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4/18 17:01
"낙천 낙선운동. '선거혁명'이라는 수사가 통할만큼 거대하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운동이 한동안 맥없이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신명을 불어넣고 있다. 현재 시점에서 이 운동을 지지하는 일은 최소한의 정신건강만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이 운동을 지지하며 이 운동이 우리 사회에 분명한 유익을 남기길 기대한다. 그러나 나는 이 운동의 거대한 일사불란함 속에서 얼마간의 허전함을 느낀다. 허전함은 이 운동이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그들, 몹쓸 정치인들을 뽑은 게 바로 우리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오늘 우리가 온갖 비난과 분노를 쏟아 붓고 있는 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허전함은 이 운동을 주도하는 총선시민연대에서도 온다. 그 연대는 여러 입장과 견해를 초월한 위대한 연대인 동시에 최소한의 상식과 원칙을 생략한 허황한 연대이기도 하다. 가장 끔찍한 경우는 이른바 음대협(음란폭력성조장매체시민대책협의회) 관련인사들의 참여다. 나는 도덕을 기준으로 온 세상을 판단하는 그들의 인생관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전적으로 유권자에게 남겨두는 낙천 낙선운동과, 공권력의 힘을 빌어 <거짓말>이라는 영화에 대한 관객들(유권자들이기도 한)의 선택의 기회를 제거하려는 폭력이 그들의 머리통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분열적이다.

허전함은 또한 우리의 비굴함에서도 온다. 한국 정치가 복구 불능해 보일 만큼 썩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모든 부분 가운데 유독 정치만 썩었다거나 한국 사회의 모든 불행이 정치에서 온다는 식의 주장은 우리의 비굴함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비굴함은 우리에게 진실을 주는 게 아니라 값싼 위안을 준다. 정확하게 말해서 한국정치는 한국사회에서 유일하게 썩은 부분이 아니라 그 썩음이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일 뿐이다.

한국 정치는 한국 사회의 거울이며 한국 정치인은 한국 국민의 거울이다. 우리가 또 다른 고문기술자를 뽑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여자와 아이를 때리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또 다른 도둑놈을 뽑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돈 봉투를 교환하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성이 없다면 그들은 우리 앞에 불멸할 것이다. 이 운동이 선거혁명이 될지 선거혁명의 모양을 한 거대하고 일사불란한 카타르시스가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해설 : 한 신문의 청탁으로 썼던 글. 그 신문은 낙천낙선운동을 지지하고 그 열기를 높이려는 의도로 여러 주에 걸친 캠페인 코너를 마련했고 나를 필진에 넣었다. 내 글은 캠페인 초입에 실릴 거라 했고 그 시점은 낙천낙선운동의 열기가 한껏 고조되고 "선거혁명이라는 수사가 통"할 무렵이었다.

캠페인이 중반을 넘어도 내 글은 실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불편해졌다. 내 생각에 내 글은 그 안에 담긴 냉소가 그 운동의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그 운동에 유익을 줄 수 있을 만한 시점에 쓰여졌지만 시간이 지나 그 운동의 열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그 운동을 훼방하려는 세력이 대열을 정비하는 시점이 되자 내 글 안에 담긴 냉소의 가치 또한 변하고 있었다.

캠페인이 거의 끝나갈 무렵(내 기억으로 총선연대 관계자들이 검찰에 출두할 무렵) 원고를 청탁했던 기자가 전화했다. 그는 몹시 미안해하며 내 글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라는 게 자신들의 판단이라 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현재 시점에서 그 글을 썼다면 내가 성격이 삐뚤어진 사람이겠죠. 없던 일로 합시다."

내 글에 담긴 냉소의 가치가 내 생각처럼 시점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화한 건지 그 신문의 생각처럼 시점에 상관없이 지나치게 냉소적이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 글이 그 캠페인에 포함되지 않았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인정해야 할 현실이라는 점(더욱이 그 신문이 이 나라 안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문이라는 사실 앞에서)일 게다. 이제 그 현실이 내게 남긴 질문은 이렇다. 우리의 캠페인은 놈들의 캠페인과 어떻게 달라야 하며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 씨네21 2000년_4월
2000/04/18 17:01 2000/04/18 17:01
2000/04/04 17:00
"4월 혁명 후에 나는 세 번이나 신문사로부터 졸시를 퇴짜 맞았다. 한 편은 '과도정권'의 사이비 혁명행정을 야유한 것이고, 한 편은 민주당과 혁신당을 야유한 것이고, 나머지 한 편은 청탁을 받아 가지고 쓴 동시인데, 이것은 이승만이를 다시 잡아오라는 내용이 아이들에게 읽히기에 온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 통과가 안됐다. 그런데 이 동시를 각하한 H 신문사는 사시로서 이기붕이까지는 욕을 해도 좋지만 이승만이는 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규가 있다는 말을 그 후 어느 글쓰는 선배한테 듣고 알았다."(김수영, '치유될 기세도 없이')

어린 후배가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무어냐 묻는다. 일 때문에 조각 내어 본 책을 빼고 나니 지난 일년 동안 새로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다. 독서량이 한 사람의 지적 역동성을 결정하는 건 아니라 해도 그런 박한 독서량과 지식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다니며 이러 저러 이름을 팔아먹는 내 근황은 영 아귀가 안 맞는다. 같은 업종에 있는 이들만큼은 못 되더라도 한국인 평균은 따라가야지 싶다. 한국인이 책을 얼마나 읽는 진 모르겠지만.

나도 책을 읽긴 한다. <마가복음> 얘기는 여러 번 했고 <김지하 전집>과 <김수영 산문집>은 내가 15년 째 가까이 두는 책들이다. 늘 조금씩 들춰보는 이 책들은 내게 늘 새롭게 다가와 내 현재를 투영하고 반추한다. 변명 삼아 말하자면 내가 새로운 책에 게으른 건 이 책들이 내 새로운 책의 필요를 면해주기 때문인 것도 같다.

내가 가진 <김지하 전집>은 70년대 중반 일본에서 나온 책이다. 한국에선 사용하지 않는 활자를 사용한 작은 책 속엔 김지하가 생명 사상을 말하기 전까지의 모든 글들이 알뜰하게 들어 있다. 지하를 읽을 때 특히 '양심선언'이나 '고행-1974' 같은 글을 읽을 때 나는 뜨겁다. 책 속에 든 지하는 따라잡을 수 없이 장엄하고 치열해서 나는 늘 주눅 든다. 나는 오늘 '율려'라는 신상품을 내놓고 식어 가는 지하와 책 속에 든 뜨거운 지하를 분리하는 일로 열패감을 위무한다.

내가 가장 자주 들춰보는 책은 <김수영 산문집>(정확하게, <김수영 전집 2, 산문>)이다. 초보 좌파로 자기 규정하는 내가 맑스주의 원전이나 신자유주의 비판서 따위를 끼고 살지 않고 반공포로 출신의 자유주의자 김수영을 끼고 사는 일은 썩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수영을 읽을 때 나는 늘 평화롭다.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뜨거움의 총량이 지하를 넘어서면서도 그 뜨거움의 방식은 나 같은 치졸한 인간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의 뜨거움이 한 인간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한껏 고양된 뜨거움이라면 수영의 뜨거움은 한 인간이 일생에 걸쳐 성격처럼 지닐 수 있는 일상적 뜨거움이다.

지식인의 인생이 본디 코미디인 이유는 '자기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 자기'와의 숙명적인 거리 때문일 게다. 수영은 바로 그 숙명적인 거리를 최대 한 좁혀 보인 사람이다. 그는 대개의 우리처럼 소심하고 겁 많고 이기적이지만 그런 소심함과 겁 많음과 이기심을 숨기거나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계와 맞섬으로서 자신과 세계와의 긴장을 누구보다 촘촘히 만든다. 내게 수영을 읽는 일은 수영을 부르는 일과 같다. 수영은 늘 내 곁에 와 그 큰 눈망울을 굴리며 미소짓는다. 그 미소는 늘 같아 보이지만 때로는 어, 너 잘했어 때로는 어, 이 나쁜 자식으로 내게 해석된다.

읽은 책이 없는 걸. 맥빠진 답변에 어린 후배가 되묻는다. 그럼 권하고 싶은 책이라도. 어, 김수영 산문집. 왜요. 어, 김수영을 읽는 일은 한국에서 지식인이 되는 통과제의니까. 그래요. 어, 온갖 책을 다 읽어도 수영을 읽지 않았다면 지식인으로 결격이란다. 너에게 수영을 권한다. | 씨네21 2000년_3월
2000/04/04 17:00 2000/04/04 17:00
2000/04/01 22:38
다섯 차례에 걸친 서준식과의 인터뷰 테이프를 풀고 보니 원고지로 천 매가 넘었다. 어지간한 책 한 권 분량인 셈이다. 그런 방대한 분량은 인터뷰의 정교함보다는 인터뷰어의 부실한 준비나 드러내는 거겠지만 어쨌거나, 서준식과는 어지간히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많았던 것 같다.

‘아웃사이더를 찾아서’라는 연재 인터뷰의 첫 번째 대상으로 서준식을 선택하는 일에 별다른 망설임은 없었다. 개인의 취향을 넘어, 그가 자신의 신념을 소중히 지키며 우리 사회의 변방에서 올곧게 실천하는 몇 안 되는 아웃사이더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서준식을 만났다.

선생은 사회주의자다. 진보 의식은 어릴 적부터 길러지는 정의감이나 이타심, 분노하는 능력 같은 게 기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동감이다. 어릴 적 누가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걸 보면 싸우곤 했다. 우선 내가 조선인으로 따돌림 당하니까 따돌림 당하는 친구를 보면 화가 나고 불쌍했다. 감옥에서 사상 전향을 끝까지 거부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맑스주의 이론을 특별히 많이 알거나 철저해서 라기보다는 어릴 때 형성된 그런 성격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강한 분이었다고 들었다. 선생의 비타협적 성격은 어머니 영향을 받은 건가.

내가 조선인이란 걸 되새긴 게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일본인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서 한복 입고 김치 먹고 하는 걸 보고 소문이 났다. 놀림 받고 따돌림 당하고 이유 없이 몰매를 맞기 시작했다. 힘들어 하는 내게 어머니는 “숨길 필요 없다. 조선인이라는 게 나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후 나를 놀리는 아이들과 매일 학교 가서 싸웠다. 아이들이 냄새 난다고 도망가면 쫓아가서 패주고. 칼도 차고 다녔다.

그런 상황은 중학교 올라가서도 계속되었나.

중학교에 올라가선 내가 조선인이라는 걸 대개 몰랐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지냈다. 그러다 3학년 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내는 게 부끄러워 웅변 대회에 나가서 3천 명 앞에서 이야기를 해버렸다. 내 환경을 바꾸기 위해 내 몸을 던진 건데 그런 행동 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믿는다. 내가 어떻게 살고 싶으면 우선 몸을 던져 내 환경을 바꾸면 자연스럽게 내 의식도 바뀐다. 몸을 던지지 않고 그런 변화를 가져오기는 대단히 어렵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법대에 입학했다. 처음 본 조국이 어땠나.

나는 조선놈이 되기 위해 한국에 왔다. 일본에 살 때는 오로지 민족이었는데 한국에 오니까 사회 의식을 갖게 되더라. 60년대의 비참한 모습,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고 껌 팔고, 신문 팔고, 구두 닦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법학을 선택한 걸 후회했다. 법학이라는 게 세상을 교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묶어 놓는 학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갈등 끝에 사회과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책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어서 주로 방학 때 일본에 가서 많이 봤다. 그렇게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엥겔스 등 기본적인 고전을 다 읽었다.

대학 3학년 때 서승(서준식의 둘째 형. 수사 과정에서 고문에 못 이겨 난로를 껴안고 자살 기도하여 심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과 방북했다. 무슨 생각으로 간 건가.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동경이었나.

부끄럽지만 거의 호기심이었다. 북한을 보고 싶었다. 당시 나 같은 재일 교포들은 북한에 대한 공포나 혐오감이 없었다. 민단 사람과 조총련 사람이 결혼도 하고 내 친구들이 조선 대학에 가기도 했다. 문제는 우습게도 내가 국가보안법에 대해 잘 몰랐다는 거다. 법대에선 국가보안법을 배우지 않는다. 사법고시에 안 나오니까. 나는 탄로나면 3년쯤 살거나 학생이니까 잘하면 집행유예로 나올 거라 생각했다. 나중에 수사관이 법조문을 보여주는데 무기 징역 또는 사형이라고 적혀 있더라.

그런 순진한 호기심이 선생의 일생을 결정했다. 감옥 생활은 어땠나.

처음엔 형이 자살 기도한 일로 교도소 쪽에서 밀수나 경제 사범들이 있는 좋은 방에 있었는데 일심 때 사형을 받고 절도범들이 있는 개털방으로 옮겼다. 거기서 많은 걸 배웠다. 기억 나는 고아 출신 절도범이 있다. 배가 고파 서울역 창고에서 레일을 팔아먹으려고 훔치다 들켰는데 차마 레일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들고 도망가다가 잡힌 친구다. 이 세상에는 넘나들 수 없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간첩이었기 때문에 다른 양심수들과는 처지가 달랐을 텐데.

내란 음모사건으로 잡혀 들어온 조영래, 장기표, 이신범은 다 서울 법대라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인데 감옥에선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영웅적인 민주 투사고 나는 간첩이었다. 우리 때문에 학생 운동이 손해 봤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이상 인간적인 후퇴를 못하겠더라. 그래서 전향 문제를 나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마지노 선으로 삼았다. 하지만 감옥에서 20년, 30년 견딘 영감들을 보니까 부끄럽더라. 나는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진보 운동의 작은 부분일 뿐인데 내 마음대로 뭔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확정된 7년을 다 살고도 보안감호 처분 10년을 받았다. 막막하지 않았나.

7년 동안은 이를 갈면서 오기로 똘똘 뭉쳐 살았다. 배도 고팠고 몸도 아팠지만 회의도 후회도 없었다. 그런데 또 보안감호 처분을 받게 되니까 조금씩,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게, 인간이란 게 굉장히 복잡한 것이다. 내가 공부한 맑스주의 이론만 가지고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맑스주의라는 게 인간의 도덕성을 직접 다그치는 장치가 없다. 바로 옆에 있는 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라든가 하는 게 없단 말이다. 꼭 필요한 건데 이걸 어디서 가져올지 막막했다. 독방에 혼자 갇혀 있다 보니 그런 생각이 가지를 치게 되고 결국에는 내가 전향을 해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더라.

결국 전향하지 않았는데, 고민들이 해결된 건가.

그런 고민 속에 3년을 꼬치꼬치 말라 갔는데, 하루는 어쨌든 이건 지금 여기에선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내 좌우명인데 혼란스럽고 방향 못 잡을 때는 가장 구체적인 문제로 내려가면 방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지금 나를 잡아 가두고 있는 사회안전법과 구체적인 싸움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87년에 51일 동안 단식 투쟁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론을 갖고 장난치지 않겠다, 구체적인 일을 하면서 살겠다, 구체적인 일이야말로 구원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전향한 사람들을 어떻게 보나.

나 역시 전향한 사람을 직접 비판한 적은 없지만 인간적인 이해와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은 달라야 한다. 한 사람이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전향하는 일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의식도 갖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사회의 가치 기준을 지킬 방법이 있는가.

워낙 세상의 가치 기준이 낮아지다 보니 그런 원칙은 강퍅해 보이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아무 가치 기준이 없듯 진보 운동 역시 아무런 가치 기준이 없는 게 큰 문제다. 자기 형님이 있고 아버지가 있고 할아버지가 있고 그들 역시 자기가 겪은 수난을 당했다는 자각이 있으면 전향을 해놓고도 감히 자기정당화를 할 수 있겠는가. 전향한 사람들은 적어도 진보 운동 속에선 확실하게 왕따가 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전향을 하고도 여전히 새로운 진보를 말하고 대중들에게 아우라를 행사하니까 문제다.

입장을 바꾸고도 여전히 진보를 말하며 아우라를 행사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는데 박노해가 말하는 새로운 진보론은 어떻게 보나.

박노해는 사노맹 할 때는 사회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원래부터 사회주의가 아니었던 거 같다. 맑스주의 운동이 15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150년의 역사를 의식한다면 그렇게 쉽게 반성문을 내고 준법 서약서를 쓰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운동이 자기 개인의 결단이라는 생각은 반만 옳다. 나는 대단히 부자유하다고 생각한다. 따지다 보면 결국 우리를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우리 안에선 자기만의 결단이란 불가능하다. 박노해는 “옛날에는 억눌린 대중들이 자신들의 억눌린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를 갈망했다. 그런데 요즘은 대중보다 기업가들이 더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세상이 거꾸로 됐다. 나는 머물러 있지 않는다. 나도 변한다”고 말하더라. 그런데 왜 그런 난폭한 논리를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 기업가가 변하는 이유와 대중이 변하는 이유는 반대다. 또 처음에 나왔을 때 농촌에 들어가서 공동체 운동을 한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안 하고 있고, 준법 서약서를 쓰면서 준법 서약서에 반대한다고 얘기하다가 나와선 반대 발언을 한 번도 안 했고. 완전히 엉망 아닌가. 생각하면 화는 나지만 박노해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가 없으니까 박노해를 비판하는 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유형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역시 생명이니 인간이니 하는 뭔가 현실을 초월한 보다 근본적인 것을 내세우는 경향이다.

더 이상 계급 문제를 말하지 않는 일에 대한 완충 효과라 할까. 자기를 정당화하면서 한발 물러설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 말을 자꾸 하면서 자기 최면을 거는 거고.

고생할 만큼 한 사람들이 관심사가 달라지거나 운동을 접는 건 비난할 수 없다고 본다. 문제는 그런 변화를 새로운 진보의 방법인 양 주장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보는데.

그런 주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 정당화는 혼자서 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통해서만 된다. 그래 너는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라는 요구는 사실 불가능한 거다.

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시민 운동이 각광을 받고 있다. 가장 약진한 건 역시 참여연대인데 처음 시작 때 선생과 인권운동사랑방도 참여한 걸로 안다.

사랑방을 만든 게 93년이고, 94년에 조희연이나 박원순 같은 사람들이 경실련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민 단체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존에 운동하고 있는 동력이 필요했던 것 같다. 결합할 거냐 말 거냐를 밤새도록 토론했고 새벽에 표결에 붙였는데 내가 졌다.

반대했다는 얘긴데.

나는 시민 운동은 어디까지나 체제 내의 운동이고 인권 운동이 아무리 체제 내를 장으로 한다고 해도 그걸 넘어서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여연대의 발기인 대회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지적했다.
단체 이름에 ‘인권’을 넣을 것과 ‘시민’이라는 말을 타이틀로 쓰지 말 것.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온 것이 과거 민중 민주 운동의 성과인데 그 운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짓밟으면서 시민 운동이 성장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발기인 대회에서 결정하고 우리가 결합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어물쩍 시민이라는 말이 들어가 버렸다. 그 시점에서 바로 나왔어야 했는데 결합해 놓고 또 나온다는 게 굉장히 힘들더라.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큰 조직이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끌어오려면 가시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왜 사랑방은 자료실에만 묻혀 있고 항소심만 만들고, 왜 인권센터는 가시적인 일을 안 하느냐는 압력이 은근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들 속이 부글부글 끓어 6개월 만에 나왔다.

참여연대가 경실련하고는 다르지 않은가.

내가 당시 경실련을 비판한 건 문어발식 선단식 운동, 이것저것 다 끌어들여서 인기 있고 관심 끄는 건 뭐든지 다 한다는 것이었다. 참여연대 역시 경실련을 비판하며 시작했지만 나는 참여연대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수십 명의 활동가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 인기 있는 종목이 아닌 것을 하면서 돈을 모을 수는 없는 거고 그래서 결국 여기저기 사업을 벌일 거라 봤다.

박원순은 누구나 인정하는 모범적인 시민운동가지만 한편으론 한국에서 그 만한 문화자본가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쪽에서도 존경 받고 저쪽에서도 대우 받고. 운동하면서 그런 삶을 누리기도 쉽진 않은데.

박원순의 진보 의식을 높게 평가하진 않지만 그 사람은 낮은 단계에서 그 단계까지 올라온 거니까 비판의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오히려 80년대에 진보, 민중 얘기를 하다가 민중을 갑자기 시민으로 바꾼 사람들이다. 역사 속에서 민중이 갑자기 시민으로 바뀌는 게 아니지 않은가. 조희연 같은 사람들이 시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시민 운동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시류에 영합하는 일 외엔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 도덕적 결백함은 갖고 싶으니까 진보니 변혁적 관점이니 하는 말을 갖다 붙인다.

현재 시민 운동의 내부를 보면 다양한 성향의 결합체로 보인다. 대개 조희연 같은 사람을 시민 운동권의 진보적인 부분으로 보는데.

조희연 같은 사람들은 시민 운동을 갖고 진보 운동의 지평을 넓혀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이 지금 소멸되어야 할 이 사회의 문제에는 정작 손을 안 대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어서 시민의 작은 권리 찾기 운동이라는 게 화장품의 유통 기간 문제라든가 난시청 지역의 시청료를 납부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그런 문제들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데 못하고 있는 게 많다. 감옥 면회 갔는데 3분밖에 못 했다라든가 불심 검문 거부하기 라든가. 우리가 현실을 고쳐 나간다는 게 근본적으로 이 구조를 넘어서기 위한 건지, 이 구조에 좀더 생명력을 주기 위한 건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랑방이 총선연대에서 빠진 것도 그런 이유인가.

낙선 운동 불참을 결정한 건 상근 활동가들이다. 그렇게 결정했다고 들었고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요컨대 다들 하려고 나서는데 우리가 굳이 낄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다른 중요한 할 일도 많은데 이름만 올려놓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인 것 같다.

총선연대의 낙선 운동에 어떤 문제점을 보는가.

지금까지 대체로 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그 의원들이 무슨 활발한 의정 활동을 했는가 하는 것보다는 의원들의 주장이나 입장이다. 이를테면 이 의원은 국가보안법 개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안 된다, 이런 주장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낙선 운동의 의의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참 어려운 일에는 안 나서고 빛이 나는 일에만 다들 나서려고 한다 싶어 섭섭할 때가 있다.

요즘 시민 운동이라는 말이 모든 운동을 대충 포괄하곤 하는데 얘기 나온 김에 구분을 좀 해보자.

운동은 진보의 정도에 따라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네 부류 중에서 앞의 두 개는 계급이라는 관점을 가진 운동인데 앞의 것은 계급 운동이고 뒤에 건 사민주의다. 그 다음 두 개가 시민 운동인데 그 역시 좌파와 우파로 나눌 수 있다. 참여연대가 시민 운동의 좌파에 속한다. 나머지 경실련이나 환경운동연합처럼 정부나 기업가에 대해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은 곳들이 시민 운동의 우파다. 그보다 못한 건 운동이라 볼 수 없고 오히려 김종철 씨가 하는 《녹색평론》은 사민주의에 가깝다는 느낌도 든다. 어쨌든 참여연대는 시민 운동의 좌파인데 이 사람들에게 계급 부분을 포기했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 참여연대가 하고 있는 사업 중에 계급 부분을 드러내는 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지금 좀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빛을 좀 받는 이런 쪽에 무게를 걸고 있다고 본다. 만일 상황이 바뀌어 진보 운동이 다시 힘을 회복하고 계급의 문제가 관심거리가 되면 또 그쪽으로 힘을 걸 것이다. 나는 그런 행태가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 생각한다.

운동은 표현이 아니라 효과인데, 전략 전술의 차원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은가.

순수한 기회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전혀 진보에 대해서 몰랐던 사람이 나름대로 지식인의 역할을 하겠다고 시민 운동 좌파 정도에서 열심히 하는 경우는 매우 훌륭한 것이다.

선생은 인권운동가다. 인권 운동을 선택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88년에 처음 나와서는 비전향 좌익수 출신인 내가 운동을 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다. 나이 마흔이 되었는데 장가도 못 갔겠다, 산동네에 가서 빈민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와서 천호동 고모 집에 도착하자마자 외신 기자들이 몰려오는데 그래 가지고 무슨 산동네에 들어가겠나. 운동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글을 쓸 마음을 먹었다. 감옥에 있을 때 편지 쓰기에 재미가 들어서 글쓰기의 괴로움과 기쁨을 동시에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일단 비전향 좌익수로는 내가 처음 나왔기 때문에 안에 있는 장기수들을 위해 전향 문제, 장기수 문제를 일 년 정도 떠들고 다녔다. 이렇게 일 년만 하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이게 최소한의 의리다 생각했다. 거의 조폭이지.

비전향 장기수로서 그런 일을 하는 데 불편은 없었나.

그때만 해도 장기수 문제를 꺼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장기수라는 게 실은 다 간첩이기 때문에 간첩 얘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첩이라는 벽을 깨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간첩의 이야기를,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였다. 그 다음에 전향에 관한 얘기를 해야 했는데 이게 힘든 게 전향하고 나온 사람들을 비난하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운동을 분열시킨다는 욕까지 들었다. 그렇게 일 년 지나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아줌마들이 찾아왔다. 조작 간첩의 가족들인데 이 사람들은 민가협 같은 데 가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학생 어머니들이 왜 자기 자식하고 간첩하고 같이 석방 운동 해야 하냐 생각하니까. 그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고 2년 동안 다시 조작 간첩 문제만 했다.

인권 운동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렇게 접어들었다는 얘긴가.

처음엔 인권이라는 게 자본주의적인 개념이라 생각했고 사람들이 인권운동가라고 부르면 속으로 ‘나는 아니야’ 했다. 그러다 전민련이 뜨면서 인권위원장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만났다. 강경대가 죽고, 계속 분신 정국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루는 고위 당정 회의가 열렸단다. 안기부장, 검찰총장, 여당 고위 당직자들이 모여 얘기하다 “잇따른 분신 사건에 배후가 있다. 잡자” 이런 얘기가 나온 거다. 공교롭게도 김기설이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한 게 바로 다음날 새벽이었다. 누가 서강대에서 분신을 했다며 유서가 복사본으로 도는데 그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김기설의 글씨였기 때문이다. 김기설은 인권위원회에서 내가 데리고 일하던 친구였고 매일 나한테 보고서를 내고 내가 수정하고 했기 때문에 필적을 잘 안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생각했다. 국가 권력이 그 방향으로 몰아가는데 그걸 뒤집긴 어렵다고 봤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었다. 명동성당에서 계속 농성하면서 반증 자료 모으면서 이삼 일에 한 번씩 기자회견 하고 자료 공개하고 하다가 결국 잡혀갔다.

강기훈이 결백하다는 주장이 범죄가 되는가.

잡아간 명분은 내가 보안관찰을 받는 사람이라 정기적으로 보고를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다는 거다. 내가 법정에서 그렇다면 왜 지난 2년 동안은 안 잡아갔냐고 물었다. 97년 《레드헌트》 상영 때 감옥살이 한 것 역시 죄목은 보안관찰법 위반이었고 지금도 그런 상태에 있다.

자신을 인권운동가라 규정한 건 언제인가.

강기훈 사건으로 6개월 살고 집행 유예로 나왔는데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인권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생각했다. 그때 고민했던 게 운동을 하면 글 쓸 기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성명서, 논평 이런 건 글재주를 기르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거다. 운동을 하고 있으면 현장 경험이 있으니까 더 생생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 뛰어난 운동가이면서 뛰어난 저술가가 될 수는 없었다. 레닌 같은 특별한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겠지. 운동과 글쓰기 가운데 선택해야 했는데 이미 사람들과 관계망이 생겨서 운동을 잘라낼 순 없었다.

인권이라는 말도 다 같진 않은데 선생이 생각하는 인권은 무엇인가.

인권은 처음부터 국가 권력과의 대항 관계 속에서 태어난 개념이다. 그리고 나는 계급 사회에서 보편적인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계인권선언문의 사유 재산의 권리나 지적 재산권 같은 건 사실 매우 자본주의적인 개념이다. 인권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변해 왔고 앞으로도 변해 갈 것이다. 인권 운동의 우선 과제는 자본주의 사회를 위해 만들어진 인권 개념을 보편적인 인권 개념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습게도 보수 진영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말하는데.

왜 북한 인권 문제는 손을 안 대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주제넘은 소리다. 내가 북한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가치관이나 사회 운영 시스템이 전혀 다른 나라를 전통적인 자본주의 인권 개념을 갖고 재단하는 건 폭력이기 때문이다. 먼저 북한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인권 개념이 필요하다.

새롭고 보편적인 인권 개념을 만드는 일은 진척되고 있는가.

인권 운동을 하고 있지만 인권 운동이라는 게 자본주의적인 기반을 갖다 보니 우리가 바라는 구체적인 운동 양태와 인권 이론의 합치가 굉장히 어렵다. 솔직히 운동의 양태만으로 볼 때 나나 사랑방은 앞서 말한 시민 운동의 좌파쯤에 가깝다. 이 내용을 계급 운동의 성격을 뚜렷이 가진 걸로 만들기가 굉장히 어렵지만 그러나 이걸 만들어내야 새로운 단계의 진보 운동을 할 수가 있다. 인권, 여성, 동성애, 환경, 장애 같은 여러 부문에서 동시에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 20세기의 진보 운동은 일부 전위가 정치적으로 뚫고 나가는 거였지만 앞으로의 진보 운동은 좀더 분화되고 각 부문에서의 전문성이 진보 운동과 연결되면서 그 분야에 진보 이론이 생기고 이런 것이 모두 종합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 진보적 인권 운동의 이론을 세우는 과정에 있다.

과정이라면 틀은 잡혔다는 말인가.

어떤 나라든 인권 상황이라는 게 그 나라의 지배 계급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인권이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인권, 인권 해도 인권이 다 좋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거다. 인권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실은 지배 계급의 정치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국이 바로 이걸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는 거 아닌가. 인권은 하늘이 준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그냥 지켜져야 되는 거라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인권은 신이 부여한 보편적인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이 일반적인데.

보편이라는 말은 참 폭력적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반드시 힘 센 놈이 강요하게 되어 있다. 서구 자본주의 강국들이 제3세계에 침략해서 자원 같은 걸 막 가져가면서 자본주의의 틀을 잡았는데 이 과정에서 내세운 것이 바로 가톨릭의 보편적 가치다. 보편을 강요하고 보편의 이름으로 자기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거다. 물론 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하지만 사회 구성원 간이나 나라들 간에 이해 관계의 대립 조건 속에서는 보편적 인권이라는 게 불가능하다. 이해 관계가 대립되어 있을 때 한쪽 인권을 보장해 주면 다른 쪽 인권은 무시되는 법이니까. 기본적으로 지배 피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은 지배 계급의 기만일 뿐이다. 결국 이해 관계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그런 시대가 와야 하는데 결국 계급의 문제다. 원칙적으로 계급이 없어지고 계급 지배가 없어지지 않는 한 보편적 인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선생이 그저 강고한 맑스주의자인 줄로만 알았다가 예수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것을 알고 놀랐다. 어쩌다 인민의 아편을 가까이 하게 되었는가.

감옥에서 중국어를 공부했는데 읽을 거리가 없었다. 중국 대륙에서 나온 책들은 들어올 수가 없고 대만에서 나온 《리더스 다이제스트》 같은 건 또 얼마나 시시한 책인가. 그것보단 성경이 낫겠지 싶어 홍콩에서 나온 중국어 성경책을 넣어달라고 했다. 공관복음을 꼼꼼히 읽으면서 자연스레 내 상황을 투영하게 되었다. 그 즈음 나는 좌익수 중에 6.25전쟁 와중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게 된 영감님들에게 반발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간수를 볼 때마다 적들, 적들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나는 말단 간수는 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서를 보면서 그런 고민들을 자꾸만 하게 되었다. 예수가 왜 세리를 사랑하라고 했는가. 세리는 민중의 피를 빠는 나쁜 놈인데. 그런 게 말단 간수를 보는 눈과 연결돼서 자꾸만 나를 자극했다. 그러면서 사회의 복잡함이라든가 인간의 복잡함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고 맑스주의로 해결하기 어려운 인간의 도덕성이나 사랑 같은 부분을 예수에게 기대게 되었다. 맑스주의는 유물론이지만 기독교도 유물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도 됐다. 유물론의 반대가 관념론이지 유신론은 아니지 않은가.

진정한 인간 해방은 정치적 해방만은 아닐 것이다. 나머지를 종교 차원에서 보완할 수 있다고 할 때 사상과 종교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다 생각하나.

부족한 지점이 어디까지가 자본주의라는 제도 때문인지 어디부터가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인지 분간하긴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윤리적인 부분, 또는 자신이 약할 때라든가 반대로 강해질 때 자신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어떤 잣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부분을 사회주의가 줄 수 있느냐에 나는 회의적이다. 하느님은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상대화의 기준이겠지만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만큼 경계도 필요하지 않을까. 아마 한 인간이 윤리적인 힘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최상이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걸 요구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하느님과 사회주의가 같이 갈 수 있다고 본다. 아마 은총 같은 지점에서 갈라지겠지만 그 차이가 현실 생활에서 문제를 줄 정도는 아니다.

은총을 체험한 적 있는가.

51일 동안 단식하고 며칠 방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다 운동 나갔는데 간수가 의자를 갖다 줬다. 의자에 앉아서 햇빛 쬐는데 아, 이런 게 은총이구나 싶었다.

맑스주의를 버릴 뻔한 순간이었다.

사실이다. 공관복음을 접하면서 예수가 여러 위선에 보인 안티 테제들이 반짝 반짝 가슴에 박혔다. 그때 내가 잡기만 하면 잡히는 거였는데 내가 안 잡았다. 예수 덕에 나는 제2의 서준식이 되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진 않았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건데 섭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맑스주의를 버리는 일이다. 나를 키워 준 맑스주의를 버릴 순 없었다.

선생은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서유럽 국가들처럼 사회 복지가 강화된 자본주의 모델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 역시 인권운동가로서 사회 보장 제도를 얘기하지만 원칙적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진정한 사회 보장은 불가능하다. 파리코뮌을 지나서 사회적 권리라는 것이 두 가지 흐름으로 발전하는데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계급 투쟁을 체제 내화하기 위한 사회 정책의 측면이고, 자본주의 재생산이 지나친 착취로 피폐해지니까 이윤의 극대화를 보장하기 위해서 노동자들도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줘야 된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그게 소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 복지 개념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도 알고 보면 나을 게 없었다.

파리코뮌 이후의 또 하나의 흐름은 러시아 혁명 쪽으로 이어지는데 진짜 사회 복지가 이루어질 소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나 같은 사람이 현실적인 데이터를 내놓을 수 없게 된 거다.

그것은 선생의 숙제인가.

나 자신의 숙제이자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반공 극우 정권이 지배하다 보니 금기시하는 말이 많다. 사회주의자라는 말도 그런 경우인데.

나도 강연하면서 왜 굳이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하느냐는 얘길 종종 듣는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라는 건 별로 자랑도 아닌 게, 사회주의라는 말은 포괄적으로 공산주의부터 사회민주주의까지 포함해서도 쓰여지는 애매한 말이다.

요즘은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별로 문제가 없는데 실은 공산주의자라는 말도 거리낌없이 쓸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불편한 부분은 내가 젊은 시절 내 인생을 걸었고 내가 희망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계속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배신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무슨 얘긴가 하면 자기 소신을 분명하게 규정지어 말 못하고 애매한 형태로 말하는 부분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는 거다.

분명할 필요가 있다는 얘긴가.

그렇다. 사회주의자인데 어떤 사회주의자인지 그걸 말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라고 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오해를 기대하는 거다. 내가 극렬한 좌익이 아니라 합리적인 좌익이라고 오해하기를. 만사가 그렇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했을 때 카스트로라든가 게바라라든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우니까 김구 정도로 타협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실 엄청난 폭력 속에 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가 박해 받고 있을 때 내 주는 예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는 진리를 갈망한다 이렇게 말하는 거다. 자기 양심을 완전히 배신하지 않으면서 상대로 하여금 뭔가 오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레닌을 존경한다고 얘기할 수 있나, 우리 사회에서?

지난번 동티모르 독립운동가 구스마오가 왔을 때 왜 안 만났는가. 그쪽에 관심이 남달랐는데.

이런 걸 아웃사이더 기질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 어려운 상황에서 열심히 할 땐 사람들이 안 붙는다. 죽어라고 안 붙는다. 근데 뭔가 상황이 달라지면서 노력한 게 약간씩 결실을 맺고 빛을 내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확 모인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빠지고 싶다. 이제 동티모르가 독립이 되었고 구스마오도 제도권 정치인으로 활동을 할 텐데 내가 굳이 만날 필요가 있나 싶다. 사실 내가 뭐 대단하게 도와준 것도 없고. 뭐랄까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지가 않다. 총선연대도 비슷하다.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 앞장서려고 하는데 내가 거기 하나 붙어 있으면 뭐하나, 그럴 시간 있으면 사랑방 일 하나라도 더 챙기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우리가 여력이 없어 못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다.

아까 전화하는 걸 듣다 보니 선생이 아무개 있는 자리는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더라. 그런 성격이 독선적인 스타일로 와전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사랑방 출입해 본 결론은 선생이 사랑방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아니던데.

사람들은 내가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비타협성은 논리적인 판단을 넘어 성품에 가까워 보인다. 좀 딱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예를 들어 전철 타고 가다가 비질비질한 노인이 탔을 때, 아휴 할아버지 여기 와서 앉으세요 하면서 양보를 못했다. 노인이 내 앞에 오는 걸 기다렸다가 그냥 일어나서 가버리곤 했다.

위선에 대한 증오가 선생을 딱딱하게 만드는 건가.

그 역시 위선의 일종이겠지. 감옥에서 한참 전향 공작을 하는데 나를 조금씩 허물어뜨리려고 이를테면 들어온 책을 안 주고 검토 중이라느니 하면서 미루는 거다. 내가 약간만 비굴하게 나가면 책을 받을 수가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8개월 동안 활자 구경을 못했는데 참 고통스러웠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책 보던 사람은 책 두 달만 못 보게 하면 다 떨어져 나간다. 그러다 몸이 굉장히 쇠약해져서 영양제를 사먹었는데 8개월 만에 영양제 설명서에 있는 그 활자를 보면서 눈물이 복받쳤다. 먹물의 가장 큰 약점이 여기에 있구나 절실하게 느꼈다.

지난 여름 하루감옥체험 가서 선생을 처음 봤다. 단상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산만한데 혼자 미간 찌푸리고 정좌하고 있더라. 저 양반 듣던 대로 되게 고집 세게 생겼구나 싶었다. 만나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표정부터 고쳐야겠군. 내가 고집불통인 건 맞는데 내가 말도 안 되는 일에 고집부리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고집부리는 내용이 뭐냐는 거다. 그걸 안 보니까 서준식이만 정말 대책 없는 고집쟁이가 된다. 알고 보면 나도 피해자다.

선생을 고집불통이라 평가하는 사람에겐 꼭 그렇게 평가할 필요가 있는 거다.

가족들과는 어떻게 지내는가.

뚜렷한 성과를 남긴 운동가들 가정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한심한 경우가 많다. 가정을 돌보는 노력까지 전부 다 운동 쪽에 쏟아 붓기 때문이겠지. 나 역시 가정 부분을 잘라내고 운동 부분에 집중하면 뭔가 뚜렷한 성과를 남길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그러지 않는 이유는 진보 인사 아무개 자식이 아버지를 원망하고 가출을 했다거나 이런 게 싫어서다. 그래서 운동가로의 능력이나 내가 가능한 진보는 여기까지다 딱 선을 그어버리고 산다. 그렇다고 해서 애들한테 성화를 부리는 건 아니고 애들하고 그냥 같이 있고 애들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애들한테 뭐 하나 가르쳐주는 게 더할 수 없이 기쁘고. 진보 인사 아무개는 자기 부인을 이 년아 저 년아 부르더라.

아이들을 원래 좋아하는가.

스무 살 무렵 꿈이 초등학교 선생이었다. 하지만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초등학교 선생을 할 수 있었겠는가. 불가능한 꿈이라는 걸 깨닫고 얼마나 낙심했는지 모른다. 여전히 아이들을 좋아하고 운동 판에서 은퇴하면 조그맣고 따뜻한 고아원을 운영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두 딸이 아빠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아는가.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인데 가정 조사표 직업란에 인권운동가라고 쓴다. 우리 딸들은 선생이 네 아빠는 뭐 하는 분이니 하고 물으면 인권운동가요 대답하는데 아마 조금 지나면 인권운동가요 하면서도 우리 아빠가 다른 아빠들처럼 선생님이요 라든가 회사 다니세요 라든가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것 같다. 워낙 별난 직업이니까.

진보적인 의식을 유지하는 데 검약한 생활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결정적이다. 이 사회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한 진보적인 사람, 운동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한다. 가난하지 않으면 정당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 말이 액면 그대로가 정당한 건 아니지만 일단 배부르게 사는 사람들의 말은 일단 정당하지 않고 배고픈 사람들의 말은 정당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독립군 정신이다.

독립군 정신이라. 고난을 자초하는 운동은 낡은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구조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고난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게 참 이해 받기 어려운 부분인데 진보 운동하고 체제 내 운동하고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참여연대가 정부 지원이나 기업 지원은 받지 않지만 매우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후원금을 받는데 시민들의 후원금 역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다. 시민들의 의식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시민들을 향해 지금 변혁을 이야기하거나 혁명을 이야기하거나 자본주의 없애야 한다고 얘기하면 시민들이 좋아하고 후원금 주고 하겠는가.
진보 운동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진보 운동이 무슨 사업 아이템이 낡아서나 운동 방식이 잘 못 되어서 라거나 고집이 세서 가난하다는 얘기는 모함이고 악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시민 운동이 잘되는 이유는 잘될 수밖에 없는 운동이기 때문이고 진보 운동이 어려운 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부디 선생의 소망이 크게 열매 맺길 빈다.



서준식 연보

1948. 5. 25 일본 교토 출생
1967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으로 유학
1968 서울대학교 법학과 입학
1970 형, 서승과 함께 방북
1971. 4. 20 서승과 함께 보안사령부에 체포
1972. 2. 14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판결
1978. 5. 27 징역 7년 만기와 동시에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 결정
1980. 7. 9 교도 당국의 처우에 항의하며 18일 동안 단식 투쟁
1987. 3. 3 사회안전법 철폐와 석방을 요구하며 51일 동안 단식 투쟁
1987. 3. 6 고등법원에 <나의 주장> 제출
1988. 5. 25 석방.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 전개
1989-1991 민가협 공동 의장
1991.6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관련 구속
1991-1993 강기훈 공대위 집행위원장
1993. 3 인권운동사랑방 창립
1993-1995 전국연합 인권위원장
1996-1997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1997 인권영화제에서 제주도 4.3 항쟁을 다룬 《레드헌트》 상영으로 구속
1997 KNCC 인권상 수상
1998 씨네21 영화상 대상 수상
현재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2000/04/01 22:38 2000/04/01 22:38
2000/03/15 16:57
내 친구 석구는 용인의 한 시골 교회 목사다. 지난해 어느 날 카트를 밀며 장 보는 아내 뒤를 좇을 때 울린 전화 속엔 15년만에 듣는 녀석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몇 주 후 나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소박하게 박힌 녀석의 교회를 찾았다. 내가 길을 헤매다 늦게 도착한 탓에 녀석은 이미 설교 중이었고 나는 묵상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광고 시간에 녀석은 나를 불러일으켜 여러분 저의 귀한 옛친구가 찾아왔습니다, 하고 소개했다. 교인들의 평화롭고 따뜻한 박수 소리 때문이었을까. 녀석의 말이 내 귀엔 여러분 여기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하고 들렸다. 탕자는 녀석의 사는 모습에 안도했다. 녀석은 15년을 하루같이 천천히 예수에게 다가가고 있다.

내가 한신에 입학했을 때 녀석은 신입생을 환영하러 나온 2학년들 가운데 하나였다. 녀석은 한신이란 학교가 있는지조차 모른 채 입학한 나와는 달리 일치감치 신학공부를 소망했었다. 내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역동성을 깨닫고 예수라는 사나이를 인생의 기준으로 삼게 된 데는 녀석의 영향이 컸다. 녀석은 대책 없는 건달에서 엉성한 대학생으로 생활을 전이하고 지리멸렬하던 내게 예수에 대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제 소망에 대해 조용히 말하곤 했다. 나는 녀석을 따라 한 걸음씩 예수에게 다가갔다.

언젠가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는 소망을 접은 이유가 교회에 대한 낙심 때문이라고 적었지만 다른, 보다 큰 이유는 예수처럼 살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예수에 대해 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였지만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를 따라 사는 일의 얼개를 파악하게 되었을 때 나는 거스를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검약한 삶을 넘어, 자기 헌신의 기쁨마저 생략한 채 오로지 남을 섬기다가 완전한 고독감 속에 사라져가기엔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았다.

내가 예수의 삶에서 넘어설 수 없었던 지점은, 그가 보여준 삶의 폭이 인간이 이룬 어떤 선한 그룹에서조차 결국 오해받기 십상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예수는 정치범으로 몰려 죽었지만(당시 로마 식민지령에서 십자가 처형은 민족해방 운동가들에게 사용되었다. 물론 전시 효과 때문이었다.) 정치범이 아니었다. 그를 죽이는 일은 로마 식민정권, 유태 괴뢰정권, 유태교 지도자들 같은 압제자들간의 합의였을 뿐 아니라 예수가 자신들의 정치 혹은 영혼의 해방을 이루어 줄거라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민중들의 합의이기도 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정치 지도자로 혹은 영혼의 지도자로 제각기 받아들였지만 그들이 예수를 좀더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정치 지도자라 여겼던 사람들은 그를 영혼의 지도자라 여겼고 그를 영혼의 지도자라 여겼던 사람들은 그를 정치 지도자라 여기게 되었다. 정치적 해방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영혼의 해방을 되새기고 영혼의 해방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정치적 해방을 되새기는 예수의 방식은 사람들의 욕망을 거슬렀다. 완전한 인간 해방이란 그 둘간의 접점 속에 있는 게 분명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 혹은 영혼의 해방 전선이 상할까 두려워했다.

이제 예수가 죽은 지 이천 년이 지나 그는 죽음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사했다는 모호한 신학론의 박제가 된 채 사람들의 욕망의 담보물이 되었다. 예수를 근거로 한다는 기독교 정신이 인류의 주요 부분을 장악한 지 몇 세기가 지났지만 그가 보여준 완전한 인간 해방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천 년 전 그가 죽을 때보다 결코 늘지 않았다. 예수를 배신한 자책감도 이젠 바래어가고, 오늘도 천천히 예수에게 다가가는 내 친구를 바라보는 일로나 추레한 삶을 위무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아무리 둘러봐도 예수의 삶은 대개 헛되었던 것 같다. 예수는 이천 년 전 우리에게 해방을 가르쳤지만 우리는 이천 년째 예수에게 욕망을 요구한다.
2000/03/15 16:57 2000/03/15 16:57
2000/03/07 16:56
종일 아이를 보는 토요일. 내 몸을 짓밟으며 공룡 놀이를 하던 김단과 김건이 잠시 다른 놀잇감을 찾아 물러간 틈을 타 텔레비전을 켠다. 연속극, 스포츠, 쇼, 미국방송, 일본방송, 중국방송... 버릇대로 이리저리 리모콘 서핑을 하다 눈에 밟히는 얻어맞는 고딩의 클로즈업. 쇼트가 바뀌고 HOT가 카메라 앞에 바짝 다가와 팔을 휘젓는다. HOT가 왕따를 노래하고 있다. 언젠가 씨랜드 아이들을 노래하는 걸 본('들은'이 아니다. 이수만은 HOT의 장르가 립싱크라 확인한 바 있다.) 기억이 살아나면서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영혼까지 사고 파는 자본주의라지만 해도 너무 하는군.

한때 통기타를 치며 여린 목소리로 <모든 것 끝난 뒤> 같은 감상적인 노래를 부르던 '트로트 포크' 가수 이수만은 미국 유학에선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단단히 배워왔던 모양이다. 대중음악 상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여느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한 최초의 한국인일 그는 (현진영 정도를 제외하곤) 지나치게 앞선 시도가 불발에 그치곤 하다 결국 HOT라는 히트상품을 만들어냈다. 나는 HOT 공연실황 클립 속에서 천사 날개를 달고 무대에 선 HOT에 환호하는 10대들을 잊을 수 없다. 그 장면을 보며 내 머리통 속에선 HOT에게 천사 날개를 달아준 이수만의 욕망과 고작 그런 우스운 천사에게서나 안식을 얻는 한국 10대들의 가련한 처지가 대립했다.

알다시피 HOT라는 상품이 순항하는 근거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남긴 공백이다. (박노해가 신영복 모델을 선택하듯) 이수만은 서태지 모델을 선택했고 그런 선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중음악 시장을 면밀히 분석해온 이수만으로선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서태지 모델을 선택했다는 것은 단지 서태지의 은퇴로 생긴 남성 댄스그룹의 빈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외에 몇 가지 세부를 갖는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건 이른바 사회비판이다. 추측컨대 서태지 모델을 선택한 이수만이 서태지의 중요한 구성 요소라 공인된 사회비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만은 사회비판이라는 요소를 기꺼이 HOT라는 공산품의 외장재로 채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음악이 상품이 아닐 도리는 없겠지만 그 상품들이 가진 사회비판의 권한은 저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천지인이나 메이데이처럼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상품 시스템을 사용할 뿐인 그룹이나 스스로 음악을 창작하고 집행하는 능력을 갖춘 서태지와, 순수한 공산품인 HOT에게 똑같은 사회비판의 권한이 주어진다면 대체 우리의 삶에 어떤 판단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돈 속에 썩어버린 양심 너의 그런 한심한 모습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 (...) 이젠 제발 돈 때문에 사람 팔지 말고 주위를 둘러봐 너 혼자만 잘살잖아 한편의 허상을 향해 초라한 몸부림에 흐느끼는 영혼들의 울음이 들린다."(Korean pride)

두어 달 전 어느 시사월간지에서 이수만과 대담을 하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우습게도, 갑자기 불어난 유사 지식인 활동에 치어 사는 나로선 선뜻 응할 형편도 못 되었지만, 허탈함에 쓴웃음이 나왔다. 대담 제목이 <문화는 돈이다>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인생의 적이자 신앙의 적으로 여기는 내가 자본주의의 전사 이수만과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 자본주의는 현실의 법이며 내가 아무리 이수만을 마땅치 않아 한들 합법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그를 공식적으로 비난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나는 꿈에라도 이수만이 욕망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의 전사에서 계몽주의를 신봉하는 대중음악 활동가로 탈바꿈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내가 이수만에게 바라는 건 단지 그의 공산품에 사회비판이라는 외장재는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것, 공산품의 길을 걸어달라는 것이다. | 씨네21 2000년_3월
2000/03/07 16:56 2000/03/07 1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