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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3/10/23 더러운 공화국
  2. 2003/10/08 풍요
2003/10/23 00:17
국가보안법은 일제 시기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이던 치안유지법의 외아들이다. 일제가 물러 간 후 남한 사회는 일제에 붙어 영화를 누리던 부역자 세력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른바 대한민국은 세계사에서 가장 더러운 피를 가진 공화국이다. 아무런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남한의 지배세력은 국가보안법을 통해 남한 사회를 반공주의 파시즘 체제로 만들어갔다.

반세기 동안 남한은 반공주의의 수용소였다. 학문과 종교와 예술을 포함한 남한의 모든 정신활동은 국가보안법의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했다. 반공주의 파시즘을 제외한 모든 의견은 모조리 공산주의적 활동이자 친북 활동으로 규정되었다. 사회주의도 아니고 혁명도 아니고 단지 민주주의와 자유를 생각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국가보안법은 단 한번도 ‘나라를 지키는’ 법이 아니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공개적으로 질문할 수 있게 된 건 90년대 이후, 반공주의 파시즘의 절대적인 권위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매우 한정된 사람들 끼리나 알고 있던 ‘국가보안법의 비밀’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90년대 말에 이르러선 최소한의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21세기의 첫 해가 뜨기 전에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거나 적어도 개정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21세기가 된지 3년이나 지난 오늘 여전히 건재하다. 그 배후에 거대한 타협이 있다. 국가 권력은 그 법을 조금은 덜 야만적으로 보이게 사용하는 대신, 국가보안법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은 그 법의 존재에 잠시 눈을 감는 타협 말이다. 송두율 씨를 둘러싼 이런저런 상황들은 그런 거대한 타협의 실체를 송두리째 드러낸다. 민주화운동 이력과 국가보안법에 의한 상흔을 훈장처럼 달고 행세하는 자들은 말한다. “정말 몰랐다.” “당혹스럽다.” “국민에게 사과한다.”

국가보안법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온 극우 세력과 파시스트 언론이 이 맛난 먹이를 놓치려 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쥐어뜯고 할퀴고 뒤에서 찌르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너무 심하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국가보안법으로 송두율을 말하지 말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몹시 곤혹스러운 얼굴로 ‘관용’을 말한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관용을 애걸하는 건가. 파시스트들에게? 반세기 동안 빨갱이의 딱지를 쓰고 광장에 끌려 나온 사람들에게 ‘죽여라!’라고 외쳐 온 잘난 국민들에게?

송두율이 노동당원이면 어떻고 민노당원이면 어떤가. 송두율이 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들어가면 어떻고 남한으로 들어오면 또 어떤가. 그런 건 분단 덕에 영화를 누려왔기에 분단이 영원하길 바라는 놈들에게나 상관있는 일이다. 분단 조국을 둔 지식인이 남북을 넘어 민족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독일이라는 제3국에 거주하는 지식인이 반세기 동안 반공주의 파시즘이 지배해 온 남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지식인이 아니다. 사람들이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송두율의 이런저런 행적들은 분단 조국을 살아가는 지식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식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송두율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질문하기 전에 “국가보안법은 어떤 법인가?”라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 질문은 주먹을 쥐고 소리치는 별스런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국가보안법의 비밀’이 밝혀져 있고 그 법에 당하는 사람이 실재하는 이상 그 법에 눈감는 일은 노예의 행동이다. 우리가 국가보안법에 반대한다면 그 법을 무시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전제로 한 송두율에 대한 어떤 의견이나 조치도 무시해야 한다. 누가 감히 추방을 말하는가. 누가 감히 관용을 말하는가. 이 더러운 공화국에서.(씨네21 2003/10/23)
2003/10/23 00:17 2003/10/23 00:17
2003/10/08 00:16
일산 중산, 파주 운정, 용인 기흥, 다시 파주 교하... 지난 몇 해 동안 내가 산 곳들이다. 남보다 게으르게 살지 않았지만 일가친척을 다 뒤져 당장 돈 오백만원 빌릴 데 없는 알량한 배경을 가진 내가 그런 형편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은 단지 정직하게 일한다고 집을 마련하거나 돈을 모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나는 사회주의자로서 예수를 좇는 사람으로서 내 그런 형편에 만족한다.

아내는 나와 열세 해 동안 살면서 열세 번 이사를 다녔다. 유랑 생활은 아무래도 여자 쪽을 더 고단하게 만들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남편을 공경하는 봉건적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집이야 오르면 다른 데로 옮기면 되고 돈이야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정도면 되지만, 같이 사는 인간이 돈이나 명예 따위에 자존심을 내주는 꼴은 볼 수 없어서다. 내가 개혁과 진보의 경계를 줄타기하는 잘 나가는 지식상품의 행보를 접을 때도 그는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아내는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대화할 때 아내는 담배를 피우고 나는 술을 마시다가 얼마 전 그가 담배를 끊고 나선 함께 술을 마신다. 아파트나 땅 따위가 대화 소재가 되는 일은 없다. 그런 걸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런 걸 할 만한 형편이 되어본 적이 없다. 대화는 대개 아이들 문제에 대한 토론이거나 서로의 일에 대한 토론이다. 열 살 먹은 김단에게 일찌감치 ‘여성 의식’을 심어준 것 역시 토론의 산물이었다.

초고를 쓰면 대개 아내에게 읽히곤 한다. 뭘 쓰는가에 대해 그는 참견하지 않지만 배운 놈들이나 알아먹을 문장이나 여성에 대한 편견을 담은 문장은 냉정하게 골라낸다. 그런 검열이 필화의 방어막은 아니다. 언젠가 ‘그 페미니즘’이라는 글의 초고를 읽고 그는 말했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큰 소란이 날 테니 알아서 하라.” 물론 나는 알아서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아내는 혼자 있길 좋아하는 내 습성을 불편해했다. 미안해진 나는 내 습성을 고치려고 노력해왔다. 그 덕에 얼마 전 동네 친구들을 얻게 되었다. 나는 짬이 날 때마다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교하 숲에서 자전거를 탄다. 그들은 살아온 배경도 하는 일도 제각각이지만 아직 소년의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아내들 역시 소녀의 눈빛을 잃지 않았다.

나는 글 씁네 예술 합네 하는 인간들이 몸으로 땀 흘려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제가 세상의 배후라도 되는 양 허풍떠는 일을 죽도록 경멸해왔다. 나는 동네친구들에게 내가 단이와 건이의 아빠이자 모자 쓰고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길 바랐다. 나는 동네친구들에게 내가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이 내 알량한 허명이나 내 글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만 전해지길 바랐다.

얼마 전 그들은 인터넷에 ‘물푸레마을’이라는 카페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나를 ‘추장’이라 부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나를 만나 제 인생이 달라지고 있다고 그곳에 적어놓았다. 그들은 나를 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변화하는 중이다. 물론 세상에는 나를 추장이라 불러줄 사람보다는 딱하게 여길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나는 안다. 그게 오늘 세상의 가치이고 그런 세상을 변화하는 일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작은 변화에서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나는 풍요롭게 살고 있다.(씨네21 2003/10/08)
2003/10/08 00:16 2003/10/08 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