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되지 않은 10대의 반항의식으로만 가득하던(머리 속에 든 거라곤 록음악과 오토바이와 여자뿐이던) 내가 대학에 들어가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전적으로 운동하는 선배들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당시 대학생들 가운데 가장 진지하고 지적이면서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매료되었으며 그들과 동아리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알다시피 오늘 대학 신입생들은 운동하는 선배들에게 호감을 갖지 않는다. 신입생들에게 그 선배들은 아무데서나 ‘운동권 사투리’를 남발하며 설득과 공감의 과정 없이 ‘삭발하고 구호나 외쳐대는’ 썰렁한 사람들이다. 텔레비전 연예 프로그램에서 최수종씨의 20년 전 CF화면에 폭소를 터트리는 관객들처럼, 신입생들은 그들에게 실소를 보낸다.
그런 반응은 대개 오늘 청년들이 사회 현실보다는 제 안락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라 설명된다. 오늘 청년들이 20년 전 청년들보다 개인주의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런 설명은 일부만 옳다. 그런 설명이 전적으로 옳다면 왜 오늘 청년들은 언론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개혁운동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며, 인터넷을 무리지어 오가며 사회적 여론을 만들고 심지어 말도 안 되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변신시키기까지 하는가.
그런데 그들은 진보운동엔 무관심하다. 개혁운동에 그토록 열심인 그들은 진보운동엔 왜 그토록 무관심한가. 지난 10년 동안 ‘넥타이 멘 운동가들’이 시민 혁명가로 떠오르고 개혁운동이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동안 진보운동은 청년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청년들에게 진보운동은 지난 시절의 박제가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진보운동에 내용이 부족해서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개혁운동에는 무슨 대단하고 체계적인 내용이 있는가. 지난 10년 동안 승승장구해온 개혁운동의 내용은 단 한번도 “나쁜 놈들을 몰아내자” 수준을 넘은 적이 없다. ‘나쁜 신문 몰아내자’ ‘나쁜 정치인 몰아내자’... 진보운동은 언제나 그보다 훨씬 더 정확한 현실 분석과 내용을 가져 왔다.
그럼 왜일까. 이유는 실은 간단하다. 진보운동은 지난 10년 동안 청년들과 소통 자체를 거부해왔다. 이런 말에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언제 소통을 거부했단 말인가. 그러나 소통이란 일방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서로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진보운동은 소통을 거부해왔다. 진보운동에서 대중을 상대로 만든 문건 몇 개만 살펴보면, 그 문건들을 강준만이나 유시민이나 노사모나 참여연대 같은 데서 만든 문건들과 비교해 보면 금새 알 수 있는 일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오늘 청년들에게 진보운동은 ‘거부감을 주는 언어로 듣든 말든 지들끼리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다. 학생운동의 쇠락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학생운동의 쇠락이 진보운동의 쇠락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학생운동, 즉 대학 시절과 대학 공간이라는 일시적 유한함을 기반으로 한 지사적 운동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서나 적절했다. 진보운동,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에 노출된 상태에서 일생을 거쳐 유지되는 운동이어야 한다. 학생운동은 그 효용성을 다했고 쇠락은 필연적이다.
중요한 건 진보운동과 청년들과의 관계다. 소통을 시작하자. 쉬운 언어와 친절한 말씨로. 청년들과 소통하지 않는 한,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지 않는 한 진보운동에 미래는 없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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