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4/17 17:32
오삼숙 때문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지만, <아줌마>가 화제의 드라마가 된 건 주로 장진구 덕이었다. 사람들은 장진구인 사람들과 장진구가 아닌 사람들로 나뉘어, 장진구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장진구와 다름을 증명하느라 내내 땀을 흘렸고, 장진구가 아닌 사람들은 그 장진구와 현실 속의 장진구의 유사함을 확인하느라 내내 재미를 봤다. <아줌마>는 막을 내렸고 <아줌마>적 논의는 막을 내리기 않았다.

장진구를 자처하는, 소설가 김영하는 '내가 <아줌마>를 싫어 하는 두세가지 이유'를 제출했다. 나는 <아줌마>가 싫다, 나는 장진구다, 지식인이란 장진구다, 지식인은 본디 노는 사람이며 사회의 잉여다, 소크라테스 만한 장진구가 있었는가, 공자도 유비도 예수도 장진구였다, 우리를 미워 해라, 그러나 우리를 씹으려면 좀더 세련되시라... 김영하의 자기모멸은 얼핏 지성적이지만, 결국 김영하는 <아줌마>를 오독하고 지식인을 모욕했다.

지식인이 먹물이라는 대체어로 즐겨 불리는 데서 보듯, 비지식인들의 지식인 혐오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비지식인들은 지식인들을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생각은 현실 속에서 대체로 근거 있고 사실이지만, 얼마간은 오해다. 지식인에겐 노는 사람이나 사회의 잉여로 오해받을 만한 구석이 있다.

지식인은 여느 노동들처럼 몸을 움직여 분명한 결과물을 생산하는 노동이 아닌, 세상의 정신 부문을 담당하는, 세상을 분별하여 세상에 알리는, 매우 추상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갖는 그런 추상성은 종종 비지식인들로 하여금 지식인들을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오해하게 하며, 종종 지식인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이 본디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오해하게 하곤 한다. 김영하의 경우다.
제 노동의 결과를 아카데미즘이니 인문주의니 딱지가 붙은 궤짝 속에 쌓아두기만 하는 부류는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게 중 나은 편이다. 훨씬 많은 지식인들은 백날 천날 놀면서 각종 실물 정치와 각종 실물 경제에만 집착하는 순수한 잉여들이다. 그런 잉여들의 유일한 노동이란 비지식인들로부터 자신을 구별지으려는 끊임 없는 노력이다. "오삼숙의 모델이 된 친구가 그랬다. 자기 남편은 아내가 저 하는 말 절대로 알아 듣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고. 또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말도 유행이 있는 것 같다고..."(<아줌마>의 작가 정성주)

김영하는 소크라테스에 공자에 유비에, 급기야 예수까지 끌어들여 <아줌마>를 공격한다. 그 논리적 해괴함(장진구가 십자가에 달린 까닭은?)은 덮어두고라도, 그런 시공 초월적 지식인론은 <아줌마>라는 과녁과는 거리가 멀다. <아줌마>는 섬뜩할 만치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80년대를 밑천 삼아 90년대에 백가쟁명을 과시하였으되 세상을 바꾸기는 커녕 2천년대 정신적 공황기를 도래케 한 사람들이다."(정성주)

<아줌마>의 그런 분명한 설정은 그런 설정 바깥 또한 분명히 한다. 세상은 분명히 장진구들로 차고 넘치지만 자신의 노동을 기억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는 지식인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김영하는 장진구 같은 지식인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했는데, 김영하는 장진구에 가미된 코미디 장치를 착각했다.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건 장진구가 아니라 장진구에 가미된 코미디 장치다. 그 장치를 걷고라면, 세상은 분명히 장진구들로 차고 넘치지 않는가.) 그들이 바로 2천년대의 정신적 공황기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그들의 성실한 노동 덕에 세상에 차고 넘치는 장진구들의 죄가 사함 받는다.

추신 : 김영하는 '오삼숙과 그의 일당들 같은 순결한 민중들'은 1930년대 소비에트 선동극에나 존재한다고 했다. 2천년대의 소설가는 평균 이하의 교양을 요건으로 하는가. 소비에트 선동극 속의 민중들은 생으로 지어낸 인물들이 아니다. 억압의 상태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순결해진다. 어떤 졸렬한 인간도, 억압의 상태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순간 가장 순결해지는 것. 우리가 사람인 이유이자 역사에 절망하지 않는 이유다.(씨네21)
2001/04/17 17:32 2001/04/17 17:32
2001/04/16 21:55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은 80년대가 준 것이다. 젊은이들의 알록달록한 머리색,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을 권리, 그 대통령을 욕할 자유, 북한군을 인간으로 그린 영화, 민주적인 노동조합...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어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의 9할은 80년대, 그 불의 시대가 준 선물이다. 한국의 80년대는 특별했다.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이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한 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투신하고 스러져간 시대가 있었던가.

80년대 청년들의 땀과 피가 땅에 베어 파시스트들이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될 무렵,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물론 그것은 사회주의의 붕괴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한 졸렬한 시도의 붕괴였지만) 더 이상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적인 우경화가 시작되었다. 이 모순된 상황은 일견, 한국은 살 만한 나라가 되었고 사회주의적 가치는 시효를 다 한 것처럼 보였다. 10여 년을 극악한 군사 파시즘과 싸우던 청년들의 긴장은 그 변화한 상황 속에서 혼란에 빠졌고, 정처 없이 흐트러져갔다.

10년이 지났다. 오늘 그들은 대략 셋으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의 내용은 폐기하고 이력만을 팔아 장사에 나선 부류는 접고 가자. 그런 천박함까지 80년대의 이름으로 언급할 순 없으니.)

첫째,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이다. 손에 꼽을 만치 적은 그들은 곤란한 처지에 있다. 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변했다고 합의했고, 그런 합의를 기반으로 하는 방식의 운동이 각광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이 지키는 신념은 낡은 것으로 비쳐지기 일쑤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들은 ‘여전히 남은 문제들’과 싸우는 유일한 세력이다. 그들은 낡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새로운 세상에 접근한 사람들이다.

둘째, 이른바 90년대 이후의 변화한 상황을 근본적인 변화로 규정하고 적응한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90년대 중반 이후 급부상한 부르주아적 시민운동이다. 그런 새로운 방식의 운동은 80년대의 전체운동 중심 운동의 그물에 담지 못했던 중산층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챙기며, 준 정당에 가까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 성과야 지나칠 만큼 충분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런 운동이 오늘의 유일한 운동인 양 주장되는 일이다. 그런 주장들은 바로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을 어리석고 낡았다고 비난하는 일이 된다.

(그들은 여전히 ‘80년대의 연속성’이나 ‘변혁의 전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들의 실제 활동 속에서 그런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지를 위해 많은 것을 타협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언론에 의지하다 보니 언론문제에 불분명한 입장을 보인다든가, 언론에서 다뤄줄 만한 주제에 편중한다든가, 그 번듯한 살림을 꾸리기 위해선 과격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든가 하는 문제들은 그들의 족쇄다.)

셌째, 이력을 팔아 장사에 나설 만큼 간교하지도 변화한 상황에 적응할 만큼 재빠르지도 못했지만, 여전히 신념을 지키며 살기엔 변화한 상황의 혼란과 피로를 이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80년대의 청년들의 가장 많은 부분일 그들은 말 그대로 청년 시절의 노고가 허망해져버린 사람들이다. 남들이 일신의 안위를 준비하느라 열심일 때 거리와 현장을 내달려야 했던 그들은, 꼭 그 만큼 경쟁에 뒤진 삶을 어색하게 꾸려간다. <한겨레>를 구독하고 남들보다 진지한 책을 읽고 선거 때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정당에 투표하기도 하지만, 그런 작은 노력들은 이미 천민자본주의의 정신에 사로잡힌 그들의 주변으로부터 은근한 경멸의 대상일 뿐이다.

오늘 80년대의 청년들은 (변화한 세상에 적응한 사람들을 빼고는) 대개 세상의 경멸에 처해 있다. 희한한 일은, 사람들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그 청년들을 마치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처럼 경멸하곤 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동의는 그런 경멸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 청년들이 ‘그 80년대에 데모 한번 안 해본 놈들’에게서까지 받는 그런 경멸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하는 말대로, 그들이 80년대의 후반기에 그렇게 열심하던 사상 투쟁이나 사회구성체 논쟁은 분명 과열된 부분이 있었고 그들의 운동엔 편중된 부분이 잇었다. 그들이 90년대의 혼란에 그렇게 무력하게 흐트러진 일 또한 그런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해선 그런 오류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오히려 80년대가 종료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토론이 진행되지 않은 일은 아쉬운 일이다.

문제는, 80년대의 오류에 대한 그런 비판들이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한 생산적인 목적이 아닌 엉뚱한 목적,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80년대의 정신은 ‘지나친 자본주의’로서 신자유주의 정신과 적대적이며, 80년대의 정신이 아무 구분없이 경멸되어야 할 필요가 바로 거기 있다. 오늘의 정신, 신자유주의의 정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는, 모든 경제적 실패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넘겨지는,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대로 신분을 나누는, 일류대학이 부자의 자식들로 채워지는, 오로지 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부모가 자식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올바로 살라고 가르치는 일이 자식과 제자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정신이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희망은 부당한 경멸을 돌려주는 일에서만 출발할 것이다. 80년대, 그 위엄을 되찾아야 할 때다.

(우리교육)
2001/04/16 21:55 2001/04/16 21:55
2001/04/10 22:27
내가 ‘가난’과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건 상계동 철거민들을 만나면서부터이다. 난 상계동 철거현장에서 책으로만 봤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력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포크레인을 앞세워 집을 부수는 빨간 모자를 쓴 철거 깡패들, 그 포크레인 밑으로 몸을 던져 철거를 막으려는 주민들, 겁에 질려 울고있는 아이들... 이런 장면들을 촬영하면서 단지 이사갈 수 없는 세입자란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재개발은 올림픽과 도시미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재벌과 정부의 땅투기, 집투기라는 사실을 별다른 설명 없이도 깨달을 수 있었다. ‘구조나 계급이 문제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안 끼치고 산다’같은 평소 내 지론은 그 상계동 철거현장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당시 난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곳 역시 20년 전 뚝방 동네 사람들이 살던 보금자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의는 아니더라도 결국 나 역시 가해자에 편에 있었던 셈이며 그런 부끄러움이 철거민들을 평생이웃으로 선택하게 했다. 난 상계동 주민들과 함께 머물면서 카메라를 그들의 시선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겉으론 쾌적하게 보이는 아파트들, 순진한 중산층의 욕망 이면에 있는 자본과 권력의 음험한 결탁과 온갖 회유와 협박, 그리고 철거민들의 저항 혹은 굴복의 역사를 나의 카메라로 파헤치고 싶어했다.

‘<또 하나의 세상> 연출 노트’에서

대마초를 길러가며 피웠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도 있고, 선생의 청년 시절 이력과 오늘 삶은 무척 대조적이다.

지금 내 삶은 대학을 졸업하도록 세상물정 모르고 놀았던 퇴폐적인 삶에 대한 당연한 벌이라는 생각도 한다. 80년 6월에 제대해보니 세상은 시끄러운데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고통스러웠고 앞이 보이지 않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자살까지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나도 뚜렷한 인생관을 갖고 싶다,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천주교 쪽에서 빈민운동 하던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도와주었다. 세례를 받으며, 다시 태어났으니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탕자가 돌아오는 건 아니다. 달랐다는 생각은 안 드나.

원래 이렇게 되게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 집안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삐딱한 데가 있었고 언젠가 ‘이터널 마이너리티’라는 말을 듣고 생각을 많이 했다. 소수일 때 오히려 풍요로울 수 있고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다는 생각. 특히 한대수 씨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시절 내 또래는 대개 그랬지만 남과 달랐다면 그런 반항심이 맥을 끊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는 거다.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대한 건 아니었어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은 언제나 품고 있었다.

옛날 생각을 하기도 하나.

이따금 씩. 그러나 미련은 없다. 놀아볼 대로 놀아봤기 때문일 거고 그런 쾌락이 남기는 허무와 불쾌감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거다.

실은 나도 선생처럼 좀 다른 이력이 있다. 얼마 전 어느 웹사이트에 건달 출신인 주제에 세상을 비판할 수 있느냐는 글이 올라 웃었다.

아, 그런가.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방황의 어떤 부분을 분명히 반성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이너의 가치를 익히는 것일 수 있고 무난하게 생활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다큐멘터리 하기 전엔 충무로 생활을 했는데.

대학원 다니면서 조감독 생활을 했는데 학교나 사회 분위기와 영화 조감독 하는 나 사이의 심한 괴리를 느꼈다. 내가 너무 편하게 앞길을 정하고 간다는 죄의식이었다. 상계동에 들어가면서 많이 정리가 됐다. 어떻게 하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유학을 가야 하나 충무로에 남아야 하나 하는 고민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건지 철거민들한테서 배웠다. 극영화를 그만 두고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면서 철거민이라든지 비전향 장기수라든지 노동자라든지 세상의 그늘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의사의 아들이 철거촌이라. 거부감은 없었나.

매료되었다. 내가 본 상계동 철거민들은 아주 용감하게 싸우고 싸움이 끝나면 어린아이들처럼 엉엉 울기도 하고 커다란 솥에다가 밥이나 라면을 끓여 빙 둘러앉아 먹고 술판 벌어지면 정말 노는 것처럼 놀고 그런 모습에 매료되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게 그들에게 있었다. 동시에 내가 존중하던 사람들의 허위나 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중에 낭만적인 기대만 하다 그들의 뒤틀린 외양에 기층 실망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상계동에서 한참 싸움이 절정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을 봤다. 옷가지가 들어오면 같이 모여 나누어야 할텐데 몰래 먼저 좋은 걸 빼간다든지, 라면 들어온 걸 누가 하나 더 가져갔네 해서 싸움이 나고, 그런 다툼으로 회의가 개판이 되고 그랬다. 내가 잘못 판단했나 잘못 믿었나 하는 좌절감이 들었다. 그런 고민을 내가 소속한 천도빈(천주교 도시빈민사목회) 신부님들에게 털어놓으니 그러더라. 그런 모습들이 비굴하고 추악하게 보이겠지만 중산층이나 부자들은 사기를 친다거나 도둑질을 하는 것도 점잖은 방법으로 하기 때문에 안 드러날 뿐이다. 그런 면은 사람한텐 다 있는 거다. 차라리 솔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지식인들은 민중을 개념화하고 개념화한 민중에 실망한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데서 출발하면 된다. 민중에 대한 낭만적 기대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민중에게 있다. 중요한 건 그런 모든 것들을 솜처럼 받아들이는 힘 또한 민중에게 있다는 거다. 어떤 분이 민중을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힘이고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다.

개신교 평균치에 비해 나은 편이긴 하지만 천주교 역시 보수적인 부분도 많다.

말하자면 천주교 좌파인 셈인데 성당에는 잘 안 나간다. 천도빈 모임이나 동네에서 미사 할 때는 꼭 참석하지만 큰 성당이나 이런 데 가면 적응이 안 된다.

기독교든 천주교든 예수의 삶을 따르는 일인데.

무엇보다 가난해야 한다. 강요된 가난은 죄악이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은 바로 예수의 모습이다. 그것에 의심이 없다. 이젠 버리는 게 어렵지 않고 갖지 않는 게 편안하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버틸 수 있다고 믿고 웬만한 건 걱정을 안 한다. 아이들 과외도 못 시키지만 과외를 시키는 게 비정상이고 설사 아이들이 대학을 못 가고 가난한 기층 민중으로 살더라도 전혀 걔들한테 불행한 게 아니라고 믿는다. 도시빈민이나 농민 노동자의 삶 속에는 지식인들이나 중산층들의 삶이 가질 수 없는 게 있다.

선생에게 가난은 자기 절제인가.

편안한 거다. 그러나 무작정 편안한 게 아니라, 가난해야만 가난의 가치를 가질 때만 세상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고 나는 그걸 따라가는 거다. 가난은 이제 내 가치관이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부인은 선생을 지지하나.

아내도 빈민운동을 했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일치한다. 많이 못 벌어가는 건 별 문제가 없는데 최저생계비를 못 지키기는 일이 잦아지면 심각하게 추궁을 받기도 한다. 요새는 좀 낫다. 특강 불려가고 대학 강의도 적지만 고정수입이 되고.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아이들 문제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텔레비전을 멀리해야 할 텐데 꼼꼼하게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잘 못한다.

아이들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나.

직접 물어본 일은 없지만... 아내 말로는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제일 아쉬운 게 시간을 같이 못 보내는 것이다. 새벽에 작업하다 들어가서 애들이 학교간 다음에 일어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모습이 아이들한테 안 좋게 보일 것 같아 고민이다. 아내나 아이들은 일찍 자고 5시에 일어나는데 나는 야행성이라 그 시간에 자니까 잘 안 맞는다. 집안 일이라도 분담하려고 노력을 한다.

<민들레>를 만들던 후배들이 한번은 그랬다. 유가협 어머니들과 오래 지내다 보니 갈등하는 모습이나 꺼려지는 모습도 있는데 작품에 그런 걸 담아야 할 지 빼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나는 보여줘도 충분한 올바름이 있지 않느냐고 했는데 어찌 됐든 <민들레>엔 그런 모습들이 담겼고 그래서 더한 감동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그런 고민은 필연적일 텐데.

늘 부닥치는 고민이다.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 80년대에는 국가 폭력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당시 철거민 내부의 갈등을 드러내는 일은 그야말로 객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젠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최근작인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은 너무 미화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 작품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상계동 철거하면서 꿈꾸었던 공동체가 바로 행당동 공동체다. 협동운동을 하면서 자활을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가난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행당동이 이루어냈다. 물론 그런 모습이 다는 아니지만 나는 그 작품을 일종의 교육용이라 생각했다. 다른 철거민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할까. 내가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면 그들의 갈등하는 모습이 담겨야겠지만 나는 그들의 사업을 그리려 했고 그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강조하려 했다.

다큐멘터리에서 객관성은 존재하는가.

이를테면 10여년 전 텔레비전에서 광주를 다룬 <어머니의 노래>라는 작품을 했다. 당시 그 작품이 객관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희생자들 편에만 서 있다는 방영 반대 논리가 있었다. 물론 그 작품을 낱개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통시적 관점에서 보면 10여 년 동안 텔레비전은 가해자의 논리에 의해서만 광주를 묘사하지 않았나. 그런데 10년이 지나 처음으로 피해자의 시점이 강조된다 해서 객관성을 잃었다고 얘기할 순 없다는 거다. 내가 다루는 소재로 얘길 한다면 80년대에는 도시빈민 문제가 묻혀 있던 역사였다. 그것을 처음 드러낸 작품을 가지고 객관성을 논란하는 건 사치스런 일이지만 이젠 도시빈민운동의 역사도 생겼고 도시빈민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작품도 몇 개 나와 있으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생각한다. 나만의 균형감각인 지 모르겠지만 한 작품을 가지고 객관성을 말하는 건 위험하다. 다른 작품과의 관계라든가 사회 전반의 맥락에서 작품을 봐야 한다.

푸른영상 안에서 그런 입장 차이로 갈등을 빚는 일도 있나.

우리는 세상을 보는 입장 자체가 비슷한 편이라 큰 갈등은 없다. 이미 어느 정도는 걸러진 비슷한 사람들이 푸른영상에 들어오기 때문일 거다. 물론 관심 소재나 주제는 다들 다르고 사람을 전면에 세우느냐 주제를 전면에 세우느냐 하는 방법론도 다들 다르다. 제안한 사람, 먼저 얘기를 꺼낸 사람에게 기본적인 결정 권한을 주는 게 우리의 원칙이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보나.

텔레비전 덕에 다큐멘터리가 양적으로 늘어났다고들 하지만 실은 텔레비전이 다큐멘터리를 말아먹었다. 텔레비전 덕에 다큐멘터리의 모든 형식과 방법이 굳어버린다. 텔레비전에서 요구하는 형식이 있다. 친절해야 하고 뭔가 깔끔해야 하고 시청률 때문에 소재주의나 선정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항상 시간에 쫓기느라 최소한의 예술적 고민이 어렵다. 구조적으로 많은 걸 포기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 방송사 밖에서 만들어지는 다큐라 해도 텔레비전이 거의 유일한 상업적 경로이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요구하는 걸 염두에 두고 작업하게 된다. 텔레비전 이전에도 다큐는 있었다. 우리는 텔레비전 다큐를 다큐의 전부처럼 생각하지만 그건 3, 4십 년밖에 안된 거다. 텔레비전 이전의 다큐들은 자유분방했고 예술적으로도 훌륭했다.

계급적 편향도 문제인 것 같다.

텔레비전 다큐는 PD의 시각, 중산층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런 해석들이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염된다. 다른 시각으로 말하고 다른 방법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텔레비전은 언제나 한가지 시각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선생의 작품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겠다면.

당연히 받아들인다. 물론 우리로선 방영료를 받는 것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작품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한테 보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간섭만 없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90년대 초만 해도 독립 다큐 하는 사람들이 홈비디오 장비를 사용했던 걸로 안다. 6밀리 디지털이 나오면서 그런 장비의 문제가 해결된 셈인데.

6밀리 디지털은 크기도 작고 값이 싸면서도 프로급 성능을 가진 장비라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엔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다. 우리도 97년부터 대부분 6밀리로 작업한다.

좀 달라지고 있지만, 영화 하는 사람들에겐 필름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다. 필름 다큐멘타리를 할 생각은 없나.

전혀,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낀다. 필요하다면 키네코 장치로 비디오 작업을 필름으로 옮기면 된다. 필름카메라는 굉장히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연출을 할 수밖에 없다. 대상이 편안하지 않고 워낙 필름이 비싸기 때문에 인터뷰를 해도 연습을 하고 해야 하니 그걸 무슨 재미로 하겠나.

VJ라는 직업도 디지털 장비와 함께 본격화 했다. 자주적인 다큐 작가일 수도 있고 새로운 형태의 방송 아르바이트로 보이기도 한다.

외국의 경우에는 VJ들이 스스로 아이템을 잡아 촬영하고 나래이션 넣어 우리로 말하면 9시 뉴스 같은 데 팔고 한다. 우리 방송사는 그런 걸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걸 자기네들이 한다는 생각으로 방송사 안으로 흡수하려 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청구조에 머물게 된다. VJ들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다.
근래 한국영화의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모든 가치 기준이
산업 차원으로 흐르는 건 한심해 보인다. 투기업자가 영화판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어떤 평론가는 할리우드에 비하면 한국영화는 다 독립영화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선생은 독립영화협회 대표이고 실제로 독립영화인들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데.

2년 전 스크린쿼터 싸움할 때 독립영화 쪽도 참여했는데 한편에선 독립영화와 스크린쿼터가 무슨 상관이냐는 비판이 있었다. 당시 나는 오락영화나 영화적 환상도 필요하다,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참여했다. 문제는 스크린쿼터를 내세우며 영화가 하나같이 블록버스터를 지향하고 그런 영화만이 살아남게 되는 구조가 되어간다는 거다. 이제 우리는 스크린쿼터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요구할 것은 독립영화 전용관과 문화로서의 영화다. 한국영화 구조가 이젠 완전히 할리우드를 빼 닮아가고 있다. 산업적 외형에서 나아졌다지만 속으론 더 악화되었다. 옛날에는 그나마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재미있는 영화와 재미없는 영화만
있을 뿐이다.

그런 흐름을 견제하기엔 독립영화 쪽의 힘이 부족해 보인다.

아직은 자생력이 없고 그런 실정이 모든 문제의 한 원인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환갑 넘은 사람들도 독립영화를 하는데 그런 전통과 역사가 생길 때 독립영화 쪽에서 영화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선생이 환갑을 넘기면 한국에도 환갑을 넘긴 독립예술가가
존재하게 된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대중 음악 쪽도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독립예술가 생활을 계속한다는 게 아직은 어려운 현실이다. 열심히 하던 사람들도 일정한 시기가 되면 제도권으로 편입되거나 아예 포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독립예술 부분은 제도권 예술계의 예비 인력풀이나 아마추어 부분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독립영화는 결국 독립영화니까 어려운 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다만 외국엔 기금 같은 게 많다. 영화를 찍겠다 하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생활보조비가 나간다. 우리는 이제 그런 게 시작되고 있는데 좀 기형적이다. 현재 상태에서 직접 지원에 치중하는 건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고 미디어센터를 만들어 카메라나 편집장비들을 좀더 쉽게 활용하고 전용관에서 작품을 상영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무조건 돈으로만 풀려 하는 건 박정희 시절부터 길러진 습성이라 바꾸기가 어려운 것 같다.

돈 문제는 좀더 심각한 부분 아닌가.

돈, 물론 좋다. 우리도 운영비가 맨 날 모자라 사전제작 지원금을 받아볼까 생각도 하는데 돈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밥값 없으면 찍는 사람한테 얻어먹고 테이프 없으면 쓴 테이프 또 쓰면 된다. 다른 곳과 비교하면 서울영상집단은 좀 길게 잡고 큰 작품을 하고 노동자뉴스제작단은 반대로 현장성과 속보성을 중요시 하는데 우리는 그 중간 쯤이다. 원맨 시스템으로 제작비를 최소화 하되 대신 시간을 많이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카메라와 편집장비가 있으니 테이프 값이나 진행비 정도 1,2백 만원으로 작품을 할 수 있다. 돈 없어서
제작 못하는 건 아니다.

결혼식 비디오는 요즘도 하는가.

나는 이제 졸업했지만 여전히 많이 한다. 수익사업은 30만원 이하는 개인 아르바이트로, 30만원 이상은 푸른영상의 사업으로 하고 있다.

30만원이 넘는 종목은 뭔가.

요즘 시민단체에 돈이 도니까 가장 많은 게 교육비디오 제작이다. 기업 홍보물도 내용이 건전하면 만들어준다. 중국 투자 중계하는 회사, 쓰레기를 분해해서 거름을 만드는 회사, 영어교재도 했고...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닌데 문제는 없나.

사실 수익사업이라면 포르노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 물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기는 하지만 이걸 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고민에 시간을 뺏기는 건 더 어리석은 일이다. 한나라당 의원 홍보물을 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내부 논쟁이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다 생각한다.

활동비는 얼마나 지급되나.

30만원이 기본이고 결혼을 하면 10만원 붙고 아이가 생기면 또 10만원 붙고 아이가 둘이면 또 10만원 붙는 시스템이다. 처녀 총각들은 30만원을 받는 거고 나는 아이가 셋이니까 70을 받아야 하는데 대개 50% 미만으로 받는다. 이번 달에도 고민스러운데 지난 달에 50% 받았고 지지난 달에는 30% 받았다. 100% 받는 건 수익사업의 잔금을 받았다든지 그럴 때인데 1년에 한두번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10%든 20%든 반드시 활동비를 지급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라는 단편영화는 내용이 파격적이었는데 어디선가 선생이 칭찬한 걸 봤다. 선생 취향은 아닐텐데 그런 노력이 주는 나름의 유익을 평가하는 건가.

아니, 그 자체의 상상력이 신선하지 않은가. 무조건적인 사랑인 모성애를 포르노에 빠진 아들과 비교한다는 건 상당히 신선한 발상이다. 결국은 모성애의 승리로 끝난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하기도 하고. 우리한텐 80년대의 경직된 관성들이 남아 있다. 80년대의 관성이 없어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 시작하는 유연함도 있다.

그런 작품을 직접 해볼 생각도 있나.

해보고 싶은데 이젠 내 상상력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내가 70년대 세대라 오히려 데카당스한 경험을 해봤다는 거다. 80년대에도 나는 중심에 있지 않고 보조자 역할이었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나는 사회과학 서적을 거의 안 읽었고 해방신학이라든지 종교관계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 내가 무식해선지 그쪽이 유연해서 좋았고 오래 간다.

한국 영화의 부흥은 80년대 영화운동 하던 청년들이 대거 충무로로 투신한 결과이기도 하다. 누구도 그들에게 계속 운동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지만 그들의 행태엔 분명 지나친 데가 있다.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모욕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아예 부정한다고 말하면 좋겠다. 부정하는지 안 하는지 말도 안하고 안면을 몰수하는 게 문제다. 영화운동 같이 하던 사람들이 충무로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성공하는 걸 보면 한편으로는 박수치고 싶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의문이 든다. 혼란스러운 건 전혀 다른 작품을 한다는 거다.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 고민하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만 받을 수 있다면 흔쾌하게 박수칠 텐데. 욕하고 싶진 않고 조금 갸우뚱하는데 아직 인간적인 유대는 남아 있다고 믿는다. 4월에 독립영화 회고전을 하는데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옛 동료들하고 토론회를 하기로 했다. 그때 무슨 얘기가 나올지 궁금하긴 한데 얘기가 잘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아까 시민단체에 돈이 돈다고 했는데 뒤집어 말하면 그들이 제도권의 구미에 맞는 운동을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방식의 운동이 각광을 받으면서 좀더 진보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운동은 부당하게 폄하되는 분위기가 있다. 독립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거슬리는 건 누구든 유독 선생에 대해선 다들 칭송 일변도라는 점이다. 그러나 선생 한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그런 칭송은 전체 독립영화인들에 대한 경멸을 전제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좀 꼬인 건가.

아니다. 나 역시 낯간지럽다. 그런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긴 커녕 차라리 너나 똑바로 해라 싶은 생각이 든다. 문제는 나한테 있는데 부닥치지 않는다는 거다. 뭔가 따끔한 게 있었다면 그런 얘기 못 할텐데 두리뭉실 관계를 유지하니까 그런 것 같다. 내 성격이 딱딱 끊지를 못한다. 나는 해도 남한테 강요하기 싫고, 넌 그렇게 가라 나는 나대로 간다라는 적당주의가 있다.
하여튼 선생은 한국 독립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니 그런 뒤집힌 가치들에 한번은 정색을 하고 비판할 필요도 있지 않은가. 분투하는 후배들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지도자 품성이 아닌데 억지 춘향으로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할 자신이 있다. 결정적인 순간이 언제인지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그런 소릴 들으면 정말 화가 난다. 물론 각론으로 들어가면 좋아진 것도 있다. 독립영화도 이젠 검열 걱정 안 하니 좋고 도시빈민들도 임대아파트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나더러 행복해졌냐고 묻는다면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겠다.

뭐가 문젠가.

달라지지 말아야 하는 것들만 달라지고 달라져야 하는 것들은 안 달라진다. 옛날엔 힘이 들었지만 모이면 힘이 났는데 동지들 다 떠나고 관계가 엷어지고, 만나도 옛날에 우리가 잘못 생각했어 그때 웃겼어 그런 냉소만이 가득하다. 근본적으로는 아직 달라진 게 없는데 민주주의든 삶의 질이든 아직 과정 중에 있는데 포기해 버리면서 피상적인 변화만 가지고 세상이 달라졌다, 사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강변한다.

절망적인가.

종말론적인 어두움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을 믿는다. 내 안에도 우리 사회에도 희망이 있고 그걸 키우고 싶다. 키우는 방법은 결국 희망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자체가 희망인 사람들을 만나는 데서 출발한다. 내 주변에 누가 있는가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내 경우, 산동네 사람들이 여전히 만나서 즐겁고 내게 힘을 주는 사람들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이라기보다는 빈민운동가라는 비판 아닌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나는 빈민운동에서도 아웃사이더다. 빈민운동과 신자유주의 문제를 연결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내고 있다. 빈민운동이 사회운동에 복무하는 흐름이 대세이던 시절 나는 지역에 천착하고 삶에 비중을 두고 싶었다. 당시엔 노동운동이 너무 말이 많고 자기들이 주인공이라 생각해서 달갑지 않았다. 빈민운동은 자기 동네에서 하니 삶과 투쟁이 유리되지 않는 진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오히려 빈민운동이 노동운동과 연대하고 전체 운동의 맥락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운동이 대안으로 주장되기도 하는데.

공동체 운동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거나 지나치게 중산층적으로 갈 위험이 있다. 그리고 빈민운동처럼 분명한 공동체 운동은 없다. 이를테면 아파트공동체 운동 같은 중산층 운동에 빈민운동이 줄 건 있어도
받아올 건 아무 것도 없다. 노동운동은 계급도 같고 이젠 빈민운동도 계급 운동의 정체성을 강화할 때라고 본다. 결국 빈민운동은 노동운동과 함께 가야 한다.

십수년 전 군대 말년휴가 길에 인사동에서 <상계동 올림픽>을 봤다. 이른바 변혁운동의 열기가 한껏 고조될 무렵이었고 관객의 질문에선 카메라가 멀다, 왜 카메라는 싸우지 않느냐는 식의 공격이 있었다.

기억한다. 그런 질문에 나는 엉뚱한 답변을 했고 그런데 부끄러운 걸 몰랐다.
왜 나를 여기에 불러서 자기들의 기준으로 재단하려 하나 하는 불쾌감도 있었고, 한편으론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나저나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누구나 아는 일이기도 하다. 하여튼 그들은 그렇게 사라졌고 선생은 오늘 한국영화에서 가장 정치적인 지점에 서 있다. 나는 선생의 그런 지점이 선생보다 앞장 선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결과라 생각했는데 선생은 당시에 비해 좀더 분명한
정치 의식을 갖게 된 것 같다.

좀 나아졌다. 상계동 만들 땐 계급의식이 아닌 중산층적 영화인적 의식에 머물렀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남들에겐 시류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지만 나로선 너무나 당연하다. 오늘, 어느 시절보다 더 분명한 너무나 분명한 세계적 계급분화 현상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오죽하면 수십년 잠잠하던 미국 대학생들까지 신자유주의 반대를 말하겠는가.

지난해 선생의 다큐멘터리 15주년 특별전을 한 걸로 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뭔가.

아무래도 <상계동 올림픽>. 철거민들과 살게 되고 그 작품을 만들게 된 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엉뚱한 출세작이 되었고 결국 내 삶을 규정했으니 나로선 운명적인 작품인 셈이다.
요즘도 테입이 팔린다던데.

철거민들과 3년 동안 같이 살면서 만들었다는 부가가치가 있는 것 같다. <상계동>은 걸레 같은 화질에 어줍잖은 나래이션에다 3년 동안 찍었는데 27분밖에 못 건진 그런 작품이다. 그때 다큐멘터리가 뭔지 알았다면 그렇게 만들지 않았겠지. 그러나 알았다면 아예 만들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상계동>은 작품이라기보다 기록의 느낌이 강하다.

지난해 특별전(김동원 특별전) 때 상계동 시절 총무하던 분을 초청했다. 당시엔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상계동을 못 봤던 분이다. 현장은 영화보다 치열했다는 비판을 기대하고 초청했는데 내가 고생 했다는 얘기, 영화는 찍지 않고 돌 들고 같이 싸웠다는 얘기만 했다. 사실 <상계동>의 절반은 내가 찍은 게 아니다. 동네 청년들, 천도빈 회원들이 찍었다. 나는 못 찍더라도 같이 돌 던지고 싸우는 게 마음 편했고 지금도 그렇다.

특별전 때 선생은 후배들에게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 평론가는 그 일을 “비판으로 선배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고 적었던데.

그 지적들이 나름대로 정확했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점에서 후배들의 그런 비판은 나에게도 필요했다. 물론 내 작품을 독립영화의 표본으로 놓고 얘기하는 건 무리고 내 작품은 어떤 고리가 되기에 약하지만 후배들의 그런 비판을 나 역시 일종의 헌사로 받아들인다.

새로운 시도란 무엇인가.

독립 다큐가 독립 다큐라는 이유만으로 옹호 받고 지지 받는 단계는 넘어설 때가 되었다. 밖에서 어렵다면 안에서라도 비판해야 할 시점이다. 두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는 운동으로서 다큐라고 했을 때 이젠 내부 갈등도 드러내고 그것을 이슈화 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개인을 다룬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내 가족 이야기, 연애 이야기 같은 개인사들 말이다. 물론 그 목적은 진보여야 한다.

목적이라 했나.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기록하는 예술이고 소재나 대상은 달라진다 해도 언제나 그 목적은 현실이 변화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목적은 진보다.

선생의 가난한 카메라가 이길 것이다.



김동원

푸른영상 대표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영화위원장

1955년생
서강대 신방과 대학원 졸업
1983-86 이장호, 정지영, 장선우 조감독
1988년 <상계동 올림픽>
제39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
1991 야마가타국제기록영화제 초청 상영
1990년 <벼랑에 선 도시빈민>
1991년 <하느님 보시니 참 좋았다>
1991년 푸른영상 설립
1993년 <미디어 숲속의 사람들>
1994년 <행당동 사람들>
1995년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
1997년 <명성, 그 6일의 기록>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독립영화상 수상,
제 48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 초청 상영
1999년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
2001/04/10 22:27 2001/04/10 22:27
2001/03/28 17:28
별이 두개던가 세개던가. 박정희의 혁명 동지라던, 내가 다닌 경기도 A고등학교 이사장은 참으로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그렇듯) 넘쳐나는 욕심의 근거로 신앙심을 내세우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경기고나 대전고를 능가하는 한국 제일의 명문 고등학교를 만들겠다는 욕심 역시 신앙심을 근거로 한 그의 하고많은 욕심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중학 3학년이 될 무렵 그 욕심이 벽에 부닥쳤다.

그 도시에 고교평준화 계획이 발표되었고 만든 지 5년밖에 안 된 그의 고등학교에 시험으로 신입생을 뽑을 기회가 한번밖엔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박정희의 혁명동지이자 시련을 더 큰 욕심을 채울 기회라 파악하는 독실한 기독교인답게, 그해 내내 그는 교사들을 풀었다. 울릉도 출신 세명을 포함, 전국 방방곡곡에서 내로라 하는 우등생들이 장학금 약속에 이끌려 모여들었다.

신입생들이 등교하자 학교는 흥분했다. 전교생 조회의 교장연설은 1학년들과 2, 3학년들이 질적으로 얼마나 다른가를 강조하는 내용이었고, 이른바 가장 실력 있는 교사들이 1학년에 배치되었으며, 그 교사들은 난 너희 같은 엘리트들을 가르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쩜 너희들은 하나같이 인물도 좋으냐는 식의 장광설로 수업을 채웠으며, 그 도시의 한 여고 3학년들의 인기투표 결과가 A고 1학년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1학년들은 자연스레 엘리트의 자부를 익혀갔다. 1학년들이 1학기에 치른 시험이 3학년 과정에도 나오지 않는 문제로 채워져 절반 이상이 0점을 받은 일 역시 엘리트만의 해프닝으로 여겨졌다. 문제가 생긴 건 반년이 지나서다. 학교는 2학기를 앞두고 1학년 장학생 수를 40여명으로 줄였다. 장학금을 받아가며 3년 후 금의환향만을 꿈꾸던 1학년들의 분노가 빠른 속도로 모여 갔다. 이사장의 그라나다 승용차가 황급히 학교로 들어 선 어느 날 교장은 운동장에 1학년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손나팔을 한 교장이 말했다. 제군들은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세계 어느 명문 고등학교도 50점 이하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법은 없다. 왜 제군들은 최고의 엘리트인 자신을 모욕하려 하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교장의 희한한 엘리트론은 1학년들의 분노를 누그러트리는 힘이 있었다. 50여명의 1학년들이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1학년들은 매일 자취방에 모여 하릴없이 술과 유흥으로 시간을 죽여 갔다.

졸업한 지 10년 쯤 지난 어느 날, 나는 그 도시의 역 앞에 나붙은 포스터를 보았다. 天下名門 大 A高 6會 同門會. 동기들이 선배와 후배들을 배제한 동문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참담해진 나는 그 학교에서 만난 모든 것들과 인연을 접었다. 나는 비로소 분노와 분별력을 잃은 엘리트의 자부란 그저 어릿광대의 자부임을, 어릿광대의 자부는 그 어릿광대를 사용하는 세력에 의해 전적으로 관리됨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 학교를 떠난 지 20년이 된 나는 그런 어릿광대의 자부를 세상의 도처에서 발견하곤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살아가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적 악행들의 실무는 그런 어릿광대의 자부를 통해 진행된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암, <조선일보>의 어릿광대들이 갖는 최고 신문의 최고 엘리트 기자라는 자부 따위 말이다. 화사한 외양을 한 그 어릿광대들은 저널리스트로서 최소한의 분노와 분별력을 자신들을 사용하는 파시스트들이 전적으로 관리하는 어릿광대의 자부와 하루 한번 등가교환 한다.

추신 : 그런 어릿광대의 자부가 얼핏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는 건 어릿광대 주변에 득실거리는 얼치기 어릿광대들 덕이다. 얼치기들은 어릿광대의 화사한 외양에 매혹된 채 늘상 밑도 끝도 없이 흥분하곤 한다.
2001/03/28 17:28 2001/03/28 17:28
2001/02/09 22:22
“여러분, 제가 병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섭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여자도 남자도...” 한대수의 새 앨범(8집, )은 한대수의 음울한 대사로 시작한다. 한대수는 를 자신의 마지막 앨범이라 말하고 쉰 줄에 접어든 자신은 이제 음악가로선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앨범 어디에서도 한물 간 음악가의 낯간지런 인사치레를 발견할 수 없다. 1968년 한국 유일의 문명비판적 대중음악가로 출현한 한대수의 음악 세계는 30여 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사랑과 평화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런 에너지는 그것이 처음 나타난 시절이나 오늘이나 한국에선 좀처럼 찾기 어렵다.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한대수의 목마름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고 목마른 사나이는 여전히 귀환 중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난 선생이 뿌리뽑힌 자의 노래를 하는 이유는.

나는 돈과 명예를 동시에 가진 집안에서 자랐다. 사람들은 그런 환경에서 왜 저항을 하게 되었느냐 묻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런 환경 덕에 내 나름의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 저항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지만 그런 저항의 정신을 만든 사람들은 부유한 환경 출신인 경우가 많다. 레닌도 부잣집 자식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가난했다면 화폐를 먼저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자라면서 화폐 걱정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화폐를 초월할 수 있었기에 세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록음악을 하게 된 건가.

미국 흑인들의 블루스가 록앤롤이 되었는데 록앤롤이란 알다시피 섹스를 뜻한다. 록앤롤의 시작은 역시 ‘불만’이다. 록은 불만에서 시작한 아우성, ‘아 싫다’ 이다. 나는 그런 록의 시작이 인간의 시작과 같다고 본다. 인간의 시작 역시 불만이다. 절대로 만족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자꾸 사는 거고 언젠가는 만족이 채워질까 싶어서 자꾸 사는 건데 결국 못 채우고 죽는 게 인생 아닌가.

록이 불만을 해소한다는 말인가.

만약 록이 없다면 도처에서 주먹 싸움이 터지고, 코가 부서지고, 귀가 부서질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한쪽에서는 사랑스럽게 지내지만 또 한쪽에선 호랑이들처럼 공격하는데 그 공격부분을 록이 해소한다.

불만을 고양시키기도 하지 않는가. 지식인들이 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떻든 록의 저항 이미지는 그런 데서 나오는데.
맞는 얘기지만 내 경우엔 해소에 가까웠다. 내가 스무 살 무렵 아무도 못 말렸다. 록이 없었다면 한심한 건달이 됐을 것이다. 음악에 모든 정열과 힘을 바쳤기 때문에 내 모든 갈망과 분노가 해소되었다. 사실 어느 시대나 젊은이에겐 산다는 게 늘 힘들고 화나는 일이다. 젊은이들은 올라가려 하고 세상은 자꾸 젊은이들의 머리를 때리니까.

그런 젊은이들의 열정이 거대하게 폭발한 게 히피다. 선생은 한국 유일의 히피라고 불렸는데.

내 기억으로 그 히피가 65년에서 72년 사이, 7년 정도 되는데, 그 7년 사이에 음악이 다 나오고 패션이 다 나오고 문학이 다 나왔다. 히피의 캐치프레이즈는 역시 사랑과 평화다. 사랑과 평화. 내 생각에 한국은 히피정신을 겪지 못해 세대간, 사회계층간에 무리가 많다. 이슬람 빼놓고는 모든 서양사회, 심지어 일본까지 전부 히피를 겪는데 우리만 유신체제였고 새마을 운동을 했다. 참 억울하고 슬픈 일이다. 지금 젊은 세대는 인터넷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흡수하고 모든 최신 유행을 다 알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중간 역할을 하는 세대가 없다. 공무원들만 있다. 공무원들과 무슨 얘기가 되겠는가.

히피 세대는 오늘 서구 사회의 중추다.

완전히 그렇다. 지금 그 사람들이 50대, 60대 초반이니 완전히 서양사회를 움직이고 사는 거다. 클린턴도 히피였고 영국 수상 젊었을 때 사진 보니 나보다 머리가 더 길더라. 히피가 세상을 담당하고 있다.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위로 물결같이 춤추는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
- <바람과 나>



<바람과 나>에서 ‘무명 무실 무감’이란 뭔가.

나는 곡을 만들 때 항상 음을 먼저 따고 가사는 크게 신경을 안 쓰는 편이다. 무명 무실 무감... 하니까 발음이 되더라. 열 일곱 살 때 할아버지 집에서 조용히 살 때 만든 노랜데, 내가 정말 무명 무실 무감하더라. 모든 것이 제공되고 하는 일도 없고 가정교사까지 있고. 그러니까 내가 무명하고 무실하고 무감하더라. 사람들이 나더러 노자를 공부했느냐 묻기도 하는데 나는 동양철학 쪽은 공부가 거의 없다. 그저 맞아들어 가길래 붙인 거다.

선생은 선생의 음악보다 낙천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고통은 내 애인이고 고독은 내 정부다. 원래부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항상 너무나도 고통을 느낀다. 단순하게 생각을 못하는 게 내 고통이다. 화폐가 생겼다, 먹을 것이 많다, 오늘 영화 보러 가자. 나는 이게 안 된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애인에 정부라... 고통과 고독의 내용은.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세상은 나아질 수 있는데 왜 안 되는 걸까, 그런 생각만 하다보니 자꾸 슬퍼지고 끝없이 고독하게 되고 끝없이 고통스럽게 된다. 그렇게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그러니까 고통과 고독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30여 년 동안 그런 메시지를 노래해도 울림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데.

80여 곡 작곡하고 노래했지만 나 혼자 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 슬프다. 그러나 나는 한 인간이 역사를 바꿀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료가 없어도 상관없고 나는 그저 혼자 걸어가면서 사랑과 평화를 외칠 뿐이다. 그냥 그러고 싶다. 그러는 것만이 내 짧은 삶에 의미를 준다. 그래서 앨범을 8집이나 낸 거고.

음악은 인간의 구멍을 여는 거라는 선생의 말을 기억한다.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뜻이다. 늘 하는 얘기지만 나는 인간은 동물이라고 본다. 코 입 눈 성기 같은 구멍이 만족될 때 인간은 행복해진다. 코는 아름다운 냄새, 입은 아름다운 음식, 눈은 아름다운 그림, 성기는 아름다운 섹스... 인간의 모든 구멍이 열렸을 때 인간은 행복해진다. 음악도 그런 것이다.

성인 이후 선생은 스스로 안락한 환경을 버렸는데.

실은 안락한 것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인간은 필요성에 따라서 행동한다. 다들 love와 need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항상 need가 앞서게 마련이다.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역시 필요하니까 사랑하는 거다. 나 역시 그런데, 내 need는 남들과 조금 다른 것 같다. 화폐보다도 안락한 생활보다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무대, 그게 내 need고 안락이다.
need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다.

그렇다. 나는 평생 화폐를 걱정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생활은 항상 되기도 했고. 기타를 칠 수 있고 샤워할 수 있으면 끝이더라. 그 이상 뭐가 필요한가. 난 차도 없다. 서울에서 차 준대도 안 받고 뉴욕에서도 없다. 골치 아프고 시간 낭비다. 내게 필요한 건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 한 둘 있고,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가볍게 산보할 수 있고 하루 두 끼 정도 먹을 수 있고 그 정도다. 사람은 미니멀리스트로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행복하다.

이번 앨범은 손무현씨가 프로듀스했는데 사운드가 뛰어나다. 그러나 그런 완벽한 사운드, 스튜디오 냄새가 물씬 나는 사운드는 선생과는 안 맞는다는 느낌도 든다. 편견인가.

그런 얘기를 듣는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일부러 그랬다. 거친 건 전에 많이 했으니까. <멀고 먼 길>에서부터 내 나름의 단계 같은 게 있는데 이번 단계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거친 사운드를 듣고 싶다면 과거 앨범을 아무거나 집어들면 거친 사운드 천지다.

이번 앨범은 자켓이 충분히 거치니 그쯤 하고 넘어가자. 그런데 데뷔앨범도 그렇고 선생은 인물도 좋은데 왜 자켓에 얼굴만 등장하면 찌그러트리는가.

모든 가수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화장까지 하고 자켓 사진을 찍는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짓이다. 이번에 우는 얼굴을 한 건 두 가지 이윤데 개인적으로 진짜 울고 싶은 것이, 나는 이미 노년의 대문을 노크했다. 2년 전 후쿠오카 라이브 때 <스페어 파트>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노래 따라 가고 있다. 두 번째는 러시아에 우리 처하고 두 번 가봤는데(한대수의 아내 옥사나는 몽골계 러시아인이다) 러시아 사람들이 참 재미있더라. 누가 친구한테 전화해서 나 배 아프다 그러면 받는 친구는 넌 배 아프니, 난 배 아프고 팔 아프고 다리까지 아프다. 그럼 전화한 친구는 난 괜찮네 그러는 거다. 우리 사회에 우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7, 80퍼센트는 울고 사는데 가수가 울면 나 우는 건 별 거 아니다 생각할 것 아닌가.


난 잠자기가 무서워
난 일어나기가 무서워
밖에 나가기도 무서워
난 집에 있는 것도 무서워
-



이번 앨범은 “모든 게 무섭습니다”라는 선생의 대사로 시작된다.

나는 사회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무슨 학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항상 사회 공부를 한다. 도서관 가서 책을 읽고 사람들 이야기 듣고, 버스에서 이야기 듣고 서울 와서도 버스 지하철 다니면서 이야기 듣고. 그런데 공부하면서 얻는 결론이 우리가 무서운 시대에 왔다는 거다. 인터넷 세상, 디지털 세상에 왔는데 많은 나라가 셀 수 없이 핵을 보유하고 있고 환경문제도 해결 불가능하고 여자와 남자의 관계도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은 그런 세상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섭다, 오늘 세상이 무섭다는 말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연과 어긋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선생은 일생 동안 예술활동을 통해서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며 비타협적으로 살아왔다. 이번 앨범은 어렵게 냈다고 들었는데 타협할 생각이 들진 않았나.

아직은 그런 생각 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내게 음악이 있다, 발표하자, 그런 생각만 해왔다. 8집을 냈는데 모두 뮤지션이 달랐다. 내가 노래를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얘긴데 그건 큰 행운이다. 내가 단지 남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다면 그렇지 못했다.

선생은 이제 음악가로선 늙었다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밋밋해지는 것인 것 같다. 매사에 판단을 분명히 하는 일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말이다. 선생은 예외라 보여지지만.

아니, 나도 동물이다. 남자의 육체적 피크는 스무 살, 정신적 피크는 마흔 살이다. 50살 넘어서 이래저래 하는 건 다 개소리다. 다 지난 사람이 하는 소리다. 나도 개소리 안 하려 애는 쓰지만 개소리긴 마찬가지다. 서양 사회가 참 잘 돌아가는 것이 서양사회의 대기업 회장들이 30대 후반, 40대 초반이 많다. 얼마나 좋은가.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게 45세 때였다. 토니 블레어가 몇 살인가. 한국에서 그 나이면 아이일 뿐이다.

김대중씨나 김영삼씨가 40대 때, ‘40대 기수론’을 폈는데 그 세대가 30년이 넘도록 정체되고 있다.

그게 우리 나라의 문제다. 한국은 늙은이들이 다스리는 나라다. 내가 앨범 8개 만들면서 나와 같은 연배 뮤지션하고 한 적이 있나. 한 번도 없다.

처음엔 비슷했고 계속 나이 차가 벌어진다.
나는 늙어왔지만 계속 20대 아니면 30대 뮤지션하고 작업했다. 그 세대가 가장 창의력이 좋고 아이디어가 좋고 배울 게 있다. 우리 나라를 봐라. 젊은이가 늙은이에게 배울 게 하나라도 있나.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늙은이들에게. 절대로 늙은이가 젊은이한테 배워야 한다. 정치도 그렇지만 특히 방송국 신문사 같은 대중의 정신을 만드는 사람들은 3, 40대가 사장을 맡아야 한다. 나도 20대부터 40대까지는 제일 창작도 많이 했고 일을 많이 했고, 겁도 없었고 배운 것을 정직하게 써먹었다. 지금은 나이 드니까 폼잡는 부분이 있다.

한국인들은 너무 오랫동안 국민을 훈육의 대상으로 여기는 국가에서 살아온 덕에 젊은이들도 정신이 늙긴 매한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선생은 한국 군대에서 빳다를 맞은 최초의 뉴요커였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다른 병사들은 잘 버티는데 덩치 큰 내가 한 방 맞고 완전히 쓰러져버렸다. 알다시피 난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는 재가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할아버지는 한번도 내게 큰소리를 내거나 야단친 적이 없다. 그 때 빳다 맞고 바깥 세상을 처음 알았다. 그런 폭력은 단지 고문이다. 한국의 고문은 일본인과 미국인들에게 배운 것이고 월남전 때도 지독하게 써먹었다. 세상에 고문을 이겨낼 인간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인격을 그런 식으로 빼앗을 순 없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아! 가겠소 난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넘어 가겠소
여행 도중에 처녀 만나본다면 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은유했다 해서 금지곡이 되었었다. 코미디였다.

코미디였다. 스무 살의 나는 그냥 너무 화가 나서, 세상이 화가 나고 사는 게 화가 나서 물 좀 달라고 고함을 친 거다. 이번 8집의 <멸망의 밤>하고도 어느 면에서 일치가 된다. 그런데 당시에 물고문이 많았다. 상처가 안 남고 제일 고통스러우니까. 게다가 어느 홍콩영화에서 그걸 주제곡으로 써서 문제가 커졌다.

유신시대의 검열관들의 교양이라는 게 백치와 다름없었다. 정미조씨의 <불꽃>이라는 노래는 사회주의 혁명을 은유한다고 금지되고.

미치는 거다.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 시절을 다시 살라 하면 다 도망갈 거다.

선생은 음악가로서는 아주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 97년 후쿠오카 콘서트에 초청되면서 한국에서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내가 뉴욕에서, 27살부터 거의 25년을 혼자 사는데 아무도 안 부르더라. 오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판을 만들자는 사람도 없고. 혼자 고생하면서 나자빠지고 방값 내느라 노동하고 그랬는데 다시 음악할 기회가 생기고 자서전까지 냈으니 나로선 행운이라 생각한다.

일본인들이 선생을 도운 셈이다.

일본 공연이 없었다면 잊혀진 사람이 되었을 거다. 아마 <행복의 나라> <물 좀 주소> <바람과 나> 이 세 곡은 이봉조씨의 <밤안개>처럼 남았겠지.

노래방에서나 들리는.

노래방에서나 들리는. 하여튼 일본 사람들 참 대단하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고 그렇게 어려운 초청을 했느냐. 그때 일본에 갔더니 한국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옛날 음반을 들고 와서 싸인을 받아가더라. 청계천을 뒤지고 지방까지 내려가서 사왔다는데 참 무서운 사람들이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전 부인은 다른 남자가 생겨 이혼했고 선생은 자살까지 생각했는데 그 여자가 나중에 곤란해져 선생께 도움을 구하자 지금 부인 옥사나와 사는 좁은 집에 거두어 보살핀 대목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해가 안 간다. 동양 남자는 여자가 성적인 배반을 했을 때는 용서하기 어렵다. 딴 남자와 게다가 서양 남자와 육체 관계를 맺고 돌아온 여자는 오히려 죽어 마땅하다는 게 동양적 사고방식인데, 그걸 아는 여자가 한국 핏줄을 가진 여자가 오죽했으면 돌아왔겠느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굉장한 고독을 겪고 보니까 한 사람과의 만남이 20년이 된다는 건 큰 의미가 있더라. 어떤 사람은 20년도 못 살고 죽는데 우리는 20년 동안 같이 살았다. 그러면 마지막 배반한 1, 2년을 생각하느냐 아니면 17, 8년의 아름다운 시간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건데 나는 17, 8년을 생각했다.

옥사나 씨가 불평하지 않았나.

러시아라는 나라가 워낙 복잡한 나라다. 한 나라가 시차가 열두 개나 되고 워낙 크다 보니 가족관계 복잡하고 웬만한 건 예사로운 일인 모양이다. 그 여자와 현재 육체관계를 안 맺고 있지만 밑에 흐르는 잔잔한 사랑이 없어지지는 않지 않는가. 그걸 이해하더라.

좋은 사람이다. 선생은 <노 릴리전>이라는 노래에서 종교에 강한 반감을 표현했다. 종교의 문제점에 대한 반감인가 종교 자체에 대한 반감인가.

현재 주류 종교들에 대해 모두 비판적이다. 거의 모든 종교 리더들은 사기꾼일 뿐이다.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맹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이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불행을 낳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종교는 정말 끔찍한 것이다.

한국인의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예수와 오늘 한국 교회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개의 교회는 예수가 성전에서 쫓아냈던 장사꾼들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를 빙자하고 파는 사기꾼들과 예수 자체는 구분되어야 하지 않나.

예수가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 덕에 또 다른 종교들의 같은 주장 덕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예수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총각으로 살다 죽었고, 상당히 웅변을 잘 했고, 사랑과 평화를 설교했고, 인기가 대단한, 오늘로 말하면 록스타였고, 참 좋은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을 지표로 삼는다.

나는 일단 머리가 기니까 좋다. 사랑과 평화. 예수는 그야말로 원조 히피다.

선생의 앨범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는 코소보 사태에서 착상했다 들었다. 우리 나라에도 그 이상 끔찍한 역사가 있었다. 광주에서 권력욕에 미친 군인들이 양민을 도살했고 4.3 항쟁에선 제주도 사람의 3분의 1이 죽었지만 여전히 진실 규명이나 책임자 처리가 안 되고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이유에서 건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거다. 종교 때문에, 사상 때문에, 어떤 이유든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의견 차가 있다면 돌아설 수 있는 권리는 있어도 의견 차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는 누구한테도 없다.

우리 현대사는 그런 일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 그런데 그런 걸 계속 받아들이는 게 습관이 되면, 모든 국민이 메조키스트가 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런 데가 있다. 그게 바로 소주다. 밖으로 나가서 싸울 수는 없지만 소주나 마시면서 속을 달래는 거. 분단에 대해 미국이니 소련이니 핑계를 대는데 다 우리 잘못이다. 우리가 38선을 받아들였다. 월남은 악착같이 싸워서 이겼지 않은가. 우리가 바보였다

남한 내에서도 전라도 경상도 나누고 학연으로 나누고 지연으로 나누고 하는 상태에서 통일이 어떨지 걱정스럽다.

참 답답한 일이다. 남북한 문제는 정치적으로는 빨리 해결될 수가 없고 그런 식의 통일은 일단 가능치 않다. 양체제의 지배계층이 피차 먼저 기득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은 연방제 개념으로 양 체제를 인정하면서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교류 이산가족이 왕래하면 사실상 이미 통일이 된 것이다. 야구할 때 홈런으로 이길 수도 있지만 히트로만 이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통일의 방법이 아니라 통일이다.


이 좆같은 세상 다 썩어가네 총알은 튀고 또 피바다 되어
비린내 나는 이 끝없는 전쟁 공해와 질투 또 오해와 권투
돈 좇아가다 다 지쳐 버렸네 어린애들은 다 미쳐 버렸네
-<멸망의 밤>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줄어들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장악했다. 최소한의 공정성을 보완하지 않은 자본주의는 단지 짐승의 법칙이다.

정말 큰 문제다. 신자유주의란 말의 중심은 스톡 마켓이다. 간단히 말해서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미국이 세계의 모든 증권시장, 모든 화폐를 장악하고 움직이는 거다. 오늘 1% 올리겠다 그러면 오르고, 내리겠다 그러면 내리고... 완벽하게 전세계를 다스리는 빅 브라더의 체제가 되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전세계가 빅 브라더의 꼭두각시가 된다. 우리는 이제 음악도 못 한다. 월스트리트에서 주는 음악에 우리는 춤만 춰야 된다. 그 쪽에서 탱고 하면 우리도 탱고 해야 되는 거다. 음악조차도 월스트리트에서 조종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들이 자신들 편안하게끔 코카콜라 펩시콜라 팔았듯 세상을 조종하려 하고 있다.

빈부격차가 아주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겉만 화려한 야만의 세상이 되어간다.

지구에 이렇게 많은 기술과 과학이 발달했고, 특히 농업 관계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사람들이 굶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내가 지금 묵고 있는 이 역삼동 단칸방 월세가 100만원이 넘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지구가 얼마나 큰가. 모든 상황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만들고 조종하는데 우리는 아무 의문도 없이 반항도 없이 복종하는 상태에 있다.

의문과 반항으로 해결되는가.

의문과 반항뿐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이 나와야 한다. 물론 시스템은 우리가 만드는 거다. 우리가 태어날 때 주어지는 게 공기, 물, 음식, 사랑, 네 가지다. 인간은 그 네 가지 가지고 사는 건데 이젠 그 네 가지를 모두 돈으로 사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러시아나 프랑스 혁명 같은 피가 흐르는 혁명은 바라지 않지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는 건 절대적이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이나 편안함을 인정한다. 자본주의적 경쟁이 인류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런데 이젠 자본주의가 우리를 해치고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지나친 자본주의다. 팔기 위해 과잉생산하고 그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쓰러져간다.

그런 생각을 하는 선생의 예술이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 발표할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대중들의 의식은 나아지고 있기도 하다. ‘서해 교전’이라고 들어봤나.

아, 들어봤다.

5년 전만 같았어도 그런 일이면 서울 사람들 모두 라면 사재기하고 도망갈 채비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들 텔레비전 보며 앉아 있었다. 성의식도 많이 변했다. 이른바 0양 비디오 나왔을 때와 백양 비디오 나왔을 때는 사람들 반응이 전혀 달랐다. 0양 비디오 나왔을 때는 ‘처녀가 품행이...’ 어쩌고 했었는데 백양 비디오에 대해선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훨씬 많았다.

남북이 갈라진 상태가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계속 받아 주니까 그런 상황이 유지되고 그런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 득세하게 된다. 비정상적인 건 당연히 정상화시켜야 한다. 섹슈얼한 문제도, 우리 나라의 큰 문제는 포르노 코너가 없다는 것이다. 포르노는 고상한 예술은 아니지만 필요하다. 섹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한국에도 음지엔 포르노가 많다.

양지에 있어야 한다. 어딜 가면 쇼도 볼 수 있고 영화도 비디오도 볼 수 있고 책도 살 수 있고, 인간의 근본을 숨기려 하니까 자꾸 관음증으로 가는 거다.
정치적인 파시즘이 후퇴하면서 그런 도덕적 규제로 정치적 규제를 보완하려 하는 것 같다. 궁금했던 게 있다. 돈이라는 말을 안 쓰고 굳이 화폐라 하는 이유가 뭔가.

어젯밤 뉴스를 보니 20개 사건 중에 19개는 다 돈하고 관계가 있더라. 화폐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돈에 대한 관념을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마누라도 여보 여보 하다가, 오랜만에 이름을 부르면 더 새롭게 와 닿지 않는가.

돈이라는 개념에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얘긴가.

그렇다. 돈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 <행복의 나라>



<행복의 나라>는 제목 그 자체로 화두다. 선생에게 행복의 나라는 무엇인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울타리 속에서 바깥세상 못 보고 살다가 세상에 나가 보니 사람들이 상당히 고통을 받고 살더라. 시타르타가 그랬던 식으로 나도 갑자기 느꼈다. 왜 이럴까. 밥도 못 먹고 옷도 못 입고 왜 이래야 할까. 특히 뉴욕 가고 한국 다시 들어오고 하면서 행복의 나라라는 것이 머리에 들어왔다. 불행한 인생이 워낙 많이 보였다. 나 자신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환경이지만 실은 고아와 다름없었는데 나의 그런 고통이 울타리 밖의 가난의 고통과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행복의 나라를 생각하게 되고, 울고 웃고 싶소 그랬다.

선생은 유토피아를 믿는 편은 아닌 것 같다.

<행복의 나라>를 만든 열 여섯 살 때나 지금이나 그렇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 노래를 만들고 불렀고, 또 아직은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불행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또 그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그 노래가 선생이 발견한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나.

글쎄, 우선 나 자신의 고통을 노래한 것이다. 나는 우선 나 자신을 위해 작곡한다. 히트하고 이런 건 생각 안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면 즐거운 거고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해 <행복의 나라> 작곡한 거고 사회의 분위기와 맞아 들어간 거고. 작곡가는 다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베토벤도 폴 메카트니도. 문제는 그 작곡가가 사회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개인적인 것에 사회적인 것이 반영되는 것 같다.
80년대 민중음악 하는 이들은 선생이 미국으로 간 걸 들어, 한대수는 행복의 나라로 가버렸다고 비아냥거렸다.

미국이 행복의 나란가. 행복의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나는 후배들에게 미국에 꼭 나가 보라 권하고 싶다. 음감을 얻기 위해서. 한국인이 미국음악을 배우면 미국음악에 한국색을 입힐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국제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선생의 노래엔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고, 선생은 예술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댄스 음악 좋다. 이쁜 사람 나와서 춤 잘 추고 패션 맞고 재밌지 않은가. 김현정이나 샤프처럼 노래가 좋다면 더 좋고. 거꾸로 생각해 봐라. 매일 텔레비전에 한대수 같은 사람만 나오는 상황을.

문제는 균형이다.

모든 사람은 나름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택시 기사들은 특별히 많고. 그런데 그 메시지를 정리해서 사회에 제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이 체제에서 돈을 벌기 위해선 무난한 게 제일이기 때문이다. 김부장과 악수하고 이부장과 악수하고, 마누라하고 식구들에게 잘하고, 그게 최고니까.

사회가 변한다는 건 현재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고치려는 노력으로만 가능한데 현재 한국 젊은이들의 예술은 현재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지나치게 없지 않은가.

청년들이 그런 얘길 해야 한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정치, 여성운동이나 인종이나 동성애 문제가 비틀즈니 밥 딜런, 지미 핸드릭스 같은 사람들이 말을 했기 때문에 발전했다. 십대나 이십대에서 그런 메시지가 안나온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나 같은 사람 혼자 아무리 ‘이 좆같은 세상...’ 어쩌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얘기다.
한국 사회는 비관적인가.

그런데 난 그렇게 본다. 우리가 워낙 오랫동안 한 50여 년 동안 너무 힘들게 압박을 받고 살다 보니까 올림픽 이후 허상적으로 선진국이니 뭐니 해서 한동안 잔치를 벌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흑인들이 할렘에서 출세하면 금을 사서 주렁주렁 차고 다닌다. 워낙 못살다 보니 자기가 부자가 되었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게 한 십여 년 되었으니 이제 곧 현실을 다시 바라보는 분위기가 생길 거라 본다. 내가 만난 젊은이들 중엔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참 많았다. 길게 보면 절대 비관적이진 않다.

선생의 낙관주의를 존중한다. 9집을 기다린다.



한대수 연보

1948 3월 12일 부산 출생.
1955 부산 남일국민학교 입학.
1958 뉴욕 할렘의 P.S 125 초등학교로 전학.
1964 부산 경남고등학교 입학. 미국으로 이주.
1965 뉴욕 롱아일랜드의 앨프레드 G. 버너 고등학교로 전학.
1966 뉴햄프셔 대학에서 수의학 전공.
1967 뉴욕 사진학교로 옮겨 사진 공부를 시작.
1968 한국으로 돌아와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데뷔.
1969 이화여대, 서울대, 서강대, 부산대,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
1974 첫 음반 <멀고 먼 길>(신세계) 발표.
1975 두 번째 음반 <고무신>(포시즌)을 발표했으나 모두 압수당함.
1977 미국으로 이주.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활동. 록 밴드 ‘칭기즈칸’을 결성.
1989 김명신과 이혼. <무한대>(신세계) 발표.
1990 <기억상실>(뮤직디자인) 발표.
1991 <천사들의 담화>(삼화> 발표.
1992 옥사나 알페로바와 재혼. 사진집 출간.
1996 시 으로 워싱턴의 국제시인협회가 주는 편집인상 수상.
1997 ‘크로스비트 아시아’의 후원으로 후쿠오카에서 공연. 시집 . 사진•시집 (black book) 출간.
1998 자서전 <물 좀 주소 목 마르요>(가서원) 출간.
1999 <1975 고무신-1997 후쿠오카>(도레미),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감미레코드) 발표. 사진•시집 (blue book) 출간.
2000 <기억상실/천사들의 담화>(도레미) 재발매. <마스터피스>(신세계) 발표.
8집 발표.
2001/02/09 22:22 2001/02/09 2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