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 날이던가. 나와 소주잔을 기울이던 선배가 환호하는 군중을 보며 말했다. “안 됐군. 그래도 실망하는 데 일년은 걸리겠지.” 내가 대꾸했다. “사람 스타일이 그렇게까지 안 걸릴 것 같아요. 이회창을 따돌렸을 때 김영삼한테 달려가는 거 봤잖아요.”
노무현의 스타일. 그게 언제나 나빴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노무현이 극적으로 대통령이 되는 중요한 힘이었다. 역겨운 스타일의 중년남성들로 가득 찬 한국 제도 정치권에서 노무현의 솔직하고 화끈한 스타일은 사람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저 이가 대통령이 되면 이 역겨운 정치도 신선해지리라, 마법처럼.
오버의 연속. 그런 걸 두고 ‘입만 벌리면 실패한다’고 하던가. 대통령이 되자 그 스타일은 간단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솔직함과 화끈함은 단순함과 오만함으로 밝혀졌다. 하여튼 노무현의 스타일은 갈수록 무너지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정신건강은 갈수록 정처 없어져간다.
그러나 노무현의 스타일은 여전히 노무현을 돕기도 한다. 노무현의 스타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스타일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정작 내용은 덮어두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그의 단순함과 오만함 앞에서 “무슨 말을 저 따위로 하는 거야”, 짜증이나 내고는 좀더 진지하게 노무현의 문제를 따져보기를 성가셔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잊는 건 노무현의 스타일이 살아나건 무너지건 그 스타일 속에 든 노무현의 정치적 내용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가 부시 앞에서 천박하게 말했든 위엄 있게 말했든 정작 말하려고 한 바, 즉 한미관계에 대한 그의 의견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정치적 의견은 그의 개인적 인격이나 스타일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의 ‘사회적 인격’, 즉 이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개인적 인격이 개인적 행태로 반영되듯 사회적 인격(이념)은 사회적 행태로 반영된다. 그러나 사회적 인격(이념)은 매우 복잡한 사회적 이해관계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규정되기에 대개 더욱 오차 없이 반영된다.
오늘 한 사람의 이념을 가늠하는 가장 정확한 잣대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야 말로 오늘 세상의 정치, 사회, 문화적 현상들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이 모든 착취가 모든 사회적 악행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이름으로 기획되고 집행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는 진보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매우 충성스런 정치인이다. 이라크 침략전쟁, 한미관계, 노동운동 따위 이런저런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일관된 보수적 태도는 놀랄 만한 일도, ‘대통령이 되더니 달라져서’도 아니다. 그런 모든 태도들은 단지 보수주의자로서 그의 이념을 오차 없이 반영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노무현의 개혁적 면모들도 대개 부풀려진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일보>와 지역감정 문제에 대한 그의 ‘용감한 도전’을 되새겨 보자. <조선일보>야 이미 그가 잘 보인다고 해서 잘 해줄 가능성이 없는 상황인데다 안티 조선 분위기도 무르익어 아예 맞서는 게 이득이었다. 지역감정을 무릅쓰고 부산에서 출마한 일도, 당내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그가 대통령 후보급으로 뛰어오르려면 획기적인 여론적 지지를 업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역시 당연한 선택이었다.
물론 그런 행동들과 관련해서도 노무현의 진심이 무엇이었나를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노무현과 사귀려는 게 아니라면, 그의 개인적 인격이나 스타일은 접고 그의 사회적 인격(이념)에 집중하는 게 좋다. 하여튼 오늘 노무현은 온 세상의 이목을 제 스타일에 집중시킴으로써,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보수 정치에 침을 뱉고 돌아설 수많은 순간들을 예방하는 보수의 전사로, 숭고한 보수의 전사로 살아가는 중이다.(씨네21 2003/06/25)
2003/06/25 00:08
2003/06/12 00:07
1917 년 러시아혁명을 시작으로 지구 곳곳에 사회주의 나라들이 생겨났다. 그 나라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나라들과 긴장하며 자본주의의 야만을 극복한 사회를 시도했다. 70여년 뒤, 그 가운데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현실 사회주의'의 그런 결과는 대개 사회주의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판단으로 이어진다. 사회주의란 실현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끔찍한 것이라고 말이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약탈적 형태로 내달리는 오늘 우리는 10여년 전 그 일을 한번쯤 되새길 만하다. 그 사회주의는 우리가 확신하듯 그저 끔찍한 것이었나. 만일 그렇다면 모든 사회주의적 시도는 미망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주의에 존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무너지고 만 게 애석한 일이라면,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해 좀더 사려 깊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회주의를 판단하는 이런저런 정보들이란 대개 (CNN에 의해 걸러진 이라크처럼) 다시는 지구상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걸러진 것이다. 사실 한 사회가 살 만한 곳인가를 판단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하는 실수는 사회주의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자유'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 자유란 단지 자본주의적 자유다.
자본주의가 야만의 체제인 건 경쟁력 있는(잘나고 능력 있는) 소수의 인간은 한없이 안락하고, 평범한(정직하고 성실할 뿐인) 다수의 인간은 한없이 고단한 인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안락한 소수에겐 고단하게 살아볼 자유마저 보장되지만 고단한 다수에겐 고단하게 살 자유만 보장된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어디에나 진열되어 있지만, 돈이 없으면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적 자유가 제한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제한은 좀더 많은 정당한 자유를 위한 제한이다. 사회주의에선 경쟁력 있는 소수가 평범한 다수보다 몇백 몇천배 안락할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선 그게 정당한 일일 수 있지만 사회주의에서 염치없고 부도덕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선 제 아무리 경쟁력 없는 사람도 사회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한다면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자유가 보장된다.
경쟁력 있는 소수에게 사회주의란 달갑지 않은 것이다. 나처럼 잘나고 능력있는 사람이 저런 평범한 멍청이들과 큰 차이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 견딜 수 없는 모욕일 테니. 그러나 한없이 고단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여전히 희망의 근거다. 사회주의는 유식한 혁명가들의 고민거리가 아니라 나와 내 새끼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거리인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되새겨보는 일은 그런 고민을 푸는 한 갈래가 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목소리나 사회주의에 살았으되 자본주의적 자유를 갈망했던 특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다. 우리가 이라크 전쟁의 진실을 이라크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듯 말이다.
불가리아의 장수마을(요구르트 먹고 장수한다는 광고에 나온 그 마을)엔 더이상 장수노인들이 없다. 마을 묘지엔 1990년즈음 세해 동안 죽은 사람들의 묘로 그득하다. 마을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다. "사회주의 시절엔 안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진 않았다. 소박하나마 집과 자동차도 나왔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노인들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 노인들의 장수비결은 요구르트가 아니라 사회주의였던 셈이다. 그게 그 마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한다.(씨네21 2003/06/12)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약탈적 형태로 내달리는 오늘 우리는 10여년 전 그 일을 한번쯤 되새길 만하다. 그 사회주의는 우리가 확신하듯 그저 끔찍한 것이었나. 만일 그렇다면 모든 사회주의적 시도는 미망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주의에 존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무너지고 만 게 애석한 일이라면,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해 좀더 사려 깊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회주의를 판단하는 이런저런 정보들이란 대개 (CNN에 의해 걸러진 이라크처럼) 다시는 지구상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걸러진 것이다. 사실 한 사회가 살 만한 곳인가를 판단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하는 실수는 사회주의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자유'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 자유란 단지 자본주의적 자유다.
자본주의가 야만의 체제인 건 경쟁력 있는(잘나고 능력 있는) 소수의 인간은 한없이 안락하고, 평범한(정직하고 성실할 뿐인) 다수의 인간은 한없이 고단한 인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안락한 소수에겐 고단하게 살아볼 자유마저 보장되지만 고단한 다수에겐 고단하게 살 자유만 보장된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어디에나 진열되어 있지만, 돈이 없으면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적 자유가 제한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제한은 좀더 많은 정당한 자유를 위한 제한이다. 사회주의에선 경쟁력 있는 소수가 평범한 다수보다 몇백 몇천배 안락할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선 그게 정당한 일일 수 있지만 사회주의에서 염치없고 부도덕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선 제 아무리 경쟁력 없는 사람도 사회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한다면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자유가 보장된다.
경쟁력 있는 소수에게 사회주의란 달갑지 않은 것이다. 나처럼 잘나고 능력있는 사람이 저런 평범한 멍청이들과 큰 차이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 견딜 수 없는 모욕일 테니. 그러나 한없이 고단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여전히 희망의 근거다. 사회주의는 유식한 혁명가들의 고민거리가 아니라 나와 내 새끼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거리인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되새겨보는 일은 그런 고민을 푸는 한 갈래가 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목소리나 사회주의에 살았으되 자본주의적 자유를 갈망했던 특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다. 우리가 이라크 전쟁의 진실을 이라크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듯 말이다.
불가리아의 장수마을(요구르트 먹고 장수한다는 광고에 나온 그 마을)엔 더이상 장수노인들이 없다. 마을 묘지엔 1990년즈음 세해 동안 죽은 사람들의 묘로 그득하다. 마을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다. "사회주의 시절엔 안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진 않았다. 소박하나마 집과 자동차도 나왔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노인들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 노인들의 장수비결은 요구르트가 아니라 사회주의였던 셈이다. 그게 그 마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한다.(씨네21 200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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