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7'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2/07/31 민족과 계급 메모 (5)
  2. 2002/07/18 편지3 - 하나 되면 죽는 사람들
  3. 2002/07/01 김규항 인터뷰 (1)
2002/07/31 10:17
(참세상 게시판 답변으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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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극우 이념과 파시즘의 기초이기도 한 민족주의는 남한에서 진보적인 함의를 가져왔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36년 동안 지배되었던 경험과, 지난 50여년 동안의 분단 상황과 관련한 것이다. 일제에 대한 독립은 당시 진보 세력에게도 가장 중요한 과제였고 수많은 진보주의자들은 보다 실천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이 곧 분단으로 귀결된 후, 적어도 남한에서 민족주의는 분단 체제 자체를 부인하는 불온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남한 지배계급은 민족이니 통일이라는 말을 지배체제 내에서만 독점적으로 사용했다. 다른 말로 하면, 민간 영역에서 자주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민족이나 통일은 지배계급과 충돌하는 매우 진보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남한에서 민족주의가 미국과 관련을 맺게 된 건, 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다. 광주항쟁 무렵까지 남한의 사회운동이란 진보적 변혁운동이 아니라 극단적인 군사파시즘을 반대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절차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남한의 사회운동 세력은 반미를 포함하지 않았고, 미국은 여전히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남았다. 광주항쟁이 참혹하게 진압된 후 비로소 남한의 사회운동세력은 광주에서 미국의 역할을 파악했다. 반미 구호가 없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던 남한에서 반미 구호가 터지기 시작했다. 반미는 미국을 반대한다는 의미와 함께, 남한 사회운동세력의 성역이 사라졌다는 의미를 가졌다. 남한 사회운동세력은 급속히 진보적 변혁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런 변혁운동의 흐름은 적어도 90년대 초반 동구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무너질 때까지 활발했다. 오늘 남한에서 반미 의식은 보편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물론 그런 변화는 단지 쇼트트랙 경기 사건이나 여중생 압사사건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그런 일은 지난
50여년 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철저히 외면되어 왔다) 광주항쟁의 경험에서 시작한 반미의식이 결국 대중영역으로 확산되는 현상이다. 오늘 남한에서 반미의식은 정당한 것이고 진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질 때만 그렇다. 반미의 대상은 미국인 전체가 아니라 미국의 지배계급,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끝없는 전쟁을 통해 제3세계 민중의 피를 빠는 미제국주의자들이다. 부시와 미국 노동자들은 전혀 하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주영과 남한 노동자들은 전혀 하나가 아니다. 정주영이 사망하자, 민족통일 문제에 집중한다는 일부 진보운동 세력은 그의 통일 업적을 칭송했다. 정주영은 통일 업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통일운동의 업적마저 돈으로 구입한 사람이다.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을 때, 민족은 짐짓 반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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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한국의 진보운동 세력은 계급 문제에 집중하는 민중민주(PD) 세력과 민족/통일 문제에 집중하는 민족해방(NL) 세력으로 크게 나뉘어진다. 두 세력은 ‘노선이 다른 동료’로서 존재하지만, 일부에선 ‘적보다 노선이 다른 동료를 더 적대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90년대 초반에 이르러 동구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자, 스탈린주의의 자정 능력을 갖지 못한 민중민주 세력은 급속히 세를 잃었고, 전반적인 우경화 바람은 민족해방 세력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10여년이 지나, 오늘 시점에서 민족과 통일을 말하는 것은 여전히 정당한 것이지만, 무조건적으로 북한정권을 좇는 일부 경향은 그 자체로 반동적이다. 나는 북한 체제가 일제 부역자 처리 문제를 비롯하여 그 출발부터 적어도 남한 체제보다는 정당했다고 생각하고, 이른바 주체 사상 역시 미제국주의와 적대적 긴장을 유지해 온 북한의 특별한 상황과
관련해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북한에 대한 평가도 신중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북한에 대해 극히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북한의 문제를 북한과 다른 체제의 잣대(흔히들 북한의 인권을 말하지만, 거주 이동의 자유나 사적 소유의 자유 따위 자유권들은 실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개념이다)로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의 진보운동 세력이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 정치인들이다.)의 입장을 무원칙하게 좇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도 존중하기 어렵다. 그런 종북적 태도의 기본적인 모순은, 신념과 원칙을 기반으로 행동해야 하는 진보활동가가, 때로는 당연히 신념과 원칙을 벗어나서 행동해야 하는 현실 정치인들을 무작정 따르는 데 있다. 그런 종북적인 경향은 민족 해방 세력에 대한 무분별한 폄하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계급에 집중하는 사람들과 민족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고민없이 서로 반목하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태도가 아니다. 민족이나 통일 얘기를 하면 저거 주사파군 한다거나, 계급 이야기를 하면 저거 피디군 하는 식은 전혀 진보운동과 관계가 없는 인간적 경박함이다. 제 아무리 잘못된 편향이 실재하고 또 서로 비판하더라도, 남한의 진보 운동이 계급과 민족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우리의 선배/어른들에게서 피디니 엔엘이니 하는 구분을 무색케 하는 차원을 가진 분들을 볼 수 있다. 언뜻 떠오르는 대로 말하자면, 백기완 선생이나 홍근수 목사, 또 서준식, 채만수 선생 같은 분들이다. 그들은 피디의 입장에서나 엔엘의 입장에서나 기꺼이 존경할 만한 분들이고, 우리에게 성숙한 진보주의자의 차원을 몸소 보여주는 분들이다. 경박한 반목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그런 실재하는 인간들에게서 배우는 일로 풀 수 있다. 경박함은 사상이나 이념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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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반미의식이 두리뭉실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정확한 대상으로 집중되어 진보적인 함의를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당연한 임무일 것이다. 우리는 두리뭉실한 반미감정이 자칫 엉뚱하게 사용될 수도 있음을 ‘반일감정’을 돌이켜 봄으로써 알 수 있다. 알다시피, 반일감정은 일제에 의한 36년 동안의 침략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경험은 일본 민족과 한국 민족 사이의 일이 아니라, 일본 지배세력(제국주의세력)과 한국 민중 사이의 일이었다. 한국의 지배새력은 대개 그 시기에도 안락했으며, 반대로 일본 민중들은 한국 민중들과 다를 바 없이 수탈당하고 전쟁에 끌려나가 죽어야 했다. 분단 이후 남한 체제는 일제 부역자들을 골간으로 출발했고, 박정의 이후 군사독재 정권들은 일본 극우세력(제국주의세력)의 구체적인 지도를 받아왔다. 그러나 남한의 지배세력은 줄곧 일체의 일본 것을 금하는 반일정책을 고수해왔다. 정기적으로 제공되는 독도 망언이나 공중파 뉴스에서 주기적으로 기획되는 ‘젊은이들의 왜색’ 기사 따위들만으로 남한 지배세력은 남한 민중의 두리뭉실한 반일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배세력은 매우 효율적으로 민중들의 반일감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독도에 그렇게도 흥분하는 사람들은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해선 어땠는가.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울부짓는, 이젠 늙고 병들어 몇 남지 않은 그들에겐 말이다. 민족주의는 어떤 계급에게 사용되는가가 문제다.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을 때, 민족은 짐짓 반동적이다
2002/07/31 10:17 2002/07/31 10:17
2002/07/18 23:56
해미님. 월드컵이 끝나고 히딩크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여진은 남습니다. 고단한 사람들이 모처럼 맞은 축제의 달콤한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에서 “4700만 우리 모두 가슴 벅차게 행복했습니다”로 이어지는 삼성카드의 심령부흥회풍 광고(이 기괴한 광고에 왜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걸까요)나, 월드컵에 돈을 댄 KT와 거저먹은 SK의 싸움질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장사꾼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팔아먹는 것이고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애국심’은 ‘대한민국의 구매력’일 뿐입니다.

인텔리들의 호들갑 역시 여전합니다. 몇달 전 ‘노풍’을 87년 민주화운동과 연결시켜 ‘혁명’이라 부르던 그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혁명을 갖다 붙입니다. 소싯적에 잠시 혁명에 몰두했으되 이젠 누구보다 혁명을 회의하는 그들이 혁명이라는 말을 그리 즐겨 쓰는 건 희한해 보이지만, 2년 전 낙천낙선운동에 슬그머니 혁명을 갖다 붙인(과연 그 혁명은 무엇을 바꾸었던가요) 다음부터 그들은 무엇에든 기회가 되는 대로 혁명을 갖다 붙입니다. 10여년 전 별다른 자기 설명없이 제 혁명에 침을 뱉은 그들로선 혁명을 일반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인텔리들이 그렇게 혁명을 갖다 붙이는 좀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그걸 진짜 혁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속이 아니라 세상의 외곽, 술집이나 세미나실에서 세상에 대한 관찰기를 교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창백한 눈에 650만이 넘는 붉은 인파가 거리를 메우고 함성을 지르는 광경은 그저 ‘혁명’인 것입니다. 해미님. 우습지 않습니까. 꿈도 희망도 없는 고단한 일상에 찌들 대로 찌든 사람들이 제 나라 축구팀이 세계 16강 진출이라는 목표치를 두번이나 경신했다면 너도나도 광장으로 뛰쳐나오는 일이야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거기에 무슨 의식성이 있고 혁명이 있다는 겁니까.

인텔리들은 늘 뒤늦게 흥분하고 먼저 절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대중의 저력’에 뒤늦게 흥분하고 ‘대중의 반동’에 먼저 절망하는 발작과 패닉의 끝없는 반복상태를 보입니다. 대중이 그저 묵묵히 흐르는 강물이라면 그들은 그 강물의 굽이굽이 변화무쌍한 속도에 시시각각 깡총거리는 송사리들입니다. 노풍은 조금만 진중한 사람이라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민주당 경선이야 민주당 안에서 하는 건데 한나라당도 아니고 민주당이라면 한국 평균은 되는 사람들일 터, 그런 사람들이 몇년 전 앞머리 이상하게 치켜세우고 박정희 흉내나 내던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뽑는단 말입니까.

월드컵과 관련한 인텔리들의 호들갑을 그저 볼썽사나운 꼴로만 넘길 수 없는 건, 그들이 연신 ‘국민 통합’이니 ‘국운 융성’이니 ‘민족적 환희’니 하는 국가주의적 선동을 해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매우 급진적이라 알려진 한 문화과학자는 “국민적 열정을 국민적 캠페인으로”라는 언사를 스스럼없이 사용합니다. 해미님. 진보주의의 출발은 세상을 계급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물론 국가가 있고 국경이 있는 한 국가나 민족의 구분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한국 국적을 가졌거나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다 내 나라 내 동포는 아닙니다. 일생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오신 해미님 아버님은 과연 이건희씨와 동포입니까, 켄 로치의 <빵과 장미>에 나오는 3등 미국인들과 동포입니까.

세상엔 응당 하나 되어야 할 것과 갈라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는 자본과 노동자가 적대적 긴장을 이루는 사회이고 우리는 그 분명한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건 도덕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실재하는 현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직하게 땀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끼리의 ‘연대’이지 적대하는 계급끼리의 ‘통합’이 아닙니다. 한국의 자본과 노동자가 ‘애국’의 이름으로 하나될 때 노동자에게 돌아올 건 죽음뿐입니다. 해미님. 오늘은 ‘계급’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해드리려 했는데 그렇지 못했군요. 그럼 다음에...(씨네21 2002/07/18)
2002/07/18 23:56 2002/07/18 23:56
2002/07/01 21:26
이 인터뷰는 제가 한 게 아니라 지승호라는 인터뷰어가 저를 인터뷰한 것입니다. 2002년 6월에 했으니 좀 낡은 내용도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제 생각을 비교적 정확하게 적고 있는 인터뷰입니다. '그 페미니즘''그놈들과 그년들'이라는 글로 빚어진 주류 페미니스트들과의 갈등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인터뷰이기도 합니다.


'그 페미니즘' '그놈들과 그년들'이라는 칼럼으로 페미니즘 진영과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김규항씨를 만나 그에 대한 입장과 월드컵에 관한 생각, 최근의 정치흐름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고종석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비장함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 비장함이 글의 주제와 어울려서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을 때 비장함은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 비장함은 그른 것이다. 김규항 글의 비장함은 대체로 옳고 좋은 것 같다. 그가 칼럼에서 다루는 주제는 대개 진지한 것들이고, 그 비장함이 실릴 때 김규항의 메세지는 매우 효율적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이번의 그 칼럼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이번엔 그 비장함이 그르거나, 나빴던 것일까? 강준만 교수는 "지식인들이 숭배하는 그 어떤 서구의 석학들로부터도 건질 수 없었던 그 어떤 소중한 깨달음을 김규항에게서 자주 얻는다. 김규항의 글을 꿰뚫는 한 가지 중요한 정신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위선에 대한 강한 혐오다"라고 말한 바 있다.

확실히 김규항은 위선을 아주 혐오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보충 설명했고, 그 글이 애정에서 비롯된 비판이었다는 것과 '그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어떤 페미니즘과는 더 확실히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승호(이하 지) - 예전에 쓰신 글 중에 "(98년 프랑스 월드컵때) 월드컵은 이 나라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불편했다. 하지만 4년에 한번씩 온 나라가 '짜고 미치는' 축제에 파시즘의 혐의를 둘 수는 없었다"고 하셨는데요. 이번 월드컵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규항(이하 김) - 비슷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월드컵에 흥분하고 열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보지만, 그런 현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 국가주의로 몰고가거나 장사에 이용해먹으려는 데는 비판적입니다.

지 - 인권운동사랑방 논평 보셨습니까? 거기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이 상당히 과격한 반발을 했는데요.

김 - 꽤 광범위해 보였지만 그런 반발이 보편적인 건 아닙니다.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성이
민주적인 분위기를 만든다고들 하는데, 함부로 아무렇게나 말하게 되는 측면이 좀더 강합니다. 저는 사랑방의 논평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랑방의 첫번째 논평이 대중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더 세심하게 드러내야 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진지하게 읽었다면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 논평은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조차 민족이 어떻고 국운이 어떻고 미쳐돌아가는 일방적인 상황에서 나왔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논평이 편향되었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편향된 얘깁니다.

지 - 저한테는 그것이 소수의견을 무시하거나, 탄압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 같아 씁쓸하던데요. 그런식으로 다수의 힘으로 말을 막거나 말하기 무섭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집단주의적인 측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김 - 집단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익명성에 숨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매우 특정한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오늘의 월드컵은 일종의 '주술'입니다. 우리보다 근대적이라는 나라 사람들도 별다른 게 없구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따져가며 행동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지 - 더 심한 나라들이 많죠. 영국도 그렇고.

김 - 대중들이 월드컵에 정신을 놓아버리는 건 그들이 그만큼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라고 외치는 사람 누구도, 자랑스러운 나라의 기준이 축구 순위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고단한 삶 속에서 참으로 오랜 만에, 다시 오지 않을 환희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 환희와 열광이 본격적인 국가주의로 가는 데는 의식성이 부여되어야 하는데, 알다시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라는 이들이 대거 그 짓을 했습니다.

지 - 사실 축구가 영국에서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시작됐고, 요즘의 월드컵은 국가주의보다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 - 축구가 원래 그랬던 건 아니지만 자본이 그렇게 사용해왔습니다. 물론 그건 축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월드컵과 축구를 분리해서 보고 싶습니다. 오늘의 월드컵은 단지 자본의 잔치이지만, 그럼에도 월드컵 속의 축구는 여전히 아름답고 정직한 육체의 향연입니다. 누구든 국가니 민족이니 하지 않고도 월드컵 속의 축구를 즐길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경우가 다릅니다. 그들은 월드컵의 본질이 뭔지 잘 알고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버린 현실을 잘 알고 있고, 그걸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 - 소위 강-진논쟁(강준만, 진중권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논란이 많은데요. 강준만을 지지하는 측은 '진중권의 예의없음이 지나쳤다'고 하고 진중권을 지지하는 측은 '할 수 있는 문제제기에 대한 과도한 대응이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김 - 제대로 읽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 노무현이 김영삼 만나고 할 때, 강준만선생이 노무현이 YS를 만난 것이 YS의 반성을 유도한다면 좋은 것일 수 있다 뭐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강선생의 실용주의가 갖는 의미를 존중하지만 그 말은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가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중권씨는 나름대로 현실주의적인 노선을 좇는 건 좋은데, 자신보다 왼쪽의 입장은 모조리
닭짓이라 한다거나 자신만이 옳다는 식의 태도는 문제라고 봅니다. 하여튼 두분의 갈등은 선거와 관련해서 일어났는데, 두분이 선거에 열중하는 건 좋은데 자신들이 단순한 선거운동원이 아니라 보편성을 좇는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선거운동원이라면 해당 선거의 결과에 모든 걸 걸어야 하지만 지식인은 좀더 장기적인 생각을 가져야 할테니까요.

지 - 강준만 교수를 '근대화의 기수'라고 평가하신 적이 있으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에 대해 도덕적 순결주의를 벗어나 시장과 언론 같은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라는 의견은 이치에 맞지 않는 무리한 훈수이며, 좌파에 대한 이념적 공격이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그것 역시 민주당 편향의 정치성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김 - '강준만'이라는 글은 강준만 선생을 비판한 게 아니라 강준만과 나는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걸 다르다고 했을 뿐이지요. 그런 얘길 굳이 하게 된 건 강준만의 활동을 존중하는 일과 강준만의 이념을 존중하는 일이 뒤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의 언론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일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일은 다르다는 겁니다. 언론개혁 운동이란 현실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현실을 좀더 합리적으로 만드는 운동입니다. 강선생은 제 이런 말에 마땅치 않아하시는 것 같은데 이건 서로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언론개혁운동을 무시해온 것도 아니었구요.

지 - 강진논쟁에 관련해서 강준만 교수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월간 인물과 사상에 3개월째 진중권에 관한 글이 나가고 있고, 무크지에서도 절반 가까운 분량으로 진중권을 공격하고 있는데, 그간 그렇게까지 공격받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공격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김 - 비판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비판의 내용이 문제겠지요. 제대로 읽어보지 않아서 판단하기 어렵지만, 강선생은 오래 전부터 그런 얘기를 신물나게 들어왔습니다. 말은 맞는데 말하는 방식이 거칠다느니(웃음) 그런 비판은 언뜻 공감을 주지만 실은 가장 너절한 것입니다.

지 - 진보적인 남성으로 여성운동에 대한 공격이 쉽지는 않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심스러운 질문인데요.

김 - 편하게 얘기하세요(웃음)

지 - 주위에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더 짜증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혹시 그런 글을 쓰게 된것은, 최보은씨와 같이 '쾌도난담'을 진행하면서 느낀 불편함 때문은 아니었습니까?


김 - 분명히 해두고 싶은 건, 그 글은 최보은씨를 대상으로 쓴 게 아닙니다. <씨네21>에 실린 최보은씨의 ‘그 페미니스트 입 열다’라는 기사도 그런 컨셉이던데, 제 글을 제대로 안 읽어서 그렇겠지요. 최보은씨와 안지 오래지만 저는 그가 어떤 일관된 논리를 가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장점이 참 많은 사람인데 유독 여성문제에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고 개인적으로 그건 그가 자신의 체험에 매몰되어 있어서라 생각해왔습니다. '박근혜 지지' 발언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저 '최보은답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글을 쓴 이유는 최보은의 발언이 아니라 최보은의 발언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반응 때문입니다. 최보은의 발언은 페미니즘의 대의를 망칠 만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뜨겁게 얼싸안았다 그 심정을 잘 안다는 식의 정서적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었지요. 저는 그런 반응이 한국 페미니즘의 오늘 상태를 전적으로 대변하진 않더라도 매우 강하게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염려하는 분들은 그러게 뭐하러 페미니즘을 건드렸느냐고도 하지만, 오히려 저는 그 지경에서도 아무도 그런 얘길 안 했다는 게 희한할 뿐입니다.

지 - 김어준은 "규항이형의 말이 옳지만, 아직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배려하는 방식이
아니다"라고 했는데요.

김 - 그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런 듣기 좋은 말이 페미니스트들의 기분을 낫게 만들어주는 것 외에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페미니즘에 실재하는 문제를 비판하는 건 바로 페미니즘을 위한 일입니다.

지 - IF의 이숙인은 "지적한 부분이 어떤 사회운동에게도 있는 딜레마인데, 왜 유독 여성운동에서만 맵고 독하게 작용하는가?"하고 반문했는데요.

김 - 저는 한국 사회의 판관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권리로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순위를 매길 수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저는 김지하 선생이나 이현주 목사도 비판했는데 그분들은 제 청년기의 소중한 스승들이고 여전히 존경합니다. 저는 페미니즘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 게 아니라, 단지 페미니즘 문제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운동입니다. 제 생각에, 모든 운동엔 두가지 필수적인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에 대한 분명한 '자부'이고, 둘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입니다. 자부가 없으면 운동은 비루해지고, 겸손이 없으면 운동은 빗나갑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자부만큼 겸손을 갖는다면 그런 반문은 안 해도 될 겁니다.

지 - 페미니스트들이 다른 체험에는 무지하거나 자신이 하는 운동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이 부족하다는 뜻인가요?

김 -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은 '아픈 체험의 연대' 이기도 합니다.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온갖 억울한 체험들이 페미니즘의 바탕에 정서적으로 깔려 있지요. 신분이나 처지가 다름에도 남성 쪽의 공격에는 자연스럽게 뭉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실재하기에, 그건 당연한 것이고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부분이 페미니즘을 빗나가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체험이란 매우 주관적이면서도 강한 확신을 갖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죽을병 걸렸다 살아난 기독교인이나, 가족을 빨갱이에게 잃은 사람은 기독교나 이념에 대해 심각한 아집을 갖게 됩니다. 그런 아집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긴 어렵지만, 사회적으로 표현될 땐 엄격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얼마 전 최보은과 가깝고 저와도 아는 사람을 얼마 전 만났는데, 자기는 개인적으로는 최보은을 비판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회적으로 비판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그럴 자신은 없습니다. 공중 앞에 제출하는 의견이기에 엄격해지는 겁니다.

지 - 그렇다면 박근혜 지지론을 반대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 - 저는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좌제는 누구에게 사용되어도 연좌제입니다. 제가 박근혜를 반대하는 건 그가 박정희의 정치적 딸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부터 대통령 후보로 성장하기 까지 박근혜씨는 철저히 박정희의 아우라를 사용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이 박근혜 지지를 논리적으로는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건 아까 말한 대로 '아픈 체험의 연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을 한 심정을 나는 이해한다,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 체험이 다른 체험을 무시할 권리는 없습니다.
얼마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30여년 전에 중앙정보부에서 수사 받다 죽은 서울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이 타살로 여겨지며,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유족들은 즉시 국가와 당시 중정부장 등을 상대로 10억원의 배상 소송을 했지요. 그런데 그들이 승소해서 10억을 받는다고 한들 30년 동안 지속되는 그 아픈 체험이 배상될 수 있습니까. 최종길씨의 가족들에도 물론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데, 박근혜 지지 발언에 공감한다는 여성들은 과연 그 여성들 앞에서도 '여성의 이름으로' 박근혜 지지를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알기 바랍니다. 그들이 그 발언을 분명히 반성하지 않는 한 그들은 여성의 적이고 치마 두른 마초들입니다. 이 생각은 전혀 타협할 뜻이 없습니다.

지 - 일부 페미니즘 진영에 대한 문제제기를 생각하시면서 고민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 후 주변 여성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김 - 개인적으로는 받은 이메일은 공감한다는 쪽도 많았는데, 다들 공개적으로 지지하긴 어렵다더군요(웃음) 통쾌했다는 남성 편지엔 '너 같은 마초 새끼 좋으라고 쓴 게 아니다’라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지요. 한 여자 선배는 대학 선생이고 진보정당 쪽에서 여성위원장 제의도 받고 하는 분인데, 어디서고 제 얘기 나오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열심히 설명한다더군요. 아내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민주적인지, 딸을 얼마나 당당하게 키우는지, 아들에게 올바른 성의식을 길러주려 얼마나 노력하는지 등등. 저보다 더 억울해 하면서.(웃음) 서준식 선생은 저를 옹호하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러면 판이 이상하게 될 것 같다고 웃으시더군요. 제가 부디 품위 유지하시라 했습니다. 하여튼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친 셈입니다. 아내에게도 그렇고.

지 - 야간비행에서 서준식 선생님의 책을 출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김 - 네. 서준식 옥중서한(1971-1988), 850페이지 짜리 양장본입니다. 이 놈들아 이게 바로 책이다 하는 마음으로 냅니다. 때론 객기가 소중할 수도 있습니다. 고전이 될만한 책입니다.

지 - 권혁범 교수가 '노력하는 마초'라는 말에 대해 '인종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말처럼 모순적이다. 여성주의에 절대적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그것에 대한 무지 혹은 근원적 거부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김 - 무슨 말이 그렇게 어렵고 거창한가요 노력하는 마초라는 건....

지 - 전 일종의 겸손의 의미로 받아들였는데요.

김 - 그렇죠. 자괴감의 표현입니다. 아까 여성문제에 대해 듣기 좋은 말 하는 게 오히려 더 무성의한 것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자지라는 성기를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억압자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 한국입니다. 저는 여성문제에 협조적이라고 해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남성도 보기 민망합니다. 과연 제 세대쯤 되는 남성이 아무리 노력한들 수십년 동안 체화된 마초적 습속을 완전히 씻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나쁜놈들일 뿐입니다. 제 글에 분노한 여성들이 그 말을 오해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남성인 권혁범씨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가 과연 '세상의 온기와 냉기를 직접 느끼는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지 - 무지했기 때문에 용감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도 여성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발언하지 않는 상태에서 옳든 그르든 간에 비주류에 대한 진지한 반론을 해주어서 오히려 고마웠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대화파트너로 인정해줬다는 거죠.

김 - 멋진 분이군요. 그쯤 되어야 마초들이 위협을 느끼지요.(웃음)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약자의 비굴한 태도를 벗어나길 바랍니다. 우리의 아픔을 알아주는가 몰라주는가 만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건 동정을 바라는 약자의 태도이지 싸우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남성들에게 값싸게 이용됩니다. 은근슬쩍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우호적인 남성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죠. '그 페미니즘' 이런 거 쓰면 구제 받기 어려운 마초 취급을 받는 거구요. 알다시피, 제 또래 이상의 한국 남성들은 보수고 진보고 할 것 없이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워낙 그렇게 교육되고 관습이 되어서 그런데 우습게도 그런 편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놈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건 여성들을 존중해서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들을 무서워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여자들에게 욕먹는 걸 용납할 수 없어서, 성가셔서일 뿐이지요. 상대를 업신여길 때는 절대 비판하지 않는 법입니다.

지 - 지지하는 정당은 있으십니까?

김- 없습니다. 제 이념은 사회당이나 민노당 좌파에 가깝겠지만, 한 당을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현재의 진보정당이 실재하는 진보 이념을 포괄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를 싸잡아 의회주의라 폄하하는데도 반대합니다. 저는 민주당 후보를 염두에 둔 당선 가능성 운운은 우습게 생각하지만, 진보정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 문제엔 관심이 많습니다. 민노당 우파라 해도 보수 후보가 되는 것보다는 백배 낫기 때문입니다.


지 - 강준만 교수 같은 분은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김 - 강선생은 실용주의자이고 스스로 그렇게 자처하는 분입니다. 실용주의자는 옳은 것보다는 가능한 것을 좇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 분의 역할이고 저는 그걸 존중합니다. 하지만 모든 지식인이 실용주의자라면 제도 정치권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강선생은 최악과 차악의 차이에 집중하는 분이라면, 저는 차악과 선한 것의 좀더 근본적인 차이에 집중합니다.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그분이 단기적인 문제에 성실하게 집중하니까 저 같은 사람이 좀더 장기적인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지 - 조중동을 옹호하기 위해 볼테르의 말까지 인용했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요즘 언론인들에 대한 고소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홍세화 씨가 사람 하나 버려놓았군요 (웃음)

지 -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이회창이 되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니들 땜에 이회창이 됐다'는 비판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우리는 니들한테 양보하려 존재하느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기본 입장이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태도로 볼 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몇 년 후 한국이 남미 꼴이 될 가능성이 좀더 높다는 게 사실 걱정입니다. 정태인씨는 그런 이유에서 노무현을 돕겠다고 하던데, 요즘 노무현씨 하는 것 보면 돕기도 쉽지 않겠더군요. 노무현의 새로운 적은 바로 노무현입니다.

지 - 폭주족에 관한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폭주족에 대한 사회적인 적의는 지나치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어떤 영화를 보니까 폭주족에 짜증을 내던 택시 승객이 그 폭주족이 사고로 죽자 '그 놈 참 잘 뒈졌다'고 말하더군요.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이나 고속도로에서 과속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죠.

김 - 저도 오토바이를 오래 탔습니다만, 폭주족은 두가지죠. 할리데이비슨 타는 귀족 폭주족과 125씨씨 이하 타는 하층 폭주족. 우리가 말하는 폭주족은 대개 후자고 그 비판엔 하찮은 놈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데 대한 계급적 경멸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계급적 경멸을 기반으로 하는 폭주족에 대한 비판이 전국민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중파 뉴스 같은 데서 폭주족이 어떻고 떠드는 것을 보면 비위가 상합니다. 그들이 뉴스 시간 30분 동안 저지르는 범죄는 어떻습니까.

지 - 그 아이들이 정말 나쁜 짓을 하려면 강도를 하지 않을까요?(웃음)

김 -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몰아가면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미래나 꿈을 갖지 못하게 하는 우리가 죄인입니다. 제 아무리 막되어먹고 불량한 사람도 품위있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게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아는 순간 사람은 파행하게 됩니다. 점잔 빼는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 - 청소년 성범죄자 신상공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그게 정말 청소년을 위하는 건지, 청소년을 통제하자는 건지, 아니면 범죄자들에 대해 복수하자는 건지 헷갈릴때가 있던데요.(웃음) 성폭행 같은 것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그런 측면이 없지 않나하는 우려도 있구요. 몇몇 사람을 단죄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구요.

김 - 생각이 좀 바뀌었는데… 명단 공개는 반대합니다. 인권 문제이고, 인권은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입니다. 사실 원조교제라는 것 자체가 우스운 얘기입니다. 그건 성인 남성과 10대 여성의 사랑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죠. 그것이 사랑인지 매매춘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연애라 해도 나이 더 먹고 돈버는 사람이 비용 내는 게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따지고 들면 오늘의 결혼제도라는 것 자체가 대부분 공인된 매매춘입니다. 경제적 능력을 가진 남성에게 평생 동안 독점적인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계약이지요. 10대 소녀들이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줄 생각은 안 하면서 명단공개 같은 선정적 단죄를 사용하는 건 구조적인 문제를 감정적으로 감추려는 위선입니다.

지 - 과격한 일부 영 페미니스트들의 경우 지나친 피해의식 탓인지, 빠져나갈 구멍도 주지 않고, 몰아 붙이거나, 인간으로서 당연히 고마워해야할 호의를 베풀어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준식 선생님 같은 분도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잖습니까? 조직보위 논리니 뭐니 얘기할 진 몰라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앞으로도 계속 해야할 사람이기도 하구요) 농담 한마디로 매도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장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습니다.

김 - 아까 말했듯 우리를 알아주는가 몰라주는가에만 집착하는 건 동정을 바라는 약자의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로 얻을 수 있는 건 심리적 위안뿐이지요. 운동이란 그 운동에 이미 동의하는 사람들끼리의 한풀이가 아닙니다. 그 운동에 찬성하지 않거나, 회의하는 사람들을 한명이라도 끌어들여 세를 늘이는 게 운동이지요. 후배가 월장 회원들이 제 글을 비판하는 토론기사를 보내주어 읽어보았는데, 경박한 마초 흉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그들은 경박한 태도를 당당한 태도로 착각합니다. 운동은 인간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운동 사회의 성폭력 문제 거론 할 때 조직보위논리를 많이 공격합니다. 저는 그런 공격이 정당하다 생각하지만, 페미니스트 자신들도 조직보위논리에 빠진 경우가 많습니다. 박근혜 지지 발언에 대한 두리뭉실한 반응도 결국 그런 경우지요.


지 - 월장논쟁 같은데서의 남성들의 반응에 대해 '악성마초'라고 하셨는데요.

김 - 그랬습니다. 하지만 월장 자체에 대한 평가는 별개입니다. 싸우는 여성들의 목표는 남성들의 권력을 빼앗아 남성이 누리던 것을 누려보는 게 아니라, 남성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좀더 품위있는 여성의 정신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드는 게 아니라면 페미니즘이 존재할 이유도 지지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지 -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이 폭력의 피해자로 노출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김 - 일반적인 게 꼭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가정 폭력은 알다시피 대부분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정 폭력이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인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몇 년 전 저희 아버님 동네 수퍼 아주머니가 남편을 폭행해서 죽였습니다. 이웃 아주머니들 얘기가 뭐냐 하면 평소엔 저녁부터 때리더니 그날은 아침부터 때리더라 였습니다. 저는 이런 특수한 예로 일반적인 상황을 뒤집겠다는 게 아니라, 가정 폭력의 핵심은 생리적 남성에 의한 생리적 여성의 폭력이 아니라 권력자에 의한 피억압자의 폭력이라는 겁니다. 그걸 잊고 감정적으로 매몰되면 박근혜 지지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지 - 홍세화씨와의 대담에서 '신세대가 어찌 보면 늙었다. 제도권 게임의 법칙을 일찍이 파악해 냉소적으로 산다고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월드컵때 20대가 우리의 패배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였다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우려되는 부분이 그런 부분인데요.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전세계가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집단주의로 흐를 우려 역시 있고.

김 - 제가 대중들을 열심히 옹호했으니 이면도 얘기해야겠지요.(웃음) 아까 말했듯 별다른
고민없이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게 그 자체로 우려할 만한 국가주의라고 할 순 없지만, 국가주의에 사용되기 충분한 상태인 건 분명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이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말아야할 부분, 적대적으로 긴장해야할 부분을 무마해버리는 효과 때문이지요. 사랑방 논평에 대한 집단주의적인 반발도 보편적이지 않지만 보편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지 - 몇몇 운동가만을 가지고 여성운동의 전부인 것처럼 오도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김 - 저는 그 글에서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고 했습니다. 90년대 이후라는 말은 90년대 이전과의 변별성의 표현이고, 주류란 양적인 차원을 넘어 말 그대로 주요한 흐름이란 뜻입니다. 90년대 이후 어떤 불건전한 경향이 페미니즘 전반을 두루뭉실하게 휩쓸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 제 생각이 부당하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들의 두리뭉실한 상태를 먼저 분명히 구분하기 바랍니다. 이를테면 박근혜 지지 발언은 페미니즘의 건전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분명히 드러낼 기회였고, 반드시 그랬어야 합니다. 그런 발언엔 침묵하다가 그런 침묵에 대해 비판받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하는 건 떳떳치 못합니다. 그 글에서 "내 주변의 진보주의자 남성들은 하나같이 페미니즘을 못마땅해 한다"라는 구절 기억하십니까?

지 - 네, 기억합니다.

김 - 그게 원래 '진보주의자 남성'이 아니라 '진보주의자'였습니다.

지 - 불리함을 자초하신 거네요.

김 - 사실 진보주의자가 맞는데, 왠지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고쳤지요.(웃음)

지 - 그것이 평소 스타일인 비장미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것 같은데요. 기왕 논쟁하는거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하신 겁니까?(웃음)

김 - 그런 대단한 의미를 둔 건 아니고, 그녕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데… 하여튼 그렇게 고쳤다고 아내한테도 핀잔께나 들었습니다.(웃음) 그러나 진정성을 가진 여성이라면 그런 차이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겁니다. 조선희씨는 뜬금없이 저를 ‘현실의 경험에서 떠나 관념적’이라고 적었던데, 그걸 읽고 저는 역시 이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온세상의 일에 보편적인 양식을 가진 듯 행동하지만, 실은 무엇 하나도 양식있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기 책을 조선일보 기자에게 갖다주고 홍보를 부탁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선일보 기자와 마주 앉아 문화계의 근황들을 양식있는 어휘로 교환하면서 말입니다. 사람이 양식있게 산다는 건 양식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크든 작든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일에 양식있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그걸 지키는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지 - 지식인들의 사회적 의견에는 좀 더 엄격한 태도가 필요한데, 편향된 페미니즘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말씀인가요?

김 -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우리의 일상에 매우 구체적인 관습으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성의 도리, 여자다움, 착한 여자 따위들로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관습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모든 관습엔 이념이 숨어 있고 그 관습을 통해 이익을 누리는 계급이 존재합니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게 하는 관습은 지배계급의 가장 효율적인 지배 방식입니다. 세상의 절반만 지배하면서 전체를 지배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윤은 노동자의 잉여 노동에서 발생합니다. 그런데 남성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유지시키는 것은 여성입니다.
여성들은 남성을 먹이고 입히고 재웁니다. 게다가 다음 노동력을 생산하고 기르기까지 하지요. 그게 자본주의에서 가사 노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자본은 알다시피 여성에게는 한푼도 지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노동이 여성의 당연한 도리라는 관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착취는 충분히 유지되는 것이지요. 그런 구조를 꿰뚫어보지 않는다면 여성에게 해방은 없습니다. 여성들이 생리적 남성을 최종적인 적으로 규정하는 건 실은 자신에 대한 억압 구조를 스스로 은폐하는 일입니다.

지 - 여성들이 자신에 대한 계급적 억압을 보지 못하고, 단지 눈에 보이는 일반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를 스스로 은폐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여성들의 싸움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까요?

김 - 여성들의 싸움은 구조적인 측면과 관습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관습이 사회 구조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이미 체화된 관습은 구조를 해결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의 문제는 대개 관습적인 부분에만, 말하자면 생리적 남성과의 싸움에만 매달리는 데 있습니다. 장상이라는 사람 문제도 그런데, 그는 생리적 여성이지만 한국 보수영역의 가부장적 정신에 누구보다 충실하게 적응해온 사람입니다. 그는 성공한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정신에 투항한 여성입니다. 그와 관련한 모든 추문을 보면 가부장적 매뉴로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생리적 여성이라고 옹호하는 건 여성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인앤아웃>이라는 영화에 보면 커밍아웃한 게이 선생님을 옹호하는 졸업생이 게이선생이 학생들에게 무슨 게이파라도 쏜다는 말이냐? 말합니다. 장상을 옹호하는 여성들은 생리적 여성이 총리가 되면 온 나라에 무슨 여성파라도 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저는 그가 치마 두른 남성으로만 보입니다.

지 - 인물과 사상에 실렸던 '김규항의 지식인 비판은 어떻게 소비되는가?'라는 글 보셨습니까? 지식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 오히려 '모두 다 똑같아'라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고 썼는데요. 그 글이 '강준만'이라는 글을 쓰신 이후에 나온 것 같은데, 항간에는 '간접적인 공격'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김 - 간접적인 공격이라… 설사 강선생이 저 좀 공격하면 어떻습니까.(웃음) 그런 게 다 근래 몇년 새 대거 등장한 종합 논평가들'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문제에도 실존적인 투신을 하지 않으면서 마치 구름 위에라도 앉은 듯 이놈은 이게 문제고 저놈은 저게 문제고 한가한 훈수만 일삼지요. 묵묵히 진보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을 낡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비웃어가면서 말입니다.
그 글은 부산대 학생이 쓴 건데 저는 이 친구 똑똑한 걸 하면서 읽었습니다. 고맙다는 편지와 제 책도 보내주고 그랬는데, 조금 설명하면 전 한국 지식인 전체를 싸잡아 공격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강준만 선생처럼 최악을 모면하는 일에 집중하는 분과 저처럼 차악조차 거부하는 사람은 공격 대상의 범위가 다른 것이지요. 강선생은 적시할 수 있는 몇 명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만, 제 얘기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는 겁니다. 이를테면 80년대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목숨이라도 바칠 것처럼 소리치다가 고작 10년 이 지난 오늘 진보적 신념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이를테면 저와 동갑내기인 신현준씨는 저를 비난하며 옛 좌파는 쿨했다고 말합니다. 그게 과연 정치경제학 이론가였다는 사람이 할 말인지, 참 딱한 일입니다. 우리 세대가 대개 비루하게 살아가지만, 비루하게 살더라도 비루한 삶을 자랑할 건 없습니다.

지 - "글쓰기란 용접공이 용접을 하듯 한사람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한가지 노동이다. 용접공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건너다닐 다리를 용접하는 것처럼 지식인의 글쓰기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용할 정신의 다리를 용접하는 일이다"고 하셨는데요. 사회구성원과 갈등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계몽하려한다고 욕하기도 하구요.

김 - 다행스럽게도 저는 계몽하려느냐는 비판을 받은 기억은 없습니다. 글이 비교적 쉬워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욕을 얻어먹은 적은 많지요. 김지하, 이현주 선생님, 의사들, 해병들, 페미니스트들… 제가 제일 우습게 생각하는 글쓰기는 '안전한 글쓰기'입니다. 항상 점잖은 얼굴로 안전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겨레의 전속필자로서 맨날 조선일보 욕을 하는 건 정말이지 안전한 일입니다.

진보주의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것인데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현재 세상의 경계를 건드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확연히 적대적인 대상만을 비판하는 방식은 단지 안락을 좇는 색다른 방식입니다. 확연하고 일반적인 경계에서 드러나 있지 않은 애매한 부분, 세부에 대해서 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진중권은 그런 점에서 높게 평가합니다. 경계를 많이 건드렸죠. 최근 서해교전이나 여중생 압사사건과 관련한 의견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엉뚱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안전한 글쓰기만을 하는 사람보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전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곤란한 문제엔 언제나 두루뭉술하게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이를테면 제가 페미니즘을 비판한 일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 반드시 그런 식으로 답변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얻는 것은 존경과 품위의 증가이지만, 경계를 건드리는 사람이 얻는 것은 오해와 욕설과 고단함이죠. 진보주의자가 존경과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세상은 오래 전에 변했을 겁니다.

지 - '글을 쓰는 건 그로 인해 사회가 모기다리만큼이라도 영향받으라고 쓰는 것이다'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김 - 하나마나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진보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한겨레나 우리 모두의 자리에서 조선일보 욕하는 것은 이젠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스레 진보적이랄 게 없습니다. 진보는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증명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급진적인 주장도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 자체론 대단치 않지만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스템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진보적 가치란 계속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몇 년 전에 조선일보 반대를 말하는 것과 오늘 조선일보 반대를 말하는 건 전혀 다른 가치를 갖습니다.

지 - "글은 구원이다라는 말은 개소리다. 구원은 행동에 있다"고 하셨는데, 공격적인 글쓰기를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십니까?

김 - 제가 무슨 대단한 진보주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분도 있는데, 진보운동은 글이나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땀을 흘려 조직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글쓰기도 진보 운동의 일부일 수는 있겠지만, 진보 운동 가운데 가장 낮고 주변적인 운동이겠지요. 진보주의자에게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쓰기에 사용된다면 저는 그게 대단하든 대단치 않든 제 역할에 진지하게 임할 뿐입니다. 요즘은 이른바 지식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 누가 누구하고 논쟁을 했다느니 누가 이런 걸 썼다느니 하는 것보다는, 현장 쪽에 좀더 실천적으로 결합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승호)
2002/07/01 21:26 2002/07/01 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