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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3/07/23 수작
  2. 2003/07/09 활동가
2003/07/23 00:11
몇 해 전에 강준만이 <조선일보>에 협조적인 지식인들을 매달 게시한 일이 있다. ‘목표가 정당해도 방법이 정당하지 않다면 잘못이다’ 식의 지당한 말씀들(이 나는 종종 역겹다. 이를테면, 어떤 폭력의 위협도 없는 안온함 속에서 주장되는 ‘폭력은 모두 나쁘다’,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보다 귀하다’ 따위 빤질빤질한 말들이) 덕에 그 일은 중단되었는데, 그 후 강준만의 운동은 꾸준히 진행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조선일보>에 협조하는 일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보기 어렵게 되었다.

요즘 들어 다시 그런 말들을 종종 듣게 된다. 특정한 신문을 반대하는 건 자유지만 그런 선택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뭐 그런 말들이다. 그런 말이 다시 불거지는 데 아무런 배경이 없는 건 아니다. <조선일보>와 사이가 나쁜 노무현이라는 이가 대통령이 되면서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것이 그 본래 의미 외에 현 정권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포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준만의 5중대’라 불리던 시절이나 진보적 주제에 집중하는 지금이나 <조선일보>에 한결같은 나지만, 오늘 <조선일보> 반대가 갖는 그런 이중적 의미는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조선일보>는 우리 모두에게 면죄부를 발부해주는 전지전능한 악당이 아니다.”라는 신윤동육의 의견에 찬성한다. 시민의 지위를 확보한 사람들에겐 여전히 <조선일보>가 악이고 <한겨레>가 선일 수 있겠지만, 시민에 이르지 못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겐 <조선일보>가 악이라면 <한겨레>는 차악이다.

나는 특정한 신문에 협조하고 안 하고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말을 존중한다. 그런 말에 걸맞은 신문을 두고,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이 할 때라면 말이다. 특정 ‘신문’이 아니라 특정 ‘범죄조직’인 <조선일보>를 두고 그런 말은 도무지 걸맞지 않는다.(신문이 사실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는가 진보적으로 해석하는가는 해당 신문이 선택할 문제다. 그러나 사실 자체를 아예 날조하거나 진실을 감춘다면 그건 더 이상 신문이 아니라 범죄조직이다. <조선일보>는 줄곧 그래 왔다.)

그리고 그런 말은 적어도 ‘범죄조직에 협조하지 않는 정도’의 양식은 갖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강준만이 등장한 지 한두 해도 아니고 <조선일보>가 어떻다는 건 어지간한 사람이라면(특히 <조선일보>에서 원고를 청탁할 만한 사람이라면) 모르기 어렵게 된 마당에 굳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그저 <조선일보>에 글을 씀으로써 겪어야 하는 이런저런 불편을 덜어보려는 수작일 뿐이다.

나는 누가 <조선일보>에 글을 쓴다 해서 애써 비난할 생각은 없다. 내가 하고많은 일 가운데 하필이면 출판 일을 하다보니(빌어먹을!) 갖은 교양과 지성을 자랑하는 동업자들(쌍팔년의 민주화 운동 이력을 주렁주렁 매단 느끼한 중년남성들의 출판사에서 미래와 생명을 고민하는 신선하고 청량하기 짝이 없는 출판사까지)이 하나같이 술자리에선 <조선일보> 욕을 하면서 하나같이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고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물리도록 보아온 터다.

써라. 써서 짭짤한 원고료 받아 귀여운 새끼 운동화도 바꿔주고 늙은 어미 맛난 것도 사드려라. 기왕이면 사진도 크게 박아, 옛 애인과 재회도 하고 동네에서 명사 행세도 실컷 해라. 다만 고작 그런 이유로 지식 넝마들을 팔아넘기는 주제에 무슨 대단한 자유주의적 양식이라도 지키는 양 떠들지는 마라. 그 범죄조직에 숨이 넘어간 사람들이 얼마며 그 범죄조직 덕에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인지 잘 알면서, 제발이지 허튼 수작들 부리지 마라.(씨네21 2003/07/23)
2003/07/23 00:11 2003/07/23 00:11
2003/07/09 00:10
“어이, B급!” 박래군은 늘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른다. 작년에 페미니즘 일로 괜스리 시끄러울 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나를 “마초!”라고 부르곤 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내 성격에, 다른 누가 그랬다면 바로 코라도 주저 앉혔을 것이다. 박래군이 그러면 그냥 “저 웬수.”하며 웃고 만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고 그의 그런 장난끼 어린 조롱엔 무슨 대단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나에 대한 속 깊은 염려와 조심스런 지지가 담겨 있다. (설사, 그게 진짜 조롱이라 한들 어떤가. 현역 활동가인 그가 나처럼 입이나 놀리는 얼치기 좌파를 조롱하는 건 눈곱만큼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몇 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를 의심했다. 그가 지나치게 좋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처럼 어디서나 좋은 사람 소리를 듣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옳음과 그름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근거하면,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대개 가장 세련된 처세술을 가진 위선자들이다.

박래군과 친해지면서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면서 옳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거니 싶어졌다. 나는 확실히 박래군과 친해졌다. 그러나 내가 박래군과 친해졌다는 건 박래군과 사적으로 친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활동가로서 삶과 친해졌다는 뜻이다. 활동가도 인간인지라 대개 제 신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박래군은 지난 십수 년 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궂은 부위에서, 빛도 이름도 나지 않는 그런 운동을 해왔다.

노동운동을 하던 박래군이 그렇게 된 일이 있다. 박래군은 1988년 ‘광주학살 원흉처단’을 외치며 제 몸을 불사른 박래전 열사의 친형이다. 동생의 주검과 그 주검이 남긴 신념을 수습한 박래군은 잇따르는 수많은 주검들과 그 주검들이 남긴 수많은 신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를 쓴 1991년을 전후로, 박래군이 수습하고 장례를 치룬 죽음은 50여건에 이른다. 그는 ‘장의사’라 불렸다. 박래군은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기 이전에, 비탄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다.

“명동성당이라고? 엊그제 에바다*라며.” “야, 그게 언젠데. 너한테 전화한 다음날 들어왔어. 벌써 9일째야.” “그랬어. 네이스 반대 농성 얘긴 들었는데 박래군이 있는 건 몰랐지. 신부들이 뭐라 안 해.” “나가라 그러지.” “한심한 X들. 예수가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싫어했지.” “요즘 다 그런걸 뭐.” “몸은 어때.” “이번엔 준비를 좀 했어. 괜찮아.” “필요한 건.” “노숙 단식에 뭐가 필요하겠냐. 저녁에 한번 놀러나 와라.” “가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나 같은 놈이 가서 분위기나 흐려지지.” “어유, 겸손할 줄도 알아.” “나야 가진 게 겸손뿐이지. 내 맛난 것 한 보따리 싸가지고 갈게.”

싱거운 농을 주고받으며 전화기를 내려놓지만 속은 끓어오른다. ‘세상이 갈수록 지랄 같아지는구나. 6년 전에 전자주민증인가 하는 것도 여론에 밀려 폐기됐었는데 극우 반동들이 밀린다는 오늘 그보다 더 악랄한 네이스를 두고 하네 마네 난리니 온 나라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걸까. 싸울 수밖에,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불과 몇 분 전 안온하던 내 속은 점점 더 뜨겁게 끓어오른다. 활동가는 분노를 실어 나른다.

* 지난 7년 동안 평택 에바다농아원은 ‘법이 멈추는 공간’이었다. 도둑들은 농아어린이 70여명을 인신매매하고 강제노동, 임금착취에다 국고보조금 및 후원금을 횡령했고, 6명이 변사했다. 지난 5월 28일, 똥물을 뒤집어쓰고 폭행을 당하는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민주이사진이 에바다를 접수했다. 사람들아, 에바다를 기억하자.(씨네21 2003/07/09)
2003/07/09 00:10 2003/07/09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