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0'에 해당되는 글 2건

  1. 1999/10/26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2. 1999/10/05 글쓰기 1.5년차의 단상
1999/10/26 16:48
"...그 사람에 대한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불신감. 이 한 단어로 족할 것 같습니다... 그의 변명은 간단하겠죠. 우리는 너무 조급했다, 내 그릇이 작았다. (항상 개운치 않은 건 그는 항상 '나는 감옥에서 엄청난 도를 깨우치고 더 큰 사람이 되었다'는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풍기고 다닌다는 거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최근의 그의 신작 시를 읽을 때, 저는 예전의 그의 글과 마찬가지로 그 특유의 '가쁜 호흡', 어떤 '집요한 욕망'을 느낍니다... 그가 연예인이 되기로 작정했다면, 좀 덜 짜증나는 연예인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올해 초, 모스크바 유학 중인 옛 사노맹 조직원이 내 글을 읽고 보내 온 편지다. 나는 글에서 박노해(출소 이후의)를 두 번 언급했고 그 글들은 박노해에 대한 분명한 경멸을 담고 있었다. 준법서약서를 쓰고 나오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고 남기로 한 동료들을 "유연하지 못하다" 하고, 진보의 기본을 저버린 자신의 '새로운 진보론'을 강변하기 위해 여전히 진보의 기본만은 놓지 않으려는 옛 동료들을 "낡았다" 하는 인간에 대한 경멸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 글들이 책이 되어 나오자 나는 도리 없는 불편을 안았다. 어쨌거나 사회적 이유로 오랜 고생을 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편지는 그런 내 불편을 얼마간 덜어주었다.

생태니 공동체니 일상성이니 서태지니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박노해의 '새로운 진보론'은 과거의 박노해(혹은 과거의 진보)가 갖는 정치적 강퍅함보다 달콤해 보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호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진보론은 조금만 살펴보면 이미 진보의 테두리를 멀찌감치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새로운 진보론엔 정치성이 송두리째 빠져 있다. 이 영리한 전직 혁명가는 '과거의 정치 편향을 철저히 반성'한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정치성을 빼버린다.(과거의 문제는 정치편향이었는가, 정치성 자체였는가.) 대체 정치성이 빠진, 현실에 대해 정치적 긴장을 일으키지 않는 진보가 이룰 수 있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나는 박노해가 다시 고난에 찬 혁명가가 되라는 게 아니다. 우리 중의 누가 그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겠는가. 박노해는 할만큼 했다. 우리는 그의 과거만으로도 그에게 존경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미 그가 그러고 있듯) 그가 안락하길 바란다. 그러나 박노해가 자신이 선택한 안락이 마치 새로운 진보의 방식인 양, 진보의 미래 비전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댐으로써, 여전히 그에게 호의를 갖는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여전히 진지하게 진보의 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다.

거짓 선지자가 된 전직 혁명가는 피할 수 없는 자기 혼돈에 빠지고 그 혼돈은 더욱 깊어만 간다. 출소 직후 넘쳐나는 핸드폰을 개탄하던 그는 이제 자신의 신간 표지를 'TTL' 풍으로 만들어 달라 요구하고(이 경박한 미감), 출소 직후 하루 다섯 시간 노동하며 사는 농촌공동체를 만들겠다 약속하던 그는 이제 '세상을 배우기 위해' 주식투자를 해보겠다 말한다(이 가련한 현실감). 박노해 말마따나 세상은 변했고 진보도 변하건만, 변하지 않은 그 '가쁜 호흡'은 여전히 자신을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가라 불리고 싶게 하고, 변하지 않은 그 '집요한 욕망'은 여전히 자신을 최고의 상품으로 만들고 싶게 한다.

추신 : <한겨레>에 실린 박노해의 신간('오늘은 다르게'라는 경쾌한 제목이 붙은) 광고엔 오늘 이 나라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지성들의 주례사가 도열했다. 조혜정, 박원순, 유홍준... 박노해와 그 지성들의 계급 본능(교수나 변호사의 기득권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은 예술처럼 교감한다. 그 지성들에게 박노해는 달콤함(분명한 현재인)에 쌉쌀함(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과거인)까지 곁들인, 달콤 쌉쌀한 초콜릿이다. 그 지성들은 천천히 그 초콜릿을 씹으며 시민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의 인수합병을 자축한다. 하지만 내 귀엔 벌써 그들의 새로운 대사가 들리는 듯 하다. "무슨 초콜릿이 이리 달기만 해. 싸구려란..." | 씨네21 1999년_10월
1999/10/26 16:48 1999/10/26 16:48
1999/10/05 16:47
연대 총학생회에서 마련한 '저자와의 대화'에 불려 갔다. 학생들끼리 만나고 싶은 저자를 투표했고 진중권과 내가 결과라 했다. 매일 붙어 다니는 사이인 데다 <아웃사이더>라는 잡지도 함께 준비하고 있는 둘을 불렀다는 우연도 희한했지만 아직 저자가 아닌(한 권의 책도 내지 않은) 내가 거기 낀 일은 더욱 희한했다. 얼마간의 민망함과 비슷한 양의 흐뭇함을 안고 나는 거기에 갔고 다행스럽게도 '대화'는 유쾌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사는 게 하도 팍팍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이른바 영화전문서 출판을 시작한 이래 맺어 온 염치와 우애가 없는 인간관계를 모두 접으려 두 시간에 한번씩 버스가 들어오는 파주의 어느 마을에 들어간 지 6개월. 인간에 대한 절망감과 남들 한달 월급만큼의 한달 이자를 온갖 노동으로 때워야 하는 삶의 팍팍함을 위무할 길을 찾던 나는 불현듯 글쓰기를 떠올렸다. 글쓰기는 내가 이미 접은 과거의 인간관계를 통하지 않고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씨네21> 편집장과 알지 못했다면 그나마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글쓰기 이력이 전무한 건달에게 글쓰기를 하도록 배려한 세상에 감사했다. 다른 이보다 족히 십 년은 늦게 글쓰기를 시작한 내겐 그 십 년 동안 쌓였어야 할 나름의 '문장'도 이런저런 '지성'도 없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생각을 가감 없이 옮겨 적는 '솔직한' 글쓰기뿐이었고, 언젠가는 그 솔직함이 정직이 되고 그것이 다시 진실이 되길 기대했다.

나는 글쓰기를 용접공이 용접을 하듯 한 사람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한 가지 노동이라 여겼다. 용접공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건너다닐 다리를 용접하는 것처럼 지식인의 글쓰기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용할 정신의 다리를 용접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일년 반. 어느새 글쓰기는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나를 대표하는 일이 되었고 내가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는 방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나는 이제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던 '필자'니 '지식인'이니 하는 호칭으로 불리는 일에 꽤 익숙해졌고, 심지어 내게 남은 약간의 어색함을 "나는 진보지식인입니다" 하는 너스레로 뒤집어 사람을 웃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너스레가 완전한 농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분노와 거부감을 안겨줄 만한 말이지만) 나는 오늘 이 나라의 글쓰기가 진보가 아닐 도리가 없다 생각한다. 알다시피 이 나라의 모든 정신적 다리는 무너진 지 오래다. 이 나라에서 사회 정의와 개인의 양심은 강물 속에 흩어진 잔해로만 남아 있다. 이런 현실을 분명히 하고 그 다리를 성실하게 다시 지으려는 당연한 태도가 바로 진보다. 보수라면 다리가 무너진 현실을 인정은 하되 그 다리를 적당히 고쳐 사용하자 할 것이고 극우라면 아예 다리가 무너지지 않았다 생떼를 쓸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보수는 오늘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고 극우는 오늘의 이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안 쓴다면 모를까 이 나라의 글쓰기가 진보가 아닐 도리가 있는가.

그나저나, 밑도 끝도 없이 삶의 팍팍함을 위무하겠다는 무식한 생각으로 글쓰기에 뛰어든 나 같은 건달도 아는 그런 소박한 이치를 도저한 지식과 장구한 글쓰기 이력을 가지고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된 사정일까. 그들이 하나같이 아둔한 걸까, 그저 나 혼자 싸가지가 없는 걸까.

추신 : '저자와의 대화'에서 만난 '그들'(오늘의 대학생들)에 대한 소감. 짐작대로 '그들'은 '우리'(80년대의 대학생들)보다 대체로 탈정치적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정치성의 숫자가 아니다. 알다시피 세상은 한순간에 바뀌는 게 아니며 문제는 그 정치성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되는가다. '우리'의 부끄러운 이력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그래서 적지만 오래갈 듯한 정치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일단 나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고 싶다. | 씨네21 1999년_10월
1999/10/05 16:47 1999/10/05 1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