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7/27 16:40
'출판사 영화언어 발행인'이라는 매우 영화적인 직함과는 달리 나는 영화에 대해 전문적이지 않다. 그런 내가 올해 초 한 시사월간지로부터 '김규항의 영화에세이'라는 지면을 수락한 건 극장에 가는 회수를 2년에 한번에서 한 달에 한 번으로 늘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평'을 피하느라 매달 심란해지지만, 나는 이제 한 달에 한 번은 극장에 가고 있다. 그렇게 본 영화가 <쉬리>, <인생은 아름다워>, <부기나이트>, <정크메일>, <이재수의 난>, <스타워즈 에피소드1> 들이다. 나는 내 삶 속에 갑자기 늘어난 영화의 부피에 만족해했다.

그런 내 흥을 깬 건 <이재수의 난>이다.(가장 한심한 건 <에피소드1>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영화라기보다는 캐릭터 사업을 위한 거대한 CF라 여긴다) 나는 <이재수의 난>이 불쾌했고 영화를 본 지 한 달이 넘은 지금 그 불쾌감은 불편함으로 남았다. 내가 <이재수의 난>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박광수가 사회파 감독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사회파 감독을 가름하는 기준이 사회적 소재가 아니라 사회의식이라 할 때 나는 <이재수의난>에서 어떤 사회의식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보았던 <그들도 우리처럼>을 비롯 박광수가 만든 여섯 편의 영화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박광수는 사회파 감독이 아니라 '사회적 소재를 즐겨 채택하는' 감독이었다.

나는 <이재수의 난>이 민중영웅담이길 바라는 게 아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창작자의 몫이다. 내가 <이재수의 난>에 불쾌한 건 역사에 대한 박광수의 해석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박광수의 해석이 가진 무기력 때문이다. <이재수의 난>은 '구체적인 삶과 죽음이 포함된 실재'로서의 역사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못한 영화다. 나는 <이재수의 난>이 충실한 내러티브를 갖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얼치기 계몽주의자인 나로선 역사물엔 리얼리즘이 나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형식주의의 정당한 능력을 폄하하고 싶진 않다. 문제는 박광수가 역사에 무기력했듯이 내러티브에도 무기력했다는 점이다.

나는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에서 박광수가 굳이 '이재수의 난'이라는 역사를 소재로 채택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박광수가 사회적 소재를 즐겨 채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통속적인 것을 재미없어 하는 그의 고급한 취향에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취향이야말로 박광수의 창작 방법의 골간인 듯 하다. 그러나 박광수의 그런 고급한 취향은 '이재수의 난'이라는 역사적 다이내미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하다. <이재수의 난>은 그런 무기력과 그것을 자인하지 않는 박광수의 오만의 불행한 결합물이다. 박광수의 취향대로 <이재수의 난>은 통속적이지 않지만, 잘 만들어진 고급 예술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난해한 긴장감은 한 순간도 찾아볼 수 없다.

'오만한 감독의 무기력한 실패'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건 박광수와 <이재수의 난>에 대한 이른바 전문가들의 정치적 배려다. 사회에 대해 별다른 배려가 없어 보이는 그들의 사회파 감독에 대한 무한정한 배려는 기이하기만 하다. 특히 <씨네21>의 캠페인에 가까운 박광수 옹호는 매우 위험해 보인다.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민족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중원을 평정한 영화 전문지로서의 정치적 입장(거의 유일한 작가적 감독을 밀어준다는)을 이해하지만 그런 정치적 배려가 영화와 감독에 대한 엄정한 평가에 우선할 수 있다는 태도는 파시즘이다. 문화권력이 된 <씨네21>은 '고급비평정보지'라는 독자와의 처음 약속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재수의 난> 시사회에 몰린 인파의 질과 양에 나는 놀랐다.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회파 감독'이라는 말은 박광수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수사는 '유행이 지난' 사회물을 만드느라 죽을 고생을 하는 독립영화 감독들에게나 어울린다. 빈정대자는 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어떤 곳인지 다들 아는 대로)에서 지난 10여년 동안 사회적 소재만으로 여섯 편의 영화를 만들고도 파멸하지 않았다면 박광수는 특별히 행복했다 할 만하다. 나는 거꾸로 묻고 싶다. 대체 그 사회파 영화들은 어떤 것이었나? | 씨네21 1999년_7월
1999/07/27 16:40 1999/07/27 16:40
1999/07/13 16:39
둥글고 환하게 뜬 달을 보며 김단이 묻는다. "아빠, 달은 가까이 가서 보면 더 커?" 아이의 질문에 공을 들이는 편인 내가 대답한다. "응, 달에 가까이 갈수록 달이 더 크게 보이지. 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지."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 "응, 단아 지구가 어떻게 생겼지?" "공같이." "그래. 그런데 단이가 지금 어디에 있지?" "지구에." "그래, 그런데 지구가 공처럼 보여?" "아니 똑바루 보여." "그래. 단이는 지구에 있으니까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고 얼마나 큰 지도 알 수 없는 거야." "아, 그렇구나."

내가 하고도 내게 이로운 말이었다. 지구에 있기 때문에 지구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이치는 당대와 지식인과의 관계와 닮았다. 당대를 올바로 보기란 정말 어렵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 잘 볼 수 있는 것도 많다. 달 위에 선 사람은 달 표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달에 무엇이 사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보는 달 위에 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달에서 멀리 떨어져보지 않는다면 달이 공처럼 둥글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지식인의 역할이 바로 거기에 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정보만으로 당대 현실을 파악할 때, 혹은 그게 모두라고 단정할 때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알리는 일 말이다. 지식인은 그런 역할을 해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1999년의 한국을 파악하는 통찰을 얻기 위해 1999년 한국 이외의 모든 것을 공부한다. 여느 사람들이 사도세자나 장희빈의 사생활을 역사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프랑스 혁명사나 러시아 혁명사를 배우고, 여느 사람들이 이문열이나 김진명을 독서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구태여 촘스키니 부르디외니 하는 사람들을 읽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당대를 파악하는 지식인의 노동은 용접을 하는 용접공의 노동이나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노동처럼 사회적으로 분담된 하나의 역할일 뿐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원래부터 다른 모든 노동보다 존귀한 건 아니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원래부터 존귀한 것은 없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육체노동의 의무를 면해주고 존경과 명예를 준 것은 지식인이 원래 존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파악하는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지식인에게 등대의 역할, 이정표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상한 삶과 세상의 존경과 명예가 제가 나면서부터 똑똑하고 잘나서 얻은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은 '지식인 세계'를 형성하고 그들끼리만 소통 가능한 암호 언어(그들이 '지적 대화'라고 부르는)로 그들의 서푼짜리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그들은 또한 그 서푼짜리 허영심의 냄새나는 퇴적물을 지성이니 교양이니 인문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몸에 두른 채 당대 현실로부터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짓는다.

이 나라의 정신 세계는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이 나라의 백성들은 온갖 집단주의, 온갖 파시즘의 멍에에 사로잡혀 있지만 겸허한 계몽주의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지식인은 어디에도 찾기 힘들다. 오늘도 이 나라의 보수 지식인들은 극우와의 경계를 넘나들고, 이 나라의 진보 지식인들은 가상현실을 오르내릴 뿐이다. 당대의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이 책상에 앉아 '고유한 지식'을 탐구하는 모습은 머리가 텅 빈 미인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고기와 관련한 것이다. 한국 지식인들은 천민자본주의라는 푸줏간에 걸린 썩은 고기들이다. | 씨네21 1999년_7월
1999/07/13 16:39 1999/07/13 16:39
1999/06/15 16:38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내가 나라가 시끄러울 만큼 못된 짓을 한 인물이 나오기만 하면 "또 교인이군"하는 게 버릇이 되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하느님께 민망할 따름이다. 좌우간 저 옛날 부천서에서 여대생 취조하는 데 희한한 도구를 사용한 문귀동 집사로부터 빨갱이 대통령을 막는답시고 바람을 일으키다 잡혀 들어가 오늘도 성전에 성전을 거듭하고 있는 권영해 장로라든가 소싯적부터 오로지 대통령이 되기만을 간구한 끝에 진짜로 대통령이 되어 끝내 나라를 부도 낸 김영삼 장로를 비롯, 국가적인 규모로 사고치는 인간 치고 교회 안 다니는 인물이 드무니 낸들 어쩌겠는가.

사정이 그러한데 그 아줌마들, 이른바 낮은 울타리 아줌마들이 교인인 건 되레 당연했다. 낮은 울타리의 모태는 '수요 봉사회'라 하며, '수요 봉사회'란 박정희 시절 만들어진 장관집 아줌마들의 사회봉사모임으로 매주 수요일에 모여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치약이나 칫솔을 넣어 일선 장병한테 보내는"(한겨레) 식의 활동을 해왔다고 했다. 고매한 장관집 아줌마들이 하잘것없는 군바리에게 보낼 치약 칫솔을 주머니에 담는 일을 주마다 해왔다니 건국 이래 이런 갸륵한 미담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아줌마들이 라스포사니 앙드레 김이니 하는 옷가게에서 50% 할인 혜택을 받았다거나 그마저 다른 돈 많은 이들이 내주곤 했다는 건 그런 노고에 대한 당연한 사회적 보상이라 할 만하다. 하여튼 낮은 울타리는 '수요 봉사회' 아줌마들 가운데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아줌마들의 모임이라 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말하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어찌 그럴 수 있냐지만 그 말씀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몰라서 하는 말씀일 뿐이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일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교회는 물질축복은 성실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이 되라 했지만, 교회는 세상의 더러운 죄를 들어와서 씻어라 하지 않는가.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동산과 벌판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했지만, 교회는 성전을 짓고 찬란하게 치장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 가르치지 않는가. 그 아줌마들, 이른바 낮은 울타리 아줌마들은 결단코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지키고 실천한 참 신자들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또 말하길 교회의 가르침이 세상의 욕망과 다를 게 무어냐 하고 심지어는 예수와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온통 거꾸로라고도 하지만, 그 말씀 역시 참 신앙의 경지가 무언지 몰라 하는 말씀일 뿐이다. 2천년 전 이스라엘의 가르침은 오늘 대한민국의 생활 형편에 맞추어 살아 숨쉬는 가르침으로 재해석되는 게 당연하며, 백 번을 양보하여 대개의 한국 교회가 수천만을 상대로 하는 거대한 사기조직일 가능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더라도, 진실을 밝히는 게 언제나 은혜가 되는 건 아니다. 만일 기독교인의 삶, 예수를 따르는 삶이 돈과 명예 권력 따위를 얻는 일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삶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 당하며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죽기 십상인 삶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의 대혼란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느님을 경배 드리는 거룩한 성전에 날품팔이 거지 양아치 장애자 매춘부 따위들이 예수의 동무랍시고 몰려들고, 대를 이어 뜨겁게 믿고 정확히 바쳐 온 집사 권사 장로 목사들의 신앙적 프리미엄이 하루아침에 깡통주가 된다면 그 억울함을 무슨 수로 보상할 것인가. 근대 이후 교회를 핍박한 건 언제나 빨갱이들이었고, 성도들은 순교자의 본을 받아 죽음으로 교회를 지키고 또 지켜낼 뿐이다. 할렐루야. | 씨네21 1999년_6월
1999/06/15 16:38 1999/06/15 16:38
1999/05/19 16:33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자 아버지가 분주해졌다. 하루는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OO본부 행정병으로 가는 건데, 그런 데 가면 책도 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당신 아들 됨됨이와 당신이 삼십 년 동안 체험한 군대가 빚어낼 부조화에 대해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걱정해온 터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모병 쪽에 있던 아버지 동기가 약간의 배려를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고 그날 밤 종이를 채우기로 했다. 김-규-항-6-2-1-1-2... 워낙에 악필이라 글자 하나에 1분 정도를 들여 ‘그려나가던’ 나는 이내 짜증에 휩싸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나 때문에 원래 그 부대 운이 닿았던 한 녀석이 전방에 가서 뺑이 칠 거라는 데 생각이 이르자 도저히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아버지 저 그냥 갈게요.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대 당일 나는 가족들을 대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친구 녀석들에게 입대 날짜를 알리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논산에 내려 머리를 깎고 훈련소에 들어섰다. 의연하고 의젓하게, 하여튼 갖은 폼은 다 잡으며 입대했건만 내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67년 생부터 거슬러 시작한 나이 파악은 65년생에서 제일 많았고 63년생 땐 아무도 없었다. 파악을 마쳤다고 생각한 조교는 내무반을 나갔다. 조교가 다시 돌아온 것은 5분이 채 못 되어서였다. 다짜고짜 짠밥통을 걷어찬 조교가 소리쳤다. “손 안 든 새끼 나와.” 더럭 겁이 난 나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너 이 새끼 왜 손 안 들었어.” “62년생입니다.” 와 하고 폭소가 터졌다. 머쓱해진 조교는 나가버렸지만 그 요란한 웃음소리는 내 머리통 속에 아득한 공명을 일으키며 후회와 절망감으로 변해갔다.

그 광경을 본 건 상병 때였다. 휴가 길에 나는 화곡동 국군통합병원에 들렀다. 중대 이병 하나가 트럭 바퀴에 머리통이 끼는 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었다. 귤봉지를 들고 정형외과 병동을 찾았을 때, 내가 찾은 녀석 건너편 침상에 유난히 체구가 큰 사병 하나가 눈을 감은 채 울고 있었다. 침상 옆엔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아들 손에 고개를 묻은 채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사병의 몸엔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나는 이내 그의 다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자의 끝 모를 절망과 비통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군대 가서 사람된다느니 사내다워진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저 농담이다. 사람이 되는 게 권위에 무작정 복종하는 일이고 사내다워지는 게 힘없는 사람에게 일수록 불량스러워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군대도 군대 나름이겠지만 이 나라의 평범한 아들들이 가는 군대란 언제나 고되고 삭막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아차 하면 장애인 되거나 죽는 곳이며 도무지 배울 게 없는 곳이다. 돈을 먹여서 군대를 빠지는 일이 끔찍한 죄인 건 단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 하지 않거나 남 하는 고생을 피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대신 군대에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님 아들 빠진 자리를 머슴 아들이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시민사회에서 말이다. 군대란 안 갈수록 이익인 곳임에 분명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한국의 신체 건강한 청년이라면 그저 눈 딱 감고 3년 썩어줄 필요가 있다. 어쩔 것인가. 후진 나라에 태어난 것도 죄라면 죄 아닌가.

제 자식 대신 남의 자식 군대 보내는 더러운 아버지들, 그리고 이제 스물 몇 살의 나이에 그런 악취 나는 거래에 제 몸을 내 맞긴 음탕한 아들들. 그들에게 성질 나쁜 아들 군대 보내고 3년을 잠 못 이룬 내 아버지의 한숨과 다리 잘린 아들 곁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던 한 어머니의 눈물을 담아 꼭 들려줄 말이 있다. 개새끼들. | 씨네21 1999년_5월
1999/05/19 16:33 1999/05/19 16:33
1999/05/04 16:31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20년 전 어느 날, 3학년 P가 '영감'(교련 선생)을 폭행했다. 총검술 수업 중에 '통제'에 따르지 않던 몇몇을 영감이 불러내어 기합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 P가 목총으로 영감을 친 것이었다. 체육 수업 중이던 나는 그 일을 목격했는데, 영감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해 있고 P는 여남은 명의 급우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고 있었다. 한참 후 P는 갈비 두 대가 부러진 채 병원에 실려갔고 학교는 P의 갈비가 되붙기 전에 그를 학적부에서 파냈다. 3학년 대표 몇몇이 영감의 집을 찾아 무릎을 꿇고 사죄했고 영감은 다시 총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19년 전 어느 날, 나는 '빠가사리'(수학 선생)가 수업 중인 교실 문짝을 걷어찼다. 급우들을 대신하여 한 짓이었지만 와장창 문짝이 넘어가면서 유리 조각이 튀고 사위가 정적에 휩싸이자 나는 모든 게 내 문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주먹과 발은 물론 걸레 자루, 걸상까지 동원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니 진짜 안 빌래." 빠가사리는 무조건 빌 것을 요구하며 나를 때리고 자빠트렸지만 나는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동작을 거듭할 뿐이었다. 그것은 전투였고 수백 개의 눈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맞서 칠 수 없다면 그저 버텨서라도 이겨야 했다. 수업 시작종이 두세 번쯤 더 울리고서야 그 지루한 경기는 끝이 났다. 탈진한 빠가사리가 내일을 기약하며 복도 끝을 돌아 나가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피가 고인 입안에서 살점들이 돌아다니고 교실 바닥이 파도처럼 넘실거렸지만 나는 녀석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녀석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가와 피를 닦아주거나 회칠갑이 된 교복을 털어 주었다.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에선가 학생의 뺨을 수십 차례 때리던 선생을 학생들이 경찰에 신고해서 잡혀가는 일이 일어나 세상이 무너지는 '교권'을 한탄하고 있을 때, 나는 20여 년 전을 추억했다. P는 선생을 팼고 나는 교실 문짝을 찼지만 그 차이가 몰매와 박수라는 결론의 차이를 낳은 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별명의 차이, '영감'과 '빠가사리'의 차이에서 나온다. 학생들에 의한 선생의 별명은 괜스레 착안되는 게 아니며 매우 긴 시간적 공간적 경험의 공유에 의해 만들어진다. 선생의 별명이란 대개 그 선생의 인간적인 등급인 것이다. 영감은 총검술이나 가르치는 시시한 존재였지만 매우 기품 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빠가사리는 3학년 수학을 맡는 실력자였지만 악취가 나는 사람이었다. P가 아니라면 누구도 영감을 때리지 않았겠지만,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빠가사리가 수업 중인 교실 문짝을 걷어찼을 것이다.

선생이 학생을 때릴 권리를 '교권'이라 부르는 일은 폭력으로나 권위와 가치를 유지하려는 파시즘이다. 교권이 '사랑의 매'를 전제로 한다 해도 그 매가 사랑의 매인지 아닌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역시 학생이다. 급우가 맞는 과정을 지켜본 학생들이 경찰을 불렀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매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20년 전 선생을 때린 급우에게 몰매를 놓은 학생들과 19년 전 선생이 수업 중인 교실 문짝을 걷어찬 급우에게 박수를 보낸 학생들, 그리고 오늘 어느 교실에서 한 선생을 지켜보는 학생들은 전적으로 같다. 20여년 전 학생을 때리던 선생과 오늘 학생을 때리는 선생이 전적으로 같듯이 말이다. 양심과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 학생의 인생을 그르치는 일이 되는 마당에, 선생이 단지 선생이라는 이유로(영감이든 빠가사리든) 똑같은 권위를 부여받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따져야 할 일은 선생과 학생 사이의 권위적 질서가 아니라 인간(선생이라는)과 인간(학생이라는) 사이의 인격적 질서이며, 지켜야 할 건 '교권'(선생만의)이 아닌 '인권'(선생과 학생의)이다.

후일담 : 졸업 이듬해, 그러니까 17년 전 어느 날, 나는 버스에서 빠가사리와 마주쳤다. 그를 발견한 내가 그래도 은사라고 다가가자(순진한 건가 노예근성인가) 빠가사리는 황급히 버스를 내려 도망쳤다. '교권'을 곱게 보기엔, 나는 너무 치명적인 경험을 가진 셈이다. | 씨네21 1999년_4월
1999/05/04 16:31 1999/05/04 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