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3'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04/03/31 이사
  2. 2004/03/30 아직과 이미
  3. 2004/03/29 한대수의 하루아침
  4. 2004/03/28 결핍
  5. 2004/03/25 노무현의 편지, 그후 1년 (6)
  6. 2004/03/24 야신의 죽음 (10)
  7. 2004/03/23 선암사 원통전 뒷켠 늙은 흰매화 (5)
  8. 2004/03/22 샤말 타파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 (2)
  9. 2004/03/21 분노 (36)
  10. 2004/03/18 개미의 생활 (45)
  11. 2004/03/15 박기범의 생각 (16)
  12. 2004/03/15 다른 세상을 여는 사람들의 총선 이야기
  13. 2004/03/15 너 빨갱이지? (12)
  14. 2004/03/15 무사 노무현 (26)
  15. 2004/03/14 탄핵,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 10 (64)
  16. 2004/03/14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33)
  17. 2004/03/12 모십니다 (9)
  18. 2004/03/11 (15)
  19. 2004/03/10 대문짝 만한 사진 (6)
  20. 2004/03/08 박경석의 말 (4)
2004/03/31 08:41
고래가 관이 지원하는(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 인텔리젠트 빌딩에 입주했다. 바닥에 전기나 랜선 구멍이 있고 중앙 냉난방에 청소까지 해주는 건물이다. 그런 편의 장치들이 꼭 좋은 건 아니지만 인력이 부족한 고래에겐 큰 도움이 된다. 이곳에서 2년 동안 머물게 된다. 짐 정리도 남았고 칸막이도 해야 하고 어수선하지만 이사는 언제나 심기일전의 계기다.
2004/03/31 08:41 2004/03/31 08:41
2004/03/30 00:39
참담하고 혼란스럽던 며칠이 지나면서
여전히 아이들과 공연을 준비하고 일상을 해나가면서
김규항씨의 글을 보는게 도움이 됐습니다.

블로그(사실 저희 식구들은 여길 보면서 블로그란 걸 처음 알았습니다.)를 보니까
난리가 나 있어서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나고 마음도 들지만
생각도 짧고 잘 정리할 능력도 없어서 보고만 있다가
단지 '연대'의 의미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편지를 써 봅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지요.
누구 편에 설것인가. 어디에 서 있을것인가의 물음 말입니다.
제가 아는 한 '진보'는
그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혁명'은
하느님 나라를 이땅에 이루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존재를 통해서 말입니다.

김규항씨의 글에서 제가 발견하고
힘을 얻는 것은
바로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입니다.

며칠전 아웃사이더에 하워드 진 교수가 이야기한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품위가 지켜지는 조그만 영역들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글로만 만나기에도 벅차고 멀고 대단해 보이던 노교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우리가 하루하루 해 나가고 싶은 그 꿈이었습니다.
우리가 4월 17일날 공연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공연을 홍보하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며칠 그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일상을 이어갑니다.

이곳에서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나라에 대해 언제나 깨어있고 명확해야 함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미'와 있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 자리라는 것도 생각합니다.

좁고 안전한 이곳 만석동에서 매일 변하는 것 없는 아이들과
여기서 함께있는 식구들을 바라보면서 '아직과 이미'사이에
깨어있는 다는 것이 사실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힘내십시오.
삶을 이어가는
모든 '선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힘을 내겠습니다.


(지난 15일, 기차길옆작은학교 선생님에게서 받은 편지.)
2004/03/30 00:39 2004/03/30 00:39
2004/03/29 19:18
한대수는 참 유명한 음악가다. 그러나 그 유명함은 대개 ‘물 좀 주소’나 ‘행복의 나라로’ 같은 그의 30여년 전 음악에 한정된다. 그걸 빼고 말한다면, 한대수는 유명한 음악가지만 음악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음악가다. 한대수의 그런 묘한 유명함은 사람들이 한대수의 (유명하지 않은) 음악에 접근하는 걸 훼방한다. ‘물 좀 주소’나 ‘행복의 나라로’ 말고도 한대수의 명곡은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대수, 하면 떠오르는 몇몇 곡들 때문에 한대수 음악에 접근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대수의 곡은 ‘하루아침’이다. 한대수의 가장 훌륭한 곡이 뭐라 생각하는가 묻는다면 다른 걸 댈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곡은 언제나 ‘하루아침’이다. 세상에 대한 애정도 얼마 남지 않은 주제에, 세상을 상대로 글도 쓰고 잡지도 만들면서 휘청휘청 살아가는 나는 ‘하루아침’을 들을 때 마음이 편안하다. 실실 웃기까지 한다. 들어보시라. ‘코맹맹이 소리로 주류 질서를 조롱하는 어느 노마드의 기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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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9 19:18 2004/03/29 19:18
2004/03/28 00:46
에콜로지, 이를테면 김종철 선생의 이야기에 늘 관심을 갖게 된다. 나는 아무래도 경제 문제를 위주로 하는 진보주의자 체질은 아닌 모양이다. 물론 경제 문제, 즉 사회적 불공정의 문제를 소홀히 여기는 온갖 생태, 생명론들은 우파의 장식물일 뿐이다.(내가 김지하 선생을 존경할 수 없는 이유도 그것이다.)

내가 “좌파는 현재 체제를 위협하는 사람”이라 말할 때 ‘현재 체제’는 자본주의를, ‘위협’은 사회주의적 기획을 말한다. 문제는 사회주의적 기획이 문명, 산업, 개발, 성장 같은 반 생태적 개념들을 충분히 해명하진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 문제를 위주로 하도록 강제된 사람’(극단적인 예로, 분신을 고려하는 비정규노동자)의 처지에서 경제 문제는 우주와 같다.

사회주의적 기획의 결핍을 인정하는 일과, 현재성을 뛰어넘는 진리는 없다는 믿음은 늘 공존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좀더 방점을 둔다. 아무 것도 위협하지 않는 현자보다는 시시한 것 하나라도 위협하는 활동가가 백배 낫다고 생각한다. 위협하지 않는 건 의미 없는 것이다.
2004/03/28 00:46 2004/03/28 00:46
2004/03/25 23:04
노무현의 편지, 그후 1년
2004/03/25 23:04 2004/03/25 23:04
2004/03/2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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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결국 야신을 죽였다. ‘헬기에서 휠체어에 탄 노인에게 미사일을 발사하는 방법’으로. 야신은 팔레스타인 인민의 자존심이었다. 그가 만들고 주도한 하마스는 병원과 학교를 짓고 굶주린 인민들과 식량을 나누면서, 매일같이 팔레스타인 인민을 살해하는 이스라엘과 미제국주의에 저항해왔다. 그 저항을 우리는 ‘테러’라 부른다. 이슬람의 신과 기독교의 신과 유대교의 신은 하나다. 야신은 신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더많은 야신이 돌아오고 있다.
2004/03/24 15:49 2004/03/24 15:49
2004/03/23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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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사진을 보내준 ㅇ선생이 적었다.

기품이.있고.아름다워.
늘.저렇게.늙어야.한다고..
되새기지요.
2004/03/23 01:27 2004/03/23 01:27
2004/03/22 11:59
억압받고 있다면, 인종과 피부가 달라도 우리는 동족입니다.
샤말 타파에게 존경과 연대를!

샤말 타파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
2004/03/22 11:59 2004/03/22 11:59
2004/03/21 23:51
광장에 나가는 사람들의 분노를 존중한다. 그러나 광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분노가 적은 사람들이라는 말은 사양한다. 분노가 적어서가 아니라 분노가 넘쳐서 광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를 무등 태우고 촛불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광장에서 일년 내내 방패에 목이 찍혀 넘어가고 군화에 배를 차여 피를 싸대고 몸이 얼어붙는 날 물대포에 맞아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분노가 적다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2004/03/21 23:51 2004/03/21 23:51
2004/03/18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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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자는 줄 알았던 김건이 눈이 동그래져서 달려왔다. “아빠, 휴지통 옆에 개미가 네 마리나 있어!” “그래?” “아빠, 어떡해?” “어떡할래?” “죽일까?” “개미들이 널 해쳤어?” “물지도 모르잖아.” “물었어?” “아니 물지도 모른다고.” “ 김건이 개미집에 갔다고 개미들이 죽이면 좋겠어?” “아니.” “개미처럼 작은 동물이든 인간처럼 크고 잘난 체하는 동물이든 생명은 다 같은 거야.” “맞아.” “아빠는 40년이나 살았지만 인간이 개미보다 낫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들어. 아빠 생각엔 인간이 제일 나쁘고 어리석어.” “그럼 어떡하지?” “그냥 같이 살지 그래.” “개미하고?” “걔들은 휴지통 옆에서 살고, 너는 너대로 살면 되지.” “그럴까?” “너무 많아지거나 물면 아빠가 해결해 줄게.” “어떻게?” “단 것으로 유인해서 밖에 내놓든가 하면 되지.” “알았어.” “개미들 어떻게 사는지 잘 관찰해 봐. 걔들도 사람하고 똑같은지. 엄마도 있고 친구도 있고 이야기도 하고 사랑도 하는지.” 김건은 한참을 휴지통 옆에 엎드려 들여다보더니 이 그림을 그렸다. 돋보기 반대편에서 김건을 보았을 개미들은 김건의 마음을 알았을까. 어쩌면 그들은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처럼 대놓고 제 종족을 잡아먹는 동물은, 잡아먹히면서도 저항할 줄 모르는 동물은 어디에도 없으니.
2004/03/18 01:12 2004/03/18 01:12
2004/03/15 22:05
동화작가 박기범 씨가 쓴 탄핵에 대한 두 가지 마음 입니다. 아는 분도 많겠지만, 박기범 씨는 권정생 선생을 이을 만한 훌륭한 동화작가입니다. 이라크 평화운동으로도 많이 알려졌는데, 이 글을 보니 역시 '좋은 동화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싶습니다. 언젠가 이오덕 선생이 그의 됨됨이를 칭찬하던 일이 기억납니다. "요즘 같은 세상이 그런 젊은이가 있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한번들 읽어보시고 역시 여러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2004/03/15 22:05 2004/03/15 22:05
2004/03/1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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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5 15:03 2004/03/15 15:03
2004/03/15 14:40
자기 의견을 말하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하는 건 모두 좋은 일이다. 토론은 우리가 함께 나아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물론 내 의견에 자부심을 갖지만 그렇다고 내 의견이 언제나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의견에 대한 비판을 최대한 경청한다. 비판이 나를 설득하거나 오류를 깨우치게 할 가능성을 인정하며, 만일 설득되거나 오류를 깨우치면 서슴없이 고치거나 반성할 준비를 한다. 이번처럼 십자포화를 맞을 게 뻔한 의견을 낼 때는 더욱 말이다.

도사들도 아닌데, 의견 교환이 늘 점잖기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할 선은 있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의 주장과 같다”는 식의 말은 의견이 아니라 야비하고 저급한 폭력이다. 우리는 군사 파시즘 시절에 ‘소수 의견’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북의 주장과 같다.”, 혹은 “너 빨갱이지?”하는 말로 당했다는 걸 기억한다.(오늘 거리를 물결치는 사람들이 지키려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시절의 ‘소수의견’ 아니던가?) 자신의 의견에 자부심을 갖는다면 자신의 의견을 폭력이나 배설로 만들지 않는 게 좋다.

그리고
몇 년 전 의사들과 전쟁을 치루면서 “너 빨갱이지?” 라는 말을 들을 때도 전여옥이라는 이와 함께 취급되었었다. 같은 말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에게서 듣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라서 굳이 밝혀둔다. 나는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지 않는 몇 안 되는 출판사의 대표이며, 전여옥이라는 이를 정상적인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2004/03/15 14:40 2004/03/15 14:40
2004/03/15 12:39
언젠가, 노무현 씨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이가 내게 말했다.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치밀한 계산에 의해 말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들을 때는 '과연 그런가?' 싶었는데, 이번 일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영리한 사람인지 절감했다. 노무현 씨는 단 한번의 '베기'로 세가지 적을 해치웠다. 1. 자신의 오른쪽, 2. 자신의 왼쪽, 그리고 3. 자신의 과오.
2004/03/15 12:39 2004/03/15 12:39
2004/03/14 22:16
1. 노무현 씨는 바보가 아니다.
2. 탄핵 사유와 노무현 씨의 개혁성은 별 관련이 없다.
3. 탄핵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
4. 노무현 씨는 탄핵이 가결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 즉, 노무현 씨는 탄핵을 선택했다.
6. 탄핵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건 노무현 씨와 열우당이다.
7. 노무현 씨와 열우당은 탄핵이 가져올 이익을 알 수 있었다.
8. 탄핵 사태와 민중의 삶은 별 관련이 없다.
9. 탄핵 사태와 6월항쟁은 별 관련이 없다.
10. 오늘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농민과 노동자들이 죽어나갈 때도 나왔다면 대한민국은 좀더 아름다웠다.
2004/03/14 22:16 2004/03/14 22:16
2004/03/14 15:06
(어떤 이가 나에게 왜 여의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냉소하느냐 말했다. 좌파가 ‘관념적 냉소로 가득찬 인간’ 취급을 받는 세상이긴 하지만,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들을 냉소하겠는가. 그들은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에 사느라 좀더 나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그래서 욕심도 적을 뿐이다. 그들은 고작 축구팀이 세계 4강에 드는 일로 조국에 대한 첫 자부심을 느끼고, 개혁이라는 식인체제의 새로운 대변자가 처한 곤경을 한없이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결코 그들을 냉소할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울고 뒤론 웃는 놈들’을 냉소하기에도 벅차다.)


언젠가 이영희 선생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우파 과잉의(좌파 결핍의) 사회임을 두고 한 말이다. 우파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거나 옹호하는 세력이며, 좌파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단지 혁명적인 방법만 말하는 게 아니라) 세력을 말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보여주듯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는, 혹은 좌파의 견제가 없을 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체제’일 뿐이다. 흔히 자본주의를 “인간의 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라고 말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능 가운데 탐욕만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식인 체제’였다. 분단과 6.25전쟁 체험을 빌미로 하는 강력한 반공 파시즘은 대한민국에서 좌파의 씨를 말렸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노동자와 농민과 민중을 내키는대로 마음껏 잡아먹었다. 물론 그런 식인 체제에 민중들이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수많은 죽음과 희생을 무릅쓴 끈질기고 빛나는 저항 운동이 있었다. 그 운동은 단지 ‘제도 민주주의’를 얻는 것을 넘어 반공 파시즘이라는 ‘식인 체제’를 부수는 데 목표를 두었다.(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운동의 성원 가운데 대부분은 변혁을 좆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제도 민주주의’가 마련되자 그 운동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성원들 가운데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운동의 종결’을 선언하는 일이 생겼다. 물론 그 선언은 거짓말이었다.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별 문제없이 작동되었다. 그러나 그 선언은 그 운동의 보다 평범한 성원들이 갖는 자괴감(현실 사회주의 몰락의 충격에서 비롯한, 제 지난 운동의 관념적 급진성에 대한 자괴감. 처음에 순수했으나 점차 비뚤어진 좌파 혐오로 발전한다.)과 주류 사회에서 행세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대세가 되었다.

그런 거대한 기만을 비판하는 좌파는 갈수록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운동의 종결’을 선언한 사람들은 좌파를 공공연하게 ‘철 지난 이야기나 하는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무렵, ‘운동의 종결’을 선언한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후반작업’이자 ‘수구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을 내세우는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과 강준만 씨를 비롯한 안티조선운동,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이런저런 네티즌 운동들이 그것이다.

좌파가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혁운동은 ‘패러다임이 변화한 시대의 좌파운동’으로 포장되어, ‘수구기득권 세력’의 악취에 넌더리가 난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협잡과 공갈로 행세해 온 정치인들은 처음으로 위기를 맞게 되고, 위세가 영원할 것 같던 파시스트 신문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서 존경받지 못하게 되었다. 개혁운동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하여 ‘개혁 정권’을 만들어냈다.

개혁이 만들어낸 사회적 변화들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그런 변화가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의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이란 한국 사회를 실제로 유지하는 대대수의 사람들, 노동자 민중들이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개혁이 가져다주었다는 변화가 지니는 의미를 판단하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기준이다. 그렇게 볼 때 개혁이 가져다 준 변화는 그 휘황한 겉모습에 비해 믿을 수없이 초라한 것이다. 그 변화가 의미 있는 것이라면 왜 한국사회의 실제 성원들은 왜 전보다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는가. 왜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기만 하는가.

그게 다 개혁의 지도부가 늘 말하듯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그렇다면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것도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에 순진한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보내는 것도 역시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우리는 그런 현실들이 전적으로 ‘개혁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혁이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은 이유는 개혁의 지도부가 미숙해서거나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발 때문이 아니라, ‘개혁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좌파 운동’이 아니다. 개혁은 그 식인 체제가 내뿜는 악취를 제거하는 ‘우파 운동’일 뿐이다. 개혁으로 위기를 맞은 건 ‘식인 체제’가 아니라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들’(제도 정당과 언론, NGO 따위)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이미 효용성을 다한, 극심한 악취로 더 이상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을 서둘러 교체하는 중이다. 그들은 ‘개혁적 외양을 가진 대변자’가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실체이자 진실이다. 오늘 많은 선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 분노하는 ‘탄핵 사태’ 역시 그런 교체의 와중에서 나온 사건이다. 교체 위기에 빠진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은 어차피 죽을 거면 싸우다 죽겠다는 심정으로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그들이 더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식인체제의 '대중적 대변자’ 노릇을 할 수 없음을 좀더 분명하게 했다. 그들은 노무현 씨를 탄핵함으로써, 수구기득권 세력과 싸운다는 강력한 명분을 가지면서도 졸렬한 실무 능력으로 지리멸렬하던 노무현 씨와 열우당을 단숨에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열우당 의원들이 ‘앞으론 울지만 뒤론 웃고 있다’는, 아니 기뻐서 날뛰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순교자’는 머지않아 강력한 대중적 호응을 업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말이다.

하여튼 개혁 우파는 좀더 빨리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로서 역할에 충실하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대변자는 교체된 대변자의 잔재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고, 적어도 중간 계급 이상의 한국인들은 좀더 ‘상식적인 시민 사회’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한국인들, 한국사회의 실제성원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이며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몸을 불사르는 일도 계속될 것이며, 순진한 청년들이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서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수구기득권 세력의 저항’이라는 설명은 ‘한국적 현실’이라는 좀더 전통적인 설명으로 대체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오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속속 여의도로 모여드는 선한 사람들을 보며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가장 기만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식인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
2004/03/14 15:06 2004/03/14 15:06
2004/03/12 15:16
고래 필자 모십니다. 고래가그랬어는 대부분 교양 만화로 되어 있는데 그 사이 사이에 한쪽짜리 글이 몇 개 들어갑니다. 착한 인터넷, 나쁜 장사꾼들, 귀신의 고향 같은 꼭지들입니다. 그걸 좀더 늘이려고 합니다. 아이들을 홀리는 흥미 위주의 정보니 상식이니 따위로 흐르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사회성’이 필요하긴 하지만, 주제나 소재의 제한은 없습니다. 역사도 좋고 과학도 좋고 음악이나 미술, 스포츠 뭐든 좋습니다. 원고 분량은 200자 원고지 4매(5매 이하)입니다. 내 자식, 내 조카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를 우리 모두의 자식, 우리 모두의 조카에게 들려주고 싶다면 간단한 기획안을 고래 이메일로 보내주십시오.
2004/03/12 15:16 2004/03/12 15:16
2004/03/11 14:23
그는 어느 작은 마을에서 한 농촌 여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또 다른 마을에서 자랐는데 그곳에서 30세가 될 때까지 목수로 일했다.
그러고 나서 3년 동안 그는 방랑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결코 책을 쓴 적이 없다. 또 사무실도 열은 적이 없었다.
결코 가족이나 가정을 가지지 않았다. 대학에도 가지 않았다.
그가 난 곳에서 300킬로미터 이상 밖으로 여행한 적도 없었다.
거대함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성취한 적이 없었다.
자신 이외에 어떤 신용장이나 자격증도 없었다.
여론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그는 겨우 서른세 살이었다.
그의 친구들도 그를 버렸다.
그는 적들의 손에 넘겨졌고, 그들은 재판에서 그를 조롱했다.
그는 두 도둑들 가운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께 왜 자기를 버렸느냐고 물으면서 고통에 휩싸여 있을 때
그를 고문한 자들은 유일한 소유물인 그의 옷을 놓고 제비를 뽑고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한 친구가 묘를 빌려서 그곳에 그를 매장했다.
20세기가 지나갔지만, 오늘날 그는 우리세계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변화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다.
행진해갔던 어떤 군대도,
항해했던 어떤 해군도,
회의를 했던 어떤 국회도,
지배했던 어떤 왕도
이 모든 권력을 다 합쳐도 그이 이 고독한 삶만큼
지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을 바꾼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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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2003년 맨체스터대학 연구팀이 만들어낸 예수의 얼굴. 2천년 전 유대인 농부의 두개골을 재료로 법의학 기술과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을 섬약한 백인의 얼굴로 기억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런 실증적인 얼굴은 의미가 있다.
2004/03/11 14:23 2004/03/11 14:23
2004/03/10 11:25
아내가 김단의 사진이 크지 않냐고 해서 그의 컴퓨터 화면으로 보니 대문짝만했다. 내가 생각한 '적당한 크기'는 실은 '대문짝만한 크기'였다. 대개의 컴퓨터 화면이 1024x768인데, 내 노트북 해상도가 1400x1050이라 생긴 일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진의 긴변을 490픽셀로 맞추기로 했다.

'490'은 안상수의 블로그에서 본 딴 것이다. 안 선생은 내 블로그를 보고 블로그 시작을 결심, 일단 내 블로그의 템플릿을 그대로 본 땄다. 내가 최호찬의 블로그를 본 땄듯이. 최호찬 형은 내 블로그가 생긴 후 자신의 것을 조금 바꾸어 '둘이 다르게' 만들었다. 머지않아 안 선생의 블로그가 '예술적 개비'를 하면 '셋이 다르게' 될 것이다. 본 따고 배려하고. '꽤 생산적인' 놀이를 하고 있다.
2004/03/10 11:25 2004/03/10 11:25
2004/03/08 20:21
노들장애인야간학교 박경석 대표가 민노당 장애인 비례대표 후보를 고사하며 쓴 글. 행글라이더 타다가 장애인이 되었으니 '놀만큼 논' 사람인데, 이젠 욕창(휠체어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생긴)이 가실 일이 없이 싸우는 투사다. 그는 자신의 운동을 '진보적 장애인운동'이라 말한다. 모든 소수자 운동은 '진보적'이지 않으면 동정을 기다리는 구차한 몸짓이 된다. 그를 몇번 스치듯 만났지만, 지적 능력과 우직함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머지 않아 인터뷰를 할 생각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박경석입니다.
정말 무겁고 민망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며 이 글을 씁니다.

박인용 동지의 추천 글을 통해 수많은 동지들의 추천을 받고 감당할 수 없는 지지에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무게는 88년부터 지금까지 장애운동을 하면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럽고 획기적인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동지들의 지지에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민망할 따름입니다. 이 결정이 동지들에게 상처가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번을 기회로 동지들과 함께 더욱 현장투쟁을 확장하고 강화시키며 진보적 장애운동의 조직건설에 진정으로 연대하고 싶습니다.

장애아이를 둔 어머니의 추천 글에서 저의 출마가 고통 받는 이 땅의 장애인들에게 희망이라 말씀해주시는 것에 더욱 마음이 쓰리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하나의 소중한 희망이듯, 장애인들이 거리에서 투쟁하는 현장을 강화하고 진보적 장애운동을 힘차게 전개해 나갈 조직건설의 활동가로 남는 것 또한 동등한 무게의 희망이라 생각합니다. 활동가로 남는 그 희망이 어머니에게 기쁨을 주는 희망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보적 장애운동은 여전히 척박하고 열악한 상황입니다. 그로 인하여 이 땅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장애민중들은 한낱 부르주아 보수 정치인들의 정치적 치장물로 전락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떡고물에 관변적이고 보수적인 장애인단체는 생물학적인 장애인 당사자를 팔아 정치적으로 야합하였고, 몇 명의 잘난 장애인들은 그 조직을 자신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장애민중이 투쟁으로 조직을 건설하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장애운동에 있어 열악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장애인의 문제는 더욱 왜곡되어 왔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정말 저에게는 소중한 김도현 동지를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 동지는 에바다 투쟁으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습니다. 집행유예기간에 또다시 중증장애인을 철로에 내려주는 투쟁을 감행하였고 그래서 구속이 되어 1심에서 징역8월의 실형을 받았고, 집행유예기간이라 에바다 투쟁으로 받은 1년 6개월을 더하여 살아야 할지 모르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동지가 구속되어서 면회 갔을 때 저에게 그가 구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 '장애운동의 열악함'이라 했습니다. 그는 비장애인입니다. 온전히 저로 인해 구속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지가 저 대신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 동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동지는 저에게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로 나가는 것이 정말로 소중하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진보적 장애운동을 건설할 현장에서 형이 더욱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의회로 진출하는 것이 현장과 분리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동지의 말이 틀리고 맞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더 열악하고 낮은 현장에서 장애대중을 조직하고 투쟁해야 할 절실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저를 더욱 필요로 하는 곳은 그곳이라 생각합니다.

'내 모습 지옥같은 세상에 갇혀버린 내 모습 큰 모순 자유 평등 지키지도 않는 거짓 약속 흥! 닥치라고 그래, 언제나 우린 소외 받아왔고 방구석에 폐기물로 살아있고 그딴 식으로 쳐다보는 차별의 시선 위선 속에 동정 받는 병신 인줄 아나!'

제가 좋아하는 '젠'동지들의 공간이동이라는 노래의 랩 부분입니다. 그렇게 이 사회에서 장애인은 차별의 한가운데 살아왔습니다. 방구석에 폐기물로 살아왔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본의 질서에서 가장 억압받고 고통받는 계층으로 살아왔지만, 우리의 투쟁은 사랑의 리퀘스트 류의 자선공연이거나 오히려 하나의 퍼포먼스로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저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면서 적어도 이 사회에서 장애라는 문제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회적 담론으로 형성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의 문제는 하나의 이벤트일지는 몰라도 주류의 담론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장애인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은 하나의 퍼포먼스요 시혜와 동정으로 다가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저와 그리고 함께 투쟁하는 동지들에게는 하나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자본의 사회를 변혁시킬 저항이었습니다. 이제 그 저항운동을 선도적이고 힘차게 일상적으로 현장에서 펼쳐낼 진보적 장애운동의 조직체 건설이 제가 느끼는 운동의 과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향해 '지키지도 않는 거짓 약속 흥! 닥치라고 그래' 외치며, 이젠 우리의 힘으로 강제해 나갈 것입니다.

저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교사 활동을 11년째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일년 내내 논밭을 갈아서 가을의 수확을 마친 후 그 모든 결실들을 지주에게 다 바치고 텅 빈 가을 들녘을 낮 술에 취해 바라보는 한 농부의 눈동자에서 녹아오는 허전함을 매년 느낍니다. 노들장애인야학에 나오는 저희 장애학생들은 20년 30년 방구석에 처박혀 지내다가 학령기를 다 놓친 후 늦은 나이에 야학을 찾아와 공부를 배웁니다. 저는 장애운동을 하면서 그곳을 소중한 현장으로 느낍니다. 왜냐하면 장애운동을 하려면 그래도 소위 '쪽수'가 되어야 하는데 장애인들은 집구석에 처박혀 지내서 눈뜨고 찾아 볼 수 없어 어떻게 장애인을 꼬셔서 운동을 해볼까 하는 고민에서 야학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조직해서 야학을 하고 있습니다. 공부도 가르치지만 차별에 대한 저항정신을 가르칩니다. 쉽게 말하면 학생들과 교사들을 데모할 수 있도록 어떻게 해서든지 조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허전함을 매년 느끼는 것은 장애민중들의 현실적인 열악함에서 사회적이고 조직적인 역량강화를 위한 현장조직의 상황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한 반증으로 느끼는 마음입니다. 끊임없는 허전함과 미래가 없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1년, 2년 길게는 3년 4년 그렇게 왔다가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굴러온 것이 야학의 활동이었고 그것이 지금 진보적 장애운동 조직을 건설하고자 희망을 가지게 된 물리적인 힘의 원천입니다.

이제 다시 돌이켜 봅니다. 저에게 보내주는 동지들의 지지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저의 선택이 동지들의 생각에 잘못일지는 몰라도 장애운동의 열악함으로 보아주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열악함으로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장애인이 받아왔던 차별의 무게만큼 더 질기게 혁명적으로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자본과 비장애인의 중심으로 계획되고 운영되는 세상을 바꾸어 갈 것입니다. 거리투쟁의 현장에서 진보적 장애운동조직을 건설할 것입니다. 그대 동지들이 투쟁하며 만들어 왔던 민주노동당의 희망을 제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래서 장애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그리고 당당히 민주노동당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진보정당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 -

단순히 장애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장애인을 돕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장애해방은 자본의 체제에 대한 저항입니다.
민주노동당 당원 여러분!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같다면, 그렇다면 함께 투쟁합시다!

다시 한번 동지들의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거리투쟁의 현장에서 동지들의 지지를 가슴에 안고 열심히 투쟁하겠습니다^^

2004. 3. 1.

박경석 드림.
2004/03/08 20:21 2004/03/08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