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에 해당되는 글 13건
2007/01/31 23:13
이즈음 부모들이 아이 교육 문제와 관련하여 갖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철학이 없다는 것일 게다. 이를테면 아이에게 ‘영어 공부를 어떻게 시킬 것인가’에는 거의 모든 부모들이 열띤 관심을 갖지만 정작 아이가 ‘왜 영어 공부를 하는가’를 고민하는 부모는 이상하게도 거의 없다. 그들은 아이가 영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접은 채 무작정 아이에게 영어 공부를 강요하고 아이가 영어 공부를 못한다고 근심하고, 심지어 야단친다. 물론 이건 영어 공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국어도 수학도 사회도 과학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이 아이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에 열중하면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아이들은 그들의 가르침대로 철학 없는 인간으로 자란다. 아이들은 경쟁만 아는 영악한 소수로, 그 소수를 위해 인생을 보내는 다수의 바보들로 자라간다.
2007/01/30 01:26
예수전 연구반 식구들 몇몇과 고래독자 커뮤니티 일로 인사동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남자들 가사노동’ 이야기가 나왔다. 당연히 여자들(이미 당한, 혹은 앞으로 당할)은 자못 분기가 어려 제 이야기를 돌아가며 했다. 나중에 내가 말했다. “그런데 가사노동이다 뭐다 다 떠나서, 사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옆에서 노는 놈은 나쁜놈이야.”
2007/01/27 02:50
2004년 2월 이 블로그를 열면서 1998년 이후 내가 쓴 거의 모든 글들(두 권의 책으로 묶인 글들을 포함하여)을 올린 건 누구나, 돈 주고 책을 사지 않고도, 내 글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선택은 내 마음을 편하게, 얼마간은 떳떳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책으로 읽는 것과 모니터로 읽는 것의 차이를 인정하기로 했다며 책으로 묶여진 글들, 말하자면 2005년 5월 이전의 글들을 안보이게 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이번엔 ‘뭘 그렇게까지 했나’ 싶어 마음이 종종 불편했다. 해서 ‘절충’하여 블로그를 연 시점부터 글은 다시 연다. 변덕을 용서하시길. ㅎㅎ
2007/01/26 11:10
2007/01/25 09:58
2007/01/24 17:07
정대화 같은 사람들이 열을 올리고 있는 “진보 개혁 세력이 힘을 모아 수구 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 는 주장은 얼핏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적어도 현재 상태로 볼 때 다음 선거에서 대통령은 백퍼센트 한나라당에서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화당과 민정당의 법통을 이어받은 군사 파시즘의 잔재들이 다시 집권한다는 건 매우 모욕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현실을 더 깊은 미궁에 빠트리자는 소리일 뿐이다. 오늘 한국 사회가 이 꼴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수구세력 때문이 아니라, 개혁세력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개혁세력을 진보라 믿고 그들에게 사회진보의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몇 년 사이 개혁세력은 한국사회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아가리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노무현 씨는 제 정권을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사실을 스스로 시인한 바 있다.(‘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가부장 여성주의’나 ‘비폭력 조폭’ 같은 정신분열적인 말이긴 하지만, 곧 죽어도 자신을 진보라 포장하고 싶은 열망에서 나온 말이니 넘어가기로 하자.) 그리고 오늘 이미 출산율이 세계 최저에 이를 만치 캄캄한 현실은 그 어김없는 결과다.
정대화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전선을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전선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조금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 전선이 가짜라는 걸 알 수 있다. 수구와 개혁은 적대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가장 듬직한 동지이다. 개혁세력이 자신을 진보로 포장할 수 있었던 건 대개 수구세력 덕이었다. 그놈들이 만날 빨갱이다 좌파다 해준 덕에 순진한 사람들은 개혁세력을 진보세력이라 믿게 된 것이다.
개혁세력은 수구세력의 도움으로 진보로 포장할 수 있었고 개혁이 진보를 자처하니 극우파인 수구는 아주 멀쩡한 보수로 행세할 수 있었다. 이런 거대한 ‘이념 흐리기’(혹은 ‘이념의 좌향 조정’)가 바로 오늘 한국 사회를 정신적 미궁에 빠트린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좌를 좌라 우를 우라 못하는 사회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념 흐리기‘의 원조는 극우파시즘을 ‘한국적 민주주의’라 주장하던 박정희다. 극우 파시즘이 민주주의니 극우 파시즘이 아닌 모든 정신은 빨갱이요 간첩일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김영삼씨도 빨갱이로 몰렸고 김대중 씨는 사형선고까지 받았었다. 그런 이념 흐리기가 박정희의 시절을 지속하는 힘이었다. 이제 박정희가 죽은 지 30여년 이른바 민주화가 시작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에 이념 흐리기는 달라진 게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렇다면 당신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좋다는 말인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하겠다. 물론 나도 이명박이나 박정희의 ‘정치적 딸’이 내가 사는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건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들이 집권한다고 해서 당장 한국사회가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소리다.
군사 파시즘 시절이 인민들은 민주화를 열망했는데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인민들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고 있었던 시절이라는 건 인텔리들이 책상에서 만든 가설일 뿐이다. 얼마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권력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인민들의 의식 수준의 반영이다. 오늘 한국 인민들의 의식 수준은 적어도 어떤 인간이 대통령이 되어도 사회가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정도는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한나라당과 열우당(혹은 개혁세력이 만들어낼 신당)이 정책상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선 이미 오래 전에 노무현 씨가 한나라당과 합칠 것을 제안하면서 스스로 확인한 바 있다. 개혁은 단지 덜 권위주의적인 보수일 뿐이다. 인민의 삶과 관련하여 한나라당이 집권해서 더 새롭게 나빠질 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진보를 자처하진 못하기에 반인민적 정치와 싸워나가기엔 훨씬 더 정당한 상황이 된다는 이점도 있다.
물론 덜 근본적인 차원에서 두 세력의 외양은 달라 보인다. 이를테면 한쪽은 인혁당 사건의 무죄 판결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만 다른 한쪽은 그 판결을 마땅치 않아 한다. 그러나 오늘 두 세력은 인민의 삶에 반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좇는다는 점에서 죽은 인혁당 사건의 주인공들의 정신에 똑같이 적대적이다.(계속)
그러나 그런 주장은 현실을 더 깊은 미궁에 빠트리자는 소리일 뿐이다. 오늘 한국 사회가 이 꼴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수구세력 때문이 아니라, 개혁세력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개혁세력을 진보라 믿고 그들에게 사회진보의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몇 년 사이 개혁세력은 한국사회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아가리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노무현 씨는 제 정권을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사실을 스스로 시인한 바 있다.(‘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가부장 여성주의’나 ‘비폭력 조폭’ 같은 정신분열적인 말이긴 하지만, 곧 죽어도 자신을 진보라 포장하고 싶은 열망에서 나온 말이니 넘어가기로 하자.) 그리고 오늘 이미 출산율이 세계 최저에 이를 만치 캄캄한 현실은 그 어김없는 결과다.
정대화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전선을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전선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조금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 전선이 가짜라는 걸 알 수 있다. 수구와 개혁은 적대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가장 듬직한 동지이다. 개혁세력이 자신을 진보로 포장할 수 있었던 건 대개 수구세력 덕이었다. 그놈들이 만날 빨갱이다 좌파다 해준 덕에 순진한 사람들은 개혁세력을 진보세력이라 믿게 된 것이다.
개혁세력은 수구세력의 도움으로 진보로 포장할 수 있었고 개혁이 진보를 자처하니 극우파인 수구는 아주 멀쩡한 보수로 행세할 수 있었다. 이런 거대한 ‘이념 흐리기’(혹은 ‘이념의 좌향 조정’)가 바로 오늘 한국 사회를 정신적 미궁에 빠트린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좌를 좌라 우를 우라 못하는 사회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념 흐리기‘의 원조는 극우파시즘을 ‘한국적 민주주의’라 주장하던 박정희다. 극우 파시즘이 민주주의니 극우 파시즘이 아닌 모든 정신은 빨갱이요 간첩일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김영삼씨도 빨갱이로 몰렸고 김대중 씨는 사형선고까지 받았었다. 그런 이념 흐리기가 박정희의 시절을 지속하는 힘이었다. 이제 박정희가 죽은 지 30여년 이른바 민주화가 시작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에 이념 흐리기는 달라진 게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렇다면 당신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좋다는 말인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하겠다. 물론 나도 이명박이나 박정희의 ‘정치적 딸’이 내가 사는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건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들이 집권한다고 해서 당장 한국사회가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소리다.
군사 파시즘 시절이 인민들은 민주화를 열망했는데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인민들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고 있었던 시절이라는 건 인텔리들이 책상에서 만든 가설일 뿐이다. 얼마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권력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인민들의 의식 수준의 반영이다. 오늘 한국 인민들의 의식 수준은 적어도 어떤 인간이 대통령이 되어도 사회가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정도는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한나라당과 열우당(혹은 개혁세력이 만들어낼 신당)이 정책상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선 이미 오래 전에 노무현 씨가 한나라당과 합칠 것을 제안하면서 스스로 확인한 바 있다. 개혁은 단지 덜 권위주의적인 보수일 뿐이다. 인민의 삶과 관련하여 한나라당이 집권해서 더 새롭게 나빠질 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진보를 자처하진 못하기에 반인민적 정치와 싸워나가기엔 훨씬 더 정당한 상황이 된다는 이점도 있다.
물론 덜 근본적인 차원에서 두 세력의 외양은 달라 보인다. 이를테면 한쪽은 인혁당 사건의 무죄 판결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만 다른 한쪽은 그 판결을 마땅치 않아 한다. 그러나 오늘 두 세력은 인민의 삶에 반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좇는다는 점에서 죽은 인혁당 사건의 주인공들의 정신에 똑같이 적대적이다.(계속)
2007/01/23 12:33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오랜 만에 전태일 유서를 읽다 이 구절이 다시 다가왔다.
전태일의 문장은 읽을수록 지적 통찰이 넘친다.
2007/01/14 23:25
섬긴다라는 말도 아주 협의적으로 해석이 많이 되요. 네 이웃을 섬겨라 이런 이야기가 이웃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음식도 나눠먹고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인사성 밝지 않아도 근본적인 삶의 태도에서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지요. 섬긴다는 말의 표피적인, 정서적인 느낌 있잖아요. 어떤 사람들 겸손하고 성찰적인 태도, 외형적으로 볼 때 그런 걸로 해석되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은데, 저는 그것 보다는 계속 밑으로 내려가는 거라고 보는 겁니다. 힘을 얻고 세를 불려서 위에서 밑으로 세상을 바꾸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우리는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의 태도는 주류 사회에서 힘을 얻고 지위에 올라서 좋은 태도로 세상을 바꾼다가 아니라 실재하는 밑바닥의 문제, 가장 극명한 현실적인 모순 그 문제에 계속 집착하는 것입니다. 왜 섬길 수밖에 없냐하면 사회현실에 참여해도 이런저런 시민운동을 하면 사회 중상층부와 접점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런데 여전히 가장 계급적이고 가장 극명한 모순과 관련된 운동을 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배제되어 있지요. 섬기려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처지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당대 현실에서 가장 신앙적인 차원에서든, 이념적인 차원에서든, 가장 극명한 모순, 가장 처절한 상황 여기에 연대하고 싸움을 하게 되면 주류 사회의 위치하고는 더 멀어지기 때문에 섬기는 위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섬기라는 말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에 투신하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태도를 취하라,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성찰에 가득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애가 끓는 사람들과 연대를 하라는 것이고, 그건 섬기는 위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녹취_김광현)
2007/01/13 00:35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고 하는데 먼저 누가 장애인인가를 우리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진짜 장애인들이잖아요. 돈, 사회적 체면, 미래에 대한 통속적인 욕망 이런 거에 사로잡혀서 뭐가 옳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고 어떻게 가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거야말로 진짜 장애인이지요, 이거 병신입니다. 이걸 보고 멀쩡한 병신이라고 하는 건데, 갈 수 없어서 못 가는 장애보다는 훨씬 중증 장애지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못 가는 거니까. 어른들과 아이들의 차이는 그들이 생각과 행동을 그나마 일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옳은지 몰라서 그렇게 안하나, 제가 만날 농담처럼 이야기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 사회나 사람들의 삶의 철학은 두 가지 정도 되잖아요. 사는 게 다 그런거지,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인데. 그거 이외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모든 사회가 돌아가는 거나 개인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전부 거기에 입각해서 합니다. 아이들 교육도 그렇게 하고. 진짜 다 장애인들이예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 인간적으로 훌륭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요, 적은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더 적지요. 이렇게 따진다면 육체적으로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저렇게 태어나도 인간인가 중증 장애인, 우리가 가만히 우리 스스로를 되새겨보면 우리가 그들보다 더 중증 장애인이지요. 이것은 레토릭이 아니라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아주 끔찍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들이 추해 보이거나 우리보다 모자라 보이거나 그래 보이지 않고 오히려 열등감을 느낄 수 있어요.
사람이 그렇잖아요, 조금 아플 때, 쉽게 말해서 몸이 제대로 안 돌아갈 때, 그 때는 평소에 안했던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니까, 좀 더 겸손해지기 때문에. 그러나 장애인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체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여러가지 면에서 지금 이야기한 진짜 장애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나을 확률이 많습니다. 우량한 조건을 가졌으니까, 왜냐하면 몸의 곤란이 자신의 영적인 타락, 통속성을 우리보다는 조금 더 건강하게 해 줄 가능성이 많다, 덜 썩게. 물론 모든 장애인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건 아니지만, 몸이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위세가 있고 외형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멀쩡해서 열등감도 없고 되돌아 볼 기회가 없는 사람에 비해서는 장애인들이 우량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위 예수에 대해 고민하든 신앙하든 하는 사람이라면 장애라는 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상인이고 그들은 내가 돕고 동정해야 할 장애인이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 할 장애인들이지요. (녹취_김광현)
사람이 그렇잖아요, 조금 아플 때, 쉽게 말해서 몸이 제대로 안 돌아갈 때, 그 때는 평소에 안했던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니까, 좀 더 겸손해지기 때문에. 그러나 장애인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체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여러가지 면에서 지금 이야기한 진짜 장애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나을 확률이 많습니다. 우량한 조건을 가졌으니까, 왜냐하면 몸의 곤란이 자신의 영적인 타락, 통속성을 우리보다는 조금 더 건강하게 해 줄 가능성이 많다, 덜 썩게. 물론 모든 장애인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건 아니지만, 몸이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위세가 있고 외형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멀쩡해서 열등감도 없고 되돌아 볼 기회가 없는 사람에 비해서는 장애인들이 우량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위 예수에 대해 고민하든 신앙하든 하는 사람이라면 장애라는 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상인이고 그들은 내가 돕고 동정해야 할 장애인이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 할 장애인들이지요. (녹취_김광현)
2007/01/10 23:42
“사랑합니다. 고객님.” 이 소리 때문에 114에 전화하기가 두려웠는데 바꾼 모양이다. 만일 114 안내를 하는 여성노동자가 수많은 불특정 고객을 상대로 “사랑합니다. 고객님.” 했다면 별 게 아닐 수 있다. 요즘 다 그러니까. 그러나 한 남성을 상대로 그렇게 해야 하는 건, 전화를 걸어온 한 낯모르는 남성에게 애교가 넘치는 목소리로 “손님, 사랑해요.”라고 말해야 하는 건 인권 문제였다.
친절이 사라진 세상을 ‘상업적 친절’이 채워가고 있다. 그 덕에 정당한 수준의 친절은 불친절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연체'라도 한번 되어 그 이면을 겪어보면 이 상업적 친절이 얼마나 요사스런 것인지 단박에 알게 된다.
친절이 사라진 세상을 ‘상업적 친절’이 채워가고 있다. 그 덕에 정당한 수준의 친절은 불친절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연체'라도 한번 되어 그 이면을 겪어보면 이 상업적 친절이 얼마나 요사스런 것인지 단박에 알게 된다.
2007/01/08 17:10
요즘 같은 살풍경한 세상에선 남을 웃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맞을 때 개그콘서트를 챙겨보게 되는 건 그래서일 거다. 개그콘서트엔 빼어난 연기자들이 많다. 아주 많지만 그 중에서도 김준호와 김병만이 호감이 간다. 이 자그마한 남자들은 튀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채워가는 힘이 있다. 두 사람의 운동으로 다져진 몸동작도 보기 좋다. 프로그램을 다 챙겨보진 못하지만 동영상을 찾아보는 코미디도 있다. 웃음충전소의 ‘타짱’인데 김준호의 능란한 진행에 슬랩스틱을 넘어 자학, 자해에 가까운 연기를 감행하는 연기자들을 보노라면 감탄사가 나온다. 5연승을 하던 양배추는 6회에서 윤성호에게 침몰했다. 윤성호와 키스신을 벌인 보조연기자의 마지막 다리 연기는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양배추는 7회에서 다시 제 자리를 되찾는다. 뭣 같은 세상 살다 아무 생각없이 웃고 싶을 때 한번들 찾아보시길.
(어느 신문에선가 보니 타짱을 저질 코미디란다. 그 기사에서 말하는 품격 있는 코미디란 아마도 말로 하는 코미디일 텐데 몸으로 하는 코미디가 말로 하는 코미디보다 저급하다는 건 참으로 무식한 말이다. 그럼 찰리 채플린은 코미디 역사상 가장 저질 코미디언인가? 배웠다는 놈들의 한국 코미디 비판은 꽤 오래 전부터 읽은 기억이 나는데 슬랩스틱이 대세일 땐 “말로 못 웃기니 엎어지고 자빠지고 한다”고 개탄하고 개그맨들이 처음 출현해서 말로 하는 코미디가 유행하기 시작하자 “몸을 사용하지 않고 말장난만 늘어놓는다”고 개탄하는 게 그들이었다. 한국에 아직 채플린이나 우디알랜 같은 코미디언들이 없다는 건 나 역시 아쉽지만 코미디를 한국의 다른 사회문화 부분과 견줘보라.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
(어느 신문에선가 보니 타짱을 저질 코미디란다. 그 기사에서 말하는 품격 있는 코미디란 아마도 말로 하는 코미디일 텐데 몸으로 하는 코미디가 말로 하는 코미디보다 저급하다는 건 참으로 무식한 말이다. 그럼 찰리 채플린은 코미디 역사상 가장 저질 코미디언인가? 배웠다는 놈들의 한국 코미디 비판은 꽤 오래 전부터 읽은 기억이 나는데 슬랩스틱이 대세일 땐 “말로 못 웃기니 엎어지고 자빠지고 한다”고 개탄하고 개그맨들이 처음 출현해서 말로 하는 코미디가 유행하기 시작하자 “몸을 사용하지 않고 말장난만 늘어놓는다”고 개탄하는 게 그들이었다. 한국에 아직 채플린이나 우디알랜 같은 코미디언들이 없다는 건 나 역시 아쉽지만 코미디를 한국의 다른 사회문화 부분과 견줘보라.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
2007/01/06 01:05
지난달 초 트래픽 문제도 있고 해서 호스팅회사를 옮기면서 몇 가지 에러가 생겼는데 수정 작업을 조금 하다가 이참에 블로그를 개비하기로 했었다. 무버블타입을 사용 중이지만 사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디자인을 빼곤 모조리 후배가 만들어준 거라 무버블타입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서 테터툴즈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옮긴 호스팅회사의 서버가 테터툴즈의 신버전과 맞지 않았다. 결국 다시 호스팅회사를 옮기고 테터툴즈로 새 블로그를 만들어야 하게 되었는데 대단치도 않은 블로그를 갖고 이 무슨 난린가 싶어 한 호흡 미뤄두고 있다.
2007/01/05 22:03
“잘 살아내고 계신가”요?
선배에겐 이미
“삶 자체의 복잡미묘한 단애들을 섬세하게 보듬어 안는 동지”가
여럿 있지요. 기적처럼..
선배의 영성이 그걸 가능하게 하지요.
이런 말들은 선배를 “신화적 인물로 우상화하는” 건가요? ^ ^
후배가 보낸 편지.
얼핏 보고 왜 이리 표현이 과한가, 했는데 패러디였다.
그나저나
영성이라.. 고맙고 또 고마운 말인데..
정말 그러한가?
부디 그러하길..
선배에겐 이미
“삶 자체의 복잡미묘한 단애들을 섬세하게 보듬어 안는 동지”가
여럿 있지요. 기적처럼..
선배의 영성이 그걸 가능하게 하지요.
이런 말들은 선배를 “신화적 인물로 우상화하는” 건가요? ^ ^
후배가 보낸 편지.
얼핏 보고 왜 이리 표현이 과한가, 했는데 패러디였다.
그나저나
영성이라.. 고맙고 또 고마운 말인데..
정말 그러한가?
부디 그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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