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에 해당되는 글 16건
- 2007/09/30 무슨 소리를 했더라
- 2007/09/29 아버지 하느님 엄마 하느님
- 2007/09/22 케이던스 킷
- 2007/09/20 최성각
- 2007/09/19 대문호
- 2007/09/14 아지트
- 2007/09/13 평범한 훌륭한 사람
- 2007/09/12 평론가 자격
- 2007/09/11 개구리왕자
- 2007/09/10 한 50년 쯤 후에
- 2007/09/09 역시, 강준만
- 2007/09/05 현상 공모
- 2007/09/05 김소민
- 2007/09/04 심정
- 2007/09/03 놉시다
- 2007/09/01 콧노래 부르며
2007/09/30 02:08
이번 책이 지승호의 열한 번 째 인터뷰집이라는데 그 중 몇 권에 들어가면서 느낀 인터뷰이의 생리는 대강 3단계다. 인터뷰를 하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슨 소리를 했더라’ 하다가, 책을 받아보곤 ‘아 이랬지’ 하는 것이다. 지금은 ‘무슨 소리를 했더라’ 중이다.
2007/09/29 01:02
청년들은 겸연쩍게 제 고민을 털어놓는다. 교회가 잘못된 게 참 많은데 비판을 하자니 목회자나 교회에 순종하지 않는 게 신앙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는 대답한다. “다니는 곳이 교회인지 아닌지 부터 확인해보세요. 십자가 단 건물에 강대상 놓고 예배 본다고 교회는 아니니까요. 만일 교회가 아니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어요.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쓰게 웃으며 한 말 기억하지요?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태 24:2) 바로 우리에게 한 말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대개 ‘윤리적 타락’라는 면에서 해석되곤 한다. 교회가 개혁되면 해결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교회개혁운동의 열정을 진심으로 존중하지만 그 운동이 한국 교회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 대개의 한국 교회들은 ‘타락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행여 발끈할 건 없다. 나는 이치에 맞는 비판은 ‘인간의 생각’이라 방어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제 생각은 ‘하느님의 뜻’이라 강변하는 사람들과 핏대 올릴 생각은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저 딱 한 가지만 함께 짚어보자. 오늘 한국 교회가 모시는 하느님은 과연 예수가 말한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인가?
성서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구약의 하느님과 예수의 하느님은 많이 다르다. 구약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으로서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출애굽기 20:5)”라고 대놓고 말하는 하느님이다. 구약의 하느님은 자기를 섬기는 놈은 어떤 악행을 해도 축복하고 자기를 거스르는 놈은 바로 살아도 저주하고 징벌하는, 권위적이며 포악한 마초 아버지 하느님이다. 바로 오늘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일없이 죽이는 극우 시온주의자들의 하느님 말이다.
예수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선포했다. 예수의 하느님은 잘나고 힘세며 늘 승리하는 자식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못나고 약하고 늘 지기만 하는 자식 걱정에 잠을 못 이루며 그가 사람대접 받으며 살길 갈망하는 하느님, 엄마 하느님이다. 죄를 후손 삼대에까지 갚고 마는 하느님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뉘우치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하느님,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느라 체면도 품위도 잃어버린 사람들 앞에서 고상한 말이나 쓰며 으스대는 놈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 야단치는 하느님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 속에 우주가 있고 또 우주가 그 사람의 영혼과 함께 맞물려 작동한다는 걸 깨우치게 하는 하느님이다.
예수와 예루살렘 성전체제와의 충돌은 결국 두 하느님의 충돌이었다. 새로운 하느님, 엄마 하느님은 인민들에겐 후천 세상이 왔음을 알리는 복음이었지만 옛 하느님을 섬기며 온갖 영화를 누리던 자들에겐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야만 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생겨난 지 2천년, 오늘 한국 교회의 하느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의 하느님이다. 오늘 양식 있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에 분노한다. 그러나 그 하느님 앞에서 그 분노는 어리석은 것이다. 미국은 하느님을 섬겨 축복받았고 아랍인들은 우상을 섬겨 벌을 받는 거라는, 침략전쟁이 거룩한 성전이라는 주장은 그 하느님 앞에서 전적으로 옳다. 부자와 권력자들의 사교클럽으로서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그 하느님 앞에서 가장 축복받은 교회들이다. 아프카니스탄 인질 사건으로 불거진 몹쓸 해외선교 방식도 그 하느님 앞에서 한치도 부끄러울 게 없다. 양심이라는 유전자가 처음부터 없는 듯한 어느 독실한 기독교인 대통령 후보 역시 그 하느님 앞에선 크게 쓰임 받아 마땅한 사람일 뿐이다.
한국의 밤풍경은 붉은 네온 십자가로 가득하다. 그 십자가 십자가마다 예수가, 엄마 하느님이 피흘리며 달려 있다.(한겨레21, 일러스트 김대중)

한국 교회의 문제는 대개 ‘윤리적 타락’라는 면에서 해석되곤 한다. 교회가 개혁되면 해결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교회개혁운동의 열정을 진심으로 존중하지만 그 운동이 한국 교회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 대개의 한국 교회들은 ‘타락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행여 발끈할 건 없다. 나는 이치에 맞는 비판은 ‘인간의 생각’이라 방어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제 생각은 ‘하느님의 뜻’이라 강변하는 사람들과 핏대 올릴 생각은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저 딱 한 가지만 함께 짚어보자. 오늘 한국 교회가 모시는 하느님은 과연 예수가 말한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인가?
성서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구약의 하느님과 예수의 하느님은 많이 다르다. 구약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신으로서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출애굽기 20:5)”라고 대놓고 말하는 하느님이다. 구약의 하느님은 자기를 섬기는 놈은 어떤 악행을 해도 축복하고 자기를 거스르는 놈은 바로 살아도 저주하고 징벌하는, 권위적이며 포악한 마초 아버지 하느님이다. 바로 오늘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일없이 죽이는 극우 시온주의자들의 하느님 말이다.
예수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선포했다. 예수의 하느님은 잘나고 힘세며 늘 승리하는 자식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못나고 약하고 늘 지기만 하는 자식 걱정에 잠을 못 이루며 그가 사람대접 받으며 살길 갈망하는 하느님, 엄마 하느님이다. 죄를 후손 삼대에까지 갚고 마는 하느님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뉘우치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하느님,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느라 체면도 품위도 잃어버린 사람들 앞에서 고상한 말이나 쓰며 으스대는 놈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 야단치는 하느님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 속에 우주가 있고 또 우주가 그 사람의 영혼과 함께 맞물려 작동한다는 걸 깨우치게 하는 하느님이다.
예수와 예루살렘 성전체제와의 충돌은 결국 두 하느님의 충돌이었다. 새로운 하느님, 엄마 하느님은 인민들에겐 후천 세상이 왔음을 알리는 복음이었지만 옛 하느님을 섬기며 온갖 영화를 누리던 자들에겐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야만 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생겨난 지 2천년, 오늘 한국 교회의 하느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자들의 하느님이다. 오늘 양식 있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에 분노한다. 그러나 그 하느님 앞에서 그 분노는 어리석은 것이다. 미국은 하느님을 섬겨 축복받았고 아랍인들은 우상을 섬겨 벌을 받는 거라는, 침략전쟁이 거룩한 성전이라는 주장은 그 하느님 앞에서 전적으로 옳다. 부자와 권력자들의 사교클럽으로서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그 하느님 앞에서 가장 축복받은 교회들이다. 아프카니스탄 인질 사건으로 불거진 몹쓸 해외선교 방식도 그 하느님 앞에서 한치도 부끄러울 게 없다. 양심이라는 유전자가 처음부터 없는 듯한 어느 독실한 기독교인 대통령 후보 역시 그 하느님 앞에선 크게 쓰임 받아 마땅한 사람일 뿐이다.
한국의 밤풍경은 붉은 네온 십자가로 가득하다. 그 십자가 십자가마다 예수가, 엄마 하느님이 피흘리며 달려 있다.(한겨레21, 일러스트 김대중)

2007/09/22 10:45
산에서야 좀 다르겠지만 도로 라이딩의 경우 가장 중요한 건 적정한 페달 회전수를 유지하는 것이다. 랜스 암스트롱의 경우 분당 90~100 회전을 유지한다고 한다. 이 회전수는 실제로 타보면 힘을 쓴다고 하기엔 헛도는 느낌이고 헛돈다고 하기엔 힘이 들어가는 회전수다. 케이던스 킷(페달 회전수를 재는 장치, 혹은 자전거 운율 장치)을 처음 달고 시험 삼아 한탄강 너머까지 가보았다. 라이딩 거리 130킬로미터. 회전수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긴 고개를 오를 때 다리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리고 실제 회전수보다 빠르게 느껴지면서 회전수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회전수를 유지하니 힘도 덜 들고 고개를 오르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도 덜했다. 적정 회전수가 충분히 몸에 익으면 케이던스 킷을 떼도 될 것이다. 삶에도 케이던스 킷이 있을까? 마흔 몇 해나 살았으니 이미 충분히 몸에 익어서 떼어낸 걸까? 천천히 묵상해보기로.
2007/09/20 21:22
환경운동 혹은 생태운동 하는 사람의 경향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녹색평론과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최열(이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뭘까? 하는 짓을 보면 정치인인데 꼭 환경운동가의 이력이나 명망을 앞세우곤 하니 브로커라고 해야 하나?) 같은 사람이 녹색평론에 글을 쓰거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최성각은 전에 이런저런 자연물에 상을 주는 이벤트를 벌이는 걸 보고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그렇고 그런 사람인가, 했다가 녹색평론에 글을 쓰는 걸 보고 다시 보게 된 사람이다. 그의 산문집이 나왔는데 참 좋다. 문학은 죽었고 진정한 문학가는 멸망하는 세상을 버텨내느라 도무지 문학할 겨를이 없는 정황으로 볼 때 그는 진정한 문학가다. 한권씩 사서 읽어보시길 권한다.
2007/09/19 02:27
2007/09/14 11:27
새로 짜인 고래 편집위원회. 어른들이 빼앗은 아이들의 영토를 되찾아주는 이야기에 몰두하노라면 다들 기발하고 즐겁다. 이번에 나온 ‘영토 회복’ 이야기는 '아지트'. 아이들에겐 아지트가 필요하다. 마을 뒷산 어느 곳이 아니더라도 아파트 단지 후미진 공간이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옷장 서랍 한 귀퉁이라도, 아이들에겐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하다.
2007/09/13 11:32
2007/09/12 11:13
영화 평론하는 후배와 오랜 만에 통화하는데 녀석이 얼마 전 올린 평론가 이야기를 꺼냈다. “기분 상했어?” 물으니 “아니. 맞는 말인데 뭘.” 하며 킬킬 웃는다. 그 웃음이 참 마음에 들어 “자신을 조소할 줄 아니 그래도 넌 평론가 자격이 있구나.”했다. 그러나 그 글(의 원래 제목은 평론가의 탄생이다)은 평론가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평론가들(80년대에 운동하다가 90년대 들어 사회복귀의 한 방식으로 대중문화평론 가게를 차린 사람들, 이젠 다들 문화계 언저리에서 훈수 두는 영감 노릇이나 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다. '젊고 유능한' 평론가들은 행여 서운해 마시길.
2007/09/11 10:26

앞치마 사러 이케아 매장에 들렀다가 김건 주려고 산 개구리왕자. 큰 입은 ‘자꾸’로 여닫을 수 있고 파리도 한 마리 들어있다. 김건은 봉제인형을 좋아한다. 전엔 "몇 살인데.." 하며 면박을 주기도 했지만 이젠 그의 취향으로 여기고 있다.
2007/09/10 00:44
<화려한 휴가>는 교양 있고 비판적인 사람들에게서 트집 잡히기 쉬운 영화다. 특히, 초인적인 인격과 강인함을 가진 전형적인 재난영화 영웅(안성기 분)이 후반부를 이끌어가게 만듦으로서 광주의 마지막 전사들을 덜 주체적으로 그린 건 그런 사람들에겐 적이 불만스런 일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왜곡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테고 ‘노회한 상업영화’(광주판 실미도?)라고 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비판이 근거없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참 예쁘다.
영화는 내내 관객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여기는 광주입니다. 되도록 재미있게 보시라고 조금 각색하긴 했지만 여기는 분명히 광주입니다. 이곳에서 싸우고 사랑하다 죽어간 사람들의 피와 땀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영화는 관객들을 27년 전 광주로 데려간다. 관객들은 광주 사람들과 함께 내내 울고 웃다 소스라치다 주먹을 불끈 쥔다. 영화는 폭도라면 폭도인줄 알고 열사라면 열사인 줄 알며 살아온 맥없는 중년들이나 소싯적 광주의 진상에 분노했으나 이젠 아이의 성적과 주식 시세에나 분노하는 386들은 물론, 그 일이 일어날 때 어린 아이였거나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뿐인 사람들까지 모두 광주로 데려간다.
2007년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광주로 데려갈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광주의 정신은 죽은 사람들과 함께 묻혔으며, 김대중의 집권과 자본화(흔히 ‘민주화’라 불리는)의 광풍은 광주의 모든 유산들을 체제내화했다. 광주의 흔적은 무공훈장을 가슴에 단 느물느물한 중년남성들의 이전투구에서나 발견되며, 광주의 정신이 필요한 모든 현실적 저항에 오늘 광주는 결합하지 않는다. 지난 6월 광주의 보수화를 고뇌하다 쓸쓸히 돌아간 윤한봉 선생의 장례식 풍경은 오늘 광주의 처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를 비현실적이고 고집스런 사람으로 따돌리던 수많은 후배와 옛 동지들이 모두 출연한 기괴한 가면무도회는 말이다.
장선우 씨가 광주 영화를 만들 드문 사회적 기회를 관념의 마스터베이션으로 소모해버린 이후 광주를 소재로 한 진지한 영화 구상은 구현이 어려워져버렸다. 그리고 십여년이 지나 <화려한 휴가>가 우리에게 왔다. <화려한 휴가>가 켄 로치의 영화처럼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도 담백하고 예술적인 영화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런 영화의 제작이 가능해지도록 만드는 다리가 필요하다. <화려한 휴가>는 바로 그 다리다. <화려한 휴가>는 도저한 예술적 형식미나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대신, 광주를 말하기 머쓱해진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호흡 안에서 광주를 속삭이게 만들었으며, 광주를 제작 가능한 영화적 소재의 하나로 복권시켰다.
예술성을 포기하기만 하면 대중성은 자연스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있지만,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예술적인 영화를 만드는 일보다 덜 어렵지 않다. 김지훈 씨는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 줄 아는 감독이다.(만일 이 영화가 상업적 의도만 무성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였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러나 아무리 대중성과 상업성을 고려한다고 한들 아직 영화청년의 자의식이 남아있을,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몇 해 동안 광주의 자료를 조사하고 분석한 젊은 감독이, 마지막 도청의 전사들이 차례차례 죽어가면서 마지막 말을 남기는 장면을 그렇게 길게 신파조로 넣으면서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그와 소주한잔 나누고 싶어진다.
지사적 풍모를 갖추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사만이 역사에 기여하는 건 아니다. <화려한 휴가>는 역사에 기여했다. 언젠가는 들불야학의 전사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넘어서는 광주 영화가 만들어지길 소망한다. 들불야학의 전사들은 그런 영화를 만들기에 차고 넘치는 소재다. 꼭 만들어질 것이다. 민우가 신애에게 남긴 마지막 말처럼, “한 50년 쯤 후에”라도 꼭. (한겨레21, 일러스트 김대중)

영화는 내내 관객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여기는 광주입니다. 되도록 재미있게 보시라고 조금 각색하긴 했지만 여기는 분명히 광주입니다. 이곳에서 싸우고 사랑하다 죽어간 사람들의 피와 땀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영화는 관객들을 27년 전 광주로 데려간다. 관객들은 광주 사람들과 함께 내내 울고 웃다 소스라치다 주먹을 불끈 쥔다. 영화는 폭도라면 폭도인줄 알고 열사라면 열사인 줄 알며 살아온 맥없는 중년들이나 소싯적 광주의 진상에 분노했으나 이젠 아이의 성적과 주식 시세에나 분노하는 386들은 물론, 그 일이 일어날 때 어린 아이였거나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뿐인 사람들까지 모두 광주로 데려간다.
2007년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광주로 데려갈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광주의 정신은 죽은 사람들과 함께 묻혔으며, 김대중의 집권과 자본화(흔히 ‘민주화’라 불리는)의 광풍은 광주의 모든 유산들을 체제내화했다. 광주의 흔적은 무공훈장을 가슴에 단 느물느물한 중년남성들의 이전투구에서나 발견되며, 광주의 정신이 필요한 모든 현실적 저항에 오늘 광주는 결합하지 않는다. 지난 6월 광주의 보수화를 고뇌하다 쓸쓸히 돌아간 윤한봉 선생의 장례식 풍경은 오늘 광주의 처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를 비현실적이고 고집스런 사람으로 따돌리던 수많은 후배와 옛 동지들이 모두 출연한 기괴한 가면무도회는 말이다.
장선우 씨가 광주 영화를 만들 드문 사회적 기회를 관념의 마스터베이션으로 소모해버린 이후 광주를 소재로 한 진지한 영화 구상은 구현이 어려워져버렸다. 그리고 십여년이 지나 <화려한 휴가>가 우리에게 왔다. <화려한 휴가>가 켄 로치의 영화처럼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도 담백하고 예술적인 영화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런 영화의 제작이 가능해지도록 만드는 다리가 필요하다. <화려한 휴가>는 바로 그 다리다. <화려한 휴가>는 도저한 예술적 형식미나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대신, 광주를 말하기 머쓱해진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호흡 안에서 광주를 속삭이게 만들었으며, 광주를 제작 가능한 영화적 소재의 하나로 복권시켰다.
예술성을 포기하기만 하면 대중성은 자연스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있지만,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예술적인 영화를 만드는 일보다 덜 어렵지 않다. 김지훈 씨는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 줄 아는 감독이다.(만일 이 영화가 상업적 의도만 무성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였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러나 아무리 대중성과 상업성을 고려한다고 한들 아직 영화청년의 자의식이 남아있을,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몇 해 동안 광주의 자료를 조사하고 분석한 젊은 감독이, 마지막 도청의 전사들이 차례차례 죽어가면서 마지막 말을 남기는 장면을 그렇게 길게 신파조로 넣으면서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그와 소주한잔 나누고 싶어진다.
지사적 풍모를 갖추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사만이 역사에 기여하는 건 아니다. <화려한 휴가>는 역사에 기여했다. 언젠가는 들불야학의 전사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넘어서는 광주 영화가 만들어지길 소망한다. 들불야학의 전사들은 그런 영화를 만들기에 차고 넘치는 소재다. 꼭 만들어질 것이다. 민우가 신애에게 남긴 마지막 말처럼, “한 50년 쯤 후에”라도 꼭. (한겨레21, 일러스트 김대중)

2007/09/09 14:54
2007/09/05 17:42
2007/09/05 13:13
화려한 휴가의 감독 김지훈 씨와 김상경 씨의 인터뷰 기사가 한겨레에 났었는데 나중에 보려고 접어두었다가 며칠 전에야 봤다. 전부터 든 생각인데, 김소민이라는 기자는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분간할 것 다 분간하면서도 기자라고 보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사려 깊게 쓴다. 정치부 기자(사회를 운영하는 핵심부에 접근해있다는 자부가 자신이 그 핵심부라는 망상으로 발전한 환자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종종 발견된다면 우리의 신문 읽기가 훨씬 단란할 것을..
2007/09/04 00:49
명색이 예수에 대해 책을 쓰다 보니 종교와 관련한 화제의 책이 나오면 내키든 안 내키든 사서 일별은 해보게 된다. 최근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샀다. 말이 많은 사람답게 100쪽이면 충분한 이야기를 600쪽이나 들여 열심히 신의 부재를 논증하는데, 역시 싱거운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는 논증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논증은 실은 신이 존재한다는 혹은 신이 부재한다는 주장을 논증할 뿐이다. 우리가 신의 존재나 부재를 논증하는 것과 상관없이 신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건 하나다. 인류 역사에서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보다 훨씬 해로웠고 여전히 해롭다는 것. 어쨌거나 신은 열심히 자신의 부재를 논증하는 도킨스가 고마울지도 모른다. 수천년 째 숨고 싶은 심정일 테니..
2007/09/03 21:01
편해문 형에게 현상 퀴즈의 심사평을 부탁했더니 흐뭇한 소감문을 보내왔다. 알다시피, 그는 제목만으로도 전적인 지지를 보내 마땅한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의 저자다.
많은 고래들이 올려주신 글이 제게 참 좋은 놀거리를 안겨다주어 지금 벅차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조금 흥분하고 있네요. 먼저 오락을 게임이라는 말로 가다듬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놀이와 게임에 대한 고래 식구들의 의견을 가려낼 수 있는 식견이나 자격이 있지 않다는 것을 먼저 밝힙니다. 다만 놀이와 게임의 도드라진 점이 있다면 살피고 우리 아이들이(어른 함께) 놀이와 게임을 바르고 고르게 만났으면 한다는 바람에서 써보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놀이와 게임을 고루 만나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을 조금 많이 하고 있거든요.
올려주신 글을 두루 읽었어요. 참 잘 노는 고래들이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도드라지게 인상 깊었던 분들이 여럿 계셨어요. 멍석을 깔아놓으면 한 가락 하실 분들이 하나둘이 아닐 것 같아요. 올려주신 글에 제 생각을 조금 보태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micol73님 말씀처럼 놀이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분지님 말씀처럼 놀이는 할수록 마음이 풍요로워지지만 게임은 할수록 허기가 지지요.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몸소 겪은 일을 올린 글들에 제 무릎을 때렸습니다.
자 이 놀이에는 심판이 없네요. 그래서 그런지 당연히 다툼이 있습니다. 누가 반칙을 하나 안 하나 꼬나보고 있다가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나오는 심판이 없으니 이 경기가 엉망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 죽었다고 우기는 아이가 있지만 내일 아침까지 울고불고 우길 필요는 없지요. 왜냐하면 지금 죽었다고 해도 다음 판에 조금만 기다리면 곧바로 살아날 수 있는데 뭐 하러 기를 쓰고 따집니까. 놀이의 재미를 아는 아이들은 간발의 차이로 겪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넉넉한 아량으로 “그래 나 죽었다” 하고 받아 넘길 줄 알았습니다. 아 어른들은 좀 어렵지요. 좀 길게 따집니다. 그러다가는 노는 시간 다 지나갑니다. 아이들이 어서 재미있게 놀자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계속 따지면 미움 받습니다. 다음 놀이판에 쉽게 끼어줄지 모르겠네요.
“노올고 있네~” 좋은 말인데 나쁜데 더 자주 쓰는 말이 된 것 같아요. 놀이와 게임이 어떻게 다른지 저처럼 이렇게 따지지 않아도 모두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밖에서 놀고 있어야 “야 이놈들아 그만 놀고 공부 좀 해라!”라고 동네가 떠나가게 소리 한번 질러 보지요. 욕도 한 마디 섞어서 말입니다. 빈고호님과 좁쌀한알님은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재미나게 하시는지... (역시 고래님들은 놀이를 알어. 땀 안나는 놀이는 놀이가 아녀!)
여기서 잠깐 놀이와 게임과 도박과 전쟁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모르겠네요. 지금 아이들이 하는 인터넷 게임은 이미 게임을 지난 것 같아요. 어느새 도박에 이르렀고 피시방은 전쟁터입니다. 도박으로 날이 새는 어른들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씻지도 않고 먹은 것을 치우지도 않습니다. 온갖 악취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놀음판에서 살아있는 것은 오로지 노름꾼들의 핏발선 눈동자뿐입니다. 자신에게 그런 냄새가 나는지도 전혀 모릅니다. 왜냐하면 노름은 사람을 무아지경으로 데려다 놓기 때문입니다. 밥도 물도 시간도 필요 없습니다. 몇날 며칠을 노름을 해도 배가 안고픕니다. 그런데 요즘 이와 같은 노름꾼 모습을 한 아이들이 떼지어 보이기 시작합니다.
놀이와 게임에는 기본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다른 점은 놀이는 놀면서 규칙을 새롭게 만들어간다는 것이고 게임은 규칙의 단단함에 모무 투항해 철저히 규칙의 노예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지켜야할 어떠한 규칙도 없습니다. 지금 아이들의 게임은 놀이를 넘어 게임과 도박을 지나 전쟁을 향하고 있습니다. 게임 안과 밖을 혼동하는 아이들로부터 집안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아이들,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패배를 상대편 적이 있는 PC방으로 쳐들어가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게임은 전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 놀이를 만나게 하고 싶습니다.
빈고호님의 이야기는 평소 제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와 닿아 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 가는 것 같아서요. 요즘은 가난한 동네 아이들의 놀거리 라고는 오직 게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놀거리가 없는 가난한 아이들은 놀이영양결핍에 더욱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일 값싸게 놀 수 있는 것이 게임이니까요. 생각해보세요. 1000원을 가지고 한 시간을 놀 수 있는 게 게임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어요. 잘 사는 아이들은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회도 가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긴 말 필요 없이 놀이와 게임의 차이는 돈이 드느냐 안 드느냐에 달려 있어요. 돈이 있어야 운동을 해서 몸을 단련하고 음악회를 가서 정서를 가다듬지요. 돈이 없으니 값싼 게임밖에 더하겠어요. 요즘은 가난한 아이들이 잘 사는 아이들한테 싸움도 못 이겨요. 가난한 아이들이 몸이 고루 자라지 못하는 거지요. 가난한 동네 아이들 놀이라고는 오로지 컴퓨터밖에 없거든요. 피눈물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옛날 아이들은 놀면서 지영님 말씀처럼 그까짓 슬픔, 절망, 분노와 같은 감정들을 훌훌 풀어 던졌어요. 그러나 컴퓨터 게임을 하면 할수록 슬픔, 절망, 분노는 고스란히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지요. 우리 시대는 이런 아이들의 쌓인 분노를 현실에서 맞닥뜨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요.
옳은 말씀입니다. 저 또한 같은 생각인데요. 오락이라는 것, 여가라는 것, 게임이라는 것 따지고 보면 볼수록 자본의 발명품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왜 자본이 이런 것을 만들어냈을까 하는 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자본이라는 것이 모든 일터를 노동을 파는 곳으로 바꾸어버려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가짜놀이를 만들어 팔아먹기 시작한 것에 그 뿌리가 있는 것 같아요. 자 아이들이 하는 게임도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아이들이 본래는 놀아야 하는데 공부에 강제되고 있어 이러다가는 아이들이 미쳐버릴 것 같으니 움직이지 말고 방구석에 앉아 요것 갖고 놀아라 하며 신나게 가짜놀이를 만들어 팔아먹은 거지요. 아이들은 게임에 속고 어른들은 오락과 여가에 속는 악순환입니다.
저는 놀이와 노을을 잇는 just2kill님과 놀이가 추억이라는 상이님 말이 가장 낭만적으로 들려 좋았습니다. 예수가 그토록 탄압을 받았던 것은 그가 낭만을 모르는 사람으로 온통 휩쌓인 시대의 한 복판에서 낭만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과 싸우려면 놀아야 합니다. 이런 저런 장난감과 게임기, 노래방 탬버린을 놓고 맨손으로 사람끼리 만나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얼마 전까지 다 그렇게 놀았습니다. 우리 자본에 빼앗긴 낭만을 되찾아 옵시다.
놀이를 하는 시간은 micol73님 말씀처럼 자유를 누리고 아팠던 것을 치유하는 시간에 다름 아닙니다. 놉시다. 모두 고맙습니다.
아이에게 놀이, 오락의 차이를 말해보라고 했더니 놀이는 '아이들이 스스로 규칙, 방법을 정해서 하는 거'라고 하고요. 오락은 게임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썼던 말이랍니다. 오락이라는 말이 아이들에게는 좀 낯선듯 하구 - 맹목
많은 고래들이 올려주신 글이 제게 참 좋은 놀거리를 안겨다주어 지금 벅차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조금 흥분하고 있네요. 먼저 오락을 게임이라는 말로 가다듬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놀이와 게임에 대한 고래 식구들의 의견을 가려낼 수 있는 식견이나 자격이 있지 않다는 것을 먼저 밝힙니다. 다만 놀이와 게임의 도드라진 점이 있다면 살피고 우리 아이들이(어른 함께) 놀이와 게임을 바르고 고르게 만났으면 한다는 바람에서 써보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놀이와 게임을 고루 만나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을 조금 많이 하고 있거든요.
올려주신 글을 두루 읽었어요. 참 잘 노는 고래들이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도드라지게 인상 깊었던 분들이 여럿 계셨어요. 멍석을 깔아놓으면 한 가락 하실 분들이 하나둘이 아닐 것 같아요. 올려주신 글에 제 생각을 조금 보태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micol73님 말씀처럼 놀이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분지님 말씀처럼 놀이는 할수록 마음이 풍요로워지지만 게임은 할수록 허기가 지지요. 옳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몸소 겪은 일을 올린 글들에 제 무릎을 때렸습니다.
우스개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어른들은 못한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술래가 움직였다고 하거나 어 너 이빨 보였어(우리 동네에선 눈깜박이는 건 봐줬습니다)하면 꼼짝없이 술래뒤에 가서 손가락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내가 언제, 증거 대봐, 이렇게 나오니 놀이가 될 수가 없지요. 뭐 가끔 안움직였다고 우기는 어린 동무들이 있긴 하지만 이내 다른 참여자들에 의해(말없이 그저 빨리 술래의 무궁화꽃....을 듣고 싶다는 즉, 놀자는 표정하나만으로도) 이내 제압됩니다. - 아유해피
자 이 놀이에는 심판이 없네요. 그래서 그런지 당연히 다툼이 있습니다. 누가 반칙을 하나 안 하나 꼬나보고 있다가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나오는 심판이 없으니 이 경기가 엉망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 죽었다고 우기는 아이가 있지만 내일 아침까지 울고불고 우길 필요는 없지요. 왜냐하면 지금 죽었다고 해도 다음 판에 조금만 기다리면 곧바로 살아날 수 있는데 뭐 하러 기를 쓰고 따집니까. 놀이의 재미를 아는 아이들은 간발의 차이로 겪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넉넉한 아량으로 “그래 나 죽었다” 하고 받아 넘길 줄 알았습니다. 아 어른들은 좀 어렵지요. 좀 길게 따집니다. 그러다가는 노는 시간 다 지나갑니다. 아이들이 어서 재미있게 놀자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계속 따지면 미움 받습니다. 다음 놀이판에 쉽게 끼어줄지 모르겠네요.
아들이 만화책을 보면서 키득거리고 있다. 지나가는 어머니 왈 "놀고 있네~!"
- 여기서 "오락하고 있네~!"하면 이상하잖아요?
오락기라고 불리는 기계를 잡고 아들이 놀고 있다. 어머니 왈 "오락 그만하고 숙제해~!!"
-여기서 "놀이 그만하고 숙제해"라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 두루미
“노올고 있네~” 좋은 말인데 나쁜데 더 자주 쓰는 말이 된 것 같아요. 놀이와 게임이 어떻게 다른지 저처럼 이렇게 따지지 않아도 모두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밖에서 놀고 있어야 “야 이놈들아 그만 놀고 공부 좀 해라!”라고 동네가 떠나가게 소리 한번 질러 보지요. 욕도 한 마디 섞어서 말입니다. 빈고호님과 좁쌀한알님은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재미나게 하시는지... (역시 고래님들은 놀이를 알어. 땀 안나는 놀이는 놀이가 아녀!)
놀이 : '놀'고 나면 '이'게 재미구나 하고 (놀고 나면 땀이 나고)
오락 : '오'락하고 나면 '악'소리나고 (오락하고 나면 땀이 안나고) - 빈고호
놀이: 하고 나면 즐겁고 신나고 행복하고 친구들과 가까워지고 뿌듯한 것~!
오락: 돈 들고 맘 상하고 사람 망치고 인간관계 나빠지는 것~! - 좁쌀한알
여기서 잠깐 놀이와 게임과 도박과 전쟁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모르겠네요. 지금 아이들이 하는 인터넷 게임은 이미 게임을 지난 것 같아요. 어느새 도박에 이르렀고 피시방은 전쟁터입니다. 도박으로 날이 새는 어른들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씻지도 않고 먹은 것을 치우지도 않습니다. 온갖 악취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놀음판에서 살아있는 것은 오로지 노름꾼들의 핏발선 눈동자뿐입니다. 자신에게 그런 냄새가 나는지도 전혀 모릅니다. 왜냐하면 노름은 사람을 무아지경으로 데려다 놓기 때문입니다. 밥도 물도 시간도 필요 없습니다. 몇날 며칠을 노름을 해도 배가 안고픕니다. 그런데 요즘 이와 같은 노름꾼 모습을 한 아이들이 떼지어 보이기 시작합니다.
놀이와 게임에는 기본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다른 점은 놀이는 놀면서 규칙을 새롭게 만들어간다는 것이고 게임은 규칙의 단단함에 모무 투항해 철저히 규칙의 노예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지켜야할 어떠한 규칙도 없습니다. 지금 아이들의 게임은 놀이를 넘어 게임과 도박을 지나 전쟁을 향하고 있습니다. 게임 안과 밖을 혼동하는 아이들로부터 집안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아이들,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패배를 상대편 적이 있는 PC방으로 쳐들어가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게임은 전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 놀이를 만나게 하고 싶습니다.
옛날 학교 다닐 때 가난한 친구들은 놀거리는 많았지만 오락거리가 없었구요. 부자집 친구들은 오락거리는 많았지만 놀거리는 없었던거 같아요 - 빈고호
빈고호님의 이야기는 평소 제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와 닿아 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 가는 것 같아서요. 요즘은 가난한 동네 아이들의 놀거리 라고는 오직 게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놀거리가 없는 가난한 아이들은 놀이영양결핍에 더욱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일 값싸게 놀 수 있는 것이 게임이니까요. 생각해보세요. 1000원을 가지고 한 시간을 놀 수 있는 게 게임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어요. 잘 사는 아이들은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회도 가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긴 말 필요 없이 놀이와 게임의 차이는 돈이 드느냐 안 드느냐에 달려 있어요. 돈이 있어야 운동을 해서 몸을 단련하고 음악회를 가서 정서를 가다듬지요. 돈이 없으니 값싼 게임밖에 더하겠어요. 요즘은 가난한 아이들이 잘 사는 아이들한테 싸움도 못 이겨요. 가난한 아이들이 몸이 고루 자라지 못하는 거지요. 가난한 동네 아이들 놀이라고는 오로지 컴퓨터밖에 없거든요. 피눈물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옛날 아이들은 놀면서 지영님 말씀처럼 그까짓 슬픔, 절망, 분노와 같은 감정들을 훌훌 풀어 던졌어요. 그러나 컴퓨터 게임을 하면 할수록 슬픔, 절망, 분노는 고스란히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지요. 우리 시대는 이런 아이들의 쌓인 분노를 현실에서 맞닥뜨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요.
놀이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몰입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오락이란 여가 시간(남는 시간)에 일상에서 얻은 스트레스나 피곤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이 놀이일 수도 있고 공부가 놀이일 수도 있고 생활이 놀이일 수도 있지만(그 사람이 일과 공부와 생활에서 자기 스스로 즐거움과 만족을 느낀다면), 오락이란 일과 공부와 생활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 찾는 대치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길위에서
옳은 말씀입니다. 저 또한 같은 생각인데요. 오락이라는 것, 여가라는 것, 게임이라는 것 따지고 보면 볼수록 자본의 발명품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왜 자본이 이런 것을 만들어냈을까 하는 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자본이라는 것이 모든 일터를 노동을 파는 곳으로 바꾸어버려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가짜놀이를 만들어 팔아먹기 시작한 것에 그 뿌리가 있는 것 같아요. 자 아이들이 하는 게임도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아이들이 본래는 놀아야 하는데 공부에 강제되고 있어 이러다가는 아이들이 미쳐버릴 것 같으니 움직이지 말고 방구석에 앉아 요것 갖고 놀아라 하며 신나게 가짜놀이를 만들어 팔아먹은 거지요. 아이들은 게임에 속고 어른들은 오락과 여가에 속는 악순환입니다.
밤새워 놀 수는 있어도 밤새워 오락하다가는 쓰러질 것 같네요.
또한 논다는 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들 때부터 자연스레 하는 거지만 오락은 오락기계, 오락부장, 오락시간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 맹목
저는 놀이와 노을을 잇는 just2kill님과 놀이가 추억이라는 상이님 말이 가장 낭만적으로 들려 좋았습니다. 예수가 그토록 탄압을 받았던 것은 그가 낭만을 모르는 사람으로 온통 휩쌓인 시대의 한 복판에서 낭만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을이 질 때까지 놀라는 뜻으로 노을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더군요(수십 년 전 국어선생님 주장). - just2kill
놀이는 시간이 지났을 때 추억이 되는 것이고
오락은 시간이 지났을 때 후회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 상이
자본과 싸우려면 놀아야 합니다. 이런 저런 장난감과 게임기, 노래방 탬버린을 놓고 맨손으로 사람끼리 만나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얼마 전까지 다 그렇게 놀았습니다. 우리 자본에 빼앗긴 낭만을 되찾아 옵시다.
놀이는 내가 내켜서 한다.
놀이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놀이는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다.
놀이는 무엇으로든 할 수 있다. - napper4
놀이를 하는 시간은 micol73님 말씀처럼 자유를 누리고 아팠던 것을 치유하는 시간에 다름 아닙니다. 놉시다. 모두 고맙습니다.
2007/09/01 16:27
사회적 의견을 교환하는 데 있어 대전제는 남의 의견을 경청하고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먹는 것, 이다. 그 다음에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는 법인데 어떤이 말마따나 그런 사람이 참 가뭄에 콩나듯 하다. 갈수록,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모든 걸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차고 넘친다. 세상은 안개에 갇히고 체제는 콧노래 부르며 힘을 더해 간다.
(힌트 하나. 타인의 취향은 폭주족을 위한 변명과 비슷한 글이다.)
(힌트 하나. 타인의 취향은 폭주족을 위한 변명과 비슷한 글이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