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씨 좋은 화원 할머니가 외국에 있는 당신 손주들 생각난다며 김단과 김건에게 수련 화분을 하나씩 주었다. 거기에다 김건과 내가 동네논에서 잡아온 올챙이, 물방개, 우렁이 따위를 넣었다. 애나 어른이나 틈만 나면 쪼그리고 앉아 이 ‘작은 세상’을 들여다보는데, 한참 그러고 있으면 마음마저 평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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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8 12:15
![]() 마음씨 좋은 화원 할머니가 외국에 있는 당신 손주들 생각난다며 김단과 김건에게 수련 화분을 하나씩 주었다. 거기에다 김건과 내가 동네논에서 잡아온 올챙이, 물방개, 우렁이 따위를 넣었다. 애나 어른이나 틈만 나면 쪼그리고 앉아 이 ‘작은 세상’을 들여다보는데, 한참 그러고 있으면 마음마저 평안해진다. 2005/06/27 12:18
예비군을 넘어 민방위훈련 마친 지도 오래지만, 이따금 행군하는 병사들이라도 만날라치면 여전히 속이 울컥한다. 그들은 이른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든 청춘의 권리를 징발당한 채 꼬박 두해를 묶여 지내는데 그놈의 조국은 전혀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조국이 아니다. 청년들은 그런 어이없는 조국을 위해 두해를 보내다 어이없이 다치거나 죽곤 한다. 연천의 지피에서 다시 여덟 명의 청년들이 죽었다. 나도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보고 동료가 죽어나가는 걸 보기도 했지만, 이번 연천 사고는 그간 한국 군대에서 일어나 온 총기 사고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 든다. 사건에는 분노나 원한보다는 어떤 ‘정처 없는 담담함’이 짙게 흐른다. 이번 사건은 오히려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총기난사 사건과 닮았다. 아직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8명의 동료를 죽일 만한 이유’가 나올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결국 이 사건은 ‘극히 비정상적인 개인’의 문제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 돌아가는 정황도 그렇고 정부당국 입장에서도 그게 가장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극히 비정상적인 개인’이 원인이라 여겨지는 바로 그 이유에서 이 사건은 ‘극히 사회적’이다. 질문을 하나 해보자. 당신은 미국 고등학교의 총기 난사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사건의 원인이 바로 미국 사회에 있다고 믿고, 미국 사회가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얼마간은 예비 살인자다. 살면서 한 뻔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구를 느껴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실제로 살인하지 않는다. 그건 바로 사회가 그런 욕구를 억제하기 때문이다. 살 만한 사회일수록 정의와 평화가 존중되는 사회일수록 그런 억제력은 높다. 그러나 미국은 정반대의,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고 정의와 평화가 실종된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정신의 거처’를 찾지 못한 아이들이 쉽게 총을 구할 수 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은 오히려 적다. 연천 사건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은 어떤 사회인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반대하기는커녕 빌붙어 군대를 보내는, 그런 정책을 강행하는 정권이 민주화운동의 계승자이자 수구세력과 싸우는 개혁세력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는 어떤 가치인가? 민주화 이후 새로운 주인이 된 자본과 상업주의에 사로잡혀 돈이면 사랑이나 존경마저 살 수 있다고 여겨지는, 부모들이 제 아이를 오로지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미쳐 돌아가는, 애국심은 국가 대표 축구팀의 성적으로나 보충되는 사회에서 어린 청년들은 대체 무엇을 존경하고 대체 어디에서 품위 있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그렇게 정신의 거처를 잃어버린 청년들이 무기가 옥수수처럼 주렁주렁 매달인 공간에서 꼬박 두해를 보낼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어쨌거나, 사건은 마무리될 것이고 정부당국은 무기 관리를 철저히 한다느니 병영생활을 합리화한다느니 하는 그럴싸한 후속 대책들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분석과 대책들은 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문제는 무기 ‘관리’나 병영생활의 ‘합리화’가 아니라 무기와 병영생활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많은 관심을 갖지만 언제나 그렇듯 얼마 지나고 나면 다들 새로운 화젯거리로 몰려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사건이 군대 내 총기사건의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살 만한 사회로 변하지 않는다면 정의와 평화가 넘쳐흐르지 않는다면, 여전히 축구경기에서나 애국심을 보충해야하는 사회라면, 정신의 거처를 잃은 어느 청년은 다시 담담한 얼굴로 수류탄과 총을 집어들 것이다. 2005/06/26 11:30
내가“미국엔 안 간다”고 공언하곤 하는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미국대사관 앞에 줄서기 싫어서다. 뒤늦게 안치환 8집을 듣다보니 그런 가사가 나온다.
오늘도 미국 대사관 앞엔 그 담벼락 따라 줄 서는 사람들 비오나 눈이 오나 바람 부나 변함없이 줄 서는 사람들 다들 갈수록 온화해지는데, “안치환은 변했다”고 욕하던 사람들도 다들 온화해지는데 정작 안치환은 갈수록 격렬하다. 거꾸로 살줄 아는 그는 근사한 사람이다. 01 외침!! (Intro) 02 산맥과 파도 능선이 험할 수록 산맥은 아름답다 능선에 눈발 뿌려 얼어붙을 수록 산맥은 더욱 꼿꼿하게 아름답다 눈보라 치는 날들을 겨울꽃 터져오르는 밖으로 그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오른 저 산맥 저 산맥 모질고 험했던 당신 삶의 능선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산맥으로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으로 바꿨는가 예 거친 바위 만날 수록 파도는 아름답다 새찬 바람 등에 몰아칠 수록 파도는 더욱 힘차게 부서진다 파도치는 날들을 안개꽃 터져오르는 밖으로 그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오른 저 바다 저 바다 암초와 격랑이 많았던 당신 삶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파도로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으로 바꿨는가 예 산맥이여 파도여 우리들의 삶이여 산맥이여 파도여 우리들의 삶이여 산맥이여 파도여 우리들의 삶이여 산맥이여 파도여 우리들의 삶이여 03 해방구 멈춘듯 고요한 시간 앞에 무릎 꿇고 손모아 빌었다.제발 꿈이 아니길. 이글거리는 태양 너를 향해 소리친다. 깨어라.뛰어라.불꽃으로 타올라라. 이념을 넘어 지금 지긋지긋한 현실을 넘어 맘껏 뛰고 외쳐라. 여기 해방구에 날려버려.날려버려 억압을. 거칠것 없는 그대의 자유 그 영혼의 깃발을 들어라. 이글거리는 태양 너를 향해 소리 친다. 깨어라.뛰어라.불꽃으로 타올라라. 이념을 넘어 지금 지긋지긋한 현실을 넘어 맘껏 뛰고 외쳐라. 여기 해방구에 날려버려.날려버려.억압을. 거칠것 없는 그대의 자유 그 영혼의 깃발을 들어라. 세대를 넘어 두터운 마음의 담벼락 넘어 맘껏 뛰고 놀아라. 여기 해방구에 춤을 춰라. 하나되자. 사람아. 거칠것 없는 그대의 자유. 하나됨의 북소릴 울려라. 04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음음음 절로 웃음 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어떠리 무슨 꽃인들 어떠리 사람들 사이에 나비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을 추며 넋놀때 꿀을 빨 때 음음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어떠리 무슨 나빈들 어떠리 음음음 사람들 사이에 음음음 꽃이 핀다면 음음음 사람들 사이에 음음음 나비 난다면 05 물 속 반딧불이 정원 사람들 속에 있어도 돌아누워 홀로 수척해지는 가을산 처럼 가을산 처럼 정막함이 목구멍까지 밀려오는 적막함 당신도 따뜻했던 기억들을 꺼내들고 천천히 내일을 천천히 내일을 천천히 내일을 부르겠지요 무명실같은 달빛마져 떠나간 저문 강가에서 차르르 차르르 풀벌레로 불리나 당신생각에 더듬이가 부러져 그만 물속으로 들어가버린 내 마음이 빛이 닿은 물에 눈동자처럼 당신 속에 퍼질때 세상 사는듯 그리워지겠지요 당신이 조금만 조금만 더 무심했더라면 짖이겨진 날개를 들키지 않았을것을 서럽게 바닥이른 여린빛들이 모두 사라지면 당신 얼굴을 아주 잊게될까봐 온몸에 불을 달고 검푸른 물풀새를 물풀새를 떠돌며 물속 반딧불이 정원에 반딧불이 정원에 반딧불이 정원에 물속 반딧불이 정원에 살았습니다 06 개새끼들 절대로 선은 없어 절대 악도 없어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영원한 적은 없어 영원한 친구도 없어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넌 개새끼야 난 개새끼야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절대 가친 없어 절대 신념도 없어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영원한 사랑은 없어 영원한 증오도 없어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넌 개새끼야 난 개새끼야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넌 개새끼야 난 개새끼야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넌 개새끼야 난 개새끼야 니 밥그릇 앞에 내 밥그릇 앞에 개 밥그릇 앞에 개 밥그릇 앞에 07 부메랑 그대가 아무리 옳다 우겨도 세상의 진실은 빛나고 있어 더러운 펜으로 그대 배부른 자여 일그러진 너의 얼굴을 보라 그래 너희가 써갈기고 휘두른데로 갈 길을 빼앗긴채 끌려가줄까 끝없는 횡포에 내 온몸이 묶여 아무 말도 못하는 우리가 되어줄까 얼마나 더 빼앗아야 얼마나 더 가져야 너희가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탐욕으로 얼룩진 그 야합의 시간과 진실을 사살한 잔인한 숨소리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그대 가슴에 꽂히리라 (이 순간에도)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서글픈 그대의 최후를 보리라 얼마나 더 빼앗아야 얼마나 더 가져야 너희가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탐욕으로 얼룩진 그 야합의 시간과 진실을 사살한 잔인한 숨소리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그대 가슴에 꽂히리라 (이 순간에도)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서글픈 그대의 최후를 보리라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그대 가슴에 꽂히리라 (이 순간에도)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서글픈 그대의 최후를 보리라 08 피 묻은 운동화 그날,너흰 무슨 말을 하며 걸어갔을까. 봉숭아빛 두뺨을 햇살아래 반짝이고 어떤 꿈으로 하루가 설레었을까. 얼마나,무서웠니.겁에 질렸니. 탱크바퀴 밑에 뒹구는 피묻은 운동화. 너희가 신고갈 열다섯살 희망이었는데. 물방울 터지듯 웃던 고운 아이들아 어린새처럼 죽어갔니. 떠나라,이땅에서.(미친 탱크여 떠나라) 우리의 여린 희망.(미친 탱크여 떠나라) 짓이기지 말고 이땅에서 떠나라. 피를 부르는 오만한 양키들아. 얼마나,무서웠니.겁에 질렸니. 탱크바퀴 밑에 뒹구는 피묻은 운동화. 너희가 신고갈 열다섯살 희망이었는데. 물방울 터지듯 웃던 고운 아이들아 어린새처럼 죽어갔니. 떠나라,이땅에서.(미친 탱크여 떠나라) 우리의 여린 희망.(미친 탱크여 떠나라) 짓이기지 말고 이땅에서 떠나라. 피를 부르는 오만한 양키들아. 떠나라,이땅에서.(미친 탱크여 떠나라) 우리의 여린 희망.(미친 탱크여 떠나라) 짓이기지 말고 이땅에서 떠나라. 피를 부르는 오만한 양키들아. 떠나라 떠나라 미친 탱크여 떠나라. 09 America Hello Hello 악의 제국 America여 평화의 가면을 쓰고 미소짓지 마라 그 가면 속엔 더러운 전쟁에 굶주린 잔인한 악마의 피가 넘쳐 흐른다 너희들은 핵폭탄에 미사일에 온갖 무기 다가지고 팔아먹고 만만한 놈 "핵"자만 내밀어도 평화 위협 개소리들 지껄여댈때 Fucking America Dirty America여 Oh No America Hello Hello 악의 제국 America여 정의의 가면을 쓰고 미소짓지 마라 그 가면 속엔 무참하게 학살된 자유 또다른 정의의 피가 넘쳐 흐른다 마음에 들면 쿠테타 도와주고 꼭두각시 세워놓고 지켜주고 수 틀리면 언제든지 한순간에 쌍둥이 빌딩처럼 날려버릴 때 Fucking America Dirty America여 Oh No America Hello Hello 악의 제국 America여 자유의 가면을 쓰고 미소짓지 마라 그 가면 속엔 날카로운 이빨을 숨긴 미친 저 자본의 피가 넘쳐 흐른다 밖에서는 America 싫다는 놈 죄없는 놈 트집잡아 작살내고 안에서는 나 몰라라 춤을 추며 성조기여 영원하라 흥청거릴 때 또 남의 나라 한복판에 눌러앉아 통일조국 가로막고 제발 제발 물러가라 옮겨가라 아무리 외쳐봐도 소 닭 보듯 할 때 Fucking America Dirty America여 Oh No America Fucking America Dirty America rica Oh No America Fucking America Dirty America rica Oh No America 10 Stop The War 그대가 부르짖는 정의 그대의 가슴속엔 없다 침략이 정의인가 아하 멈춰라 전쟁을 Stop The War 그대 부르짖는 자유 그대 가슴속엔 없다 살인은 자유인가 아하 멈취라 학살을 Stop The War 그대 믿는다는 신은 그대의 가슴속엔 없다 내 아는 그대의 신은 아하 말한다 사랑을 Stop The War 신의 이름으로 Stop The War Stop The War 자유의 이름으로 Stop The War Stop The War 정의의 이름으로 Stop The War Stop The War 그대가 부르짖는 정읜 피뭍은 달라의 힘이다 달라는 끊임 없이 아하 부른다 수탈을 Stop The War 그대 부르짖는 자유는 힘없는 나라의 서러운 피다 그피로 배부른가 아하 살찐 USA Stop The War 진정 이 세상에 신이 신이 있다면 응답하소서 약자의 편에 서서 아하 응답하소서 Stop The War 신의 이름으로 Stop The War Stop The War 자유의 이름으로 Stop The War Stop The War 정의의 이름으로 Stop The War Stop The War 평화의 이름으로 Stop The War Stop The War 인간의 이름으로 Stop The War Stop The War Stop The War Stop The War Stop The War Stop The War Stop The War Stop The War 11 총알받이 자랑스런 대한민국 군인인 넌 떠나가네 저 먼 낯선 곳으로 누굴 위해 무얼 위해 가야하나 아버지가 베트남에 가셨던 것처럼 넌 떠나가네 제국의 총을 맞으러 뒤치닥거리 하러 예 조국을 위한단 건 모두 새빨간 거짓말 넌 그저 총알받일 뿐야 우리 아버지처럼 자랑스런 대한민국 군인인 넌 군인인 난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우린 미군의 총알받이 힘도 없고 빽도 없는 대한민국 군인인 넌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우린 미군의 총알받일 뿐 그래 우린 떠나가네 제국의 총알받이로 뒤치닥거리 하러 예 조국을 위한단 건 모두 새빨간 거짓말 넌 그저 총알받일 뿐야 우리 아버지처럼 자랑스런 대한민국 군인인 넌 군인인 난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우린 미군의 총알받이 힘도 없고 빽도 없는 대한민국 군인인 넌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우린 미군의 총알받일 뿐 나 난 난 미군의 총알받이 나 난 난 제국의 총알받이 자랑스런 대한민국 군인인 넌 군인인 난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나 난 난 미군의 총알받이 나 난 난 제국의 총알받이 힘도 없고 빽도 없는 대한민국 군인인 넌 그저 미군의 총알받이 총알받일 뿐 12 오늘도 미국 대사관 앞엔 오늘도 미국 대사관 앞엔 그 담벼락 따라 줄 서는 사람들 비오나 눈이 오나 바람부나 변함없이 줄 서는 사람들 난 미국이 싫소 난 그 미국이 싫소 우리 국민들 줄 세우는 그런 미국이 싫소 난 싫소 베트남 정부는 말했다오 당신들이 뭔데 우리를 줄 세우느냐고 며칠 후 그 줄은 없어지고 미국이 지은 대기실이 생겨났다오 난 베트남이 좋소 난 베트남이 좋소 미국 앞에 당당한 그런 정부가 좋소 난 부럽소 맹목적 환상을 쫓아서 미대사관 안에 들어간 사람들 양키 옆에 통역하는 한국 여자들 그 여자들 덕에 또 한번 화가날 거요 난 그 여자가 싫소 난 그 사람이 싫소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다운 난 그들이 싫소 난 증오하오 오늘도 미국 대사관 앞엔 그 담벼락 따라 줄 서는 사람들 비오나 눈이 오나 바람부나 변함없이 줄 서는 사람들 13 꼭두각시 그 무엇 때문인가 그 누구 때문인가 왜 서로를 미워하고 천시하고 무시하고 헐뜯고 그 언제부터인가 아무런 이유없이 할아버지 욕하시니 그 아들에 손주까지 따라시네 그대가 걸어온 두터운 마음의 선 그 선속에 그대의 삶도 갇혀버릴 때 누군가는 상처받고 절망하고 피눈물 흘리고 누군가는 뒤돌아서 비웃으며 더러운 배를 채우네 미친듯이 돌아간다 아주 가라 이 세상아 부끄럽고 천박하다 내 나라여 서글픈 내 나라여 에헤 야비한 권력자의 사치 여유는 요란하다 그대 이성은 마비되고 꼭두각시 춤을 추네 자처하네 나 잘되면 내 팔자요 잘못되면 남 탓하지 누워서 침뱉기야 눈가리고 아옹하는 탓탓탓 그대가 쌓아올린 견고한 벽 그 벽속에 그대의 삶도 갇혀버릴 때 누군가는 상처받고 절망하고 피눈물 흘리고 누군가는 뒤돌아서 비웃으며 더러운 배를 채우네 미친듯이 돌아간다 아주 가라 이 세상아 부끄럽고 천박하다 내 나라여 서글픈 내 나라여 에헤 그 무엇 때문인가 그 누구 때문인가 왜 서로를 미워하고 천시하고 무시하고 헐뜯고 나 잘되면 내 팔자요 잘못되면 남 탓하지 누워서 침뱉기야 눈가리고 아옹하는 탓탓탓 웃기는 탓 탓탓탓 너 잘난 탓 내 못난 탓 탓탓탓 탓탓탓 14 내버려둬! 내버려둬 있는 그대로 세월의 발걸음과 한번의 젊음 그 고행이 아니라도 내버려둬 있는 그대로 수억년 온세상이 만들어온 이 터전에 그 역사를 한줌의 흙 한모금의 물 한숨의 공기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모든 생명을 제발 내버려둬 그만 내버려둬 있는 그대로 내버려둬 제발 내버려둬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게 스스로 만들어가게 내버려둬 있는 그대로 수억년 온세상이 만들어온 이 터전에 그 역사를 한줌의 흙 한모금의 물 한숨의 공기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모든 생명을 제발 내버려둬 그만 내버려둬 있는 그대로 내버려둬 제발 내버려둬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둬 제발 내버려둬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게 스스로 만들어가게 15 연탄한장 삶이란 나 아닌 다른 이에게 기꺼이 연탄한장 되는 것 방구들 싸늘해지는 가을녘에서 이듬해 봄 눈 녹을 때까지 해야할 일이 그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히 남는게 두려워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장도 되려하지 못했나보다 하지만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길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아침에 나 아닌 다른 이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나는 만들고 싶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히 남는게 두려워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장도 되려하지 못했나보다 하지만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길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아침에 나 아닌 다른 이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나는 만들고 싶다 그 길을 나는 만들고 싶다 2005/06/17 14:03
영식이가 누님처럼 의지하며 지내던 무속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다들 영식이에게 장례에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젊은 무당이 갑작스레 죽었으니 꺼림칙해 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 만류의 말들이 너무나 강퍅했다. 특히 영식이 부부와 죽은 이가 단지 무당과 손님의 관계가 아니라는 걸 잘 아는 이들의 말에 지나침이 많았다. 오늘 한국이라는 나라의 인간관계란 그저 ‘상거래’에 가깝다는 걸 드러내는 말들이었다. 영식이는 몹시 상심했다. 그 꼴을 보는 나도 몹시 부아가 났다. “친구가 죽었는데 가야지. 설사 재수가 좀 없으면 또 어때. 형하고 같이 가자.”
영식이는 죽은 이에게 꽤 많은 돈을 받을 게 있었다. 유족들 가운데는 뚜렷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 없고, 그걸 둘러싸고도 말들이 오갔다. 나는 영식이에게 “돈은 없던 일로 하는 게 어떠냐” 충고하고 싶었지만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 영식이가 이미 유족들에게 “돈은 없는 걸로 하자”고 했다는 걸 알았다. 영식이는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제 사회의식을 고상하게 늘어놓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일로 나한테 도맡아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돈 문제엔 어떤 고상함도 없는 시절, 그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고상하다. 2005/06/14 10:20
나는 대부분의 교회를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 문제’에 대해 비교적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갱신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성실과 고뇌’에 대해 늘 마음의 빚이 있다. 뉴스앤조이는 그런 갱신운동의 주역 가운데 하나다. 뉴스앤조이의 의견들은 진보적 기독교인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이겠지만, 그 의견들이 보수적(이른바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 안에서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때론 매우 급진적인 의견’이 된다. 사회적 가치란 늘 상대적이다.
2005/06/07 15:32
중세 교회는 봉건 지배체제의 일부였습니다. 교회는 엄청난 땅을 소유했고 평민들에게서 세금을 걷고 사법권의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느님이 준 권력인 국왕과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 “현실은 죄로 물든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럴싸한 말이지만, 이 설교에 따르면 모든 현실적 욕망(부도덕한 탐욕뿐 아니라 인간 해방의 욕망 같은 정당한 것까지 포함한)은 사악하고 부질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봉건체제의 지배이데올로기였습니다. 성직자와 귀족을 제외한 전체 인구의 95%가 넘는 사람들이 그런 신앙의 사슬에 묶여 수입의 8할 이상을 귀족과 교회에 바치며 평생 죽도록 일만 했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욕망을 사악한 것이라 설교하는 교회는 현실적 욕망에 가장 충실했습니다. 토지와 돈에 대한 교회의 탐욕은 그야말로 끝이 없었고 평민들의 불만도 점점 높아갔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생기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사회는 성직자와 귀족이 제3신분인 평민들을 착취하는 사회였지만 평민들 가운데 일부가 새로운 중간계급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부르주아가 출현한 것입니다. 부르주아들은 한편으로 저술가, 의사, 교사, 변호사, 판사들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상인, 제조업자, 은행가들이었습니다. 부르주아는 무능한 귀족과 타락한 교회와 대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에서 자유방임, 사회적으론 ‘이성의 지배’를 표방하며 성장했고 자신들에게 마지막 남은 제약, ‘신분’을 해결합니다. 그게 바로 시민혁명입니다. 시민혁명은 프랑스 혁명, 영국혁명, 이렇게 일컬어지는 사건이지만 봉건사회가 부르주아에 의해 점령되는 수백 년에 걸친 과정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은 그런 과정의 제1막입니다. 흔히 종교개혁을 타락한 교회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보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부르주아가 봉건 지배체제로서 교회를 자신들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는 달라졌지만, 교회가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봉건시대의 교회는 부를 더러운 것이라 설교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라 설교했습니다. 칼빈은 최초의 기업정신을 만듭니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상인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막스 베버는 칼빈이 말한 근면과 성실, 그리고 금욕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돈을 축적하는 일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이 축복하는 선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맑스주의는 생산력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그에 조응하는 정신적인 가치들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어떻게 생겨났는가가 아니라 그 정신이 현재 우리에게 무엇인가, 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봉건사회에 대한 저항으로서 갖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의미보다는 그 정신을 담은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부의 축적은 칼빈이 말한 대로 여전히 근면과 성실, 그리고 금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물론 성공한 자본가들은 자신이 정당하게 부자가 되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그런 선전들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김우중 씨의 안경다리가 20년 된 것이라느니 정주영 씨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그들이 ‘안경다리’가 아닌 개인 용도에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쓰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근검절약은 그들의 호사 취미일 뿐입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의 부가 근검절약으로 축적된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모은 돈을 대학게 기부하는 김밥 할머니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부를 축적하는 원리는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잉여 노동입니다. 즉 노동자의 100원어치 노동을 60원에 사 40원을 먹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적 불평등에 참여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이른바 자선입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선 사업에 기부함으로써 사회적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선은 두 가지 문제를 갖습니다. 하나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불쌍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자선이 가난의 부당함과 가난을 만드는 사회적 모순을 은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노동이든 사람이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노동을 하면 먹고 살 수 있고 얼마간의 인간적인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불공정한 상태를 고쳐내야 합니다. 자선은 바로 그것을 값싼 눈물과 감동으로 차단합니다. 우리는 워낙 반공주의 경향이 강한 나라에서 살다보니 흔히 자본주의는 다 같은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은 우리보다는 나은데 유럽은 또 미국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유럽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회에 가깝습니다. 근래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에 열심히 따른다고 비난을 받는 영국만 보더라도 의료와 교육이 전액 무료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사회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북유럽 쪽의 사회복지는 서유럽보다 더 높은 수준입니다. 몇 해 전에 노키아의 부회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과속으로 걸려서 범칙금으로 1억 3천만원을 냈다는 이야기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작년 말엔 같은 핀란드의 27살짜리 부자가 자동차 과속으로 2억 5천만원을 냈습니다. 우리는 이건희가 과속을 하건 40대 무주택 가장인 김 아무개가 과속을 하건 똑같이 3만원을 내는 걸 공정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유럽에서 기독교는 뚜렷하게 쇠락하고 있습니다. 현대 신학의 중심지라는 독일의 교회는 노인들만 몇몇 앉아서 예배를 봅니다. 반면에 미국이나 한국처럼 자본주의적 모순이 좀 더 노골적인 나라에선 교회가 차고 넘치지요. 이것은 현재 기독교의 정신이 자본주의적 모순이 좀 더 노골적인 사회에 부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정신이 인류의 미래에 전혀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럽 사회의 사회복지는 본디 자본주의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 사회들은 러시아보다 더 먼저 사회주의 나라가 될 뻔 했고 그걸 막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타협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회주의는 유물론을 기초로 하고 유물론자들은 대개 하느님의 존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떠받드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정신도 종교개혁의 정신도 아닌 예수의 정신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건 기독교인에게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만 강조하여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삶의 방식을 외면하는 건 종교체제로서 기독교나 교회에 사로잡혀 예수를 다시 한번 팔아먹는 행위라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는 단지 어떻게 사는 게 사랍답게 사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인지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삶을 실천하고 전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기독교 정신의 가장 위대한 지점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심지어 기독교인이든 불교신자든 이슬람교도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사실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유대인의 신으로 여겨지던 하느님이 온 인류의 신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건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 정신은 어떤 형태의 차별이나 착취도 불가능하게 합니다. 사회주의가 분배의 공정함을 목표로 한다면 기독교 정신은 분배의 공정함을 이룬 다음에도 남는 ‘내 형제에 대한 염려’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남보다 더 좋은 것을 입고 먹는 일은 바로 헐벗고 가난한 내 형제에 대한 배신입니다. 8억이 넘는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그 가운데 3억이 어린 아이들입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지금 자기마치 3억 명의 제 새끼가 굶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은 어떤 맛있는 걸 먹을까 찾아다니고 돈을 들여가며 비만을 치료하고 지역마다 음식 쓰레기를 맡지 않겠다고 싸웁니다. 이역만리 어느 곳에 부당하게 고통 받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기독교인은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내 형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서 기독교가 사회주의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정한 분배체제를 만들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키워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교회는 그런 마음을 키우고 실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는 지난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예수의 정신이 너무나 현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엔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아동인권을 비롯한 인류가 현대에 들어서야 깨달은 여러 소중한 정신들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의 일행엔 언제나 여성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어떤 현인이나 종교 창시자도 여자를 일행에 포함시킨 일이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2천년 전에 여자들과 동행했고 여자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성매매 여성과 인격적으로 교우했습니다. 예수의 그런 행동이 사람들을 얼마나 당혹스럽게 만들었을지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기독교인은 과연 어떤 행동으로 사회에 당혹감과 충격을 주고 있습니까?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기심과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땀 흘려 같이 일하고도 남보다 수천 수만배의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이 찬미되는, 계급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착취가 공공연한, 사랑이나 존경까지도 돈으로 매매되는 자본주의는 기독교인에게 말 그대로 악마의 사회체제입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의 야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80년대 말 자본주의의 강력한 경쟁자이던 동구 사회주의들이 몰락하면서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금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빈부격차는 급속하게 벌어지고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선 공공연한 침략전쟁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이 가장 강한 교회가 바로 한국의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배경은 흔히 미국식 근본주의 기독교, 말하자면 지금 부시 일당이 믿는 그런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맞는 얘기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배경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다는 이른바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은 주로 박정희 개발 파시즘 기간 동안의 일입니다. 물론 그건 시간상의 우연한 일치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개발 독재의 가장 충직한 선전선동 장치였습니다. “믿으면 받는다” 라는 한국 교회의 설교는 “하면 된다” 라는 개발 독재의 구호와 일치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무조건적 반공주의는 민주주의적 의견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독재의 의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저항의식을 배설하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관제 행사가 아니라면 여럿이 모이는 일조차 불편하던 시절, 교회는 사람들이 마음껏 소리치고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파시즘이라는 사회적 억압에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전근대적 가부장제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교회는 그야말로 해방의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믿으면 남편도 자식도 잘된다는데 당시 여성들에게 그보다 더한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줌마’들은 교회 부흥의 돌격대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사’는 그렇게 씌어졌고 오늘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저급한 신앙관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파시즘이 물러나고 민주화와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파시즘이 있던 자리를 대신 자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의 지배는 파시즘의 지배처럼 폭력이나 억압을 통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본의 달콤한 욕망을 심어주어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어서 사람들이 돈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지요.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세상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부동산과 통장 잔고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지배자에게도 ‘준비된’ 선전선동 장치입니다. 제가 한국 교회를 욕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에는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는 세계 교회사에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소중한 실천들도 존재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초에 모든 사회운동의 중심에 진보적인 교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정신을 갖는 교회는 이제 거의 없습니다. 이젠 거의 모든 교회가 하느님 대신에 돈을 섬깁니다. 오늘 대개의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들일 뿐입니다. 그 살벌하던 파시즘 시절에도 살아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없습니다. 파시즘보다 ‘자본의 신’이 기독교인에게 더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예수가 살던 2천년 전 유대사회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별과 착취는 언뜻 알아보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고, 신문이나 방송 같은 주류 미디어와 여론을 가장한 온갖 이데올로기 공작, 특히 지배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네티즌의 활약은 그 복잡한 구조를 한 번 더 덮어 버립니다. 깊고 뜨거운 신앙심이나 영적 신령함이 그 구조를 자동으로 보여주진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들여다볼 수 없다면 예수의 삶을 실천할 방법도 없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에게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성경 공부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놈의 자본주의가 대체 사람들의 피를 어떻게 빨아먹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가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 예수가 당대 지배체제와 대결했다는 사실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 대결의 방식에서 나타나는 비폭력성만을 편의적으로 발췌하여 예수의 급진성을 모호하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다 돈을 섬기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돈 대신에 다른 걸 섬기는 교회도 있습니다. 바로 ‘내 마음’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의 목사님과 신도들은 다 온화하고 도사들 같습니다. 수염 이렇게 기르고 개량한복 입고 조용히 앉아서 “부시나 라덴이나 똑같다”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 흉내를 내지만, 그 폭력의 현실과 내 형제의 고통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예수를 팔아먹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단 한 번도 현실을 떠나거나 초월한 어떤 가치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가 이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늘 고민해야 합니다. (평신도 아카데미 강의) 2005/06/02 14:56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는 고래의 열혈 지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늘 고래에 글을 쓰고 싶어하면서 아직 시작은 못 했고 나 역시 채근하지 않고 그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 올 초 그가 나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해서 이 글을 읽고 여러 생각을 했다. '황우석 선수' 일로 요란한 요즘 읽어보면 약이 될 만한 글이다.
과학기술의 덫에 갇힌 언론 2005/06/01 16:10
2005/06/01 12:23
동무들은 성서를 아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갖고 다니는 두꺼운 책 말이야. ‘성경’이라고도 하고 ‘성서’라고도 하는데 여기선 성서라고 할게. 성서는 수천 년 동안 쓴 66권의 책을 모아놓은 책이야. 성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어. 앞부분을 구약이라고 하고 뒷부분을 신약이라고 해.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 사람은 예수야. 성서는 예수가 태어나기 전의 부분을 구약, 태어난 후의 부분을 신약이라고 해. 구약은 39권의 책이고 신약은 27권의 책으로 되어 있지.
물론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서는 언제나 하느님(‘하나님’이라고도 해)이 중심이야. 그런데 재미있는 건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면서도 많이 다르다는 거야. 구약의 하느님은 뭐랄까, 엄한 아버지 같은 하느님이야. 자기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고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지만 자기 말을 잘 안 듣거나 어기는 사람은 벌을 줘. 구약에는 나쁜 짓을 하고도 하느님한테 잘 해서 복을 받는 이야기도 많아. 신약의 하느님은 따뜻하고 이해심 많은 하느님, 엄마 같은 하느님이야. 예수는 하느님이 얼마든 기다리고 용서하는 분이라고 했어. 그리고 하느님에게 아무리 잘 해도 힘없고 가난한 이웃에게 잘 못하면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어. 도리어 힘없고 가난한 이웃에게 잘 하는 게 하느님에게 잘하는 것이라고 했어. 동무들도 알듯이 기독교(천주교, 개신교)는 예수 때문에 생긴 종교야. 구약만 인정하는 종교는 유대교가 있지. 그런데 교회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구약의 하느님처럼 엄한 아버지 하느님인 것 같아. 교회에 잘 나오면 구원을 받고 안 나오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든가. 하느님을 잘 믿으면 남보다 잘 살 수 있다고 한다든가. 엄마 하느님은 어디로 간 거지? (고래가그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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