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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01 선생님과 사장님
2005/09/01 08:48
나는 사람을 부를 때 되도록 직함을 붙여 부르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직함을 붙여 부를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함은 본디 그 사람의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직업이 아니라 신분을 나타낸다. 그것은 모든 직업에 직함을 붙여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누구나 변호사나 교수를 ‘아무개 변호사님’ ‘아무개 교수님’이라고 부르지만, 누구도 환경미화원이나 농민을 ‘아무개 환경미화원님’ ‘아무개 농부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알고 보면 직함을 붙여 부르는 직업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 수는 부모들에게 “당신 아이가 나중에 뭐가 되었으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나오는 답의 수와 비슷하다. 변호사나 교수 외에 국회의원, 장군, 피디, 감독, 기자 등 해서 채 스무 개나 될까. 현재 한국 사회엔 2만개가 넘는 직업이 있다니 0.1퍼센트의 직업만이 직함을 붙여 불려 진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에 직함을 붙여 부르는 건 ‘당신은 특별한 신분을 가졌습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법정이 아니라면 굳이 변호사님이라 부를 이유가 없으며 학교가 아니라면 굳이 교수님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

내가 가장 많이 쓰는 직함은 선생님이다. 나는 직업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내가 편하게만 대할 수 없는 거의 모든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이 차이가 좀 나서 내 그런 호칭을 못 견뎌하는 경우엔 ‘형’이나 ‘님’을 사용한다. 때론 자신을 교수님이나 변호사님이라 부르지 않는 나를 못내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다. 다들 그렇게 하니 내가 도리어 불거져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겸임 자리만 얻어도 직함을 ‘교수님’으로 갈아붙이는 치기어린 세태에서, 그런 불편은 그들에게 약이 될 뿐이다. 그리고 교수 중의 교수 혹은 변호사 중의 변호사는 이미 선생님이라 불리지 않는가?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쓰길 바란다. 선생님이란 말은 얼마나 좋은가. 상대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건 그에게서 배우겠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배울 게 있으며 또 배우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처럼 좋은 인간적 태도가 있겠는가. 선생님을 여성에겐 쓰기 불편한 호칭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지만 근거도 없고 써보면 아무런 불편이 없다. 익숙하지 않은 것 가운데는 소중한 게 참 많다. 나이가 좀 아래인 사람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기가 어색한 사람들(특히 한 살 많고 적고를 갖고 죽기 살기로 따지는 습성이 남아있는 유아적 남성들)을 위해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가 있다.

이오덕 선생. 돌아가신지 두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 모든 한국인의 스승이라 해도 넘침이 없는 분이다. 선생은 수십 년 아래의 사람에게도 반드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시곤 했다. 심지어 선생은 나에게 당신의 아들을 소개하실 때 ‘우리 아이’라고 하셨다. 그 아들은 나보다 열 몇 살 위다. 진정한 예의는 아래로만 혹은 위로만 흐르지 않는다. 진정한 예의는 아래로도 위로도 흐른다. 그럴 때 예의는 비로소 품위가 된다.

(근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직함은 슬프게도 ‘사장님’이다. 언젠가부터 카센터에서든 식당에서든 손님에게 사장님(혹은 사모님)이라 부르는 게 유행이 되었다. 사람을 실없이 치켜세우는 그 직함은 오늘 우리사회를 그대로 반영한다. ‘부자 되세요’가 최상의 덕담이 되고 ‘당신의 사는 곳이 당신의 가치를 정합니다’ 따위 광고가 무리없이 통용되는 사회를 말이다. 요컨대 민주화의 성과가 자본의 차지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장사꾼의 심성을 가지게 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인격체가 아니라 거래처로 파악하는 것이다.)
2005/09/01 08:48 2005/09/01 0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