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0/26 16:48
"...그 사람에 대한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불신감. 이 한 단어로 족할 것 같습니다... 그의 변명은 간단하겠죠. 우리는 너무 조급했다, 내 그릇이 작았다. (항상 개운치 않은 건 그는 항상 '나는 감옥에서 엄청난 도를 깨우치고 더 큰 사람이 되었다'는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풍기고 다닌다는 거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최근의 그의 신작 시를 읽을 때, 저는 예전의 그의 글과 마찬가지로 그 특유의 '가쁜 호흡', 어떤 '집요한 욕망'을 느낍니다... 그가 연예인이 되기로 작정했다면, 좀 덜 짜증나는 연예인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올해 초, 모스크바 유학 중인 옛 사노맹 조직원이 내 글을 읽고 보내 온 편지다. 나는 글에서 박노해(출소 이후의)를 두 번 언급했고 그 글들은 박노해에 대한 분명한 경멸을 담고 있었다. 준법서약서를 쓰고 나오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고 남기로 한 동료들을 "유연하지 못하다" 하고, 진보의 기본을 저버린 자신의 '새로운 진보론'을 강변하기 위해 여전히 진보의 기본만은 놓지 않으려는 옛 동료들을 "낡았다" 하는 인간에 대한 경멸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 글들이 책이 되어 나오자 나는 도리 없는 불편을 안았다. 어쨌거나 사회적 이유로 오랜 고생을 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편지는 그런 내 불편을 얼마간 덜어주었다.

생태니 공동체니 일상성이니 서태지니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박노해의 '새로운 진보론'은 과거의 박노해(혹은 과거의 진보)가 갖는 정치적 강퍅함보다 달콤해 보이고 어떤 사람들에겐 호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진보론은 조금만 살펴보면 이미 진보의 테두리를 멀찌감치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새로운 진보론엔 정치성이 송두리째 빠져 있다. 이 영리한 전직 혁명가는 '과거의 정치 편향을 철저히 반성'한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정치성을 빼버린다.(과거의 문제는 정치편향이었는가, 정치성 자체였는가.) 대체 정치성이 빠진, 현실에 대해 정치적 긴장을 일으키지 않는 진보가 이룰 수 있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나는 박노해가 다시 고난에 찬 혁명가가 되라는 게 아니다. 우리 중의 누가 그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겠는가. 박노해는 할만큼 했다. 우리는 그의 과거만으로도 그에게 존경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미 그가 그러고 있듯) 그가 안락하길 바란다. 그러나 박노해가 자신이 선택한 안락이 마치 새로운 진보의 방식인 양, 진보의 미래 비전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댐으로써, 여전히 그에게 호의를 갖는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여전히 진지하게 진보의 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다.

거짓 선지자가 된 전직 혁명가는 피할 수 없는 자기 혼돈에 빠지고 그 혼돈은 더욱 깊어만 간다. 출소 직후 넘쳐나는 핸드폰을 개탄하던 그는 이제 자신의 신간 표지를 'TTL' 풍으로 만들어 달라 요구하고(이 경박한 미감), 출소 직후 하루 다섯 시간 노동하며 사는 농촌공동체를 만들겠다 약속하던 그는 이제 '세상을 배우기 위해' 주식투자를 해보겠다 말한다(이 가련한 현실감). 박노해 말마따나 세상은 변했고 진보도 변하건만, 변하지 않은 그 '가쁜 호흡'은 여전히 자신을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가라 불리고 싶게 하고, 변하지 않은 그 '집요한 욕망'은 여전히 자신을 최고의 상품으로 만들고 싶게 한다.

추신 : <한겨레>에 실린 박노해의 신간('오늘은 다르게'라는 경쾌한 제목이 붙은) 광고엔 오늘 이 나라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지성들의 주례사가 도열했다. 조혜정, 박원순, 유홍준... 박노해와 그 지성들의 계급 본능(교수나 변호사의 기득권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은 예술처럼 교감한다. 그 지성들에게 박노해는 달콤함(분명한 현재인)에 쌉쌀함(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과거인)까지 곁들인, 달콤 쌉쌀한 초콜릿이다. 그 지성들은 천천히 그 초콜릿을 씹으며 시민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의 인수합병을 자축한다. 하지만 내 귀엔 벌써 그들의 새로운 대사가 들리는 듯 하다. "무슨 초콜릿이 이리 달기만 해. 싸구려란..." | 씨네21 1999년_10월
1999/10/26 16:48 1999/10/26 16:48
1999/10/05 16:47
연대 총학생회에서 마련한 '저자와의 대화'에 불려 갔다. 학생들끼리 만나고 싶은 저자를 투표했고 진중권과 내가 결과라 했다. 매일 붙어 다니는 사이인 데다 <아웃사이더>라는 잡지도 함께 준비하고 있는 둘을 불렀다는 우연도 희한했지만 아직 저자가 아닌(한 권의 책도 내지 않은) 내가 거기 낀 일은 더욱 희한했다. 얼마간의 민망함과 비슷한 양의 흐뭇함을 안고 나는 거기에 갔고 다행스럽게도 '대화'는 유쾌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사는 게 하도 팍팍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이른바 영화전문서 출판을 시작한 이래 맺어 온 염치와 우애가 없는 인간관계를 모두 접으려 두 시간에 한번씩 버스가 들어오는 파주의 어느 마을에 들어간 지 6개월. 인간에 대한 절망감과 남들 한달 월급만큼의 한달 이자를 온갖 노동으로 때워야 하는 삶의 팍팍함을 위무할 길을 찾던 나는 불현듯 글쓰기를 떠올렸다. 글쓰기는 내가 이미 접은 과거의 인간관계를 통하지 않고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씨네21> 편집장과 알지 못했다면 그나마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글쓰기 이력이 전무한 건달에게 글쓰기를 하도록 배려한 세상에 감사했다. 다른 이보다 족히 십 년은 늦게 글쓰기를 시작한 내겐 그 십 년 동안 쌓였어야 할 나름의 '문장'도 이런저런 '지성'도 없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생각을 가감 없이 옮겨 적는 '솔직한' 글쓰기뿐이었고, 언젠가는 그 솔직함이 정직이 되고 그것이 다시 진실이 되길 기대했다.

나는 글쓰기를 용접공이 용접을 하듯 한 사람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한 가지 노동이라 여겼다. 용접공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건너다닐 다리를 용접하는 것처럼 지식인의 글쓰기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사용할 정신의 다리를 용접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일년 반. 어느새 글쓰기는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나를 대표하는 일이 되었고 내가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는 방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나는 이제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던 '필자'니 '지식인'이니 하는 호칭으로 불리는 일에 꽤 익숙해졌고, 심지어 내게 남은 약간의 어색함을 "나는 진보지식인입니다" 하는 너스레로 뒤집어 사람을 웃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너스레가 완전한 농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분노와 거부감을 안겨줄 만한 말이지만) 나는 오늘 이 나라의 글쓰기가 진보가 아닐 도리가 없다 생각한다. 알다시피 이 나라의 모든 정신적 다리는 무너진 지 오래다. 이 나라에서 사회 정의와 개인의 양심은 강물 속에 흩어진 잔해로만 남아 있다. 이런 현실을 분명히 하고 그 다리를 성실하게 다시 지으려는 당연한 태도가 바로 진보다. 보수라면 다리가 무너진 현실을 인정은 하되 그 다리를 적당히 고쳐 사용하자 할 것이고 극우라면 아예 다리가 무너지지 않았다 생떼를 쓸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보수는 오늘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고 극우는 오늘의 이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안 쓴다면 모를까 이 나라의 글쓰기가 진보가 아닐 도리가 있는가.

그나저나, 밑도 끝도 없이 삶의 팍팍함을 위무하겠다는 무식한 생각으로 글쓰기에 뛰어든 나 같은 건달도 아는 그런 소박한 이치를 도저한 지식과 장구한 글쓰기 이력을 가지고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된 사정일까. 그들이 하나같이 아둔한 걸까, 그저 나 혼자 싸가지가 없는 걸까.

추신 : '저자와의 대화'에서 만난 '그들'(오늘의 대학생들)에 대한 소감. 짐작대로 '그들'은 '우리'(80년대의 대학생들)보다 대체로 탈정치적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정치성의 숫자가 아니다. 알다시피 세상은 한순간에 바뀌는 게 아니며 문제는 그 정치성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되는가다. '우리'의 부끄러운 이력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그래서 적지만 오래갈 듯한 정치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일단 나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고 싶다. | 씨네21 1999년_10월
1999/10/05 16:47 1999/10/05 16:47
1999/09/21 16:46
이른바 근대 정신의 핵심은 '개인'(나의 주인은 왕이나 신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이고 오늘날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 적혀 있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그런 근대 정신을 보장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난 50여 년 동안 반공주의 외의 모든 사회적 의견을 빨갱이로 몰아온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건재하고, 이미 3년 전 예술 작품에 대한 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얻고도 여전히 예술작품에 대한 온갖 검열이 횡행하는 이 나라를 근대적인 국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국민의정부가 만든 '민주적 검열기구'인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3개월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영화다. 알다시피 등급보류란 지정한 기간 동안 영화를 알아서 가위질 해오게 하는 손 안대고 코푸는 검열장치다. 등급보류는 1~3개월로 나눠지는데 기간을 나누는 이유는 자를 게 많을수록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예술적 배려' 때문이다.(공윤이 공진협을 거쳐 등급위로 바뀐 과정이나 등급보류가 뭔지 조차 모르는 독자는 이쯤 해서 읽기를 중단하고 조종국 기자의 지사적 저널리즘을 되훑어 보시길)

어느 시대든 검열자들이 내세우는 두 가지 핑계는 사회 안전과 도덕이다. 우리의 경우 사회 안전은 주로 반공으로 표현되어 왔지만 이젠 그 반공이 얼마나 맹랑한 반공이었는가가 대체로 밝혀진 편이라 새삼 말하기가 욕스럽다. 도덕은 주로 청소년문제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추하고 부도덕한 현실을 보이는 일이 그들의 정서 함양에 해가 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이 나라의 성인들은 그들에게 곱고 바른 것을 많이 보여줄 의무가 있다. 문제는 청소년에게 해를 주는 현실이 '예술작품 속의 현실'인가 '실제 현실'인가 하는 점이다. 청소년들이 24시간 숨쉬는 실제 현실엔 어떤 도덕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판에, '청소년을 위해' 소설 한편 영화 한편 속의 도덕을 따지는 일이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것은 단지 어젯밤 술집에서 남의 딸을 희롱한 이 나라의 성인 남자가 오늘밤 제 딸이 같은 일을 당할까 노심초사하는 눈물겨운 부성애에 봉사하는 일일뿐이다.

나는 아직 <거짓말>을 보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장정일의 소설을 좋아한 일이 없고(산문을 통해선 그가 존중할 만한 작가임을 확인했지만) <우묵배미의 사랑> 이후 장선우엔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특히 그가 <거짓말>과 검열문제를 두고 자꾸 색즉시공이니 공즉시색이니 하면서 도사연 하는 일은 마땅치 않다. 그가 선방이 아니라 세상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길 바라며 그 영화가 이미 사회적 의제가 되어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소한의 계몽적 태도를 보이는 게 예의가 아닐까.) 그러나 장정일과 장선우와 그들의 예술작품에 대한 내 입장과 장정일과 장선우와 그들의 예술작품에 가해진 검열에 대한 내 입장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모든 검열의 목적은 한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그 기득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그 사회의 정신세계를 묶어두려는 데 있다. 해서 검열은 언제나 한 사회의 정신적 생산물 가운데 가장 앞선, 가장 돌출된 부분만을 대상으로 한다. 뒤집어 말하면 한 사회에서 검열자의 먹이가 되는 정신적 생산물은 (그것이 설사 쓸모 없는 쓰레기처럼 보인다 해도) 그 사회의 정신세계의 확장을 위해 제 몸을 태우는 숭고함을 갖는 것이다. 나는 장정일(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과 장선우(그의 태도가 마땅치 않지만)가 가진 예술가로서의 용기를 존경하며 그들의 예술작품 <거짓말>(아직 보지 않았지만)을 진심으로 지지한다. 나는 <거짓말>을 시사회장이 아닌 내가 사는 곳 근처의 극장에서 내 돈 내고 볼 수 있기를 원한다.

추신 : <거짓말>은 '세계적'인 베니스영화제에 가 있고 이 글이 독자에게 읽힐 무렵엔 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이 나라의 사대주의 수준으로 볼 때, 이 영화가 상을 받는다면 검열자들은 두 번 쪽팔리게 됐다. '세계적'인 예술작품을 등급보류한 일로 한번, '세계적'인 예술작품의 등급보류를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할 일로 한번 말이다. 하긴 상을 받든 못 받든 그 빌어먹을 검열에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한 우리도 '세계적'으로 쪽팔리긴 매한가지다. 아, 우리 쪽의 거처는. | 씨네21 1999년_9월
1999/09/21 16:46 1999/09/21 16:46
1999/09/07 16:45
(내가 가진 얼마간의 좌파 성향과 상관없이 얘기하자면)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다양성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며 여러 다른 의견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최선의 사회적 합의를 얻는다. 그런 지리한 과정은 좌든 우든 좀더 ‘능률적인’ 사회 시스템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답답함을 주지만, 개인의 개성과 사회 정의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는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그 신문은 다양성에 반대한다. 그 신문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테러한다.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대사는 그 신문의 정수다. 이장희나 최장집을 빨갱이로 몰기 위해 그 신문이 저지른 사실 왜곡의 수준은 우리의 이성을 강간한다. 그 신문은 사회적 합의에 반대한다. 그 신문은 전쟁이 나자 국민을 버리고 도주했고 결국엔 중학생까지 가세한 저항에 의해 쫓겨난 독재자를 이 나라의 아버지라 일컫는다. 그 신문은, 일제 식민지 시절 바로 그 일본군 헌병이었고 해방공간에서는 사회주의자였다가 동료들을 밀고하는 대가로 살아남아 쿠테타로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하나로 제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려 든 또 다른 독재자를 민족의 신으로 추앙한다. 지난 50년을 통틀어 그 신문이 지지해온 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파괴자들이다.

서글픈 일은 그 신문이 이 나라에서 300만 부(그 신문의 주장대로라면)나 팔린다는 사실이다. 300만 부가 팔린다는 얘긴 천만 명 이상 읽는다는 뜻이며 천만 명 이상 읽는다는 얘긴 그 신문이 이 나라의 정신을 대체로 지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근대적 외관과 봉건적 정신’(빌어먹을 박정희의 위대한 업적인) 속에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그 신문을 즐겨 보는 일이 되레 당연하다 싶다. 언뜻 보기에 그 신문의 정치 사회면은 <동아>나 <한국> 같은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고 그 신문의 문화면은 <한겨레> 만큼이나 진보적이다. 전체적으로 그 신문은 한국에서 발행되는 어떤 신문보다 볼 게 많고 재미있다.

문제는 그 신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만만치 않은(적어도 나 같은 건달보다는 훨씬 훌륭해 보이는) 지적 능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그 신문이 다른 보수신문들과 다른 게 무어냐, 반문할 때 맥이 풀린다. 나는 차라리 이 나라의 전근대적인 교육 시스템을 원망한다. 그들은 또 말한다. 어떤 신문이든 글만 바르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이런 순진한 사람들에게 <월간조선>과 그 신문의 문화면을 찬찬히 비교해 보기를 권한다. 그 둘 사이의 믿기 힘든 간격이야말로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운영 원리다.

그 신문의 정치 사회면이 평소 다른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다가 먹이가 나타났을 때만 기동한다면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 조직’의 별동대로서 상시적인 전투를 수행한다.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정신이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심지어 사무라이 정신과 몽골기마민족론 따위의 위험천만한 파시즘 맨털리티로 무장되어 있다. 그에 반해 그 신문의 문화면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을 중화하는 임무를 띤다. 문화와 학술로 포장된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담론들은 그 신문에 어떤 위협도 주지 않지만, 수많은 좌파나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기고하는 신문은 그저 건전한 보수 신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신문의 소품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오늘날 근대성을 가진 나라라면 지식인이 극우 신문에 기고하는 일만으로도 사회적 스캔들이 된다는 상식쯤은 갖길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신문이 극우신문이라는 의견이 아직은 충분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현실을 인정한다. 게다가 그 신문에 출연하는 이들 가운데는 머지 않아 나의 미더운 벗이 될 사람이 여럿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파시스트의 부역자라 게시하기보다는 지루함을 무릅쓰는 논쟁이나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믿는다. 결국 우리는 함께 외칠 것이다. "벗이여,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 | 씨네21 1999년_8월
1999/09/07 16:45 1999/09/07 16:45
1999/08/24 16:42
'하루감옥체험'을 했다. 명동성당 앞에 지어놓은 0.75평 짜리 감방 일곱 개 가운데 하나엔 내 이름이 적혀 있고 나는 그곳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참여해 달라는 연락이 왔을 때 나 같은 건달을 뭐에 써먹으려나 싶었지만 군말 없이 따랐다. 민가협, 그들은 우리가 알량하나마 나름의 신념을 건사하고 살수 있도록 사랑하는 가족을 담보로 제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이라면 우리 가운데 누구에게든 하루쯤 감옥 체험을 하라고 권유할 자격이 있다. 또한 하루감옥체험은 한국에는 양심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더러운 파시스트들로부터 우리의 명예를 확인할 소중한 기회다.

0.75평 짜리 감방은 내 짐작보다 더 좁았다. 이런 곳에서 수십 년을 지내고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체제의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곳에 사람을 수십 년씩 가두는 국가에 우리가 걸 수 있는 신뢰는 어떤 것일까. 허락 받지 않은 상념에 빠진 나에게 그들(비전향 장기수 영감님들)이 찾아왔다. 전향서라는 이름의 종이 한 장과 수십 년의 세월을 맞바꾼 그들의 얼굴은 수도자처럼 맑았고 그들의 몸가짐은 사위를 바로 새울 만큼 정중했다. 그들이 창에 얼굴을 대고 자신을 소개한 후 "고생 많으십니다."라고 고개를 숙였을 때 나는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그저 "죄송합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쯤이었다. 그들은 내가 있는 곳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있던 곳과 모양과 크기가 비슷하다 했다. 그러나 그런 도량형 상의 유사함이란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수십 년 동안 여섯 면의 벽은 하루하루 그들을 향해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세 살쯤 되었을까. 이른바 국민의 정부 하에서 일어난 조직사건인 '영남위 사건'으로 투옥된 양심수의 딸아이가 찾아왔다. "아빠도 이런 데 계셔,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 엄마 팔에 앉긴 아이의 눈엔 이슬이 맺혔고, 인사를 재촉하는 엄마의 말에 아이는 자꾸만 몸을 빼면서도 눈길만은 나를 놓치려 하지 않는다. 곱고 예쁜 세상만 보여주기에도 모자랄 저 아이의 눈망울에 이 비열하고 사악한 세상을 마련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방법은 무엇일까.

"아저씨 힘들지 않으세요." 초등학교 일 학년 짜리 남자아이가 제 키를 넘기는 창에 간신히 얼굴을 대고 묻는다. "괜찮아, 아저씬 조금 있다 나가." "우리 아빤 광주 교도소에 있는데." "아빠가 뭘 잘못했지?" "아빤 착한 일 해서 잡혀가셨어요." 고개를 떨구는 저 아이가 익힌 세상의 이치는 '착한 일 하면 잡혀가는' 곳이다. 아이에게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정신적 성취들(학문적 예술적 문화적 혹은 종교적인)은 한낱 오물에 불과하다.

교도관들(역시 양심수 출신인 청년들)의 감시를 피해 훔쳐 본 명동거리는 텔레비전 스케치 화면처럼 낯설었다. 따가운 햇살 아래 모델 같은 몸매의 아가씨들이 잦은 집회로 길이 든 명동성당 입구를 따분한 얼굴로 흘끔거리며 지나가고, 성당으로 오르는 고급승용차들은 진입로에 주저앉은 보라색 스카프의 어머니들에게 끊임없이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저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자신들이 지켜 가는 다이어트에의 신념마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갇힌 이들의 신념 덕에 가능함을 알고 있을까. 고급승용차 뒷좌석에 우아하게 들어앉은 저 귀부인은 자신이 지켜 가는 종교에의 신념마저 한여름 땡볕 아래 주저앉은 저 어머니들의 뚫린 가슴 덕에 가능함을 알고 있을까.

어머니들은 창살 사이로 내 손을 어루만지며 자기 자식인양 안타까와했다. 이곳은 공갈 감옥이고 나는 공갈 양심수지만 그들은 진짜 어머니들이었다. 불과 몇 년 전, 제 자식의 안위만을 기원하며 살던 그들은 이제 이 나라의 가장 추악한 부위를 몸으로 겪으면서 제 자식이 풀려나고도 남의 자식 걱정에 거리를 누비는 투사가 되었다. 내 손을 잡은 채 미소지으며 한 어머니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게 엄마잖아. 엄마의 힘은 하늘도 움직일 수 있거든. 우린 무서울 게 하나도 없어." | 씨네21 1999년_8월
1999/08/24 16:42 1999/08/24 1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