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에 해당되는 글 21건
- 2005/11/30 30분
- 2005/11/28 왠지 쓸쓸해하는
- 2005/11/25 황우석 구하기?
- 2005/11/24 주민등록증
- 2005/11/23 전학
- 2005/11/22 아직은 망가지지 않은
- 2005/11/19 약속
- 2005/11/18 평화누리
- 2005/11/17 막 죽여?
- 2005/11/16 예수전 1기
- 2005/11/12 내 무거운 책가방
- 2005/11/10 인터뷰
- 2005/11/09 마법
- 2005/11/07 요다
- 2005/11/06 아픈 평택, 즐거운 평택
- 2005/11/05 맑은 아이들
- 2005/11/04 미소
- 2005/11/03 위대한 기술자
- 2005/11/03 감수
- 2005/11/02 책임감
2005/11/30 16:32
예수가 "먹고마시길 즐기는 자"라 불릴 만큼 세속적인 외양을 가지면서도 틈만 나면 혼자 산에 기도하러 갔던 것 기억하시지요? 혼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권합니다. 기도가 꼭 종교적이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야 2천년 전 유대인이니 당연히 종교적 기도를 했지만 우리에겐 기도도 될 수 있고 묵상이나 명상이 될 수 있지요. 꼭 눈을 감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눈을 감으면 눈에서 열이 나고 졸음이 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여튼 중요한 건 형식이나 방법이 아니라 매일 30분 정도 조용히 앉아 나를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한 구절씩 읽으며 삶을 예수의 삶에 반추해 보는 것도 좋겠지요. 30분이 길게 느껴지십니까? 물질적 욕망과 경쟁심이 스물네 시간 우리를 좀먹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30분은 정말 최소한입니다.
(예수전 1기 카페에 적은 글.)
(예수전 1기 카페에 적은 글.)
2005/11/28 23:54
며칠 전에 라디오에 나갔는데 오랫동안 저녁뉴스를 진행해서 낯이 익은 진행자는 두어 차례 마치 내 마음을 읽는 듯 질문했다. 그 중 하나. “좌파적 신념을 고수하시면서도 왠지 쓸쓸해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이쯤 되면 순순히 항복할 수밖에 없다. “예.. 저를 순정한 이상주의자라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실은 저는 그런 사람이 못 됩니다. 이를테면 저는 공정한 사회가 이루어진다 해서 무작정 인간이 행복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공정한 사회를 위해 활동하는 이유는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기 때문입니다.” 마치고 피디와 셋이서 낮술을 조금 했다.
2005/11/25 00:22
황우석 사건(사태?)에 대한 의견을 묻는 메일이 이어져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네티즌들의 황우석 구하기 바람이 거세다. 황우석 문제에 대해 생명윤리 차원에서 진지한 비판이 있어왔고 물론 나는 그 의견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정작 내가 정작 걱정스러운 건 월드컵과 독도 문제를 거치면서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껏 드높아진 국가주의의 그림자다. 국익이라는 말이 이 정도로 자발적인 함성을 이룬다면 그야말로 파시즘의 전조라 할만하다. 세상은 국가로 나뉘는가? 물론 세상은 국가로도 나뉜다. 미국, 일본, 한국..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계급으로 나뉜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건희와 나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얘기다. 국가의 이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이며 중간 이하 계급, 즉 대다수 정직하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은 국익이라 선전되는 지배세력의 이익을 위해 늘 동원된다. 황우석이 1등국가를 만든다 해도 여전히 3등국민일 사람들은 말이다. 황우석 구하기의 함성은 애처로운, 동원의 함성이다.
2005/11/24 17:05
얼마 전 내 유일한 신분증명인 운전면허증을 지갑과 함께 잃어버렸다. 다시 만들려고 했더니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단다. 내가 나임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나. 당장 신분증이 필요한 일이 밀려 있는지라 도리 없이 면사무소에 갔다. “재발급 신청서 써오세요.” “재발급이 아니라 처음 만드는 겁니다.” “예?” 이 면에선 처음 있는 일인 듯, 접수창구의 직원은 상사(면장으로 보이는)에게 달려가고 상사는 다시 누군가를 부르더니 저희끼리 한참 수군거린다. 꼼짝없이 지문을 바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상한 나는, 누구든 허튼 소리만 해봐라 하는 심사로 잠자코 서 있다. 보아 하니 다른 직원들은 조심조심 말하는데 면장으로 보이는 자는 나를 흘끔거리며 “아니, 주민등록증도 없이 산단 말야?” 어쩌고 계속 꿍얼거린다. 안 되겠다 싶어 그를 노려보며 큰소리로 “뭐 잘못된 거 있어요?” 했더니 이내 입을 다문다. 10분쯤 기다리다 임시주민등록증이라는 걸 받아들고 나오는데.. 거 참 황량하더라..
2005/11/23 08:39

신도시 개발한답시고 몇해는 어수선할 게 뻔한데 마침 계약 만기라 좀더 북쪽으로 이사했다. 세 살면 이런 건 참 편하다. 행정구역으로는 교하가 아니지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다’는 뜻에서라면 오히려 더 교하인 곳이다. 내 어릴 적 경험도 있고 해서 아이들 전학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히 둘 다 학교가 마음에 든단다. 김건은 전학 첫날부터 동무들을 끌고 왔다. 제 누나 말로는 여자 아이에게서 쪽지도 받았단다. 특이한 놈.
2005/11/22 10:42
어느 의대 예과 2학년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했다. 나를 부른 교수의 말마따나 “아직은 망가지지 않은 아이들”이다. 계급과 이념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했는데 간간히 웃음도 터트리며 다들 재미있어 한다. 게 중 몇몇은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잘 잡아주면 꽤 괜찮은 의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의사 고시 합격률이 95%이니 의대에 들어오면 이미 의사인 셈인데, 의대생에 대한 어떤 사회적 대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망가진’ 그들의 선생들과 선배들의 작업에 대응하는.
2005/11/19 01:40
술꾼 은홍 형이 밤 한시에 전화했다. 일 때문에 올라왔다가 친구네집에서 술먹고 있단다. 목소리가 술이 꽤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용은 없어도 니 목소리 좀더 들어도 되지?” 하며 한참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이제 니 목소리 너무 많이 들었다. 혜원이 바꿔줄게.”하면서 형수를 바꿔준다. “오빠 나 생일 선물 해줘야 하는데.” “응, 자전거.” “아니, 그냥 자전거말고 산악자전거.” “그럼, 산악자전거. 내가 ‘자전거’라고 하면 산악자전거지.” “진짜?” “그럼!” 작년에도 같은 대화를 했고 아마 재작년에도.. 올핸 몰라도 내년엔 꼭 약속을 지키기로.
2005/11/18 16:58

임진각 옆에 평화누리라는 게 생겼다. 이 공간과 관련한 경기문화재단이니 평화 심포지움이니 하는 것들의 속물 냄새가 꺼림칙하긴 하지만, 하여튼 앉아 있으면 바람이 솔솔 불고 시야가 트인 그런 공간이다. 사람이 많지 않은 게 특히 마음에 든다. 카페 ‘안녕’에 앉은 선태. 첫 장거리 라이딩을 거뜬히 해내는 중이다. 뒤로 보이는 게 '음악의 언덕'.
2005/11/17 15:10
김단 - 아빠, 이런 거 잘못된 행동이지?
김규항 - 뭐가?
김단 - 수민이 하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후문 슈퍼 앞에 꺾어지는 데 있잖아. 거기서 어떤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난 거야.
김규항 - 그래서?
김단 - 우리보고 교회 다니냐 그래. 그래서 둘 다 다니긴 다닌다고 했더니 잘했대. 불교는 나쁜 우상이라 교회에 다녀야 한 대. 그런데 수민이는 성당에 다니거든.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성당은 가짜래, 죽은 걸 믿어봐야 소용없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그러면서 막 교회에 나가라는 거야.
김규항 - 그걸 계속 듣고 있었어?
김단 - 할아버지잖아. 그래서 우리가 공손하게 어딜 가는 중이라 이젠 가야한다고 말했는데도 막 아무리 바빠도 생명만큼 소중한 게 있냐고 하면서 계속 들어보라고 하는 거야. 거의 20분은 넘게 붙들려 있었어.
김규항 - 단이 생각엔 그 할아버지가 뭘 잘못한 것 같아?
김단 - 다른 사람 가는데 자기 맘대로 막고 못 가게 한 것, 그리고 다른 사람 종교 나쁘게 말한 것.
김규항 - 아빠도 같아.
김단 -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러는 거야?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래?
김규항 - 안 그렇지. 만약에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똑같이 하면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을 걸? 다른 나라엔 그러기도 해.
김건 - 막 죽여?
김규항 - 그럼. 아주 많이 죽이지. 부시 알지?
김건 - 응.
김규항 - 그 사람이 사람 참 많이 죽이거든. 그런데 그게 하느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래. 교회에 얼마나 열심히 다니는데. 매일 기도하고 그래.
김건 - 이상해. 만약에 하느님하고 예수님하고 부처님하고 직접 만나면 반가워하고 좋아하실 것 같은데.
김규항 - 그럼. 하여튼 앞으로 그런 사람 만나면 그냥 가도 괜찮아. 그런 사람은 어른도 아니야.
김단, 김건 - 응.
김규항 - 에이, 재미없다.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김규항 - 뭐가?
김단 - 수민이 하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데 후문 슈퍼 앞에 꺾어지는 데 있잖아. 거기서 어떤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난 거야.
김규항 - 그래서?
김단 - 우리보고 교회 다니냐 그래. 그래서 둘 다 다니긴 다닌다고 했더니 잘했대. 불교는 나쁜 우상이라 교회에 다녀야 한 대. 그런데 수민이는 성당에 다니거든.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성당은 가짜래, 죽은 걸 믿어봐야 소용없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그러면서 막 교회에 나가라는 거야.
김규항 - 그걸 계속 듣고 있었어?
김단 - 할아버지잖아. 그래서 우리가 공손하게 어딜 가는 중이라 이젠 가야한다고 말했는데도 막 아무리 바빠도 생명만큼 소중한 게 있냐고 하면서 계속 들어보라고 하는 거야. 거의 20분은 넘게 붙들려 있었어.
김규항 - 단이 생각엔 그 할아버지가 뭘 잘못한 것 같아?
김단 - 다른 사람 가는데 자기 맘대로 막고 못 가게 한 것, 그리고 다른 사람 종교 나쁘게 말한 것.
김규항 - 아빠도 같아.
김단 -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러는 거야?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래?
김규항 - 안 그렇지. 만약에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똑같이 하면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을 걸? 다른 나라엔 그러기도 해.
김건 - 막 죽여?
김규항 - 그럼. 아주 많이 죽이지. 부시 알지?
김건 - 응.
김규항 - 그 사람이 사람 참 많이 죽이거든. 그런데 그게 하느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래. 교회에 얼마나 열심히 다니는데. 매일 기도하고 그래.
김건 - 이상해. 만약에 하느님하고 예수님하고 부처님하고 직접 만나면 반가워하고 좋아하실 것 같은데.
김규항 - 그럼. 하여튼 앞으로 그런 사람 만나면 그냥 가도 괜찮아. 그런 사람은 어른도 아니야.
김단, 김건 - 응.
김규항 - 에이, 재미없다.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2005/11/16 22:44

지난주로 첫번째 예수전 강의를 마치고 어젠 각자 써온 ‘나의 예수전’을 나누며 "먹고 마시길 즐기"기 위해 풀집 부근 음식점에 다시 모였다. 어떤 이는 시로, 어떤 이는 편지로, 어떤 이는 자의식 가득한 산문으로. 그 절절한 사연들을 나는 예수전 원고에 절절히 반영할 것이다. 예수전 1기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소통을 지속하기로 했다.
2005/11/12 14:41
내 몸집보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는 오늘도 학교에 간다.
성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아주 공갈 사회책
따지기만 하는 산수책
외우기만 하는 자연책
부를 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잘 부러지는 연필 토막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일기장, 숙제장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혼식 점심 밥통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얼마나 더 많이 책가방이 무거워져야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집어넣어야
나는 어른이 되나, 나는 어른이 되나?
1975년, 김대영이라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쓴 시.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것 같아서 타이핑했다. 그나저나 이 아이는 이젠 어른이 되었을까?
나는 오늘도 학교에 간다.
성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아주 공갈 사회책
따지기만 하는 산수책
외우기만 하는 자연책
부를 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잘 부러지는 연필 토막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일기장, 숙제장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혼식 점심 밥통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얼마나 더 많이 책가방이 무거워져야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집어넣어야
나는 어른이 되나, 나는 어른이 되나?
1975년, 김대영이라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쓴 시.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것 같아서 타이핑했다. 그나저나 이 아이는 이젠 어른이 되었을까?
2005/11/10 10:42
(지난달 초에 했던 인터뷰 두 개.)
‘B급 좌파’ 김규항. 그의 글이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온 것은 무엇보다 쉽고 간결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기교나 교묘한 풍자를 동원하지 않지만, 가장 간결한 동작만으로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다. 이런 저런 부연설명을 하지 않는 그의 특성상, 상대와의 갈등은 어찌보면 필연적이다. 여성주의 진영과의 ‘주류페미니즘 논쟁’도 그랬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부터 제도권 지면에서의 사회적 발언을 삼가며 소위 ‘잠행’에 들어갔다. 물론 ‘뜨고 지는’ 지식인들이야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민감한 사안을 에두르지 않던 ‘자객’ 김규항의 침묵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런데 최근 그가 ‘예수’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예수라고? 조금 의외다. 그렇다면 만나서 직접 들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산의 한 오피스텔에서 김규항을 만났다. 그는 나직한 저음의, 그러나 언뜻언뜻 결기가 비치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참고삼아 밝혀두지만, 이건 월간 『말』과 ‘B급좌파’의 첫 만남이다.
교회는 중3때, 예수는 한신대에서
-한동안 잠행아닌 잠행을 하시다가 ‘나의 예수전’이라는 주제의 강의을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으로서 바쁘셨겠지만, 예전에 비해 사회적 발언의 강도가 좀 약해진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근황부터 듣고 싶습니다.
“『고래가 그랬어』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지식인 활동’에 대해서 힘이 많이 빠진 측면이 있죠. 제가 어떤 이유에선지 사회적 발언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되곤 했는데 제도 시스템 안에서 진보주의자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생겼죠. 자기의 남은 사회의식을 머리로만 배설하는 사람들한테 제 글이 소비되는 것도 답답하고…. 그리고 월드컵이나 탄핵사태 경과할 때마다 아주 힘이 쭉쭉 빠졌죠. 존중할만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당시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서 특히 그랬죠.”
김규항은 잘 알려진 대로 좌파다. 그러나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즉 그가 ‘예수’와 무관한 건 아닌 셈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3때부터 교회를 나갔지만 집회나 부흥회를 하면 ‘눈이 말똥말똥 떠지는’, 한국기독교식 표현으로 ‘은혜를 입지 못하는’ 사람이었단다. 그런 그에게 한신대 입학은 새롭게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한신대학교는 시쳇말로 ‘빨갱이학교’였고, 다니던 교회의 분위기에만 익숙했던 김규항은 “혼란에 빠졌다.”
“한신대 학풍이나 예수에 대한 역동성, 당시 해직된 상태였긴 하지만 민중신학자들의 이론들, 이 모든 것에 저는 완전히 매료됐죠. 나는 기독교에 대해서 왜 뜨겁지 않은가 자책만 하던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그것이 내 세계관에 깊고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근거를 발견한 겁니다, 저로서는 교회는 중3때부터 다녔고, 예수는 한신대에서 처음 만난 거죠.”
굳이 연결짓자면 김규항은 청년시절 ‘예수’를 만났고, 그런 문제의식들이 좌파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 발효하면서 ‘나의 예수전’을 강의하고 책으로 내게 된 셈이다. 그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은폐된 거대권력, 교회
대형교회를 한번 건드리면 소규모언론의 경우,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견제가 들어온다. 심리적 압박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타격도. 권위주의 정부가 물러나면서 어느샌가 교회가 ‘언터쳐블’이 된 것이다. 김규항은 “그것은 교회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회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이 문제가 “강준만 이후 진행되어온 언론, 정치, 지역문제 등의 개혁과제 속에 포함돼지 않은 게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라 밝혔다. 그는 한국교회가 박정희 개발독재시기 사상유례 없는 팽창을 거듭했고, 교회가 그 속에서 “홍위병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하면 된다”는 개발독재논리가 “믿으면 받는다”는 보수교회논리와 등치되면서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됐다는 것. 한국교회의 ‘기본사항’인 반공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박정희 시대 교회가 팽창한 또 하나의 이유로, 교회라는 공간이 대중들 사회의식의 효과적 배출구가 됐다는 데서 찾는다.
“제가 고3때 박정희가 죽었으니까 박정희의 아주 ‘오롯한 자식’입니다. 어떤 분은 그 시절이 좋다고 하는데, 그 시절로 다시 돌려보내면 다들 자살할 거예요(웃음). 지금 우리의 이 상황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 잘 모르는 거죠. 민주주의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말입니다. 어쨌든 당시는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만 해도 의심받는 시대였지만, 당시에 인민들이 유일하게 마음껏 소리지르고 교제하고 떠들 수 있던 장소가 하나 있죠. 바로 교회입니다. 동네마다 다 있죠, 그때만 하더라도 여자들이 함부로 떠들지도 못하던 전근대적 분위기인데, 특히 여성들에겐 교회가 정말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배설하는 곳이죠. 거기가면 한복 곱게 차려입고 가서 안내도 하고, 찬송도 크게 부르고, 부흥회할 때는 몽환상태에서 발광을 해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교회는 파시즘 시절에 대중들의 사회의식이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효과적으로 배설하게 하는 강력한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은 이렇게 ‘권력과의 상보관계’ 속에서 성장을 거듭한 한국교회 자신이 이제 권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자가 1천만 명이 넘고, 불교에 비해 상류계급의 비중이 높은, 다시 말해 한국사회에 어느 곳에나 가지를 뻗은, ‘은폐된 권력’이 된 것이다.
-전에 보면 이라크 파병 때나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유명한 목사들이 신도들 이끌고 집회를 여는데요. 성조기와 태극기를 같이 흔들면서 수많은 신도들이 모였는데, 솔직히 저는 무서웠습니다(웃음)
“(웃음)그러나 사실은 보수교회에 속하는 수많은 신도들이 신앙과 사회적 양심 사이에서 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미국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고 하거든요. 상당히 고대적인 상상력인데요(웃음). 옛날에는 제정일치의 씨족 단위니까 그렇다하더라도, 근대 이후에는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죠. 무슨 민족단위로 멸하고 흥하고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는 기독교인이 70%가 넘으니까 하나님이 상을 주고 저기는 50% 미만이니까 벌을 내리고… 그런 하나님이라면 없애버려야죠. 근데 보수적인 교회라고 굳이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한국교회 논리가 그런 것이거든요. 구약성서에 보면 그런 식이예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아주 엄한 아버지같은 가부장적 하나님이죠.”
-그래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도 표현하잖습니까?(웃음)
“그렇죠. 엄청나게 권위적이면서 속으로는 아주아주 쫀쫀한(웃음). 자기한테 듣기 좋은 말하는 걸 좋아하고. 충성하지 않으면 벌을 내리고. 나쁜 짓을 해도 자기한테 충성하면 용서해주고. 그런 하나님은 예수가 2천 년 전에 벌써 없애버렸어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재해석을 했단 말입니다. 근데 2천 년 후에 한국교회는 수천 수만 년전의 유대 하나님을 끌고 오는 거죠. 이것이 우리나라 전체사람들의 의식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진보주의자들은 “이건희와 당신이 어떻게 같은 나라 사람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파들은 사회를 ‘국민’이니 ‘민족’으로 싸잡아 묶으려고 합니다. 독도 얘기 나오면 비정규 노동자건 뭐건 다 사라지는 거죠. 지금 천만이 넘는 기독교신자와 그 사람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세요. 우리사회의 사회진보를 가로막는, 정말 은폐되어있지만 가공할 정도로 힘을 가진 의식이 바로 기독교신앙 형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말씀 듣고 보니까 한국교회가 반공주의는 물론이고 배타적 민족주의, 가부장주의 등 한국사회의 보수가 가진 가치들을 총체적으로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수구의 총결산입니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에도 젊은 기자들은 조갑제씨 창피해하고, 정말 ‘쪽팔리지 않는 우파’가 되고 싶어 하는데. 지금의 한국교회는 그런 것조차 없습니다.”
“‘안티조선’같은 교회개혁운동 필요하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 언론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한시적 연대감 같은 게 형성됐습니다. 종교권력에 대항해서도 그런 식의 좌우합작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혹은 그런 식으로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는 형태의 운동이 필요한 것인지요?
“정말 필요합니다. ‘안티조선’은 우리가 여기서 더 치열하게 한다고 해서 조선일보가 갑자기 망한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에도 극우세력, 극우언론이 존재하죠.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는 지금 다들 냉소와 반감, 많이 형성된 것 같아요. 요즘 교회들이 하는 말 들어보면 이제 더 이상 전도가 잘안되다고 하거든요. 위기라고 그러거든요.”
-아니, 인구 4천만 중에 1천만 명한테 전도했으면 많이 한 거 아닌가요?
“우리나라 교회는 작은 건 가게고 큰 건 기업입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이 애써 공부하는 것들이 교회경영학입니다. 신자유주의 이후에는 모든 것이 사이즈나 규모로 가치가 결정되잖습니까. 교회가 크고 신자수가 많으면 그게 하나님 축복을 받은 것이지, 과거처럼 작더라도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는 교회? 그런 식의 얘기는 이제 없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기업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죠. 기업이란 게 뭡니까. 기업은 영구적으로 팽창하는 것이 아닙니까. ”
-예전 김선일 씨 사망 직전 그 어수선한 이라크에 선교하러 갔던 사람들도 있었죠
“그렇죠. 정부에서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가잖습니까. 죽으면 순교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면 그건 기업정신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거죠. 거꾸로 말씀드리면 ‘목숨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수구정신’이라는 겁니다.”
그가 예수전을 쓰는 이유
한국의 언론들은 ‘잊을만하면 한번씩’ 대형교회를 건드린다. 한바탕 소란이 일고 또 잠잠해진다. 대형교회의 문제점은 개선될 여지도 보이지 않은 채 말이다. 김규항의 ‘나의 예수전’은 소위 이런 식의 대형교회비판, 아니면 교회개혁운동의 일환인가? 김규항은 고개를 젓는다. 그는 “『뉴스앤조이』같은 곳에서 하는 교회개혁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연대할 터”이지만, 따지고 보면 교회개혁운동은 상식적으로 당연히 일어나지 말았어할 야만적인 일을 비판하는데 그칠 뿐이다. 기독교신자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영역에서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를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사회를 진보시킬 촉매가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는 교회내부에서 개혁운동하는 분들을 존경하고 지지합니다. 그런데 언론의 경우는, 때가 되면 한번씩 교회를 때려주는 것이, 저는 이따금씩 냉소적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이 사회의 엘리트그룹들끼리 견제구를 날리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보여요. 정말 진정한 안타까움을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의 파워를 서로간에 확인하는 견제, 이런 느낌을 많이 받죠.”
김규항은 먼저 예수의 생애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짚는다. 신구교를 막론한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이라 할 ‘사도신경’에 정작 예수의 생애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동정녀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히 죽으시고”로 끝이다. 예수가 당시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없다. 김규항은 한국교회의 천박성을 떠나서, 예수가 종교체제화 됐을 때부터 근본적인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사람이 만든 종교체제 속에 예수의 역동성과 메시지가 갇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은 애초부터 그런 잘못된 기반 위에 덧붙여진 셈이라는 말이다.
김규항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모습일까. 체제변혁가로서의 예수인가, 아니면 생태주의자이자 여성주의자로서의 예수? 인권운동가로서의 예수? 그는 “놀랍게도 예수는 그 모든 것”이다. 그는 예수를 “역사상 가장 신에 가까이 간 인간”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우리 세대야말로 인류에서 예수를 이해하는 첫 세대”라고 말했다. 예수의 정신이 그간 이해받기에는 너무나 현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수의 밀접한 제자들은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여성이 사람취급을 못받던 고대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그는 이미 여성주의를 실천했던 셈이다. 김규항의 말에 따르면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여성제자들을 데리고 다닌 사람은 없다. 데리고 ‘살았던’ 사람은 많았어도.”
-제가 너무 건조하게 이해하는 것일지 모르겠는데요. 예수가 그 시대에 근대 이후의 가치틀인 평등이나 여성주의 생태주의 등을 발견하는 것이, 혹시 예수가 당시에 이미 지동설을 알고 있었다는 것만큼이나 시대착오적 오류는 아닐까요. 68 혁명 당시 일부 저항적 지식인이 자신의 이념을 예수에게 투사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예수가 그런 사상을 설명했다는 게 아니라 행동을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예수의 특징은 여성을 무시해선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여성을 존중하죠. 아동인권도 그래요. 사람들이 아이들을 무시할 때 그는 아이들을 존중한 것이죠. 문제는 예수는 여성주의자다라고 거꾸로 규정하는 것이죠. 예수는 하층계급, 소외된 사람들과 똑같이 어울려서 놀았거든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거꾸로 대입시켜서 예수를 아주 일반적인 계급적인 사회운동가로 둔갑시키는 건 안되겠죠.”
“예수전에 수반되는 ‘책임’, 피하지 않을 것”
-부러 무례한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과거의 급진적 지식인이 나이가 들면서 크게 두종류의 변신을 한다고 합니다. 철저한 시장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도를 찾는 구도자가 되거나…
“제가 과거에 그 문제에 대해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는데(웃음). 김지하 선생이 바로 옆 건물에 계시는데. 가끔 식당에서 마주칩니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관계지만, 아주 괴롭습니다.”
-‘앵벌이 상이용사’라는 말을 하셨죠.
“예, 그런 말을 했는데, 제가 그때 잘못했지요.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예, 제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채신 것 같은데요.(웃음) 진보적 청년들이 봤을 때 김규항 선생이 예수를 찾는 것이 도사, 구도자의 모습으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웃음) 아니 박형이 잘 아시면서 자꾸 그러시는데, 이미 저는 ‘규정이 돼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도사’가 된다고 해도 제가 써놓은 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 변해가는 단계가 보이잖습니까. 급진적이고 유물론적인 사람이 점점 변하면서 표정도 변하고, 패러다임변화 이야기하다가 생명, 우주 이야기하고 구체적 야합으로 이어지는. 저는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 구체적 삶의 조건을 봐도 그렇구요. 아니 근데 제가 왜 이렇게 변명을 해야 하는지.(웃음)”
-사실 이번 인터뷰는 전반전입니다. 나머지는 예수전이 출간되면 꼭 해주십시오.(웃음) 무척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각오나 전망을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아무리 예수가 누구인가를 근본적으로 천착하더라도 수반되는 문제들이 있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겠죠. 제 스타일을 알건대 그에 대해 두루뭉실하게 표현 않을 겁니다. 그게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그때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슈바이처 박사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실은 그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개척자였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화로만 존재해온 예수를 역사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공로는 적지 않다. 그런 슈바이처는 이런 말을 했다. “예수전을 쓰는 것처럼 그 사람의 참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없다.”
좌파 김규항의 ‘나의 예수전’은 결국 자신이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는지를 드러내는 훌륭한 방식이 될 것이다. 그의 의미있는 작업을 응원한다.
(말지 박권일)
한동안 당신의 글을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의 신간 소식이 더 기뻤다
나는 그저 제도권 언론의 지면을 기반으로 한 활동만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어린이 교양만화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과 예수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책의 부제는 ‘B급 좌파 김규항이 진보의 거처를 묻다’ 라고 되어있다. 무슨 뜻인가, 진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음인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물음인가?
일상적으로 잘 쓰지는 않지만 거처라는 말이 나는 좋다. 두 가지 뜻이 다 들어가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낡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로 취급되어 장외로 밀려나있으니까.
칼럼집인데 뒤에는 일기를 묶어놓았다. 사적인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시인들의 시작노트처럼 칼럼의 의미를 부연하고자 함인가?
블로그에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것도 내 글쓰기의 새로운 한 형태이다. 작년 봄부터 시작한 블로그에 짧은 글을 쓰는 게 재미 있다. 지면에 쓴 글처럼 다 잘 정리된 건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을 분량에 관계없이 좀 더 함축적으로 하는 재미가 있다.
공적인 글이란 얘긴가?
그렇다. 블로그를 보면 일상적이고 사적인 내용도 많지만 내 경우엔 지면에 기고하는 칼럼도 마찬가지다. 내 글을 두고 일상을 소재로 해서 사회적인 글을 쓴다는 평이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다. 내 일상은 내 정치적 입장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나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게 거꾸로 내게 뒤집어 씌워지기도 한다. 일상의 얘기를 많이 하니까 말과 글이 조금이라도 차이를 보이면 금세 주위에서 알아차릴 게 아닌가? 딸아이도 12살이니까 곧 내 글을 읽을 거다. 결국 내 올무에 내가 걸린 셈이다.
스트레스도 많겠다.
없다. 내가 나를 알지만 글 스타일에 변화는 어려울 테고, 딱 그만두던지, 아니면 계속 일관되게 하던지. 오래할 생각도 없다. 며칠 전, 딸에게 이야기했다. 난 오십 되면 시골로 내려가서 놀 거라고.
그 때까지 열심히 일해야겠다.
사실 먹고 사는 것만 따지면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 <강아지 똥>,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 선생은 누구보다 많은 인세수입이 들어오지만 한 달에 쓰는 돈은 20만원이라던가, 그렇게 산다.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런 생활 태도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는 생각을 보편화 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 남보다 호사를누리는 게 자랑이 아니라 머리를 긁적이게 하는, 거의 모든 인간이 그 정도의 양식을 갖춘다면 그게 바로 천국이 아닐까. 사회체제의 진전을 통한 유토피아는 없다. 인간은 너무 복잡하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내가 그런 걸 꿈꾼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정말로 회의적이다. 내가 사회체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더 나은 세상은 억압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이지 이미 안락한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당연한 얘기가 불온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 자체가 답답하다.
그래서 ‘나는 불온하다’가 아니라 ‘나는 왜 불온한가?’ 인가?
‘내가 불온한 건 당신들 때문이다’ 라는 뜻이다. 나는 그냥 지극히 평범한데 세상이 상대적으로 나를 특별하게, 불온하게 만든다. 내 생각엔 특별한 게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나는 성격적으로 튀는 걸 싫어한다. 사람들은 내가 부러 이슈를 찾는다고도 하지만, 사실 나는 그런 걸 극도로 피하는 쪽이다.
세상을 움직이기 위한 글을 쓰는 사람의 얘기답지 않다.
내가 계속 말하는 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인데 다들 하지 않는 얘기, 하기 불편해하는 이야기 들일 뿐이다.
당신의 글을 보다 칠레 소설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생각났다. 등장인물의 선과 악은 모두 계급에 따라 결정된다. 원주민 과 노동자들은 현자이거나 맑고 천진하며, 유럽 이주민과 관리인 층은 모두 인격파탄자였다. 당신의 글에도 그런 면이 있다.
자유주의자 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격은 실은 매우 사회적인 이다. 낮은 계급 사람들의 인격적 결함은 더 쉽게 드러난다. 품위를 유지하기 어려운 거다. 그런데 경제적 정신적 안락을 확보한 사람들은 얼마든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드러내지 않고살 수 있다. 둘의 인격을 한 가지 잣대로 볼 수 있는가? 나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회적 글쓰기엔 그런 고려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내가 언제나 추한 이들의 껍질을 뚫고 선한 본성을 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추한 건 추한 거다.
당신의 글은 유난히 논쟁을 많이 일으켰다.
나는 간결하고 명료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문장론이라기보다는 그게 좋고 편하다. 그러나 설명적이지 않아서 오독의 가능성이 높고 부당하게 공격 당한 적도 많다. 하지만 그런 공격에 대응한 적은 없다. 사실 나는 논쟁을 싫어하고 잘 하지도 않는다. 그저 요란하니까, 사람들은 논쟁이라 이른다.
반박하지 않는 이유는?
내 글을 성실하게 읽지 않고 하는 이야기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다.
그 동안 생산적인 논쟁은 없었다는 말인가?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 생산적인 논쟁이라는 게 존재 하는지 의문이다. 다들 논쟁의 내용보다는 모두들 논쟁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 사회적인 주제로 논쟁을 하면, 당연히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들은 그저 제 삶을 살아갈 뿐인데 지식인이랍시고 배운 놈들끼리 ‘그 사람들 편을 드니, 안 드니’ 하며 싸우는 것은 차라리 코믹한 일이다. 그럴 시간이면 거기 해당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을 한편 더 쓰는 것이 낫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가?
좋다.
당신 학생시절보다 훨씬 보수적인데?
개인주의적이다. 그러나 사회문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 것은 진보진영의 책임이 크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이 대중과의 접점을 가진 진보진영의 거의 유일한 사람이겠나. 답답하다.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대”라고도 한다. 9월호의 20대 백명의 포트레이트에서 한 친구는 자신의 세대를 “우리는 뭘 해도 재미없으니까 무엇이든 합니다.”라고 정의 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존중할만한 가치, 자신의 인생을 일관할 만한 가치를 설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해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기성세대 탓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고 자본이 가치관을 점령한 상태에서 돈과 사회적 지위가 인간의 등급을 결정하고 품위를 구성하는 사회에서. 그들이 무슨 비전을 갖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시스템을 거스르면서 개인과 세계를 조응시키며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고래가 그랬어> 를 발행하는 것도 그런 의도인가?
그렇다. 모든 게 이런 세상을 마련한 우리의 잘못이다.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만드는 거다. 어떤 사람은 <고래가 그랬어>가 아이들을 의식화 시킨다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아이들은 24시간 자본으로부터 의식화되고 있지 않나.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고래~>가 필요하다. 힘들지만 어른들 상대로 칼럼집 10권 쓰는 것보다 보람 있는 일이다.
그렇게 변화된 당신의 입지에서, 당신의 직함을 다시 정한다면 어떤게 어울리겠는가?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비주류매체에는 여러 가지 재미난 직함이 많이 등장했는데 그 중 ‘근대 이후 유일한 비우등생 출신 유명 지식인’은 명예롭게 까지 느껴졌다. ‘그래, 나밖에 없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웃음)
당신의 사상은 엄격하지만 취향은 리버럴하다. 예술을 즐기는 데에선 계급의식을 따지지 않나?
난 예술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다. 예술가는 어떤 것도 구애 받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예술가의 사회 의식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예술가의 창작과 작품 자체에는 절대로 간섭해선 안 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례를 보라. 예술은 합리성, 의식, 이념 보다 훨씬 위의 개념이다. 신들의 것이다.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예술가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나도 그런 쪽으로 갈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도 한다. 논리 이상의 부분까지 자아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예술 밖에 없다. 예술가만의 특권이다.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도 있지 않나?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연애시의 대가이면서도 어떤 진보주의자보다 앞서가는 전망과 사회의식을 보여주었다. 사회운동가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시인은 꿈을 기반으로 하니까. 우리 나라 시인들 중엔 진보주의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다. 왜 시인이 활동가보다 더 현실주의적일까. 시인이야 말로 가장 급진적인 활동가보다 더 급진적인 사람들 아닌가. 시인이 그려낸 전망을 운동가들이 실행하는 것이 아닌가.
장석남 시인은 ‘내 시를 보고 / 너무 이른 나이에 둥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들어서”라고 썼다. 그건 당신이 글을 쓰며 가장 경계하는 부분 아닌가?
아니, 나는 그런 걸 경계하지 않는다. 둥글어지면 쓰지 않으면 된다. 지금까지 누린 명예에 감사하며 그만 쓰면 될 것을 왜 굳이 똥칠을 해가며 써야 하나. 그 시인의 펜 끝은 아직 날카로운 모양이다. 실제로 둥글어진 사람들은 절대 그런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은 정말 나아질까?
계속 나아지고 있다.
정말인가?
노예제로 돌아가고 싶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특기할 만한 인류사의 변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세를 생각해보라. 그런 암흑 속에서 몇 백 년 동안 그 암흑 너머를 꿈꾸며 싸우고 모색하는 사람들 덕에 역사는 결국 바뀌었다. 역사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공식적으로 신분제는 없지 않는가. 실제로는 존재한다 해도.
당신은 “역사는 죽 쒀서 개주는 식”이라고 썼었다.
그런 식으로 발전한다는 얘기다. 소수의 헌신을 통해 열린 과실은 모든 사람들이 다 누린다. 그러나 혜택을 누린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박정희 시절이 좋았다는 호사스러운 말까지 한다. 그 시절이 좋다면 대통령 욕도 30년 전처럼 숨어서 욕할 것이지 왜 백주대낮에 큰소리를 치는가? 역사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사람과 누리는 사람들이 다른, 죽 쒀서 개주는 방식으로 전진하는 경향이 있다. 원래 그런 것이니 헌신하는 소수여 너무 억울해 하지 말라는, 일종의 위로로 한 말이다.
와의 인터뷰는 불편하지 않나?
편안하다. “왜나 <보그>같은데 글을 쓰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사실 나는 <한겨레>에 글을 쓰는 것 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 적어도 진보언론이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상업지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나. 재미도 있고.
인터뷰집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인터뷰는 어떤 거라 생각하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나는 인터뷰이의 생각과 행동이 세상에 더욱 알려져야 하는, 그래서 그 정신이 널리 전파되었으면 하는 사람들만 인터뷰 한다. 그런 사람을 알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안 만나고 불편한 자리에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축복이라 생각한다.
(GQ 정규영)
‘B급 좌파’ 김규항. 그의 글이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온 것은 무엇보다 쉽고 간결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기교나 교묘한 풍자를 동원하지 않지만, 가장 간결한 동작만으로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다. 이런 저런 부연설명을 하지 않는 그의 특성상, 상대와의 갈등은 어찌보면 필연적이다. 여성주의 진영과의 ‘주류페미니즘 논쟁’도 그랬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부터 제도권 지면에서의 사회적 발언을 삼가며 소위 ‘잠행’에 들어갔다. 물론 ‘뜨고 지는’ 지식인들이야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민감한 사안을 에두르지 않던 ‘자객’ 김규항의 침묵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런데 최근 그가 ‘예수’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예수라고? 조금 의외다. 그렇다면 만나서 직접 들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산의 한 오피스텔에서 김규항을 만났다. 그는 나직한 저음의, 그러나 언뜻언뜻 결기가 비치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참고삼아 밝혀두지만, 이건 월간 『말』과 ‘B급좌파’의 첫 만남이다.
교회는 중3때, 예수는 한신대에서
-한동안 잠행아닌 잠행을 하시다가 ‘나의 예수전’이라는 주제의 강의을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으로서 바쁘셨겠지만, 예전에 비해 사회적 발언의 강도가 좀 약해진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근황부터 듣고 싶습니다.
“『고래가 그랬어』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지식인 활동’에 대해서 힘이 많이 빠진 측면이 있죠. 제가 어떤 이유에선지 사회적 발언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되곤 했는데 제도 시스템 안에서 진보주의자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 생겼죠. 자기의 남은 사회의식을 머리로만 배설하는 사람들한테 제 글이 소비되는 것도 답답하고…. 그리고 월드컵이나 탄핵사태 경과할 때마다 아주 힘이 쭉쭉 빠졌죠. 존중할만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당시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서 특히 그랬죠.”
김규항은 잘 알려진 대로 좌파다. 그러나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즉 그가 ‘예수’와 무관한 건 아닌 셈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3때부터 교회를 나갔지만 집회나 부흥회를 하면 ‘눈이 말똥말똥 떠지는’, 한국기독교식 표현으로 ‘은혜를 입지 못하는’ 사람이었단다. 그런 그에게 한신대 입학은 새롭게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한신대학교는 시쳇말로 ‘빨갱이학교’였고, 다니던 교회의 분위기에만 익숙했던 김규항은 “혼란에 빠졌다.”
“한신대 학풍이나 예수에 대한 역동성, 당시 해직된 상태였긴 하지만 민중신학자들의 이론들, 이 모든 것에 저는 완전히 매료됐죠. 나는 기독교에 대해서 왜 뜨겁지 않은가 자책만 하던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그것이 내 세계관에 깊고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근거를 발견한 겁니다, 저로서는 교회는 중3때부터 다녔고, 예수는 한신대에서 처음 만난 거죠.”
굳이 연결짓자면 김규항은 청년시절 ‘예수’를 만났고, 그런 문제의식들이 좌파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 발효하면서 ‘나의 예수전’을 강의하고 책으로 내게 된 셈이다. 그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은폐된 거대권력, 교회
대형교회를 한번 건드리면 소규모언론의 경우,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견제가 들어온다. 심리적 압박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타격도. 권위주의 정부가 물러나면서 어느샌가 교회가 ‘언터쳐블’이 된 것이다. 김규항은 “그것은 교회문제가 아니라 이미 사회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이 문제가 “강준만 이후 진행되어온 언론, 정치, 지역문제 등의 개혁과제 속에 포함돼지 않은 게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라 밝혔다. 그는 한국교회가 박정희 개발독재시기 사상유례 없는 팽창을 거듭했고, 교회가 그 속에서 “홍위병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하면 된다”는 개발독재논리가 “믿으면 받는다”는 보수교회논리와 등치되면서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됐다는 것. 한국교회의 ‘기본사항’인 반공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박정희 시대 교회가 팽창한 또 하나의 이유로, 교회라는 공간이 대중들 사회의식의 효과적 배출구가 됐다는 데서 찾는다.
“제가 고3때 박정희가 죽었으니까 박정희의 아주 ‘오롯한 자식’입니다. 어떤 분은 그 시절이 좋다고 하는데, 그 시절로 다시 돌려보내면 다들 자살할 거예요(웃음). 지금 우리의 이 상황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 잘 모르는 거죠. 민주주의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말입니다. 어쨌든 당시는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만 해도 의심받는 시대였지만, 당시에 인민들이 유일하게 마음껏 소리지르고 교제하고 떠들 수 있던 장소가 하나 있죠. 바로 교회입니다. 동네마다 다 있죠, 그때만 하더라도 여자들이 함부로 떠들지도 못하던 전근대적 분위기인데, 특히 여성들에겐 교회가 정말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배설하는 곳이죠. 거기가면 한복 곱게 차려입고 가서 안내도 하고, 찬송도 크게 부르고, 부흥회할 때는 몽환상태에서 발광을 해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교회는 파시즘 시절에 대중들의 사회의식이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효과적으로 배설하게 하는 강력한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은 이렇게 ‘권력과의 상보관계’ 속에서 성장을 거듭한 한국교회 자신이 이제 권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자가 1천만 명이 넘고, 불교에 비해 상류계급의 비중이 높은, 다시 말해 한국사회에 어느 곳에나 가지를 뻗은, ‘은폐된 권력’이 된 것이다.
-전에 보면 이라크 파병 때나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유명한 목사들이 신도들 이끌고 집회를 여는데요. 성조기와 태극기를 같이 흔들면서 수많은 신도들이 모였는데, 솔직히 저는 무서웠습니다(웃음)
“(웃음)그러나 사실은 보수교회에 속하는 수많은 신도들이 신앙과 사회적 양심 사이에서 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미국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고 하거든요. 상당히 고대적인 상상력인데요(웃음). 옛날에는 제정일치의 씨족 단위니까 그렇다하더라도, 근대 이후에는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죠. 무슨 민족단위로 멸하고 흥하고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는 기독교인이 70%가 넘으니까 하나님이 상을 주고 저기는 50% 미만이니까 벌을 내리고… 그런 하나님이라면 없애버려야죠. 근데 보수적인 교회라고 굳이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한국교회 논리가 그런 것이거든요. 구약성서에 보면 그런 식이예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아주 엄한 아버지같은 가부장적 하나님이죠.”
-그래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도 표현하잖습니까?(웃음)
“그렇죠. 엄청나게 권위적이면서 속으로는 아주아주 쫀쫀한(웃음). 자기한테 듣기 좋은 말하는 걸 좋아하고. 충성하지 않으면 벌을 내리고. 나쁜 짓을 해도 자기한테 충성하면 용서해주고. 그런 하나님은 예수가 2천 년 전에 벌써 없애버렸어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재해석을 했단 말입니다. 근데 2천 년 후에 한국교회는 수천 수만 년전의 유대 하나님을 끌고 오는 거죠. 이것이 우리나라 전체사람들의 의식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진보주의자들은 “이건희와 당신이 어떻게 같은 나라 사람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파들은 사회를 ‘국민’이니 ‘민족’으로 싸잡아 묶으려고 합니다. 독도 얘기 나오면 비정규 노동자건 뭐건 다 사라지는 거죠. 지금 천만이 넘는 기독교신자와 그 사람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세요. 우리사회의 사회진보를 가로막는, 정말 은폐되어있지만 가공할 정도로 힘을 가진 의식이 바로 기독교신앙 형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말씀 듣고 보니까 한국교회가 반공주의는 물론이고 배타적 민족주의, 가부장주의 등 한국사회의 보수가 가진 가치들을 총체적으로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수구의 총결산입니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에도 젊은 기자들은 조갑제씨 창피해하고, 정말 ‘쪽팔리지 않는 우파’가 되고 싶어 하는데. 지금의 한국교회는 그런 것조차 없습니다.”
“‘안티조선’같은 교회개혁운동 필요하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 언론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한시적 연대감 같은 게 형성됐습니다. 종교권력에 대항해서도 그런 식의 좌우합작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혹은 그런 식으로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는 형태의 운동이 필요한 것인지요?
“정말 필요합니다. ‘안티조선’은 우리가 여기서 더 치열하게 한다고 해서 조선일보가 갑자기 망한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에도 극우세력, 극우언론이 존재하죠.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는 지금 다들 냉소와 반감, 많이 형성된 것 같아요. 요즘 교회들이 하는 말 들어보면 이제 더 이상 전도가 잘안되다고 하거든요. 위기라고 그러거든요.”
-아니, 인구 4천만 중에 1천만 명한테 전도했으면 많이 한 거 아닌가요?
“우리나라 교회는 작은 건 가게고 큰 건 기업입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이 애써 공부하는 것들이 교회경영학입니다. 신자유주의 이후에는 모든 것이 사이즈나 규모로 가치가 결정되잖습니까. 교회가 크고 신자수가 많으면 그게 하나님 축복을 받은 것이지, 과거처럼 작더라도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는 교회? 그런 식의 얘기는 이제 없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기업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죠. 기업이란 게 뭡니까. 기업은 영구적으로 팽창하는 것이 아닙니까. ”
-예전 김선일 씨 사망 직전 그 어수선한 이라크에 선교하러 갔던 사람들도 있었죠
“그렇죠. 정부에서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가잖습니까. 죽으면 순교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하면 그건 기업정신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거죠. 거꾸로 말씀드리면 ‘목숨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수구정신’이라는 겁니다.”
그가 예수전을 쓰는 이유
한국의 언론들은 ‘잊을만하면 한번씩’ 대형교회를 건드린다. 한바탕 소란이 일고 또 잠잠해진다. 대형교회의 문제점은 개선될 여지도 보이지 않은 채 말이다. 김규항의 ‘나의 예수전’은 소위 이런 식의 대형교회비판, 아니면 교회개혁운동의 일환인가? 김규항은 고개를 젓는다. 그는 “『뉴스앤조이』같은 곳에서 하는 교회개혁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연대할 터”이지만, 따지고 보면 교회개혁운동은 상식적으로 당연히 일어나지 말았어할 야만적인 일을 비판하는데 그칠 뿐이다. 기독교신자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영역에서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를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사회를 진보시킬 촉매가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는 교회내부에서 개혁운동하는 분들을 존경하고 지지합니다. 그런데 언론의 경우는, 때가 되면 한번씩 교회를 때려주는 것이, 저는 이따금씩 냉소적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이 사회의 엘리트그룹들끼리 견제구를 날리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보여요. 정말 진정한 안타까움을 갖는 게 아니라, 자신의 파워를 서로간에 확인하는 견제, 이런 느낌을 많이 받죠.”
김규항은 먼저 예수의 생애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짚는다. 신구교를 막론한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이라 할 ‘사도신경’에 정작 예수의 생애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동정녀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히 죽으시고”로 끝이다. 예수가 당시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없다. 김규항은 한국교회의 천박성을 떠나서, 예수가 종교체제화 됐을 때부터 근본적인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사람이 만든 종교체제 속에 예수의 역동성과 메시지가 갇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은 애초부터 그런 잘못된 기반 위에 덧붙여진 셈이라는 말이다.
김규항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모습일까. 체제변혁가로서의 예수인가, 아니면 생태주의자이자 여성주의자로서의 예수? 인권운동가로서의 예수? 그는 “놀랍게도 예수는 그 모든 것”이다. 그는 예수를 “역사상 가장 신에 가까이 간 인간”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우리 세대야말로 인류에서 예수를 이해하는 첫 세대”라고 말했다. 예수의 정신이 그간 이해받기에는 너무나 현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수의 밀접한 제자들은 상당수가 여성이었다. 여성이 사람취급을 못받던 고대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그는 이미 여성주의를 실천했던 셈이다. 김규항의 말에 따르면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여성제자들을 데리고 다닌 사람은 없다. 데리고 ‘살았던’ 사람은 많았어도.”
-제가 너무 건조하게 이해하는 것일지 모르겠는데요. 예수가 그 시대에 근대 이후의 가치틀인 평등이나 여성주의 생태주의 등을 발견하는 것이, 혹시 예수가 당시에 이미 지동설을 알고 있었다는 것만큼이나 시대착오적 오류는 아닐까요. 68 혁명 당시 일부 저항적 지식인이 자신의 이념을 예수에게 투사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예수가 그런 사상을 설명했다는 게 아니라 행동을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예수의 특징은 여성을 무시해선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여성을 존중하죠. 아동인권도 그래요. 사람들이 아이들을 무시할 때 그는 아이들을 존중한 것이죠. 문제는 예수는 여성주의자다라고 거꾸로 규정하는 것이죠. 예수는 하층계급, 소외된 사람들과 똑같이 어울려서 놀았거든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거꾸로 대입시켜서 예수를 아주 일반적인 계급적인 사회운동가로 둔갑시키는 건 안되겠죠.”
“예수전에 수반되는 ‘책임’, 피하지 않을 것”
-부러 무례한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과거의 급진적 지식인이 나이가 들면서 크게 두종류의 변신을 한다고 합니다. 철저한 시장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도를 찾는 구도자가 되거나…
“제가 과거에 그 문제에 대해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는데(웃음). 김지하 선생이 바로 옆 건물에 계시는데. 가끔 식당에서 마주칩니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관계지만, 아주 괴롭습니다.”
-‘앵벌이 상이용사’라는 말을 하셨죠.
“예, 그런 말을 했는데, 제가 그때 잘못했지요.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예, 제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채신 것 같은데요.(웃음) 진보적 청년들이 봤을 때 김규항 선생이 예수를 찾는 것이 도사, 구도자의 모습으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웃음) 아니 박형이 잘 아시면서 자꾸 그러시는데, 이미 저는 ‘규정이 돼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도사’가 된다고 해도 제가 써놓은 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 변해가는 단계가 보이잖습니까. 급진적이고 유물론적인 사람이 점점 변하면서 표정도 변하고, 패러다임변화 이야기하다가 생명, 우주 이야기하고 구체적 야합으로 이어지는. 저는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 구체적 삶의 조건을 봐도 그렇구요. 아니 근데 제가 왜 이렇게 변명을 해야 하는지.(웃음)”
-사실 이번 인터뷰는 전반전입니다. 나머지는 예수전이 출간되면 꼭 해주십시오.(웃음) 무척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각오나 전망을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아무리 예수가 누구인가를 근본적으로 천착하더라도 수반되는 문제들이 있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겠죠. 제 스타일을 알건대 그에 대해 두루뭉실하게 표현 않을 겁니다. 그게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그때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슈바이처 박사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실은 그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개척자였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화로만 존재해온 예수를 역사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공로는 적지 않다. 그런 슈바이처는 이런 말을 했다. “예수전을 쓰는 것처럼 그 사람의 참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없다.”
좌파 김규항의 ‘나의 예수전’은 결국 자신이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는지를 드러내는 훌륭한 방식이 될 것이다. 그의 의미있는 작업을 응원한다.
(말지 박권일)
한동안 당신의 글을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의 신간 소식이 더 기뻤다
나는 그저 제도권 언론의 지면을 기반으로 한 활동만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어린이 교양만화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과 예수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책의 부제는 ‘B급 좌파 김규항이 진보의 거처를 묻다’ 라고 되어있다. 무슨 뜻인가, 진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음인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물음인가?
일상적으로 잘 쓰지는 않지만 거처라는 말이 나는 좋다. 두 가지 뜻이 다 들어가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낡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로 취급되어 장외로 밀려나있으니까.
칼럼집인데 뒤에는 일기를 묶어놓았다. 사적인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시인들의 시작노트처럼 칼럼의 의미를 부연하고자 함인가?
블로그에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것도 내 글쓰기의 새로운 한 형태이다. 작년 봄부터 시작한 블로그에 짧은 글을 쓰는 게 재미 있다. 지면에 쓴 글처럼 다 잘 정리된 건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을 분량에 관계없이 좀 더 함축적으로 하는 재미가 있다.
공적인 글이란 얘긴가?
그렇다. 블로그를 보면 일상적이고 사적인 내용도 많지만 내 경우엔 지면에 기고하는 칼럼도 마찬가지다. 내 글을 두고 일상을 소재로 해서 사회적인 글을 쓴다는 평이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다. 내 일상은 내 정치적 입장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나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게 거꾸로 내게 뒤집어 씌워지기도 한다. 일상의 얘기를 많이 하니까 말과 글이 조금이라도 차이를 보이면 금세 주위에서 알아차릴 게 아닌가? 딸아이도 12살이니까 곧 내 글을 읽을 거다. 결국 내 올무에 내가 걸린 셈이다.
스트레스도 많겠다.
없다. 내가 나를 알지만 글 스타일에 변화는 어려울 테고, 딱 그만두던지, 아니면 계속 일관되게 하던지. 오래할 생각도 없다. 며칠 전, 딸에게 이야기했다. 난 오십 되면 시골로 내려가서 놀 거라고.
그 때까지 열심히 일해야겠다.
사실 먹고 사는 것만 따지면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 <강아지 똥>,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 선생은 누구보다 많은 인세수입이 들어오지만 한 달에 쓰는 돈은 20만원이라던가, 그렇게 산다.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런 생활 태도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는 생각을 보편화 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 남보다 호사를누리는 게 자랑이 아니라 머리를 긁적이게 하는, 거의 모든 인간이 그 정도의 양식을 갖춘다면 그게 바로 천국이 아닐까. 사회체제의 진전을 통한 유토피아는 없다. 인간은 너무 복잡하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내가 그런 걸 꿈꾼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정말로 회의적이다. 내가 사회체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더 나은 세상은 억압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이지 이미 안락한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당연한 얘기가 불온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 자체가 답답하다.
그래서 ‘나는 불온하다’가 아니라 ‘나는 왜 불온한가?’ 인가?
‘내가 불온한 건 당신들 때문이다’ 라는 뜻이다. 나는 그냥 지극히 평범한데 세상이 상대적으로 나를 특별하게, 불온하게 만든다. 내 생각엔 특별한 게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나는 성격적으로 튀는 걸 싫어한다. 사람들은 내가 부러 이슈를 찾는다고도 하지만, 사실 나는 그런 걸 극도로 피하는 쪽이다.
세상을 움직이기 위한 글을 쓰는 사람의 얘기답지 않다.
내가 계속 말하는 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인데 다들 하지 않는 얘기, 하기 불편해하는 이야기 들일 뿐이다.
당신의 글을 보다 칠레 소설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생각났다. 등장인물의 선과 악은 모두 계급에 따라 결정된다. 원주민 과 노동자들은 현자이거나 맑고 천진하며, 유럽 이주민과 관리인 층은 모두 인격파탄자였다. 당신의 글에도 그런 면이 있다.
자유주의자 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격은 실은 매우 사회적인 이다. 낮은 계급 사람들의 인격적 결함은 더 쉽게 드러난다. 품위를 유지하기 어려운 거다. 그런데 경제적 정신적 안락을 확보한 사람들은 얼마든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드러내지 않고살 수 있다. 둘의 인격을 한 가지 잣대로 볼 수 있는가? 나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회적 글쓰기엔 그런 고려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내가 언제나 추한 이들의 껍질을 뚫고 선한 본성을 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추한 건 추한 거다.
당신의 글은 유난히 논쟁을 많이 일으켰다.
나는 간결하고 명료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문장론이라기보다는 그게 좋고 편하다. 그러나 설명적이지 않아서 오독의 가능성이 높고 부당하게 공격 당한 적도 많다. 하지만 그런 공격에 대응한 적은 없다. 사실 나는 논쟁을 싫어하고 잘 하지도 않는다. 그저 요란하니까, 사람들은 논쟁이라 이른다.
반박하지 않는 이유는?
내 글을 성실하게 읽지 않고 하는 이야기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다.
그 동안 생산적인 논쟁은 없었다는 말인가?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 생산적인 논쟁이라는 게 존재 하는지 의문이다. 다들 논쟁의 내용보다는 모두들 논쟁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 사회적인 주제로 논쟁을 하면, 당연히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들은 그저 제 삶을 살아갈 뿐인데 지식인이랍시고 배운 놈들끼리 ‘그 사람들 편을 드니, 안 드니’ 하며 싸우는 것은 차라리 코믹한 일이다. 그럴 시간이면 거기 해당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을 한편 더 쓰는 것이 낫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가?
좋다.
당신 학생시절보다 훨씬 보수적인데?
개인주의적이다. 그러나 사회문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 것은 진보진영의 책임이 크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이 대중과의 접점을 가진 진보진영의 거의 유일한 사람이겠나. 답답하다.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대”라고도 한다. 9월호
지금 젊은 세대는 존중할만한 가치, 자신의 인생을 일관할 만한 가치를 설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해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기성세대 탓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고 자본이 가치관을 점령한 상태에서 돈과 사회적 지위가 인간의 등급을 결정하고 품위를 구성하는 사회에서. 그들이 무슨 비전을 갖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시스템을 거스르면서 개인과 세계를 조응시키며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고래가 그랬어> 를 발행하는 것도 그런 의도인가?
그렇다. 모든 게 이런 세상을 마련한 우리의 잘못이다.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만드는 거다. 어떤 사람은 <고래가 그랬어>가 아이들을 의식화 시킨다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아이들은 24시간 자본으로부터 의식화되고 있지 않나.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고래~>가 필요하다. 힘들지만 어른들 상대로 칼럼집 10권 쓰는 것보다 보람 있는 일이다.
그렇게 변화된 당신의 입지에서, 당신의 직함을 다시 정한다면 어떤게 어울리겠는가?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비주류매체에는 여러 가지 재미난 직함이 많이 등장했는데 그 중 ‘근대 이후 유일한 비우등생 출신 유명 지식인’은 명예롭게 까지 느껴졌다. ‘그래, 나밖에 없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웃음)
당신의 사상은 엄격하지만 취향은 리버럴하다. 예술을 즐기는 데에선 계급의식을 따지지 않나?
난 예술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다. 예술가는 어떤 것도 구애 받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예술가의 사회 의식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예술가의 창작과 작품 자체에는 절대로 간섭해선 안 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례를 보라. 예술은 합리성, 의식, 이념 보다 훨씬 위의 개념이다. 신들의 것이다.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예술가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나도 그런 쪽으로 갈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도 한다. 논리 이상의 부분까지 자아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예술 밖에 없다. 예술가만의 특권이다.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도 있지 않나?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연애시의 대가이면서도 어떤 진보주의자보다 앞서가는 전망과 사회의식을 보여주었다. 사회운동가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시인은 꿈을 기반으로 하니까. 우리 나라 시인들 중엔 진보주의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다. 왜 시인이 활동가보다 더 현실주의적일까. 시인이야 말로 가장 급진적인 활동가보다 더 급진적인 사람들 아닌가. 시인이 그려낸 전망을 운동가들이 실행하는 것이 아닌가.
장석남 시인은 ‘내 시를 보고 / 너무 이른 나이에 둥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들어서”라고 썼다. 그건 당신이 글을 쓰며 가장 경계하는 부분 아닌가?
아니, 나는 그런 걸 경계하지 않는다. 둥글어지면 쓰지 않으면 된다. 지금까지 누린 명예에 감사하며 그만 쓰면 될 것을 왜 굳이 똥칠을 해가며 써야 하나. 그 시인의 펜 끝은 아직 날카로운 모양이다. 실제로 둥글어진 사람들은 절대 그런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은 정말 나아질까?
계속 나아지고 있다.
정말인가?
노예제로 돌아가고 싶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특기할 만한 인류사의 변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세를 생각해보라. 그런 암흑 속에서 몇 백 년 동안 그 암흑 너머를 꿈꾸며 싸우고 모색하는 사람들 덕에 역사는 결국 바뀌었다. 역사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공식적으로 신분제는 없지 않는가. 실제로는 존재한다 해도.
당신은 “역사는 죽 쒀서 개주는 식”이라고 썼었다.
그런 식으로 발전한다는 얘기다. 소수의 헌신을 통해 열린 과실은 모든 사람들이 다 누린다. 그러나 혜택을 누린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박정희 시절이 좋았다는 호사스러운 말까지 한다. 그 시절이 좋다면 대통령 욕도 30년 전처럼 숨어서 욕할 것이지 왜 백주대낮에 큰소리를 치는가? 역사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사람과 누리는 사람들이 다른, 죽 쒀서 개주는 방식으로 전진하는 경향이 있다. 원래 그런 것이니 헌신하는 소수여 너무 억울해 하지 말라는, 일종의 위로로 한 말이다.
편안하다. “왜
인터뷰집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인터뷰는 어떤 거라 생각하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나는 인터뷰이의 생각과 행동이 세상에 더욱 알려져야 하는, 그래서 그 정신이 널리 전파되었으면 하는 사람들만 인터뷰 한다. 그런 사람을 알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안 만나고 불편한 자리에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축복이라 생각한다.
(GQ 정규영)
2005/11/09 03:09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그렇게 못 알아듣겠나?”였다. 제자들 입장에서 뒤집으면 이렇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듯 모를 듯하단 말야..” 예수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아들을 만큼 쉬웠지만, 그 이야기의 전모가 즉각적으로 다 드러나진 않았다. 두고두고 곱씹어보게 하고 삶을 통해서만 서서히 깨치게 하는 것, 이야말로 예수 이야기의 마법이다.
2005/11/07 13:58

우리가 예수가 탄생을 기원으로 하듯, 스타워즈는 에피소드4에 나오는 ‘야빈전투’를 기원으로 한다. 스타워즈의 연도는 B.B.Y(야빈전투전, Before the Battle of Yavin), A.B.Y(야빈전투후, After the Battle of Yavin)로 표시된다. 제다이 마스터 요다는 B.B.Y 896년에 태어나 A.B.Y 4년에 수명을 다하니 9백살을 사는 셈이다. 이 작고 볼품없는, 그러나 우주를 통틀어 가장 강한 힘과 깊은 인격을 가진 도인은 늘 포스로 말한다. “세상 그렇게 사는 게 아닐세.” 스노우캣이 김단에게 만들어준 점토 요다.
2005/11/06 12:46
기차길옆작은학교 아이들이 평택 대추리에 벽화를 그리러 갔었단다.
“아픈 동네 대추리에 갔다 오다”
초 6 홍연주
미군으로 인해 평화롭던 동네 대추리가 ‘아픈 동네 대추리’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힘을 주러 벽화를 그리러 갔다.
하얀 벽에 우리가 하나 둘씩 그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우리가 그린 그림에 중학교 언니오빠들이 도와주었다.
그림이 완성되었다.
너무 좋았다.
우리가 그 벽화를 그렸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가 그 벽화에서 사진도 찍고 노래도 불렀다.
참 재미있었다.
‘대추리’ 동네 사람들이 우리가 그린 그림을 매일 보면서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미군들이 빨리 없어져서 대추리에 좋은 날들만 있었으면 좋겠다.
말풍선: 미군 니네!!
폭력보다 평화가 더~ 세다는 거 아직도 모르니?
"우리들의 벽화"
초 6 유슬기
나는 대추리에 갔다 와서 많은 걸 느꼈다.
우리는 평택에 가서 벽화도 그렸지만 놀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가지 말라는 곳도 가고 심하게 놀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심하게 놀았다.
그런데 대추리에 계시는 ‘평화바람’이모 삼촌들은 혼내지 않으시고 웃으시면서 그쪽에 가면 안 된다고 하신 게 끝이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으셨다.
우리가 온 게 좋아서 혼을 내시지 않으신 걸..
그리고 오면서 경찰도 많이 보고 차들도 많이 봤다.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고 그건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고 ‘폭력. 전쟁’을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면 평화가 올꺼라고 생각이 된다.
‘평화바람’ 이모 삼촌들이 12월달에 다시 보자고 하셔서 우리는 다 “네~”라고 했다.
그러니까 12월달에 한 번 더 가 보았으면 좋겠다.
"즐거운 평택"
초 5 이원용
어제 평택으로 ‘평화 그림’을 그리러 갔다.
우리는 먼저 사람을 벽에 대고 그렸다.
그리고 그린 것을 한 개 골라서 얼굴, 바지, 옷 등을 그렸다.
나는 문정현 신부님을 그렸다.
나는 그림을 정성껏 그렸다.
그런데 이모들이 뒤에서 너무 열심히 한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난 더욱 더 열심히 하였다.
우리는 밑그림을 다 그린 다음 김밥이랑 라면을 먹고 에너지 보충을 하고 다시 벽화를 그리러 갔다.
밑그림을 다 그린 사람은 색칠을 했다.
색칠을 한 다음 정희 이모한테 다 했다고 그러니까 지팡이를 안 칠해서 지팡이를 칠하고 놀았다.
벽화를 그리는 것은 참 재밌다.
그리고 평택이 미군기지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판에 글씨도 썼다.
평택이 미군 기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즐거운 대추리"
초 5 조수미
어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공부방에서 평택에 갔다.
가자마자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먼저 조를 나누었다.
하얀벽에 밑그림을 그리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김밥을 먹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가서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했다.
나는 병민이랑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등부가 마무리를 했다.
멋있었다.
그리고 자유시간이었다.
난 중1언니들과 ‘사과나무’를 하면서 놀았다.
그리고 ‘오렌지 뽕’을 했다.
가기 전에는 호박죽을 ‘평화바람’이모가 해 주셨다.
그래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벽화를 다 그린 것을 보러 갔다.
아, 그리고 말풍선도 만들었다.
거기에서 아주 귀한 선물도 주셨다.
너무 귀한 것이었다.
그런데 난 논 것 밖엔 없는 거 같다.
거기에 미군 기지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
"대추리"
초 3 윤병민
평택에 있는 대추리라는 곳에 갔다.
거기에 미군 기지가 들어선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러 갔다.
거기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고 나서 중학교1,2,3학년과 바꿔서 했다.
그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놀았다.
놀다가 김밥을 먹고 호박죽을 먹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집으로 갔다.
미군이 빨리 물러갔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힘들었지만 미군들이 물러 간다면 참 뿌듯한 느낌이다.
"군인 가시오"
초 1 신진우
나는 평택에 갔다.
그래서 재밌었다.
그래서 좋았다.
군인 가시오!!!
"아픈 평택, 즐거운 평택"
수연이모
추수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를 동네, 대추리 한 가운데
벽에 아이들이 '평화 그림'을 그려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간 길이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정말 잘 놀고 왔다.
문정현 신부님이 눈물을 삼키며 말씀하신 '아프고, 슬픈 땅' 평택 대추리에 가서.
가을 햇살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을 뒤로하고 대추 분교 운동장에서 만석동 아이들은 제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 했다.
학교 바로 길 건너 집 담벼락에 오고 가며 벽화를 그리는 아이들,
운동장 여기저기서 대추리 아이들인지 만석동 아이들인지 분간없이 뒹굴며 노는 아이들.
평화바람 이모 삼촌들이 틀어주신 노래소리.
그리고 서로 나누어 먹는 음식들.
정말 평화로웠다.
내년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쫓겨 날 운명앞에 선
농부 할머니 할어버지들의 땅에서
몇 년 안에 아파트 숲에 밀려 어디로든 쫓겨날 운명을 지닌
만석동 아이들이
그렇게 즐겁고 평화로운 가을 소풍을 하고 왔다.
1년째 대추리를 지키고 있는 두희 언니 말씀처럼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빼앗기고
쫓겨나고 또 쫓겨나고 하는'
엄연한 현실 바로 한 가운데
우리는 서 있다.
“죽음은 단단하고 획일적이고 불변적이다. 그것은 또한 크고 사납고, 시끄럽고, 그리고 매우 거만하다.
탱크와 미사일이 자랑스럽게 과시하며 앞장서고, 훈련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뒤를 따르는 군사행진은 죽음의 세력의 전형적인 표징이다. 생명은 다르다.
생명은 매우 취약하다.. 그것은 매우 작고, 매우 숨겨져 있고, 매우 부서지기 쉽다..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생명을 찾도록 요구된다. 이 부드럽고 취약한 생명을 찾는 것이 참된 저항자의 표징이다.“
(헨리 나웬 신부님 '평화로 가는 길' 중)
강하고, 단단하고, 불변적이며, 나서며,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려고 하는 '공동체'가
무엇을 선택해서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평화'도 '폭력'도 머리보다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즐기고 또 밀어내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가 그 현실 앞에
길을 잃지 않고 함께 갈 힘이 생기게 되길
다시 간절히 바래본다.
“아픈 동네 대추리에 갔다 오다”
초 6 홍연주
미군으로 인해 평화롭던 동네 대추리가 ‘아픈 동네 대추리’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힘을 주러 벽화를 그리러 갔다.
하얀 벽에 우리가 하나 둘씩 그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우리가 그린 그림에 중학교 언니오빠들이 도와주었다.
그림이 완성되었다.
너무 좋았다.
우리가 그 벽화를 그렸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가 그 벽화에서 사진도 찍고 노래도 불렀다.
참 재미있었다.
‘대추리’ 동네 사람들이 우리가 그린 그림을 매일 보면서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미군들이 빨리 없어져서 대추리에 좋은 날들만 있었으면 좋겠다.
말풍선: 미군 니네!!
폭력보다 평화가 더~ 세다는 거 아직도 모르니?
"우리들의 벽화"
초 6 유슬기
나는 대추리에 갔다 와서 많은 걸 느꼈다.
우리는 평택에 가서 벽화도 그렸지만 놀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가지 말라는 곳도 가고 심하게 놀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심하게 놀았다.
그런데 대추리에 계시는 ‘평화바람’이모 삼촌들은 혼내지 않으시고 웃으시면서 그쪽에 가면 안 된다고 하신 게 끝이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으셨다.
우리가 온 게 좋아서 혼을 내시지 않으신 걸..
그리고 오면서 경찰도 많이 보고 차들도 많이 봤다.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고 그건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고 ‘폭력. 전쟁’을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면 평화가 올꺼라고 생각이 된다.
‘평화바람’ 이모 삼촌들이 12월달에 다시 보자고 하셔서 우리는 다 “네~”라고 했다.
그러니까 12월달에 한 번 더 가 보았으면 좋겠다.
"즐거운 평택"
초 5 이원용
어제 평택으로 ‘평화 그림’을 그리러 갔다.
우리는 먼저 사람을 벽에 대고 그렸다.
그리고 그린 것을 한 개 골라서 얼굴, 바지, 옷 등을 그렸다.
나는 문정현 신부님을 그렸다.
나는 그림을 정성껏 그렸다.
그런데 이모들이 뒤에서 너무 열심히 한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난 더욱 더 열심히 하였다.
우리는 밑그림을 다 그린 다음 김밥이랑 라면을 먹고 에너지 보충을 하고 다시 벽화를 그리러 갔다.
밑그림을 다 그린 사람은 색칠을 했다.
색칠을 한 다음 정희 이모한테 다 했다고 그러니까 지팡이를 안 칠해서 지팡이를 칠하고 놀았다.
벽화를 그리는 것은 참 재밌다.
그리고 평택이 미군기지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판에 글씨도 썼다.
평택이 미군 기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즐거운 대추리"
초 5 조수미
어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공부방에서 평택에 갔다.
가자마자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먼저 조를 나누었다.
하얀벽에 밑그림을 그리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김밥을 먹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가서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했다.
나는 병민이랑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등부가 마무리를 했다.
멋있었다.
그리고 자유시간이었다.
난 중1언니들과 ‘사과나무’를 하면서 놀았다.
그리고 ‘오렌지 뽕’을 했다.
가기 전에는 호박죽을 ‘평화바람’이모가 해 주셨다.
그래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벽화를 다 그린 것을 보러 갔다.
아, 그리고 말풍선도 만들었다.
거기에서 아주 귀한 선물도 주셨다.
너무 귀한 것이었다.
그런데 난 논 것 밖엔 없는 거 같다.
거기에 미군 기지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
"대추리"
초 3 윤병민
평택에 있는 대추리라는 곳에 갔다.
거기에 미군 기지가 들어선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러 갔다.
거기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고 나서 중학교1,2,3학년과 바꿔서 했다.
그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놀았다.
놀다가 김밥을 먹고 호박죽을 먹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집으로 갔다.
미군이 빨리 물러갔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힘들었지만 미군들이 물러 간다면 참 뿌듯한 느낌이다.
"군인 가시오"
초 1 신진우
나는 평택에 갔다.
그래서 재밌었다.
그래서 좋았다.
군인 가시오!!!
"아픈 평택, 즐거운 평택"
수연이모
추수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를 동네, 대추리 한 가운데
벽에 아이들이 '평화 그림'을 그려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간 길이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정말 잘 놀고 왔다.
문정현 신부님이 눈물을 삼키며 말씀하신 '아프고, 슬픈 땅' 평택 대추리에 가서.
가을 햇살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을 뒤로하고 대추 분교 운동장에서 만석동 아이들은 제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 했다.
학교 바로 길 건너 집 담벼락에 오고 가며 벽화를 그리는 아이들,
운동장 여기저기서 대추리 아이들인지 만석동 아이들인지 분간없이 뒹굴며 노는 아이들.
평화바람 이모 삼촌들이 틀어주신 노래소리.
그리고 서로 나누어 먹는 음식들.
정말 평화로웠다.
내년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쫓겨 날 운명앞에 선
농부 할머니 할어버지들의 땅에서
몇 년 안에 아파트 숲에 밀려 어디로든 쫓겨날 운명을 지닌
만석동 아이들이
그렇게 즐겁고 평화로운 가을 소풍을 하고 왔다.
1년째 대추리를 지키고 있는 두희 언니 말씀처럼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빼앗기고
쫓겨나고 또 쫓겨나고 하는'
엄연한 현실 바로 한 가운데
우리는 서 있다.
“죽음은 단단하고 획일적이고 불변적이다. 그것은 또한 크고 사납고, 시끄럽고, 그리고 매우 거만하다.
탱크와 미사일이 자랑스럽게 과시하며 앞장서고, 훈련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뒤를 따르는 군사행진은 죽음의 세력의 전형적인 표징이다. 생명은 다르다.
생명은 매우 취약하다.. 그것은 매우 작고, 매우 숨겨져 있고, 매우 부서지기 쉽다..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생명을 찾도록 요구된다. 이 부드럽고 취약한 생명을 찾는 것이 참된 저항자의 표징이다.“
(헨리 나웬 신부님 '평화로 가는 길' 중)
강하고, 단단하고, 불변적이며, 나서며,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려고 하는 '공동체'가
무엇을 선택해서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평화'도 '폭력'도 머리보다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즐기고 또 밀어내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가 그 현실 앞에
길을 잃지 않고 함께 갈 힘이 생기게 되길
다시 간절히 바래본다.
2005/11/05 09:50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들이, 전에는 대학생이 많았는데 갈수록 고등학생과 사회인들이 많아진다. ‘사회인‘도 전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 대부분이었다면 이젠 ‘개혁을 회의하기 시작한’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이 오히려 더 많다. 요 며칠 사이에 받은 고등학생의 편지들. 앞의 것은 내 글을 읽은 고3 남학생이, 뒤의 것은 그제 울산강연에서 만난 고2 여학생이 보내온 편지다. 세상을 다 아는 듯 느물대는 어른들은 이 맑은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워할지어다.
사실..
저는 소위 말하는 '노빠'였습니다. 그의 원칙과 소신들이 세상을 바꿀줄만 알았습니다.
그러한 기대가 깨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더군요.
조중동과 지역주의에는 날을 세우면서 신자유주의에는 한없이 관대한..
결국 그가 대중서민들에겐 아무런 희망도 주지못한다는 사실을 알아감과 동시에 모든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가 얼마나 공허한지 깨달은 거죠.
저는 중간층도 아니고, 그렇다고 극빈층도 아니지만,
가끔, 정말 세상 살기 힘들다 라고 느끼는 ‘중간과 맨 아래의 중간’ 계급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선생님이 강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문이나 뉴스에서 전해주는 정치에 관한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딴 세상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별 흥미도 없고, 관심도 가지 않습니다.
또 왜 미디어에서는 정작 서민들의 실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논술 준비를 위해 억지로 보았습니다.
2005/11/04 10:35

울산 강연을 마치고 오랜 만에 곽영화를 만났다. 새벽까지 술을 먹고 자기 집으로 가자는 걸 그 식구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 뿌리치고 근처 목욕탕으로 갔다. 여덟시 비행기로 올라와 급한 일 하나를 처리하고 한숨 돌리는데 전화가 왔다. “곽영홥니다. 지금 목욕탕 앞에 있습니다.” 내가 잘까봐 전화도 안 하고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 무속인에 가까운 미술가는 늘 불상처럼 미소 짓는다.
2005/11/03 16:44
추석날 만난 아버지가 당신의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건네주었다. 한참 몸이 불어나는데 교복은 그에 못 미쳐서 터질 듯한, 사진이다. 사진은 누렇게 색이 바래고 금이 쭉쭉 가 있다. 아버지는 컴퓨터로 보정을 부탁했다. 아버지는 전주공고를 3학년 때 중퇴했다. 휴학도 하고 노점상도 하면서 졸업을 해보려 애썼지만 가난한 전라도의 소년에겐 어려운 일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공군에 정비사로 입대했다. 기술자라면 무시당하지 않는 시절이었고 아버지는 그렇게 기술자가 되어 기술자로 일생을 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못 고치는 게 없고 못 만지는 게 없다. 어릴 적 단칸셋방 우리집의 난방도 아버지의 자작 보일러가 맡았다. 보일러는 링거병처럼 매달린 기름통에서 투명 호스를 따라 기름이 한 방울씩 흐르면 마치 제트엔진처럼 강한 불꽃이 구들을 가열하는 구조였다. 구조는 간단하고 엉성해보였지만 성능은 대단해서 없는 살림이지만 한번도 추위에 떠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걸 만들 때 볼트 한개도 돈을 주고 사는 법은 없었다. 집엔 늘 여기저기서 모아둔 못쓰게 된 기계 부품들이 굴러다녔는데 필요한 기계가 생기면 그 부품들은 신기하게도 바로 그 기계의 키트가 되는 거였다.
기계류야 복잡한 전투기를 정비하는 분이니 그럴 만하다 해도 아버지는 참으로 막히는 게 없는 기술자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어느 날 선생님이 “지휘봉 만들어 올 수 있는 사람!”하고 말했을 때 나는 무심코 손을 들었다. 아버지는 반색을 했다. 교사를 잘 모시셔야 하던 시절이었다. 형편도 그렇고 어머니는 늘 건강이 안 좋아서 학교에 인사도 한번 못가고 하니 아버지는 마음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이틀 후 아버지가 신문지에 싸준 지휘봉을 펴 본 선생님은 눈이 동그래졌다. “사왔나?”
돌아가신 지 한참인 할머니는 나에게 늘 말하곤 했다. “니 애비는 겨우 걸아다닐 적부터 부억 바닥에 못을 박고 놀았는데 그 못대가리가 얼마나 줄이 똑바로인지 어른들이 다 놀라곤 했지.” 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나도 이릴 적부터 기계를 좋아했다. 지금도 나무나 꽃 이름은 부러 외우려 해도 잘 안되는데 기계는 한번만 봐도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집에 돌아다니는 온갖 부품들을 이리저리 꿰맞추어보는 일은 어릴 적 나의 주요한 놀이였다.
폭탄을 만든답시고 혼자 며칠을 낑낑거리다 폭발해버린 일도 있었다. 명절이라 할머니 집에서였는데 온몸이 화약연기로 덮인 내가 마당으로 뛰어나오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두부를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사람, 된장이 낫다고 소리치는 사람, 찬물을 부어야 한다는 사람, 오히려 따뜻한 물을 부어야 한다고 반박하는 사람... 지금도 내 손에 그 날 흉터가 남아있다. 어린 기술자의 훈장이.
결혼을 하고 아버지와 떨어져 산 후로도 뭐든 고장이 나면 기술자를 부르는 일은 별로 없다. 신기한 건 그 기계의 구조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서도 뜯어서 뚝딱뚝딱 만지다보면 해결되는 것이다. 아내는 늘 “어떻게 고쳤어?” 묻지만 나는 그저 “나도 잘 몰라.”할 뿐이다. 구조를 모르니 왜 해결이 되었는지도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백이면 백 문제는 해결된다. 기계는 합리성과 인과관계의 결정체라지만 나는 오래된 기계엔 어떤 감성 같은 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말하자면 나와 기계는 어떤 감성적 소통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기계와 그랬듯이 말이다.
추석날 밤 아버지 등에 부항을 떠드렸다. 어깨는 작아지고 주름살과 검버섯은 몰라보게 많아진 등을 만지며 나는 조용히 탄식했다. ‘아, 위대한 기술자가 늙어버렸구나!’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못 고치는 게 없고 못 만지는 게 없다. 어릴 적 단칸셋방 우리집의 난방도 아버지의 자작 보일러가 맡았다. 보일러는 링거병처럼 매달린 기름통에서 투명 호스를 따라 기름이 한 방울씩 흐르면 마치 제트엔진처럼 강한 불꽃이 구들을 가열하는 구조였다. 구조는 간단하고 엉성해보였지만 성능은 대단해서 없는 살림이지만 한번도 추위에 떠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걸 만들 때 볼트 한개도 돈을 주고 사는 법은 없었다. 집엔 늘 여기저기서 모아둔 못쓰게 된 기계 부품들이 굴러다녔는데 필요한 기계가 생기면 그 부품들은 신기하게도 바로 그 기계의 키트가 되는 거였다.
기계류야 복잡한 전투기를 정비하는 분이니 그럴 만하다 해도 아버지는 참으로 막히는 게 없는 기술자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어느 날 선생님이 “지휘봉 만들어 올 수 있는 사람!”하고 말했을 때 나는 무심코 손을 들었다. 아버지는 반색을 했다. 교사를 잘 모시셔야 하던 시절이었다. 형편도 그렇고 어머니는 늘 건강이 안 좋아서 학교에 인사도 한번 못가고 하니 아버지는 마음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이틀 후 아버지가 신문지에 싸준 지휘봉을 펴 본 선생님은 눈이 동그래졌다. “사왔나?”
돌아가신 지 한참인 할머니는 나에게 늘 말하곤 했다. “니 애비는 겨우 걸아다닐 적부터 부억 바닥에 못을 박고 놀았는데 그 못대가리가 얼마나 줄이 똑바로인지 어른들이 다 놀라곤 했지.” 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나도 이릴 적부터 기계를 좋아했다. 지금도 나무나 꽃 이름은 부러 외우려 해도 잘 안되는데 기계는 한번만 봐도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집에 돌아다니는 온갖 부품들을 이리저리 꿰맞추어보는 일은 어릴 적 나의 주요한 놀이였다.
폭탄을 만든답시고 혼자 며칠을 낑낑거리다 폭발해버린 일도 있었다. 명절이라 할머니 집에서였는데 온몸이 화약연기로 덮인 내가 마당으로 뛰어나오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두부를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사람, 된장이 낫다고 소리치는 사람, 찬물을 부어야 한다는 사람, 오히려 따뜻한 물을 부어야 한다고 반박하는 사람... 지금도 내 손에 그 날 흉터가 남아있다. 어린 기술자의 훈장이.
결혼을 하고 아버지와 떨어져 산 후로도 뭐든 고장이 나면 기술자를 부르는 일은 별로 없다. 신기한 건 그 기계의 구조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서도 뜯어서 뚝딱뚝딱 만지다보면 해결되는 것이다. 아내는 늘 “어떻게 고쳤어?” 묻지만 나는 그저 “나도 잘 몰라.”할 뿐이다. 구조를 모르니 왜 해결이 되었는지도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백이면 백 문제는 해결된다. 기계는 합리성과 인과관계의 결정체라지만 나는 오래된 기계엔 어떤 감성 같은 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말하자면 나와 기계는 어떤 감성적 소통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기계와 그랬듯이 말이다.
추석날 밤 아버지 등에 부항을 떠드렸다. 어깨는 작아지고 주름살과 검버섯은 몰라보게 많아진 등을 만지며 나는 조용히 탄식했다. ‘아, 위대한 기술자가 늙어버렸구나!’
2005/11/03 09:29
아이들과의 대화를 글로 적으면 반드시 “혹시 틀린 말 있으면 말해줄래?” 감수를 받곤 한다. 대개는 틀린 게 없다고 하는데 이번엔 있다는 답장이다. 그런데.. "알았어 아빠"와 "아~ 알겠어"가 뭐 그리 다르다는 거지? 김단의 편지는 언제나 이모티콘이 절반이다.
Re: 아빠 블로그
아빠 =_=;
맨밑에 "알았어 아빠"가 아니라
"아~ 알겠어"에요.. =_=;;
□□□□아빠고치세요□□□□
Re: 아빠 블로그
아빠 =_=;
맨밑에 "알았어 아빠"가 아니라
"아~ 알겠어"에요.. =_=;;
□□□□아빠고치세요□□□□
2005/11/02 12:30

지난달 중순, 김단이 제 학교 독서축제인가에 창작동화를 내기로 했다며 원고를 보여주었는데 “리아의 모험 1 - 흩어진 왕국”이라는 제목의 판타지 소설이었다. 분량도 길고 표현이나 구성이 꽤 그럴싸해서 속으로 좀 놀랐다. 학교에서 무슨 상을 받은 모양인데 늘 내가 “상이라는 건 정확하지 않다”고 말해 버릇해서인지 기쁜 걸 많이 내색하진 않는다. (아내 말마따나 속으로야 좀 다르겠지만.) 반면에 제 아비의 칭찬에는 많이 고무된 것 같다. 웬만한 일엔 부러 칭찬을 하지 않는 편이지만, 체질적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이 약한 나는 내 딸이 판타지를 써냈다는 게 꽤나 기뻤던 모양이다. 하여튼 김단은 요즘 부쩍 밝아져서 종일 생글거리며 다닌다. 며칠 전 김단과의 대화.
“아빠, 나 만화가 말고 소설가 될까?” “만화가든 소설가든 니가 알아서 할 일인데 두가지는 떨어져 있는 게 아니야. 단이가 좋아하는 상뻬도 그림도 잘 그리지만 그 그림에 글 쓰는 사람보다 더 깊은 생각이 들어 있어서 훌륭한 거잖아.” “맞아.” “그래서 단이도 이젠 책임감 있게 행동할 때가 된 거야.” “책임감?” “엄마 아빠가 단이 학교공부 갖고 뭐라 하지 않지?” “응.” “다른 동무들도 그런 것 같아?” “아니. 이제 다 학원 다니고 그러지.” “지금은 단이가 공부를 곧잘 하지만 육학년 되고 중학교 들어가면 성적이 떨어질 거야. 다른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니까.” “알아.” “단이가 만화가나 소설가가 될 거라면 학교 성적이 가장 중요하진 않아. 그런데 그건 단이가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전제에서야.” “맞아.” “그런 공부도 안 하면서 학교공부도 안 한다면 엄마 아빠가 단이를 존중할 수 있을까?” “아니.” “바로 그게 책임감이야.” “알았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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