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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30 23:22
홍세화 : 우선 <총구>라는 훌륭한 연극을 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지금 현재 한국과일본, 나아가서 넓게는 동아시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연극 <총구>가 제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군국주의 또는 쇼비니즘적 민족주의가 어떻게 국가주의 교육, 지배세력의 교육을 통해 획일화되어 가는가를 <총구>는 교육현장의 모습을 통해 생생하게 표현해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실로 ‘충격’속의 ‘확인’이었습니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똑같을 수 있을까 할 정도입니다. 시차를 어느 정도 두고, 한 20년 내지 4, 50년 차이를 두고 똑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졌다는 것이죠.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다른 게 없는지... 교육내용도 그렇고, 그것에 대한 저항을 탄압하는 방식도 그렇고...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일본 문제가 극복되지 못한 채 한반도 분단을 통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일본과 한국이 ‘공동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김규항 : ‘공동의 운명’이란 말씀을 조금 더 보충해 주시죠.
홍세화 : 민중의 처지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한국이 일본을 접할 때도 민중의 생각과 움직임은 배제된 채 <산케이신문> 등과 같은 우익신문이나, 우파 정치인들의 발언 등 일본사회 주류의 움직임만 접하는데,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서로가 그런 쪽으로만 고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총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정말 양심적이면서, 어린 구성원들의 미래를 바라보고,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총구>를 통해 일본에도 민중이 있고, 민중의 움직임과 운동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의 운명’이라 함은, 한일 두 사회가 왜 다시금 ‘총구’ 앞에 놓이는 현실이 되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패전은 한반도 분단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천황제 등을 안고 있는 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한반도 분단을 통해 봉합되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한일 민중은 ‘공동의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총구>는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 : 홍 선생님 말씀대로, 일본의 것이 우리에게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는 걸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똑같은가 하면, 예를 들어 주인공 류타네 집이 전당포를 하는데, 동료교사가 류타네는 잘사는 집안이니까 부르주아 사상이 맞겠지만, “가난한 사람을 많이 보아 왔으니, 프로레탈리아 의식이 길러졌을 것”이라고 하자 당치 않다고 반응하는 류타에게, “교장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니 서로 몸조심하자”고 귀뜸하죠. 그러한 얼토당토않게, 갖다 붙이기식 해석이 우리에게도 많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런 부분들이 재미있었습니다. 또 하나, 한일 간의 양심적인 세력이 연대하고, 좀 더 진지해져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사실 한일문제가 한 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일감정이 생긴 게 제국주의 침략 때문인데, 일본 사회 전체와 한국 사회 전체, 일본민족 전체와 한국민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번에 연극하러 오신 분들도 한국의 반일감정을 걱정하셨다는 데서 보여지듯 일본 양심세력조차도 그걸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일문제는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세력과 한국 민중간의 문제였습니다. 한국의 지배세력은 야합해서 잘 살았지요. 반면에 일본 민중은 제국주의 지배세력의 똑같은 피해자였습니다. 이것들이 구분되지 않은 채로 쭉 내려오고 있습니다. 군사정권 때도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국가적 통합’을 위해 동원하는 게 '반일감정'입니다. 저도 <총구>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는데요. 양심적인 부분, 진보적인 부분, 비주류적인 부분, 그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한일 양국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총구>는 그것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연극입니다.
홍세화 : 말만 일본어였지, 우리의 현실 그대로 보여주는 연극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시차만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 점에서 예를 들면, 일본의 ‘교육칙어’가 어떻게 한국에서 ‘국민교육헌장’이 되고,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이 되는지 너무나 똑같은 방식입니다. 국가주의 교육이 어떻게 초등학교 때부터 강력하게 관철되어 왔는가 말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간 게 1954년인데, 바로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을 맺은 이듬해였습니다. 제가 워낙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더 절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지점에서 요즘 젊은 세대가 어떻게 국가주의 교육을 받고 있는지, <총구>가 말하고자 하는 쇼비니즘적 군국주의화 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역사의 ‘의식의 공유’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일본의 ‘새역모’ 문제라든지, 한국에서 최근에 나온 ‘뉴라이트’ 1)* 는 한 궤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교육이 폭넓게 교육과정에 있어서의 현장을 우리가 얼마나 중요하게 바라보고 다루어야 하는가를 알려주었습니다.)
김규항 : 말로는 다 일본 식민지지배의 잔재가 있다고 하고, 일본 것 본 따서 답습하고 있다는 건 아는데, 실제로 그 세밀한 부분까지 연극 <총구>를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다큐멘터리 보듯이 보니까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박정희 군사 쿠테타 직후에 태어났고, 제가 고3때 박정희가 죽었는데요. 초중고 시절을 박정희 치하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게 나왔는데 제일 빨리 외웠다고 학교 방송실에 가서 낭송했어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좀 으쓱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주 민망한 일입니다. 홍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학내 구호도 있었습니다. “건설합시다!” 라구요. 선생님과 저의 학교시절이 다르겠지만 국가주의 관련 의례 등이 상당히 많았지 않습니까?
홍세화 :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으니까, 그야말로 군국주의 일본에 충성하면 ‘국민’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국민’이 되는 거였죠. 바로 그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일제 때부터 시작되었고, 정작 2차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학교 이름을 다시 ‘소학교’로 되돌렸습니다. 왜냐하면 ‘국민학교’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90년대 초까지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일본천황에게 충성하는 황국신민(국민)이었다가 반공의식에 투철해야만 국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형식은 그대로 둔 채 내용만 바꿔서 답습하는 시대였습니다. 그것이 한국전쟁으로 더욱 격화되고 심화된 것이죠. 60년대에 * 4.19를 통해 평화통일의 기류가 생겼지만 이듬해 * 5.16 군사구테타가 나면서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했죠.
김규항 : 그때 제가 태어났지요.
홍세화 : 김규항 : 선생이 이야기 하시니까 생각나는데, 5.16 구테타가 일어났을 때 중2였는데요. ‘6대 혁명공약’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에게 모두 암기시켰지요. 저도 그 당시 다 외웠고.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1항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 일로 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였습니다. 달달 외웠고, 6개항 잘 외우면 방송실에 가고, 잘 못 외우면 변소청소를 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죠. 지배세력이 어떻게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주입이나 세뇌를 통해 ‘존재’와 전혀 무관한, 오히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하는지, 그를 위해서 지배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교육과정이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그 부분을 정확히 알아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총구>의 주인공 기타모리 류타가 연극 속에서 자기가 교사로서 다시 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대목입니다. 지배세력은 당연하게도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교육과정을 통해서 사회구성원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의식을 심어주려는 데 대해, 학생들을 중심에 놓고, 학생들을 목적으로 두고, 학생을 보호하려면 국가권력과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류타가 교직에 대한 고민하면서 “내가 감히 다시 할 수 있을까”의 고민이 그래서 공감되는 거죠. 교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말이죠.
김규항 : : 개인을 국가의 부속물로 생각하는 의식이 존재하는 한,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가 되었든, 군사 파시즘이 되었든, 그리고 지금처럼 자본이 전면에 나서든 진정한 변화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보통사람을 국민이라 부르는 것도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보통사람을 국민이라 부르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보통사람은 영어로 ‘피플’인데 우리말로는 ‘인민’이고 ‘민중’이란 표현도 있죠. 국민이란 말은, 말 그대로 국가의 부속물이라는 뜻인데 진보적인 사람들까지도 아무 문제없이 쓰입니다. 이런 자잘한 습속들이 우리의 의식을 묶어두는 면이 많습니다.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가. ‘개인’을 위해서 개인들을 보호하고 개인들이 잘살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국가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직 약합니다. 월드컵 때 젊은이들 보거나, 대학교에 강연 같은 걸 가 보면, 1학년 학생들이 87년생인데요. 1987년 은 민주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해입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국가주의교육 별로 받지 않았고 개인주의적인 미덕도 많은데 의외로 자신을 대한민국의 부속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의 모든 진보적인 노력, 실제로 아이들, 인민들, 정직하게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위주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가장 훼방 놓는 점입니다. 구분해서 보지 않으니까요. ‘삼성’의 자랑은 ‘인민’의 자랑이 됩니다. 이건 참 곤란합니다. 이번에 한미 FTA 협상을 통해서도 드러나듯 삼성의 이익과 인민의 이익은 대립적이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한국 전체를 통으로 보는 사고방식, 세상을 계급이 아니라 국가 전체로만 보는 사고방식이 지금 한국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홍세화 : 실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개인이 국가의 소속, 국가권력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있는, 개인을 중점으로 놓고 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회구성원 각각이 국가를 보는 철학이 달라져야 하는데, 그걸 막기 위해 국가가 교육과정 안에서 철저히 해왔습니다.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식으로 강조해왔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프랑스에 망명해 있었으니까,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이 있었습니다. 철학문제였는데요. 세 개중에 1개를 택해 4시간 동안 논술하는 거였는데, 그 중 하나가, “국가는 개인의 적인가?”라는 문제였습니다. 그걸 보고 뭔가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교육과정을 통해 사회구성원에게 국가를 대상화해서 “국가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한국에서는 감히 그랬다가는 국가보안법에 저촉되겠죠. 바로 이런 것들이 교육의 중요성, 교육환경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소위 ‘집단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공동체라는 표현을 자주 쓰기도 하지요. 교육과정에서도 개인에 비해 집단의 우위가 자리 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물질의 공동체’라는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오히려 사회 경제적으로 불평등하고 계급적으로 불평등한 것을 그와 같은 논리로 억압하고 통합하려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유럽의 경우에는 개인의 ‘이기적 개인’을 전제로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연대를 강조합니다. 그것이 ‘시민’입니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은 ‘국민’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국가주의가 개인을 억압하고, 물질적인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불만을 억압하는 기제로, ‘국가’와 ‘통합’을 지배세력이 이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의 중요성, 개인의 자존감, 이런 부분이 균형점을 찾아야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김규항 : : 말씀대로, 개인들의 진정한 이해의 총체가 국가의 이익이 맞지요.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말하고 있는 ‘국익’은 언제나 소수 지배세력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해왔습니다. 이라크 파병도 국익을 위해서 가슴 아프지만 해야 하고, 평택의 미군기지 이전 문제나 FTA협정도 전부 그렇습니다. 말로는 ‘국익’ 좋은데,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구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하는가를 따져보면, 상당히 기만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여전히 아직 우리사회의 인식은, 지배세력이 자기 세력의 이해를 ‘국익’이라고 거짓말하고, 그게 통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파병 때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영감님들은 다들 고만고만하게 어렵게 사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배계급의 이해에 입각한 국익을 위해 호소하고 외치지요. 그런데 그들을 수구 세력이라고 사라져야할 세력이라고 반발하는 젊은 세대 역시 ‘국익’이라는 말에선 자유롭지 못합니다. 군대나 조폭사회에서 개인의 존엄이나 개인의 가치를 내세우는 것은 조직 내 배반이 되고 이기적이 될지 모르나, 사회 내에서는 개인적 가치가 가장 중요하며 그 가치의 진정한 총화가 국가의 이익에 이어진다고 봅니다.
홍세화 : 한국에서는 ‘개인주의’라 하면 이기주의의 사촌쯤으로 생각합니다. 전혀 다른 개념인데 말이죠. 실은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오히려 국가주의를 이용해왔습니다. 결국 개인의 가치나 존엄성은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에 의해 국가에 종속되었습니다.
김규항 : 저는 ‘보수주의’가 무슨 사상이 아니라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는 욕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총구>에서 교장이 그걸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군국주의 시절에는 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전쟁터에 많이 보냈다며 자랑을 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정치에 뛰어들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행태를 보입니다. 그러한 변신은 언제나 무슨 상당한 가치관인 것처럼 표현되는데, 실은 철저한 자신의 사익에 근거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홍세화 : 그런 건, 어쩜 그렇게 한국과 똑같은 거지? (일동 웃음)
김규항 : 우리사회에서 90년대 이후에 고전적인 정신들, 이를테면 양심, 고뇌, 신념은 다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대변화와 상관없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연극으로 보여주면, 진보냐 보수를 떠나서 모두 ‘촌스럽다’고 여깁니다. 형식을 비틀거나 장난을 치지 않는 한 촌스럽다고 할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 역시도 이번에 황자혜 : 씨가 적극적으로 초대해주지 않았다면, 만약 어딘가에서 인터넷홍보나 전단, 플래카드를 보았다면 매력을 못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청년극장'은 이런 걸 만들면서 6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다양한 세대로 이루어진 100여 명의 배우가 있다는 걸 듣고 놀랐습니다. 우리나라도 80년대까지 이런 연극 있었습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이 “근래 한국 영화에는 이야기가 없다”고 했는데요. 문학 쪽에서는 또 “문학이 너무 사소해졌다”고 합니다. 물론 사소한 것들도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간직해야할 고전적인 가치들이 없어져버렸지요. <총구>는 형식 자체도 정통적이고 모든 것이 정통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묵직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아쉬웠습니다.
황자혜 : 그 아쉬움이란 게 한국에 대한 것이죠?
김규항 : 한국에서는 이런 연극 보기 힘든데, 하는 생각. 형식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총구>는 진짜 이야기라는 생각, 어떤 '굵은' 느낌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게 없구나, 이런 것을 볼 기회가 없구나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말입니다.
홍세화 : 일본의 양심세력들이 지닌 ‘평화헌법 9조’ 폐기에 대한 위험인식이라든가, 새역모의 '새역사교과서' 문제라든가 포스트 코이즈미라 불리며 정권의 복판에 선 아베 등 우익 정치세력의 문제, 그리고 히노마루 기미가요 거부로 제기되는 교사들의 문제의식 등이 저는 이 연극에도 나와 있다고 봅니다. 저와 같은 한국인들은 오히려 연극 <총구>가 일본에서는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선 하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요즘 이런 연극을 한국에서 하면 젊은이들이 흔히 말해서 ‘썰렁’하다고 합니다. 저희로선 궁금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어떤지, 정말 큰 반향을 일으켜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라는 것이죠.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하는데 전 그것에 아주 근본적인 물음을 갖게 됩니다. 경제적 동물로 축소되었다는 것이지요. 자아실현을 위한 사회를 바라보는, 인문사회적 교양이 결합된 주체적 자아가 아니라, 순전히 물질을 추구하는, 그 물질도 피상적 쾌락, 편리함을 위한,그래서 역사와 정치는 간단하게 ‘썰렁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세대들은 청소년기에 그래도 존재에 대한 고뇌 같은 게 있었거든요. ‘데미안적 고뇌’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런 것조차 요즘 세대들은 좀 없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면에서도 특히 일본 청소년층이 이 연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관심이 갑니다.
김규항 :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저도 연극의 홍보물을 봤다면 특별히 가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가서 <총구>를 보면서 아주 좋았습니다. "아이들을 데려올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사람들의 근본적인 감동의 정점은 닮은 것 같습니다. 홍 선생님께서 ‘경제적 동물’ 이야기 하셨는데,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런 면에서 분산 차단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품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자본이 유포하는 판타지에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바로 내 문제고 실제 접하면 정말 짠하고 감동할 일인데,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죠. 텔레비전 뉴스에서 비정규 노동자가 분신한 이야기 나오면 다들 어느 불쌍한 사람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실은 그들 대부분이 비정규 노동자이거나 곧 그렇게 되는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런 비판을 받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런 낡은 선전선동이 먹히겠느냐”고 하는 건데 저는 그 역시 상당히 조작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을 ‘낡은 것’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자꾸 조작됩니다.
홍세화 :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세력의 이념이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이 어떻게 사회적 존재로서 각 개인들의 의식 속에 국가가 침투해 들어가는가를 말합니다. 국가주의교육의 충실한 마름이어야만 교장이 될 수 있고, 교장이 충실한 마름 노릇을 하는 사회, 자유의 가치를 부정하는 그런 구조 아니겠습니까. 바로 ‘존재’들이 왜곡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사의 고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바로 <총구>에서의 주인공 교사 기타모리 류타의 고민입니다. 이것은 한일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중요합니다. 분단 이후 국가주의교육은 한반도에서 철저하게 이루어졌는데, 교사들이 아이들을 국가주의로부터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중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어떻게 갖게 할 것인가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국가주의와 마찬가지로 광고 등 미디어를 통해 침투해 들어오는 지배세력의 가치관에 대한 비판적 여과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김규항 : 교사들을 만나면 이런 질문 많이 받습니다. 미디어의 침투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거죠. 선생님들도 답답하니까요. 물론 그건 교육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해야만 해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제가 학교 다닐 때의 ‘한’, ‘아쉬움’을 반추해보면, 교사라는 직업은 자기가 맡고 있는 학급, 그 공동체 안에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 상당 부분을 구현할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주류 사회와 학교에서 제시하는 가치관을 뒤집어서 공부는 썩 잘하지 않더라도 인간적이고 연대할 줄 아는, 그런 아이를 훌륭한 아이로 그 공동체의 영웅으로 인정해줄 때 아이들은 인생 안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고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총구>에서 기타모리 류타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칭찬한 작문을 교장선생님은 시시하다면서 한탄을 하죠. “고양이가 죽어서 슬펐다가 뭐냐, 지금 천황의 군인은 전쟁터에서 장열히 전사하는 마당인데, 이에 대해 쓰는 아이 하나 없다"고요. 여기서 교장은 국가교육체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류타 같은 교사가 있다면 학급 안에서는 전적이진 않더라도 인간의 공동체를 구현하고 맛을 보게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홍세화 : 입학식 졸업식에서의 히노마루 게양에 반대해 기립하지 않은 교사가 정직을 당했다는 것이 도쿄전문위원인 황자혜 : 씨의 기사로 <한겨레21>지면에 소개되었죠. 한국에도 있었습니다. 최근의 일인데 한 고등학교 교사가 ‘국기에 대한 경례’가 가진 문제를 아이들에게 말하고, ‘병역법’도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이순신 영웅화도 비판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을 아이들이 부모한테 이야기하고, 학부모 40명이 서명해서 교육청에 보낸 겁니다. 그런데 별로 반응이 없으니까 <조선일보>에 이야기해서 보도가 되면서, 7월에 징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처한 오늘, 현실의 문제입니다. <총구>의 한국공연에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공연을 했는데, 다시 한국의 교사조직과 조직적인 결합을 해서 함께 연대하는 모습으로 공연을 한다면 더욱더 폭넓은 참여가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규항 : 일단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봐야만 “이런 게 이렇게 좋구나, 재미있구나” 알 수 있습니다.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되는 겁니다.
홍세화 : 한국에서 재공연도 적극적으로 고려해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나하면 이런 노력과 시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류 미디어들은 두 나라의 민중에게 민중 배제의 시각을 갖도록 하면서 한 쪽으로 보게 만들지만, 이것을 어떻게 하면 견제할 수 있느냐, 어떻게 맞불을 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김규항 : 그건 역시 ‘연대’죠.
홍세화 : ‘연대’는 이제 말로 할 게 아니라 이렇게 작품으로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황자혜 : <총구>가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시는 건가요?
홍세화 : 물론입니다.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아주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규항 : 우리 작품이 아닌데 오히려 감동하고, 공감하고, 역시 공동의 문제구나 하는 느낌,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일러주었습니다.
황자혜 : 극단에서는 과연 일본의 역사에 대해 한국 관객들이 몰입해 줄까 걱정도 했고, 또 외국 연극이어서 한글자막으로 봐야한다는 것을 걱정했는데요.
홍세화 : 그건 당시의 역사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 얼마나 답습되는지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김규항 : 깜짝 놀랐거든요. <총구>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같은가 하구요.
황자혜 : <총구> 원작자 고 미우라 아야코는 한국에 간다면 당당히 가슴펴고 다닐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양심적인 일반 시민들, 양심적인 지성들은 일본의 침략전쟁 역사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작자의 죄의식, 전쟁에 대한 반성,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 등을 계속적으로 주장해온 일본의 양심 세력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홍세화 : 그런 분들이 일본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우리와 서로 알아야 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요. 수평적인 비교는 안 되겠지만 전후에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비교적 철저한 정리가 있었고, 독일에서는 나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전혀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일본 내 양심세력, 한국의 양심세력은 결국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그런 소통과 역사의식이 중요한 것이지 '죄의식'은 오히려 맞지 않다고 봅니다. 서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사청산법을 만들기로 추진하고 있지만, 사실 과거에 대한 반성, 안기부 국정원이 물리력으로 국가적 폭력을 가했던 그런 것에 대해서 반성도 필요하지만, 제가 보는 관점에서 더 심각하게 반성해야 하는 것이 교육부라고 봅니다. 국가주의 교육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일본 내에서도 <총구>가 소통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규항 : 소극적 태도, 기존의 왜곡된 통로를 전제로 무릎을 꿇고 한국사회 전체에 대해 죄의식 갖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세력에게는 미안할 게 없습니다. 분명하게 구분하고 양심세력간의 소통의 중요성과 하나의 계기점이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총구>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결핍상태인 걸 되새길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간적이고 양심적인 교사상, 전통적인 교사상과 인간형, 이제 한국사회에서는 촌스럽고 낡은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 그러나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황자혜 : 양산에서 몇 백 명의 교교생들이 연극을 보러왔는데, 과연 지금 이 시대 아이들이 이 <총구>라는 연극에 집중을 해줄까 걱정했습니다. 웬걸요, 고문 장면에서는 함께 비명을 지르고 류타가 돌아왔을 때는 환호하고, 당신 같은 분이 선생님이셔야 한다는 듯 아이들의 말똥말똥한 눈과 집중력과 환호에 극단측은 대단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서로 통하는 지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홍세화 : 결국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작용하는 교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실이 희망의 거처이고, 교사가 희망의 담지자여야 한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이 연극이 국가주의 교육의 폐해로부터 아이들이 인간성과 민주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중요한 면을 주제로 삼고 있고 동질성, 역사성, 한일 민중연대의 매개의 한 전례가 되고 전범이 될 겁니다.
황자혜 : 마지막으로 청년극장의 <총구> 전 멤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홍세화 : 저는 우선 극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계속 이러한 시대정신을 견지해주시길. 그리고 이러한 생각, 고민, 가치관을 일본 내에서 이끌고 나아가주시길 바랍니다.
김규항 : 그분들이 지금 인민들을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에 예술가로서 얼마나 근사하게 살고 있는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왜 사람은 자기 것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저는 청년극장 분들이 충분한 긍지와 기쁨을 가지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늠름하시길’ 바랍니다.
홍세화 : 그냥 이 작품으로 다시 오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작품도 물론이지만 <총구>로 꼭 한번 다시 오시고, 조직적으로 시도하면 좋겠습니다.
김규항 : ‘공동의 운명’이란 말씀을 조금 더 보충해 주시죠.
홍세화 : 민중의 처지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입니다. 한국이 일본을 접할 때도 민중의 생각과 움직임은 배제된 채 <산케이신문> 등과 같은 우익신문이나, 우파 정치인들의 발언 등 일본사회 주류의 움직임만 접하는데,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서로가 그런 쪽으로만 고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총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정말 양심적이면서, 어린 구성원들의 미래를 바라보고,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총구>를 통해 일본에도 민중이 있고, 민중의 움직임과 운동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의 운명’이라 함은, 한일 두 사회가 왜 다시금 ‘총구’ 앞에 놓이는 현실이 되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패전은 한반도 분단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천황제 등을 안고 있는 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한반도 분단을 통해 봉합되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한일 민중은 ‘공동의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총구>는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 : 홍 선생님 말씀대로, 일본의 것이 우리에게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는 걸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똑같은가 하면, 예를 들어 주인공 류타네 집이 전당포를 하는데, 동료교사가 류타네는 잘사는 집안이니까 부르주아 사상이 맞겠지만, “가난한 사람을 많이 보아 왔으니, 프로레탈리아 의식이 길러졌을 것”이라고 하자 당치 않다고 반응하는 류타에게, “교장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니 서로 몸조심하자”고 귀뜸하죠. 그러한 얼토당토않게, 갖다 붙이기식 해석이 우리에게도 많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런 부분들이 재미있었습니다. 또 하나, 한일 간의 양심적인 세력이 연대하고, 좀 더 진지해져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사실 한일문제가 한 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일감정이 생긴 게 제국주의 침략 때문인데, 일본 사회 전체와 한국 사회 전체, 일본민족 전체와 한국민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번에 연극하러 오신 분들도 한국의 반일감정을 걱정하셨다는 데서 보여지듯 일본 양심세력조차도 그걸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일문제는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세력과 한국 민중간의 문제였습니다. 한국의 지배세력은 야합해서 잘 살았지요. 반면에 일본 민중은 제국주의 지배세력의 똑같은 피해자였습니다. 이것들이 구분되지 않은 채로 쭉 내려오고 있습니다. 군사정권 때도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국가적 통합’을 위해 동원하는 게 '반일감정'입니다. 저도 <총구>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는데요. 양심적인 부분, 진보적인 부분, 비주류적인 부분, 그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한일 양국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총구>는 그것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연극입니다.
홍세화 : 말만 일본어였지, 우리의 현실 그대로 보여주는 연극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시차만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 점에서 예를 들면, 일본의 ‘교육칙어’가 어떻게 한국에서 ‘국민교육헌장’이 되고,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이 되는지 너무나 똑같은 방식입니다. 국가주의 교육이 어떻게 초등학교 때부터 강력하게 관철되어 왔는가 말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간 게 1954년인데, 바로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을 맺은 이듬해였습니다. 제가 워낙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더 절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지점에서 요즘 젊은 세대가 어떻게 국가주의 교육을 받고 있는지, <총구>가 말하고자 하는 쇼비니즘적 군국주의화 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역사의 ‘의식의 공유’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일본의 ‘새역모’ 문제라든지, 한국에서 최근에 나온 ‘뉴라이트’ 1)* 는 한 궤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교육이 폭넓게 교육과정에 있어서의 현장을 우리가 얼마나 중요하게 바라보고 다루어야 하는가를 알려주었습니다.)
김규항 : 말로는 다 일본 식민지지배의 잔재가 있다고 하고, 일본 것 본 따서 답습하고 있다는 건 아는데, 실제로 그 세밀한 부분까지 연극 <총구>를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다큐멘터리 보듯이 보니까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박정희 군사 쿠테타 직후에 태어났고, 제가 고3때 박정희가 죽었는데요. 초중고 시절을 박정희 치하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게 나왔는데 제일 빨리 외웠다고 학교 방송실에 가서 낭송했어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좀 으쓱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주 민망한 일입니다. 홍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학내 구호도 있었습니다. “건설합시다!” 라구요. 선생님과 저의 학교시절이 다르겠지만 국가주의 관련 의례 등이 상당히 많았지 않습니까?
홍세화 :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으니까, 그야말로 군국주의 일본에 충성하면 ‘국민’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국민’이 되는 거였죠. 바로 그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일제 때부터 시작되었고, 정작 2차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학교 이름을 다시 ‘소학교’로 되돌렸습니다. 왜냐하면 ‘국민학교’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90년대 초까지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일본천황에게 충성하는 황국신민(국민)이었다가 반공의식에 투철해야만 국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형식은 그대로 둔 채 내용만 바꿔서 답습하는 시대였습니다. 그것이 한국전쟁으로 더욱 격화되고 심화된 것이죠. 60년대에 * 4.19를 통해 평화통일의 기류가 생겼지만 이듬해 * 5.16 군사구테타가 나면서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했죠.
김규항 : 그때 제가 태어났지요.
홍세화 : 김규항 : 선생이 이야기 하시니까 생각나는데, 5.16 구테타가 일어났을 때 중2였는데요. ‘6대 혁명공약’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에게 모두 암기시켰지요. 저도 그 당시 다 외웠고.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1항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 일로 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였습니다. 달달 외웠고, 6개항 잘 외우면 방송실에 가고, 잘 못 외우면 변소청소를 해야 하는 그런 시대였죠. 지배세력이 어떻게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주입이나 세뇌를 통해 ‘존재’와 전혀 무관한, 오히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하는지, 그를 위해서 지배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교육과정이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그 부분을 정확히 알아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총구>의 주인공 기타모리 류타가 연극 속에서 자기가 교사로서 다시 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대목입니다. 지배세력은 당연하게도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교육과정을 통해서 사회구성원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의식을 심어주려는 데 대해, 학생들을 중심에 놓고, 학생들을 목적으로 두고, 학생을 보호하려면 국가권력과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류타가 교직에 대한 고민하면서 “내가 감히 다시 할 수 있을까”의 고민이 그래서 공감되는 거죠. 교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말이죠.
김규항 : : 개인을 국가의 부속물로 생각하는 의식이 존재하는 한,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가 되었든, 군사 파시즘이 되었든, 그리고 지금처럼 자본이 전면에 나서든 진정한 변화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보통사람을 국민이라 부르는 것도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보통사람을 국민이라 부르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보통사람은 영어로 ‘피플’인데 우리말로는 ‘인민’이고 ‘민중’이란 표현도 있죠. 국민이란 말은, 말 그대로 국가의 부속물이라는 뜻인데 진보적인 사람들까지도 아무 문제없이 쓰입니다. 이런 자잘한 습속들이 우리의 의식을 묶어두는 면이 많습니다.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가. ‘개인’을 위해서 개인들을 보호하고 개인들이 잘살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국가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직 약합니다. 월드컵 때 젊은이들 보거나, 대학교에 강연 같은 걸 가 보면, 1학년 학생들이 87년생인데요. 1987년 은 민주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해입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국가주의교육 별로 받지 않았고 개인주의적인 미덕도 많은데 의외로 자신을 대한민국의 부속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의 모든 진보적인 노력, 실제로 아이들, 인민들, 정직하게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위주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가장 훼방 놓는 점입니다. 구분해서 보지 않으니까요. ‘삼성’의 자랑은 ‘인민’의 자랑이 됩니다. 이건 참 곤란합니다. 이번에 한미 FTA 협상을 통해서도 드러나듯 삼성의 이익과 인민의 이익은 대립적이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한국 전체를 통으로 보는 사고방식, 세상을 계급이 아니라 국가 전체로만 보는 사고방식이 지금 한국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홍세화 : 실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개인이 국가의 소속, 국가권력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자발적 의지를 가지고 있는, 개인을 중점으로 놓고 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회구성원 각각이 국가를 보는 철학이 달라져야 하는데, 그걸 막기 위해 국가가 교육과정 안에서 철저히 해왔습니다.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식으로 강조해왔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프랑스에 망명해 있었으니까,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이 있었습니다. 철학문제였는데요. 세 개중에 1개를 택해 4시간 동안 논술하는 거였는데, 그 중 하나가, “국가는 개인의 적인가?”라는 문제였습니다. 그걸 보고 뭔가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교육과정을 통해 사회구성원에게 국가를 대상화해서 “국가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한국에서는 감히 그랬다가는 국가보안법에 저촉되겠죠. 바로 이런 것들이 교육의 중요성, 교육환경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소위 ‘집단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공동체라는 표현을 자주 쓰기도 하지요. 교육과정에서도 개인에 비해 집단의 우위가 자리 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물질의 공동체’라는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오히려 사회 경제적으로 불평등하고 계급적으로 불평등한 것을 그와 같은 논리로 억압하고 통합하려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유럽의 경우에는 개인의 ‘이기적 개인’을 전제로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연대를 강조합니다. 그것이 ‘시민’입니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은 ‘국민’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국가주의가 개인을 억압하고, 물질적인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불만을 억압하는 기제로, ‘국가’와 ‘통합’을 지배세력이 이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의 중요성, 개인의 자존감, 이런 부분이 균형점을 찾아야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김규항 : : 말씀대로, 개인들의 진정한 이해의 총체가 국가의 이익이 맞지요.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말하고 있는 ‘국익’은 언제나 소수 지배세력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해왔습니다. 이라크 파병도 국익을 위해서 가슴 아프지만 해야 하고, 평택의 미군기지 이전 문제나 FTA협정도 전부 그렇습니다. 말로는 ‘국익’ 좋은데,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구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하는가를 따져보면, 상당히 기만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여전히 아직 우리사회의 인식은, 지배세력이 자기 세력의 이해를 ‘국익’이라고 거짓말하고, 그게 통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파병 때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영감님들은 다들 고만고만하게 어렵게 사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배계급의 이해에 입각한 국익을 위해 호소하고 외치지요. 그런데 그들을 수구 세력이라고 사라져야할 세력이라고 반발하는 젊은 세대 역시 ‘국익’이라는 말에선 자유롭지 못합니다. 군대나 조폭사회에서 개인의 존엄이나 개인의 가치를 내세우는 것은 조직 내 배반이 되고 이기적이 될지 모르나, 사회 내에서는 개인적 가치가 가장 중요하며 그 가치의 진정한 총화가 국가의 이익에 이어진다고 봅니다.
홍세화 : 한국에서는 ‘개인주의’라 하면 이기주의의 사촌쯤으로 생각합니다. 전혀 다른 개념인데 말이죠. 실은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오히려 국가주의를 이용해왔습니다. 결국 개인의 가치나 존엄성은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에 의해 국가에 종속되었습니다.
김규항 : 저는 ‘보수주의’가 무슨 사상이 아니라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는 욕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총구>에서 교장이 그걸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군국주의 시절에는 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전쟁터에 많이 보냈다며 자랑을 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정치에 뛰어들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행태를 보입니다. 그러한 변신은 언제나 무슨 상당한 가치관인 것처럼 표현되는데, 실은 철저한 자신의 사익에 근거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홍세화 : 그런 건, 어쩜 그렇게 한국과 똑같은 거지? (일동 웃음)
김규항 : 우리사회에서 90년대 이후에 고전적인 정신들, 이를테면 양심, 고뇌, 신념은 다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대변화와 상관없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연극으로 보여주면, 진보냐 보수를 떠나서 모두 ‘촌스럽다’고 여깁니다. 형식을 비틀거나 장난을 치지 않는 한 촌스럽다고 할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 역시도 이번에 황자혜 : 씨가 적극적으로 초대해주지 않았다면, 만약 어딘가에서 인터넷홍보나 전단, 플래카드를 보았다면 매력을 못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청년극장'은 이런 걸 만들면서 6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다양한 세대로 이루어진 100여 명의 배우가 있다는 걸 듣고 놀랐습니다. 우리나라도 80년대까지 이런 연극 있었습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이 “근래 한국 영화에는 이야기가 없다”고 했는데요. 문학 쪽에서는 또 “문학이 너무 사소해졌다”고 합니다. 물론 사소한 것들도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간직해야할 고전적인 가치들이 없어져버렸지요. <총구>는 형식 자체도 정통적이고 모든 것이 정통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묵직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아쉬웠습니다.
황자혜 : 그 아쉬움이란 게 한국에 대한 것이죠?
김규항 : 한국에서는 이런 연극 보기 힘든데, 하는 생각. 형식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총구>는 진짜 이야기라는 생각, 어떤 '굵은' 느낌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게 없구나, 이런 것을 볼 기회가 없구나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말입니다.
홍세화 : 일본의 양심세력들이 지닌 ‘평화헌법 9조’ 폐기에 대한 위험인식이라든가, 새역모의 '새역사교과서' 문제라든가 포스트 코이즈미라 불리며 정권의 복판에 선 아베 등 우익 정치세력의 문제, 그리고 히노마루 기미가요 거부로 제기되는 교사들의 문제의식 등이 저는 이 연극에도 나와 있다고 봅니다. 저와 같은 한국인들은 오히려 연극 <총구>가 일본에서는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가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선 하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요즘 이런 연극을 한국에서 하면 젊은이들이 흔히 말해서 ‘썰렁’하다고 합니다. 저희로선 궁금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어떤지, 정말 큰 반향을 일으켜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라는 것이죠.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하는데 전 그것에 아주 근본적인 물음을 갖게 됩니다. 경제적 동물로 축소되었다는 것이지요. 자아실현을 위한 사회를 바라보는, 인문사회적 교양이 결합된 주체적 자아가 아니라, 순전히 물질을 추구하는, 그 물질도 피상적 쾌락, 편리함을 위한,그래서 역사와 정치는 간단하게 ‘썰렁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세대들은 청소년기에 그래도 존재에 대한 고뇌 같은 게 있었거든요. ‘데미안적 고뇌’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기가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런 것조차 요즘 세대들은 좀 없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면에서도 특히 일본 청소년층이 이 연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관심이 갑니다.
김규항 :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저도 연극의 홍보물을 봤다면 특별히 가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가서 <총구>를 보면서 아주 좋았습니다. "아이들을 데려올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사람들의 근본적인 감동의 정점은 닮은 것 같습니다. 홍 선생님께서 ‘경제적 동물’ 이야기 하셨는데,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런 면에서 분산 차단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품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자본이 유포하는 판타지에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바로 내 문제고 실제 접하면 정말 짠하고 감동할 일인데,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죠. 텔레비전 뉴스에서 비정규 노동자가 분신한 이야기 나오면 다들 어느 불쌍한 사람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실은 그들 대부분이 비정규 노동자이거나 곧 그렇게 되는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런 비판을 받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런 낡은 선전선동이 먹히겠느냐”고 하는 건데 저는 그 역시 상당히 조작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을 ‘낡은 것’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자꾸 조작됩니다.
홍세화 :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세력의 이념이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이 어떻게 사회적 존재로서 각 개인들의 의식 속에 국가가 침투해 들어가는가를 말합니다. 국가주의교육의 충실한 마름이어야만 교장이 될 수 있고, 교장이 충실한 마름 노릇을 하는 사회, 자유의 가치를 부정하는 그런 구조 아니겠습니까. 바로 ‘존재’들이 왜곡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사의 고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바로 <총구>에서의 주인공 교사 기타모리 류타의 고민입니다. 이것은 한일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중요합니다. 분단 이후 국가주의교육은 한반도에서 철저하게 이루어졌는데, 교사들이 아이들을 국가주의로부터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중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어떻게 갖게 할 것인가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국가주의와 마찬가지로 광고 등 미디어를 통해 침투해 들어오는 지배세력의 가치관에 대한 비판적 여과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김규항 : 교사들을 만나면 이런 질문 많이 받습니다. 미디어의 침투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거죠. 선생님들도 답답하니까요. 물론 그건 교육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해야만 해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제가 학교 다닐 때의 ‘한’, ‘아쉬움’을 반추해보면, 교사라는 직업은 자기가 맡고 있는 학급, 그 공동체 안에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 상당 부분을 구현할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주류 사회와 학교에서 제시하는 가치관을 뒤집어서 공부는 썩 잘하지 않더라도 인간적이고 연대할 줄 아는, 그런 아이를 훌륭한 아이로 그 공동체의 영웅으로 인정해줄 때 아이들은 인생 안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고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총구>에서 기타모리 류타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이 칭찬한 작문을 교장선생님은 시시하다면서 한탄을 하죠. “고양이가 죽어서 슬펐다가 뭐냐, 지금 천황의 군인은 전쟁터에서 장열히 전사하는 마당인데, 이에 대해 쓰는 아이 하나 없다"고요. 여기서 교장은 국가교육체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류타 같은 교사가 있다면 학급 안에서는 전적이진 않더라도 인간의 공동체를 구현하고 맛을 보게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홍세화 : 입학식 졸업식에서의 히노마루 게양에 반대해 기립하지 않은 교사가 정직을 당했다는 것이 도쿄전문위원인 황자혜 : 씨의 기사로 <한겨레21>지면에 소개되었죠. 한국에도 있었습니다. 최근의 일인데 한 고등학교 교사가 ‘국기에 대한 경례’가 가진 문제를 아이들에게 말하고, ‘병역법’도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이순신 영웅화도 비판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을 아이들이 부모한테 이야기하고, 학부모 40명이 서명해서 교육청에 보낸 겁니다. 그런데 별로 반응이 없으니까 <조선일보>에 이야기해서 보도가 되면서, 7월에 징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처한 오늘, 현실의 문제입니다. <총구>의 한국공연에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공연을 했는데, 다시 한국의 교사조직과 조직적인 결합을 해서 함께 연대하는 모습으로 공연을 한다면 더욱더 폭넓은 참여가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규항 : 일단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봐야만 “이런 게 이렇게 좋구나, 재미있구나” 알 수 있습니다.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되는 겁니다.
홍세화 : 한국에서 재공연도 적극적으로 고려해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나하면 이런 노력과 시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류 미디어들은 두 나라의 민중에게 민중 배제의 시각을 갖도록 하면서 한 쪽으로 보게 만들지만, 이것을 어떻게 하면 견제할 수 있느냐, 어떻게 맞불을 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김규항 : 그건 역시 ‘연대’죠.
홍세화 : ‘연대’는 이제 말로 할 게 아니라 이렇게 작품으로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황자혜 : <총구>가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시는 건가요?
홍세화 : 물론입니다.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아주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규항 : 우리 작품이 아닌데 오히려 감동하고, 공감하고, 역시 공동의 문제구나 하는 느낌,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일러주었습니다.
황자혜 : 극단에서는 과연 일본의 역사에 대해 한국 관객들이 몰입해 줄까 걱정도 했고, 또 외국 연극이어서 한글자막으로 봐야한다는 것을 걱정했는데요.
홍세화 : 그건 당시의 역사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 얼마나 답습되는지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김규항 : 깜짝 놀랐거든요. <총구>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같은가 하구요.
황자혜 : <총구> 원작자 고 미우라 아야코는 한국에 간다면 당당히 가슴펴고 다닐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양심적인 일반 시민들, 양심적인 지성들은 일본의 침략전쟁 역사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작자의 죄의식, 전쟁에 대한 반성,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 등을 계속적으로 주장해온 일본의 양심 세력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홍세화 : 그런 분들이 일본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우리와 서로 알아야 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요. 수평적인 비교는 안 되겠지만 전후에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비교적 철저한 정리가 있었고, 독일에서는 나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전혀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일본 내 양심세력, 한국의 양심세력은 결국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그런 소통과 역사의식이 중요한 것이지 '죄의식'은 오히려 맞지 않다고 봅니다. 서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사청산법을 만들기로 추진하고 있지만, 사실 과거에 대한 반성, 안기부 국정원이 물리력으로 국가적 폭력을 가했던 그런 것에 대해서 반성도 필요하지만, 제가 보는 관점에서 더 심각하게 반성해야 하는 것이 교육부라고 봅니다. 국가주의 교육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일본 내에서도 <총구>가 소통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규항 : 소극적 태도, 기존의 왜곡된 통로를 전제로 무릎을 꿇고 한국사회 전체에 대해 죄의식 갖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세력에게는 미안할 게 없습니다. 분명하게 구분하고 양심세력간의 소통의 중요성과 하나의 계기점이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총구>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결핍상태인 걸 되새길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간적이고 양심적인 교사상, 전통적인 교사상과 인간형, 이제 한국사회에서는 촌스럽고 낡은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 그러나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황자혜 : 양산에서 몇 백 명의 교교생들이 연극을 보러왔는데, 과연 지금 이 시대 아이들이 이 <총구>라는 연극에 집중을 해줄까 걱정했습니다. 웬걸요, 고문 장면에서는 함께 비명을 지르고 류타가 돌아왔을 때는 환호하고, 당신 같은 분이 선생님이셔야 한다는 듯 아이들의 말똥말똥한 눈과 집중력과 환호에 극단측은 대단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서로 통하는 지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홍세화 : 결국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작용하는 교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실이 희망의 거처이고, 교사가 희망의 담지자여야 한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이 연극이 국가주의 교육의 폐해로부터 아이들이 인간성과 민주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중요한 면을 주제로 삼고 있고 동질성, 역사성, 한일 민중연대의 매개의 한 전례가 되고 전범이 될 겁니다.
황자혜 : 마지막으로 청년극장의 <총구> 전 멤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홍세화 : 저는 우선 극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계속 이러한 시대정신을 견지해주시길. 그리고 이러한 생각, 고민, 가치관을 일본 내에서 이끌고 나아가주시길 바랍니다.
김규항 : 그분들이 지금 인민들을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에 예술가로서 얼마나 근사하게 살고 있는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왜 사람은 자기 것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저는 청년극장 분들이 충분한 긍지와 기쁨을 가지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늠름하시길’ 바랍니다.
홍세화 : 그냥 이 작품으로 다시 오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작품도 물론이지만 <총구>로 꼭 한번 다시 오시고, 조직적으로 시도하면 좋겠습니다.
2006/07/28 07:00
전엔 책을 빨리 읽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책은 느리게 읽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다 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다”가 다 같진 않다. 경주남산을 사흘 만에 “다 봤다”는 사람도 있지만 십년을 하루같이 오르고도 “멀었다”는 사람도 있듯. 김건이 책을 지나치게 빨리 읽는 습관이 있어서 언젠가 고쳐주어야지 싶었는데 며칠 전 날을 잡았다. 미하엘 엔데 동화집을 주면서 맨 앞에 나오는 ‘마법학교’를 읽어보라고 했다. 몸을 뒤틀어가며 꼼짝없이 옆에 앉아 읽긴 읽는데 역시 건성이다. 삼십 페이지가 넘는 동화를 앞에 앉은 제 누나 참견까지 해가면서 칠분 만에 다 읽었다고 내놓으니 기가 차다.
벌써 다 읽었어?
응.
임마, 아빠가 읽어도 한 시간은 걸리겠다.
진짠대. 줄거리 말해볼까?
책은 줄거리를 알려고 읽는 게 아니야. 그래..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다음날 저녁 이번엔 팔 페이지짜리 머리말을 읽게 했다. 부러 정색을 하고는 한 문장도 빠트리지 말고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흘끔흘끔 곁눈질로 읽는 품새를 살펴보니 이번엔 제대로 읽는 것 같다. 이십분이 조금 지나 김건은 다 읽었다고 했다. 시험 삼아 몇 가지 질문을 하니 꼬박꼬박 대답이 나온다.
삼십 페이지 넘는 걸 칠분에 읽더니 팔 페이지에 이십분이 더 걸렸구나. 어제는 대충 읽은 것 맞지?
응..
김건, 책이라는 게 뭐지?
어떤 사람의 생각.
책을 왜 읽지?
지혜를 얻으려고.
지혜가 뭐야?
지혜는 음.. 모르는 걸 아는 거.
모르는 걸 아는 게 지혠가? 그럼 아는 것과 깨닫는 건 어떻게 다르지?
아는 건 조금 아는 거고 깨닫는 건 많이 아는 거.
그건 그냥 조금 알고 많이 아는 거지.
그럼 진짜 아는 거.
진짜 아는 거라.. 아빠 생각엔 아는 것은 남의 생각을 받아들인 거고 깨닫는 건 그걸 내 생각으로 만드는 거야.
아.
책을 읽는 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닫기 위해서야.
어른들은 책 읽으면 다 깨달아?
아니. 책은 엄청나게 많이 읽었는데 자기 생각은 없는 어른들도 많아. 그런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가 많이 안다고 떠들어대지.
그럼 책은 무조건 천천히 읽는 거야?
꼭 그렇진 않아. 대충 읽어도 되는 책도 있지. 아빠가 말하는 건 책다운 책, 좋은 책을 말하는 거야. 좋은 책은 반드시 천천히 읽어야 해. 너무 빨리 읽으면 책을 머리로만 읽게 돼.
그럼 또 뭘로 읽는데?
(김건 가슴을 검지로 짚으며) 마음으로 읽지. 그래야 깨달을 수 있는 거야.
그렇구나.
책 백권을 대충 읽은 사람과 한권을 제대로 읽은 사람 가운데 누구 생각이 더 훌륭해질까?
한권 읽은 사람.
그럼 백권이 아니라 만권이라면?
그래도 한권 읽은 사람.
(드림텐)
벌써 다 읽었어?
응.
임마, 아빠가 읽어도 한 시간은 걸리겠다.
진짠대. 줄거리 말해볼까?
책은 줄거리를 알려고 읽는 게 아니야. 그래..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다음날 저녁 이번엔 팔 페이지짜리 머리말을 읽게 했다. 부러 정색을 하고는 한 문장도 빠트리지 말고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흘끔흘끔 곁눈질로 읽는 품새를 살펴보니 이번엔 제대로 읽는 것 같다. 이십분이 조금 지나 김건은 다 읽었다고 했다. 시험 삼아 몇 가지 질문을 하니 꼬박꼬박 대답이 나온다.
삼십 페이지 넘는 걸 칠분에 읽더니 팔 페이지에 이십분이 더 걸렸구나. 어제는 대충 읽은 것 맞지?
응..
김건, 책이라는 게 뭐지?
어떤 사람의 생각.
책을 왜 읽지?
지혜를 얻으려고.
지혜가 뭐야?
지혜는 음.. 모르는 걸 아는 거.
모르는 걸 아는 게 지혠가? 그럼 아는 것과 깨닫는 건 어떻게 다르지?
아는 건 조금 아는 거고 깨닫는 건 많이 아는 거.
그건 그냥 조금 알고 많이 아는 거지.
그럼 진짜 아는 거.
진짜 아는 거라.. 아빠 생각엔 아는 것은 남의 생각을 받아들인 거고 깨닫는 건 그걸 내 생각으로 만드는 거야.
아.
책을 읽는 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닫기 위해서야.
어른들은 책 읽으면 다 깨달아?
아니. 책은 엄청나게 많이 읽었는데 자기 생각은 없는 어른들도 많아. 그런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가 많이 안다고 떠들어대지.
그럼 책은 무조건 천천히 읽는 거야?
꼭 그렇진 않아. 대충 읽어도 되는 책도 있지. 아빠가 말하는 건 책다운 책, 좋은 책을 말하는 거야. 좋은 책은 반드시 천천히 읽어야 해. 너무 빨리 읽으면 책을 머리로만 읽게 돼.
그럼 또 뭘로 읽는데?
(김건 가슴을 검지로 짚으며) 마음으로 읽지. 그래야 깨달을 수 있는 거야.
그렇구나.
책 백권을 대충 읽은 사람과 한권을 제대로 읽은 사람 가운데 누구 생각이 더 훌륭해질까?
한권 읽은 사람.
그럼 백권이 아니라 만권이라면?
그래도 한권 읽은 사람.
(드림텐)
2006/07/17 14:45
얼마 전 부산에서 전교조 교사들에게 강연을 할 때 김진숙 선생(민노총 지도위원 하는, 강의 잘하기로 유명한 분)이 “90년대 이후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었지만 진정한 민주화는 퇴보했다”는 내 말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마치 절차적 민주주의는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민주화가 되었다지만 진정한 민주화는 오히려 퇴보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지만, 수긍이 가는 지적이었다. 이 더러운 신자유주의 정권은 절차적 민주주의고 법이고 엿 바꿔먹은 지 오래다. 박래군이 '또' 구속되었다.
2006/07/16 14:57
(질문에 답하기 전에 ‘진보개혁세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몇 자 적습니다. 지금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말이 상용되고 있고 귀 신문의 기획 역시 그에 근거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진보’와 ‘개혁’이라는 전혀 다른 개념이 한 묶음으로 쓰임으로써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고 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이 문제가 정리된 후로..)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말은 ‘좌파우파세력’이라는 말과 같다. 이런 개념적 혼란이 담긴 말이 생긴 배경은 옛 독재-민주화 구도다. 흔히 옛 독재세력을 잇는 세력은 ‘수구기득권세력’이라 민주화운동을 잇는 세력은 ‘진보개혁세력’이라 부른다. 민주화운동을 잇는 세력을 진보개혁세력이라 부르는 건 민주화운동이 두 세력의 연대였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은 군사독재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한 자유주의적 우파(현재의 개혁세력)와 변혁적 좌파(90년대 이후 개혁세력에 의해 배제되어 온 진보-좌파세력)의 연대였다.
그러나 이미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화가 시작된 지 20여년 이 지났다. 9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적자를 자임하며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개혁우파 세력은 늘 독재-민주화 구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 수구기득권(극우) 세력이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라고 말하면서, 개혁우파와 극우파의 대립을 우리사회의 중심 갈등으로 설정함으로써, 진보운동을 배제시켜왔다. 나도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초기부터 참여한 바 있지만 오늘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극우 세력이 아니라 바로 개혁우파 세력이다. 90년대 이후 사회문화적 개혁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유도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올인하여 우리 사회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개혁세력 말이다.
‘진보개혁세력의 위기’가 아니라 ‘개혁세력의 위기’다. 그들이 진보/좌파를 참칭해오다 그들 스스로 민중의 적대세력임이 밝혀지고 있다. 진보세력은 90년대 이후 ‘오늘의 진보’를 자임하는 개혁세력에 의해 사회적 영향력에서, 대중들의 관심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개혁과 진보를 하나로 보는 개념적 혼란은 개혁세력에 대한 실망을 진보세력에 대한 실망으로 확대시키기도 한다.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은 그런 현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더 이상 혼란을 용납하지 않는다. FTA 문제는 대중들로 하여금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대중들은 FTA가 자신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고갈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열우당은 FTA를 찬성하고 제도정치권에서 FTA를 반대하는 건 민노당뿐이다. 대중들은 또한 민노당보다 진보적인 제도정치권 밖의 진보운동 세력을 조금씩 파악해갈 것이다.
절차적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우파끼리 좌우를 갈라먹음으로써 진보-좌파가 배제되어 왔다는 것이다. ‘진보개혁세력의 위기’, 즉 개혁세력의 위기는 진보와 개혁을 하나로 보는 습성에 의해 진보세력에게 피해를 주지만 서서히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분명히 함으로써 진보세력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진보세력의 발전만이 우리 사회에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민노당을 비롯한 진보/좌파세력이 ‘실력이 없다’고 느껴지는 두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개혁 우파에 의해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무대에서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실력을 평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실력을 평가하는 패러다임이 철저히 우파적이라는 것이다. 우파적 패러다임은 국가의 이해(실제론 지배계급의 이해)를 기반으로 하지만 좌파적 패러다임은 계급의 이해(인민의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좌파적 지향을 우파적 패러다임으로 보면 엉성해 보일 수밖에 없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차이인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말은 ‘좌파우파세력’이라는 말과 같다. 이런 개념적 혼란이 담긴 말이 생긴 배경은 옛 독재-민주화 구도다. 흔히 옛 독재세력을 잇는 세력은 ‘수구기득권세력’이라 민주화운동을 잇는 세력은 ‘진보개혁세력’이라 부른다. 민주화운동을 잇는 세력을 진보개혁세력이라 부르는 건 민주화운동이 두 세력의 연대였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은 군사독재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한 자유주의적 우파(현재의 개혁세력)와 변혁적 좌파(90년대 이후 개혁세력에 의해 배제되어 온 진보-좌파세력)의 연대였다.
그러나 이미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화가 시작된 지 20여년 이 지났다. 9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적자를 자임하며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개혁우파 세력은 늘 독재-민주화 구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 수구기득권(극우) 세력이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라고 말하면서, 개혁우파와 극우파의 대립을 우리사회의 중심 갈등으로 설정함으로써, 진보운동을 배제시켜왔다. 나도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초기부터 참여한 바 있지만 오늘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극우 세력이 아니라 바로 개혁우파 세력이다. 90년대 이후 사회문화적 개혁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유도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올인하여 우리 사회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개혁세력 말이다.
‘진보개혁세력의 위기’가 아니라 ‘개혁세력의 위기’다. 그들이 진보/좌파를 참칭해오다 그들 스스로 민중의 적대세력임이 밝혀지고 있다. 진보세력은 90년대 이후 ‘오늘의 진보’를 자임하는 개혁세력에 의해 사회적 영향력에서, 대중들의 관심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개혁과 진보를 하나로 보는 개념적 혼란은 개혁세력에 대한 실망을 진보세력에 대한 실망으로 확대시키기도 한다.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은 그런 현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더 이상 혼란을 용납하지 않는다. FTA 문제는 대중들로 하여금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대중들은 FTA가 자신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고갈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열우당은 FTA를 찬성하고 제도정치권에서 FTA를 반대하는 건 민노당뿐이다. 대중들은 또한 민노당보다 진보적인 제도정치권 밖의 진보운동 세력을 조금씩 파악해갈 것이다.
절차적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우파끼리 좌우를 갈라먹음으로써 진보-좌파가 배제되어 왔다는 것이다. ‘진보개혁세력의 위기’, 즉 개혁세력의 위기는 진보와 개혁을 하나로 보는 습성에 의해 진보세력에게 피해를 주지만 서서히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분명히 함으로써 진보세력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진보세력의 발전만이 우리 사회에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민노당을 비롯한 진보/좌파세력이 ‘실력이 없다’고 느껴지는 두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개혁 우파에 의해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무대에서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실력을 평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실력을 평가하는 패러다임이 철저히 우파적이라는 것이다. 우파적 패러다임은 국가의 이해(실제론 지배계급의 이해)를 기반으로 하지만 좌파적 패러다임은 계급의 이해(인민의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좌파적 지향을 우파적 패러다임으로 보면 엉성해 보일 수밖에 없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차이인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6/07/12 11:40
2006/07/11 23:59
2006/07/10 10:19
요즘 독자 편지에 답장을 못 하고 있다. 이래저래 정신적 여유가 없기도 하고 형평성 문제(답장을 하는 편지와 안하는 편지의 기준이 분명치 않아서 늘 마음이 불편했다) 때문이기도 한데, 하여튼 당분간은 그러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함을 전한다.
2006/07/05 02:46
김단.
응.
쓰레기 버리러 가자.
응, 잠깐만.
쓰레기통에 있는 쓰레기를 모아 봉투에 넣고 재활용쓰레기들을 현관 앞으로 꺼내고 하는 내내 김단은 제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안 나오고 뭐해?
응..
빨리 나와.
알았어, 잠깐만..
그제서야 나온 김단은 아래 위 옷을 다 새로 꺼내 입고 모자까지 썼다.
무슨 나들이 가냐. 쓰레기 버리러 가면서 뭘 그렇게 멋을 내?
그게 아니라..
김단은 시무룩해져서 쓰레기들을 나른다.
그제야 알아챈 둔한 아비.
이젠 집 앞에 나갈 때도 그전과는 다르구나?
응.
그렇구나. 아빠가 미처 생각 못했구나. 미안.
응.
응.
쓰레기 버리러 가자.
응, 잠깐만.
쓰레기통에 있는 쓰레기를 모아 봉투에 넣고 재활용쓰레기들을 현관 앞으로 꺼내고 하는 내내 김단은 제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안 나오고 뭐해?
응..
빨리 나와.
알았어, 잠깐만..
그제서야 나온 김단은 아래 위 옷을 다 새로 꺼내 입고 모자까지 썼다.
무슨 나들이 가냐. 쓰레기 버리러 가면서 뭘 그렇게 멋을 내?
그게 아니라..
김단은 시무룩해져서 쓰레기들을 나른다.
그제야 알아챈 둔한 아비.
이젠 집 앞에 나갈 때도 그전과는 다르구나?
응.
그렇구나. 아빠가 미처 생각 못했구나. 미안.
응.
2006/07/04 10:46
잘 지내시는지요? 허성호입니다. 선태 형한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부안에 있습니다. 부안생태문화활력소란 단체가 만들어졌는데, 어쩌다가 여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폐교된 마포초등학교를 변산공동체, 산들바다(유기농공동체), 주민풍물패 천둥소리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간이었는데, 부안반핵민주항쟁을 거치며 부안생태문화활력소가 만들어져 이 공간에 한 운영단체로 들어가게 되고, 생태문화전시실, 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이런 저런 지역 운동의 한 공간으로 자리잡아가는 중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로운 공간이 어디 있겠냐만, 최소한 여기는 공산사회가 어떨지에 대한 자연스런 이미지가 그려지는 곳입니다. 여기 공동체들과 그 식구들이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 문화의 차이나 지역색 같은 것에 적응하는 단계라서 그렇지만, 좀 더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되면 공동체 바깥의 진짜 세계와 다시 부딪히면서 공산사회 같은 느낌은 한 때의 낭만이 되어버릴 거 같지만. 하여간 지금은 참 좋네요. 아무래도 이쪽에 아는 분들도 꽤 있을 거라 짐작되는데 언제 시간과 여유가 되면 한번 놀러 오세요. 아! 그리고 보내주시는 '고래가그랬어'의 한 권은 제 조카에게 보내는데, 조카가 너무 좋아합니다. 제가 늦게 보낼 때면 이미 그 전에 조카에게 독촉전화를 받기도 하죠. 제가 가족과 가지는 거의 유일한 끈이 '고래가그랬어'입니다. 그 때마다 형에게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2006/07/03 23:18
연극 총구가 일본에서 책으로 나온단다. 거기 들어갈 대담 자리에서 오랜 만에 ㅎ선생을 만났다. 눈에 띄게 안색이 안 좋았다. 세상 돌아가는 게 맥이 빠진다며, 이렇게까지 지리멸렬해질 줄은 몰랐다며 쓰게 웃는 그를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나도 내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는 후배 앞에선 똑같은 얼굴을 하기도 하지만 그의 절망감은 정도가 다른 것 같다. 그를 안 지 7년. 늘 좋기만 했던 건 아니지만, 동료라 여겼던 이들이 다들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속물적 안정에 여념이 없는 지금 돌아보면 그 만한 사람도 없지 싶다. 조심스레 ‘느린 위로’가 되는 관계를 생각해본다. 일간 소주 안주 챙겨 그의 거처를 방문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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