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강연을 며칠 앞두고 대학동기 ㅇ목사에게서 내려오면 꼭 만나자는 이메일이 왔다. ㅇ이라... 다른 친구에게 묻고서야 그가 누구인지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했고 노동현장에서도 5년 가량 활동했던 친구다. 세월이 흘러, 뒤늦게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전주에서 기독교사회복지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의 한 음식점에서 그와 술잔을 기울였다. "규항이 이 사람 그룹은 좀 특이했어..." 두런두런 익살을 섞어가며, 그가 그의 '동지들'에게 그 시절 나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었다.
웃음 지으며, 그 시절을 추억하던 나는 문득 ㄷ과 ㅎ을 생각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본질적으론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운동을 하던 둘은 올해 초 사회운동으로 이전했다. 둘을 생각하면 대견하고도 안쓰럽다. 더 이상 운동이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 아닌 세상에서 운동하는 둘을 생각하면 말이다. 지난해 초 둘을 처음 만나 나는 말했다. "텔레비전 토크쇼 같은 걸 보면 게스트의 10여 년 전 씨에프 장면을 보여주는 일만으로 폭소를 불러일으킨다. 자본 진영의 선전선동 기법은 10여년 새 혁명을 이루었다는 얘기다. 그들과 맞서 싸운다는 자네들의 기법은 10여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면 운동이 아니다. 내가 처음 만난 운동권 선배들은 학교 안에서 가장 호감 가는 사람들이었다. 요즘 신입생들이 운동권 선배들에게 어떤 인간적 호감을 느낄 거라 생각하나."
시간이 지나 그들과 좀더 친해지고 그들의 형편(세는 줄어들고 임무는 더욱 많아진)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내 '보편타당한 비판'을 반성했다. 그것은 운동이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던 시절(그 시절, 우리가 운동을 하는 건 말 그대로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었다. 군인들이 양민을 도살하고 그 도살자들이 직접 통치하던 시절이었다.)에 운동했던 사람이, 운동이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 아닌 오늘 힘들여 운동하는 사람에게 주는 차가운 '논평'이었다.
게다가 오늘 이른바 학생운동의 경직성과 미숙함은 세상을 바꾸는 일에 일생을 바치겠노라 후배들 앞에서 눈물로 맹세하다 90년대 들어 아무런 설명 없이 일제히 사라져버린, 선배와 후배 사이의 호감과 존경을 한 순간에 거두어버린 사람들이 마련한 것이다. 오늘 그들은 '운동했던 친구들'끼리 만나 '논평'하곤 한다. "요즘 운동권 애들 보면 한심해. 아니, 우리가 운동할 때는 말야..." 지나간 추억이나 들먹이는 되먹지 않은 주둥아리들에겐 이런 질문이 제격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오늘 어떻게 살고 있나."
학생운동은 쇠락하고 있다. 그것은 전체 운동의 침체와 관련한 일시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전체 운동에서 학생운동이 감당할 몫이 줄어들고 있다는 좀더 본질적인 상황을 뜻한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쇠락이 대학에서 진보의 쇠락을 전적으로 지시하는 건 아니다. 학생운동의 쇠락이 강조되는 가운데, 나는 오늘 대학에서 '운동권이 아닌 진보적청년들'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중요한 건 학생운동권이 얼마인가가 아니라 학생 가운데 진보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얼마인가, 그리고 그 신념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다. 이를테면 10년 전 대학에 진보적인 청년이 백이었고 오늘은 다섯이라 치자. 알다시피 그 백 가운데 여전히 신념을 간직한 사람은 하나가 채 안 된다. 오늘 다섯 가운데 10년 후 20년 후에 둘, 아니 하나라도 남는다면 그게 훨씬 좋은 것이다.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뀐다.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운동을 청산한 사람들이나 선택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지점들을 포함한)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운동하는 판사, 운동하는 국회의원, 운동하는 배우, 운동하는 코미디언, 운동하는 투수, 운동하는 장군, 운동하는 사장... 세상의 모든 지점에 운동이 스며들 때 세상은 비로소 바뀔 것이다.(씨네21 2001/12/19)
2001/12/19 23:28
2001/12/06 23:07
이른바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였는가. 사회주의의 본래 의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인민의 정부는 인민들을 착취하고 공포에 떨게 했다. 그것은 자본과 국가의 공조라는 자본주의 체제를 더욱 단순화한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했다." 희한한 일은 그런 명료한 답변과 전혀 모순되는 주장이 그 명료한 답변과 늘 함께 한다는 것이다. 주장은 이렇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그 근거는 (사회주의가 아닌)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다."
이 아귀가 안 맞는 주장은 오늘 인간해방의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관련지으려는 모든 진지한 모색들에 적지 않은 몽환적 혼돈을 선사한다. 물론, 혼돈에 아무런 배경이 없는 건 아니다.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었지만, 분명히 사회주의의 시도이긴 했다. 바꿔 말하면 20세기에 사회주의의 시도는 대거 '사회주의가 아닌 것'으로 귀결했다. 그 비극은 당연히 반공주의자들에게 최종적 자신감(사회주의는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라는)을 불어넣었다. 그 비극은 또한 강력한 반공주의의 장벽 덕에 현실 사회주의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대외선전용 모델하우스에 안거하던 한국의 인탤리들을 제풀에 무너지게 했다.
비극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가. 비극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맑스는 물론 그 비극을 목도하진 못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첫 번째 시도가 일어나기 30여 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맑스의 삶의 족적에서조차 그런 비극의 편린을 무수히 엿볼 수 있다. 1872년 맑스는 자신이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터내셔널의 갈등을 보다 못해 결국 해산에 이르게 한다. 만일 내로라하는 국제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그 갈등이 그 갈등의 외피처럼 단지 정당한 견해의 충돌이었다면, 토론과 논쟁을 통해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맑스는 그런 극단적인 해결책을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견해의 충돌을 외피로 하는 그 갈등의 내용 속에 '보편적인' 인간적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질투 욕심 음모 폭력 등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의 근원이자 어떤 숭고한 정신 속에도 능히 암약하는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의 문제였다. 어이없는 얘기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사회주의가 아닌 것'으로 귀결한 원인 또한 대개 거기에 있다. 이기심은 억압에 처한 상황보다는 억압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마련된 강력한 정부는 바로 그 강력함 덕분에 그 정부를 이루는 인간들(빛나는 혁명 이력을 가진, 역시 평범한 인간인)의 이기심을 고양시킨다. 강력한 혁명성과 폭발하는 이기심의 멀어지는 간격은 결국 비극을 낳는다.
이 숙명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민의 정부에 대한 인민들의 '견제 능력'이다. 우리는 스탈린이 죽었을 때 그 가련한 인민들이 위대한 아버지의 주검을 보기 위해 경쟁하다 수백 명이 깔려죽은 일을 알고 있다.(이 일을 두고 어느 한가한 논평가는 현실 사회주의가 '합의독재'였다 말한다. 차라리 합의할 능력이라도 있었더라면.) 견제 능력은커녕 내 주인은 나라는 최소한의 근대정신조차 갖지 못한 그 인민들은 '사회주의가 아닌 것'을 일찌감치 예비했다.
한국에서 근대 정신이 시작된 건 불과 몇년 새다.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반공주의 말고도 세상을 보는 방법이 여럿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최초의 존중받을 만한 우익들(강준만을 필두로 한 양심적 자유주의자들)이 출현하면서 한국을 장악한 극우 정신의 추악한 가면이 벗겨지고 있다. 중립적으로 피력하자면, 사회주의의 시도에 가장 회의적인 듯한 한국에 사회주의의 시도를 위한 희망이 마련되는 중이다.(한겨레 2001. 12. 6)
이 아귀가 안 맞는 주장은 오늘 인간해방의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관련지으려는 모든 진지한 모색들에 적지 않은 몽환적 혼돈을 선사한다. 물론, 혼돈에 아무런 배경이 없는 건 아니다.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었지만, 분명히 사회주의의 시도이긴 했다. 바꿔 말하면 20세기에 사회주의의 시도는 대거 '사회주의가 아닌 것'으로 귀결했다. 그 비극은 당연히 반공주의자들에게 최종적 자신감(사회주의는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라는)을 불어넣었다. 그 비극은 또한 강력한 반공주의의 장벽 덕에 현실 사회주의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대외선전용 모델하우스에 안거하던 한국의 인탤리들을 제풀에 무너지게 했다.
비극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가. 비극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맑스는 물론 그 비극을 목도하진 못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첫 번째 시도가 일어나기 30여 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맑스의 삶의 족적에서조차 그런 비극의 편린을 무수히 엿볼 수 있다. 1872년 맑스는 자신이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터내셔널의 갈등을 보다 못해 결국 해산에 이르게 한다. 만일 내로라하는 국제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그 갈등이 그 갈등의 외피처럼 단지 정당한 견해의 충돌이었다면, 토론과 논쟁을 통해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맑스는 그런 극단적인 해결책을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견해의 충돌을 외피로 하는 그 갈등의 내용 속에 '보편적인' 인간적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질투 욕심 음모 폭력 등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의 근원이자 어떤 숭고한 정신 속에도 능히 암약하는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의 문제였다. 어이없는 얘기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사회주의가 아닌 것'으로 귀결한 원인 또한 대개 거기에 있다. 이기심은 억압에 처한 상황보다는 억압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마련된 강력한 정부는 바로 그 강력함 덕분에 그 정부를 이루는 인간들(빛나는 혁명 이력을 가진, 역시 평범한 인간인)의 이기심을 고양시킨다. 강력한 혁명성과 폭발하는 이기심의 멀어지는 간격은 결국 비극을 낳는다.
이 숙명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민의 정부에 대한 인민들의 '견제 능력'이다. 우리는 스탈린이 죽었을 때 그 가련한 인민들이 위대한 아버지의 주검을 보기 위해 경쟁하다 수백 명이 깔려죽은 일을 알고 있다.(이 일을 두고 어느 한가한 논평가는 현실 사회주의가 '합의독재'였다 말한다. 차라리 합의할 능력이라도 있었더라면.) 견제 능력은커녕 내 주인은 나라는 최소한의 근대정신조차 갖지 못한 그 인민들은 '사회주의가 아닌 것'을 일찌감치 예비했다.
한국에서 근대 정신이 시작된 건 불과 몇년 새다.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반공주의 말고도 세상을 보는 방법이 여럿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최초의 존중받을 만한 우익들(강준만을 필두로 한 양심적 자유주의자들)이 출현하면서 한국을 장악한 극우 정신의 추악한 가면이 벗겨지고 있다. 중립적으로 피력하자면, 사회주의의 시도에 가장 회의적인 듯한 한국에 사회주의의 시도를 위한 희망이 마련되는 중이다.(한겨레 200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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