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에 해당되는 글 28건
- 2004/07/31 승용차와 아파트를 버려라
- 2004/07/30 구기
- 2004/07/29 마지막 고개
- 2004/07/28 몸
- 2004/07/27 밤의 주둥아리들
- 2004/07/27 이빨 소식
- 2004/07/24 사인을 받다
- 2004/07/21 현모양초, 마술사
- 2004/07/21 송두율 선생 석방
- 2004/07/20 이메일 대화
- 2004/07/19 이 심정 누가 알랴
- 2004/07/18 영국에서 온 편지
- 2004/07/18 격렬의 이유
- 2004/07/17 술꾼
- 2004/07/13 손글씨 편지
- 2004/07/13 외부
- 2004/07/12 대한민국?
- 2004/07/11 성교육
- 2004/07/10 불속에 던져라
- 2004/07/10 토마스 베른하르트
2004/07/31 10:17
(작은책에 쓴 권쟁생 선생의 불편한 글.)
승용차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달아나야 한다. 30평짜리 아파트에서 달아나 이전에 우리가 버려두고 떠나왔던 시골로 다시 돌아가서 15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 가까운 데는 걸어다니고 먼 곳에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달에 백만 원 들던 생활비는 50만 원으로 줄어들 것이다.
텃밭을 가꾸고 묵혀 둔 논에 쌀농사 지어 자기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농사짓고. 그리고 남는 시간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뜨개질, 바느질 예쁘게 하면서 살면 된다. 그러면 실업자도 없어지고 거지도 없어진다. 한국사람 절반만이라도 이렇게 살면 자연 환경은 더 이상 파괴되지 않고 쓰레기도 사라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선일 같은 착한 젊은이가 억울하게 죽지 않아도 된다. 구태여 이라크에 파병을 해가면서 석유를 더 많이 얻어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패권주의 미국한테 발목 잡혀 계속 끌려가다 보면 통일도 점점 멀어지고 우리들 자유민주주의도 위태로워진다. 전쟁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고, 미국한테 엎드려 빌면서까지 미국 군대를 우리 땅에 붙잡아 둬야 할 것이다. 비싼 돈을 주고 무시무시한 전쟁 무기도 계속 사들여야 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작은 집에서도 네 식구 다섯 식구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승용차를 버리면 기름 걱정 안 해도 되고 일부러 걷기 운동 안 해도 자연히 걸어다니게 되고 살찔 걱정도 없다. 고기 안 먹어도 싱싱한 나물을 손수 가꾸어 먹으면 더 건강해진다. 아이들은 시냇물이 흐르고 솔숲이 우거진 작은 시골 학교에서 공부하면 된다. 거기서 중학교까지 공부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마을마다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스스로 공부하면 된다. 꼭 필요한 사람만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되 출세를 하기 위한 공부가 아닌 사람과 자연을 위한 인간교육이어야 한다. 과학도 철학도 정치도 모든 게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교육을 할 때 훌륭한 대학교육이 될 것이다. 시골 마당에 둘러앉아 밤마다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면 즐겁다. 가벼운 우스갯말도 하고 심각한 철학 이야기도 하고. 구태여 대학에 가서 고급 강의를 듣지 않아도 훌륭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지난 6월, 김선일 씨가 피살당한 소식을 듣고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이라크 파병 찬성이 늘고 복수를 해야 한다고 분노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파병 때문에 김선일 씨가 죽었으니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는 더욱 강하게 파병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김선일 씨의 죽음을 이라크 무장 집단이 저질렀고 그것을 미리 막지 못한 한국 정부 탓도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들의 풍요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죄 없는 김씨를 죽이게 한 것이다. 지금 내가 타고 가는 승용차 기름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평화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다. 풍요롭게 살면서 우리는 우리 주권도 못 가진, 강대국에 예속된 허울뿐인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통일도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이라크 테러 집단의 학살 방법은 너무나 잔인했다. 하지만 우리도 옛날을 돌이켜 보자. 칠팔십 년 전 고통받던 시절, 우리에게도 일본 침략자에 맞서서 싸운 테러리스트들이 있었다. 김구 선생이 아직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살던 열아홉 살 나이 때, 이 청년은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원수인 일본 군인 쯔찌다 중위를 죽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용케 사면되어 기적같이 살아났다. 김창수가 김구가 된 뒤에도 중국에 가서 한국독립당을 만들어 윤봉길, 이봉창 같은 애국 청년을 길러 내어 테러를 감행했다.
그 밖에도 안중근 의사는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이고, 흑도회의 박열은 천황 암살을 노리다가 들키고, 시인 이육사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다. 이 시대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내어 놓고 무장투쟁을 했다. 그 시대에선 이분들이 오늘의 알 카에다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고, 한국인과 다른 약소국 민중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다.
침략에 대한 저항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라크 무장 단체가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그이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강대국 미국처럼 핵무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뉴욕이나 워싱턴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기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이들은 말 그대로 맨주먹으로 미국과 맞서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김선일 씨의 죽음은 백번 말해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김선일 씨를 죽인 이라크 무장 단체에게 분노할 수만은 없다. 그이들은 우리 군대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미리 경고를 했다. 침략국인 미국을 도와 보내는 군대는 미국과 똑같이 그 사람들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선일 씨는 죽기 직전에 “노무현 대통령은 큰 실수를 하고 있다”고 절규했는데, 정말 우리 모두 큰 실수를 했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고 어떤 협박을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이 한반도에 핵 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내비췄다. 만약 우리가 이라크 파병을 거부하고 미국의 심사를 불쾌하게 해서 핵폭탄을 한 방 맞는다면 어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고 그 속에서 얼마만큼 살아남아 나라를 지속 유지해갈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전멸할지 아니면 반은 살아남아 고통 속에서나마 계속 나라를 지켜나갈지 상상조차 못한다. 옛날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과는 비교도 안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과연 무서운 나라다.
최민식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파이란>에서 이강재는 뒤늦게 찾아낸 파이란과의 가슴아픈 사랑을 깨닫고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이강재는 오랫동안 복종하며 기대 살았던 깡패 소굴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끝내 죽임을 당한다.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이다.
미국 역시 우리 한국을 꼼짝 못하게 목을 조르고 있다. 지난 시절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쪽을 전리품으로 얻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평등한 동맹국이라면 절대 이럴 수는 없다. 약소국의 슬픔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미국과 이런 기막힌 관계를 모르고 있다.
몇 해 전에 죽은 이곳 마을 박씨 노인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 남쪽에 남게 되었다. 박씨 노인이 스무 살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일으킨 집단 항의 사건으로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분산 수용하게 되었다. 미군 감시단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전향할 것인지 공산군으로 남을 것인지를 물었다. 스무 살짜리였던 박씨는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전쟁터에서 포로가 될 때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것이 살기 위해 두 손을 번쩍 드는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또다른 생사의 갈림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산군으로 남는가, 아니면 미군 쪽으로 전향을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지 그걸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을 옥죄었던 것이다. 박씨는 그때, 어쩐지 우람하게 생긴 미군 장교를 쳐다보자 살아남을 길이 훨씬 높아 보여 결국 미군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그때 선택이 박씨 노인을 영원히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실수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가난한 고학생 이수일을 버리고 부자 청년 김중배를 선택할 것인가.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더라도 패권주의 미국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를 얻는 길은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를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치루어야 할 과정이다. 통일만이 미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통일이 되고 난 다음에라야 우리는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서 미국과 동등한 동맹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가난한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승용차를 버리고 30평 아파트를 반으로 줄이는 길뿐이다. 그래야만 석유 전쟁에 파병을 안 해도 떳떳할 수 있다.
승용차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달아나야 한다. 30평짜리 아파트에서 달아나 이전에 우리가 버려두고 떠나왔던 시골로 다시 돌아가서 15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 가까운 데는 걸어다니고 먼 곳에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달에 백만 원 들던 생활비는 50만 원으로 줄어들 것이다.
텃밭을 가꾸고 묵혀 둔 논에 쌀농사 지어 자기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농사짓고. 그리고 남는 시간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뜨개질, 바느질 예쁘게 하면서 살면 된다. 그러면 실업자도 없어지고 거지도 없어진다. 한국사람 절반만이라도 이렇게 살면 자연 환경은 더 이상 파괴되지 않고 쓰레기도 사라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선일 같은 착한 젊은이가 억울하게 죽지 않아도 된다. 구태여 이라크에 파병을 해가면서 석유를 더 많이 얻어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패권주의 미국한테 발목 잡혀 계속 끌려가다 보면 통일도 점점 멀어지고 우리들 자유민주주의도 위태로워진다. 전쟁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고, 미국한테 엎드려 빌면서까지 미국 군대를 우리 땅에 붙잡아 둬야 할 것이다. 비싼 돈을 주고 무시무시한 전쟁 무기도 계속 사들여야 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작은 집에서도 네 식구 다섯 식구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승용차를 버리면 기름 걱정 안 해도 되고 일부러 걷기 운동 안 해도 자연히 걸어다니게 되고 살찔 걱정도 없다. 고기 안 먹어도 싱싱한 나물을 손수 가꾸어 먹으면 더 건강해진다. 아이들은 시냇물이 흐르고 솔숲이 우거진 작은 시골 학교에서 공부하면 된다. 거기서 중학교까지 공부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마을마다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스스로 공부하면 된다. 꼭 필요한 사람만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되 출세를 하기 위한 공부가 아닌 사람과 자연을 위한 인간교육이어야 한다. 과학도 철학도 정치도 모든 게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교육을 할 때 훌륭한 대학교육이 될 것이다. 시골 마당에 둘러앉아 밤마다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면 즐겁다. 가벼운 우스갯말도 하고 심각한 철학 이야기도 하고. 구태여 대학에 가서 고급 강의를 듣지 않아도 훌륭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지난 6월, 김선일 씨가 피살당한 소식을 듣고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이라크 파병 찬성이 늘고 복수를 해야 한다고 분노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파병 때문에 김선일 씨가 죽었으니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는 더욱 강하게 파병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김선일 씨의 죽음을 이라크 무장 집단이 저질렀고 그것을 미리 막지 못한 한국 정부 탓도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들의 풍요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죄 없는 김씨를 죽이게 한 것이다. 지금 내가 타고 가는 승용차 기름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평화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다. 풍요롭게 살면서 우리는 우리 주권도 못 가진, 강대국에 예속된 허울뿐인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통일도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이라크 테러 집단의 학살 방법은 너무나 잔인했다. 하지만 우리도 옛날을 돌이켜 보자. 칠팔십 년 전 고통받던 시절, 우리에게도 일본 침략자에 맞서서 싸운 테러리스트들이 있었다. 김구 선생이 아직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살던 열아홉 살 나이 때, 이 청년은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원수인 일본 군인 쯔찌다 중위를 죽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용케 사면되어 기적같이 살아났다. 김창수가 김구가 된 뒤에도 중국에 가서 한국독립당을 만들어 윤봉길, 이봉창 같은 애국 청년을 길러 내어 테러를 감행했다.
그 밖에도 안중근 의사는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이고, 흑도회의 박열은 천황 암살을 노리다가 들키고, 시인 이육사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다. 이 시대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내어 놓고 무장투쟁을 했다. 그 시대에선 이분들이 오늘의 알 카에다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고, 한국인과 다른 약소국 민중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다.
침략에 대한 저항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라크 무장 단체가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그이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강대국 미국처럼 핵무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뉴욕이나 워싱턴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기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이들은 말 그대로 맨주먹으로 미국과 맞서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김선일 씨의 죽음은 백번 말해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김선일 씨를 죽인 이라크 무장 단체에게 분노할 수만은 없다. 그이들은 우리 군대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미리 경고를 했다. 침략국인 미국을 도와 보내는 군대는 미국과 똑같이 그 사람들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선일 씨는 죽기 직전에 “노무현 대통령은 큰 실수를 하고 있다”고 절규했는데, 정말 우리 모두 큰 실수를 했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고 어떤 협박을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이 한반도에 핵 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내비췄다. 만약 우리가 이라크 파병을 거부하고 미국의 심사를 불쾌하게 해서 핵폭탄을 한 방 맞는다면 어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고 그 속에서 얼마만큼 살아남아 나라를 지속 유지해갈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전멸할지 아니면 반은 살아남아 고통 속에서나마 계속 나라를 지켜나갈지 상상조차 못한다. 옛날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과는 비교도 안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과연 무서운 나라다.
최민식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파이란>에서 이강재는 뒤늦게 찾아낸 파이란과의 가슴아픈 사랑을 깨닫고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이강재는 오랫동안 복종하며 기대 살았던 깡패 소굴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끝내 죽임을 당한다.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이다.
미국 역시 우리 한국을 꼼짝 못하게 목을 조르고 있다. 지난 시절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쪽을 전리품으로 얻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평등한 동맹국이라면 절대 이럴 수는 없다. 약소국의 슬픔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미국과 이런 기막힌 관계를 모르고 있다.
몇 해 전에 죽은 이곳 마을 박씨 노인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 남쪽에 남게 되었다. 박씨 노인이 스무 살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일으킨 집단 항의 사건으로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분산 수용하게 되었다. 미군 감시단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전향할 것인지 공산군으로 남을 것인지를 물었다. 스무 살짜리였던 박씨는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전쟁터에서 포로가 될 때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것이 살기 위해 두 손을 번쩍 드는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또다른 생사의 갈림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산군으로 남는가, 아니면 미군 쪽으로 전향을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지 그걸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을 옥죄었던 것이다. 박씨는 그때, 어쩐지 우람하게 생긴 미군 장교를 쳐다보자 살아남을 길이 훨씬 높아 보여 결국 미군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그때 선택이 박씨 노인을 영원히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실수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가난한 고학생 이수일을 버리고 부자 청년 김중배를 선택할 것인가.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더라도 패권주의 미국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를 얻는 길은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를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치루어야 할 과정이다. 통일만이 미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통일이 되고 난 다음에라야 우리는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서 미국과 동등한 동맹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가난한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승용차를 버리고 30평 아파트를 반으로 줄이는 길뿐이다. 그래야만 석유 전쟁에 파병을 안 해도 떳떳할 수 있다.
2004/07/30 11:47
구기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 소시 적부터 공을 갖고 여럿이 이런저런 룰을 정해 놓고 하는 구기운동은 어딘가 사기라는 생각을 해왔다. 운동이란 무엇보다 제 몸과 섬세하게 대화하는 일인데 그런 운동은 ‘재미’가 그걸 차단하며, 진정한 운동은 혼자 하는 것(달리기나 자전거)이거나, 한 명의 상대와 몸을 합하는 것(복싱이나 이런저런 무술들)이라 생각해왔다.
그런 내가 유니폼까지 갖춰 입고 축구선수로 뛴 적이 있다. 이등병 시절 단지 “잘 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체육대화에 뽑혀나간 것이다. 나는 ‘구기운동에 대한 견해’를 밝힐 군번이 아니었고, 그들은 '구기운동을 안 해본 20대 남성'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여튼 한대라도 덜 맞으려고 열심히는 뛰었는데 전반전 끝나고 고참들에게 변소 뒤로 끌려갔다. “왜 축구 잘 한다고 거짓말 했냐!”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지난 일요일에 난생 처음으로 족구를 했다. 최근 족구에 재미를 붙인 동네 친구들이 판을 벌여놓고 어찌나 성화인지 도리가 없었다. 결과는? 재미있었다. '구기운동에 대한 나의 견해'는? 모르겠다. 요즘은 이런 엉성한 타협이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준다. 사람이 되가는 걸까?
그런 내가 유니폼까지 갖춰 입고 축구선수로 뛴 적이 있다. 이등병 시절 단지 “잘 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체육대화에 뽑혀나간 것이다. 나는 ‘구기운동에 대한 견해’를 밝힐 군번이 아니었고, 그들은 '구기운동을 안 해본 20대 남성'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여튼 한대라도 덜 맞으려고 열심히는 뛰었는데 전반전 끝나고 고참들에게 변소 뒤로 끌려갔다. “왜 축구 잘 한다고 거짓말 했냐!”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지난 일요일에 난생 처음으로 족구를 했다. 최근 족구에 재미를 붙인 동네 친구들이 판을 벌여놓고 어찌나 성화인지 도리가 없었다. 결과는? 재미있었다. '구기운동에 대한 나의 견해'는? 모르겠다. 요즘은 이런 엉성한 타협이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준다. 사람이 되가는 걸까?
2004/07/29 15:02

방금 고래 11호 표지를 공장에 넘겼다. 고래는 물과 식량이 떨어진 채 타클라마칸을 넘는 탐험대처럼 최악의 상황과 싸우며 마지막 고개를 넘고 있다. 나는 이 순간 계속되는 동료들과 작가들, 그리고 제작진의 헌신과 우애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작은 역사를 만들고 있다.
2004/07/28 00:07

랜스 암스트롱이 뚜르 드 프랑스를 6연패했다. 그가 고환암을 이기고 2연패했을 때 "20세기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 했는데 4연패를 더 했다. 암스트롱의 몸은 몸이 자전거를 타는 건지 자전거가 몸을 타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치 효율적이다. 그는 뛰어난 심폐 지구력을 바탕으로 가벼운 기어비를 사용해 빠른 속도로 패달링한다. 알프스를 넘는 기나긴 업힐 구간에서도 내내 엉덩이를 뗀 채 기관차처럼 치고 올라간다.
2004/07/27 12:36
“자주 어울리는 분들이 누구십니까?” “동네 친구들입니다.” “동네 친구들요?” “예.” “어떤 분들인가요?” “그냥 동네사람들입니다. 회사원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그 아내들, 아이들 다 친구죠.” “뭘 하고 어울리십니까?” “모여서 놉니다. 산에 가서 자전거도 타고 술도 먹고. 며칠 전엔 난생 처음으로 족구도 했군요.” “글 쓰는 분이나 문화 쪽에 있는 분들과는 어떠십니까?” “안 어울립니다.” “단호하게 들리는데.” “글쓰기 시작할 무렵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안 어울립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불편합니다. 이를테면... 00만들기라고 아시죠.” “예, 술집.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죠.” “한다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죠. 거길 몇 번 가봤는데 참 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예...” “그렇게 매일 밤 모여서 자기들이 한국의 사회를 운영하는 양 떠들어대죠. 싸우면서도 엘리트의식은 공유합니다. 얼마나 괴상한 풍경입니까?” “그렇군요.” “삶을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도 있고 입으로 살아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동네 친구분들은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인가요?” “그 친구들도 결점이 있지만 적어도 입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은 아니죠.”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십니까?” “그냥 사는 이야기죠.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 장난도 치고.” “그런 분들과 어울리다 보면 뭐랄까 지적 갈증 같은 건 못 느끼시나요?” “글쎄요. 정말 지적인 건 예수처럼 가장 평범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일 겁니다.” “그분들이 김선생이 어떤 분인지 아나요?” “대충은 압니다. 감추려 했는데 그렇게 됐죠.” “불편해하진 않나요?” “그럴 건 없을 겁니다.” “그분들이 듣기에 어려운 말씀도 간혹 하시나요?” “안 합니다. 지난번에 무슨 신문엔가 실린 인터뷰를 읽으며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규항이 형은 우리하고 말할 땐 안 그런데 이런 데선 어려운 말 되게 많이 해.’” “재미있군요. 뭐라 하셨나요?" "그냥 웃고 말았죠." "그런 말들을 풀어서는 하시나요?” “글쎄요. 하여튼 무슨 이론이나 원칙 같은 걸 말하진 않습니다. 유일하게 하는 건 남자들이 제 아내에게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할 때죠.” “화를 내십니까?” “거의 죽는다고 봐야죠.” “그럼 고쳐집니까?” “조금씩 고쳐집니다.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그 외엔?” “딱 한번 지난번 선거 때 진보와 보수에 대해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긴 했죠.” “잘 알아듣던가요?” “그럼요. 밤의 주둥아리들보다 백배 낫죠.” “밤의 주둥아리들이 누구죠?” “네티즌들 말입니다.”
2004/07/27 11:15
역시 이빨과는 악연인가. 일주일이 더 지났지만 약을 거르면 여전히 아프고(어젯밤에도 자다 일어나 약을 먹었다.) 사랑니가 파고 먹은 앞 이빨은 신경치료 중이다. 나중에 금으로 씌운다는데 30만원을 준비하란다.
2004/07/24 18:06
2004/07/21 19:55
고래 일로 어떤 이(나보다 두어 살 많은 여성)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그가 그랬다.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적어내는데 여자 아이들 대부분이 현모양처였어요. 그걸 잊지 않는 게 한 아이가 ‘현모양초’라고 적었다고 선생님에게 맞았거든요. 저는 ‘마술사’라고 적었다고 맞았고요.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적어내는데 여자 아이들 대부분이 현모양처였어요. 그걸 잊지 않는 게 한 아이가 ‘현모양초’라고 적었다고 선생님에게 맞았거든요. 저는 ‘마술사’라고 적었다고 맞았고요.
2004/07/21 17:45
2004/07/20 20:03
도서출판 야간비행의 출간 기획은 전혀 없는지요?
고래 일에 밀려서 공세적이지 않을 뿐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군요. '출판인'이라는 게 김형의 아이덴티티 중의 하나이고 강화하면 좋은 것이기도 할 듯한데
내버려 두고 있는 건 아닌가 하여 물어봤습니다.
강화할 수 있길 늘 고대합니다.
고래 일에 밀려서 공세적이지 않을 뿐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군요. '출판인'이라는 게 김형의 아이덴티티 중의 하나이고 강화하면 좋은 것이기도 할 듯한데
내버려 두고 있는 건 아닌가 하여 물어봤습니다.
강화할 수 있길 늘 고대합니다.
2004/07/19 14:58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썩은 어금니를 빼러 부대 병원에 갔다. 그 시절 군인가족들은 그곳에서 공짜로 진료를 받곤 했다. 군의관이 마취주사를 놨지만 마취가 되지 않았다. 한대 더.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대 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뭔가 짜증스럽게 혼자 중얼거리던 군의관은 이빨을 빼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는 내 팔과 다리를 위생병들이 붙들고. 그날 다시는 치과엔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분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군의관의 엄포에 계급이 낮은 아버지가 가세한 건 더욱 비참했다.
3년 전, 오른쪽 사랑니가 반쯤 썩어 이따금 아프고 볼을 자꾸 갉았다. 많이 불편했지만 어릴 적 다짐 때문에 치과에 갈 생각은 안 했는데 어느 날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김단이 그랬다. “아빠 입에서 냄새 나.” 다행히 마취가 잘 되었다.(사실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데 병원을 나와 30분 쯤 지나자 아프기 시작했다. 나중엔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두 시간 쯤 지나 물고 있던 솜을 뺐는데 피가 계속 나왔다. 10분이면 큼지막한 피 덩어리를 뱉어내야 했다. 자정 무렵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속도로 피를 흘리면 아침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자고 있는 의사를 불러내 다시 마취주사를 놓고 꿰맸다.
오늘 아침 왼쪽 사랑니를 뺐다. 3년 전 의사가 앞의 이를 파고 든 왼쪽이 좀더 심각하다고 했었는데 아직 아프지도 않은 이빨을 한개 더 뽑기엔 상황이 좀 심란했다. 작년부터 그 이빨이 아프기 시작했고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며칠 전 제천 모임 날엔 이틀 동안 계속 아팠다. 잠 한숨 못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어릴 적 다짐이고 3년 전의 사고고 소용이 없었다. 뺀 지 다섯 시간이 더 지났는데 아프지도 않고 피도 안 난다.(사실 이 역시 당연한 것이지만) 남만큼만 되도 이렇게 기쁘다. 이 심정 누가 알랴.
3년 전, 오른쪽 사랑니가 반쯤 썩어 이따금 아프고 볼을 자꾸 갉았다. 많이 불편했지만 어릴 적 다짐 때문에 치과에 갈 생각은 안 했는데 어느 날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김단이 그랬다. “아빠 입에서 냄새 나.” 다행히 마취가 잘 되었다.(사실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데 병원을 나와 30분 쯤 지나자 아프기 시작했다. 나중엔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두 시간 쯤 지나 물고 있던 솜을 뺐는데 피가 계속 나왔다. 10분이면 큼지막한 피 덩어리를 뱉어내야 했다. 자정 무렵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속도로 피를 흘리면 아침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자고 있는 의사를 불러내 다시 마취주사를 놓고 꿰맸다.
오늘 아침 왼쪽 사랑니를 뺐다. 3년 전 의사가 앞의 이를 파고 든 왼쪽이 좀더 심각하다고 했었는데 아직 아프지도 않은 이빨을 한개 더 뽑기엔 상황이 좀 심란했다. 작년부터 그 이빨이 아프기 시작했고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며칠 전 제천 모임 날엔 이틀 동안 계속 아팠다. 잠 한숨 못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어릴 적 다짐이고 3년 전의 사고고 소용이 없었다. 뺀 지 다섯 시간이 더 지났는데 아프지도 않고 피도 안 난다.(사실 이 역시 당연한 것이지만) 남만큼만 되도 이렇게 기쁘다. 이 심정 누가 알랴.
2004/07/18 23:38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이고, 평론을 쓰며 한 때 대중음악 개혁운동에 열심이던 후배는 음악 공부를 마무리하겠다며 2년 전에 영국으로 갔다. 보름쯤 한국에 다니러 온 그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생각이 많이 변한 것 같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작은 전망이라도 주어서 보내야 할텐데. 며칠 전에 그가 보낸 편지.
드릴 말씀이 참 많습니다. 소위 선진국이자 록의 본고장이라는 런던에서 보고 느낀 것도 많고... 선배님 최근 글에 피곤함에 대한 이야기나 느낌이 많이 보이던데, 저도 요즘 마찬가지로 느낍니다.
일단 음악 이야기만 간단히 드리자면 진지한 록은 전세계적으로 이제 전멸이라는 것이 런던 연주 바닥에서 2년간 생활한 결론입니다. 핑크 플로이드며 레드 제플린의 영광은 다 죽어 이제 회생할 길이 없습니다. 런던 음악씬은 세계 최악의 싸구려 씬으로 변하고 있구요.
런던 음악판, 아니 전세계 음악판이 이렇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자본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지금 서구 음반 시장에는 음반사가 거대 메이저 다섯 개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색깔 있는 곳들은 전부 몰락하거나 흡수돼서 생명력을 잃거나 인디도 아닌 동네 레이블로 전락했지요.
결국 모든 것이 전부 단기적인 시장 전략으로 결정되고, 음악적인 고집이나 뭔가를 창조해 보겠다는 욕심은 메이저 씬에서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 결과 연주인들은 실력 불문하고 먹고 살기 위해 CF 음악이나(그것도 운이 아주 좋아야 합니다) 유람선 밴드로 취직하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의 절반 정도가 호화 유람선 밴드 취직이 ‘꿈’ 이라면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이 되시려나요.
암튼, 세상 돌아가는 걸 아무리 봐도 역시 답은 한 가지 방면으로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천박한 자본주의가 세상을 모든 면에서 망치고 있는데 도무지 그걸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인정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드릴 말씀이 참 많습니다. 소위 선진국이자 록의 본고장이라는 런던에서 보고 느낀 것도 많고... 선배님 최근 글에 피곤함에 대한 이야기나 느낌이 많이 보이던데, 저도 요즘 마찬가지로 느낍니다.
일단 음악 이야기만 간단히 드리자면 진지한 록은 전세계적으로 이제 전멸이라는 것이 런던 연주 바닥에서 2년간 생활한 결론입니다. 핑크 플로이드며 레드 제플린의 영광은 다 죽어 이제 회생할 길이 없습니다. 런던 음악씬은 세계 최악의 싸구려 씬으로 변하고 있구요.
런던 음악판, 아니 전세계 음악판이 이렇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자본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지금 서구 음반 시장에는 음반사가 거대 메이저 다섯 개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색깔 있는 곳들은 전부 몰락하거나 흡수돼서 생명력을 잃거나 인디도 아닌 동네 레이블로 전락했지요.
결국 모든 것이 전부 단기적인 시장 전략으로 결정되고, 음악적인 고집이나 뭔가를 창조해 보겠다는 욕심은 메이저 씬에서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 결과 연주인들은 실력 불문하고 먹고 살기 위해 CF 음악이나(그것도 운이 아주 좋아야 합니다) 유람선 밴드로 취직하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의 절반 정도가 호화 유람선 밴드 취직이 ‘꿈’ 이라면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이 되시려나요.
암튼, 세상 돌아가는 걸 아무리 봐도 역시 답은 한 가지 방면으로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천박한 자본주의가 세상을 모든 면에서 망치고 있는데 도무지 그걸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인정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2004/07/18 11:46
사람마다 유난히 격렬해지는 이유가 있다. 내 경우엔 진보 운동을 ‘갖고 노는’ 꼴을 봤을 때 그렇다. 박노해, 김지하, 이현주 들을 비판한 게 다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내가 좌파라서 내가 하는 운동을 훼방했대서가 아니다. 고작 그런 이유라면 나는 ‘아집에 빠진’ 사람이거나 ‘너무 심하게 말하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격렬해지는 건 진보운동이 ‘죄 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문제에 개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싸움이든 그 개입을 풍부하게 하는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노력이든 그 개입의 긴장감은 다를 수 없다. 그래서 그 긴장감이 있다면 거칠고 문제가 보여도 관대해지지만, 긴장감이 없다면 세련되고 근사해 보일수록 오히려 더 격렬해진다.
이진경 씨에 대한 단상을 적어놓고 속이 불편했다. 그를 앞서 열거한 인사들처럼 이미 맛이 갔다고 보지도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근래 그가 “다시 맑스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게 너무나 반갑다. 그런데 그가 구체적인 현실에 보이는 태도, 이를테면 노무현 정권에 보이는 ‘여유롭기 짝이 없는’ 태도는 참으로 걱정스럽다.
과연 그는 ‘개입의 긴장감’을 갖고 있는가? 나는 진심으로 그런 의문이 괜한 것으로 기억되길 빌지만, 피차 스무 해가 넘게 같은 진영에 속해 있는 처지에 ‘애정이 있기 때문에 비판한다’는 따위 낯간지러운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부러 격렬해지고 또 속 불편해한다.
내가 격렬해지는 건 진보운동이 ‘죄 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문제에 개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싸움이든 그 개입을 풍부하게 하는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노력이든 그 개입의 긴장감은 다를 수 없다. 그래서 그 긴장감이 있다면 거칠고 문제가 보여도 관대해지지만, 긴장감이 없다면 세련되고 근사해 보일수록 오히려 더 격렬해진다.
이진경 씨에 대한 단상을 적어놓고 속이 불편했다. 그를 앞서 열거한 인사들처럼 이미 맛이 갔다고 보지도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근래 그가 “다시 맑스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게 너무나 반갑다. 그런데 그가 구체적인 현실에 보이는 태도, 이를테면 노무현 정권에 보이는 ‘여유롭기 짝이 없는’ 태도는 참으로 걱정스럽다.
과연 그는 ‘개입의 긴장감’을 갖고 있는가? 나는 진심으로 그런 의문이 괜한 것으로 기억되길 빌지만, 피차 스무 해가 넘게 같은 진영에 속해 있는 처지에 ‘애정이 있기 때문에 비판한다’는 따위 낯간지러운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부러 격렬해지고 또 속 불편해한다.
2004/07/17 17:38
제천으로 옮겨 간 ‘술꾼’ 이은홍 형 집에 신혜원, 유승하, 강우근, 최호철, 조대연 들과 모였다. 치통 때문에 진통제를 먹어가며 술을 먹다보니 술과 술자리에 대한 ‘소격효과’가 유지되었다. 분명히 느낀 건, 술꾼이란, 술이 센가 안 센가, 심지어 술자리를 좋아하는가 아닌가와 상관없이, ‘술에 취한 상태’를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술꾼이 되긴 어려워 보인다.
2004/07/13 18:49

족히 15년 만에 손글씨 편지를 썼다.
컴퓨터로 편지글을 만든 다음, 화면을 베껴 적는 방식으로.
손가락이 많이 아팠다. 퇴화했다.
수신인은 권정생 선생님.
부칠지, 만나 뵐지, 만나 뵙고 편지를 전해 드릴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2004/07/13 13:49
제 아무리 난해해도, 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더라도, 지혜와 통찰을 제공한다면 그 이론의 가치는 인정할 수 있다. 그 지혜와 통찰을 다시 쉽게 풀려서 많은 사람이 공유하면 좋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난해한데 정작 그 이론이 주는 통찰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면 그 이론은 그저 딱한 것이다. 오래 전 이진경 씨가 ‘탈주’ ‘횡단’의 현실적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걸 보고 좀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있다. ‘아니 고작 그런 이야기를 저렇게 어렵게 한단 말인가!’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배운 사람들은 대개 책과 이론을 통해 진리에 접근한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진리에 접근하는 배운 사람들의 방법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책과 이론이 아니라 진실한 삶과 자기 성찰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본다. 많이 배우지 않았고 난해한 개념어 따위는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 현명한 사람들 말이다. 삶을 통한 방법 역시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진리에 접근하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다. 진리는 결국 삶을 위한 것이며 삶을 통한 방법이 삶과의 괴리도 적기 때문이다. 책과 이론을 통한 접근도 결국 삶에 천착하지 못하면 유희에 불과하다. 생각해보라. 오로지 책과 이론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가련한가.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면 당연히 깨우치는 일상의 깨달음마저도 책과 이론을 통해서만 깨우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생경하고 현학적인 이론을 들먹이지 않고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련한가.
덧붙이자면, 프랑스 철학자들 특유의 현학은 적어도 프랑스에선 별 문제가 없는 것이긴 하다. 프랑스 대중들 특유의 철학적 기반과 현학적 문화를 전제로 한.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한(않은) 사회에 그 현학이 직수입될 때 그것은 괜스레 어렵고 현학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촘스키 선생이 ‘그것들을 불속에 던져버려라’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 역시 프랑스 안에서라면 ‘쓸 만한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한국은, 알다시피 프랑스의 '외부’다.
덧붙이자면, 프랑스 철학자들 특유의 현학은 적어도 프랑스에선 별 문제가 없는 것이긴 하다. 프랑스 대중들 특유의 철학적 기반과 현학적 문화를 전제로 한.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한(않은) 사회에 그 현학이 직수입될 때 그것은 괜스레 어렵고 현학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촘스키 선생이 ‘그것들을 불속에 던져버려라’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 역시 프랑스 안에서라면 ‘쓸 만한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한국은, 알다시피 프랑스의 '외부’다.
2004/07/12 15:34
지성이란 국가를 개무시하고 인민을 떠받드는 정신이다. 남한에 사는 지식인이 남한을 남한으로, 나라의 절반으로 인식하는 것은 지성의 기초다. 분단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모든 문제들은 나라의 절반을 전체로 인식하는 것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남한을 대한민국이라 부르면서 “송두율씨를 풀어내라”, “비전향 장기수가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 주장하는 건 비굴하고 추레한 일이다. 우리에겐 아직 조국이 없다. 대한민국? 엿이나 드시라.
2004/07/11 11:58
낮에 김단, 김건과 케이블 채널에서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섹스신이 나왔다. 김단은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저럴 때가 아닌데...”(영화 속에서 형은 동생이 위기에 빠지는 것도 모르고 섹스한다.) 하고 김건은 아는지 모르는지 잠자코 보기만 한다.
나는 이런 문제에 특별한 입장을 가지고 있진 않다. '성교육'이라는 말은 그 일방적인 느낌과 그 속에 짙게 깔린 성차별적인 코드 때문에 되도록 쓰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래서 이집 식구들은 ‘김단의 초경이 언제쯤일까’ 하는 이야기를 첫눈이 언제 올까를 이야기하듯 하는 정도는 된다.
두 가지는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이들은 언제나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이든 어른이든 성문제는 개인적인 것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나는 이런 문제에 특별한 입장을 가지고 있진 않다. '성교육'이라는 말은 그 일방적인 느낌과 그 속에 짙게 깔린 성차별적인 코드 때문에 되도록 쓰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래서 이집 식구들은 ‘김단의 초경이 언제쯤일까’ 하는 이야기를 첫눈이 언제 올까를 이야기하듯 하는 정도는 된다.
두 가지는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이들은 언제나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이든 어른이든 성문제는 개인적인 것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2004/07/10 18:06
탈근대 철학이 문제인 건 오히려 맑스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 이론은 현실과 대중에 의해 끊임없이 검증받으며 제 오류와 한계를 수정해나간다. 그러나 탈근대철학은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언어의 범벅이라 현실에게서든 대중에게서든 검증받을 수 없는 속성을 가진다. 우리는 그렇다면 탈근대철학은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라는 자연스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맑스주의를 대중과 현실에서 끝없이 격리시키면서 가장 지적이고 세련된 맑스주의처럼 행세하는 이 물건은 말이다.
아래 글은 그 물건에 대한 촘스키 선생의 견해다. 그는 주눅 들것 없이 해명을 요구하거나 그 물건을 “불속에 던질” 것을 권한다.
Z에 기고한 촘스키의 글
여행을 가서 강연을 마치고 - 제 대부분의 생애를 이것으로 보내지요 - 돌아와보니 "이론"과 "철학" 에 대한 토론과 관련해서 계속 글들이 올라오고 있군요. 제가 보기에는 다소 기묘한 논쟁입니다만 말입니다. 여기 제 반응들을 몇가지 올립니다. 단, 미리 인정하겠지만, 솔직히 지금 무슨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이 논쟁은 처음에, 저와 마이크[Michael Albert; "Z"의 편집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에서 촉발되었지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이 점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고, 이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론"과 "철학"과 "이론적 구성물들"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마이크를 대변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까지 저의 응답은 제가 35년전, 그러니까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성계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오래 전부터 이미 활자화했던 주장들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만약에 시사 문제들을 다루거나 국내외의 분쟁들을 해결하는데에 적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시험을 거쳤으며 잘 검증된 이론이 있다면, 누군가가 그런 이론의 존재를 지금까지 비밀리에 잘 감춰왔음이 분명하다. [그런 이론이 있다는] 수많은 사이비 과학적 허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가 아는한 이 말은 35년전에도 맞는 말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더구나, 제가 한 말은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확장되며, 35년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온 "이론"들에 대해서도 물론 단 하나의 예외없이 적용됩니다. 제가 아는 한 그동안 바뀐 것이라면, 이른바 "이론"과 "철학"을 제안하는 사람들 사이에,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이비 과학적 허세"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지요. 제가 에전에도 썼지만,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는 것들중 가끔 꽤 흥미있는 것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도 제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있는 실제 세계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함축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가령, 예를 들어달라는 구체적인 요구와 관련해서 제가 언급한 것으로, 롤즈(Rawls)의 중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자기네들끼리에 대한 존경심의 폭발적인 증가라는 현상은 이미 주목받고 있습니다. 가령 상당히 괜찮은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 (그리고 또한 활동가이기도 하지요)인 앨런 그라우바드 (Alan Graubard)가 몇년전에 롤즈에 대한 로버트 노직 (Robert Nozick)의 "자유지상주의적"인 응답, 그리고 그 응답에 대한 반응들과 관련해서 흥미있는 논평을 썼었지요. 앨런은, 노직의 응답에 대한 반응들이 아주 열광적이었음을 지적했습니다. 논평을 썼던 사람들마다 노직의 논변들이 가지는 파워 및 그밖의 여러 점들을 극찬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실제 세계와 관련된 노직의 결론들중 그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중 이미 그런 결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외로 하고 말이지요). 앨런의 지적이 맞습니다. 더불어 이런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그의 논평도 맞구요.
"이론"과 "철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옹호하길 원한다면 아주 쉽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냥 저에게,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비밀"로 남아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면 됩니다. 기꺼이 공부하겠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알려달라고 여러번 요구했지요. 그리고 여전히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답변하기 어려운 요구가 아닙니다: 마이크, 저,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실, 편협하고 놀랍게도 자족적인 지식인 사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류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과 사안들에 "적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시험을 거쳤으며, 잘 검증된 이론"의 예를 보여주면 됩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문제들과 사안들, 또한 이들과 같은 종류의 문제들과 사안들에 대해서 말이지요. 조금 다르게 말해보면, 우리가 공부해야한다고 하고 또 적용해야 한다고 하는 "이론"이나 "철학"의 원리들이, 우리 및 다른 이들이 다른(또는 더 나은) 근거에 의해 이미 다다른 결론들을 타당한 논변을 통해 이끌어낸다는 점을 보여주십시오. 이 "다른 이들"에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이들 또한 "이론적" 모호함 같은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호 관계를 통해, 또는 곧잘 스스로들, 제가 말한 그런 결론들에 다다르니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은 간단한 요구입니다. 이런 요구를 전에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그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지요. 저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몇가지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요즘 진행되고 있는 (그리고 논쟁에서 언급된 바 있는) 이른바 "해체(deconstruction)"과 관련해서는 논평을 할 수가 없군요. 왜냐하면 그 대부분이 저에게는 횡설수설인것처럼 보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것이 심오함을 깨닫지 못하는 저의 능력부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라면, 다음으로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 결과들을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들로 다시 서술해주고, 이 결과들이, 세음절 이상 나가는 단어, 비정합적인 문장, (최소한 저에게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남발되는 수사, 이런 것들 없이도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결과들과 왜 다른지, 또는 왜 더 나은지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 능력부족이 치료가 되겠지요. - 물론, 치료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어쩌면 치료가 안될지도 모르지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이건 만족시키기 아주 간단한 요구입니다. 그렇게도 대단한 열정과 분노로 제기되는 주장들에 어떤 근거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대신, 답변들을 보면 잔뜩 화만 내고 있지요: 이런 요구를 제기하는 것은 "엘리트주의", "반지성주의", 또 그밖의 다른 범죄들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 반면에, 스스로에 대한 존경과 상호간의 존경이 가득한 지식인 사회에 머무르면서 자기네들끼리만 얘기하고 제가 있기를 더 선호하는 종류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라고 하는 듯 합니다. 제가 더 선호하는 세계에 대해서라면, 제 강연 및 집필일정만 봐도 제가 뭘 의미하는지 예시가 될 겁니다. 물론 이 토론 참가자들이야 다 알고 있거나, 쉽게 알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저는 그 세계에서 어떤 "이론가"들도 본적이 없으며, 그들이 하는 회의나 파티에 가본적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와 그들은 그냥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세계가 아닌 제 세계가 "엘리트주의"적 세계인지는 알기 힘듭니다. 더 이상 논평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것은 자명한듯이 보이지요.
또 다른 면을 덧붙이자면, 저에게는 강연 요청들이 너무나 많이 밀려들어와 도저히 제가 원하는만큼 다 수용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 경우 저는 다른 사람들을 제안하지요. 하지만 기묘하게도, 저는 "이론"이나 "철학"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절대 제안하지 않습니다. 대중 모임과 활동가들의 모임및 단체, 일반 단체, 대학, 교회, 노조, 등등, 또 국내외 청중들, 제3 세계 여성들, 난민들, 등등, 이들과 관련된 제 자신의 (상당히 광범위한) 경험에서, 그런 사람들과 (또는 그들의 이름조차도) 우연히 부딪히거나 한 적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궁금합니다.
그래서, 게시판의 이 모든 논쟁이 기묘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성난 비난과 탄핵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비난과 탄핵을 지지할만한 증거와 논변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대해 더한층 분노로 가득찬 비난으로 응답을 합니다. --- 하지만 놀랍게도, 어떤 증거나 논변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왜 그럴까를 물어보게 되지요.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합니다. 또는 어쩌면 과거 20년동안 [프랑스] 파리의 지식인들과 그 추종자들이 밝혀놓은 심오한 사실들을 이해할만한 지적 능력이 저에게 부족한 것이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런 가능성들에 대해 전적으로 열려있습니다. 비슷한 비난들이 쏟아진 수년간 계속 그래오고 있지요 - 하지만 제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변도 들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 질문들은 간단하고 답변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 답변이 있다면 말입니다: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면, 그게 뭔지 보여주십시오.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로 말이지요. 물론, 그것들이 완전히 제 이해를 벗어나 있는 것이라면 - 그럴 수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체념해야지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제가 이해할수 있는 것 같은 일들을 계속해야지요. 또한 이 일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으며 관심있어하는 것 같은 사람들과 계속 다녀야지요. (물론 저로서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자기 자족적인 지식인 문화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제가 뭘 놓치고 있는지 성공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남은 것은 두번째 가능성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가능성이 참일지도 모른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합니다만, 저로서는 계속 미심쩍어할수밖에 없군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지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 가령, 중성미자(neutrino)가 질량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최신 논쟁, 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최근에 어떤 식으로 증명되었는가에 대한 지식. 하지만 저는 이쪽 동네에 50년간을 있으면서 다음과 같은 두 사실을 배웠지요:
(1) 관련 분야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어려움없이 내 부탁을 들어줄수 있다.
(2) 내가 관심있으면, 좀 더 공부해서 이해할 수도 있다.
자, 이제 데리다(Deridda), 라캉(Lacan), 리오타르(Lyotard), 크리스테바(Kristeva), 등등 - 심지어 푸코(Foucault)도 말이지요. 비록 제가 그를 알고 있고 좋아했으며, 이 부류의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말입니다 - 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을 쓰지요. 하지만 [이들의 글과 관련해서는] (1)과 (2)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해했다고 하는 어떠한 사람도 저한테 그걸 설명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실 그런 저의 이해불능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조금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습니다.그렇다면, 다음의 두가지 가능성중 하나가 맞겠지요. (a) 지성계에 무엇인가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졌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갑작스러운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서이겠지요). 그 결과 그 깊이와 심오함에 있어서 양자역학, 위상수학, 등등을 뛰어넘는 형태의 "이론"이 탄생되었다. 또는 (b) . . .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 지식인 세계라는 데에서 50여년간을 살아왔고, "철학"과 "과학"이라고 불리우는 영역들 및 지성사 분야에서 제 자신의 일을 상당량 해 왔습니다. 아울러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예술 분야에서의 지식인 문화에 대해 상당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이런 경험을 통해, 저는 지식인들의 생활에 대한 제 자신의 결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여러분들보고 "이론"과 "철학"의 경이로움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해줄 것을 요구하십시오. 물리학, 수학, 생물학, 언어학, 그 밖의 다른 분야들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군가가 그들보고 진지하게 그들 이론의 원리들이 무엇이고, 그 원리들이 어떠한 증거들에 바탕해있고, 그것들이 설명하는 것들이 이미 명백한 것들이 아닌지 등등을 물어볼 때 기꺼이 답해주겠지요. 이건 누구나 해야하는 공평한 요구들입니다. 이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그렇다면 저는 비슷한 상황에서 흄(Hume)이 제시한 충고를 받아들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그 "이론"과 "철학"을 불속에 던져버리십시오.
이제 몇가지 세부적인 논평을 하겠습니다: 제가 "파리 학파들"(Paris Schools)과 "포스트모더니스트 종파들"(Postmodernist cults)을 말할 때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건지 페틀랜드(Phetland)가 물어보았지요. 위에 든 사람들이 그 일례들입니다.
그 다음에 페틀랜드가, 당연하게도, 왜 제가 이들을 "무시"하느냐고 물어보았지요. 가령 데리다를 들어볼까요. 우선, 저는 이제부터 제가 하려는 것과 같은 종류의 논평을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하지만 여기 이 게시판에 참가한 사람들이, 가령, 소쉬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원하는지 의심스럽군요. 그리고 어쨌든 저는 그런 분석을 하지 않을 겁니다. 페틀랜드가 제 견해를 명시적으로 물어보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할 얘기를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제 견해를 뒷받침하라고 요구받는다면 저는, 그런 일은 시간들여서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어쨌든 데리다를 보겠습니다. 나이많은 저명한 사람들 중 하나이지요. 저는 최소한 그의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지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제가 매우 잘 알고 에전에 거기에 관해서 논문도 쓴 적이 있는 고전적 문헌들에 관한 비판적 분석같은 것 말이지요. 우스꽝스런 오독에 근거한, 형편없는 스칼라쉽이었습니다. 아울러 그 논변이라는 것이, 제가 사실상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익숙해왔던 정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글쎄, 아마 제가 뭘 놓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의심은 여전히 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대지 않은 논평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견해를 물어봤으니, 답변을 하는 겁니다.
이 종파들 (제가 보기에는 종파들처럼 보입니다)에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저도 만나보았습니다: 푸코 (우리는 심지어 몇시간씩 토론도 했지요. 활자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동안 매우 즐거운 대화를 했지요. 실질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 그는 불어로, 저는 영어로). 라캉 (여러번을 만났고, 재미있는, 그리고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기꾼 (charlata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종파를 형성하기 이전인 그의 초기 연구는 사리에 맞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제 논의도 활자화되어있지만 말입니다). 크리스테바 (그녀가 열광적인 마오주의자였을 때 잠깐 만난적이 있지요).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요. 저는 제 선택에 의해 이들 써클을 멀리 했고, 전혀 다르면서 훨씬 광범위한 써클들을 더 선호했으니까요 - 제가 강연하고, 인터뷰하고, 운동에 참여하고, 매주 몇십장씩 긴 편지들을 쓰고 하는 써클들 말입니다. 저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의 저술에 손을 댔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진도를 많이 나가지는 못했지요: 제가 본 것은, [이들이] 극단적으로 허세를 부리면서도, 검토해보면 그 허세중 대부분은 단순히 그 분야에 대해 기본 소양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때로는 제가 논문을 쓴 적도 있는) 문헌들에 대한 엄청난 오독, 기본적인 자기-비판도 수시로 무시한다는 점에서 지독하게도 형편없는 논변, (복잡다단한 말들로 치장되어있지만) 사소하거나 거짓인 많은 진술들, 이런 것들에 근거한 허세이지요. 더불어 상당부분은 그냥 횡설수설(gibberish)입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분야들에서 중간에 막힐 경우에는, 저는 위에서 말한 (1)과 (2)에 관련된 문제들과 부딪히지요. 어쨌든 위에서 말한 사람들이 제가 애초에 염두에 둔 사람들이고, 또 제가 왜 진도를 많이 나가지 못했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혹시 불분명하다면 더 많은 이름들을 나열할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하지만 내부인으로서의) 관찰에 대한 문학적 묘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데이비드 롯지 (David Lodge)의 소설들을 권하겠습니다. 제가 판단할 수 있는 하에서는, 정곡을 찌른 것 같습니다.
페틀랜드는 또한, 제가 "뉴욕 타임즈의 허세와 혹세무민을 드러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들 지식인 써클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무시"하는 것이 "매우 당혹스럽게" 여겨진다고 썼습니다. "왜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것이지요?" - 정당한 질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간단한 답변이 있지요. 제가 논의하는 (뉴욕 타임즈, 여러 저널들, 많은 학술책들) 텍스트들은 이해가능한 글들로 씌어져있고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사회같이 성공적으로 교설적인 (doctrinal) 사회에서, 생각과 표현을 담는 교설의 틀 (doctrinal framework)을 제공하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세계 전역에 걸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지요. 저는 이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지, 롯지가 (제 생각에는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일반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들에 관심이 있다면, 제가 논의하는 텍스트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지요. 페틀랜드가 언급한 글들은, 제가 판단하는 한, 전혀 그런 성격의 글들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 글들은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 글들은 단지 같은 써클들 내에 있는 다른 지식인들에게만 읽혀지니까요. 더구나, 이들 글들을 일반 대중들 (가령, 제가 강연을 하거나, 만나거나, 편지를 쓰거나, 또는 제가 글을 쓸때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별다른 특별한 어려움 없이 제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일반적으로 볼 때 이들 역시 제가 포스트모던 종파들에 맞닥뜨렸을때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지적 장애를 그 종파들에 대해 가지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에게 이해시켜보려는 시도가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저는 그런 글들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적용해보려는 시도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의미에서, 이미 명백한 것이 아닌 뭔가 새로운 결론들을 뒷받침해주는 역할로서의 적용을 해보려는 시도 말이지요. 저는 지식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명성을 부풀리고, 특권과 존경을 얻고, 일반일들의 투쟁에 동참하는 것을 점점 멀리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지요.
페틀랜드는 푸코에서부터 시작해 볼 것을 제안하는군요. 반복하지만, 푸코는 다른 이들과 두가지 이유에서 조금 틀리지요: [첫번쩨로] 최소한 푸코가 쓴 글들중 몇몇은, 비록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습니다만, 저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푸코는 개인적으로 [대중들의 투쟁에]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고, 같은 부류의 특권 엘리트 써클들안의 다른 이들과만 상호 교류하지도 않았지요. 이어서 페틀랜드는 정확히 제가 요구했던 것을 답하려고 합니다: 페틀랜드는 왜 자신이 푸코의 저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쓰고 있지요. 이것이 토론을 하는 제대로 된 방식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여기에 대한 제 답변을 통해 왜 제가 이런 부류의 저술들에 대해 그렇게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 사실,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페틀랜드가 서술하고 있는 푸코의 "이론" - 올바른 서술이라고 확신하건데 - 은 제가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론"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알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 사회사 및 지성사와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사실 이 세부사항들에 대해서도, 저라면 상당히 주의하겠습니다: 이 영역들 중 몇몇은 제 자신이 우연히도 꽤 광범위하게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역들과 관련해서는 푸코의 스칼라쉽이 별로 신뢰할만한게 못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 결과 제가 모르는 영역들에 대해서도, 별다른 조사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의 작업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1972년 이래로 활자화된 논의들을 보면, 이런 문제점들이 조금씩 불거지기 시작하지요. 17세기와 18세기에 관련해서 [푸코보다] 훨씬 더 나은 스칼라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들과, 제 자신의 조사결과를 참고하지요. 하지만 다른 역사 관련 저술들은 제쳐놓고, "이론적 구성물들"과 설명들로 넘어가봅시다: "가혹한 억압 메커니즘으로부터, 사람들이 권력이 원하는 것들을 (심지어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보다 교묘한 형태의 메커니즘으로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설명은 진실입니다. 사실, 당연한 말이지요. 만약 이런 게 "이론"이라면, 저에 대한 모든 비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런 "이론"은 있으니까요. 저는 정확하게 푸코가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점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유와 역사적 배경도 제시했지요. 하지만 저는 제 견해를 "이론"이라고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론"이라는 용어를 붙일만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헷갈리게 만드는 수사도 쓰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제 주장은 아주 단순한 것이니까요). 아울러 제 견해가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지요 (왜냐하면 당연한 사실이니까요). 통제와 억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쇠락해감에 따라 20세기초 PR 산업 종사자들이 "대중들의 마음을 조종하기"라고 부른 것들에 점점 의존해야 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은 오랫동안 인지되어온 사실입니다. 18세기에 흄이 말했듯이,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통치자들의 느낌과 욕구에 굴복하여 암묵적으로 맡겨버리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통치자들이 사람들의 견해와 태도를 조종하는데에 근거해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이론"이나 "철학"이 되어야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설명해주어야지요. 흄이라면 웃었을 겁니다.
푸코의 특정한 예들 중 몇몇 (가령 18세기의 형벌 방식)은 흥미있어 보이고, 그 정확성에 대해 조사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단순히, 남들이 별다르게 심오한 것이 있다는 허세없이도 간단하게 지적해놓은 것을 엄청나게 복잡하게 만들고 부풀려서 다시 진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페틀랜드가 서술한 것 중 그 어느 것도 제가 35년간 써왔고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보여왔던 것들 - 이것들 모두가 명백하고 당연한 사실들이지요 -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소한 사실들에서 흥미있는 것은 어떤 원리가 아니라 - 그 원리가 무엇인지는 명백하지요 - 어떻게 이 원리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들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가 하는 점을 보이는 것입니다: 국가개입, 칩략, 착취, 테러, "자유시장"이라는 사기, 등등에서 말입니다. 이것들과 관련된 작업은 푸코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을 쓸 수 있고 지성계에서 "이론가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의 많은 저술들에서는 그런 작업을 찾아볼 수 있지요.
제 논지를 분명히 하겠습니다. 페틀랜드는 정확히 옳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푸코가 발견한 "중요한 통찰들과 이론적인 구성물들"을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제 문제는, 그 소위 "통찰들"이라는 것이 이미 익숙한 것들이며, 더구나, 단순하고 익숙한 아이디어들이 복잡하고 허세에 가득찬 수사들로 치장되었다는 점을 뺀다면 어떠한 "이론적인 구성물들"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페틀란트는 제가 푸코의 작업을 "틀렸는지, 쓸모없는지, 또는 허세인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역사와 관련된 그의 작업은 때때로 흥미롭습니다. 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고, 하나하나 검증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지요. 오랫동안 명백한 사실이었고 훨씬 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점들을 재진술한 부분은 "쓸모없지" 않습니다. 사실 매우 쓸모있고, 그게 바로 저와 다른 활동가들이 늘 같은 점들을 지적하는 이유이지요. "허세"와 관련해서는, 물론 제 견해로는 푸코가 쓴 많은 것들이 허세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그것 때문에 푸코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허세는 프랑스 파리의 썩어빠진 지식인 문화에 아주 뿌리깊숙히 박혀있는 것이고, 푸코는 그냥 거기에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간 것이니까요. 오히려 높이 사야 할 점은, 그가 그 문화에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이지요. 파리 지식인 문화의 "부패"(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해서는, 이건 다른 이슈이고 제가 다른 곳에서 논의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여기 게시판의 사람들이 이 이슈에 대해 관심있어 해야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별로 관심없습니다. 제 견해로는, 그들 자신들만의 편협하고 (최소한 저에게는) 별로 흥미롭지도 않은 써클들에서 엘리트 지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력을 쌓았고 또 다른 것들을 추구했는지에 대해 검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게 매우 성근 주장이라는 걸 압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무런 증명없이 이런 논평을 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지요. 하지만 저에게 질문들을 제기해왔고, 저는 여러분들이 제기한 특정 이슈들만을 답했습니다. 제 일반적인 견해를 물어보면, 저로서는 그냥 제 견해를 말하는 방법밖에 없지요. 그리고 보다 특정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그것들 하나하나에 대해서만 답할 수 밖에요. 저는 제가 관심이 없는 주제들에 대해 책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론"과 "철학"에 관련된 주장들이 제기될때 어떠한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도 곧바로 마음속에 떠올릴 단순한 문제들에 대해 누군가가 대답해줄수 없는한, 저는 제가 보기에 합당하고 계몽적인 작업들을 지속해나아갈 것이고, 또한 세계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날 것입니다.
존 (Johnb)은 "듣는 이가 준거틀 (frame of reference)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평이한 언어로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을 해주었습니다. 옳고 중요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 올바른 반응은, 있지도 않은 "이론"과 관련된 애매모호하고 불필요하게 복잡한 말과 허세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지요. 올바른 반응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준거틀을 의문시해보라고 요청하고, 그것 대신 고려해 볼 수 있는 다른 대안을 평이한 언어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혹은 어떤 경우에는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과 늘 얘기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단 교육 수준이 점점 올라가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단단히 세뇌되어 있고 알아서 복종하는 것 (엘리트 교육의 상당 부분은 이런 걸 가르치는 것이지요)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일수록 이해시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존은 말하기를, 여기 게시판과 같은 써클을 제외한 "우리나라[미국]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그"는 저를 의미하지요)는 이해불가능한 사람이다"라고 했지요. 이건 제 많은 경험들에 완전히 위배되는 말입니다. 모든 종류의 청중들과 관련해서 말이지요. 오히려, 제 경험은 제가 방금 서술한 그대로입니다. 가령, 라디오 대담을 보지요. 저는 라디오 대담에 상당히 많이 나갔는데, 억양등을 들어보면 청취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상당히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가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은, 청취자가 가난하고 덜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많은 배경지식이나 "준거틀" 문제같은 것을 제가 그냥 건너뛸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하는 것들은 상당히 자명하고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는 그냥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로 곧장 옮겨나아갈 수 있습니다. 좀더 교육받은 청취자일수록 이게 훨씬 더 힘이 듭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들을 부숴버리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제가 쓴 책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 안의 아이디어들이나 언어가 복잡해서 그런것이 아니지요. 강연장에서 자유토론을 할 때는, 정확히 같은 사안들에 대해, 심지어 정확히 같은 단어들을 써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제 문체 때문일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방대한 자료를 제시해야 될 필요 (최소한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때문에 그 결과 읽기가 어려워지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 책에서 특정 부분을 (어떤 때는 거의 그대로) 팜플렛 형태나 그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배포하지요. 아무도 [이해하는데] 별 문제를 느끼는 것 같지 않더군요.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히려 Times Literary Supplement나 전문적인 학술 저널들은 도대체 제가 뭘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경우가 자주 벌어집니다만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 보면, 정말 희극적이지요.
마지막 지적입니다. 이미 다른 데서도 썼습니다만 (Z에서의 토론, <501년: 정복은 계속된다>의 마지막 장등), 최근 지식인 계급의 행동에서 놀라운 변화가 있었지요. 60년전이라면 노동 계급 학교들에서 가르치거나 <백만인을 위한 수학> (제목 그대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수학을 이해가능하게끔 해주었지요)과 같은 책들을 쓰고 대중 조직들에 참여 및 강연을 했었을 좌파 지식인들이, 지금은 그러한 활동들을 거의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이건 조그만 문제가 아니지요. 지금 이 나라[미국]는 매우 이상하고 불길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환상에서 깨어나고, 회의적이 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마이크가 말한 것처럼, 이런 상황이야말로 활동가들이 꿈꾸어오던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상황은 선동정치가들과 광신자들에게 비옥한 토양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의 선배들이 뿌려왔던 메시지들을 뿌려대면서 상당수의 대중적 지지를 즐길 수 있을 (그리고 실제로 벌써 즐기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과거에 이러한 상황이 어떠한 식으로 발전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지요. 과거에는 일반 대중들과 그들의 문제를 기꺼이 공유하고자 한 좌파 지식인들이 메어왔던 간극이, 현재는 엄청난 틈으로 존재하고 있지요. 제가 보기에 이러한 상황은, 불길한 함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답변을 끝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명백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할 경우, 이 문제에 대한 저의 개인적 관심도 이것으로 끝을 내려고 합니다.
아래 글은 그 물건에 대한 촘스키 선생의 견해다. 그는 주눅 들것 없이 해명을 요구하거나 그 물건을 “불속에 던질” 것을 권한다.
Z에 기고한 촘스키의 글
여행을 가서 강연을 마치고 - 제 대부분의 생애를 이것으로 보내지요 - 돌아와보니 "이론"과 "철학" 에 대한 토론과 관련해서 계속 글들이 올라오고 있군요. 제가 보기에는 다소 기묘한 논쟁입니다만 말입니다. 여기 제 반응들을 몇가지 올립니다. 단, 미리 인정하겠지만, 솔직히 지금 무슨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이 논쟁은 처음에, 저와 마이크[Michael Albert; "Z"의 편집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에서 촉발되었지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이 점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고, 이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론"과 "철학"과 "이론적 구성물들"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마이크를 대변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까지 저의 응답은 제가 35년전, 그러니까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성계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오래 전부터 이미 활자화했던 주장들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만약에 시사 문제들을 다루거나 국내외의 분쟁들을 해결하는데에 적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시험을 거쳤으며 잘 검증된 이론이 있다면, 누군가가 그런 이론의 존재를 지금까지 비밀리에 잘 감춰왔음이 분명하다. [그런 이론이 있다는] 수많은 사이비 과학적 허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가 아는한 이 말은 35년전에도 맞는 말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더구나, 제가 한 말은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확장되며, 35년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온 "이론"들에 대해서도 물론 단 하나의 예외없이 적용됩니다. 제가 아는 한 그동안 바뀐 것이라면, 이른바 "이론"과 "철학"을 제안하는 사람들 사이에,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이비 과학적 허세"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지요. 제가 에전에도 썼지만,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는 것들중 가끔 꽤 흥미있는 것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도 제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있는 실제 세계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함축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가령, 예를 들어달라는 구체적인 요구와 관련해서 제가 언급한 것으로, 롤즈(Rawls)의 중요한 작업이 있습니다.)
자기네들끼리에 대한 존경심의 폭발적인 증가라는 현상은 이미 주목받고 있습니다. 가령 상당히 괜찮은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 (그리고 또한 활동가이기도 하지요)인 앨런 그라우바드 (Alan Graubard)가 몇년전에 롤즈에 대한 로버트 노직 (Robert Nozick)의 "자유지상주의적"인 응답, 그리고 그 응답에 대한 반응들과 관련해서 흥미있는 논평을 썼었지요. 앨런은, 노직의 응답에 대한 반응들이 아주 열광적이었음을 지적했습니다. 논평을 썼던 사람들마다 노직의 논변들이 가지는 파워 및 그밖의 여러 점들을 극찬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실제 세계와 관련된 노직의 결론들중 그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중 이미 그런 결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외로 하고 말이지요). 앨런의 지적이 맞습니다. 더불어 이런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그의 논평도 맞구요.
"이론"과 "철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옹호하길 원한다면 아주 쉽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냥 저에게,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비밀"로 남아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면 됩니다. 기꺼이 공부하겠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알려달라고 여러번 요구했지요. 그리고 여전히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답변하기 어려운 요구가 아닙니다: 마이크, 저,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실, 편협하고 놀랍게도 자족적인 지식인 사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류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과 사안들에 "적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시험을 거쳤으며, 잘 검증된 이론"의 예를 보여주면 됩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문제들과 사안들, 또한 이들과 같은 종류의 문제들과 사안들에 대해서 말이지요. 조금 다르게 말해보면, 우리가 공부해야한다고 하고 또 적용해야 한다고 하는 "이론"이나 "철학"의 원리들이, 우리 및 다른 이들이 다른(또는 더 나은) 근거에 의해 이미 다다른 결론들을 타당한 논변을 통해 이끌어낸다는 점을 보여주십시오. 이 "다른 이들"에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이들 또한 "이론적" 모호함 같은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호 관계를 통해, 또는 곧잘 스스로들, 제가 말한 그런 결론들에 다다르니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은 간단한 요구입니다. 이런 요구를 전에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그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지요. 저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몇가지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요즘 진행되고 있는 (그리고 논쟁에서 언급된 바 있는) 이른바 "해체(deconstruction)"과 관련해서는 논평을 할 수가 없군요. 왜냐하면 그 대부분이 저에게는 횡설수설인것처럼 보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것이 심오함을 깨닫지 못하는 저의 능력부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라면, 다음으로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 결과들을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들로 다시 서술해주고, 이 결과들이, 세음절 이상 나가는 단어, 비정합적인 문장, (최소한 저에게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남발되는 수사, 이런 것들 없이도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결과들과 왜 다른지, 또는 왜 더 나은지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 능력부족이 치료가 되겠지요. - 물론, 치료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어쩌면 치료가 안될지도 모르지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이건 만족시키기 아주 간단한 요구입니다. 그렇게도 대단한 열정과 분노로 제기되는 주장들에 어떤 근거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대신, 답변들을 보면 잔뜩 화만 내고 있지요: 이런 요구를 제기하는 것은 "엘리트주의", "반지성주의", 또 그밖의 다른 범죄들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 반면에, 스스로에 대한 존경과 상호간의 존경이 가득한 지식인 사회에 머무르면서 자기네들끼리만 얘기하고 제가 있기를 더 선호하는 종류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엘리트주의"가 아니라고 하는 듯 합니다. 제가 더 선호하는 세계에 대해서라면, 제 강연 및 집필일정만 봐도 제가 뭘 의미하는지 예시가 될 겁니다. 물론 이 토론 참가자들이야 다 알고 있거나, 쉽게 알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저는 그 세계에서 어떤 "이론가"들도 본적이 없으며, 그들이 하는 회의나 파티에 가본적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와 그들은 그냥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세계가 아닌 제 세계가 "엘리트주의"적 세계인지는 알기 힘듭니다. 더 이상 논평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것은 자명한듯이 보이지요.
또 다른 면을 덧붙이자면, 저에게는 강연 요청들이 너무나 많이 밀려들어와 도저히 제가 원하는만큼 다 수용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 경우 저는 다른 사람들을 제안하지요. 하지만 기묘하게도, 저는 "이론"이나 "철학"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절대 제안하지 않습니다. 대중 모임과 활동가들의 모임및 단체, 일반 단체, 대학, 교회, 노조, 등등, 또 국내외 청중들, 제3 세계 여성들, 난민들, 등등, 이들과 관련된 제 자신의 (상당히 광범위한) 경험에서, 그런 사람들과 (또는 그들의 이름조차도) 우연히 부딪히거나 한 적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궁금합니다.
그래서, 게시판의 이 모든 논쟁이 기묘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성난 비난과 탄핵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비난과 탄핵을 지지할만한 증거와 논변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대해 더한층 분노로 가득찬 비난으로 응답을 합니다. --- 하지만 놀랍게도, 어떤 증거나 논변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왜 그럴까를 물어보게 되지요.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합니다. 또는 어쩌면 과거 20년동안 [프랑스] 파리의 지식인들과 그 추종자들이 밝혀놓은 심오한 사실들을 이해할만한 지적 능력이 저에게 부족한 것이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런 가능성들에 대해 전적으로 열려있습니다. 비슷한 비난들이 쏟아진 수년간 계속 그래오고 있지요 - 하지만 제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변도 들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 질문들은 간단하고 답변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 답변이 있다면 말입니다: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면, 그게 뭔지 보여주십시오.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로 말이지요. 물론, 그것들이 완전히 제 이해를 벗어나 있는 것이라면 - 그럴 수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체념해야지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제가 이해할수 있는 것 같은 일들을 계속해야지요. 또한 이 일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으며 관심있어하는 것 같은 사람들과 계속 다녀야지요. (물론 저로서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자기 자족적인 지식인 문화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제가 뭘 놓치고 있는지 성공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남은 것은 두번째 가능성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가능성이 참일지도 모른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합니다만, 저로서는 계속 미심쩍어할수밖에 없군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지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 가령, 중성미자(neutrino)가 질량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최신 논쟁, 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최근에 어떤 식으로 증명되었는가에 대한 지식. 하지만 저는 이쪽 동네에 50년간을 있으면서 다음과 같은 두 사실을 배웠지요:
(1) 관련 분야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한 어려움없이 내 부탁을 들어줄수 있다.
(2) 내가 관심있으면, 좀 더 공부해서 이해할 수도 있다.
자, 이제 데리다(Deridda), 라캉(Lacan), 리오타르(Lyotard), 크리스테바(Kristeva), 등등 - 심지어 푸코(Foucault)도 말이지요. 비록 제가 그를 알고 있고 좋아했으며, 이 부류의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말입니다 - 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을 쓰지요. 하지만 [이들의 글과 관련해서는] (1)과 (2)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해했다고 하는 어떠한 사람도 저한테 그걸 설명해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실 그런 저의 이해불능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조금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습니다.그렇다면, 다음의 두가지 가능성중 하나가 맞겠지요. (a) 지성계에 무엇인가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졌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갑작스러운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서이겠지요). 그 결과 그 깊이와 심오함에 있어서 양자역학, 위상수학, 등등을 뛰어넘는 형태의 "이론"이 탄생되었다. 또는 (b) . . . .자세히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 지식인 세계라는 데에서 50여년간을 살아왔고, "철학"과 "과학"이라고 불리우는 영역들 및 지성사 분야에서 제 자신의 일을 상당량 해 왔습니다. 아울러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예술 분야에서의 지식인 문화에 대해 상당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이런 경험을 통해, 저는 지식인들의 생활에 대한 제 자신의 결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여러분들보고 "이론"과 "철학"의 경이로움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해줄 것을 요구하십시오. 물리학, 수학, 생물학, 언어학, 그 밖의 다른 분야들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군가가 그들보고 진지하게 그들 이론의 원리들이 무엇이고, 그 원리들이 어떠한 증거들에 바탕해있고, 그것들이 설명하는 것들이 이미 명백한 것들이 아닌지 등등을 물어볼 때 기꺼이 답해주겠지요. 이건 누구나 해야하는 공평한 요구들입니다. 이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그렇다면 저는 비슷한 상황에서 흄(Hume)이 제시한 충고를 받아들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그 "이론"과 "철학"을 불속에 던져버리십시오.
이제 몇가지 세부적인 논평을 하겠습니다: 제가 "파리 학파들"(Paris Schools)과 "포스트모더니스트 종파들"(Postmodernist cults)을 말할 때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건지 페틀랜드(Phetland)가 물어보았지요. 위에 든 사람들이 그 일례들입니다.
그 다음에 페틀랜드가, 당연하게도, 왜 제가 이들을 "무시"하느냐고 물어보았지요. 가령 데리다를 들어볼까요. 우선, 저는 이제부터 제가 하려는 것과 같은 종류의 논평을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하지만 여기 이 게시판에 참가한 사람들이, 가령, 소쉬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원하는지 의심스럽군요. 그리고 어쨌든 저는 그런 분석을 하지 않을 겁니다. 페틀랜드가 제 견해를 명시적으로 물어보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할 얘기를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제 견해를 뒷받침하라고 요구받는다면 저는, 그런 일은 시간들여서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어쨌든 데리다를 보겠습니다. 나이많은 저명한 사람들 중 하나이지요. 저는 최소한 그의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지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제가 매우 잘 알고 에전에 거기에 관해서 논문도 쓴 적이 있는 고전적 문헌들에 관한 비판적 분석같은 것 말이지요. 우스꽝스런 오독에 근거한, 형편없는 스칼라쉽이었습니다. 아울러 그 논변이라는 것이, 제가 사실상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익숙해왔던 정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글쎄, 아마 제가 뭘 놓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위에서 말한대로 의심은 여전히 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대지 않은 논평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견해를 물어봤으니, 답변을 하는 겁니다.
이 종파들 (제가 보기에는 종파들처럼 보입니다)에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저도 만나보았습니다: 푸코 (우리는 심지어 몇시간씩 토론도 했지요. 활자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동안 매우 즐거운 대화를 했지요. 실질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 그는 불어로, 저는 영어로). 라캉 (여러번을 만났고, 재미있는, 그리고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기꾼 (charlata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종파를 형성하기 이전인 그의 초기 연구는 사리에 맞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제 논의도 활자화되어있지만 말입니다). 크리스테바 (그녀가 열광적인 마오주의자였을 때 잠깐 만난적이 있지요).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요. 저는 제 선택에 의해 이들 써클을 멀리 했고, 전혀 다르면서 훨씬 광범위한 써클들을 더 선호했으니까요 - 제가 강연하고, 인터뷰하고, 운동에 참여하고, 매주 몇십장씩 긴 편지들을 쓰고 하는 써클들 말입니다. 저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의 저술에 손을 댔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진도를 많이 나가지는 못했지요: 제가 본 것은, [이들이] 극단적으로 허세를 부리면서도, 검토해보면 그 허세중 대부분은 단순히 그 분야에 대해 기본 소양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때로는 제가 논문을 쓴 적도 있는) 문헌들에 대한 엄청난 오독, 기본적인 자기-비판도 수시로 무시한다는 점에서 지독하게도 형편없는 논변, (복잡다단한 말들로 치장되어있지만) 사소하거나 거짓인 많은 진술들, 이런 것들에 근거한 허세이지요. 더불어 상당부분은 그냥 횡설수설(gibberish)입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분야들에서 중간에 막힐 경우에는, 저는 위에서 말한 (1)과 (2)에 관련된 문제들과 부딪히지요. 어쨌든 위에서 말한 사람들이 제가 애초에 염두에 둔 사람들이고, 또 제가 왜 진도를 많이 나가지 못했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혹시 불분명하다면 더 많은 이름들을 나열할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하지만 내부인으로서의) 관찰에 대한 문학적 묘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데이비드 롯지 (David Lodge)의 소설들을 권하겠습니다. 제가 판단할 수 있는 하에서는, 정곡을 찌른 것 같습니다.
페틀랜드는 또한, 제가 "뉴욕 타임즈의 허세와 혹세무민을 드러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들 지식인 써클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무시"하는 것이 "매우 당혹스럽게" 여겨진다고 썼습니다. "왜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것이지요?" - 정당한 질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간단한 답변이 있지요. 제가 논의하는 (뉴욕 타임즈, 여러 저널들, 많은 학술책들) 텍스트들은 이해가능한 글들로 씌어져있고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사회같이 성공적으로 교설적인 (doctrinal) 사회에서, 생각과 표현을 담는 교설의 틀 (doctrinal framework)을 제공하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세계 전역에 걸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지요. 저는 이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지, 롯지가 (제 생각에는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일반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들에 관심이 있다면, 제가 논의하는 텍스트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지요. 페틀랜드가 언급한 글들은, 제가 판단하는 한, 전혀 그런 성격의 글들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 글들은 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 글들은 단지 같은 써클들 내에 있는 다른 지식인들에게만 읽혀지니까요. 더구나, 이들 글들을 일반 대중들 (가령, 제가 강연을 하거나, 만나거나, 편지를 쓰거나, 또는 제가 글을 쓸때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별다른 특별한 어려움 없이 제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일반적으로 볼 때 이들 역시 제가 포스트모던 종파들에 맞닥뜨렸을때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지적 장애를 그 종파들에 대해 가지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에게 이해시켜보려는 시도가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저는 그런 글들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적용해보려는 시도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의미에서, 이미 명백한 것이 아닌 뭔가 새로운 결론들을 뒷받침해주는 역할로서의 적용을 해보려는 시도 말이지요. 저는 지식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명성을 부풀리고, 특권과 존경을 얻고, 일반일들의 투쟁에 동참하는 것을 점점 멀리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지요.
페틀랜드는 푸코에서부터 시작해 볼 것을 제안하는군요. 반복하지만, 푸코는 다른 이들과 두가지 이유에서 조금 틀리지요: [첫번쩨로] 최소한 푸코가 쓴 글들중 몇몇은, 비록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습니다만, 저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푸코는 개인적으로 [대중들의 투쟁에]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고, 같은 부류의 특권 엘리트 써클들안의 다른 이들과만 상호 교류하지도 않았지요. 이어서 페틀랜드는 정확히 제가 요구했던 것을 답하려고 합니다: 페틀랜드는 왜 자신이 푸코의 저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쓰고 있지요. 이것이 토론을 하는 제대로 된 방식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여기에 대한 제 답변을 통해 왜 제가 이런 부류의 저술들에 대해 그렇게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 사실,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페틀랜드가 서술하고 있는 푸코의 "이론" - 올바른 서술이라고 확신하건데 - 은 제가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론"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알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 사회사 및 지성사와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사실 이 세부사항들에 대해서도, 저라면 상당히 주의하겠습니다: 이 영역들 중 몇몇은 제 자신이 우연히도 꽤 광범위하게 연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역들과 관련해서는 푸코의 스칼라쉽이 별로 신뢰할만한게 못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 결과 제가 모르는 영역들에 대해서도, 별다른 조사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의 작업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1972년 이래로 활자화된 논의들을 보면, 이런 문제점들이 조금씩 불거지기 시작하지요. 17세기와 18세기에 관련해서 [푸코보다] 훨씬 더 나은 스칼라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들과, 제 자신의 조사결과를 참고하지요. 하지만 다른 역사 관련 저술들은 제쳐놓고, "이론적 구성물들"과 설명들로 넘어가봅시다: "가혹한 억압 메커니즘으로부터, 사람들이 권력이 원하는 것들을 (심지어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보다 교묘한 형태의 메커니즘으로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설명은 진실입니다. 사실, 당연한 말이지요. 만약 이런 게 "이론"이라면, 저에 대한 모든 비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런 "이론"은 있으니까요. 저는 정확하게 푸코가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점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유와 역사적 배경도 제시했지요. 하지만 저는 제 견해를 "이론"이라고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론"이라는 용어를 붙일만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헷갈리게 만드는 수사도 쓰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제 주장은 아주 단순한 것이니까요). 아울러 제 견해가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지요 (왜냐하면 당연한 사실이니까요). 통제와 억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쇠락해감에 따라 20세기초 PR 산업 종사자들이 "대중들의 마음을 조종하기"라고 부른 것들에 점점 의존해야 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은 오랫동안 인지되어온 사실입니다. 18세기에 흄이 말했듯이,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통치자들의 느낌과 욕구에 굴복하여 암묵적으로 맡겨버리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통치자들이 사람들의 견해와 태도를 조종하는데에 근거해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이론"이나 "철학"이 되어야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설명해주어야지요. 흄이라면 웃었을 겁니다.
푸코의 특정한 예들 중 몇몇 (가령 18세기의 형벌 방식)은 흥미있어 보이고, 그 정확성에 대해 조사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단순히, 남들이 별다르게 심오한 것이 있다는 허세없이도 간단하게 지적해놓은 것을 엄청나게 복잡하게 만들고 부풀려서 다시 진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페틀랜드가 서술한 것 중 그 어느 것도 제가 35년간 써왔고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보여왔던 것들 - 이것들 모두가 명백하고 당연한 사실들이지요 -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소한 사실들에서 흥미있는 것은 어떤 원리가 아니라 - 그 원리가 무엇인지는 명백하지요 - 어떻게 이 원리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들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가 하는 점을 보이는 것입니다: 국가개입, 칩략, 착취, 테러, "자유시장"이라는 사기, 등등에서 말입니다. 이것들과 관련된 작업은 푸코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을 쓸 수 있고 지성계에서 "이론가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의 많은 저술들에서는 그런 작업을 찾아볼 수 있지요.
제 논지를 분명히 하겠습니다. 페틀랜드는 정확히 옳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푸코가 발견한 "중요한 통찰들과 이론적인 구성물들"을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제 문제는, 그 소위 "통찰들"이라는 것이 이미 익숙한 것들이며, 더구나, 단순하고 익숙한 아이디어들이 복잡하고 허세에 가득찬 수사들로 치장되었다는 점을 뺀다면 어떠한 "이론적인 구성물들"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페틀란트는 제가 푸코의 작업을 "틀렸는지, 쓸모없는지, 또는 허세인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역사와 관련된 그의 작업은 때때로 흥미롭습니다. 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고, 하나하나 검증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지요. 오랫동안 명백한 사실이었고 훨씬 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점들을 재진술한 부분은 "쓸모없지" 않습니다. 사실 매우 쓸모있고, 그게 바로 저와 다른 활동가들이 늘 같은 점들을 지적하는 이유이지요. "허세"와 관련해서는, 물론 제 견해로는 푸코가 쓴 많은 것들이 허세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그것 때문에 푸코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허세는 프랑스 파리의 썩어빠진 지식인 문화에 아주 뿌리깊숙히 박혀있는 것이고, 푸코는 그냥 거기에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간 것이니까요. 오히려 높이 사야 할 점은, 그가 그 문화에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이지요. 파리 지식인 문화의 "부패"(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해서는, 이건 다른 이슈이고 제가 다른 곳에서 논의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여기 게시판의 사람들이 이 이슈에 대해 관심있어 해야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별로 관심없습니다. 제 견해로는, 그들 자신들만의 편협하고 (최소한 저에게는) 별로 흥미롭지도 않은 써클들에서 엘리트 지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력을 쌓았고 또 다른 것들을 추구했는지에 대해 검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게 매우 성근 주장이라는 걸 압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무런 증명없이 이런 논평을 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지요. 하지만 저에게 질문들을 제기해왔고, 저는 여러분들이 제기한 특정 이슈들만을 답했습니다. 제 일반적인 견해를 물어보면, 저로서는 그냥 제 견해를 말하는 방법밖에 없지요. 그리고 보다 특정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그것들 하나하나에 대해서만 답할 수 밖에요. 저는 제가 관심이 없는 주제들에 대해 책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론"과 "철학"에 관련된 주장들이 제기될때 어떠한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도 곧바로 마음속에 떠올릴 단순한 문제들에 대해 누군가가 대답해줄수 없는한, 저는 제가 보기에 합당하고 계몽적인 작업들을 지속해나아갈 것이고, 또한 세계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날 것입니다.
존 (Johnb)은 "듣는 이가 준거틀 (frame of reference)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평이한 언어로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을 해주었습니다. 옳고 중요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 올바른 반응은, 있지도 않은 "이론"과 관련된 애매모호하고 불필요하게 복잡한 말과 허세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지요. 올바른 반응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준거틀을 의문시해보라고 요청하고, 그것 대신 고려해 볼 수 있는 다른 대안을 평이한 언어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혹은 어떤 경우에는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과 늘 얘기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단 교육 수준이 점점 올라가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단단히 세뇌되어 있고 알아서 복종하는 것 (엘리트 교육의 상당 부분은 이런 걸 가르치는 것이지요)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일수록 이해시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존은 말하기를, 여기 게시판과 같은 써클을 제외한 "우리나라[미국]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그"는 저를 의미하지요)는 이해불가능한 사람이다"라고 했지요. 이건 제 많은 경험들에 완전히 위배되는 말입니다. 모든 종류의 청중들과 관련해서 말이지요. 오히려, 제 경험은 제가 방금 서술한 그대로입니다. 가령, 라디오 대담을 보지요. 저는 라디오 대담에 상당히 많이 나갔는데, 억양등을 들어보면 청취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상당히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가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은, 청취자가 가난하고 덜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많은 배경지식이나 "준거틀" 문제같은 것을 제가 그냥 건너뛸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하는 것들은 상당히 자명하고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는 그냥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로 곧장 옮겨나아갈 수 있습니다. 좀더 교육받은 청취자일수록 이게 훨씬 더 힘이 듭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들을 부숴버리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제가 쓴 책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 안의 아이디어들이나 언어가 복잡해서 그런것이 아니지요. 강연장에서 자유토론을 할 때는, 정확히 같은 사안들에 대해, 심지어 정확히 같은 단어들을 써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제 문체 때문일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방대한 자료를 제시해야 될 필요 (최소한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때문에 그 결과 읽기가 어려워지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제 책에서 특정 부분을 (어떤 때는 거의 그대로) 팜플렛 형태나 그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배포하지요. 아무도 [이해하는데] 별 문제를 느끼는 것 같지 않더군요. 물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히려 Times Literary Supplement나 전문적인 학술 저널들은 도대체 제가 뭘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경우가 자주 벌어집니다만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 보면, 정말 희극적이지요.
마지막 지적입니다. 이미 다른 데서도 썼습니다만 (Z에서의 토론, <501년: 정복은 계속된다>의 마지막 장등), 최근 지식인 계급의 행동에서 놀라운 변화가 있었지요. 60년전이라면 노동 계급 학교들에서 가르치거나 <백만인을 위한 수학> (제목 그대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수학을 이해가능하게끔 해주었지요)과 같은 책들을 쓰고 대중 조직들에 참여 및 강연을 했었을 좌파 지식인들이, 지금은 그러한 활동들을 거의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이건 조그만 문제가 아니지요. 지금 이 나라[미국]는 매우 이상하고 불길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환상에서 깨어나고, 회의적이 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마이크가 말한 것처럼, 이런 상황이야말로 활동가들이 꿈꾸어오던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상황은 선동정치가들과 광신자들에게 비옥한 토양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의 선배들이 뿌려왔던 메시지들을 뿌려대면서 상당수의 대중적 지지를 즐길 수 있을 (그리고 실제로 벌써 즐기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과거에 이러한 상황이 어떠한 식으로 발전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지요. 과거에는 일반 대중들과 그들의 문제를 기꺼이 공유하고자 한 좌파 지식인들이 메어왔던 간극이, 현재는 엄청난 틈으로 존재하고 있지요. 제가 보기에 이러한 상황은, 불길한 함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답변을 끝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명백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할 경우, 이 문제에 대한 저의 개인적 관심도 이것으로 끝을 내려고 합니다.
2004/07/10 17:31
토마스 베른하르트. 5년 전 우연히 그의 소설 <옛거장들>과 <비트겐슈타인의조카>를 읽고 그에게 반했다. 내가 인간이란 얼마나 가망 없는 존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베른하르트를 좋아한다는 걸 희한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베른하르트야말로 모든 이상주의자들의 의지처일 수 있다.
이상주의자는 그 이상 때문에 단순해지는 속성이 있다. 그 단순함은 다시 이상주의를 단순하게 만들고 혁명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인간과 세계에 대한 혐오다. 혐오를 모른다면 혐오를 넘어설 수 없으며 진정한 건강성과 아름다움을 구할 수 없다.
“이렇게 가망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대체 내가 뭘 하겠다는 거지?” 이렇게 중얼거릴 줄 모르는 이상주의자는 위험하거나, 적어도 경박하다.
이상주의자는 그 이상 때문에 단순해지는 속성이 있다. 그 단순함은 다시 이상주의를 단순하게 만들고 혁명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인간과 세계에 대한 혐오다. 혐오를 모른다면 혐오를 넘어설 수 없으며 진정한 건강성과 아름다움을 구할 수 없다.
“이렇게 가망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대체 내가 뭘 하겠다는 거지?” 이렇게 중얼거릴 줄 모르는 이상주의자는 위험하거나, 적어도 경박하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