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동이 틀 무렵 계기판의 바늘이 200km을 넘기는 순간을 경험해 보았는가. 세상은 적막해지고 시야는 느리게 흐르는데 감흥에 취해 눈이라도 감으면 3초 안에 죽음이 다가온다. 스피드는 예술이다. 125cc 오토바이로부터 시작된 20여 년에 걸친 나의 스피드 체험에 의하면 스피드는 다른 어떤 무엇도 아닌 그저 예술인 것이다.
이런 몽롱한 소리를 그것도 구제금융 시대에 지껄여도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는 행복하다. 알량하나마 출판사 발행인이 아니라면, 이 지면이 '고급 비평정보'를 추구하는 유명 영상지의 고정란이 아니었다면 어렵지 않았을까.(이거야말로 정말 치사하기 짝이 없는 나의 사회적 신분이 아닌가) 그런데 만일 이런 얘기를 낮엔 철가방을 나르고 밤이 오면 대학로에 나가는 열 일곱 살 짜리 폭주족이 한다면 어떨까.
한국의 폭주족은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티뷰론을 타는 중산층 자식들이 아니고 가죽옷을 걸치고 자동차보다 비싼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미국 폭주족들과도 전혀 다르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미래에 명예나 지위 출세 안정 따위가 놓일 자리가 없음을 너무 일치감치 알아차린 나머지 '미래'가 있던 그 자리에 '뿅카'를 놓아버린 순진한 소년들이다.
폭주족에 대한 사회의 적의는 지나치다.(폭주족은 오토바이를 사용한 범죄조직이 아니다. 폭주족이 경찰에 잡혀 봐야 구류 이틀밖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의 범법행위가 적어도 실정법 상으로는 매우 경미한 수준임을 방증한다.) 그 적의의 실체가 다름 아닌 계급적 경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밝고 깨끗하지 않은 모습을 한 모든 것에 대한 중산층의 불안과 혐오이자 폭주족이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 죽어지내길 바라는 사회적인 요구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이다. 그 보복은 정기적으로 공공의 적을 선정하여 사회의 진짜 적을 감추는 TV라는 괴물에 의해 발표된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 감히 이 사회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단잠을 깨워."
폭주족이 쇼바를 높이고 머플러에 구멍을 낸 '뿅카'로 앞바퀴를 치켜든 채 세상을 질주하는 일은 그들의 삶에서 미래를 앗아간 사회에 대한 가슴 아픈 저항이자 자신들을 위한 유일한 예술이고 퍼포먼스다. 알고 보면 누구나 폭주족만큼은 범법자다. "아저씬 음주 운전 한 번도 안 했어요? 아줌마 몰래 콩 깐 적 없어요?" 하지만 누구도 폭주족만큼 솔직하진 않다. "왜 타냐고요? 그냥요, 죽이잖아요." 그들의 잘못은 그들도 안다. "솔직히, 잘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들이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다. "아홉 시 뉴스 보면 진짜 나쁜 새끼들은 따로 있잖아요."
사안의 성격상 나는 이쯤해서 꼬리를 접어야겠다. 폭주족을 신파적으로 미화하는 일은 지나치게 관념적이며 폭주족 문제를 '계급 대결'로 해석하는 일은 지나치게 공상적이라고 해두자. 그저 폭주족도 정당한 사회적 판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 한가지만 분명히 해두기로 하자.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은 삐삐밴드가 TV 카메라에 침을 뱉는 일을 저항이라고 우기는(당사자는 극구 아니라고 하는데도) 진보적 지식인들이 폭주족의 저항과 예술에 대해선 침묵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서양 대중문화사라는 메뉴판에 나와 있지 않은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 그들의 격조 있는 식성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스피드를 모르기 때문일까. | 씨네21 1998년_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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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06/23 폭주족을 위한 변명 (5)
댓글 ::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시야를 접하고 갑니다.
그들의 행위를 주류에 대한 비주류의 저항으로 본다는 것이 물론 전적으로 타당한 것만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래도 그런 부분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점은 한 번 반성해볼 만하겠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콧노래를 부르며'에 트랙백을 타고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블로그가 없는 저로서는 제 이 글을 읽고 답답한 제 의견의 어디다가 써야할지 몰라서 그냥 이렇게 씁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고 저는 김규항씨가 폭주족이 되보았는가 라고 묻고싶습니다.
주류에 대한 정신이라구요? 아직 어린 저로서, 그리고 그러한 친구를 사귀어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그들에게 그러한 정신은 '절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때를 기억하기론 '폭주족'이라는 아이들은 소위 '노는 아이'들이였고, 그들은 '논다'라는 말로, 큰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수에 대한 의식'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오히려 멋스러운 그리고 폼나는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뭐, 그것이 영화나 티비에서 폼나게, 그리고 진짜 '저항정신'을 갖고 오토바이를 타는 듯 보이는 '연예인 정신'을 따라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저 저같이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엘리트도 그렇다고 '노는'아이도 아니였던, 평범한 아이들은 그런 '노는 아이들'의 권위에 안그런척하면서도 위축되는 '진짜 소수'일 수 밖에,
그리고 그래서 피해볼 수 밖에 없는 학생이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김규항씨가 말하는
'저항정신'을 가졌다기보단, 그저 '지킬 건 지키는'학생이였기에, '그들보다는 내가 낫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리고 폭주라는 행위에 어떠한 예술이나 정신을 끼워넣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행여 그러한 정신이 들어가있다고 해도,
남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에 '예술'을 끼워넣는(여기선 정말 끼워넣는다라는
표현이 잘 맞는다) 것은 관념적이다 못해 조금은 위험해보입니다.
'진보 지식인'이라는 김규항씨가 소수를 대변하는 듯 하면서도, 자칫 내가 보기엔
사회적 약자라면 그들이 하는 행위는 그것이 '이유없이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도'
'저항정신'일 수 있으므로, '사회적 판정'을 해보자라고 하는듯해서 입니다..
물론 사회적 판정은 할 수 있을테지요. 하지만, 제발 나쁜 것은 제발 나쁜 것으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이것저것을 덧붙이고, 말을 만들다보면
'나쁘지만, 이런 것은 이해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어느 정도 용인되고 마니까요
그리고 제가 보기엔, 그들이 '잘못된것은 알지요'라고 말하며잘못을 시인하는 것에 '진실함'이 묻어나질 않습니다..
진짜 나쁜 새끼들을 진짜 아는 이가 저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위에서 말했든, 제가 지금까지 본 많은 '폭주족'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조차 잘 안하므로, 그곳에 대신 무엇을 넣는다라는건, 그저 김규항씨 생각이라고 봅니다.
'밀양 성폭행'사건을 보셨습니까.
요즘 10대들, 특히 그들 중 '노는 아이'들의 범법행위는
'순진하다'고 말하기엔 무리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그만큼씩은 범법자다는 말로 쉽게 '미화'시킨다면,
이 세상에 '범법'행위 중 '아픈 저항'이 아닌 것이 몇있습니까
아직은 배울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지만, 책을 읽고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인간의 언어라는 것이 정말 대단하고도, 무섭다'라는 생각이듭니다.
나는 '디워'논쟁을 보며, 뭐 다들 참 말은 잘한다라고 느꼈습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고,
생각이 있지만 뭐 그 긴글들을 보다보면 결국은 '그 얘기가 그 얘기'이고 논쟁이 자꾸 맴도는 느낌이 드는 건 저만 그런것일까요?
뭐 결국은 서로 나름의 논리를 쓰고 비아냥되지만, '자신이 소수를 대변한다'라고 부르짓는 듯하면서도, 그 긴 글에는 또 다른 '소수'를 비웃는 듯합니다.
(`김규항 논란`과 살롱좌파 지망생 :특히 이글을 보면 더욱 그렇다. 결국 한윤형과 이 글을 쓴자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김규항씨의 디위논쟁에 관한 글에 관해서도 이것부터 논의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디워의 대중들을 감싸는 '지식인'들이 말하는 '대중들'이 자신이 무시된다거나 멸시당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문제말이다. 디워논쟁을 보면서 '네티즌'의 글 중엔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평론을 쓰는 평론가'를 겨냥해 특권계층이 되고싶어하는 엘리트를 비판한 글은 거의 볼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몇몇 '지식인'들이 나서,
이는 '네티즌들의 평론가에 대한 반발'이다라고 꿈보다 해몽이 좋은 말을 시작한 것입니다.
디워를 사이에 둔 이러한 논쟁은 '엘리트'도 '지식인'도,'대중'도 아닌 나로서는, 그저 사변적으로 만들어진 '대중'이라는 말에, 경멸을 담고 있는 '지식인'들이 '제발 저리는'꼴로 보입니다.
어쨌든, 앞으로 배울 것이 많은 나는 그래도 많은 것을 알면서도 겸손하고자 하는
김규항씨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입니다. 1998년도의
글에 김규항씨가 들어와서 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항상 김규항씨의 블로그에 와서 많은 공감을 하고 가면서도,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을 오늘 발견해서 처음 글을 쓰고갑니다.
아래의 김규항씨의 글에 나는 정말 많이 공감했다.
세상은 '훌륭하게 사는 사람들'과 '훌륭하지 않게 사는 사람들' 둘로만 나뉘는 게 아니다.
아마도 숫자로는 가장 많은 또 하나의 사람들, '훌륭하게 살 수 없는(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바로 그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했으며 전망했다.
예수가 헤롯 괴뢰정권이나 성전지배세력(훌륭하지 않게 사는 사람들)보다 바리새인들
(훌륭하게 사는 사람들)과 오히려 더 많은 갈등을 벌인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경멸은 억압보다 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콧노래를 부르며'에 트랙백을 타고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블로그가 없는 저로서는 제 이 글을 읽고 답답한 제 의견의 어디다가 써야할지 몰라서 그냥 이렇게 씁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고 저는 김규항씨가 폭주족이 되보았는가 라고 묻고싶습니다.
주류에 대한 정신이라구요? 아직 어린 저로서, 그리고 그러한 친구를 사귀어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그들에게 그러한 정신은 '절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때를 기억하기론 '폭주족'이라는 아이들은 소위 '노는 아이'들이였고, 그들은 '논다'라는 말로, 큰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수에 대한 의식'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오히려 멋스러운 그리고 폼나는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뭐, 그것이 영화나 티비에서 폼나게, 그리고 진짜 '저항정신'을 갖고 오토바이를 타는 듯 보이는 '연예인 정신'을 따라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저 저같이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엘리트도 그렇다고 '노는'아이도 아니였던, 평범한 아이들은 그런 '노는 아이들'의 권위에 안그런척하면서도 위축되는 '진짜 소수'일 수 밖에,
그리고 그래서 피해볼 수 밖에 없는 학생이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김규항씨가 말하는
'저항정신'을 가졌다기보단, 그저 '지킬 건 지키는'학생이였기에, '그들보다는 내가 낫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폭주라는 행위에 어떠한 예술이나 정신을 끼워넣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행여 그러한 정신이 들어가있다고 해도,
남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에 '예술'을 끼워넣는(여기선 정말 끼워넣는다라는
표현이 잘 맞는다) 것은 관념적이다 못해 조금은 위험해보입니다.
'진보 지식인'이라는 김규항씨가 소수를 대변하는 듯 하면서도, 자칫 내가 보기엔
사회적 약자라면 그들이 하는 행위는 그것이 '이유없이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도'
'저항정신'일 수 있으므로, '사회적 판정'을 해보자라고 하는듯해서 입니다..
물론 사회적 판정은 할 수 있을테지요. 하지만, 제발 나쁜 것은 제발 나쁜 것으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이것저것을 덧붙이고, 말을 만들다보면
'나쁘지만, 이런 것은 이해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어느 정도 용인되고 마니까요
그리고 제가 보기엔, 그들이 '잘못된것은 알지요'라고 말하며잘못을 시인하는 것에 '진실함'이 묻어나질 않습니다..
진짜 나쁜 새끼들을 진짜 아는 이가 저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위에서 말했든, 제가 지금까지 본 많은 '폭주족'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조차 잘 안하므로, 그곳에 대신 무엇을 넣는다라는건, 그저 김규항씨 생각이라고 봅니다.
'밀양 성폭행'사건을 보셨습니까.
요즘 10대들, 특히 그들 중 '노는 아이'들의 범법행위는
'순진하다'고 말하기엔 무리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그만큼씩은 범법자다는 말로 쉽게 '미화'시킨다면,
이 세상에 '범법'행위 중 '아픈 저항'이 아닌 것이 몇있습니까
아직은 배울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지만, 책을 읽고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글을 읽다보면 '인간의 언어라는 것이 정말 대단하고도, 무섭다'라는 생각이듭니다.
나는 '디워'논쟁을 보며, 뭐 다들 참 말은 잘한다라고 느꼈습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고,
생각이 있지만 뭐 그 긴글들을 보다보면 결국은 '그 얘기가 그 얘기'이고 논쟁이 자꾸 맴도는 느낌이 드는 건 저만 그런것일까요?
뭐 결국은 서로 나름의 논리를 쓰고 비아냥되지만, '자신이 소수를 대변한다'라고 부르짓는 듯하면서도, 그 긴 글에는 또 다른 '소수'를 비웃는 듯합니다.
(`김규항 논란`과 살롱좌파 지망생 :특히 이글을 보면 더욱 그렇다. 결국 한윤형과 이 글을 쓴자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김규항씨의 디위논쟁에 관한 글에 관해서도 이것부터 논의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디워의 대중들을 감싸는 '지식인'들이 말하는 '대중들'이 자신이 무시된다거나 멸시당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문제말이다. 디워논쟁을 보면서 '네티즌'의 글 중엔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평론을 쓰는 평론가'를 겨냥해 '특권계층이 되고싶어하는 엘리트를 비판한 글'은 거의 볼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몇몇 '지식인'들이 나서,
이는 '네티즌들의 평론가에 대한 반발'이다라고 꿈보다 해몽이 좋은 말을 시작한 것입니다.
디워를 사이에 둔 이러한 논쟁은 '엘리트'도 '지식인'도,'대중'도 아닌 나로서는, 그저 사변적으로 만들어진 '대중'이라는 말에, 경멸을 담고 있는 '지식인'들이 '제발 저리는'꼴로 보입니다.
어쨌든, 앞으로 배울 것이 많은 나는 그래도 많은 것을 알면서도 겸손하고자 하는
김규항씨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입니다. 1998년도의
글에 김규항씨가 들어와서 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항상 김규항씨의 블로그에 와서 많은 공감을 하고 가면서도,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을 오늘 발견해서 처음 글을 쓰고갑니다.
아래의 김규항씨의 글에 나는 정말 많이 공감했다.
세상은 '훌륭하게 사는 사람들'과 '훌륭하지 않게 사는 사람들' 둘로만 나뉘는 게 아니다.
아마도 숫자로는 가장 많은 또 하나의 사람들, '훌륭하게 살 수 없는(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바로 그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했으며 전망했다.
예수가 헤롯 괴뢰정권이나 성전지배세력(훌륭하지 않게 사는 사람들)보다 바리새인들
(훌륭하게 사는 사람들)과 오히려 더 많은 갈등을 벌인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경멸은 억압보다 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혼자쓴글을 김규항씨께 쓰는 글로 고치다보니 간간히 실수로 반말이 남아있어서 다시 쓸려고 하니 '삭제'가 안되네요..
제 의도는 '~이다'체를 '습니다'체로 바꿀려고 했습니다만...
ㅠㅡㅠ
똑같은 글을 두개나 써서 죄송합니다.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