고는 자고 일어나곤 하며 밤과 낮이 가는데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씨는 싹터 무럭무럭 자랍니다. 땅은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처음에는 줄기가 자라고,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가득한 밀알이 맺힙니다. 그리고 열매가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댑니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과 비교할까, 혹은 무슨 비유로 그것을 밝혀 보일까? 하긴 겨자 씨앗과 같습니다. 그것이 땅에 뿌려질 때에는 지상의 어떤 씨보다도 작습니다. 그러나 뿌려지면 자라서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되어 큰 가지들을 뻗칩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됩니다."(마가 4:26~32)

하느님나라 운동과 꼭 같진 않더라도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싸우고 헌신하는 사람이 싸우고 헌신하는 만큼 세상이 변화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시시각각 보람과 기쁨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세상은 늘 그대로이거나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아무리 싸워도 꿈쩍도 하지 않는 세상 때문에 늘 낙심하며 결국 포기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씨를 뿌린 사람도 못 알아차리는 사이에 어느새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낱알이 맺힌다고. 역사를 되돌아보면 늘 그렇다. 변화는 언제나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순간에 일어나고 있다. 예수가 말한 “겨자”는 ‘시나퍼’라는 건데 당시 팔레스타인에 많이 자란 변종 겨자다. 다 자라면 3미터가 넘어 어지간한 나무보다 크고 무성했지만 씨앗은 그 어떤 풀보다 더 작았다. 변화의 씨앗은 언제나 보잘것없이 작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변화를 좇는 사람들을 존경하기기보다는 비웃거나 조롱한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나’ 좀 더 진지하고 양식 있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저 보잘것없는 세력이 어느 세월에 세상을 바꾼단 말인가’ ‘승산도 없는 싸움에 힘을 소모하기 보다는 최악이라도 막는 게 최선이지’ 그들의 ‘현명한 처신’은 오히려 변화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 보잘것없이 보이는 적은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세상은 결국 변화하고 그 변화의 성취는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랬고 지금 이 순간 역시 그렇다.

2008/05/01 08:34 2008/05/01 0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