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4'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06/04/30 어린이날 선물
  2. 2006/04/27 반성문 1
  3. 2006/04/25 일대일
  4. 2006/04/25 1234
  5. 2006/04/25 123
  6. 2006/04/23 바리새인
  7. 2006/04/21 두 권으로
  8. 2006/04/20 공립학교, 대안학교
  9. 2006/04/18 MP3 플레이어
  10. 2006/04/17 다 컸구나
  11. 2006/04/16
  12. 2006/04/16 고음불가
  13. 2006/04/14 사과
  14. 2006/04/11 하늘이 낮다
  15. 2006/04/10 다시, 박래군
  16. 2006/04/07 배움
  17. 2006/04/05 만년필
  18. 2006/04/03 국익 메모
2006/04/30 23:35
나에게 '괜찮은 어린이날 선물'을 물어보는 이들이 꽤 있다.
'왜 나에게?' 하다가 문득 내가 이른바 '어린이잡지 발행인'이라는 걸 되새기며 웃는다.
가장 먼저, 늘 권하는 건..

뚝딱뚝딱 인권짓기
2006/04/30 23:35 2006/04/30 23:35
2006/04/27 21:36
김단이 3학년이던 어느 날, 김건이 폐렴에 걸려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있는데 김단의 급우에게서 김단이 시험 시간에 부정 행위를 해서 벌을 받고 잇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갸우뚱했다. ‘내 새끼가 그럴 리가 없다’는 아비의 마음이 아니라 아무래도 김단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단도 물론 결점이 있는 아이지만 거짓말은 그의 종목이 아니었다.
저녁에 김단 방에 가서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김단은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아빠, 잘못했어요”하며 눈물을 보였다. 나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잘못했다면 뭘 잘못했는지 이야기해볼까?” 나는 김단을 달래가며 차근차근 사실 관계를 짚어갔다. 그리고 김단이 누명을 썼다는 것, 화가 난 교사에게 주눅이 들어 제 결백을 주장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안도감을 품고 나는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단이가 잘못한 게 아니었구나. 하지만 단지 곤란한 순간을 넘기기 위해 도둑 취급을 받은 건 잘못이야. 아빠도 오해나 성급한 마음에서 너를 잘못 야단쳤다는 걸 알게 되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너에게 사과하지? 네가 너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누가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겠어?”
하지만 열 살이라는 나이는 제 명예를 제 힘으로 지키기엔 어린 나이다. 이제 그 아이의 아비가 그 아이가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남았음을 되새기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무슨 일만 있으면 교장에게 전화하고 교육청에 달려가는 우악스런 사람도 있지만, 대개의 학부모란 제 아이를 볼모로 잡힌 처지라 교사와 상대를 하려면 어딘가 덜 당당해지기 마련이다. 김단의 담임이 어떤 사람인지, 합리적인 소통이 가능한 사람인지, 혹시 막되어먹은 사람이라면 소통의 과정에서 김단이 상처를 받을 텐데...
나는 김단에게 담임선생이 써오라고 한 반성문을 버리고 사실에 근거하여 다시 반성문을 써보자고 했다. 김단은 “선생님한테 혼날 텐데” 불안해했다. “아무리 겁이 나도 네가 한 짓이 아닌 일로 누명을 써선 안 돼.” 그리고 애써 미소지으며 말했다. “김단. 어떤 경우에도 아빠가 너를 지킬 거야, 걱정하지 마.” 그제서야 김단은 활짝 웃었다. 김단이 새로 쓴 반성문.

“2교시에 수행평가를 보다 한 문제 답의 글자를 좀 이상하게 써서 지우개로 지우다가 평가지가 찢어졌다. 나는 선생님께 야단 맞을까봐 앞 자리의 서희에게 테이프를 빌려달라고 했다. 평가를 보는 중에 내가 서희랑 말을 한 것을 보시고 선생님께서 둘이 나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서희랑 같이 선생님께 갔다. 수행평가지를 내고 손을 들고 서있었다. 몇분 후 선생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셔서 들어갔다. 선생님께서 지운 답은 틀린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난 내가 알고 있는 답을 글자가 이상해서 지운 것이고, 시험 시간에 말을 걸긴 했지만 남의 답을 베껴쓴 건 아니기 때문에 답을 써도 된다고 생각했다. 평가지를 채점한 서희는 그 답이 틀렸다고 했지만, 나는 다시 맞은 것으로 고쳐서 선생님께 가지고 나갔다. 선생님께서 틀린 것을 맞은 것으로 고쳤다고 야단치셨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화를 내실 거라곤 생각 못했기 때문에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왜 그랬냐고 계속 야단을 치셨을 때 겁이 난 나는 “덤벙대다 그랬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음부턴 평가를 보는 중에 말을 걸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시사저널)
2006/04/27 21:36 2006/04/27 21:36
2006/04/25 19:47
어제, 책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만난, 그 책의 저자인 50대 초반의 교수. 시작하기 전에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김진균 선생 이야기가 나오니 금세 표정이 착잡해진다. 그는 김진균 선생의 제자고 같은 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선생님이 저한테 뭐랄까요 좀 서운해 하셨달까요. 제가 현실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지길 바라셨고 또 워낙 신념이 투철한 분이니까 제가 노동운동 쪽에 힘을 보태주길 바라셨는데.. 하여튼 말년에 3, 4년은 좀 소원했습니다. 퇴임기념 논문집에도 결국 논문을 안 냈는데.. 마석에 묻히실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제가 춘천에 연고가 있어서 자주 지나가는데 지나갈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서.. 아이고 그 양반 이야기하니까 담배 한 대 피고 와야겠네요.” 처음 보는 나에게 많이 불편할 속내를 털어놓는 그는 좋은 사람 같았다. 그는 대학 4학년이라는 딸을 데리고 왔고 구경하러 온 두 제자에게 다정다감했다. 본 시간이 되자 그와 나는 결국 논쟁 비슷한 걸 했는데 그의 견해를 공격하는 게 적이 불편했다. 한국의 보수적인 학자들(특히 중년 남성인)이란 백이면 백 편안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울 만치 느끼한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을 만나면 영 맥이 빠진다. 이런 사람이 고작 "갈등과 반복을 넘어 미래를 도모하자"는 상투적인 주장이나 하는 보수주의자라는 게 애석하고, 소통을 통해 생각을 모아가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접점이 없다는 게 애석하다. 건달 시절 내가 좋아하던 형이 해준 말이나 되새겨야 하는 걸까? “세상에 일대일로 만나서 나쁜 놈이 어디 있냐?”
2006/04/25 19:47 2006/04/25 19:47
2006/04/25 07:41
060523.jpg
2006/04/25 07:41 2006/04/25 07:41
2006/04/25 07:40
View image
2006/04/25 07:40 2006/04/25 07:40
2006/04/23 14:05
바리새인은 기독교 영역을 벗어나서도 흔히 위선자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곤 한다. 지금이 ‘어쨌거나’ 예수의 세상이기에(그 예수가 인민의 예수든 부시의 예수든 간에), 예수가 위선자라 비난한 그들이 위선자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건 자연스런 일이긴 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느끼한 위선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랜 외세의 침탈로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 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진지한 개혁운동가들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늘의 시민운동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인민들에게서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들을 그토록 혐오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그건 바리새인의 행태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특별한 사회의식에 근거한다. 예수의 관심은 오로지 하층민, 죄인들이었으며 그런 예수에게 그들을 배제한 ‘양식있는 중간계급의 개혁운동’이란 혐오스런 것이었다. 그런 개혁운동은 예수가 집중하는 사람들의 삶을 눈곱만큼도 바꿀 수 없었지만 가장 훌륭한 운동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갈등은 오늘 좌파운동가들과 시민운동가들의 갈등과 비슷한 맥락이 있다.
2006/04/23 14:05 2006/04/23 14:05
2006/04/21 22:53
예수전을 작은 책 두 권으로 만들면 어떨까 싶다.

나의 예수전 1 - 2천년의 외로움
나의 예수전 2 - 마가복음 읽기
2006/04/21 22:53 2006/04/21 22:53
2006/04/20 13:37
제도교육이라는 게 제도 미디어와 함께 대중의 의식을 체제에 포섭하는 가장 주요한 도구라는 원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내 학교 체험은 참 끔찍했다. 나는 5.16 군사쿠테타가 다음해에 태어나 박정희가 죽은 다음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선생들은 그 시절에 걸맞았다. 나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은 제 반지를 잃어버리자 아이들을 하루 종일 변소에도 못가게 하고 교탁에 엎드려 울었다. 울다가 한번씩 우리를 노려보던 그 추한 눈빛을 난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 체험이 하도 끔찍하다 보니 김단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적이 긴장하고 이런저런 생각들도 많이 했다. 내 주변엔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는 이들이 많다. 나 역시 대안학교의 미덕과 대안학교 운동 하는 이들의 분투를 존중한다. 그럼에도 내가 대안학교를 선택하지 않은 건 ‘사회적 불편함’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 현재 한국의 대안학교들은 단지 제도교육을 불신하는 부모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일정한 경제적 안정과 교양을 가진 부모들의 ‘제한된 권리’다. 단적으로 말해서 ‘제 아이를 동네 학교에 보내기도 어려운 형편’의 부모들에게 대안학교는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물론 아이는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보는 게 낫다. 그러나 아이가 좋은 것만 본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아이는 나쁜 것을 보고 때론 나쁜 것에 고통 받으며 나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움으로써 좋은 사람이 된다. 내가 오늘 알량하나마 좌파로 살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내가 초중고 12년 동안 만난 교사들이 반면교사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조리 우파였으며, 우파의 삶이라는 게 인간적으로 얼마나 품위 없는 것인지 나에게 생생히 가르쳐주었다.
그러저러해서 나는 아이를 ‘동네 아이들이 다 가는 학교’에 보내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아이가 아비의 유별난 사회의식 때문에 희생된다면 그 또한 폭력일 것이다. 아이에게 어떤 분명한 이유가 생긴다면 나는 언제든 대안학교를 고려할 생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김단은 7년 남았고 김건은 10년 남았다. 공립학교는 내가 다니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지만 여전히 아이를 맡기기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교사의 편차가 터무니없이 커서 아이가 어떤 교사를 만날지 운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김건과의 대화.

김건 : 아빠. 선생님이 태극기 달으래.
김규항 : 무슨 날인데?
김건 : 우리나라 법을 정한 날이라던데.
김규항 : 제헌절? 단아 제헌절이 언제냐?
김단 : (달력을 들여다보며) 17일, 일요일인데.
김규항 : 그렇구나.
김건 : 6학년 형들이 태극기 안 단 집 적으러 다닌대. 그래서 적히면 가만히 안두겠대.
김규항 : 가만히 안 둬? 누가?
김건 : 선생님이.
김규항 : 너희 선생님이 잘 못 생각하는 것 같다. 태극기 다는 건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거야. 먼저 제헌절에 대해 더 알아보고 달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아빠가 도와줄게. 하지만 안 달아도 괜찮아.
김건 : 선생님한테 혼나면?
김규항 :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혼이 나? 걱정 안 해도 돼.
김건 : 알았어...
(시사저널)
2006/04/20 13:37 2006/04/20 13:37
2006/04/18 18:03
녹음기도 필요하고 해서
하드디스크 붙은 MP3 플레이어를 장만했는데
'삶의 질'이 달라졌다.
음악을 훨씬 많이 듣게 된 것이다.
2006/04/18 18:03 2006/04/18 18:03
2006/04/17 18:42
060417_.jpg


“김단,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왜, 잠을 못잤어?”
“응.”
“일찍 자지.”
“요즘 12시가 넘어야 잠이 와.”
“그래..”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다 컸구나.
2006/04/17 18:42 2006/04/17 18:42
2006/04/16 23:51
060417.jpg


한 놈은 갈아엎고 한 놈은 긁어내고..
다음 일요일엔 아이들이 호미를 들기로.
2006/04/16 23:51 2006/04/16 23:51
2006/04/16 23:18
고음불가. 그게 아주 유명해진 다음에야 처음 보게 되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재미있는 개그가 채택되는 과정은 어땠을까? 왜냐하면 고음불가의 구성이라는 게 말로 설명하면 너무나 앙상하기 때문이다. “셋이 나와 노래를 하는데 둘은 제대로 하고 한명은 틀린 저음으로 한다”는 걸 아이디어라고 냈을 때 성질 나쁜 피디라면 재떨이를 집어 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언어로 예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허망함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언어로 예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란 실은 얼마나 허망한가! 비평, 예술론, 미학, 예술정책 따위란..

(한 후배는 어쩌면 노래방 같은 데서 셋이 장난삼아 한 게 채택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꽤 그럴싸한 추정.)
2006/04/16 23:18 2006/04/16 23:18
2006/04/14 15:52
장인과 전주 시내를 걸을라치면 백미터 가는데 족히 10여분은 걸렸다. 동장에서부터 동네 건달까지, 워낙 인사하는 사람이 많아서다. 그는 집안 살림엔 무심했지만 세상 살림엔 참 지극했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식구들밖에 모르는 분이다. 동무들과 어울리는 법도 거의 없고 그저 성실하고 조용한 그런 분이다. 장모는 그런 장인이 아쉬웠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 아쉬웠다. 네분이 처음 만났을 때 장모는 아버지에 찬탄하고 어머니는 장인에 찬탄했다. 사람이란 좋은 것보다는 자기가 못 가진 것에 좀 더 찬탄하는 것 같다.
내가 찬탄하는 아버지상은 늘 미소 짓는 바위 같은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상이 이상적인 아버지상이라 생각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런 아버지가 못되기 때문이다. 내 글, 특히 아이 이야기를 읽은 이들은 나를 실제보다 훨씬 더 너그럽고 자상한 아버지로 그리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자상하긴 하지만 한없이 너그러운 아버지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아버지치곤 드물다 할 만치 아이들과 복닥거리는 그런 아버지다. 물론 그건 내가 그런 아버지상을 선택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복닥거리는 아버지’라는 전제에서 내가 선택한 최선의 아버지상은 ‘이치에 맞는 아버지’다. 나는 아이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이치에 맞는 결론을 찾곤 한다. 아이들은 아직은 순수하게 대화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100분토론’에 나오는 중년남성들처럼 대화를 그저 ‘자기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대화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거의 없다.
그리고 대화에 임하는 내 가장 중요한 태도는 ‘사과할 준비’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어른들도 아이들만큼 많이 실수하고 잘못한다. 그런 실수나 잘못을 모조리 아이에게 자복할 순 없지만 적어도 아이가 알아챈 실수나 잘못은 바로 사과해야 한다. 바로 사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제아무리 너그러운 가르침도 너그러운 권위주의에 머물게 된다.
아이에게 바로 사과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역시 그랬다. 그러나 마음먹고 해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며 비할 수 없이 청명한 자기성찰의 방식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내 가장 최근의 사과 장면.

김규항 “김단, 아빠가 야단칠 때 옛날 일 들춘다고 말했다며?”
김단 “엄마가 그래? 응..”
항 “언제 그랬다는 거지?”
단 “지난번 서울 갔다 오던 날, 차에서.”
항 “옛날 일 뭘 이야기했지? 아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단 “나도 기억이 잘 안 나. 그런데 그랬어.”
항 “아빠가 그러나?”
김건 “아빠, 나한테도 옛날에 택배차에 가서 받은 이야기 자꾸 하고 그랬잖아.”
항 “그건 아빠가 건이한테 사과했었고, 요즘도 아빠가 그래?”
김건 “요즘은 안 그러는데.”
항 “단이가 볼땐?”
단 “안 그래.”
항 “그러니까 아빠가 요즘은 안 그러는데 이번에 그랬다는 거지?”
단 “응.”
항 “아빠가 잘못했네. 앞으로 주의할게.”
단 “응.”
(시사저널)
2006/04/14 15:52 2006/04/14 15:52
2006/04/11 12:52
060411.jpg


옥상에 올라가 한참 서 있었다.
오전에 받은 메일들엔 하나같이 “하늘이 낮다” “시계가 너무 환해 아찔하다”는 말들이 들어 있었다.
2006/04/11 12:52 2006/04/11 12:52
2006/04/10 15:06
박래군과 통화하다가 길어져 "내일 다시 통화하자"고 했더니 “대추리에 들어와 있는데 내일 아침엔 크게 싸울 것 같아 통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몸조심해”하고 끊었는데 다음날 그는 연행되었고 결국 구속되었다. 박래군 아내가 쓴 탄원서. 그 동안 뭘 쫌 써보려 몇차례 시도했지만 이보다 더 잘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얼마나 잘못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글.


탄원서

판사님. 이 사건의 판결을 맡으신 용 판사 님께서는 판사 님의 가치관이나 삶과 퍽 다르게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일지라도 가슴에 담아 읽으실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길 바라면서 탄원서를 씁니다.

저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다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된 인권활동가 박래군의 아내입니다. 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두 딸을 키우는 평범한 엄마지만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과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알고 한마음으로 더불어 한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저희 남편은 평생을 낮은 곳에서 인권을 일궈내고 정의와 진실이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힘겹게 살아 왔습니다. 독재 시절에는 민주화를 외치다 억울한 옥살이를 1년이나 했고, 부모님도 모르는 사이에 군대에 강제 징집을 당했고, 자기 몸에 불을 붙여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분신 항거했던 동생의 시커멓게 탄 몸뚱이를, 꺼져가는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숱한 슬픔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그 고난의 길을 피해 따뜻한 안식처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아온 것은 내가 편안하고 배부르게 살 때, 내 곁에서 힘들게 고통받고 억압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는 착하고 올곧은 심성의 소유자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어릴 적 아주 가난하게 살았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 한 평 없이 머슴살이로 시작해 농토를 일구어 삼형제를 가르쳐야 했던 집안이었으니까요.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점심시간이면 집까지 뛰어와 끼니를 때우고, 등잔불도 아끼시는 할머니 때문에 밤에는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도 읽을 수 없었답니다.

악착같이 농사일을 하셨던 부모님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과일이며 채소를 장에 내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는 뻥튀기 구르마를 끌고 다니며 장 바닥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삼형제는 너무도 착해 학교에서 돌아와 밤늦도록 농사일을 돕고 그 추운 겨울에도 뻥튀기 구르마를 따라나서 하루 종일 시커먼 연기를 뒤집어쓰고 부모님을 도왔답니다.

가슴 절절한 시를 많이 썼던 동생이 남긴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자갈논 한 자리나마 가지고 싶다
밤낮없이 새경을 모으고
살 에이는 겨울길
뻥튀기 구르마를 끌던 아버지
국민학교 6학년 어린 나이로
구르마 쫓아다니던
큰 형님이 가여워
밤마다 베갯잎을 적시던 엄니
양회포 한 포대 얻자고
이장한테 삿대질하다가
퍼렇게 멍든 아버지 얼굴 보고
여보
우리도 한 번 보란듯이 삽시다
울며울며
자식새끼들 끌어안으시던
엄니

시에 나오는, 등골이 휘도록 힘들게 살아온 부모님을, 부모님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남편은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잊지 않았습니다. 연세대 국문과를 나온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귀를 막고 쳐다보지 않고 살았으면 이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처럼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남편은 인권의 불모지인 이 땅에 인권의 싹을 심고 키웠습니다. 장애인, 이주 노동자, 성적 소수자, 노숙자, 양심수, 구속 수감자, 복지 시설 수용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당하고, 멸시받고, 차별받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찾고 고민하고, 그들이 일어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갔습니다.

반인권과 부패로 얼룩진 사회복지설이었던 에바다 농아원을 정상화하기 위한 싸움에선 비리재단 측에서 퍼부은 똥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말 못하는 이들의 귀와 입이 되어 주는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고문후유증을 앓던 선배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을 했고, 폭력적인 수용 시설에 억울하게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았던 수용자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수용 시설에서 나왔던 한 사람은 10년이나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그는 고아여서 가족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그의 형제나 되는 듯 그 사람이 이사를 하면 이삿짐을 손수 날라 주고,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교도소에 있는데 얼마 전 석방 날짜가 연기된 줄도 모르고 사무실 총회를 밤 새워 하고 새벽에 춘천까지 차를 몰아 그를 맞이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가 가는 길엔 왜 이렇게 슬픔과 어려움과 시련이 많을까요. 쉽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 가진 자들과의 싸움, 폭력과의 싸움, 권력과의 싸움, 불의와의 싸움, 편견과의 싸움... 끝도 없는 싸움이 계속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늘 씩씩하게 웃고 다닙니다. 우울하거나 비관하는 법이 없고, 좌절하지도 않고, 고난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아갑니다. 어떤 사람과도 잘 어울리고, 자기 말을 하기 전에 남의 말을 들어 주었던 그의 곁엔 언제나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남편은 바깥 일로 늘 바쁘게 살지만 가정에도 충실한 책임감 있는 가장입니다. 아내를 존중하고 아낄 줄 아는 남편이고, 아이들로부터는 정신적 지주란 믿음을 얻고 있는 아빠입니다.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원고를 쓰거나 이런저런 일을 하여 가정의 경제도 책임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들을 무책임하게 돌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는 시간이라도 쪼개어 가족들을 보살핍니다.

넓적하고 그을린 투박한 얼굴과는 달리 집에서는 아주 섬세하게 가족을 챙깁니다. 아이들이 엄마인 저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이해해 주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아이들과 놀아 주고, 아빠는 좋은 분이라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희 옆집 아주머니는 저희 집 아이들은 엄마가 오면 엄마하고 큰 소리로 나와 부르지 않는데 아빠가 오면 맨발로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며 아빠를 반기며 안긴다고 애들이 아빠를 참 좋아한다고, 무슨 아빠가 애들을 그렇게 이뻐하냐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저희 남편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아이들의 아빠로서 뿐만 아니라 지금도 경기도 화성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늙으신 부모님에겐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여느 농민처럼 당신의 목숨처럼 땅을 아끼시며 한평생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분이십니다. 제가 결혼하던 해 고관절을 앓으시고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되셔서 목발을 짚고 다니시지만 농사일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래 서 있을 수도 쪼그려 앉을 수도 없으셔서 땅바닥을 기어다니시고 스티로폼으로 만든 방석을 끌고 다니면서도 밭일을 하십니다.

다들 왜 그렇게 사시냐면서 농사일을 그만두시라고 만류하지만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농사를 지으시겠답니다. 만류하는 가족도 있지만 저희 남편은 아버님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것을 존중해 드리고, 아버님이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드리고, 주말에 시골에 내려가 농사일을 돕습니다. 토요일도 나가 일하고 돌아와 일요일엔 쉬어야 하는데 달려갑니다. 땅을 갈아 곡식과 채소를 심을 수 있게 해 드리고, 두둑을 만들고, 고추 말뚝을 박고, 거름을 져 나르고, 농약을 주고, 포도를 따고, 포도를 갖다 팔고, 고추를 따고 고구마를 캐고, 깨를 털고, 농기계를 수리하고... 쓰려면 다 쓸 수도 없는 고된 농사일을 불평 없이 하고 돌아옵니다. 막내아들을 그렇게 먼저 보낸 부모님이 찢긴 가슴을 쓸어내리며 외롭게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생각을 놓을 수 없어서일 것입니다.

한평생 좋은 일도 없이 자식을 다 떠나보내고 병든 몸으로 외롭게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께 차마 남편이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자식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실까, 참 걱정이 많이 됩니다. 아빠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은 몹시 슬퍼하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아빠 같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왜 구속시키는지 모르겠다며 엄마와 아빠 모두 힘내시라고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판사 님께 비굴하게 빌지 말고 당당하게 부모님의 뜻을 말씀 드리라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돌아보면 그와 수많은 인권활동가들의 행동은 이 땅의 소외된 자들의 인간다운 삶, 자유롭고 평등하고 인간의 권리가 존중되는, 존엄한 삶을 위한 고귀한 실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수많은 인권활동가의 노력으로 국가인권위원회도 만들어진 것이고 국민들도 인권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인권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경찰 대학에 가서 인권 교육을 하고 법조인이 인권 교육을 받기도 하는 세상이니 인권의 싹이 크긴 큰 모양입니다. 그러나 인권은 아직 커다란 나무로 자라지 못했고 숲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인권활동가가 구속되고, 평생 살아온 땅에서 옷이 벗겨진 채 처참하게 끌려가는 농민이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는 진실의 편에 서 있었고 그의 외침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지금 구속되어 철창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번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반대 또한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외면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었기에 나선 것입니다. 이 땅을 미군에게 내어 주어 전쟁터로 만들고 싶지 않으며 평생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음은 당연한 마음이고 지키려는 싸움은 정당한 싸움입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사업 추진 중 일어난 충돌은 주민과 국민의 충분한 협의와 동의 과정 없이 일부는 돈으로 회유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땅은 강제로 빼앗으려 는 일련의 과정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공무집행방해라는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땅의 평화이고 농민들의 생존권입니다. 농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땅을 강제로 파헤치는 일을 공무라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했다면 그렇게 반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공무를 방해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악이 그것에 저항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몸부림 끝에 뒤바뀌었는지 역사를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전쟁기지로 내어 주고 농민을 내쫓은 일도 부끄러운 역사가 되리라는 것을,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용기 있게 지켜내려 했던 실천이 옳았음을 재판 과정에서 밝힐 것입니다.

제가 길게 저희 남편의 어린시절이며 살아온 이야기를 한 것은 저희 남편은 비겁하게 도주하지 않을 것이며, 재판을 성실하게 받고 진실을 밝히려 애쓸 사람이라는 것을 판사님께서 알아주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구속이 필요하다고 상당히 의심된다는 ‘공무집행방해죄’는 검사 님의 소견일 뿐입니다. 이렇게 충돌되는 사안은 양쪽의 주장을 공평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양쪽의 주장을 듣고 재판을 통해 진실을 가리면 됩니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불구속 수사와 재판으로도 얼마든지 죄를 물을 수 있습니다. 죄가 있다고 상당히 의심되지도 않거니와 증거 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는 인권활동가를 구속하는 것은 부당하고 억울합니다.

현 정부는 형사소송절차에서 피의자 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집행해 나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에 따라 공개적으로 활동해 온 저희 남편은 왜 구속되어야 하나요? 아빠의 구속을 아이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판사 님, 부디 불구속수사 원칙이라도 지켜진 속에서 남편이 진실의 법정에 설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판사 님, 아이들 아빠를 풀어 주십시오. 남편이 집에 돌아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게, 그가 이 세상 그늘진 곳에서 햇볕을 드리우는 소중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박래군 아내 정종숙
2006/04/10 15:06 2006/04/10 15:06
2006/04/07 02:54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갖는 가장 큰 확신 가운데 하나는 아이는 배워야 한다는 것, 배움으로서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건 얼마간 맞다. 어른들이 가르치는 건 구구단만이 아니다. 교육은 제도 교육의 틀 안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좋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치며 아이들은 그걸 배움으로써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나 언제나 맞는 건 아니다. 아이들은 배우지 않았기에 훌륭하며, 배움으로써 망가트려지기도 한다.
지난 글에서 내 아들 김건이 “그런데 왜 어른들은 땅이 자기 거라고 하는 거야?” 라고 해서 가슴이 저렸다고 했었다. 김건은 말하자면 땅을 사유화하는 건 잘못이라는, 지구의 주인은 지구가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어른으로 치면 매우 특별한 사람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다. 주류 사회에서 벗어나 생태주의적 실천을 하며 사는 사람 가운데서도 근본주의적인 경향의 사람에게서나.
그런데 아홉 살짜리가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내 아들의 특별함을 방방곡곡에 알려야할까? 그러나 실은 전혀 놀라운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다. 아이들, 땅과 부동산 문제에 대해 아직 ‘배우지 않은’ 모든 아이들은 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땅과 집은 필요에 의해 분배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땅과 집에 관한 그들의 첫 생각이다. 그래서 그들은 큰 개를 키우고 싶을 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가.”
우리는 그 말을 ‘철없는 소리’라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땅과 부동산 문제에 대해, 그 더러운 현실에 대해 조금씩 가르친다. 아이들은 땅과 부동산에 대해 배움으로써 땅과 부동산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잃어간다. 그들은 배움으로써 그들의 훌륭함과 품위를 잃어간다. 아이가 배움으로서 사람이 되어간다는 우리의 확신은 종종 가소롭다. 그 즈음 김건과 나눈 집에 관한 대화.

“아빠 왜 우린 집이 없어?”
“우리만 없는 게 아니라 집 없는 사람 많아.”
“선태 삼촌 집도 다른 사람 거야?”
“아니.”
“영식이 삼촌 집은?”
“영식이 삼촌 거지.”
“규일이 삼촌네 집은?”
“그건 다른 사람 거야.”
“범수 삼촌도?”
“범수 삼촌 거고.”
“그런데 뭐가 많아?”
“그 삼촌들은 그런데 알고 보면 아빠 주변에도 집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아.”
“우리 나라에 집이 모자라?”
“아니. 집이 많이 모자라면 다 길에서 자게?”
“그런데 왜 집 없는 사람들이 많아?”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들 때문이야.”
“여러 채를 가져? 자기가 다 살려고?”
“아니.”
“그런데 왜 집을 여러 채 가지는데?”
“돈을 벌려고 하는 거야.”
“어떻게?”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들이 집값을 막 올려. 그래서 돈을 벌어.”
“많이?”
“그럼. 열심히 일해서 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벌지.”
“어휴.”
“집이 없어서 창피해?”
“아니. 하나도 안 창피해.”
“그래. 창피한 건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이야.”
(시사저널)
2006/04/07 02:54 2006/04/07 02:54
2006/04/05 09:05
060405.jpg


날보러와요 보고나서 술집에 마주 앉은 해효가 꾸러미 두 개를 내밀었다. 풀어보니 만년필과 잉크다. “좋은 글 쓰시라구요.” 안 그래도, 전에 어떤 이한테서 몽블랑을 선물받았다가 자주 쓰지도 않으면서 비싼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게 영 불편해서 정중히 돌려줘 놓고는 내내 아쉬웠다. 만년필의 이름은 '아포지'. 검정에 단순하고 고전적인 생김새가 마음에 든다.
2006/04/05 09:05 2006/04/05 09:05
2006/04/03 14:31
(중대 대학원신문에 쓴 글. 퇴고가 덜 되어 거친 상태인데, 짬이 나면 다듬고 보완해보고 싶은 내용이다.)

올해 대학 신입생들은 1987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강연 같은 데서 그들을 만나면 감회가 있다. 그들이 태어난 해는 ‘민주화’의 원년이라 일컬어지는 해다. 그 해에 태어난 아이가 올해 대학생이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사회가 민주화한 지 20여년이 지났다. 알다시피 민주화란 민주주의화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인민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한다.(인민이라는 말에 괜한 반감을 가질 건 없다. 인민이란 영어의 피플과 같은 말일 뿐이다. 한국에선 국민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건 국가의 성원이라는 말이니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적당한 말은 아니다.) 하여튼 한국 사회가 민주화한 지 20년이 되었다. 한국에서 인민이의 주인노릇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참혹은 무엇인가?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빈곤층을 비롯한 빈곤의 확대, 가장 충성스러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시장개방과 공공영역의 사유화, 이어지는 민중의 삶의 파탄, 제국주의 침략전쟁 동조와 평택미군기지를 비롯한 반민중적인 국방외교정책... 무슨 놈의 인민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조목조목 인민의 삶을 거스르는 것으로만 가득한가. 한국은 민주화한 게 맞는가?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색을 하고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란 단지 자유롭게 투표하고 대통령을 욕할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말이다.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려면 세상이 어떻게 나누어지는지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세상을 나누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세로로 나누는 방법과 가로로 나누는 방법. 세로로 나누는 방법은 세상을 민족, 국가 따위로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이 방법이 세상을 나누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걸 안다. 월드컵 축구나 WBC 야구도 이 방법으로 나누어 벌어진다. 전통적으로 세상을 세로로 나우는 방법은 지배계급의 방법이다. 그들은 한 국가가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계급들 간에 온갖 불공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은폐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세상이 세로로만 나누어진다고 주장한다. 오늘 한국에서 난무하는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따위 계급을 통합한 구호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가로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세상을 세로로 나누는 기준이 민족이나 국가라면 가로로 나누는 기준은 계급이다. 세상이 민족이나 국가보다는 계급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은 유별난 사회의식을 갖는 사람이 아니어도 누구든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한 국가의 성원들은 과연 같은 세상에서 사는가? 이를테면 이건희 씨와 한 비정규노동자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똑같이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가지며 똑같은 축구팀을 응원하지만 과연 같은 세상에서 사는가? 미국에서 이건희에 해당하는 부자와 비정규 노동자를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둘이 똑같은 미국인이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산다. 그렇다면 이건희와 미국의 이건희, 혹은 한국의 한 비정규노동자와 미국의 한 비정규노동자는 어떤가? 그들은 국적도 다르고 생김새도 전혀 다르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오히려 같다. 결국 세상에 대한 견해나 태도는 세상을 세로로 나누려는 세력과 가로로 나누어보려는 세력 간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진보적인 태도나 견해란 민족이나 국가로 은폐된 세상을 애써 계급으로 나누어보려는, 그 실체를 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그런 노력의 가장 실제적인 방해물이 이른바 국익이다. 계급의 이해는 국가의 이해라는 좀 더 거대한 주장 앞에서 종종 왜소해지곤 한다. 국익이라는 구호는 한국처럼 세상을 계급으로 나누어보는 의식이 빈곤한 사회에서 특히 횡행한다. 그리고 국익의 환상은 다시 계급의식의 씨앗을 말려버린다. 군사 파시즘 시절이야 그 자체가 국가주의 세상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민주화 이후, 특히 민주화의 후반작업으로서 개혁작업을 수행한다는 노무현 정권 이후 국익 선동이 늘어만 가고 있다는 건 참 암담한 일이다. 2002 월드컵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그 자체로 국가주의적이거나 파시즘적인 건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이 흥분했듯 어떤 진보적인 사회적 힘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도 전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제 나라 축구팀이 의외의 선전을 한 데서 나오는 아주 자연스런 열기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건 그 규모나 외양과 무관하게 그저 ‘축구에 관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오늘 한국에서 울려대는 국가주의적 구호의 서막이 되었다. 독도 문제가 그렇게 이용되었고 황우석 사건이 그렇게 이용되었다. 앞서 나열한 오늘 인민의 삶과 관련한 문제들은 언제나 그런 국익의 광풍 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외면한다. 비정규노동자가 분신하고 농민이 할복할 때 그들은 어느 불쌍한 사람들의 문제인 양 외면하는 것이다.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이라는 것, 인민에게 필요한 건 국익이 아니라 계급의 이익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엔 미래가 없다.
2006/04/03 14:31 2006/04/03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