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06/09/30 새끼 고양이
  2. 2006/09/27 개혁 한담
  3. 2006/09/25 균형과 조화
  4. 2006/09/21 내 종족
  5. 2006/09/20 고민있어요 2
  6. 2006/09/17 나의 예수전, 가을
  7. 2006/09/14 고래 창간 3주년
  8. 2006/09/11 고민있어요
  9. 2006/09/09 책임
  10. 2006/09/08 허락
  11. 2006/09/07 의식을 치르지 않은 용
  12. 2006/09/06 부고
  13. 2006/09/05 영성
  14. 2006/09/04 영혼의 말단
2006/09/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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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이 새끼고양이를 데려왔다. 상자에 넣어져 길에 버려진 걸 다른 반 아이가 학교에 데리고 왔는데 아무도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김단이 아내에게 전화했고 아내는 별 도리 없이 일단 데리고 오라고 했단다. 막상 보니 눈도 못 뜨고 혼자 똥오줌도 못 누는 채 일주일도 안 된 녀석이다. 적어도 두세 달은 어미 밑에서 자라야하는데 큰일이구나 싶다. 의논이라도 하자 싶어 얀을 분양해준 이에게 연락을 했다. 마침 비슷한 새끼를 둔 어미 고양이가 있다며 두말없이 맡아주겠단다. 지난번 이 가출했을 때도 느꼈지만 동물에게 참 따뜻한 사람이다. 얀의 가출 이야기는 다음에.. (김건에게 안긴 녀석)
2006/09/30 20:08 2006/09/30 20:08
2006/09/27 01:10
“개혁은 진보가 아니”라는 주장을 많이 하셨죠?
작년까지 몇 해 동안 그 이야기만 했었죠.
이젠 “내 말이 맞지 않았나”라고 말하고 싶진 않으세요?
부질없는 일이죠. 다만 갈수록 자기 오류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적어진다는 생각은 합니다.
인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가요?
지식인들 가운데서 이회창을 막기 위해 노무현을 찍은 분들이 꽤 있어요. 그분들 가운데 일부가 공개적으로 뼈아프게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죠. 정태춘 선생이 일찌감치 그랬고 최근엔 고종석 선배가 그랬더군요.
이젠 다들 노무현 욕하지 않습니까?
자기 이야기는 안 하죠. 자기 판단이 틀렸다는 것, 자기 아집이야말로 노무현에게 힘이 되었다는 건 쏙 빼버리고 노무현만 욕하죠. 다들 “노무현의 개혁성이 변질되었다”는 식인데 늘 하는 말이지만 노무현의 개혁성이 변질된 건 없습니다. 개혁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죠. 그것에 속아놓고선 이제 다들 노무현만 욕하죠. 사회적인 차원을 떠나 인간적으로 비굴한 모습입니다.
고종석 선생도 결국 그런 쪽 아닌가요?
아니죠, 고선배는 매우 고통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것만 해도 귀하게 보입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보십니까?
자기 오류나 아집을 속으로는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또 속지 않을 수 있을테니까요.
2006/09/27 01:10 2006/09/27 01:10
2006/09/25 00:34
균형있는 인간은
누구에게서나 좋은 소릴 듣지만
조화로운 인간은
늘 비난과 찬미가 병존한다.
2006/09/25 00:34 2006/09/25 00:34
2006/09/21 21:40
어제 전교조 전북지부 강연에서 막간에 고래를 소개했다. 개그콘서트의 노마진처럼 고래를 치켜들어 보이며. 종현은 "아직 약하다"지만 그래도 그런 데서 그렇게 해본 건 처음이다. 나와 관련한 뭔가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는 일은 늘 멋쩍다. 종현에게 “다음엔 좀 더 잘해볼게” 했다. 오늘 프레시안 창립5주년 기념식장에서 김종철 선생을 만났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의 선생은 앞쪽에 지정석이 마련되어있는데도 부러 뒤편에 앉아있다. 그는 내 종족이다. 선생에게 농을 건넸다. “선생님, 녹색평론 15주년 기념식 한번 하시죠.” “에이, 그런 거 안 해요.” “선생님이 빠지시면 되잖아요.” “하~” 선생은 파안대소한다.
2006/09/21 21:40 2006/09/21 21:40
2006/09/20 09:54
초등학교 6학년이에요. 제 친구들은 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게임을 해요. 피시방에 가서 더 오래 하는 아이도 있어요. 그런데 엄마는 숙제 하는 것 말곤 컴퓨터에 손도 못 대게 해요. 친구 집에서 잠깐씩 게임을 할 순 있지만 게임을 잘 못해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부끄럽기도 하고 따돌림 당하는 것 같기도 해요. 엄마는 "게임은 한번 시작하면 반드시 중독되기 때문에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 그러세요. 게임이 정말 그렇게 해로운 건가요? 조금씩 하는 것도 해로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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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활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일과 놀이. 사람에겐 두 가지 모두 중요해. 몸과 마음에 불편한 곳이 없는데도 일하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고 놀이가 없으면 사람은 기계와 다를 게 없지.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제대로 놀 수 없고 제대로 놀지 않으면 제대로 일할 수 없어. 동무는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일 대신 공부를 하지. 물론 고래삼촌이 말하는 공부란 학교에서 시험 성적을 내는 공부만 말하는 게 아니야. 어쨌거나 동무의 생활은 공부와 놀이로 이루어지고 컴퓨터게임은 놀이의 하나야.

엄마가 게임을 못하게 하시는 건 동무가 공부만 하고 놀지는 못하게 하려는 건 아닐 거야. 일과 놀이, 공부와 놀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할까 봐 걱정해서야.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서 공부는 물론 아예 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어. 부모님이 간섭 안하고도 게임을 적당히 하는 아이는 찾아보기 어려워. 지금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게임 때문에 부모님에게서 야단을 맞거나 동무처럼 아예 금지 당하곤 해.

게임엔 중독성이 있는 게 분명해. 원래 재미있는 놀이란 조금씩 중독성이 있지. 재미있으니까 자꾸 하고 싶어지잖아. 그런데 게임은 좀 달라. 게임은 단지 재미있어서 자꾸 하고 싶어지는 게 아니야. 게임은 만들어질 때부터 사람들을 중독시키려고 만들어졌어. 무슨 말이냐고?

게임은 게임 회사에서 만들지. 게임회사에서 게임을 만드는 진짜 이유는 뭘까? 사람들에게 재미를 선물하기 위해서? 그래서이기도 하겠지.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야. 2005년 한해 동안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 회사들이 벌어들인 돈이 얼마인 줄 알아? 8조원이 넘어. 어휴, 8조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고래삼촌도 까마득한 걸.

그 돈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게임회사들은 경쟁을 해. 사람들이 자기 회사에서 만든 게임을 자꾸자꾸 하도록 만들려고 말이야. 그래서 게임은 아예 사람들을 중독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만들어지는 거야. 컴퓨터 게임이 처음 생겼을 땐 그게 큰돈이 된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중독되게 만들지도 않았어. 하지만 게임으로 버는 돈이 커지면서 경쟁도 더 심해지게 된 거야. 2004년에 게임회사들이 벌어들인 돈은 2005년의 절반도 안 돼. 이쯤 되면, 경쟁이 얼마나 심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지? 물론 경쟁이 심해지는 만큼 중독성도 더 강해지지.

그래서 게임에 지나치게 빠지면 두 가지 함정에 빠지는 셈이야. 하나는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생활이 망가져 버린다는 것, 둘은 게임으로 돈을 벌려는 장사꾼의 속셈에 놀아난다는 것. 바보가 아니라면 그 사실을 알고도 그렇게 해 줄 이유는 없겠지?

동무는 게임을 하고 싶어만 하고 엄마는 못하게만 하면 해결 방법은 없어. 동무는 엄마를 속이고 엄마는 동무를 감시하는 방법뿐이야. 얼마나 슬픈 일이야. 동무가 사는 집이 무슨 포로수용소는 아니잖아?

이렇게 하면 어때? 엄마와 게임 문제에 대해 대화를 하는 거야. 먼저 게임에 대한 동무의 생각과 동무가 게임에 중독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말씀드리는 게 좋겠지? 그러면 엄마도 분명히 동무의 의견을 존중하실 거야. 그래서 엄마의 생각과 의견을 내실 거야. 그러면 눈치 보지 않고도 엄마 눈 속이지 않고도 재미있게 게임하게 될 거야.

하지만 게임 말고도 좋은 놀이가 많다는 것 잊지 말아. 사실 게임만큼 시시한 놀이도 없지. 놀이라는 게 몸을 움직여서 해야 제 맛 아닌가? 이건 그냥 고래삼촌 생각. 힘내, 고래처럼! (고래 36호)
2006/09/20 09:54 2006/09/20 09:54
2006/09/17 07:53
모레부터 네 번째 나의 예수전. 내가 예수를 강의하고 책을 쓰는 이유는 예수가 여전히, 비로소 인류의 빛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영성과 정치라는 인류 정신의 진지한 두 가지 흐름을 2천년 전 제 삶에서 일치시켜 보였다. 예수는 개인 내면의 해방과 사회 구조의 해방이 하나라는 것, 그 둘이 분리되거나 한쪽이 배제될 때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래서 예수는 좀 더 나은 세상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전히, 비로소 빛이다. 신앙으로든 사상으로든.
2006/09/17 07:53 2006/09/17 07:53
2006/09/14 14:11
고래가그랬어 창간 3주년이다. 실은, 창간 3주년이라는 걸 열흘 전에야 ‘발견’했다.(^ ^) 그만큼 다들 경황이 없었다. 고래는 운영상의 곤란을 한고비 넘기고 전에 없이 힘차게 헤엄쳐나가고 있다. 3년은 그저 특별한 드라마였다. 내 몽상으로 끝날 고래가 실제로 창간한 일, 몇 번의 아무 방도가 없어보이던 위기를 기적처럼 넘긴 일, 그 기적과 관련한 요정 같은 사람들, 광고 한번 없이 모인 수천명의 정기구독자들, 일생의 동무가 된 조중사와 김종현을 만난 일, 들은 나에게 인생에는 굳이 합리나 우연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지점이 있음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 나는 그 일들에 ‘섭리’가 배어 있다 믿는다. 화이트헤드 선생 말대로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나는 일에도 우주 전체가 작용하는 것이다.

3주년 잔치를 준비했다. 차림은 소박하지만 고래 구독을 고려하는 분, 벗에게 구독을 권하려는 분에겐 꽤 근사한 차림일수도 있겠다. (급한 상차림에 도움을 준 사계절 강맑실 선배에게 감사드린다.)
2006/09/14 14:11 2006/09/14 14:11
2006/09/11 23:07
고래엔 ‘고민있어요’라는 꼭지가 있다. 말 그대로 아이들 고민을 들어주는 꼭지다. 창간호부터 인권운동사랑방 교육실에서 맡다가 그들 사정으로 한동안 싣지 못했다. ‘아동 상담가’야 쌔고쌨지만 고래의 관점에 걸맞은 사람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 아쉬워하다가 이번호부터 내가 해보기로 했다. 고민을 들어주느라 내가 고민에 빠져야 했고 여전히 몇군데 찜찜하지만 차오름 형의 말마따나 "고래 발행인의 짐"이려니..


중학교 가기 전에 초등 공부 완전히 익혀야 한다."는 엄마의 성화로 영어와 수학 학원에 다니기로 했어요. 지금까진 태권도와 피아노 학원만 다녔거든요. 8시까지 학원에서 공부해야 해요. 학원은 꼭 다녀야 하는 건가요? 학교에서 배운 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학원 다니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함께 놀 친구가 점점 없어져요. 학운 가긴 싫지만 친구들 학원 다니는 거 보면 "이러다 나만 뒤쳐지는 거 아닐까." 불안하기도 하고요.

음, 정말 어려운 문제인 걸. 어려운 문제일수록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 잘 알지? 그럼 질문부터.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뭘까? 사람이 되기 위해서야. 물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은 이미 사람이지만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선 배울 게 많은 거지.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달라졌어.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로. 동무도 "이러다 나만 뒤쳐지는 거 아닐까." 불안하다고 했지?

그걸 경쟁이라고 해. 경쟁은 시험 점수로 결정이 되지. 그래서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 이유보다는 시험 점수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 학교에서 선생님과 공부하는 것보다는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요령이 담긴 문제집이나 학원 같은 데가 공부의 주인공이 되었지. 물론 이건 잘못된 거야. 공부는 학교에 다니는 걸로 충분해야 해. 나머진 동무들과 맘껏 뛰어놀고 생각을 키워나가는 시간이어야지. 삼촌 생각엔 그게 더 중요한 공부라는 생각도 들어. 그래야 멋진 어른이 되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엄마는 학원에 가라고 하시는 걸까? 엄마는 그런 공부 방법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아. 하지만 성적이 떨어지면 대학에 가기 어렵고 대학을 안 가면 동무가 살기 힘들어질까봐 걱정하시는 거야. 게다가 세상은 점점 더 경쟁이 심해지고 있거든. 엄마는 정말 동무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거야.

고래 삼촌 생각엔 엄마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이해한다고 해서 엄마 생각을 무작정 따르라는 건 아니야. 이해한다는 건 대화를 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는 뜻이야. 대화란 서로의 생각을 합쳐서 더 나은 생각을 만들어가는 일이지. 이런 질문들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엄마가 동무 만할 때는 공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그 생각이 달라졌다면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달라졌는지, 공부를 못하면 꼭 불행하게 사는 건지, 돈이나 좋은 집이나 남이 부러워하는 직업 같은 것 말고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게 뭔지.

차분하고 공손하게 말씀드려봐. 그럼 동무와 엄마의 생각이 천천히 합쳐지기 시작할 거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잊지 말고. 힘내, 고래처럼!

(참고로 하는 이야기)
잘못된 공부가 판치는 현실에 대한 고민 끝에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동무나 부모님들도 있어. 아예 깊은 시골로 들어가서 자연과 함께 살거나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는 경우(홈스쿨링이라고 해요)도 있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작은 학교(대안학교라고 해요)를 만들기도 해.
고래 삼촌은 그런 선택이 언제나 훌륭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무릎 꿇거나 포기할 때 정직한 고민과 대화를 통해 그런 작은 선택들을 한다는 건 참 용감하고 소중한 일이지. 사람이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 가장 옳거나 유일한 선택이라고 착각하는 일이 많거든..^ ^
2006/09/11 23:07 2006/09/11 23:07
2006/09/09 11:42
(김건과의 대화)

있잖아 아빠. 우리나라가 애기를 너무 안 낳아서 몇 년, 아니 몇백년 지나면 우리나라가 사라진대.
그래.
응.
그런데 왜 애기를 안 낳는 걸까?
글쎄.
살기 힘들어서야. 서로 돕지 않고 이기려고만 하니까, 아이를 낳아도 공부시키고 키우려면 돈도 너무 많이 들고 힘들고. 그래서 아이 낳는 게 겁나는 거야.
그렇구나.
건이는 우리나라가 사라질까봐 걱정 돼?
응.
몇 백 년 후인데도?
그래도.
그래. 그럼 애기를 맘놓고 낳을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야겠네. 서로 도우며 고루 잘사는 나라로 말이야.
어떻게 하면 되는데?
글쎄. 그건 천천히 말해도 될가?
왜?
그게 다 어른들이 할 일이라서 말이야.
아이들은 못 해?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럴 책임이 없다는 말이야.
책임?
응, 책임..
2006/09/09 11:42 2006/09/09 11:42
2006/09/08 22:15
어떤 분이 자기 어렸을 때 이야기(유아교육 교수인 어머니가 자기 그림을 여기저기 공개한다는 걸 알고 그림 그리기가 싫어졌다는)를 들려주며 혹시 아이들 그림이나 사진을 허락받지 않고 올리는 게 아닌지 묻는 편지를 보내왔다. 내 답장.

물론입니다. 늘 허락을 얻어 올린답니다.

(바꿔 말하면 허락을 못 얻어 못 올린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릴 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던 우리가
아이들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걸 보면
인류가 진보하는 건 분명하겠지요?^ ^

감사드리며
김규항
2006/09/08 22:15 2006/09/08 22:15
2006/09/07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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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이 제 친구와 만든 소설 시놉시스. 맨 끝 문장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용에 대한 기록이 있음에도 지금 용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한여름에 겨울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의식을 치르지 않은 용일지도 모른다.” 이런 멋 부린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이의 것이라선지 호감이 간다. 내 딸이라서 일지도.
2006/09/07 08:20 2006/09/07 08:20
2006/09/06 00:00
(김응교 형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평안하신지요?
그간 인사가 게을렀습니다. 용서하세요.
저와 제 아버님을 기억하시는 분께 올립니다.
사랑 많으신 제 아버님
오늘 아침 9시 하늘나라 여행 가셨습니다.
5년 동안 누워 간암과 더불어 사시면서
두만강 푸른 물에, 앵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일세, 아멘,
아기처럼 조아려 말씀하시더니,
평생 너털웃음 아버님, 웃는 미소로 소풍 가셨습니다.
지금 서울대 영안실에 웃고 쉬고 계시고요.
9월 8일(금) 오전 9시 30분에
후암동 영주교회에서 천국환송예배를 드립니다.
그날 곤지암으로 새집 모십니다.
못 오시더라도 손모아 환송해주셨으면 합니다.
기타와 노래와 웃음과 열정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
의식이 계셨을 때, 모든 이가 고맙다, 고맙다, 되풀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아버님 흉내내서 인사 올리고요, 아버지처럼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벗들,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김응교 손모아.
2006/09/06 00:00 2006/09/06 00:00
2006/09/05 01:00
정치적 변혁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영성을 소홀히 여기고 영성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변혁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둘은 하나라는 것, 진정한 인간은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면서도 영성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2006/09/05 01:00 2006/09/05 01:00
2006/09/04 22:34
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 적어도 다니기 전보다 좀 더 좋은 인간이 될 법한데 애석하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이 된다. 대개의 교회는 분명히 이기심과 탐욕을 강화하는 데가 있다. 물론 이기심과 탐욕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 이기심과 탐욕이 무한정 뻗어나가지 않을 수 있는 건 인간 내면의 다른 한편에 그걸 견제하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그걸 양심이라고 부른다. 제 아무리 이기심과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인간도 이기심과 탐욕을 대놓고 자랑하진 않는 이유도 양심 때문이다. 심지어 양심을 팽개친 지 오래인 인간에게도 양심의 기억은 남아 조용히 작동한다. 그 기억을 완전히 지워주는 곳이 교회다. 교회는 남보다 잘 되고 남보다 많이 갖는 걸 그 과정이나 방법은 눈감은 채 '하나님의 축복'으로 공인해줌으로써 견제되던 이기심과 탐욕에 날개를 달아준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양심(혹은 양심의 기억) 때문에 조금은 마음에 걸렸을 일도 교회에 다니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된다. 교회는 인간 영혼의 말단까지 앗아간다. 이 교회를 어찌할 것인가.
2006/09/04 22:34 2006/09/04 2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