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러운 세상 살아내느라 얼마나 고생들 하셨습니까.
새해엔 다들 나시길 빕니다.
(그림 이현주)
'2004/12'에 해당되는 글 22건
2004/12/31 23:25
2004/12/29 21:21
2004/12/27 08:33
성탄절에 부인과 놀러온 안상수 선생이 내놓은 아기자기한 선물 꾸러미에 들어있던 지허 스님의 차. 아침에 먹어보니 말로만 듣던 ‘숭늉 맛’이 난다. 지허 스님은 평생 동안 한국식 차를 가꿔왔고 차에 대한 고집도 센 분이다. 그만큼 그의 차는 귀하고 비싸다. 귀하면서 비싸지 않은 차가 있을까? 만일 그런 차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차일 것이다.
2004/12/27 07:51
일주일에 한번 동네친구들과 마가복음을 공부하기로 했다. 내가 새로 다듬은(을) 마가복음을 텍스트로 하되 강의가 아니라 토론식으로 할 생각이다. 나로선 예수전의 집필을 위한 마무리 작업이기도 하다. 나는 그 책이 ‘동네사람들’에게 읽히길 바란다. 부디 그렇게 되길.
2004/12/23 11:23
2004/12/22 13:16
읍사무소에 뭘 떼러 가서 운전면허증을 내밀면 거기 앉은 이가 꼭 한마디씩 한다. 내가 아직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다는 걸 두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말투는 상냥하지만 내용은 은근한 훈계다. 그러면 그저 좀 더 노골적인 훈계를 늘어놓지 않는 것이나 다행으로 여기며 잠자코 있다. 읍사무소의 말단 공무원과 지문날인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게 하찮은 일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는 사람’에 대한 측은함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그게 한국인의 특징이라고도 하지만 글쎄 다른 사람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는 피를 타고난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파시즘 치하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파시즘이란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다. 그러나 개인은 우리가 흔히 파시즘의 요소들이라 여기는 감시, 폭력, 고문, 계엄령 따위의 억압적인 방법만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수면 아래로 숨을 뿐이다. 개인을 없애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개인끼리 서로를 없애게 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들이 다른 개인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도록 길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파시즘의 집행자들의 숙제이며 그것만 되면 사천만이 아니라 사십억도 줄에 달린 인형처럼 쉽게 조종할 수 있다. 끔찍한 건 그렇게 길들여진 습성이 파시즘의 집행자들이 물러간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아 작동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촛불행진을 벌이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지문날인이라는 능욕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늘 공동체적 이상을 좇는다. 사회주의적인, 혹은 생태적인, 혹은 또 다른 고귀한 지향을 가진. 공동체적 이상은 인간이 갖는 가장 인간적인 전망이며 세상이 진보한다는 건 결국 공동체적 세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이상을 좇기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게 있다. 진정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개인이 되지 않고는 우리에게 공동체는 없다. 이런저런 집단만이 있을 뿐.
2004/12/21 11:01
머리통이 굵은 이후로 생일이 다가오면 그저 ‘다들 잊고 지나갔으면’ 하곤 했다. 내가 태어났다는 게 과연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일인지도 확실치 않은 데다 작든 크든 다른 사람에게 내 일로 마음을 쓰게 하는 게 불편해서다. 그러나 올 한 해는 워낙 여러 사람에게 내 일로 마음을 쓰게 해서 그런 불편함을 뛰어넘어(ㅎㅎ) 버렸다. 그들과 함께 내 생일에 작은 촛불 한 개 켠다.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는 건 도리어 욕이 될까 두렵기도 하거니와 ‘그들’이 내 사적 교우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어제 받은 참으로 예쁜 편지처럼.
안녕하세요? 고래를 창간호부터 정기구독해서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6살 난 아들내미를 위해 정기구독을 한다지만 사실은 저를 위해서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게 알찬지 신랑과 저는 늘 매달 초를 기다린답니다.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고래의 힘든 사정을 읽고 인터넷 서점을 통해 고래 20권을 사들여 크리스마스카드와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돌리고 있습니다. 받아본 사람들이 무척 기뻐해 제 마음이 더 즐겁습니다. 제가 고래를 선물로 준 사람 중 책이 마음에 들어 정기구독을 할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원해봅니다. 선생님, 한 해 동안 고래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탄절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래의 왕팬 이00 올림 2004/12/19 06:24
번역서들을 보면 원래 제목을 바꾸어서 늪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대개 책에 대한 감각이 없는 출판사 식구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늪이다) 때문이지만 원래 제목을 그대로 옮기면 참으로 졸렬한, 언어의 보편성을 거스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오리온자리에서 왼쪽으로 Turn left at Orion. 이렇게 어느 나라 말로 옮겨도 훌륭할 제목을 가진 책을 만나면 반갑다. 제목을 세번쯤 읽는 것만으로도 운치를 느끼는 이런 책은 십중팔구 제목만 훌륭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어젯밤, 우리는 댄의 집 앞뜰에서 내 친구의 삼십년 된 낡은 2.4인치 굴절 망원경(현재의 십대 소유주로부터 허락을 받고 빌려온 것이다.)으로 쌍성을 보았다. 이 책의 새로운 판에 포함시킨 천체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지 확인한다는 구실을 갖다 붙였지만 진짜 이유는 그냥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소형망원경 만세!" 2004/12/17 11:22
2004/12/16 11:11
"예수의 위대함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흔히 사랑이나 용서를 말하지만 사랑이나 용서를 말하지 않은 현인이나 성인은 없습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한 것을 말하지만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은 적지 않습니다. 비정규 노동자, 소수자 운동 하는 활동가들이 다 그런 분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위대함은 예수만의 위대함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예수의 삶이 보이는 독특한 지점,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는데 정치적 혁명가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예수의 위대함을 발견합니다. 근대 사회와 현실사회주의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혁명이라는 것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회의는 실은 ‘혁명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대한 회의’여야 합니다. 우리는 혁명이 아닌 것, 혹은 혁명의 일부에 불과한 것을 혁명이라 믿었고 그런 믿음에 대한 실망과 좌절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굴하게도 그걸 혁명 자체에 대한 회의로 돌려버립니다. 우리가 할 일은 혁명을 회의하는 게 아니라 그런 역사적 경험을 통해 얻은 반성과 통찰을 혁명에 부어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혁명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혁명에서 나타난 문제는 ‘시스템과 인간의 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을 변혁하자니 인간에 소홀해지고 인간을 챙기자니 시스템을 변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두 가지를 절충하거나 한쪽을 배제하면 죽도 밥도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결국 혁명의 숙제는 어떻게 하면 ‘시스템과 인간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혁명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문제에 결정적인 통찰을 줍니다. 2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한 초라한 사내가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삶을 위대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2004/12/15 01:11
지난 금요일 돌베개출판사와 책들을 계약했다. 야간비행이 아닌 다른 곳에서 책을 내기로는 했지만 ‘나 이제 다른 출판사에서도 책 내요!’라고 광고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획안을 챙겨들고 출판사를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적이 심란했는데 생각보다 순조롭게 일이 마무리되었다. ‘전태일 평전을 낸 출판사’이기도 하지만 편집부 식구들이 함께 작업하기에 편안한 사람들인 것 같아 다행스럽다. 그곳 편집장이 그랬다. “돌베개 출판사, 제가 참 좋아하는 출판사예요.” 지난 두해는 거의 ‘전직 필자’이다시피 지냈는데 내년은 (원고 량에서) 필자를 넘어 작가 수준으로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그 책들을 제대로 써낸다면 아마도 더 이상은 쓸 게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 적게 썼지만 나로선 이미 많이 썼다.
2004/12/14 05:31
내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백과사전이니 명작전집이니 하는 것들을 파는 책장수들이 버젓이 교실에 들어오곤 했다. 그들이 수업 시간에 교실에 들어오기 위해 교사와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도 한번은 그들의 ‘어린이 백과사전’을 산 적이 있다. 백과사전을 읽어 동서고금의 교양을 습득하겠다는 야심 때문이 아니라 그걸 사면 끼워준다는 물건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망원경(쌍안경)이었다. 가난했고, 어린 아들의 속셈을 모르기야 했겠냐만 내 부모는 선선히 허락했다. 내가 망원경이 필요했듯 그들은 그들의 아들에게 백과사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며칠 후 백과사전, 아니 망원경이 도착했다. 그날부터 망원경은 내 보물이 되었다. 이듬해 친척집 잔칫날 내 보물을 도둑맞을 때까지. 며칠 전 한 아마추어 천문인 사이트를 구경하다가 “처음엔 쌍안경으로 시작하라”고 적힌 걸 발견했다. 천문 관측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무턱대고 천체망원경부터 사야 한다고 생각하고 망원경 장수들은 그걸 노려서 모양만 그럴싸한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지는 물건을 ‘초보용 천체망원경’이라는 딱지를 붙여 팔기도 하지만 초보자는 7X50(배율 7배, 구경 50mm) 정도 쌍안경으로 별을 익히는 게 좋다는 이야기였다. 쌍안경으로도 별을 보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망원경은 나를 벅차게 한다. 내일은 망원경 구경을 가야겠다.
2004/12/13 04:10
고래가그랬어는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다들 좋아한다. 특히 아이들은 “중독성이 있다”는 평이 있을 만큼 하나같이 좋아한다. 처음 구상할 때부터 ‘어른들이 아이에게 좋다고 여기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었으니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고래에겐 고민이 있다. 여전히 고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아무래도 형편이 넉넉지 않다보니 제대로 된 홍보나 광고를 하지 못해서 그렇다. 다운 받아 구경들 하시고 주위의 좋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 주시길 부탁드린다.
고래가그랬어 01 고래가그랬어 02 고래가그랬어 03 고래가그랬어 04 고래가그랬어 05 고래가그랬어 06 고래가그랬어 07 고래가그랬어 08 고래가그랬어 09 고래가그랬어 10 고래가그랬어 11 고래가그랬어 12 고래가그랬어 13 고래가그랬어 14 2004/12/12 03:39
당연한 말이지만, “예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선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건 예수를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닌가와 무관하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떠받드는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선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고 나서 그리스도로서 예수가 있는 것이지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인지조차 모르면서 무작정 예수를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라 떠받는 건 우스꽝스런 일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가 없다면 ‘신의 아들’ 예수도 없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가장 유력한 자료는 역시 신약성서의 맨 앞에 실린 네 개의 복음서들(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그 가운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 셋을 ‘비슷한 관점’에서 씌어졌다고 해서 ‘공관(共觀)복음’이라 부른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더 종교적으로 채색된 것이다. 공관복음 가운데 가장 일찍 씌어진 건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은 70년경에 씌어졌다. 마태와 누가복음은 마가복음보다 늦게, 마가복음을 기본 자료로 씌어진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이 ‘공관’을 갖게 된 것도 마가복음이 먼저 씌어지고 나머지 둘이 그것을 기본 자료로 해서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같은 관점을 가진 복음서가 세 개나 존재하는 걸까? 그것은 복음서가 씌어진 목적 때문이다.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려는 것보다는 그것을 쓴 작가가 소속된 교회공동체의 ‘신앙 고백’의 차원에서 씌어졌다. 각각의 교회공동체들은 저마다 조금씩 처지와 사명이 달랐고 그에 걸맞게 신앙관도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같은 관점이지만 조금씩 다른’ 자신들의 복음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복음서의 그런 성격을 둘러싸고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논쟁이 있어왔다. 아예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생애’를 파악하려는 게 잘못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가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려고 씌어진 게 아니라고 해서 곧 그 내용이 전적으로 역사적 허구라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각 교회공동체의 신앙고백이며 그것은 무엇보다 예수의 생애를 근거로 한다. 복음서는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서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언하는 가장 진솔한 기록인 것이다. 복음서, 특히 공관복음서의 배경이나 맥락을 함께 읽는다면 우리는 2천 년 전 집도 절도 없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랑하다 초라하게 죽어간 한 사내의 모습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일자무오설’이니 ‘축자영감설’이니 해서 성서에 씌어진 한자 한자 그대로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니 사람이 그것을 분석하려 드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얼핏 경건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런 주장은 실은 ‘하느님의 영감’을 ‘인간의 영감’으로 재단하려는 태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한낱 사적인 대화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의 말과 그 말이 갖는 배경이나 맥락을 동시에 들으려 노력한다. 그런 노력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의식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성서처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가장 최근에 씌어진 부분이 2천여 년 전에 씌어진 텍스트를 ‘글자 그대로’만 읽는다는 건 그 안에 담긴 뜻을 읽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계속) 2004/12/11 12:11
![]() 작년에 개 농장하는 후배 친구에게서 어머니 집에 얻어다 준 진돗개가 일 년이 다 되도록 귀가 안서고 하는 짓도 진돗개치곤 영 구질구질해서 어머니 식구들과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저 때 되면 밥이나 얻어먹고 청소하자마자 똥을 싸서 야단을 맞는 게 그 집에 사는 인간들과 개의 모든 관계다. 녀석을 좋아하는 유일한 두 사람은 이따금 찾아오는 김단과 김건뿐이다. 세상에 개 싫어하는 아이야 없겠지만 둘은 참 유별나게 개를 좋아한다. 하여튼 근사한 진돗개라고 얻어다준 게 그 모양이라 다른 놈으로 다시 얻어다 주기로 했다. 어머니는 어디에서 봤는지 ‘썰매 끄는 큰 개’가 멋지더라고 했다. 이 집안엔 어른이고 애고 소형 애완견에 호감을 갖는 사람이 없다. 적어도 ‘진돗개 이상’은 되어야 비로소 개라고 생각한다. 내친 김에 어제 남양주에 가서 두 달 된 시베리안 허스키 수컷을 데리고 왔다. 차에서 토하고 설사까지 하느라 개나 나나 고역이었지만 아이들은 어제 이후 ‘조국 광복’이라도 맞은 분위기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저희들 개라는 걸 인정하는 뜻에서 이름을 붙이게 했다. 둘은 개에게 ‘강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너무 센 이름이라 복실이나 뭐 그런 건 어떠냐고 해봤으나 둘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강철은 근사해 보인다. 어깨나 다리 골격이 마치 사자나 호랑이 새끼처럼 듬직한데 두달 된 짐승이라 보기엔 하는짓에 무게가 있다. 사람에게 아양을 떨어 살도록 만들어진 개와는 다른 것 같다. 개를 키우는 일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뒤집어 말하면 이 집에서 개를 키우는 일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아내까지 각별한 호감을 표시하니 생각보다 오래 지낼 것도 같다. 2004/12/09 21:59
어머니 집 골목 어귀에 사는 도배장이 부부. 그저 몇 번 스쳐 지났을 뿐이지만 드물게 온후한 사람들이라 했다. 얼마 전 나와 두런두런 동네 이야기며 교회 이야기며 나누던 어머니가 그 부부 이야기를 꺼냈다. 볼 때마다 속상한데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아들이 자이툰 부대로 이라크에 갔단다. 부부는 늘 그늘이 드리운 얼굴에 시도 때도 없이 눈물바람을 한다고 했다. 가기 싫으면 안 갈 수도 있지 않으냐 아들에게 애원도 했지만 아들은 동료들을 봐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고 하더란다.
사막복을 입은 노무현 씨가 한 사병과 얼싸안고 있다. 파병 연장이 진행되고 이런저런 정세를 생각할 때 그런 ‘쇼’가 얼마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수작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사진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사병은 활짝 웃고 있다. 고단한 사람에겐 쇼도 위로가 되는 법이다. 도배장이 부부의 아들일지도 모를, 아니면 고작해야 다른 ‘도배장이 부부’의 아들일 그 청년에게 ‘대통령의 방문’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나라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러 가면서도 밤도망하듯 떠나야 했던, 더러운 나라 부끄러운 조국을 둔 죄 많은 청년에게 말이다. 2004/12/08 03:00
2004/12/06 10:12
![]() 정치의 면에서든 생태의 면에서든 인류의 미래가 '여성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건 최소한의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식이 되었다. 고래 14호부터 실리는 '고래소녀 만덕'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만화다. 에코페미니스트 김재희 씨가 쓰고 ‘색녀열전’의 장차현실 씨가 그린다. 신화와 자연사를 넘나드는 게 예사롭지 않은데, 나와 함께 사는 두 여성은 이미 뜨거운 지지를 보내는 중. 2004/12/04 10:07
2004/12/02 11:14
성서(성경)가 여러 가진데 뭘 읽으면 좋겠느냐, 묻는 이들이 있다. 개신교 쪽과 천주교 쪽을 합하면 한글 성서가 예닐곱 가지가 되니 고민스런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교회에서 흔히 쓰는 ‘개역 성경’은 워낙 말이 예스러워서 노인이 아니고선 좀처럼 읽히지가 않는다. 설사 읽히더라도 지금 여기와는 상관없는 옛 경전 같은 느낌이라 좋지 않다. 내 생각엔 천주교에서 나온 ‘200주년 성서’가 제일 낫다. 번역의 정확성을 비롯 여러 장점을 가지지만 더 중요한 장점이 있다. 200주년 성서에서 예수는 ‘반 말’을 하지 않는다. 2천 년 전 예수와 팔레스타인 인민들이 사용했던 아람어엔 존댓말 반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처럼 존댓말 반말이 엄격하고 또 섬세한 사회적 맥락을 갖는 사회에서 예수를 ‘아무한테나 무턱대고 반말을 하는 사내’로 그리는 건 대단한 왜곡이 된다. 예수는 ‘부활 사건’(에 대해선 다음에 언급하기로)을 통하여 신의 아들이 된 것이지 백인들의 성화에서처럼 늘 머리 뒤에 둥근 불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복음서를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의 삶을 내 삶에 반추하는 것,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유랑자였던 사나이의 삶을 지금 여기의 내 삶에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복음은 비로소 ‘복음’(기쁜 소식)이 된다. 유일하게 ‘반말하지 않는 예수’를 선택한 200주년 성서는 그 점에서 유일한 훌륭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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