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6/23 16:13
스피드. 동이 틀 무렵 계기판의 바늘이 200km을 넘기는 순간을 경험해 보았는가. 세상은 적막해지고 시야는 느리게 흐르는데 감흥에 취해 눈이라도 감으면 3초 안에 죽음이 다가온다. 스피드는 예술이다. 125cc 오토바이로부터 시작된 20여 년에 걸친 나의 스피드 체험에 의하면 스피드는 다른 어떤 무엇도 아닌 그저 예술인 것이다.

이런 몽롱한 소리를 그것도 구제금융 시대에 지껄여도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는 행복하다. 알량하나마 출판사 발행인이 아니라면, 이 지면이 '고급 비평정보'를 추구하는 유명 영상지의 고정란이 아니었다면 어렵지 않았을까.(이거야말로 정말 치사하기 짝이 없는 나의 사회적 신분이 아닌가) 그런데 만일 이런 얘기를 낮엔 철가방을 나르고 밤이 오면 대학로에 나가는 열 일곱 살 짜리 폭주족이 한다면 어떨까.

한국의 폭주족은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티뷰론을 타는 중산층 자식들이 아니고 가죽옷을 걸치고 자동차보다 비싼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미국 폭주족들과도 전혀 다르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미래에 명예나 지위 출세 안정 따위가 놓일 자리가 없음을 너무 일치감치 알아차린 나머지 '미래'가 있던 그 자리에 '뿅카'를 놓아버린 순진한 소년들이다.

폭주족에 대한 사회의 적의는 지나치다.(폭주족은 오토바이를 사용한 범죄조직이 아니다. 폭주족이 경찰에 잡혀 봐야 구류 이틀밖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의 범법행위가 적어도 실정법 상으로는 매우 경미한 수준임을 방증한다.) 그 적의의 실체가 다름 아닌 계급적 경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밝고 깨끗하지 않은 모습을 한 모든 것에 대한 중산층의 불안과 혐오이자 폭주족이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 죽어지내길 바라는 사회적인 요구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이다. 그 보복은 정기적으로 공공의 적을 선정하여 사회의 진짜 적을 감추는 TV라는 괴물에 의해 발표된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 감히 이 사회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단잠을 깨워."

폭주족이 쇼바를 높이고 머플러에 구멍을 낸 '뿅카'로 앞바퀴를 치켜든 채 세상을 질주하는 일은 그들의 삶에서 미래를 앗아간 사회에 대한 가슴 아픈 저항이자 자신들을 위한 유일한 예술이고 퍼포먼스다. 알고 보면 누구나 폭주족만큼은 범법자다. "아저씬 음주 운전 한 번도 안 했어요? 아줌마 몰래 콩 깐 적 없어요?" 하지만 누구도 폭주족만큼 솔직하진 않다. "왜 타냐고요? 그냥요, 죽이잖아요." 그들의 잘못은 그들도 안다. "솔직히, 잘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들이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다. "아홉 시 뉴스 보면 진짜 나쁜 새끼들은 따로 있잖아요."

사안의 성격상 나는 이쯤해서 꼬리를 접어야겠다. 폭주족을 신파적으로 미화하는 일은 지나치게 관념적이며 폭주족 문제를 '계급 대결'로 해석하는 일은 지나치게 공상적이라고 해두자. 그저 폭주족도 정당한 사회적 판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 한가지만 분명히 해두기로 하자.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은 삐삐밴드가 TV 카메라에 침을 뱉는 일을 저항이라고 우기는(당사자는 극구 아니라고 하는데도) 진보적 지식인들이 폭주족의 저항과 예술에 대해선 침묵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서양 대중문화사라는 메뉴판에 나와 있지 않은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 그들의 격조 있는 식성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스피드를 모르기 때문일까. | 씨네21 1998년_6월
1998/06/23 16:13 1998/06/23 16:13
1998/05/26 16:12
한총련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들의 노선이 아니라 'GUESS' 모자와 'NIKE' 티셔츠를 입고도 '자주'를 외치는 그들의 분방함이 정말 좋다. 필자가 학교 다닐 무렵의 운동권 학생들은 밝고 화사한 빛깔이나 영문이 들어간 옷을 입는 것은 금기였다. 집회에 모인 학생들은 모두 '심각한' 빛깔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같은 담배를 피웠고 같은 음악을 들었으며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소설을 읽고 같은 공연을 봤고 같은 어휘로 말했다.

파시즘은 어디에 있는가. 파시즘은 이른바 5,6공 인사나 한국논단 같은 극우집단에만 남아 있는가. 천만에, 파시즘은 우리 안에도 남아 있다. 파시스트 치하에서 몇십 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파시스트와 닮아 갔고 파시즘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구제금융을 부른 '국가'가 그 원인을 '국민의 과소비'라 둘러대면 '국민'은 가슴을 치며 금가락지를 빼들고 방송국에 간다. '국민'의 대다수인 근로대중들이, 30여 년을 경제개발 현장에서 뼈빠지게 고생만 하던 사람들이 요 몇 년 아이들과 놀이동산 몇 번 가고 갈비도 사먹고 한 것이 구제금융의 원인인가.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를 한없이 비굴하게 만든다.

한 대중음악 평론가가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뜨는 노래 절반이 일본 곡 표절인데 지금 전면 개방하면 그게 다 밝혀질 거고 그러면 국민들은 배신감 때문에 우리 가요에 등을 돌릴 거다. 개방을 미뤄야 한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여당 쪽에서 일하는 선배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물었다. "미국영화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고 하지만 개방해서 경쟁하게 하는 게 근본적으로 자생력 기르는 거 아니냐?" 그 선배는 나를 일종의 영화인으로 보고 물었지만 그다지 영화인이 아닌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고 얼마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그 문제를 물었다. 놀랍게도(아무래도 나만 놀란 것 같다) 하나같이 개방이 바람직하지만 그걸 '주장'할 순 없다고 답했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이젠 물어야 한다. 이른바 '민족'의 이름 하에 덮어 둔 한국 대중문화 '업자'들의 '무능'과 '배신'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들의 정조가 과연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인지 따져봐야 한다.

세상의 모든 파시즘은 언제나 '민족'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북에 가본 강남의 중딩이 통신에다 소감을 썼다. "강북 형들 넘 무섭게 생겼당. 다신 안 간당..." 이 중딩과 점심을 거르는 강북의 고딩이 과연 같은 민족인가? 오늘 아침 농성장에 출근하는 노동자와 반성하지 않는 자본가가 굳이 같은 민족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사는 사람은 무조건 같은 민족이라는,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은 모두 민족적인 것이고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파시즘을 부른다. 전두환이 광주를 토벌하며 더러운 집권욕을 드러낼 무렵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지껄였다.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위컴은 '망언'을 사과했지만 '들쥐들'은 18년 동안 덮어놓고 맨 앞에서 뛰는 놈만 따라다녀 왔다. 파시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 씨네21 1998년_5월
1998/05/26 16:12 1998/05/26 16:12
1998/05/12 16:08
대학로에 춤 공연을 보러 나갔다. 초대권으로였지만 영화고 연극이고 이른바 예술 감상을 못한 지가 1년이 넘는 나로서는 오랜만의 즐거운 외출이었다. 올해로 다섯 번째인 '민족춤 제전'은 출품작들의 수준이 비약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제 의식에 대한 강박이 없어졌다는 점이 춤 언어를 세련되게 만들었고 보는 사람을 안심하게 했다. 행사를 꾸린 김채현 선생에게 "민족춤 같지 않네요."라는 농을 던지며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자못 문화적 포만감에 젖어 극장 밖으로 빠져 나오는 순간 가까운 곳에서 굉장한 음량의 음악과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예정에도 없던 공짜 라이브를 건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다가가 보니 수백 명의 교복들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머리를 가지각색으로 물들이고 헐렁한 옷을 입은 10대들이 댄스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또 하나의 춤공연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조명도 없이 민족춤 제전이 열리는 문예회관 대극장의 외등에 의지하는 소박한 공연이었지만 그 열기는 대단했다. 대략 열 명쯤인 댄서들이 군무를 하다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묘기에 가까운 애드립을 할라치면 수백 명의 교복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댄서들 가운데는 그쪽에서 꽤 알려진 친구들도 있는지 "삼식이 오빠 짱이야!" 하는 실명이 들어간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공연은 용감하고 당당해 보였으며 그들의 댄스는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을 가르치는 어른들이 같은 곳에서 판을 벌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 썰렁함과 퇴폐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자꾸만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내내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긴장했다. "댄스음악을 다시 봐야겠다. 저 친구들한텐 그게 록이었구나."

대중문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댄스음악이 판치는 현실, 10대들이 댄스음악에 경도 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우려한다. 거기에는 장르의 편향성에 대한 우려 말고도 댄스음악이라는 장르의 뒤편에 숨겨진 음험한 상업성에 대한 비판도 들어 있을 것이다. 나만해도 웬만하면 한 주에 한번쯤은 가요 프로그램을 보고 싶지만 양파 까듯이 반복되는 댄스음악을 견뎌내지 못하고 번번이 포기하고 마는 처지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댄스음악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해야겠다. 1. 댄스음악은 누구의 것인가? 10대들이다. 2. 그들이 댄스 음악을 선택한 이유는? 춤추기 위해서이다. 3. 그들은 왜 춤을 추는가? 그냥, 좋아서. 4. 굳이 복잡하게, <시네21> 독자들 수준으로 얘기하면? 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기성세대와 주류사회에 '저항'하기 위해서...

댄스음악은 록이 아니다. 그러나 록을 진정한 록일 수 있게 하는 이유가 이른바 록정신에 있다면, 다름 아닌 탈출과 저항의 정신에 있다면 98년 한국의 틴에이저들은 댄스음악으로 록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들이 원전(미국 대중음악사)을 따르지 않고 그들만의 록으로 댄스음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의 10대들의 정서가 많이 서구화되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록까지는 아니어서일 수도 있고 그들의 사회적 처지가 60년대 미국 노동계급의 10대들과 달라서 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대중음악사가 이 나라에서 똑같이 반복되어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댄스 하는 그들, 대한민국의 10대들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나. 이른바 기성세대와 주류사회는 그들을 위해 어떤 세상을 준비해 놓았나. 모든 갓난아이들이 20년 동안 오로지 대학입시라는 이름의 '계급 결정시험'만을 위해 살도록 정해진 대인국에서 바로 그 '계급 결정시험'을 목전에 둔 10대라는 소인들이 춤을 춘다. 그들의 적은 그들을 뺀 전부이며 그들은 댄스로 록을 한다. 끝없이 탈출하고 무작정 저항한다. 그들은 예술의 사회성을 모르며 역사적 전망을 모르며 어떤 종류의 전략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록정신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록정신으로 충만하다. 그들의 댄스를 막지 마라. | 씨네21 1998년_5월
1998/05/12 16:08 1998/05/12 16:08
1998/04/28 16:07
나는 하드록이 좋다. 레인보우의 8분 27초 짜리 <스타게이저>를 틀고 눈을 감으면 심장 근처로 고압전류가 흐르고, 드럼을 두들겨 살아있음을 확인하던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 시간만큼은 개점휴업 중인 출판사의 알량한 발행인이 아니고 한달 내내 이자 챙기기에 녹아나는 불량거래 직전의 채무자도 아니다. 그 시간만큼은 나도 한 록 하는 로커이고 국가와 사회가 감당 못할 날라리이다.

1985년의 청년은 하드록을 들을 수 없었다. 식민지에는 민족적인 문화와 매판문화가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하드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오염된 육체와 정서가 부끄러웠다. 어느 날 밤, 나는 책상 옆에 놓여져 있던 스네어 드럼을 치우고 분연히 일어나 민족음악을 찾아 나섰다. 맨 먼저 한 일은 마샬 앰프의 살인적인 출력에 늘어나 버린 나의 귓구멍을 대나무와 오동나무 그리고 쇠가죽 따위에서 내는 단출한 소리에 맞춰 다시 뚫는 것이었다. 휴학생이었고 시간은 많았다. 매일 밤 FM의 국악 프로그램을 듣고 또 그걸 녹음해선 온종일 듣기를 여러 달, 내 귀는 드디어 새로운 음악을 즐겁게 수용하기 시작했다.

내 귀는 민속악보다는 정악을 좇았다. 김성진의 정악 대금은 나를 사로잡았다. 몇십 년을 주인의 침에 삭은 쌍골대가 어떤 관념적인 틈새도 없는 윤기로 <상령산>을 울리자 나는 전율했다. 얼마간의 미장 데모도 노릇으로 나는 대금을 살 수 있었다. 단단하고 묵직한 몸에 삼현육각이 새겨진 놋쇠 덮개가 덮인 대금을 손에 넣고는 감격의 눈물을 찔끔거렸다. 입대가 한달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최선을 다했다. 국악원에 출근하다시피 열심히 강습을 받고 밤새 혼자 연습하고 대금의 조카뻘인 단소를 수십 개씩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도서관을 뒤져 대금에 관한 온갖 문헌을 찾아내기를 계속했다.

군대 내무반에서 대금 연습을 하리라는 내 계획은 대한민국 육군을 졸로 보는 꿈이었음이 입대하던 날 밤 밝혀졌다. 무슨 운명인지 대금 연습을 포기한 건 저 산밑의 일이고 나는 다시 드럼을 치게 되었다. 사병들의 춤을 위해선 <젊은 그대>, <아파트>, <배드 케이스 오브 러빙 유> 따위를 연주하고 이따금 지원되는 스트립걸을 위해선 <모나코>를 깔았으며 장교놈들 회식을 위해서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로 봉사했다. 군부정권하의 군대를 위해 문선대 노릇을 하는 일에 대한 거리낌은 없었다. 나 또한 군바리였고 나는 나의 드럼에 맞춰 미치게 몸을 경련하는 불쌍한 전우들을 위해 기꺼이 팔다리에 쥐가 나도록 드럼을 두들기고 또 밟았다.

3년을 총 대신 드럼스틱으로 때우고 나와선 이른바 노동자 문화운동 하는 조직에 들어가 보니 음악팀에선 놀랍게도 전기기타 신디사이저 드럼을 사용하고 있었다. 몇 차례 공연을 따라다니며 드럼을 치기도 했지만 내 생애에 가장 불편한 드럼이었다. 나의 음악정신은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거길 그만두고 다시 한 해를 놀 때는 또 대금을 만지작거렸다. 90년대로 넘어와 이른바 진보적 영화도서 출판을 시작하고부터는 맥없이 여러 음악을 전전했다. 퓨전재즈, 다음에 블루스, 다음에 서양 고전음악, 그 다음에 재즈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1998년, 나는 다시 하드록을 듣는다.

대금을 꺼내는 일은 드물어졌고 <영산회상>도 일주일에 한번 들을까 말까다. 대금을 꺼내고 <영산회상> 시디를 넣고 하는 일이 피곤하기 그지없고 그 이유를 생각하면 더욱 피곤해질 뿐이다. 하여간 당분간 '우리 것'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다. <서편제>가 뜨고 이른바 국악붐이 일면 명절날 방문객을 맞는 고아가 된 것 같고 쇠락한 고향을 밝히기를 부끄러워하는 잡놈이 된 것 같다. 나의 음악유전이 이 나라의 역사와 조금이라도 관련을 맺어왔을 거라는 공상을 하면서, 파시즘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이 염병할 나라에서 정악처럼 사람을 정갈하게 만드는 음악을 듣는 일은 코미디이고 잔혹극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 아직도 한줌의 음악 정신이 남아 있다면 얼마간 어질러진 채로 놔두고 싶고 그래서 거듭하는 게 하드록이다. 한없이 몽롱해 하면서도 머리와 입으로 록에 붙어먹으려는 놈들에 대한 살의를 풀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의 음악유전은 몹시 피곤했고 음악에 관한 한 나는 임포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 | 씨네21 1998년_4월
1998/04/28 16:07 1998/04/28 16:07
1998/04/14 16:06
권 장로가 성경 갈피에 미리 넣어 둔 자루 없는 커터 칼날로 배를 세 번 긋고 변기 뚜껑을 깬 것은 새벽닭이 울기 전이었다. 칼날은 5센티미터 깊이까지 들어갔으나 권 장로의 피하지방(비계)이 그보다 더 두꺼웠기 때문에 내장은 상하지 않았다. '자살기도'냐 '자해공갈'이냐 하는 정치평론보다는 "국산 칼날 문제 있다" 따위의 조크가 더 어울리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나라를 콩가루로 만든 김 장로에 이어 또 한번 교회 장로가 사고를 침으로서 기독교인들은 민망하게 되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이하 유토피아)는 이 사건을 주제로 두 목회자의 대담을 마련했다. 참석자는 응답교회 은혜만 목사와 낮은교회 지하로 목사이다. 은 목사는 유신 무렵, '영도자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창안하여 급부상한 이래 공격적인 교회경영으로 고속성장을 거듭해 온 유력한 목회자다. 지 목사는 악명 높은 철거깡패 출신으로 뒤늦게 목사가 되어 빈민선교에 전념하고 있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지면에 옮기기 거북한 부분도 그대로 두었음을 밝혀 둔다.

유토피아: 이번 권 장로 일로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지탄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지하로: 교회가 국민들과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아까 테레비에서 보니까 그 양반 오늘 구속이라는데 예배를 보고 있더라구요. 열 받아서 테레비를 뽀개버릴 뻔했어. 사실 전부터 대공이니 공안이니 오바하는 존만 새끼들 중에 집사가 많았거든. 여대생을 취조한다고 잠지를 까고 지랄한 문귀동이라든가... 존만 새끼들.
은혜만: (잠시 묵상하고) 우리 성도들은 아무래도 좀 뜨겁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많아 보이는 거지, 실제론 불교신도가 많을 걸요. 권 장로님 일은 저도 유감입니다만, 여론이 안 좋다고 같은 성도끼리 돌을 던진다면 종교탄압을 자초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유토피아: 북풍사건은 특정 대통령 후보를 빨갱이로 몰기 위해 북쪽과 내통을 했다는 게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은혜만: 그게 말이죠, 제가 정치탄압 받을 각오하고 하는 말인데요, 지금 교회 욕하는 사람들 전부 그 후보 찍은 사람들이에요. 전라도가 원래 좀 그렇잖아요. 서울만 해도 강남은 분위기가 다르다고 봐요. 그리고 빨갱이 하나 잡는 게 열 명 전도하는 거보다 은혜예요. 나도 실향민이지만 적화통일 돼봐요. 교회가 어딨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수호돼야 신앙의 자유도 있는 거예요.
지하로: 그래서 북한하고 내통했어요?
은혜만: 제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다 보니까 정보력이 좀 돼요. 이거 정보망 무너지는 거 각오하고 하는 말인데, 권 장로가 북쪽하고 접촉한 건 선교 목적일 가능성이 높아요. 권 장로님이 워낙에 뜨거워요.
지하로: 북한선교라. 완존 예술이구만. 권 장로가 자기를 패장이라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지가 성전(聖戰)을 치루고 있다는 건데, 완존 또라이야. 그럼 누가 얘를 또라이로 만들었냐, 권 장로고 문 집사고 교회가 목사가 그렇게 만들었다 이기야.
은혜만: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그 두 사람은 저희 교회 교인이 아녜요.
지하로: 돌아버리겠구만. 오늘 고명하신 은 목사님 만난 김에 하나만 물어 봅시다. 기독교가 모세를 믿는 거요, 예수를 믿는 거요?
은혜만: 허허허, 그거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지. 무슨 그런 싱거운 말씀을.
지하로: 싱거? 그런데 은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면 예수가 말한 거하고 반대가 많거든. 은 목사님은 열심히 믿으면 물질축복 받는다고 하는데,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기보다 어렵다고 했단 말야. 나는 이 생각만 하면 돌아버려. 이거 이해시키시면 내 쓰바 오늘 당장 낮은교회 엎어버리고 응답교회 나가겠시다.
은혜만: 성경 말씀은 영적인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효도하면 당연히 효행상 받아야죠. 제가 안기부 특강도 하고 그럽니다만 성도가 가난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게 다 뒤에 불온한 게 있는 거예요. 퍼런 수박 쪼개 봐요. 빨갛잖아요. 그건 그렇고 저는 내일 아침 청와대 조찬기도회 준비 땜에 일어나야겠습니다만, 솔직히 이번 권 장로 일이야 석 달만 지나면 누가 기억이나 합니까. 미국 보세요. 기독교니까 반공하니까 축복 받은 거고, 소련은 망했잖아요. 이번 일이 종교탄압으로 흐르지 않도록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유토피아: 저도 오늘 유명 영상지 원고 마감이라서요. 아쉽지만 지 목사님 간단하게 정리 말씀하시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하로: 먼저, 제가 오늘 욕하고 그런 거 미안합니다. 어제 철거반 새끼들 땜에 밤을 샜더니... (잠시 묵상 후) 교회가 그리스도의 정신, 십자가 정신을 살려야겠습니다. 그게 없으면 교회는 죽는 겁니다. 예수는 "니꺼 남 주는 게 사랑이다, 너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라" 그랬는데 교회는 "믿으면 잘 살 수 있다, 남에 꺼 먹을 수 있다"고 가르치니 이게 다 죽은 교회란 말이에요. 만날 교회만 나가면 뭐해요. 다 헛지랄인데. 예수가 알면 통곡을 할 일이죠. 점잖은 양반들이 나 같은 깡패새끼도 아는 이치를 모르다니 말이 됩니까. 이번 일이 정말로 교회가 십자가 정신을 살리는 계기가 되어야겠습니다.
유토피아: 두분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치겠습니다.
은 목사는 대기 중이던 승용차로 바삐 떠났고, 원고 마감이라던 유토피아는 소주 한잔 걸치자는 지 목사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네온사인 십자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다. | 씨네21 1998년_4월
1998/04/14 16:06 1998/04/14 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