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07/03/31 검열, 도리
  2. 2007/03/30
  3. 2007/03/29 이해가 돼
  4. 2007/03/28 목리
  5. 2007/03/27 사형
  6. 2007/03/26 오만
  7. 2007/03/23 개념 흐리기
  8. 2007/03/21 용기
  9. 2007/03/20 '하나'님
  10. 2007/03/19 마이앤트메리 4집
  11. 2007/03/16 루이스 신부의 편지
  12. 2007/03/15 출동
  13. 2007/03/14 폭력 메모
  14. 2007/03/13 고꿈세
  15. 2007/03/12 재개
  16. 2007/03/09 좋은 어린이 책
  17. 2007/03/08 41호
  18. 2007/03/07 아침
  19. 2007/03/04 천사를 죽이다
2007/03/31 10:43
불행한 소년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의견이 있었다. 의견은 많을 수록 좋다. 만 명에게 만 개의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다. 적어도 검열자의 태도를 가지진 말자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대할 때 그 내용과 맥락은 제쳐 둔 채 특정한 장면이나 표현만을 문제 삼아 금하고 허하려는 태도 말이다. 검열은 인민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 경우는 순진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악랄한 파시즘 체제도 ‘탄압하기 위해’ 검열하진 않는다. 모든 검열은 순진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덧붙여, 불행한 소년에 관한 책임은 작가가 아니라 그 작품을 ‘게재’한 고래(의 발행 겸 편집인인 나)에게 있다. 작가는 ‘무한하게 상상하고 무한하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포기한 작가는 그저 비굴한 기술자일 뿐이다. 처음 원고를 받고 편집장이 물었었다. “좀 걱정스러워들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자넨 어떤가?” “전 좋은데요.” “나도 좋네.” “알겠습니다.” “말이 좀 나오긴 할 거야.” “그렇겠죠?” “그러나 되돌려 보내거나 수정을 요구할 만한 이유는 없다고 보네. 손해를 좀 보더라도 가는 게 아이들에게 도리고.” “고래답고요.” "응."
2007/03/31 10:43 2007/03/31 10:43
2007/03/30 12:28
고래 42호 표지

아, 봄이구나.. ㅎㅎ
2007/03/30 12:28 2007/03/30 12:28
2007/03/29 14:59
난 이집에서 태어난 게 다행인 것 같아.
뭐?
내 친구 희섭이 있잖아. 걔네 아빠가 막 때린대.
많이?

머리 이렇게 잡아서 소파에 던지고 때린대. 진짜일까? 그렇게 때리는 아빠도 있어?
있지. 희섭이가 힘들겠구나.
집에 들어가기 싫어해. 오늘도 학교 앞에서 30분이나 있다가 들어갔어.
같이 있어줬어?
응. 방학 때는 친척집에서도 자는데 지금은 맨날 집에서 자야하니까 괴롭대.
그래.
그런데 아빠. 희섭이네 아빠 해병대라 되게 세대.
아이 때리는데 센 힘이 필요해? 힘은 약한 사람 보호하라고 기르는 거지.
희섭이 머리도 빡빡으로 깍게 하잖아. 맨앞에만 조금 남기고.
그래서 머리가 그렇게 짧구나.
응. 걔네 동생도 똑같아. 지난번에 희섭이네집에 갔는데 오싹했어.
아저씨가 있었어?
아니 안 계셨는데 걔네 엄마하고 동생이 표정이 이래.(눈을 가늘게 떠서 음울한 얼굴을 만들며) 다크써클 막 있고.
그래. 그런데 아저씨가 혹시 아줌마한테는 안 그런대?
그건 말 안하던데.
나중에 희섭이한테 한번 물어볼래?
희섭이가 상처받으면 어떡해?
상처받으면 안돼지. 희섭이가 그 얘길 또 하면 그 때 조심해서 물어봐 줄래?
알았어.
건이가 희섭이한테 더 잘해주면 좋겠네.
응, 그전엔 걔가 짜증내고 시비걸고 그러면 싫었는데 요새는 다 이해가 돼.
그래야지.

(저녁식사 중 김건과의 대화. 정확한 상황부터 알아보고..)
2007/03/29 14:59 2007/03/29 14:59
2007/03/28 11:47
이른바 발행인인 내가 봐도, 고래가그랬어는 참 희한한 물건이다. 우선 고래는 상품의 형태를 띠지만 상품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고래가그랬어 역시 기업의 형태를 띠지만 기업은 아니다. 단지 고래를 만들고 보급하기 위한 조직일 뿐이다. (주)고래가그랬어는 증식이 아니라 지속을 목표로 한다. 지금 고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좀 더 널리 알리는 일’이다. 고래는 조선일보를 애독하는 부모들에게까지 고래가 알려지길 바라진 않는다. 고래는 그저 고래를 알면 기뻐할 만한 부모들에게 고래가 충분히 알려지길 바란다. 고꿈세의 탄생은 그래서 든든하다. 매일 들어가보지만 이미 고꿈세만의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다. 착한 만화가 강풀이 슬그머니 들어와 인사를 하고, ‘랭보 엄마의 기다림’을 느릿하게 공유하며, 뉴욕의 고래지지자와 광명시의 독자가 키득거리며 대화한다. 따뜻하고 아기자기하며 무엇보다 ‘상향식’이다. 고꿈세의 ‘언니’ 노릇을 하고 있는 목리(박난이) 또한 참 희한한 사람이다. 그는 광고 일을 하는 아주 바쁜 사람인데 한달이면 혼자 수십명의 고래 독자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말하면 그가 아주 외향적인, 어디에서나 얼굴을 곧추 세우고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라 짐작하겠지만 전혀 그렇진 않다. 그는 늘 말하는 일과 자기 말을 곱씹는 일의 비중이 비슷할 만큼 부끄러움도 많고 자의식도 많은 그런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늘 궁금했다. 그런데 그의 스타일이야말로 강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고래라는 물건엔 그의 (세일즈맨이나 전도사와는 영판 거리가 먼) 스타일이 진실함과 신뢰감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희한한 물건에 역시 희한한 사람이 제격인가보다.

며칠 전, 목리에게 “고꿈세 회원이 몇이나 되어야 힘을 써요?” 물으니 “천 명은 되어야죠.” 한다. 그가 천 명이라면 천 명이 맞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교육 문제는 ‘별 수 없이 아이를 경쟁의 파도에 던져넣는 대다수’와 ‘아이가 경쟁만 배워서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까 염려하는 소수’ 사이의 긴장이기도 하다. 천 명은 그래서 너무나도 소중하다. 기꺼이 천 명 중의 한 명이 되어주시길..ㅎㅎ
2007/03/28 11:47 2007/03/28 11:47
2007/03/27 15:30
예수와 관련한 모든 의견과 견해, 그리고 실천들은 예수가 '왜 사형당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이를테면, 예수는 사랑과 용서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과 용서인데 왜 정치범으로 사형당했을까? 예수는 사랑과 용서이되 '사형당하는 사랑과 용서'인 것이다.
2007/03/27 15:30 2007/03/27 15:30
2007/03/26 15:45
오만은 대개 권위, 유명세 따위가 만들어낸 내 껍데기가 나를 잡아먹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만은 정의, 청빈, 헌신, 심지어 성찰에서 싹트기도 한다. 출발이 무엇이든 권위, 유명세와 결합하는 순간 오만의 씨앗이 된다. 우리는 온 사회의 칭찬과 존경을 받는 인사들에게서 종종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2007/03/26 15:45 2007/03/26 15:45
2007/03/23 20:03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지라” 탄식했다는데 지난 십여년 한국의 좌파가 꼭 그랬다. 극우파는 우파 노릇을 하고 개혁우파는 좌파 노릇을 하니 정작 좌파들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이거나 기껏해야 ‘진보개혁세력’이라는 해괴한 신조어로 개혁우파의 부록 취급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 사이 개혁우파는 한국사회를 오롯하게 신자유주의의 아가리에 집어넣었고 인민들은 ‘좌파정권’이 가져다 준 고단하고 존경 없는 삶과 캄캄한 미래에 진저리치며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몰려간다.

내 이야기에 이미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극우파니 개혁우파니 좌파니 하는 개념들 때문에 말이다. 얼마 전 이 잡지에 기고한 ‘10인의 진보논객’ 가운데에도 “그런 개념들은 지식인 끼리나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여럿이었다. 나 역시 모든 사람이 ‘아비투스’나 ‘장기지속’ 같은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개념을 모르면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불쌍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제 삶을 앗기지 않기 위해 알아야 할 최소한의 개념들은 있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인민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개념 흐리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 시작은 제 군사파시즘을 ‘한국식 민주주의’라 설파한 박정희다. “우리의 정치가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북한과 대치하는 한국 현실에선 최선의 민주주의다.” 지금 들으면 참으로 가소로운 소리지만 당시엔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에 빠져들었다. 박정희가 간 지 30여년, 이른바 민주화가 시작된 지 20년, 개념흐리기의 전통은 여전하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한국식 진보’로 바뀌었을 뿐이다. 요컨대 노무현이나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진보가 서구식 진보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수구세력과 대치하는 한국 현실에선 최선의 진보다.”

개념흐리기가 그 얼토당토않음에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한국 현실’이라는 포장 때문이다. 군사파시즘을 무작정 민주주의라 우기거나 신자유주의 개혁을 무작정 진보라 우기는 게 아니라 “물론 서구식 기준에서 볼 땐 아니지만”이라고 먼저 한 발 뺀 다음 “그러나 한국 현실에선” 하며 옭아매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사는 사회의 현실에 기반하여야 한다는 지당한 말씀에 반대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렇게 민주주의는 아주 오랫동안 유보되었고, 또 진보는 아주 오랫동안 유보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개념흐리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흐려진 개념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군사 파시즘’이라고 바로 세우고 ‘한국식 진보’는 ‘진보를 가장한 신자유주의 개혁’이라 바로 세우면 된다. 그러니 그런 와중에 “그런 개념들은 지식인 끼리나 쓰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건 적이 위험한 태도가 된다. 왜 ‘주가’나 ‘재테크’ 같은 말을 모르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서 ‘신자유주의’나 ‘좌파, 우파’는 “지식인들이나 쓰는 말”이어야 하는가?

‘주가’나 ‘재테크’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삶에서 떼어놓고 살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산다. 그러나 2007년의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나 ‘좌파, 우파’ 같은 개념을 삶에서 떼어놓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개념을 무시하거나 모를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개념이 가리키는 현실이 내 삶에서 생략되거나 사라지진 않는다. 그 개념들은 단지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간이나 뇌, 콩팥처럼 붙어있는 현실이다.

초등학교 5학년 글짓기 시간, 짐짓 분개하여 데모하는 대학생 누나 형들을 ‘한국 현실’을 근거로 비난하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얼마 전 한나라당과 열우당의 미세한 차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 말을 ‘한국 현실’을 근거로 비난하던 어느 대학생이 그 기억에 겹쳐진다. 현실은 슬프게 반복되고 있다, 아직은. (한겨레21)
2007/03/23 20:03 2007/03/23 20:03
2007/03/21 08:22
요즘은 그래도 사흘에 한번은 신문(한겨레)을 보는 것 같다. 여전히 '진보개혁세력‘이라는 관점이나 설파하는 정치면이야 ’신선한 아침‘을 사수하기 위해 넘기고 다른 면이나 대충 훑어보지만 말이다. 그래도 기사를 읽다 기자 이름을 기억하기도 하는 걸 보면(김소민이나 한승동 같은) 아주 대충은 아니다. 오늘은 우성숙이라는 엄마 이야기가 좋았다. 그의 방법이 유일하게 훌륭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의 선택은 유일하게 훌륭한 선택이 틀림없다. 그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2007/03/21 08:22 2007/03/21 08:22
2007/03/20 21:34
왜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하느님’이라 하냐고 물어오는 이들이 종종 있어서 참고로 말하면, 지금 한국에 들어와있는 주요한 기독교 교단 네 개(카톨릭,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 가운데 ‘하나님’이 하는 곳은 개신교뿐이다. 나머진 다 ‘하느님’이라 한다. 그러니 하느님이라 하는 게 그리 이상할 건 없다. 나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하느님이라 부르든 하나님이라 부르든 하느님(하나님)의 실체가 달라지는 게 아니니 말이다. 다만 개신교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주장하는 데서 개신교의 배타성이 느껴지긴 한다. 그들은 ‘하나뿐인 하나님’이어서 ‘하나’님이라고 한다지만 초기 성서번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아래아 붙은)+님’에서 온 것이다. 설사 개신교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하나뿐’이라는 뜻이라 하더라도, ‘하나’는 곧 ‘전부’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온 우주만물의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개신교와 기독교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불교와 이슬람의 하나님이며 심지어 무신론자의 하나님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인가.
2007/03/20 21:34 2007/03/20 21:34
2007/03/19 17:54
조금만 담백하게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7/03/19 17:54 2007/03/19 17:54
2007/03/16 12:34
기차길옆작은학교가 20주년 공연을 한다는 연락을 받고 홈피에 들어가보니 루이스 신부의 축하 편지가 있다. 꼰솔라따 수도회 소속 신부인 그는 93년 기차길옆작은학교 식구들을 만나 10여년 동안 함께 했고 지금은 브라질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배우고 되새길 게 많은 편지다.



우선 이 글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인사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에 기뻐요.
먼저 20주년이 맞이한 공동체 식구들 하나하나에게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고 제 삶의 귀한 부분이라고 여겨요. 그래서 제가 이 공동체와 여러분들의 역사에 아주 작은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영광이에요. 한국을 떠나 브라질에 살게 되어 몸은 멀리 있지만 생각으로 늘 가깝게 느껴요. 또한 함께 했던 그때를 뒤돌아 볼 때마다 영감을 받아 제 삶에 힘이 되어요.

이 공동체가 20 주년이 지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 했을 때 여러 가지가 떠올랐어요.
“어떤 꿈을 따라 가려고 20년 동안 공동체로 함께 하는 것. 자본재와 소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 안에서 가난의 가치관을 따라가는 것. 어렵고 약한 이들이 살 희망을 찾아낼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생활하려고 하는 것. 씨앗처럼 작고 새 생명의 힘이 갖는 것을 끝까지 원하는 것. 나아가야 할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 꿈을 계속 따라갈 수 있는 힘을 마음 안에서 찾아내는 것.”

아가방에서 기차길 옆 공부방, 그리고 작은 학교로 가는 과정에서 모든 회의나 활동, 행사 결정들을 위와 같은 가치에 따라 한 것을 보면 여러분의 공동체가 남다르게 보여요. 그 것은 참 아름다운 나무가 이 땅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공부방 아이들을 보면 그 의미를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어요. 만석동 아이들은 자기 아픔을 같이 나누고, 감추는 눈물을 서로 닦아주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가 가치 있다는 걸 믿게 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사랑과 돌봄을 통해 자신 안에 잠재해 있는 재능을 드러내게 되었죠.

그러나 이모 삼촌들은 아이들을 보며 자신들이 준 것보다 얻은 것이 많다고 말할 거예요. 저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 것은 주는 것 보다 받는 것은 더 많다는 사랑의 기적이에요. 20년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똑같은 열렬한 마음으로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사랑 덕분이에요. 희망 주는 것은 사랑 그 자체가 넓게 퍼지는 것이고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영향을 미쳐 때가 되면 같은 열매가 맺게 될 것이에요.

멀리 있으면서 공동체 식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공동체가 이미 역사도 있고 열매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씩 같은 꿈을 꾸고 있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 노력도 하고 희생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 꿈이 이미 피처럼 여러분들의 혈관 안에 돌아가고 있어요.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그 곳에 있다는 복음의 말씀대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공동체를 이루는 여러분들의 꿈은 각자의 보물이 되고, 그 보물을 얻기 위해 가졌던 개인 바람이나 계획까지 버려도 된다는 마음으로 생활하시기를 바라요.

어려움을 겪을 때나 포기할 유혹이 올 때에 힘든 선택을 했던 것을 잊지 마시고 그만큼 보람 있는 부름을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 하시고 힘내시기를 빌어요.

20추년 축하 인사와 사랑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희망의 기쁨을 함께 보내요.


마 루이스
2007/03/16 12:34 2007/03/16 12:34
2007/03/15 13:08
교하 들을 달렸다. 감기와 기관지염과 남은 기침 덕에 몇 주 만의 라이딩이다. 뒷샥을 풀고 출렁출렁 몸을 스쳐지나가는 공기를 느끼다 다시 샥을 잠그고 상체를 숙이고 핸들을 당기며 가속하기를 반복한다. 지면의 요철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게 생각보다는 다리 근육이 많이 위축된 것 같지 않다. 다행이다. 멀리 들 한 가운데 소방차 여러 대가 서 있다. 재미 삼아 다가가 보니 소방수들이 타버린 억새 숲을 지키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살피며 서있다. 사방이 베어버린 논바닥이고 곡릉천과 작은 지천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아무리 봐도 불길이 번질 때가 없는데, 퍼포먼스하듯 그들은 서있다. 예고 없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들에겐 때론 이런 한가로운 출동이 필요한 모양이다.
2007/03/15 13:08 2007/03/15 13:08
2007/03/14 10:09
최규석 만화와 관련한 이런저런 의견들을 읽다가 조금씩 마음이 답답해졌다. 다들 일리가 있는 말들인데 공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폭력은 나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 만화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아이에게 살해 장면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할 건 그런 지당한 말씀이나 논평이 아니라 아니라 그 만화에 그려진 주인공의 참혹한 인생과 그 인생을 그렇게 만든 가짜 천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가짜 천사들에 둘러쌓여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인생, 에 대해서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트랙백에 붙은 한 의견이 참으로 반갑다. 그 주인공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더이상 지당한 말씀이나 논평은 불가능한 법이다. 안그래도 폭력(과 비폭력)에 대해 한번 쓸 생각이지만, 메모 삼아 몇자 적어본다.

1. 세상에 모든 폭력주의자들은 비폭력주의자다. 다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폭력을 사용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를테면 지금 지구를 대표하는 폭력주의자라 할 부시도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저 “폭력은 나쁘다”라고 말하는 건 하나마나한 일이다. 어떤 폭력주의자도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다.

2. 진정한 비폭력주의는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는 일년 내내 뺨한번 맞을 일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긋이 눈을 내려깔고 설파하는 게 아니라,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에 함께 노출된 사람들만이, 분노와 원한을 넘어 이루는 숭고한 경지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비폭력주의자들이 반드시 폭력에 희생 당한 건 그래서다. 목숨이 위협당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다.

3. 현장에서 벗어난, 현장을 구경하고 논평하는 비폭력주의는 폭력주의자들(역시 비폭력주의자인)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게릴라나 똑같아!”라는 말은 이스라엘 극우세력을 향한 가장 흐뭇한 선물이자, 미사일에 맞아 찢겨진 새끼를 부둥켜 않고 오열하는 가난한 팔레스타인 어미의 가슴에 꽂는 더 끔찍한 미사일이다.

4. 폭력의 실체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이해관계’다. 폭력은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제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수단이다. 폭력의 목적은 폭력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극악한 폭력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빼앗는 것’이다. 그런 폭력은 폭력적으로 보이긴커녕 이런저런 명분과 대중 조작으로 아름답게 포장된다. 애석하게도 모든 순진한 비폭력주의가 그 포장지 노릇을 한다.
2007/03/14 10:09 2007/03/14 10:09
2007/03/13 07:27
몇몇 고래 독자들과 열혈 지지자들이 의기투합하여 고래 독자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고꿈세’(고래가 꿈꾸는 세상). 고래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응원도 하고 야단도 치고 또 대한민국에서 아이 키우는 사람들끼리의 동병상련의 정도 나눌거란다.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다. 많이들 참여하시어 우주의 기운을 한데 모아주시길..

(방금 발견한 흐뭇한 게시물 한 개)
2007/03/13 07:27 2007/03/13 07:27
2007/03/12 02:47
전엔 그래도 한국 사회가 비틀비틀하면서도 진보하고 있고 나는 내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근래 들어선 완전히 망하는구나 싶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져온 ‘가짜 진보’ 정권들은 신자유주의화로 현실을 망가트렸고 진보라는 개념을 똥통에 빠트림으로써 미래를 망가트렸다. 시절은 그러한데 ‘잠행’ ‘침묵’ 따위 소리를 들으며 지내는 게 적이 심란스러웠다. ‘진보논쟁’인가 하는 이름으로 진보와 개혁은 다르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제사 이런 소리들을 하나 한심스럽기도 하고 이제라도 이런 소리를 하니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여튼 그런 상념의 끄트머리에서 제도지면 글쓰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달 말부터 한겨레21에 칼럼을 쓰기로 했다. 4년 만의 ‘재개’다.
2007/03/12 02:47 2007/03/12 02:47
2007/03/09 13:34
광주 애듀컬처사업단 실무자 몇사람이 방문했다. 그들이 말하길 고래에 아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이 들어 있더란다. 내가 대답했다. “저나 편집장이나 고래를 만들면서 무슨 아동심리랄까 출판론이랄까 이론을 세워서 일해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들으면 오히려 왜 그렇게 된 걸까, 생각해보게 됩니다.(웃음) 그런 생각은 듭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전적으로 아이들 편에서 모든 걸 결정해왔습니다. 책 이름도 그렇고 만화를 많이 싣는 것도 그렇고 좀 어수선해보이는 구성도 그렇고 다 아이들의 듯을 따른 것입니다. 대개 좋은 어린이 책이라고 하면 ‘어른들이 보기에 아이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책’을 말합니다. 고래는 그런 태도에 분명히 반대합니다. 이를테면 고래창간 무렵에 손꼽히는 어린이책 출판사 사장분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대한민국 아이들 중에 저희 책 좋아하는 아이 한명도 없어요. 다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그래도 이런 책은 읽혀야 된다고 생각해서 사주는 것이죠.’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저는 참 씁쓸했습니다. ‘아이들 책의 주인은 아이들인데 왜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책이 좋은 어린이책인가?’ 대개 어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어린이책은 아이들이 재미없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건 어른들이 마땅치 않아 하는 경우가 많지요. 고래의 편집방향은 아이들이 재미있어하고 좋아하는 게 첫째이고 그 다음이 건강한 의식을 가진 어른들이 아이에게 권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저는 책뿐 아니라 행사든 사업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아이들과 관련한 모든 일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돌아가고 AGI 김영철 대표가 방문했는데 그도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고래를 만든 이유는 분명히 있지만 고래의 방식이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해본 적이 없는데 밖에서 고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거꾸로 깨닫고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2007/03/09 13:34 2007/03/09 13:34
2007/03/08 12:16
고래 41호 표지가 참 예쁘다. 등장인물은 심뚱이와 맞짱구. 지난 가을부터 올 5월까지 ‘정상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편집이나 구성, 그리고 디자인에선 이미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조중사, 백합, 소정이 고생이 많았다. 특히 소정(디자인팀장)은 유학까지 미루면서 일에 몰두 짧은 시간에 고래를 깔끔하게 만들어 놓았다. 두께도 많이 늘어서(280면) 아이들에게 좀더 씩씩하게 쥐어줄 만하다. 인쇄가 영 불안정한데 넉넉하지 않은 고래로선 참 쉽지 않은 문제다. 내가 인쇄에 자신있고 형편이 괜찮은 인쇄소 사장이면서 고래를 안다면 “종이만 갖고 오세요.” 혹은 “원가만 받을게요.” 하겠구만.. 인생엔 가끔 멋도 필요한 법이다.
2007/03/08 12:16 2007/03/08 12:16
2007/03/07 07:56
아침엔
모든 날씨가 근사하다.
2007/03/07 07:56 2007/03/07 07:56
2007/03/04 00:21
최규석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로 출발한 문제적 만화가다. 고래 창간 때부터 그의 작품을 싣고 싶었으나 그의 형편(한동안 거처를 마련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한) 때문에 미루어지다가 지난해 말부터 ‘코딱지 만한 이야기’로 고래에 참여하고 있다. ‘코딱지 만한 이야기’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우화다. 짐작대로(혹은 기대했던 대로) 최규석의 우화엔 모순과 불의로 가득찬 현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런 태도와 ‘어린이잡지’는 문제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어른들, 특히 한국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겐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고래 40호의 코딱지 만한 이야기 ‘불행한 소년’에 대해 몇몇 독자들이 항의했고 몇몇 독자들이 절독했다. 발행인의 해명을 요구해온 분들도 있는데 그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내 생각을 조금 적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천사는 천사가 아니라 천사의 탈을 쓴 악마입니다. 세상엔 그런 가짜 천사들이 참 많습니다. 무작정 운명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든가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고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든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저항을 폭력이라 몰아붙인다거나 하면서 힘센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가짜 천사들 말입니다. 아무 죄없는 사람이 일생을 그 가짜 천사에 속아 살았다면 그에겐 분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현실의 추악함을 되도록 보여주지 않고 싶어 합니다. 하긴 누가 그게 즐겁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들에게 현실의 추악함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추악함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단지 그 추악함을 감출 뿐입니다. 그것은 늘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설명되지만 실은 우리 속을 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추악함을 만든 게 바로 우리라는 것, 아이들은 그 추악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아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 지옥에 빠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이들은 그런 가짜 천사들이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그 추악함을 아이들에게 알려줄 정직함의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그 방법은 가장 신중하고 사려깊어야 합니다. 예술작품은 그런 면에서 매우 훌륭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예술작품을 통해 그런 현실의 추악함을 간접 체험하면서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 작품을 보고 어른들이 걱정하듯 심각한 충격이나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나쁜 천사네’ 할 뿐입니다. 천사는 무작정 착하고 좋다는 판타지가 깨지는 건 아이들의 마음을 더럽히는 걸까요, 현명하게 하는 걸까요? 어른들, 특히 한국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그런 강박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매우 위험합니다. 현실은 그렇게 맑고 깨끗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박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아이는 그런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당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거나 그런 추악한 현실에 같은 추악함으로 적응하는 비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듯 말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불편함이 아니라 아이들의 인생입니다. 천사를 죽이는 장면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시길 권합니다. 이 작품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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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4 00:21 2007/03/04 0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