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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3/01/08 선거 후기
2003/01/08 00:04
선거 이틀 전인가 <대학생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봄에 창간할 '어린이 진보 교양지' 준비 때문에 원고고 인터뷰고 안하고 지내는 중이지만 그 신문이 어떻게 살림을 꾸려가는가를 알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오마이뉴스>에 그 인터뷰가 올랐던 모양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일주일쯤 더 지나 송년 술자리에서야 알았다. "김규항, 권영길 비판적 지지"라는 제목이라 했고, 나를 비난하는 글들이 돌아다닌다고도 했다. "어떤 놈들은 내가 노무현 안 찍는다고 '이념적 도식주의에 빠졌다'고 욕하고, 어떤 놈들은 내가 권영길 안 찍는다고 '이념을 저버렸다'고 욕하니, 내 이념은 완전히 걸레군."

나는 비판적이든 그냥이든 권영길을 지지하지 않는다. 나는 노동자 민중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 언제나 제도적이고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권영길을 찍었다. 그런 내 선택은 "네 이념대로 찍어라"라는 내 글과 배치된다. 그러나 그 글은 진보주의자가 보수후보를 찍는 '이념적 자살'을 비판한 것이다. 나는 오늘 한국의 제도 정치가 진보주의자의 이념을 온전히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도 정치란 정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제도권 진보 정치란 진보정치의 일부일 뿐이다.

그 일부는 일부로서 중요하다. 여전히 한국의 제도정치는 사회주의는커녕 사민주의 의원 한명 없는 완전한 보수판이다. 이런 판에서 선거의 과제는 무엇보다 '보수가 아닌 정치'를 늘이는 데 있다. 나는 민주노동당이 대중적 호감을 얻는 사민주의 정당으로 성장해가길 바란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정치의 구현인가를 따지는 일은 그 당의 의원수가 '김종필의 졸개들'보다 많아질 즈음으로 미루어도 좋다. 우리는 사민주의의 개량적 반동성도 잊지 않아야 하지만 사민주의가 노동자 민중에게 갖다 줄 실익도 잊지 않아야 한다.

내가 권영길을 찍은 건 바꿔 말하면 김영규를 안 찍은 것이다. 나는 사회당이 내세우는 이념을 존중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내세우는 이념과 그들이 제도 선거를 대하는 방식이 영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회당에게 제도 선거가 전술인지 전부인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선거 구호들이 공허하게 들리는 일 역시 그런 괴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들이 제도정치의 구현에 집중하려면 그들의 이념을, 이념의 구현에 집중하려면 제도 정치를 대하는 방식을 조정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다.

내 관심은 오히려 제도 바깥에서 진지하고 성실하게 진보정치의 미래를 모색하는 단체들에 있다. 식구들의 8할 이상이 현장과 관련을 가지면서 비제도 투쟁정당을 모색하는 '노동자의 힘', 현존 사회주의에서 나타난 문제들에 대한 대안으로 평의회 체제를 모색하는 부산의'노동자민중회의'나 전주의 '노동의 미래를 여는 현장연대' 같은 곳들이다. 그 단체들은 반공주의자들의 선전을 제 체험인양 암송하는 인간들이 말하듯 망상에 빠진 스탈린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원칙과 신념을 버리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이다.

오늘 한국 진보정치를 가로막는 벽은 누구보다 진보주의자들,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의 정치적 관심은 무슨 큰 빛이라도 진 듯 온통 제도정치, 보수정치에만 쏠려있다. 우리는 민주당이니 개혁당이니 노사모니 하는 보수정치의 살림엔 속속들이 빤하면서, 노동자의 힘이나 노동자민중회의나 노동의 미래를 여는 현장연대 같은 내 살림은 아예 있든가 말든가 식이다. 이러니 무슨 놈의 진보정치가 되겠는가. 정신 차리고 힘을 기르자. 다음 선거에서도 비판적 지지니 사표니 하는 되어먹지 못한 소리에 휘둘린대서야 우리가 살아있되 산 목숨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작은책 2003.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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