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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3/03 이야기 1
  2. 2006/03/02 구멍
  3. 2006/03/01 토론문
2006/03/03 17:02
조중사가 말하길, 내가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대하는 게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들이 있단다. 내 글이나 블로그의 내용을 근거로 말이다. 이를테면 동네친구들이나 아이들에겐 더없이 자상하고 관대한데 반해 사적으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선 냉정하며 독설조차 서슴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성문제에서도 딸에 대한 태도와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태도가 판이하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조중사는 “동네 친구분들이 제 아내나 아이 앞에서 사내 행세하다가 선배한테 작살나는 걸 못 봐서 그런 것”이라며 킥킥 웃었다. 나는 “자네 이야기가 맞긴 한데, 글쎄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는 걸.”하고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떤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그 기준은 가까운 사이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사회적인가 아닌가, 다. 가깝든 가깝지 않든 사적인 차원에서 주고받는 의견이나 행동들에 대해 나는 영 물렁한 편이다. 사적 자리에선 무거운 주제로 대화하는 걸 즐기지도 않거니와(나는 동네친구들과 술 먹을 때도 사회,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따분한 이야기는 그만하지” 흥을 깨버리곤 한다) 설사 좀 문제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그런 자리에서 정색을 하고 논리를 세우는 건 실없는 짓이라 생각한다. 다음날 술 깨면 다 잊을 걸 뭔 짓인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와 제아무리 가까워도 어떤 사회적 맥락의 주장이나 행동을 했다면 태도가 전혀 달라진다. 부러 그런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다. 그 결과 나는 이 바닥에서 두해에 한번쯤은 욕지기나는 말을 들어먹어야 한다. “모르는 처지도 아니면서 그렇게 심하게 말할 수 있어!” 아예 나더러 야바위꾼이나 브로커로 나서라 해라, 제길.
2006/03/03 17:02 2006/03/03 17:02
2006/03/0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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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으로 나가는 구멍. 파주.
2006/03/02 07:31 2006/03/02 07:31
2006/03/01 20:49
토론문을 읽고 나자 옆에 있던 박래군이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타협으로 일관하다 아부로 끝을 내는군.” ㅎㅎ..



토론자라고 앉아 있지만 실은 공부하러 왔다. 두 분의 발제와 두분의 토론문 고맙게 잘 들었다. 다른 토론자들은 장애인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활동가이거나 연구자인데 반해 나는 국외자로서 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입장에 있다. 그런 입장에서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을, 단상 형식으로 밝혀본다.

운동의 성과나 전망을 평가할 때 우리가 종종 범하는 오류는 가치관의 혼돈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주류사회의 가치관에 오염되어 있으며 그 오염된 가치관으로 다시 우리 운동을 평가하곤 한다. 그런 가치관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건 물리적 규모나 즉각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적 반향 같은 ‘상품적 가치’이다. 그렇게 본다면 90년대 이후 가장 성공적인 운동은 메이저 시민운동이 된다. 그러나 그런 운동이 실제 한국사회를 변화시켰는가에 대해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내 생각에 그 운동이 수행한, 혹은 수행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일들은 군사 파시즘이 물러난 후, 절차적 민주화와 개혁의 흐름 속에서 당연히 성취될 문제들을 요란스럽게 부각시킨 것에 불과하다.

운동의 성과나 전망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는 진보성이다. 사회를 진짜 변화시켰는가, 혹은 시키는가, 다. 문제는 진보성을 가진 운동은 변혁의 기운이 무르익은 매우 특별한 시기를 빼곤 대개 왜소한 외형을 가지며 심지어 계속 쇠락하는 듯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의 논평가들은 그 운동의 전망에 대해 이런저런 훈수를 두고, 활동가들은 싸워도 싸워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생활의 곤란에 사회적 존경마저 얻지 못하는 현실에 짐짓 지친다. 그러나 그런 상태야말로 운동의 진보성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은 그런 경향을 갖는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초라한 운동이 다 진보적인 건 아니지만, 진정으로 진보적인 운동은 언제나 당대에 초라하다.

운동의 진보성은 곧 체제에 대한 태도이다. 운동은 체제의 밖에서만 진보적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빠지곤 하는 또 하나의 오류가 바로 이 체제의 개념이다. 오늘 시점에서 체제는 10년 전, 혹은 20년 전과는 전혀 다르다. 오늘은 군사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개혁적우파와 진보운동세력이 연대하던 시기가 아니다. 오늘은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화와 개혁이 20여년이나 진행된 시점이며, 오늘의 체제는 이른바 개혁운동 세력을 포함하는 우파 전반을 포함한다. 앞서 언급한 메이저 시민운동 전체, 한겨레를 포함한 개혁언론 전체, 심지어 옛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계승하는 이런저런 형태의 단체나 조직들은 '체제 내의 비판자 역’을 수행하고 있다. 그것들이 좀 더 고전적인 체제와 다른 점은 10년 전, 20년 전엔 체제밖에 있었다는 점뿐이다.

진보 운동은 체제를 공격하고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체제의 변화는 당연히 계급 관계의 변화다. 말하자면 진보운동의 뼈대는 계급성이다. 우리가 운동 앞에 진보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가는 바로 계급성을 갖는가에 달려 있다. 이 말은 모든 운동이 계급운동(이라 일컬어지는 노동운동)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말로 오해되곤 한다. 물론 그런 오해는 괜한 게 아니다. 이른바 가장 전형적인 계급운동이라 여겨지는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남성활동가들이 오랫동안 제 운동의 권위를 사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그런 논리를 악용해왔다. 그러나 그런 행태를 계급운동의 당연한 면모인 양 전제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갖는 건 잘못이다. 그런 행태는 전제되어야 할 게 아니라, 오로지 제거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계급운동의 전형처럼 여겨져 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단지 노동운동이 계급성을 가진 최초의 운동으로 출발하여 가장 활발하게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맑스조차도 장애인이나 여성 문제 같은 소수자 문제에 대해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맑스가 노동운동을 중시해서 소수자운동을 소홀히 한 게 아니라 맑스의 의식이 미처 소수자 문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급운동이 노동운동에서 출발하여 소수자, 생태, 인권 같은 개념들을 보완해가면서 성장한다는 걸 되새겨야 한다. 근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갈등 역시 계급운동이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갖은 오해와 불신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더욱 견지해야 할 원칙은 역시 계급성이다. 계급성을 내세운 노동운동 패권주의가 아닌 진정한 계급성 말이다. 계급성을 잃을 때 제 아무리 성찰적인 소수자운동도 체제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체제 내의 운동은 운동의 후방이나 외곽이 아니라 체제의 도구다. 오늘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조선일보보다 오히려 한겨레가 더 해롭듯 말이다.

이 토론회는 진보적 장애인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과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성취나 미덕을 한번 쯤 기쁜 마음으로 되새겨 보는 게 그런 작업을 훼방하는 건 아닐 것이다. 90년대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절차적 민주화의 시작과 함께 운동의 주인을 '민중'에서 '시민'으로 바꾼 운동들은 한 시절 호황을 누려왔다. 그리고 이제 그 운동들은 보다시피, 매우 빠른 속도로 흡수되거나 소멸하는 중이다. 체제의 밖에서 체제의 구성요소로 전환한 운동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 시류 속에서 진보운동은 정체성을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나 진보적 장애인운동은 그런 시류를 거슬러 오르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왔다. 김도연 선생의 발제에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시기구분(1987~1993년을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태동과 전개’, 1994~2000년을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 2001~2005년을 ‘현장대중투쟁의 복원과 새로운 전망의 제시’)을 보더라도 진보적 장애인운동은 전체 진보운동의 흐름과는 정반대의 도정을 걸어왔다.

소수자 문제에서 출발하여 계급운동의 지평에 이르는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발전 과정은 자기성찰과 사회변혁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는 불가능했다. 진보적 장애인운동은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고 가장 정당한 지점에서 운동은 새 힘을 얻고 그 정체성을 확보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진보적 장애인운동이 현재 진보운동 가운데 가장 ‘논리정연한’ 운동은 아니지만 가장 ‘역동적인’ 운동인 건 분명하다. 진보적 장애인운동과 활동가들에게 경의를 드린다.
2006/03/01 20:49 2006/03/01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