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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3/12/15 청년들의 근황 1
2003/12/28 19:31
80년대 진보운동이 갖는 급진성은 당연히 진보운동의 주체적인 힘이지만, 군사파시즘의 폭압과 책상물림 이론가들의 관념성에 크게 힘입은 것이기도 했다. 인정하고 싶든 않든 그건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90년대 들어 군사 파시즘의 폭압이 수그러지고, 현존사회주의가 무너져 책상물림들의 관념성이 정처 없어지자 진보운동은 급진성도 참으로 맥없이 사그라졌다. 거품이었다.

그 거품 속에서 최소한의 진보적인 소양(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의 진보적 소양을 갖추는 건 ‘학습’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인간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의 진보적 소양은 ‘삶’으로만 갖출 수 있다. 물론 ‘삶’은 책으로 하는 게 아니다.)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조차 진보주의자 노릇을 할 수 있었다. 80년대에는 그 거품도 진보운동의 대열에 속했지만 80년대의 급진성이 무너지자 그 거품은 이내 진보운동에 비수로 돌아왔다.

그런 사람들은 90년대 이후 파시즘의 폭압과 이론적 관념성이라는 받침대가 사라지자 보수주의자로서의 이기심과 탐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며 살아간다. 문제는 그들이 보수주의자로 살면서도 제 젊은 시절의 ‘진보운동의 이력’을 계속 내세운다는 것이다. ‘진보운동의 이력을 내세우는 보수주의자들’은 오늘 한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존재한다. 그들은 사회문화 전반에서 가장 유력한 엘리트 집단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대개 그들이 자랑스러워마지 않는 이력에 걸맞은, 혹은 그 이력보다 훨씬 더 많은 사회적 대우를 받는다. 이따금 그들의 끝없는 탐욕이 그들의 천박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이를테면 저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신을 책으로 펴냈다가 회수 소동을 벌인 아무개 출판사 사장이나 송두율씨를 초청했다가 국가보안법의 굴레가 다가오자 “그런 사람인지 나는 몰랐다. 처벌이 필요하다.”고 떠들어대는 아무개 기념회 회장처럼) 대체적으로 그들은 먹고 살만 한데다 사회적 존경까지 받는다.

그들은 제 안락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를 구사한다. 1. 나는 세상을 바꾸는 일에 투신했다. 2.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이 명쾌한 논리는 다시 ‘오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아직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쾌하게 논증한다.

우리는 그들이 그런대로 양식을 갖춘 시민들이라 착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차원에서 그들은 오늘 진보운동에 가장 큰 해악을 주는 사람들이다. 애시당초 진보운동을 적대하게 되어 있는 우익들의 공격과 그들의 공격은 사회적 공신력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대중들에게 그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룬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진보운동에 갖는 좀더 치명적인 해악은 청년들이 진보운동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그들의 주장과 행태를 통해 90년대 이후 청년들이 진보운동에 대해 두 가지 편견에 빠지게 했다. 하나는 진보운동이 ‘이제 끝났거나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둘째는 ‘진보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것을 제 일신의 안위를 위해 사용한다.’

이쯤 되면 출생 전에 무슨 신령한 진보의 은총이라도 입은 게 아닌 이상 어떤 청년도 진보운동에 관심을 갖기 어렵다. 오늘 청년들이 진보운동을 잘 모르고 진보운동에 관심이 없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 셈이다. 오늘 우리가 참으로 심란스럽게 바라보는 청년들은 바로 그런 처지에 있다. 우리는 그 청년들에게 연민을 느낄 만하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2003/12/28 19:31 2003/12/28 19:31
2003/12/15 00:19
80년대에 청년이던 사람들이 만나 대화하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안주가 ‘요즘 애들’이다.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 “요즘 애들은 이기적이야. 도무지 사회 현실에 관심이 없어.” “요즘 학생운동이 그게 운동이야.” 등등.

더 이상 책을 안 읽고, 저와 제 식구 외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운동은커녕 운동의 장애물에 가까운 그들이 그렇게 떠들어대는 풍경은 기괴하지만, 어쨌거나 80년대의 청년들과 오늘 청년들이 많이 다른 건 사실이다. 대학 학생회장 선거에서 갈수록 비운동권이 우위를 보이는 건 그런 현실의 한 단면이다.

그런 현실은 좌파운동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좌파 청년들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좌파 운동이 고령화하고 또 고립되어 머지않아 영향력을 잃게 된다는 얘기가 된다. ‘청년들을 어찌할 것인가’는 좌파운동의 가장 중요한 숙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한국에서 청년학생운동은 수십여년 동안 운동의 주력이자 메마르지 않는 우물이었고 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80년대에 좌파청년들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런 ‘풍요’는 좌파운동의 노력이나 역량보다는 현실의 엄혹함에서 온 것이었다. 온 나라가 병영화하여 청년들의 정신을 가두었고 군인들이 대낮에 양민을 도륙하고 어제 만난 친구가 사라져 얼마 후 주검으로 떠오르는 현실은 평범한 청년의 가슴에도 쉽게 불을 지를 수 있었다.

이제 군인들은 더 이상 대낮에 양민을 도륙하지 않으며 한국 청년들은 세계에서 가장 쿨한 영화광들이다. 빨갱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잇따라 대통령을 맡고 있으며 평범한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만한 현실은 눈에 띄게 적어졌다. 이쯤 되면 오늘 청년들 가운데 적게라도 좌파들이 재생산된다는 사실은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다.

오늘 청년들이 사회현실에 관심이 없다는 개탄은 사실과 다르다. 청년들은 언론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이런저런 개혁운동에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투신하고 있다. 그 투신이 제 연애와 영화감상과 취업시험 준비를 하고 남는 시간에 ‘모니터 앞에서’ 혹은 ‘촛불을 들고’ 이루어진다 해도 그들은 나름대로 사회현실에 투신하고 있다.

우리는 그 청년들에게 희망을 둘만 하다. 우리가 ‘모니터 앞에서’ ‘촛불을 들고’ 사회현실에 투신하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둘 근거는 그 청년들이 ‘진보’ 가 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 청년들은 극우가 보수를 자처하고 개혁이 진보를 자처하는 현실에 그대로 사로잡혀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개혁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라 여기고 ‘진보적 열정’으로 개혁운동에 투신하고 있다.

우리는 그 청년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개혁과 진보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 개혁운동은 세상을 바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오늘 세상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물론 그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개혁이 진보를 거의 완전하게 대체하는 데는 참여연대에서 강준만과 노사모를 거쳐 네티즌운동에 이르는 10여년의 과정이 있었다. 그 10여 년 동안 개혁운동은 좌파운동을 ‘낡고 어리석으며 실현가능성이 없는 미망에 빠진 무리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젠 우리 차례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개혁운동의 주장들이야말로 얼마나 ‘낡고 어리석은’ 것이며 개혁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없는 미망’인지를 알려주어야 한다. 개혁정권의 침략전쟁에 대한 태도나 더러운 정치자금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은, 청년들로 하여금 극우와 개혁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과연 개혁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되새기게 하는 생생한 자료들이다. 바로 지금 우리는 청년들에게 유례없이 친절하고 부드럽게 다가가야 한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2003/12/15 00:19 2003/12/15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