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3/13 23:48
<까막눈 삼디기>는 부모를 일찍 잃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초등학생 엄삼덕을 그린 동화다. 아이들은 이학년이 되도록 글자를 깨치지 못한 엄삼덕을 "까막눈 삼디기"라 놀려댄다. 씩씩한 연보라가 시골에서 전학 오고 엄삼덕을 돕기 시작한다. 며칠 전 이학년이 된 김단이 그걸 읽고 있길래내가 물었다. "단이 일학년 때 삼디기 같은친구 있었어." "응, 김은혜(가명)." "글자를 몰랐어." "글자도 모르고말도 잘 못하고 바지에 똥 싼 적도 있어." "그래서 친구들이 놀렸어." "친구들이 맨날 놀리고 남자애들은 때리고 그랬어." "뭐라고놀렸어." "바보 멍청이, 더러운 애라고." 김단은 기억이 새로운 듯 표정이 심각하다. "단이는." "난 은혜하고 친하게 지내고 은혜를 도왔어." "단이가 그랬어. 어떻게 도왔지." "너희들 그러면 나빠, 은혜도 우리와 같은 일학년이고 우리 친구야, 글자도 이제 곧 배울 거야, 그러고." "또." "때리는 남자애들 내가 때려주고." "단이처럼 은혜를 도와주는 친구가 또 있었어." "응, 한명, 아니 두명인가. 그런데 내 단짝 세 명이 은혜가 더러운 애라고, 더러운 애하고 놀면 나하고 같이 안 놀겠다고 해서..." 김단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흔히, 어른들(특히 배웠다는 어른들)은 어른들이 감당하는 거대 세계의 개념들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아이가 그 개념과 관련한 실제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착각하곤 한다. 아이에게 개념만을 가르치는 건 전혀 어려운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한 아이에게 미제국주의가 아프카니스탄 인민들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똑부러지게 말하게 만드는 데는 삼십분이면 족하다. 그러나 아이에게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그리고 아직은 감당할 의무가 없는) 그런 거대 세계의 제국주의가 아닌 제가 감당하는 실제 세계(형제나 동무들 따위와의)에서 제국주의에 해당하는 것을 분별하고 반대하는 능력을 갖게 가르치는 데는 장구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가치가 우주의 가치보다 덜하지 않다 말하듯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마치 우주를 키우는 일과 같다.

사정은 그러한데, 용감무쌍하게도 나는 두 아이를 키운다. 아홉 살 먹은 여자 김단과 여섯 살 먹은 남자 김건. 나는 그들이 세상이 우러러보는 별난 사람으로 자라기를 눈꼽만큼도 바라지 않지만 세상의 공정함을 좇는 사람으로 자라기는 간절히 바란다. 나는 그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가장 고결한 품성으로 추앙되고 남의 것을 빼앗는 능력이 사회적 능력으로 설명되는 세상에서 사람다운 사람의 유일한 요건은 공정함을 좇는 것이라 나는믿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정함을 좇는 습성(이어야 한다. 80년대 청년들의 경과가 보여주듯, 이십여년 동안 자본주의적 이기심의 범벅이 된 채 대학에서나 얻는 공정함의 추구는 어설픈 것이다.)을 길러주려 애쓴다. 그들의 모든 행동에 한껏 방임적인 나는 그 지점 부근에서 언제나 민감하고 긴장되어 있다. 세상은 이미 아이들에게 24시간 내내 남의 것을 빼앗아라 가르치고 또 되새긴다.

그런 미친 세상에서 아이에게 공정함을 좇는 습성을 갖도록 가르친다는 건 기나긴 게릴라전과 같다. 먹을 것이든 놀 것이든, 아이들의 작은 세계에서 소유 문제를 둘러싼 다툼이 발견될 때 나는 어김없이 개입한다. 잔뜩 골이 난 아이들을 달래가며 천천히 토론해 나가다보면 아이들은 결국 '남의 것을 빼앗는 놈은 나쁜 놈'이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린다. 나쁜 놈은 사과하고 반성한다.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놈에게 꿇지 않고 맞서야 한다, 맛난 게 생겼을 때 다른 형제나 친구를 먼저 생각한다, 청소 따위 궂은 일을 할 때 빠지는 건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결론을 내려간다. 그들이 어른들과 다른 단 하나는 제가 내린 결론을 지키는 일을 명예로 안다는 점이다. 어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우주를 키우다 우주만큼 많은 내 위선을 깨닫는다.(씨네21 2002/03/13)
2002/03/13 23:48 2002/03/13 23:48
2002/02/27 23:47
한국에서 벌어지는 학술 심포지엄이니 토론회니 이름 붙은 행사들은대개 가장 진지한 형태의코미디들이다. 내 생각에, 한국의 학술이 갖는 내용과 수준은 도무지 그렇게 많은 심포지엄이나 토론회를 감당할 형편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런 학술 행사의 목적이란(그런 행사가 내건 목적과는애당초 상관없이) 그런 학술적 행사의 개최나 참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개최와 참여 자체에 있다.

행사 진행이 예정 시간보다 늘어지고 있음이나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행사의 실제 목적을 벗어나지 않으려 분투하는 진행, 아무런 내용이 없거나 너무나 지당해서 새삼 발표할 이유가 없어보이는 발표, 이른바 학술계의 위계에 입각한 비굴한 아부와 타협의 이런저런 변형으로서 토론, 그리고 그 모든 코미디의 총화인 술잔을 휴지로 받쳐들고 분주히 사교에 몰두하는 리셉션!

잡글이나 쓰는 처지인지라 그런 코미디의 주최나 참여를 일삼지 않아도 되는 걸 천만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이런저런 인간적 인연들을 무작정 거스를 순 없어 빼고 미루다 가끔은 그런 공간에 불려나가기도 간다. 학술의 공간이 학자가 아닌 나를 부르는 이유야 늘 그 밥에 그 나물인 구성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꾀하자는 것일 테고, 나 또한 발표니 토론이니 하는 행사의 알맹이에야 애당초 기대를 안 하고 그저 두어 시간 눈감는다 마음먹고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놈의 방명록이 놓인 행사장의 입구에 들어설라치면 알 수 없는 낭패감이 밀물처럼 밀려오니 나도 참 어지간한 인간이지 싶다. 하긴 나이 마흔에 넥타이도 맬 줄 모르는 인간이 그리 많진 않을 테니.

불가사의한 자신감과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방자한 인간이라도 만나게 되면 본격적인 고통이 시작된다. 한국에서 가장 근거없이 안락하기에 가장 방자해진 직업인 교수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에서 그런 인간을 만나는 일은 오히려 필연이다. "오, 네가 그 김규항이란 놈이냐", 웃음 짓는 기름진 얼굴을 면전에 두고도 나를 오게 한 사람의 미래를 근심하며 눌러참고 돌아와선 "그런 자식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다니. 아무래도 내게 노예근성이 있는가" 하며 나는 끔찍해 하는 것이다.

이른바 진보적 성향의 학술 심포지엄이나 토론회에서 '더이상 진보적이지 않은 진보적 인사들'을 만나는 일은 좀더 고통스럽다. 10여년 전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충만했고 그 덕에 이름을 알린 그들은, 진작에 그 신념을 버렸음에도 여전히 10여년 전 제 이력을 '사용'하며 진보적 인사로 행세한다. 그들의 그런 야비한 처신은 적어도 국민의 정부 이후 한국 인텔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안락한 처신이다. 10여년 전 진보의 이력엔 더이상 탄압과 공포가 적용되지 않지만 그 이력은 오늘 그들의 명성을 유지하고 그들의 양심과 지성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입으로나 신념에 충실한 내가 그들이 신념을 버린 일까지 참견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의 야비한 처신을 보노라면 그저 욕지기가 난다.

지난해 가을 이후 불려간 두번의 진보적 심포지엄은 그런 인사들로 가득했다. 난 예의 야비한 처신을 대대적으로 목도해야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제 처신을 둘러싸고 그들 나름의 공고한 협력체제를 확보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10여년 전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스탈린주의자였던 한 교수는 은근슬쩍 '맑스주의의 오류'를 주장하고, 10여년 전 혁명의 박두를 노래하던 한 시인은 오늘 우리는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는 정신적 카오스 상태에 있다 노래한다. 자신의 옛 신념의 근거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정신적 공황을 일반화하는 일은, 그들의 야비한 처신을 강변하고 그 처신에 어떤 설명도 요구받지 않으려는 그들의 일치된 욕망에 봉사한다. 학술의 공간은 비로소 안도의 미소로 가득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누가 물을 때, 그들은 일제히 능글맞게 외친다. "다 알면서 뭘 그러셔."(씨네21 2002/02/27)
2002/02/27 23:47 2002/02/27 23:47
2002/02/10 21:44
그 여자를 만난 건 육년 동안 사귄 여자가 떠나고서였다. 어디에서나 그 잘남이 돋보이던 떠난 여자는 내게 무척 몰두했다. 갓 병장이 된 어느 날 여자가 말했다. “당신의 삶의 방식을 존경해요. 하지만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삶의 방식과 사는 것... 이별보다 이별이 남긴 말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나는 내가 여자와의 관계에서 모종의 선민의식을 가졌음을 발견했다. 이른바 민중과 역사를 고민한다던 내가 말이다. 욕지기가 났다. 나는 나를 조금 오염시키기로 했다.

“이상병, 나 한번 가야겠다.” “에이 김병장님 농담 마십쇼.” “농담 아니다.” “진짜 한 빠구리 하시려구요.” 네온사인 기사였다는 이상병은 색정광이었다. 그는 운천의 여성들 가운데 제 점검을 받지 않은 경우는 없다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그러나 그는 휴가길이면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옛사랑의 집만 내내 배회하는 순정파였고 돌아와서는 금새라도 총으로 제 머리통을 날릴 것 같은 절망적인 얼굴로 며칠을 돌아다녔다. 그럴 때면 나는 소주와 라면을 구해 그의 눈물 바람을 밤새 들어주곤 했다.

그 일요일 교회에 가는 사병들(기독교 환자라 불리던 답답한 녀석들)에 끼어 부대를 나갔다. 나는 이상병이 말한 ‘고흥여인숙의 윤양’을 찾았다.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안도했다. 여자는 종일 방안에서 남자나 상대하는 사람이라고 믿기 힘든, 이상스레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밤에 보초를 서면 말간 달 속에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고 밥을 먹을 때면 식판 국물 속에 그 달이 떴다. 떠난 여자가 남긴 번민을 씻어내려는 욕구가 섞였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여성지와 시시한 수필집 따위로 채워진 작은 서점에서 나는 간신히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찾았다. 여자가 사는 곳에 갔지만 들어서진 않았다. 나는 여자를 사러 온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선물을 전해주러 왔다. 난 이 고단할 연애를 그렇게라도 소유하고 싶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군복이 하얗게 변하고 모자챙 끝으로 물방울이 떨어질 무렵 내 시야의 오른편에 여자가 들어섰다. 여자는 집게에 연탄재를 들고 나오다 나를 발견했다. “이거...” 말이 나오지 않아 나는 선물만 들어 보였다. 천천히, 연탄재가 떨어져 박살이 났다.

난 여자를 몇 번 더 만났다. 늘 쫓기는 시간 속에 난 여자를 알아갔다. 나보다 두 살 아래라는 것, 카톨릭 신자라는 것, 열아홉살 때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입었고, 그러저러 이 길로 들어섰다는 것, 엄마에겐 작은 임대아파트를 언니에겐 속셈학원을 차려주었다는 것, 곧 떠날 생각이라것... “잘 생겼지요.” 여자의 보물은 초등학교 오학년 짜리 남동생 사진을 넣은 작은 액자였다. 여자도 내 얘기를 듣고 싶어했다. 어설픈 운동권이었다는 것, 보안대의 압력으로 부대를 세 번 옮겨다녔다는 것, 한 여자를 떠나보낸 일로 여자를 찾게 되었다는 것... 내 자못 심각했던 얘기들은 여자의 삶 앞에서 호사스런 장난이었다. 대신 나는 어릴 적 얘기를 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많이 아팠다는 것, 그래서 밖에 나가 놀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 초등학교 사학년 때 첫사랑과 헤어져 스무살이 되도록 힘들었다는 것...

여자와 나는 한번이라도 길고 편안한 시간을 갖길 바랬다. 올림픽이 다가오자 외출외박은 일없이 미루어지곤 했다. 간신히 외박 허가를 받은 날 나는 전령 편에 여자에게 메모를 전했다. “모레 나갑니다. 몇시에 가는 게 좋을지 알려주세요.” 어쨌거나 그 일은 여자의 직업이었고 여자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함께 나간 패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만 남았다. 일없이 배회하는 나를 순찰 나온 헌병들이 집적거렸고 나는 골목 안 만화가게에 들어갔다. 허영만, 아니 이현세였던가. 스무권은 넘게 만화를 쌓아놓고 앉았지만 한 쪽도 넘기지 못했다. 약속한 일곱시를 오분 남기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의 방 앞에 군화가 놓여 있었다.

주춤하는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손을 끌었다. “언니가 잠깐만 저쪽 방에서 기다리시라고 했거든요.” 반시간 쯤 후 온기 없는 빈방에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얼굴로 단골인데 자고 가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좀더 말해 볼테니 기다리세요.” 한시간 쯤 지나 여자가 돌아온 여자는 내 앞에 무릅을 꿇고 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괜찮아요. 다시 오면 되는걸.” 나는 흔들리는 여자의 어깨를 안아주고 준비한 돈을 쥐어주었다.

“윤양, 떠났다는데요.” 여자의 안부를 부탁했던 전령이 말했다. 잘 된 일이라 생각했지만 쉽진 않았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겠구나. 여자는 이곳에서의 기억을 잊는 게 좋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이곳에서의 모든 기억을. 종일 부대 뒤 개울가에 앉아 있다가 해가 지면 취사반 골방에 틀어박혀 밤새 소주를 먹었다. 부대를 돌아보던 인사계와 마주치자 나는 어쩔 테냐 하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3년 동안 하이에나처럼 나를 괴롭히던 그도 내 눈길을 피했다.
이상병이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편지 한 통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떠나는 바람에 연락 못 드렸어요. 저는 집에서 쉬고 있어요. 많이 보고 싶습니다...”

대대 서무계는 학생운동을 하다 강제징집된 사람이었고 내게 호의적이었다. 그가 만들어준 가짜 휴가증으로 세 개의 검문소를 통과한 나는 부평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자의 가족들 앞에 군복을 입고 나타날 순 없었다. “아저씨 우리 누나 찾아오셨어요?” 두시간 쯤 서성이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이미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이는 큰누나가 내려가 보라 했다 말했다. 늦은 시간 현관 앞을 서성이는 낯선 군인은 퍽 눈에 띄었을 것이다. “누나 집에 있니.” “누난 어제 취직해서 떠났거든요.”

말년 휴가에 청량리역 맘모스 다방에서 여자를 만났다. “제대 축하 드려요.” 꽃무늬 주름치마를 입은 여자는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수줍어했다. 여자와 광릉수목원에 갔다. 처음 갖는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모든 안타까움과 낙심은 자취도 없는 듯 했다. 많이 웃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코미디언들이 흉내내는 60년대 영화 속 술래잡기도 했던가. 여자는 양평 부근 다방에서 일한다고 했다. 티켓을 안 끊기로 해 벌이가 적긴 않지만 마음은 편하다고 했다.
그날 저녁 양평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내가 말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순간 여자의 얼굴에 웃음이 가셨다. 길게 한숨을 내 쉰 여자가 또박또박 이어 말했다. “충동적으로 말하는군요. 당신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 생각은 해봤어요. 그 사람들 중에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봤어요. 그런 걸 다 생각하고 하는 말인가요. 내가 우습게 보이나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여자가 쓰게 웃었다.

다음날 나는 여자를 찾았다. 여자는 나를 외면했다. 불편해진 나는 다방을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정 무렵 여자는 다방을 나와 주인여자의 자동차를 탔다. 다음날 다시 여자에게 갔다. 전날과 같았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나흘째 되는 날 여자가 나타났다. “버스정류장 앞 여관에서 기다리세요.” 새벽 두시가 넘어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잔뜩 취해 있었다. “이봐요,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여자는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여자의 머리를 안아주었다.

깜박 잠이 든 건가. 어스름한 방, 누운 내 옆에 여자가 서있었다. 여자가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난 자신이 없군요. 여자의 입술이 조심스레 내 입술에 닿았다. 여자가 방을 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물안개에 덮힌 강을 뒤로 한 채, 버스정류장에 여자가 섰다.

(다신 여자를 찾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나는 여자에게 한번 더 갔다. 자정 무렵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와 다방 앞에 섰다. 여자가 킬킬 웃으며 오토바이 뒤에 올랐다. 멀어지는 오토바이에서 여자가 나를 흘끔 돌아보았다. 여자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건 삼년 쯤 지나서다. 난 미숙한 인간이었다.)
2002/02/10 21:44 2002/02/10 21:44
2002/02/05 21:48
평론가란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다. 영화평론가란 대개 영화감독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음악평론가란 작곡이나 연주자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문학평론가란 작가의 꿈을 접은 사람들에게서 출발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평론가란 대개 애초 생산을 꿈꾸었으되 재능의 부족이나 의지의 박약, 혹은 지나치게 운이 없어(본인의 주장이 그렇다는 얘기) 꿈을 접었으나, 아예 그 바닥을 떠나려니 너무나 서럽고 딱히 갈 데도 없어 ‘남의 생산에 평론이나 일삼으며 사는 사람‘이다. 평론가의 재능이란 생산과 관련한 현상들을 얼마나 그럴싸한 글(말)로 꾸며대는가에 있다. 평론가들은 평론이 생산물의 질과 가치에 대해 말한다 주장하지만, 이른바 좋은 평론이란 어디까지나 ’글로서의 그럴싸함‘을 기준으로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장 유능한 영화평론가는 영화에 대해 가장 무딘 사람일 수 있으며 유능한 음악평론가는 음악에 가장 무딘 사람일 수 있으며 다른 생산에 기생하는 평론가 역시 그 생산물에 그렇다. 그러나 먹고사는 일과 관련한 인간의 본능이란 언제나 대단한 것이라서 한 생산의 언저리에 평론가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못 생산과 긴장을 이루는 (듯한) ‘평론계’가 구축되곤 한다.

한국의 대중문화 평론계는 평론의 그런 보편적인 생성과정에 좀더 특별한 사정이 덧붙여진다. 그것은 한국의 80년대라는 특별한 시기와 관련한 것이다. 오늘 한국의 모든 진보적 열정은 전적으로 80년대를 근거로 한다. 물론 한국에서 진보주의의 첫 번째 시기는 일제 치하와 해방 공간이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제 치하 독립운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좌익계 독립운동이 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해방 공간은 좌익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미군정청에서 서울시민들을 상대로 한 ‘어떤 세상을 바라는가’라는 설문에 사회주의를 선택한 한국인이 칠할 가량이었다. 박정희 같은 이도 사회주의자(그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군과 대치하던 일본 관동군 헌병이었고 해방공간에는 육군내 남로당 책이었으나 여순반란사건 즈음 동료들을 밀고하고 혼자 살아남는다.)였을 만치 넘쳐나던 한국의 진보적 기운은 6.25전쟁을 통해 철저히 박멸된다. 한국에서 진보주의는 80년 광주의 경험을 통해 새순이 돋고 30여년 동안 눌렸던 만큼 더 빠른 기세로 폭발한다. 세상은 개선되는 게 아니라 변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80년대 중반 즈음 한국의 인탤리들에서 대세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변혁의 열망은 90년대초 밖에서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안에서 폭력적인 파시즘이 사그라들자 순식간에 식는다. 인텔리들은 대개 역사의 종언을 되내이며 청산의 길을 간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며 나름의 모색을 계속하지만 그들은 이후 10여년 동안 낡고 어리석은 사람들로 경멸당한다.

한국의 대중문화평론계는 인탤리들의 그런 청산의 한 방식으로서 잉태되었다. 90년대초에 인탤리들은 자신들이 80년대에 지나치게 정치 편향적이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반성은 더 이상 정치적 열정을 갖는 일을 모면하려는 욕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들에겐 뭔가 새롭게 집중할 것이 필요했고 그들은 대중문화를 선택했다. 그들이 지난 세월 저질적이고 퇴폐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반민중적이라 경멸하던 대중문화 말이다. 한국의 진보적 인탤리들에게 대중문화가 갑자기 가장 중요한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탈춤이나 마당극, 혹은 소련식 집체극에 전념하던 시절 타락한 양키문화의 첨병이라 여기던 신중현을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옹립했다. 서태지가 가진 얼마간의 반항끼는 한없이 부풀려져 새로운 시대의 영웅적 저항정신으로 묘사되었다. 그런 우상들은 그들의 동세대들에게 개연성없는 청산을 재론하지 않으면서 알량한 정치의식을 모면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들의 평론은 승승장구했다.

그들은 대중문화에 기생하기 시작했다. 청산의 한 방식은 먹고사는 일의 한 방식이 되었다. 대중문화의 생산이야 우등생 출신인 그들에게 처음부터 불가능했지만(그런 능력은 대개 선생과 부모와의 끝없는 갈등을 수반하는 한 많은 청소년기와 등가 교환된다) 그 생산을 그럴싸한 글(말)로 꾸며대는 일은 손쉬운 일이었다. 말과 글로 떠들어대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이미 확보된 재주였고, 대중문화의 알맹이에 대한 일천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썩 그럴싸한 평론들을 써내곤 했던 것이다. 그들 이전에도 대중문화에 기생하는 평론가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처럼 생산물의 역사/사회적 배경을 들먹이는 수법을 사용하진 못했다. 그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역사와 사회에 집중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론은 대중문화에 익숙치 않으면서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인탤리들에게 강력히 어필했다. 90년대초, 한국의 대중문화평론계가 매우 빠르게 형성되었다.

10여년이 지난 오늘, 그들은 여전히 대중문화평론계의 상층부를 이룬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문화에 대해 평론가를 상회하는 정보와 식견을 가진 대중문화의 수용자들(은 오늘 청년 세대의 거의 전부다)과 묘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 어떤 필요에 의해 뒤늦게 접한 게 아니라, 어릴 적부터 대중문화를 숨쉬듯 살아온 오늘의 수용자들에게 ‘생산에 대해 그리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럴싸한 글(말)이나 꾸며대는’ 평론가들은 골아프고 불필요한 존재들이다. 결국 평론가들이 생산물이 갖는 의미에 집중할수록, 수용자들은 더욱 생산물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수용자들은 평론가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중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고양이를 부탁해>에 평론가들과 매니아들의 엇갈린 반응은 그 예라 할 수 있다. 두 영화는 좋은 영화고 그런 좋은 영화들이 외면 당하는 일은 애석하지만, 그런 현상을 무작정 개탄하는 일은 상황의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그런 개탄이야말로 수용자들로 하여금 그 영화들을 좀더 회피하게 하는 이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 평론과 수용자들의 심각한 부조화는 결국 ‘평론계’를 만들어 10여년 이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대중문화평론의 첫세대가 교체되어야만 해결될 것이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처음부터 대중문화의 생산에 기생하기엔 적절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한국에 대중문화평론계를 구축하고 그런 일로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는 공적을 남긴 채 사라지는 게 적절할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대중문화 자체에 정통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이런저런 사회적 의미에는 너무 무지하지 않느냐, 진정한 대중문화를 분별할 능력이 없지 않느냐는 따위 염려는 부질없다. 의미와 분별에만 집중하는 세대가 사라지면 오늘 수용자들 안에서 의미와 분별에 대한 적절한 배분이 이루어질 것이다. 탄생은 비루했지만 평론 또한 생물이다. (GQ)
2002/02/05 21:48 2002/02/05 21:48
2002/01/30 23:46
누군가 강준만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근대화의 기수'라 말한다. 그는 '조선일보 문제'를 비롯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사회의 작동원리가 되다시피 해온 이런저런 전근대적인 습속들을 샅샅이 '발견'해냄으로써 한국인들이 비로소 근대적인 정신을 마련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강준만씨는 참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그는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지점에 끊임없이 의견을 낸다. 그의 의견은 철저하게 제도 시스템의 테두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에는 여러 차원이 있고 늘 제도 시스템의 테두리가 충분한 건 아니다. 제도 시스템을 벗어나거나 벗어날 수 있는 지점에서 강준만씨의 의견은 종종 무리한 훈수가 되기도 한다. 특히 좌파적 활동과 관련한 그의 의견이 그렇다.

근래 그가 좌파에 거듭하는 주문은 이른바 도덕적 순결주의에서 벗어나 시장과 언론 같은 오늘의 제도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얼핏 유익해 보이는 그의 의견은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무리한 훈수일 뿐이다. 좌파란 오늘 시스템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다. 좌파임을 천명한 순간부터 오늘 시스템에서 적극적으로 배제되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일은 '선택'이나 '적극성'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 언론의 경우를 보자. 한국엔 맨 오른쪽의 <조선일보>에서 맨 왼쪽의 <한겨레>까지 여러 신문이 있다. <조선일보>의 극우성이야 새삼 말할 게 없지만, 맨 왼쪽인 <한겨레>의 이념 역시 좋게 보아 중도보수 쯤이다. <한겨레>에 진보적 기사가 적게 실리는 것은 흔히 말하듯 "<한겨레>가 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 신문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제도 언론이란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의 선전 수단이다. 제도언론이 담을 수 있는 진보성의 최대치는 그 사회의 지배계급이 허용할 수 있는 진보성의 최대치와 같다.

언론학자인 강준만씨가 그런 이치에 닿지 않는 훈수를 하는 건 그가 순진해서가 아니라 그의 이념 때문이다. 자신의 말대로, 강준만씨는 오늘 시스템,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우파다. 그가 제도언론에게 "진보적 기사를 좀더 싣는 일이 자본주의 체제의 건강을 위해 좋다"고 주문하지 않고, 좌파에게 "도덕적 순결주의에서 벗어나 제도언론을 활용하라"고 주문하는 건 더도 덜도 아닌 우파의 좌파에 대한 이념적 공격이다.

나는 강준만씨를 '근대화의 기수'라 부르지만, 정작 그는 '근대'니 '극우'니 하는 개념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세상에 의견을 내는 수단인 그의 글은 언제나 "나쁜놈들을 솎아내자"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쁜놈과 좋은놈'이라는 도덕적 차이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어떤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가의 이념적 차이로 구분된다. 모든 계급에 나쁘거나 모든 계급에 좋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선일보>처럼 계급을 막론하고 사악해 보이는 신문도 어떤 계급에게는 천사와 같다.

우파인 강준만씨에게 '좋은 놈'은 좌파에겐 '좋지 않은 놈'이거나 '나쁜 놈'일 수 있다. 이를테면 그가 다음 대통령으로 밀고 있는 노무현씨가 97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에서 보여준 빛나는 활약과, 제 활약에 감격한 노무현씨의 "이제 누구든 노동운동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방자한 선언을 기억해 보라. 좌파로선 제 아무리 '현실적인 고려'를 한다 해도 노무현씨를 지지할 방법이 없다.

강준만씨는 언제나 '나쁜놈들을 솎아내'는 일로 한국사회를 바꿀 수 있다 주장한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세계가 초국적금융독점자본과 전세계 인민 사이의 사활을 건 싸움의 와중에 있고, 강준만씨가 솎아내려는 '나쁜놈들' 역시 그 잔가지에 연결되어 있을 뿐이며, 그런 모든 맥락을 포괄한 싸움으로만 한국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겠다. 강준만씨는 내 주장을 '공허한 거대담론'이라 할까. 애석한 일이지만, 그와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많든 적든 세상의 일부다. 그와 나는 이념적인 차이를 갖는다.(씨네21 200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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