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9'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05/09/30 슬플 때 듣는 음악 3
  2. 2005/09/28 가난해도 잘 살 수 있다
  3. 2005/09/26 부상
  4. 2005/09/24 정운영
  5. 2005/09/24 이-바이블
  6. 2005/09/23 가을 하늘
  7. 2005/09/22 감사
  8. 2005/09/21 두번째 책
  9. 2005/09/20 신에 가까운
  10. 2005/09/19 관측병의 편지
  11. 2005/09/15 머리말
  12. 2005/09/14 슬플 때 듣는 음악 2
  13. 2005/09/13 경향
  14. 2005/09/12 슬플 때 듣는 음악 1
  15. 2005/09/11 지역문제 단상
  16. 2005/09/10 고래가 뭐라고 했을까
  17. 2005/09/08 희망
  18. 2005/09/06 추락한 가위손
  19. 2005/09/05 스윙걸스
  20. 2005/09/04 그러지요
2005/09/30 20:06
슬플 때 듣는 음악, 김경의 목록.


학수고대 - 백현진(아직 앨범 나오지 않음)
Wicked Little Town - 영화 <헤드윅> 버전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 조지 해리슨
Blowers Daughter - Damien Rice
애수의 소야곡 - 한영애
Yumeji's Theme - <화양연화> 중
Gurb song - Migala
Love Is Here - 스타 세일러
금자탑 - 아마추어증폭기
Hable Con Ella - 영화 <그녀에게> 중
between the bar - Elliot Smith
All Apologies - 너바나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너바나
Perfect Day - Lou Reed
Antonio's Song과 pierre - Helen Merrill
Wild Is The Wind - 데이빗 보위
Sensitive Kind - J.J cale
2005/09/30 20:06 2005/09/30 20:06
2005/09/28 16:49
오늘 강의 듣고 가난해도 잘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느껴 기뻤습니다.


예수전 수강하는 이가 보낸 편지에서.
"가난해도 잘 살 수 있다."
다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을..
2005/09/28 16:49 2005/09/28 16:49
2005/09/26 17:22
어제 자전거를 타고 숲을 달리다 다시 날았다. 신도시 개발 공사(빌어먹을 개발!)로 파헤쳐 놓은 곳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영식이 자전거를 선태에게 빌려주러 가던 길이라 슬리퍼에 아무런 안전장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정도 사고는 세 번째인데 날고 떨어지고 미끌어지는 세 단계의 과정이 일단 끝나면 본능적으로 사지를 차례로 움직여 부러진 데가 없는지 확인하게 된다. 다행히 부러진 데는 없지만 오른쪽 몸이, 팔부터 겨드랑이 가슴까지 모조리 까지고 패였다. 무릎과 골반과 머리통도 조금씩. 이 꼴로 가면 선태가 놀라겠기에 질질 자전거를 끌고 상가 화장실에 들어가 대강 상처를 씻어냈다. 선태는 갈수록 배가 나오는데 운동이은 눈곱만큼도 안하면서 늘 “운동해야 하는데, 하는데..” 한다. 해서 진작부터 자전거를 탈 것을 강권해왔고 오늘 그 첫 시간인 것이다. 몸을 씻고 옷을 털고 돌아간 자전거 핸들을 돌려 맞춘 다음 선태와 교하 숲으로 갔다. 오른팔에선 피가 흘러내리는데 선태가 알아챌 새라 왼쪽 몸만을 선태에게 향한 채 기초 교육을 시작한다. 안장 높이는 페달이 가장 멀리 있을 때 무릎이 약간 구부러지는 정도가 좋다, 기어 변속은 특별히 고속이거나 저속이 아니라면 앞쪽은 중간에 놓고 뒷 기어만 변속하는 게 좋다, 내리막에선 엉덩이를 뒤로 빼 무게 중심을 뒤로 하고 오르막에선 반대로 팔을 굽혀 엉덩이를 바짝 앞으로 해야 한다, 등등. 그리고서 한번 타고 돌아보라고 하니 어디론가 한참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그래도 소시 적에 운동한 티가 난다. “재미있어?” “응, 죽이는데.” “그래 잘 타는구나. 그래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으니까 주의해야 해. 오버하면..”이라고 말하는 순간 약간의 장난끼가 생겨 오른 팔을 슬쩍 선태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된다.” 이 마음 약한 아저씨는 비명을 지르며 금세 울 듯하다. 병원에 가자는 선태에게 킬킬 웃으며 좀 더 타라 이르고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상처를 씻고 좀 깊게 패인 곳엔 습윤성 거즈를 붙이고 다른 곳은 대충 후시딘을 발랐다. 선태에게 “여자들한테 말하지 말자”고 해놓았지만 몇 시간이 못 되어 나의 부상은 동네 소식이 되었다. 그런데 아내는 내 부상에 놀라지 않는다. 게다가 “조심 좀 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내 부상에 익숙해진걸까, 아니면 자전거를, 조금 위험하게 타는 일이 제 남편에게 갖는 의미를 이해하게 된걸까. 하여튼 아내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태도도 단번에 바뀐다. 선태 또한 어느새 본래대로다. “형.” “응.” “나랑 찜질방 갈까?” 나쁜 놈.
2005/09/26 17:22 2005/09/26 17:22
2005/09/24 17:06
1980년 한국신학대학은 신군부의 폐교 압력을 받고 신학과 신입생을 뽑지 않는 대신 인문사회계열 학과들을 신설하여 간신히 폐교를 피했다. 그 즈음 한신대에 들어온 젊은 맑스주의 경제학자 두 사람이 김수행과 정운영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배웠다. 집회를 할 때면 정 선생은 팔짱을 끼고 본관 건물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내내 바라보곤 했다. 그는 좋은 선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한국인이 아니라 유럽인 같았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그는 다시 김수행 선생과 함께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 후 그는 한겨레에 있다가 나중에 중앙일보로 갔다. 정 선생은 일생의 상당 부분을 맑스주의자로 살았지만 말년엔 개운치 않은 맑스주의의 비판자로 일관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지만, 나는 그의 ‘유럽인 같음’과 좀 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그는 그 시절 좋은 선생이었다. 명복을 빈다.
2005/09/24 17:06 2005/09/24 17:06
2005/09/24 12:33
최근 쓰기 시작한 오프라인 전자성서. 공동번역 성서를 기반으로 한 단순한 구조인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로선 상용(돈 주고 사야 하는) 프로그램들보다 더 낫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을 때는 대한성서공회의 성경읽기 사이트도 좋다.
2005/09/24 12:33 2005/09/24 12:33
2005/09/23 09:21
아빠 우리학교에 금붕어가 있는데 밥을 안줘서 한 마리가 죽었어 아빠가 좀 갖다 줘


방금 학교에 도착했을 김단에게서 문자가 왔다. “갖다주세요”는 나도 별로지만 “갖다 줄래”도 아니고 “갖다줘”라니 내가 무슨 지 심부름꾼인가 싶으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이 아이가 제 아비를 파악했구나 싶어서다. 말하자면 이 아이는 제 아비에게 빠트린 물건을 가져오라 했다간 된통 야단을 맞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저학년 때는 갖다 주기도 했다) 제 아비가 ‘공공성’엔 엄청 약하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그래 약점을 파악했으니 실컷 이용해먹어라, 혼자 중얼거리며 금붕어 먹이를 작은 용기에 덜고 “문방구 앞으로”라는 답 문자를 보낸다. 김단이 학교 밖으로 뛰어나오면서 나를 발견하고는 좋아라 폴짝폴짝 뛴다. 크면서 얼굴은 참 많이 달라졌다지만 웃을 때 눈 주위가 익살스럽게 찌부러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여튼 그 표정 앞에선 도저히 굳은 표정을 할 수 없다. “으이그 이놈아.. 이따 봐!” 하며 먹이를 손에 쥐어주니 “응!” 하며 교실로 달려간다. 가을인가. 하늘이 되게 높다.
2005/09/23 09:21 2005/09/23 09:21
2005/09/22 07:32
나의 예수전 첫 시간에 모인 이들을 보며 감사했다. ‘나 같으면 이 실용성 없어 보이는 강의에 관심은 가졌으되 돈을 마련하여 애써 오기까지 했을까?’ 게다가 나는 이 강의를 통해 예수전의 초고를 완성하겠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보답을 해야겠다 싶어 "예수전이 나오면 한권씩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2005/09/22 07:32 2005/09/22 07:32
2005/09/2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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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가르친 어머니에게
절제를 가르친 아버지에게
그 가르침 탓에 늘 애끓는 그들에게

이번 책은 내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헌정했다. 몇 달 전 어머니가 쓸쓸한 얼굴로 “항이 걔는 자나 깨나 불쌍한 동포 걱정만 하는 아이라서..”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어떤 이로부터 전해 듣고 내내 아팠다. 이번 추석 때 오랜 만에 아버지 등에 부항을 떠드리다가 ‘왜 이 사람은 단 한 번도 안락하게 살지 못한 채 늙어버렸는가’ 싶어 울컥했다. 앞으론 그들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야죠.” 따위 말은 하지 않아야겠다. 안상수 선생이 ‘전임 디자이너’의 지위를 고수해준 덕에 또 한권의 검소하면서도 예술적인 책이 만들어졌다. 혹시 이 책의 외관이 칙칙한 느낌이 든다면, 세상의 다른 책들이 지나치게 화려한 게 아닌지 되새겨보길 바란다. 책은 홍등가의 정물과는 다르다.
2005/09/21 11:13 2005/09/21 11:13
2005/09/20 23:08
예수를 ‘지금’ ‘여기’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해석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또 중요하다. 어떤 사람에게 예수는 민족해방 운동가이며, 어떤 사람에겐 영성지도자이며, 어떤 사람에겐 여성주의자이이며 다른 어떤 사람에겐 생태주의자일 수 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 예수는 교회개혁가이거나 민란의 주모자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걸 뒤집어 예수를 규정하는 것이다. 예수는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이다. 요컨대 예수는 민족해방운동가이며 영성지도자이며 여성주의자이며 생태주의자이며 교회개혁가이며 민란의 주모자다. 예수는 그런 모든 면들을 뒤섞거나 절충한 인물이 아니라 그런 모든 면들이 함께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를 신으로 인정하든 안 하든 그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2005/09/20 23:08 2005/09/20 23:08
2005/09/19 11:34
군에 있는 제 동생이 지 홈피에 남긴 글입니다. 이제 스물넷이 되는데.. 철부지이기만 하던 녀석이 어느새 이렇게 컷나 싶어지네요. 저는 대학새내기 시절 김규항님 강연과 칼럼으로 사회라는 것에 눈을 떴었지요. 그 무렵 동생은 온라인 게임으로 밤을 새고 판타지 소설을 쓴다며 대학을 자퇴했었구요. 세월이 흘러 못난 형이 고시 취업 연봉 따위에 휘둘리면서 내게 있던 조그만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나를 알아갈 무렵에.. 동생의 이런 글이 가슴을 때리는군요. 한번 보여드리고 싶어서 보내드립니다. 행복하십시오.




나는 관측병이야.
뭐냐면,
원래 대포라는 게 보통 10km 밖에 있는 적을 표적으로 삼는 물건이라서,
포를 쏘는 사람이 타겟을 보면서 쏠수 없다라는 걸 알아야해.
하지만 포가 잘못 맞거나 타겟이 어디로 이동하거나 하는 건 알아야지 타겟을 부술 수 있잖아? 그래서 그걸 봐주는 "눈"역할을 하는 게
관측병이야.
말하자면 포의 눈이지. 10km 밖에 있는 적을 봐야하니 기본적으로
높은 곳에 있어야 하고, 그래서 무전기를 들고 산을 타야하는 직책이야.
그러니까,
나는 관측병이야.

나는 포를 쏘지 않아. 만져보지도 못해. 나는 어디까지나 보는 역할, 쏘는 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거야. 죽이는 건 내가 아냐. 내게 살의는 없어. 그저, 오른쪽으로 20미터만 돌리면 타겟에 정확히 맞겠는 걸? 하면서 이야기해주는 것뿐이야. 게다가 난 원래 군대 가고 싶지 않았어. 원해서 온 게 아니라구. 알잖아?
포를 쏘는 건 내가 아냐.
그래, 내가 죽인 게 아냐.
난 그런 걸 원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지 않아?

난 그저 자본주의라는 사회 안에서 정당하게 일했을 뿐
부동산이라든가 주식이라든가 투자라든가.
번 돈은 내 것.
직장 잃고 자기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 지르는 사람들이나,
채무에 시달려 자기 몸을 팔아버리는 사람들하곤
관계없다구. 불쌍하긴 하지만, 나랑은 관계없어.
내 몸속에 축적된 지방은 내가 합법적으로 쌓아둔 거야.
말라서 비틀어진, 그런 기아민들이 내 탓으로 그렇게 된 건 아니잖아? 난 그들에게 손끝하나 댄 적 없어. 난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아.
난 그저, 열심히 일했을 뿐이야.
내 탓이 아냐.

..

전쟁이라는 것에 참여한 사람들은,
설령 총 한번 안 쏘았다고 해도
이미 누군가를 죽이는데 일조한 거다.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죄.

자본주의라는 것에 참여한 사람들은..
설령 누군가에게 주먹질 한번 안했다고 해도
이미 누군가를 죽이는데 일조한 거다.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그 땅에 서 있었던 것 자체가

오직,
赤貧한자만이
죄가 없다.
문제는 그 사람의 의지와 선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서있는 땅마당인 거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헤어날 수 없는 늪지에 서있는 거야.
누구나, 죄를 가지고 살아가. 죄인지도 모른 채.
죄가 없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 늪지에 서지 않은 사람.
적빈한자. 양심적병역거부로 감옥에 간 자.
그래서, 그 어쩔 수 없음이 서글퍼.
예수는 그래서
독설가야.
2005/09/19 11:34 2005/09/19 11:34
2005/09/15 14:41
나는 왜 불온한가 머리말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쓰는 동안 내 글쓰기도 지식인 노릇도 적이 불편했다. 처음 얼마간은 자못 신념에 차서 썼던 것도 같은데 그렇게 되어갔다. 제도 지면에 글이나 끼적거리는 일로 사회적 허명을 얻어가는 일이 내 자의식을 건드렸고, 내 글을 제 얼마간의 사회의식을 배설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슬렸고, 어느덧 장사꾼의 심성에 물든 어른들에게서 상품으로 길러지는 아이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래서 제도 지면을 무대로 하는 활동을 접고 이런저런 나름의 모색을 하면서 어린이 잡지 <고래가그랬어>도 만들었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아예 멈추진 못한 건 내 소박한 불온함 때문이었다. 민주화의 성과가 자본의 차지로 돌아가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갈수록 희망의 빛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만들어준. 나를 ‘비현실적인 근본주의자’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나는 모든 사람이 신념과 원칙에 가득 차 살기를 바라는 몽상가는 아니다. 나는 단지 사람들이 제가 사는 세상의 얼개쯤은 알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오늘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는 수구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것, 세상은 민족이나 국가나 지역이 아니라 계급으로 나뉜다는 것,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면 우리는 곧 공멸한다는 것쯤은 말이다.

나는 여전히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고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고 믿는다. 생명이든 평화든 생태든 신앙이든 다른 어떤 소중한 차원에서든 말이다.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라서 훌륭한 사회체제가 무작정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그러나 훌륭한 사회체제가 보다 많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건 분명하다. 나는 좀 더 훌륭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묵묵히 싸우는 활동가들을 알고 있다. 그들 앞에서, 글쓰기나 지식인 노릇과 관련한 내 부질없는 자의식은 그만 접어야겠다. 내 글이나 생산물이 그들의 활동을 조금이라도 더 거들 수 있도록 애써야겠다.

이 책이 내 활동의 작은 전기가 되갈 바란다. 나에게 “정말 희망이 있는가” 물었던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노신 선생의 말을 대신 전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2005년 8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하에서
김규항
2005/09/15 14:41 2005/09/15 14:41
2005/09/14 14:32
슬플 때 듣는 음악, 원종우의 목록. 원종우는 '베드테이스트' 라는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인디레이블 앨범을 냈던 뮤지션이다. 필명 '파토'로 더 알려져 있고 현재 영국에서 기타 공부를 하고 있다.

깊이 생각하고 고르면 오히려 작위적이 될 것 같아 슬픔과 관련된 심상이 바로 떠오르는 곡들로 골랐습니다. 그리고 되도록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지나친 마이너 아이템이나 어려운 곡들은 뺐습니다. (원종우)



'슬픈'이 아니라 ‘슬플 때 듣는’ 노래들

혜화동 – 동물원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 펄 시스터즈
북소리 – 들국화
새 – 이병우
떠나가는 배 – 조용필
곡예사의 첫사랑 – 박경애
날이 갈수록 – 들국화, 김정호
지금은 헤어져도 – 해바라기
옥의 슬픔 – 한대수
종이연 – 김민기
꿈 – 조덕배
서른 즈음에 – 김광석
다락방 – 논두렁 밭두렁

Since I’ve been loving you – led zeppelin
Autumn leaves – miles davis 버전
Cause we’ve ended as lovers – Jefff Beck
Echoes – pink floyd
Are you going with me – pat matheny
My funny valentine – chet baker 버전
Island– king crimson
She’s leaving home – the beatles
Children of sanchez – chuck manzione
Black star – yngwie malmsteen
Woman –john lennon
2005/09/14 14:32 2005/09/14 14:32
2005/09/13 00:20
인텔리들은 뭐가 옳은가를 해명하느라
아무 것도 안 하는 경향이 있다.
2005/09/13 00:20 2005/09/13 00:20
2005/09/12 10:29
슬플 때 듣는 음악 목록을 보여 달라는 이들이 많았다. 박준흠, 원종우, 김경 가운데 먼저 박준흠의 것. 한국 19곡, 외국 16곡인데 각각 (어느 여성에게 주려고 뽑은 게 아닌가 싶을 만치) 근사한 제목이 붙어 있다. 시디로 구워 듣길 권한다.

한국곡의 경우 매우 개인적인 상황 하에서 뽑은 노래 목록이라 좀 갸우뚱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김창기는 동물원 당시의 노래들만 들은 사람들은 음악을 들어보기 전까지는 감이 잘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김창기 1집 앨범을 들어본 사람들은 극히 소수일 것입니다. (박준흠)



"마음의 상처가 깊은 자들을 위한"

1. 김창기 - 넌 아름다워
2. 김창기 - 저문 길을 걸으며/내 자신을 속이고
3. 김창기 - 하강의 미학
4. 동물원(김창기) - 나도 자유로웠으면 해
5. 김창기.이범용 - 날 기억하는지
6. 김창기.이범용 -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께
7. 김창기.이범용 - 너도 알게 될꺼야
8. 이소라 - Midnightblue
9. 주홍글씨OST(이은주) - Only When I Sleep
10. 한영애 - 불어오라 바람아
11. 윤상 - 가려진 시간 사이로
12. 듀스 - 상처
13. 김성재 - 말하자면
14. 이현우 - 마지막 대화(live)
15. 메아리(김창남) - 금관의 예수
16. 류금신 - 지금, 나 여기에서
17. 오래된 미래(한미희) - 언젠가는
18. 오래된 미래(최문정) - 고백
19. 손현숙 - 오월에서 푸른 시월까지


"life is very long when you are lonely"

1. Lim Giong - A Pure Person (Millenium Mambo)
2. Magnetic Fields - No One Will Ever Love You
3. Joan Osborne - One Of Us
4. Natalie Merchant - Carnival (Live)
5. George Harrison - My Sweet Lord
6. George Harrison - What Is Life
7. Jeff Buckley - Hallelujah
8. Jimi Hendrix - All Along The Watchtower
9. Neil Young - All Along The Watchtower (Live)
10. Bob Dylan 外 - My Back Page (Live)
11. T. Rex - Cosmic Dancer
12. Ten Years After - I'd Love To Change The World
13. Velvet Underground - What Goes On
14. Lou Reed - Romeo Had Juliette
15. Counting Crows - Mr. Jones
16. Puff Daddy & The Family - I'll Be Missing You
2005/09/12 10:29 2005/09/12 10:29
2005/09/11 08:28
한국에서 지역문제는 두 가지 차원으로 존재해왔다. 하나는 풍습이나 문화의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오늘 우리가 심각하게 말하는 지역문제는 물론 뒤의 것이다. 풍습이나 문화의 차원에서 지역문제는 전통시대부터 있어 왔다. 역사 속에서 그 흔적은 아주 오래 전부터 발견된다. 지역문제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으로 변한 건 박정희 파시즘 시절부터다. 텔레비전 정치비화 식으로 묘사한다면 “박정희가 라이벌인 김대중을 꺾기 위해 만들었다” 쯤 될 것이다. 김대중 씨의 첫 번째 대선 출마에서 경상도 표가 아주 많았다는 사실은 그 근거가 된다.

그러나 오늘 시점에서 냉정하게 정리해 본다면, 지역문제는 ‘지배세력의 분할지배 전략’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지역문제는 보수정치세력의 주류(박정희-경상도)가 기획하고 비주류(김대중-전라도)가 동의(혹은 결과적 동의)를 하면서 만들어졌다. 인민들이 제 고단한 삶의 원인을 지배세력에게서 찾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민들을 인종이나 종교, 지역 따위로 쪼개어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건 고전적인 지배수법의 하나다. 지역문제는 보수정치 세력끼리의 연대(혹은 결과적 연대)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수익은 시차를 두고 분배된 것이다.(김대중 씨는 지역문제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수정치 세력의 연대로 만들어진 지역문제를 다시 두 세력을 이어받은 오늘의 보수정치 세력(수구보수와 개혁보수)의 연대(혹은 戀情?)으로 해결하겠다는 건 몹시 맹랑한 발상이다. 터무니없는 이간질로 싸움을 붙여 감정의 골을 있는 대로 다 파놓은 놈들이 이제 와서 지들끼리 화해할 테니 다들 얼싸안고 춤을 추라는 꼴이랄까? 인민을 줄에 달린 인형으로, 장기판의 졸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오늘 지역문제 해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수십년 전 지역문제를 기획하던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이젠 인민들 역시 지역문제의 순전한 피해자는 아니다. 지역문제가 기획되고 진행되던 초기에는 어쩔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그 문제의 얼개가 적어도 텔레비전 정치비화 수준으로는 밝혀진 지 오래인 지금도 여전히 “전라도 놈들은 원래 나쁜 놈들” 따위의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지역문제의 피해자이긴 커녕 선봉대일 뿐이다. 그들의 뒤틀린 의식은 본디 지배세력에게서 주입된 것이었지만 지금은 냉정한 계산에 의해 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부산사람들이 정형근에게 몰표를 준 건 ‘전라도 놈들이 잡으면 우리는 망한다’라는 계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지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 첫째는 그 출발이 지배세력의 지배전략(보수정치 세력의 연대)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예나 지금이나 보수정치 일변도인 한국의 정치(독재와 민주에서 수구와 개혁으로 바뀌긴 했지만)를 바꾸어야 한다. 중간 이하 계급, 숫자로는 한국인의 대부분인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진보정치(민노당뿐 아니라, 민노당을 포함 아직 제도정치에 편입되지 않은 좀 더 급진적인 정치세력을 아우르는 말이다)가 수구와 개혁을 합한 보수정치와 대등한 긴장을 이룰 수 있을 때 지역문제도 비로소 근본적인 균열을 낼 수 있다.

둘째는 지역문제의 얼개가 드러난 후에 여전히 지속되는, 뒤틀린 이기심에서 나오는 지역적 적대 행위는 정당한 사회적 비판을 받아야 한다. 이를테면 정형근에게 몰표를 준 부산 사람들은 모든 한국 인민들 앞에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잘 몰라서 저지른 일이라 해도 이제 알게 되었다면 역시 반성해야 한다. 이를테면 수십년 전 군대 시절에 ‘깽깽이’(전라도 사람) 졸병을 괴롭혔던 사람은 한번이라도 진지한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은 진작 잊은 일이라 해도 당한 사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아무는 게 아니다. 지역문제는 그렇게 진보정치의 성장과 ‘전국민적 성찰’이 동시에 진행될 때 비로소 균열을 내고 해결될 수 있다..

덧붙이자면, 풍습이나 문화의 차원에서 지역문제는 세계 어디에나 있다. 우리 사회와 늘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는 유럽도 지역문제 없는 나라가 없다. 중요한 건 공정한 사회체제가 만들어내는 이성적 견제와 인민들의 성숙한 사회의식을 통해 지역문제를 풍습이나 문화적 차원으로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의 지역문제도 물론 바람직하고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해결해야할 사회 문제도 아니다. 이를테면 나는 경상도 남자들의 불퉁거리는 말투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걸 '사내답다'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걸 사회적으로 주장하거나 적대하지 않는 한 그건 그저 개인의 취향에 머문다.
2005/09/11 08:28 2005/09/11 08:28
2005/09/10 11:55
백은하 씨가 창비어린이에 쓴 고래 리뷰. 이따금 꺼내 읽으며 '아 고래가 그런 책이지' 한다. 정교한 글이다.



“아빠를 죽이고 싶어요.”고래가 그랬어라는 어린이 ‘교양만화지’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내 머릿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았던 것은 미안하게도 ‘교양’도 ‘만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금천구 독산동에 산다는 한 5학년 소년의 절규에 가까운 고백이었다. 네 답답한 고민이 뭐야?라는, 보통 잡지들에도 의례적으로 붙어 있는 ‘고민상담 Q&A’ 코너에서 그 소년은 “술만 취하고 나면 완전히 마친 괴물이 돼요. (…) 엄마랑 동생을 때리는 걸 볼 때는 아빠를 죽이고 싶어요”라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고래’는 “지금의 상황을 참고 견디는 게 최선은 아니”며 “폭력을 그냥 눈감아주어서는 안된다”고 설득했다. “병원에서 꼭 치료를 받아보시라고 아빠에게 말하라”고도 충고했다.(2004년 1월호 243-44면)

한편 일산에 사는 한 소녀는 “밤에 오줌 누러 갔다가 엄마와 아빠가 섹스하는 것을 봤다”는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고래’는 “정말 아끼고 사랑하면 안아보고도 싶고, 더 나아가 성관계를 갖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행위’를 넘어선 ‘몸으로 표현하는 신뢰와 배려’를 보라”고 충고했다.(같은 호 246-47면)

소년, 소녀의 ‘Q’와 ‘고래’의 ‘A’는 이 잡지에 실린 어떤 획기적이고 대범한 변화들보다 더 강력하게 잡지의 성격을 단박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20년전 읽던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잡지 말미에 실린 ‘짝이랑 싸웠어요. 어떻게하면 화해할 수 있을까요?나 ‘성적이 떨어져서 고민이에요’같은 지극히 학생다운 질문에 ‘먼저 손을 내밀어 보세요’나 ‘꿈을 잃지 마세요’같은 상식적인 대답을 예상했던, 서른 넘은 한 덜떨어진 독자를 잠시 멍하게 만들었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어린이들에 대한 삐뚤어진 자세를, 그들에게 던지는 시대착오적인 언어 습관을 ‘앉은뱅이도 일으키는 기적의 장풍요법’보다 훨씬 단시간에 교정시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소위 라이썬스(licence) 패션지도 2천5백원으로 가격조정을 감행하는 초저가 시대에, 영화잡지가 천원인 판국에, 이 9천원짜리 고가의 어린이잡지를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살펴보리라 마음먹은 것도, 그러니까, 그 이후의 일이다

이 잡지, 간도 크다. 잡지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부록이 아니던가. 그런데 고래가 그랬어는 ‘이효리 전신 브로마이드’나 ‘비 포토앨범’대신 ‘UN 어린이권리조약’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떡하니 ‘이 달의 부록’이라고 끼워준다. 하지만 효리의 가슴 싸이즈를 알고 있는 조숙한 소년들도 이 전세계적인 조약 31조에 “우리에겐 쉬고 놀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장마 끝에 한줄기 햇살 같은 말이 있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어느 달에는 부록으로 ‘어린 왕자의 지구여행’이라는 말놀이판이 끼워져 있었다. 오리기만 하면 만들 수 있는 종이 주사위도 함께였다. ‘술꾼의 별’과 ‘허풍쟁이의 별’을 돌아 장미에게 유리상자를 씌울까 말까를 고민해야 하는 이 소박한 종이놀이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면 호텔을 짓고, 별장을 소유하던 ‘블루마블’같은 흥미진진한 도박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어린 왕자 라는 책에 대한 호기심을 일게 해주기엔 충분했다.

또 어떤 달에는 딱지를 끼워주기도 했다. ‘충격완화요법 팁’까지 실린 이 빳빳한 고급 딱지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재미를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다소 심심할지는 모르지만, ‘일등맨’과 ‘딱지맨’이라는 깜찍한 캐릭터를 내세워 이 아날로그 놀이가 주는 신선함을 전달하고 있었다. 윷놀이를 그저 한국의 전통의 민속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요하던 것과 다르게, 고래가 그랬어는 아이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 건강한 놀이들을 권유한다. 이거, 좀 놀 줄 아는 잡지다

볼수록, 이 잡지 맹랑하다. 귀여운 분홍 곰돌이인형이 돌연 “너네들 모두 죽인다”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달려오질 않나(김재희 강철 소년 크람바), 어떤 만화는 ‘수학적 논리와 계산적 사고’로 살아가던 한 과외선생이 어떻게 공원 벤치에 벌렁 드러누운 ‘미친년’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강무선 수학의 가치와 그 효용성). 수학이라는 그 악마적인 힘을 가진 과목의 이면에 깔린 무시무시한 진실을 까발리면서 말이다. 또한 김동화나 황미나 풍의 팬시한 등장인물과 유려한 그림체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누가 봐도 ‘재수 없는’ 을식이나 용식이, 흥식이 같은 아이들은 “나란 몸, 공부를 잘 해, 그렇다고 얼굴이 잘 생겼어? 잘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야-개.인.기;”라며 개인기 연마에 며칠 밤을 끙끙댄다.(이경석 을식이는 재수 없어). 발가락으로 쓴 것 같은 삐뚤삐뚤한 글씨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앤서니’나 ‘테리우스’같은 이름 대신 ‘오줌보 여사’나 ‘대문짝 콧구멍’이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허접한 그림과 캐릭터 ‘진짜’들이다. 복제된 로봇도 아니고, 건전사회를 꿈꾸는 어른들의 복화술 인형도 아니다. 저마다 사연을 가진 진짜 ‘사람’들인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추한 모습이 많고, 행동은 예측불허다. 하긴 원래 사람이란 게 그렇지. 이거, 사람 좀 아는 잡지다

파고들면 이 잡지 정치적이다. 발행인 김규항의 ‘아웃사이더’적인 성향은 잡지 여기저기에서 드러난다. ‘어린애들을 좌경용공화한다’는 오해를 살 만하다. 아기공룡 둘리의 파란만장한 대모험이 아니라,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의 비극적 삶을 그리고 있는 태일이(박태옥 글, 최호철 그림)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고래가 그랬어는 타이거 우즈의 1년 광고모델료가 파키스탄 나이키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가 33만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임을 알려준다(2003년 11월호 95면). 죽은 산타클로스가 무덤 속에서 “내가 언제 몸에 해로운 콜라를 마시라고 그랬어” 하며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산타클로스의 붉은 옷과 흰 수염을 앞세운 코카콜라의 교묘한 마케팅을 고발한다(2003년 12월호 159면).

루이뷔똥 지우개를 쓰는 강남 어린이들과 침대 사이에 머리가 끼인 채 장기간 방치된 삼남매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세상의 아이러니를 간과하지 않는다. 장애인을 동정하는 ‘착한 마음’을 키우라고 가르치기보다는, 그들이 처한 불공평한 현실을 바로 보는 ‘시각’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얘기한다. ‘환경을 보호하자’는 구태의연한 구호 대신 어떻게 환경이 오염되어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어린이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서 이야기하는 것이 너희들의 권리’임을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런 이슈를 놓고, 진짜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우며 토론을 벌인다. “장애인을 도와주면 애들이 착한 척하는 거 재수없다고 해서 선뜻 도와주기 힘들다"는 한 아이의 고백에, 다른 아이가 “다들 이기적이어서 그렇다”며 마음의 장애를 앓고 있는 우리들을 돌아보게 하는 의젓한 말을 내뱉는다(2004년 1월호 134-141면). 이렇게 고래가 그랬어는 그 누구도 마치 열려주지 못했던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한편,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터득하게 만든다. 이거, 꽤 든든한 잡지다.

결국, 이 잡지 야심만만하다. 과거 많은 잡지들이 아이들의 기호를 좇다가 자멸해간 것과 달리, 이 독야청청한 ‘고래’는 결코 소년, 소녀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끈적한 설탕 냄새를 풍기며 어린 선원들을 유혹하지도 않는다. 그 콧대 높은 당당함은 ‘고래’를 잡아올리는 진짜 어부는 ‘아이’가 아니라 ‘진보적인 부모’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9천원이라는 상당히 높은 책값에서도 그 근거있는 당당함을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데, 그 방법을 나도 몰라 했던 부모들에게 고래가 그랬어는 어느날 동네 어귀에 생긴 ‘유기농슈퍼마켓과’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더 깊숙이 들어가면 ‘아빠를 죽이고 싶던’ 어두운 욕망을 봉인하고 살아야 했던 소년기와 ‘봉고차 아저씨가 내 혀를 막 물고 빨았던’ 폭행의 트 라우마를 숨겨야 했던 소녀기를 거쳐온 이 시대 부모들을 위한 한풀이이자, 포경선 위에서 벌어지는 속 시원한 ‘배연신굿’인 것이다.

결국 어른들은 지갑을 열어 기꺼이 9천원을 갈취당한다. 불량식품에 길들여 있던 식탁이 어느 순간, ‘오가닉(organic)’으로 바뀐다. 아이들은 쉽사히 눈치채지 못한다. 맛이 조금 다른 것도 같지만 만화라는 익숙한 그룻에 담겨 있기 때문에 투정 없이 받아먹는다. 그렇게 고래가 그랬어는 일단 ‘초강력 빔’으로 부모들을 현혹시키고, 그들에게서 반사된 순한 빛으로 아이들을 묶어두는, 결국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게 만들고야 마는 야심만만한 잡지다. 실천력에 충성도까지 갖춘 분명한 독자층을 염두에 둔 예리한 상술도 엿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밉지 않다. ‘동화’책의 환상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잡지, 세상의 진짜 얼굴을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잡지. 이 잡지 위험하다. 그래서 매혹적이다. 아니 그래서 반갑다.
2005/09/10 11:55 2005/09/10 11:55
2005/09/08 09:38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노신)
2005/09/08 09:38 2005/09/08 09:38
2005/09/0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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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추락한 가위손. 스피커 위에 올려놓았는데 좁은 발로 간신히 서 있는 상태라 조금만 건드리면 바닥으로 추락한다. 주로 김단과 김건이 찧고 까불다 그렇게 되는데 오늘은 창문으로 들이친 바람에 넘어지는 빈 생수병(!)에 치어 추락했다. 40센치미터가 넘는 키에다 기계장치까지 들어있는(누가 제 앞으로 지나가면 천천히 가위질을 한다) 피규어라 추락의 충격이 꽤 크다. 아무래도 발바닥을 스피커 위에 붙이든가, 좀 더 안전한 곳에 놓든가 해야겠다. 추락해야 할 놈들은 멀쩡한데 죄없는 가위손만..
2005/09/06 20:30 2005/09/06 20:30
2005/09/05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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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김기덕)과 함께 올해 본 가장 근사한 영화. 김건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다 얼굴을 가리고 제 엄마한테 안기기를 거듭했다. 녀석이 재즈에 뛸 줄이야. 하긴 Take the A Train을 듣고 맨송맨송하다면 그게 무슨 새나라의 어린이일까. 인상적인 캐릭터는 가짜 재즈전문가인 수학 교사. 갈수록 '제 결함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 좋아진다. 영화든 현실이든, 그런 '카리스마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평화와 따스함의 양은 막대하다.
2005/09/05 12:34 2005/09/05 12:34
2005/09/04 10:53
선생님, 세상 돌아가는 게 아무리 끔찍해도(선생님만큼은 아니라도 저 또한 느끼지만),
좀 더 밝아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선생님의 글이 갈수록 더 "불편"합니다.
선생님의 글이 더 많은 이에게 읽히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청년이 보낸 편지. “그러지요.^^” 답장했다.
2005/09/04 10:53 2005/09/04 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