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07/04/25 스탠스
  2. 2007/04/24 덜탄빵
  3. 2007/04/23 성인식
  4. 2007/04/22 신앙
  5. 2007/04/21 예순
  6. 2007/04/19 공병호 천사
  7. 2007/04/18 눈물
  8. 2007/04/07 공멸
  9. 2007/04/06 현지
  10. 2007/04/05 고래를 추천해주세요
  11. 2007/04/04 새 시대 주기도문
2007/04/25 21:08
배운 놈들은 인민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외래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선민의식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용하던 외래어가 대중화하면(이를테면 ‘컨셉’처럼 개나 소나 사용하게 되면) 새로운 걸로 바꾸어가면서 말이다. 요 근래 배운 놈들, 특히 주류 미디어의 기자나 피디 나부랭이들이 잘 쓰는 말은 단연 ‘스탠스’인 듯하다. 스탠스를 안 쓰면 거의 말이 안 되는 지경인 친구들도 있다. 하여튼 식민지란..
2007/04/25 21:08 2007/04/25 21:08
2007/04/2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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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클레이로 뭘 만들고 있는 김단 옆에 붙어 만든 손가락 마디만한 탄빵. 이 작은 클레이 덩어리에서 온기를 느끼는 걸 보면 세상이 살아있되 죽은 사람들로 가득차긴 찬 모양이다. 그나저나, 눈알을 하얗게 칠하려다 말았으니 '덜탄빵'이라고 해야 하나? ㅎㅎ
2007/04/24 21:45 2007/04/24 21:45
2007/04/23 18:12
사람들은 내 딸이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사회의식을 가졌을 거라 짐작하곤 한다. 조금 익살스럽게 말해서, ‘좌파’인 그의 아비가 필시 날마다 아이를 붙들고 사회의식을 주입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딸과 산 십 수 년 동안 사회의식을 주입하기는커녕 사회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 기억도 거의 없다. 그건 내가 대개의 사회문제라는 것들이 아이들과는 무관한 세계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국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아이들과는 무관한, 어른들이 감당하고 책임지는 세계의 일이다. 아이의 세계는 동무들과 선생님과 이웃과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다. 그리고 그 작은 세계에도 미국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가 존재한다. 그게 아이들의 사회문제다. 나는 진보적이고 양식 있는 부모덕에 어른들의 사회 문제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아이가 정작 제 세계에서의 사회문제에 대해선 빤질빤질 무의식으로 일관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건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신앙심이 더 적더라’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신앙은 주입되는 게 아니라 제 안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인데 어릴 적부터 신앙심을 강요받게 되면 신앙심의 껍질들(성경이나 교리 지식 따위)은 늘어나지만 자발적인 신앙심에선 멀어지는 것이다. 사회의식도 마찬가지다. 아이에게 어른 세계의 사회의식을 심어주는 일은 부질없는 일을 넘어 위험한 일이기 십상이다.
딸은 올해 중학생이 되었다. 인생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바뀌는 게 어느 밤 자정이 아니라면 그는 이제 아이의 세계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 꽤 긴 여정에 접어든 셈이다. 달리 말해서 그는 어른 세계의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만한 나이가 되었다. 관심은 조금씩 감당과 책임으로 변화해갈 것이고 나는 그에 걸맞게 그와 소통해갈 것이다. 안 그래도 그는 부쩍 사회문제에 대해 말을 걸어오는 일이 늘었고 주제 또한 시사의 속도와 비슷해지고 있다. 몇 주 전 대화.
“아빠, 에프티에이가 나쁜 거지?” “어떤 사람에겐 좋고 어떤 사람에겐 나쁘지.” “농사짓는 사람들은 나쁘지?” “그렇지. 그밖에도 아주 많지. 숫자로 따지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지.” “그럼 우리나라 정부는 나쁜 정분가?” “그것도 마찬가지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정부나 모든 사람에게 나쁜 정부는 없어. 어떤 사람에겐 좋고 어떤 사람에겐 나쁘지.” “아빠는?” “아빠는... 네 생각엔 힘센 부자들 편에 서는 게 좋은 정부야,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는 게 좋은 정부야?”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는 정부.” “그럼 아주 나쁜 정부네.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
별 생각 없이 그의 말에 끔벅끔벅 대꾸했을 뿐인데, 마치고 나서야 나는 그와 ‘계급 문제’에 대해 대화했음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나는 얼떨결에 그와, 전체 사회성원에 공통된 선이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계급에겐 선이고 어떤 계급에겐 악일뿐이다,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이다, 따위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우리나라’ ‘우리민족’이라는 말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아이가 세상이 민족이나 국가보다는 계급으로 나눠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의식의 성인식’이라 할 수 있다. 성인식은 그런대로 잘 치러진 듯하다. 며칠 전.
“아빠, 일본사람들 전체가 나쁜 거야?” “왜 물어보는데?” “애들이 막 그러잖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일본 정부가 나쁜 거지 일본사람 전체가 나쁜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이었어?” “나하고 또 한명만.” “그래...” 그에게, 실은 네 동무들뿐 아니라 네 앞에서 어른 노릇을 하려드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여전히 세상이 민족이나 국가로만 나뉜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배계급에 늘 속고 뜯어 먹히며 살아간다, 말해주려다 말았다. 그의 마음속에 사회에 대한 의구심이나 분노, 혹은 연민이 더 많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겨레21)
2007/04/23 18:12 2007/04/23 18:12
2007/04/22 07:34
신앙을 갖는다는 건 나와 온 우주만물이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내 존재가 우주만물의 일부일 뿐이라는 절대 겸손이자 내 신념에 우주만물의 힘이 개입한다는 절대 용기이다.
2007/04/22 07:34 2007/04/22 07:34
2007/04/21 23:28
안치환이 보내준 9집. 세 번쯤 들었는데 ‘담쟁이’와 ‘세상이 달라졌다’가 가장 귀에 들어온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정희성의 시란다. 이런, 언제 정희성인가. 25년 전 내 동무들은 며칠 점심을 거른 돈으로 그의 시집을 샀었다. 근사한 예순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2007/04/21 23:28 2007/04/21 23:28
2007/04/19 17:36
똘망소년(나래 아빠)이 쓴 재미있는 글,
천사를 발견했어요
2007/04/19 17:36 2007/04/19 17:36
2007/04/1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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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멸에 실린 김대중의 일러스트. 책을 받아들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한 후배가 “이 그림의 압권은 가려진 아이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란다. 아믄, 내말이 그 말이다. 그 눈물이 이 그림을 ‘끔찍한 현실을 잘 드러낸 그림’ 이상이게 한다.
2007/04/18 11:16 2007/04/18 11:16
2007/04/07 04:43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를 절차적 차원으로 보는가 분배나 계급 문제를 살펴 보는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자유가 몰라보게 진전된 건 사실이다. 이젠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함부로 제한당하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가 오히려 더 퇴보한, 옛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퇴보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일까? 바로 아이들이다.
온 나라가 병영이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에게만은 자유가 있었다. 모든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며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 느린 시간, 어른이 보기엔 별 실용적 의미가 없어 보이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정서와 인간적 면모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어떤가? 그들의 삶은 감옥에서 지내는 수인과 다를 바 없다. 과거 방식으로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 즉 폭력이나 권위주의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을 구속하는 일은 이제 적어졌고 누구나 비판적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심한 매로 다스리는 교사는 더 이상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의 미래’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구속은 전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그 가공할 인권탄압을 ‘교육 문제’라 부른다.
한국은 IMF 이후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면서 무한경쟁 체제로 변화했다. 돈과 물질적인 가치가 삶을 지배하게 되었고, 군사 독재 시절에도 이어지던 공동체 정신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우애와 연대의 심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직격탄을 맞은 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젖을 떼자마자 경쟁의 바다에 던져지고 오늘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람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기른다. 옛날엔 보수적인 부모도 “동무들과 서로 돕고 양보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젠 진보적이라는 부모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동무는 경쟁자이며 경쟁자를 돕고 양보하라는 건 패배하고 도태되라는 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중학생 쯤 되는 아이들이 있는 집에 가보면 오늘 아이들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사춘기의 반항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고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짜증스럽고 종종 공격적이다. 부모들은 별 도리가 없다. 오늘 한국의 부모와 자식은 엘리트 체육에서 선수와 코치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선수의 성적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코치들은 선수의 인간적 면모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설사 문제가 보인다 하더라도 이미 과도한 훈련에 심신이 포화상태에 이른 선수에게 그런 부분까지 요구한다는 건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나는 지금 한국의 부모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이 무한경쟁의 바다에서 내 아이가 어찌 살아갈지 근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비난하겠는가? 나는 다만 아이들을 이렇게 키울 때 우리의 미래가 어떨지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과연 이 아이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우애나 연대 없이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이 소비나 물질적 축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 바로 그 순간들이라는 걸 안다. 우리가 그걸 아는 건 우리가 아이일 때 누린 자유롭고 느린 시간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자란 부모의 삶 덕이다. 그런데 날 때부터 경쟁의 감옥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적 외엔 눈을 감는 부모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행복을 알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무려 20여년의 인생을 수인처럼 살고 난 다음 무엇이 행복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든 지든 마찬가지다.
사회가 갈수록 보수화하고 진보운동이 쇠락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그래서 암울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암울한 미래가 우리 아이들을 통해 준비되고 있다. 아이들을 이렇게 키운다면, 보수와 진보가 한몸이 된 이 미친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공멸‘ 뿐이다. (한겨레21)
2007/04/07 04:43 2007/04/07 04:43
2007/04/0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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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일이더러 고꿈세에 가입인사 좀 하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딸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다. 현지는 어릴 적 처음 봤을 때 인형 같이 예쁘게 생긴 데다 외동딸이라 저게 필시 깍쟁이가 되지 싶었는데 갈수록 근사하게 크고 있다. 규일이는 고래 덕이라지만, ‘아이는 놀면서 배운다’는 규일이의 교육철학과 그들 부부의 사는 모습이 그대로 열매 맺는 것이리라. (김현지와 김건)
2007/04/06 23:35 2007/04/06 23:35
2007/04/05 12:46
고래를 추천해주세요
2007/04/05 12:46 2007/04/05 12:46
2007/04/04 15:24
FTA 대통령 특별담화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
나보다 힘없는 자가 내 먹이가 되고
내가 나보다 힘있는 자의 먹이가 된 것같이
보다 강한 나라의 축재를 복돋으사
다만 정의나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본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통치에 있사옵니다(상향~)

(고정희 유고시집)
2007/04/04 15:24 2007/04/04 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