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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2/06/27 편지2- 보수는 공기처럼 (21)
  2. 2002/06/10 편지 1 - 진보주의자는 행복합니까
2002/06/27 23:55
해미님. 한국 축구팀이 월드컵 8강에 오른 아침 서울은 열기로 가득합니다. 이런저런 방송과 신문들(심지어 와 <뉴스위크>를 포함한)이 요청한 월드컵에 대한 ‘독설’도 모두 사절하고, 그저 ‘축구나 보며’ 지내자 했습니다. 고단한 사람들이 모처럼 맞은 축제를 모욕하고 싶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축제를 분별할 책임은 없지만 축제를 즐길권리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양식있는’ 지식인들의 요사스런 행태는 연신 내 속을 긁는군요. 그들은 붉은 악마의 구호에서 반공 콤플렉스에 대한 저항을, 시청 앞 응원전에서 6월항쟁의 함성을, 급기야 보라 역사가 바뀌었노라, 국민 통합을 외칩니다. 하긴, 무솔리니도 소싯적엔 사회주의자였지요.

지난번 편지에서 나는 진보는 ‘부러 선택한 상태’지만 보수는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라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라는 표현을 하곤 하지만, 오늘 세상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보수입니다. 보수가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인 가장 큰 이유는 보수적 선전이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능과 맞아.”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지.” “사회주의는 이미 끝난 얘기야.” 우리가 별 생각없이 당연한 삶의 이치인 양 반복하는 이 말들은 실은 가장 강력하고 교활한 보수적 선전들입니다.

그 선전들에 최종적인 신뢰감을 심어주는 건 언제나 ‘양식있는’ 지식인들입니다. ‘진보적 지식인’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들은 한때 진보주의자였고 이젠 진보를 회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늘 그들의 나른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양식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진보적 이력을 들먹입니다. 그들은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던 순간의 격정을 들먹이고 체 게바라나 마르코스나 켄 로치의 낭만을 들먹입니다. 그들이 ‘지난, 저기’의 진보를 들먹이는 이유는 단지 ‘오늘, 여기’의 진보에 혐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보수의 개’로 살아가는 제 ‘오늘 여기’에 품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진보주의자는 오늘 세상의 주인에 꿇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해서 진보주의자는 세상의 외부에 처하게 마련이고(어리석은 사람들은 진보의 이런 상태를 관념성과 결벽증의 소산이라 말하지요) 진보적 선전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거칠며 위험해 보이게 마련입니다. 오늘 세상의 주인이 통제하는 모든 제도 미디어들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미디어들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입니다. 보수적 선전은 공기처럼 자연스럽지만 진보적 선전은 짐짓 혐오스럽습니다. 이를테면 <한겨레>가 <조선일보>와 함께 국가주의적 광기로 폭발한 오늘치 <진보넷 참세상>의 머릿기사는 ‘단식 9일째, 시그 노동자들의 피울음을 먹고사는 영풍’입니다.

우리에게 쉽게 포착되는 ‘명성을 동반한’ 진보란 대개 세상에 수용된 진보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론 진보지만 다른 한편으론 ‘보수의 액세서리’입니다. 나는 보수의 액세서리인 주제에 엉뚱하게도 진보적 주장을 일삼는 경우입니다. 보기보다 실속있는 편은 아닙니다. “오로지 까대고 씹어대서 댄스가수적 인기를 누리는” 나는 글쓰기로 한달에 13만3천원을 법니다. 나는 세상의 내부에선 “현실과 경험에서 유리된 도그마에 빠진 위태로운 사람”이라, 세상의 외부에선 “우파와 어울리는 상업주의적 글쟁이”이라 모욕당합니다. 나에겐 세상 내부의 안락도 세상 외부의 안락도 없습니다. 처량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그런 내 처량한 처지 덕에 안도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더한 모욕 속에서 나보다 더 처량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얘긴 다음에 해야겠군요(월드컵에 대해 해미님 동갑내기가 쓴 바른 글이 있습니다. <한겨레> 6월13일치에 실린 홍익대 1학년 문상욱씨의 ‘월드컵과 진보’라는 글인데, 그 글 앞에서 ‘양식있는’ 지식인들은 혀를 깨물거나 붓을 꺾을 만합니다. 웹에서라도 찾아 꼭 읽어보시지요).(씨네21 2002/06/27)
2002/06/27 23:55 2002/06/27 23:55
2002/06/10 23:54
해미님. 서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해미라는 곳이 있습니다. 역시 서해안에 있는 비인과 함께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땅이름 가운데 하나지요. 나는 그 이정표를 볼 때마다 마음이 환해지곤 합니다. 특히, 그 이정표를 기다리는 것을 잊고 있다 우연처럼 그 이정표를 만나는 순간은 정말 근사합니다. 사람이든 땅이든 아름다운 이름은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그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편지 잘 읽었습니다. 해미님의 긴 편지는 질문으로 가득합니다. 나는 오늘부터 그질문들에 느릿느릿 답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편지 끝에 적힌 “진보주의자는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이 내 안에 아득한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진-보-주-의-자-는-행-복-합-니-까…. 어린 시절, 깊은 우물 안으로 머리통을 잔뜩 구부려 넣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처럼 말입니다. 조금 멋을 부리자면, 이 편지는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서론이 길었군요. 강연에서 만난 청중에게 늘 묻습니다. 진보가 뭡니까?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답이 나오는 일은 드뭅니다. 몰라서라기보다는, 뭐든 어렵고 그럴싸하게 말해야 한다는 못된 버릇 때문이겠지요. 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보수란 오늘 세상을 지키려는 생각이고) 진보란 오늘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입니다. 그 둘의 끊입없는 긴장 상태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흔히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서구식 문명을 등진 소수 부족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아예 이기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있습니다. 이기심은 본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길러진 사회적 습성일 뿐입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주장은 대개 사람이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라는 주장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기에 함께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건 본디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해미님은 그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 겁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연대로 세상을 바꾼 예는 얼마든 있습니다. 이를테면, 1980년 5월의 해방 광주입니다. 계엄군을 몰아낸 그 며칠 동안 광주는가장 조화로운 사회였습니다. 도시의 모든 기능이 자발적으로 작동했고, 그렇게 많은 무기들이 나돌았지만 단 한건의 절도조차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해방 광주의 주인공은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오히려 본능적일만치 진보적입니다. 해미님. 여기 대여섯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회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중 하나가 그 사회의 열매를 가로챕니다. 물론 그는 그 일을 숨기기 위해노력하겠지요. 그러나 누군가가 그 일을 알아채게 되고 그 일은 곧 사회에 알려집니다. 그 사회의 구조는 무척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이제, 사회는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조선일보>의 김대중 같은 이조차도 그 상황에선 짐짓 진보적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많은 강제와 함께 속해 있는 국가나 세계 같은 사회는, 그런 대여섯으로 이루어진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크고 복잡한 구조를 가집니다. 물론 사회 성원들의 열매를 가로채는 사람들의 제 일을 숨기려는 노력 역시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크고 복잡한 구조를 가집니다. 이쯤되면, 사람의 사회적 본능은 맥을 못 춥니다. 우리 주변에서 더할 나위 없이 선하고 정의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 국가나 세계 같은 거대사회의 문제에선 믿을 수 없을 만치 보수적인 경우를 보는 건 바로 그래서입니다.

그런 슬픈 부조화를 물리치는 힘, 제가 속한 사회를 분별하는 능력이 바로 ‘교양’입니다. 제 아무리 선하고 정의로운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교양이 부족하다면 단지 ‘보수의 개’로 살게 됩니다. 거칠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진보는 ‘부러 선택한 상태’지만 보수는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지에선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아, 빠트릴 뻔했군요. 대학생이 된 것 축하합니다. 연애와 여행을 많이 하기 바랍니다.(씨네21 2002/06/10)
2002/06/10 23:54 2002/06/10 2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