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3/28 17:28
별이 두개던가 세개던가. 박정희의 혁명 동지라던, 내가 다닌 경기도 A고등학교 이사장은 참으로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그렇듯) 넘쳐나는 욕심의 근거로 신앙심을 내세우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경기고나 대전고를 능가하는 한국 제일의 명문 고등학교를 만들겠다는 욕심 역시 신앙심을 근거로 한 그의 하고많은 욕심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중학 3학년이 될 무렵 그 욕심이 벽에 부닥쳤다.

그 도시에 고교평준화 계획이 발표되었고 만든 지 5년밖에 안 된 그의 고등학교에 시험으로 신입생을 뽑을 기회가 한번밖엔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박정희의 혁명동지이자 시련을 더 큰 욕심을 채울 기회라 파악하는 독실한 기독교인답게, 그해 내내 그는 교사들을 풀었다. 울릉도 출신 세명을 포함, 전국 방방곡곡에서 내로라 하는 우등생들이 장학금 약속에 이끌려 모여들었다.

신입생들이 등교하자 학교는 흥분했다. 전교생 조회의 교장연설은 1학년들과 2, 3학년들이 질적으로 얼마나 다른가를 강조하는 내용이었고, 이른바 가장 실력 있는 교사들이 1학년에 배치되었으며, 그 교사들은 난 너희 같은 엘리트들을 가르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쩜 너희들은 하나같이 인물도 좋으냐는 식의 장광설로 수업을 채웠으며, 그 도시의 한 여고 3학년들의 인기투표 결과가 A고 1학년이라는 풍문이 돌았다.

1학년들은 자연스레 엘리트의 자부를 익혀갔다. 1학년들이 1학기에 치른 시험이 3학년 과정에도 나오지 않는 문제로 채워져 절반 이상이 0점을 받은 일 역시 엘리트만의 해프닝으로 여겨졌다. 문제가 생긴 건 반년이 지나서다. 학교는 2학기를 앞두고 1학년 장학생 수를 40여명으로 줄였다. 장학금을 받아가며 3년 후 금의환향만을 꿈꾸던 1학년들의 분노가 빠른 속도로 모여 갔다. 이사장의 그라나다 승용차가 황급히 학교로 들어 선 어느 날 교장은 운동장에 1학년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손나팔을 한 교장이 말했다. 제군들은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세계 어느 명문 고등학교도 50점 이하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법은 없다. 왜 제군들은 최고의 엘리트인 자신을 모욕하려 하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교장의 희한한 엘리트론은 1학년들의 분노를 누그러트리는 힘이 있었다. 50여명의 1학년들이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1학년들은 매일 자취방에 모여 하릴없이 술과 유흥으로 시간을 죽여 갔다.

졸업한 지 10년 쯤 지난 어느 날, 나는 그 도시의 역 앞에 나붙은 포스터를 보았다. 天下名門 大 A高 6會 同門會. 동기들이 선배와 후배들을 배제한 동문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참담해진 나는 그 학교에서 만난 모든 것들과 인연을 접었다. 나는 비로소 분노와 분별력을 잃은 엘리트의 자부란 그저 어릿광대의 자부임을, 어릿광대의 자부는 그 어릿광대를 사용하는 세력에 의해 전적으로 관리됨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 학교를 떠난 지 20년이 된 나는 그런 어릿광대의 자부를 세상의 도처에서 발견하곤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살아가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적 악행들의 실무는 그런 어릿광대의 자부를 통해 진행된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암, <조선일보>의 어릿광대들이 갖는 최고 신문의 최고 엘리트 기자라는 자부 따위 말이다. 화사한 외양을 한 그 어릿광대들은 저널리스트로서 최소한의 분노와 분별력을 자신들을 사용하는 파시스트들이 전적으로 관리하는 어릿광대의 자부와 하루 한번 등가교환 한다.

추신 : 그런 어릿광대의 자부가 얼핏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는 건 어릿광대 주변에 득실거리는 얼치기 어릿광대들 덕이다. 얼치기들은 어릿광대의 화사한 외양에 매혹된 채 늘상 밑도 끝도 없이 흥분하곤 한다.
2001/03/28 17:28 2001/03/28 17:28
2001/02/09 22:22
“여러분, 제가 병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섭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여자도 남자도...” 한대수의 새 앨범(8집, )은 한대수의 음울한 대사로 시작한다. 한대수는 를 자신의 마지막 앨범이라 말하고 쉰 줄에 접어든 자신은 이제 음악가로선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앨범 어디에서도 한물 간 음악가의 낯간지런 인사치레를 발견할 수 없다. 1968년 한국 유일의 문명비판적 대중음악가로 출현한 한대수의 음악 세계는 30여 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사랑과 평화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런 에너지는 그것이 처음 나타난 시절이나 오늘이나 한국에선 좀처럼 찾기 어렵다.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한대수의 목마름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고 목마른 사나이는 여전히 귀환 중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난 선생이 뿌리뽑힌 자의 노래를 하는 이유는.

나는 돈과 명예를 동시에 가진 집안에서 자랐다. 사람들은 그런 환경에서 왜 저항을 하게 되었느냐 묻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런 환경 덕에 내 나름의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 저항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지만 그런 저항의 정신을 만든 사람들은 부유한 환경 출신인 경우가 많다. 레닌도 부잣집 자식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가난했다면 화폐를 먼저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자라면서 화폐 걱정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화폐를 초월할 수 있었기에 세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록음악을 하게 된 건가.

미국 흑인들의 블루스가 록앤롤이 되었는데 록앤롤이란 알다시피 섹스를 뜻한다. 록앤롤의 시작은 역시 ‘불만’이다. 록은 불만에서 시작한 아우성, ‘아 싫다’ 이다. 나는 그런 록의 시작이 인간의 시작과 같다고 본다. 인간의 시작 역시 불만이다. 절대로 만족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자꾸 사는 거고 언젠가는 만족이 채워질까 싶어서 자꾸 사는 건데 결국 못 채우고 죽는 게 인생 아닌가.

록이 불만을 해소한다는 말인가.

만약 록이 없다면 도처에서 주먹 싸움이 터지고, 코가 부서지고, 귀가 부서질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한쪽에서는 사랑스럽게 지내지만 또 한쪽에선 호랑이들처럼 공격하는데 그 공격부분을 록이 해소한다.

불만을 고양시키기도 하지 않는가. 지식인들이 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떻든 록의 저항 이미지는 그런 데서 나오는데.
맞는 얘기지만 내 경우엔 해소에 가까웠다. 내가 스무 살 무렵 아무도 못 말렸다. 록이 없었다면 한심한 건달이 됐을 것이다. 음악에 모든 정열과 힘을 바쳤기 때문에 내 모든 갈망과 분노가 해소되었다. 사실 어느 시대나 젊은이에겐 산다는 게 늘 힘들고 화나는 일이다. 젊은이들은 올라가려 하고 세상은 자꾸 젊은이들의 머리를 때리니까.

그런 젊은이들의 열정이 거대하게 폭발한 게 히피다. 선생은 한국 유일의 히피라고 불렸는데.

내 기억으로 그 히피가 65년에서 72년 사이, 7년 정도 되는데, 그 7년 사이에 음악이 다 나오고 패션이 다 나오고 문학이 다 나왔다. 히피의 캐치프레이즈는 역시 사랑과 평화다. 사랑과 평화. 내 생각에 한국은 히피정신을 겪지 못해 세대간, 사회계층간에 무리가 많다. 이슬람 빼놓고는 모든 서양사회, 심지어 일본까지 전부 히피를 겪는데 우리만 유신체제였고 새마을 운동을 했다. 참 억울하고 슬픈 일이다. 지금 젊은 세대는 인터넷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흡수하고 모든 최신 유행을 다 알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중간 역할을 하는 세대가 없다. 공무원들만 있다. 공무원들과 무슨 얘기가 되겠는가.

히피 세대는 오늘 서구 사회의 중추다.

완전히 그렇다. 지금 그 사람들이 50대, 60대 초반이니 완전히 서양사회를 움직이고 사는 거다. 클린턴도 히피였고 영국 수상 젊었을 때 사진 보니 나보다 머리가 더 길더라. 히피가 세상을 담당하고 있다.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위로 물결같이 춤추는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
- <바람과 나>



<바람과 나>에서 ‘무명 무실 무감’이란 뭔가.

나는 곡을 만들 때 항상 음을 먼저 따고 가사는 크게 신경을 안 쓰는 편이다. 무명 무실 무감... 하니까 발음이 되더라. 열 일곱 살 때 할아버지 집에서 조용히 살 때 만든 노랜데, 내가 정말 무명 무실 무감하더라. 모든 것이 제공되고 하는 일도 없고 가정교사까지 있고. 그러니까 내가 무명하고 무실하고 무감하더라. 사람들이 나더러 노자를 공부했느냐 묻기도 하는데 나는 동양철학 쪽은 공부가 거의 없다. 그저 맞아들어 가길래 붙인 거다.

선생은 선생의 음악보다 낙천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고통은 내 애인이고 고독은 내 정부다. 원래부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항상 너무나도 고통을 느낀다. 단순하게 생각을 못하는 게 내 고통이다. 화폐가 생겼다, 먹을 것이 많다, 오늘 영화 보러 가자. 나는 이게 안 된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애인에 정부라... 고통과 고독의 내용은.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세상은 나아질 수 있는데 왜 안 되는 걸까, 그런 생각만 하다보니 자꾸 슬퍼지고 끝없이 고독하게 되고 끝없이 고통스럽게 된다. 그렇게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그러니까 고통과 고독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30여 년 동안 그런 메시지를 노래해도 울림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데.

80여 곡 작곡하고 노래했지만 나 혼자 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 슬프다. 그러나 나는 한 인간이 역사를 바꿀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료가 없어도 상관없고 나는 그저 혼자 걸어가면서 사랑과 평화를 외칠 뿐이다. 그냥 그러고 싶다. 그러는 것만이 내 짧은 삶에 의미를 준다. 그래서 앨범을 8집이나 낸 거고.

음악은 인간의 구멍을 여는 거라는 선생의 말을 기억한다.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뜻이다. 늘 하는 얘기지만 나는 인간은 동물이라고 본다. 코 입 눈 성기 같은 구멍이 만족될 때 인간은 행복해진다. 코는 아름다운 냄새, 입은 아름다운 음식, 눈은 아름다운 그림, 성기는 아름다운 섹스... 인간의 모든 구멍이 열렸을 때 인간은 행복해진다. 음악도 그런 것이다.

성인 이후 선생은 스스로 안락한 환경을 버렸는데.

실은 안락한 것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인간은 필요성에 따라서 행동한다. 다들 love와 need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항상 need가 앞서게 마련이다.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 역시 필요하니까 사랑하는 거다. 나 역시 그런데, 내 need는 남들과 조금 다른 것 같다. 화폐보다도 안락한 생활보다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무대, 그게 내 need고 안락이다.
need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다.

그렇다. 나는 평생 화폐를 걱정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생활은 항상 되기도 했고. 기타를 칠 수 있고 샤워할 수 있으면 끝이더라. 그 이상 뭐가 필요한가. 난 차도 없다. 서울에서 차 준대도 안 받고 뉴욕에서도 없다. 골치 아프고 시간 낭비다. 내게 필요한 건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 한 둘 있고,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가볍게 산보할 수 있고 하루 두 끼 정도 먹을 수 있고 그 정도다. 사람은 미니멀리스트로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행복하다.

이번 앨범은 손무현씨가 프로듀스했는데 사운드가 뛰어나다. 그러나 그런 완벽한 사운드, 스튜디오 냄새가 물씬 나는 사운드는 선생과는 안 맞는다는 느낌도 든다. 편견인가.

그런 얘기를 듣는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일부러 그랬다. 거친 건 전에 많이 했으니까. <멀고 먼 길>에서부터 내 나름의 단계 같은 게 있는데 이번 단계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거친 사운드를 듣고 싶다면 과거 앨범을 아무거나 집어들면 거친 사운드 천지다.

이번 앨범은 자켓이 충분히 거치니 그쯤 하고 넘어가자. 그런데 데뷔앨범도 그렇고 선생은 인물도 좋은데 왜 자켓에 얼굴만 등장하면 찌그러트리는가.

모든 가수들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화장까지 하고 자켓 사진을 찍는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짓이다. 이번에 우는 얼굴을 한 건 두 가지 이윤데 개인적으로 진짜 울고 싶은 것이, 나는 이미 노년의 대문을 노크했다. 2년 전 후쿠오카 라이브 때 <스페어 파트>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노래 따라 가고 있다. 두 번째는 러시아에 우리 처하고 두 번 가봤는데(한대수의 아내 옥사나는 몽골계 러시아인이다) 러시아 사람들이 참 재미있더라. 누가 친구한테 전화해서 나 배 아프다 그러면 받는 친구는 넌 배 아프니, 난 배 아프고 팔 아프고 다리까지 아프다. 그럼 전화한 친구는 난 괜찮네 그러는 거다. 우리 사회에 우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7, 80퍼센트는 울고 사는데 가수가 울면 나 우는 건 별 거 아니다 생각할 것 아닌가.


난 잠자기가 무서워
난 일어나기가 무서워
밖에 나가기도 무서워
난 집에 있는 것도 무서워
-



이번 앨범은 “모든 게 무섭습니다”라는 선생의 대사로 시작된다.

나는 사회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무슨 학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항상 사회 공부를 한다. 도서관 가서 책을 읽고 사람들 이야기 듣고, 버스에서 이야기 듣고 서울 와서도 버스 지하철 다니면서 이야기 듣고. 그런데 공부하면서 얻는 결론이 우리가 무서운 시대에 왔다는 거다. 인터넷 세상, 디지털 세상에 왔는데 많은 나라가 셀 수 없이 핵을 보유하고 있고 환경문제도 해결 불가능하고 여자와 남자의 관계도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은 그런 세상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섭다, 오늘 세상이 무섭다는 말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연과 어긋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선생은 일생 동안 예술활동을 통해서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며 비타협적으로 살아왔다. 이번 앨범은 어렵게 냈다고 들었는데 타협할 생각이 들진 않았나.

아직은 그런 생각 해 본 적이 없다. 그냥 내게 음악이 있다, 발표하자, 그런 생각만 해왔다. 8집을 냈는데 모두 뮤지션이 달랐다. 내가 노래를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얘긴데 그건 큰 행운이다. 내가 단지 남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다면 그렇지 못했다.

선생은 이제 음악가로선 늙었다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밋밋해지는 것인 것 같다. 매사에 판단을 분명히 하는 일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말이다. 선생은 예외라 보여지지만.

아니, 나도 동물이다. 남자의 육체적 피크는 스무 살, 정신적 피크는 마흔 살이다. 50살 넘어서 이래저래 하는 건 다 개소리다. 다 지난 사람이 하는 소리다. 나도 개소리 안 하려 애는 쓰지만 개소리긴 마찬가지다. 서양 사회가 참 잘 돌아가는 것이 서양사회의 대기업 회장들이 30대 후반, 40대 초반이 많다. 얼마나 좋은가.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게 45세 때였다. 토니 블레어가 몇 살인가. 한국에서 그 나이면 아이일 뿐이다.

김대중씨나 김영삼씨가 40대 때, ‘40대 기수론’을 폈는데 그 세대가 30년이 넘도록 정체되고 있다.

그게 우리 나라의 문제다. 한국은 늙은이들이 다스리는 나라다. 내가 앨범 8개 만들면서 나와 같은 연배 뮤지션하고 한 적이 있나. 한 번도 없다.

처음엔 비슷했고 계속 나이 차가 벌어진다.
나는 늙어왔지만 계속 20대 아니면 30대 뮤지션하고 작업했다. 그 세대가 가장 창의력이 좋고 아이디어가 좋고 배울 게 있다. 우리 나라를 봐라. 젊은이가 늙은이에게 배울 게 하나라도 있나.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늙은이들에게. 절대로 늙은이가 젊은이한테 배워야 한다. 정치도 그렇지만 특히 방송국 신문사 같은 대중의 정신을 만드는 사람들은 3, 40대가 사장을 맡아야 한다. 나도 20대부터 40대까지는 제일 창작도 많이 했고 일을 많이 했고, 겁도 없었고 배운 것을 정직하게 써먹었다. 지금은 나이 드니까 폼잡는 부분이 있다.

한국인들은 너무 오랫동안 국민을 훈육의 대상으로 여기는 국가에서 살아온 덕에 젊은이들도 정신이 늙긴 매한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선생은 한국 군대에서 빳다를 맞은 최초의 뉴요커였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다른 병사들은 잘 버티는데 덩치 큰 내가 한 방 맞고 완전히 쓰러져버렸다. 알다시피 난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는 재가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할아버지는 한번도 내게 큰소리를 내거나 야단친 적이 없다. 그 때 빳다 맞고 바깥 세상을 처음 알았다. 그런 폭력은 단지 고문이다. 한국의 고문은 일본인과 미국인들에게 배운 것이고 월남전 때도 지독하게 써먹었다. 세상에 고문을 이겨낼 인간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인격을 그런 식으로 빼앗을 순 없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아! 가겠소 난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넘어 가겠소
여행 도중에 처녀 만나본다면 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은유했다 해서 금지곡이 되었었다. 코미디였다.

코미디였다. 스무 살의 나는 그냥 너무 화가 나서, 세상이 화가 나고 사는 게 화가 나서 물 좀 달라고 고함을 친 거다. 이번 8집의 <멸망의 밤>하고도 어느 면에서 일치가 된다. 그런데 당시에 물고문이 많았다. 상처가 안 남고 제일 고통스러우니까. 게다가 어느 홍콩영화에서 그걸 주제곡으로 써서 문제가 커졌다.

유신시대의 검열관들의 교양이라는 게 백치와 다름없었다. 정미조씨의 <불꽃>이라는 노래는 사회주의 혁명을 은유한다고 금지되고.

미치는 거다.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 시절을 다시 살라 하면 다 도망갈 거다.

선생은 음악가로서는 아주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 97년 후쿠오카 콘서트에 초청되면서 한국에서도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내가 뉴욕에서, 27살부터 거의 25년을 혼자 사는데 아무도 안 부르더라. 오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판을 만들자는 사람도 없고. 혼자 고생하면서 나자빠지고 방값 내느라 노동하고 그랬는데 다시 음악할 기회가 생기고 자서전까지 냈으니 나로선 행운이라 생각한다.

일본인들이 선생을 도운 셈이다.

일본 공연이 없었다면 잊혀진 사람이 되었을 거다. 아마 <행복의 나라> <물 좀 주소> <바람과 나> 이 세 곡은 이봉조씨의 <밤안개>처럼 남았겠지.

노래방에서나 들리는.

노래방에서나 들리는. 하여튼 일본 사람들 참 대단하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고 그렇게 어려운 초청을 했느냐. 그때 일본에 갔더니 한국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옛날 음반을 들고 와서 싸인을 받아가더라. 청계천을 뒤지고 지방까지 내려가서 사왔다는데 참 무서운 사람들이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전 부인은 다른 남자가 생겨 이혼했고 선생은 자살까지 생각했는데 그 여자가 나중에 곤란해져 선생께 도움을 구하자 지금 부인 옥사나와 사는 좁은 집에 거두어 보살핀 대목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해가 안 간다. 동양 남자는 여자가 성적인 배반을 했을 때는 용서하기 어렵다. 딴 남자와 게다가 서양 남자와 육체 관계를 맺고 돌아온 여자는 오히려 죽어 마땅하다는 게 동양적 사고방식인데, 그걸 아는 여자가 한국 핏줄을 가진 여자가 오죽했으면 돌아왔겠느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굉장한 고독을 겪고 보니까 한 사람과의 만남이 20년이 된다는 건 큰 의미가 있더라. 어떤 사람은 20년도 못 살고 죽는데 우리는 20년 동안 같이 살았다. 그러면 마지막 배반한 1, 2년을 생각하느냐 아니면 17, 8년의 아름다운 시간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건데 나는 17, 8년을 생각했다.

옥사나 씨가 불평하지 않았나.

러시아라는 나라가 워낙 복잡한 나라다. 한 나라가 시차가 열두 개나 되고 워낙 크다 보니 가족관계 복잡하고 웬만한 건 예사로운 일인 모양이다. 그 여자와 현재 육체관계를 안 맺고 있지만 밑에 흐르는 잔잔한 사랑이 없어지지는 않지 않는가. 그걸 이해하더라.

좋은 사람이다. 선생은 <노 릴리전>이라는 노래에서 종교에 강한 반감을 표현했다. 종교의 문제점에 대한 반감인가 종교 자체에 대한 반감인가.

현재 주류 종교들에 대해 모두 비판적이다. 거의 모든 종교 리더들은 사기꾼일 뿐이다.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맹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이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불행을 낳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종교는 정말 끔찍한 것이다.

한국인의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예수와 오늘 한국 교회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개의 교회는 예수가 성전에서 쫓아냈던 장사꾼들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를 빙자하고 파는 사기꾼들과 예수 자체는 구분되어야 하지 않나.

예수가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 덕에 또 다른 종교들의 같은 주장 덕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예수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총각으로 살다 죽었고, 상당히 웅변을 잘 했고, 사랑과 평화를 설교했고, 인기가 대단한, 오늘로 말하면 록스타였고, 참 좋은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을 지표로 삼는다.

나는 일단 머리가 기니까 좋다. 사랑과 평화. 예수는 그야말로 원조 히피다.

선생의 앨범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는 코소보 사태에서 착상했다 들었다. 우리 나라에도 그 이상 끔찍한 역사가 있었다. 광주에서 권력욕에 미친 군인들이 양민을 도살했고 4.3 항쟁에선 제주도 사람의 3분의 1이 죽었지만 여전히 진실 규명이나 책임자 처리가 안 되고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이유에서 건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거다. 종교 때문에, 사상 때문에, 어떤 이유든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의견 차가 있다면 돌아설 수 있는 권리는 있어도 의견 차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는 누구한테도 없다.

우리 현대사는 그런 일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 그런데 그런 걸 계속 받아들이는 게 습관이 되면, 모든 국민이 메조키스트가 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런 데가 있다. 그게 바로 소주다. 밖으로 나가서 싸울 수는 없지만 소주나 마시면서 속을 달래는 거. 분단에 대해 미국이니 소련이니 핑계를 대는데 다 우리 잘못이다. 우리가 38선을 받아들였다. 월남은 악착같이 싸워서 이겼지 않은가. 우리가 바보였다

남한 내에서도 전라도 경상도 나누고 학연으로 나누고 지연으로 나누고 하는 상태에서 통일이 어떨지 걱정스럽다.

참 답답한 일이다. 남북한 문제는 정치적으로는 빨리 해결될 수가 없고 그런 식의 통일은 일단 가능치 않다. 양체제의 지배계층이 피차 먼저 기득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은 연방제 개념으로 양 체제를 인정하면서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교류 이산가족이 왕래하면 사실상 이미 통일이 된 것이다. 야구할 때 홈런으로 이길 수도 있지만 히트로만 이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통일의 방법이 아니라 통일이다.


이 좆같은 세상 다 썩어가네 총알은 튀고 또 피바다 되어
비린내 나는 이 끝없는 전쟁 공해와 질투 또 오해와 권투
돈 좇아가다 다 지쳐 버렸네 어린애들은 다 미쳐 버렸네
-<멸망의 밤>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줄어들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장악했다. 최소한의 공정성을 보완하지 않은 자본주의는 단지 짐승의 법칙이다.

정말 큰 문제다. 신자유주의란 말의 중심은 스톡 마켓이다. 간단히 말해서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미국이 세계의 모든 증권시장, 모든 화폐를 장악하고 움직이는 거다. 오늘 1% 올리겠다 그러면 오르고, 내리겠다 그러면 내리고... 완벽하게 전세계를 다스리는 빅 브라더의 체제가 되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전세계가 빅 브라더의 꼭두각시가 된다. 우리는 이제 음악도 못 한다. 월스트리트에서 주는 음악에 우리는 춤만 춰야 된다. 그 쪽에서 탱고 하면 우리도 탱고 해야 되는 거다. 음악조차도 월스트리트에서 조종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들이 자신들 편안하게끔 코카콜라 펩시콜라 팔았듯 세상을 조종하려 하고 있다.

빈부격차가 아주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겉만 화려한 야만의 세상이 되어간다.

지구에 이렇게 많은 기술과 과학이 발달했고, 특히 농업 관계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사람들이 굶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내가 지금 묵고 있는 이 역삼동 단칸방 월세가 100만원이 넘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지구가 얼마나 큰가. 모든 상황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만들고 조종하는데 우리는 아무 의문도 없이 반항도 없이 복종하는 상태에 있다.

의문과 반항으로 해결되는가.

의문과 반항뿐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이 나와야 한다. 물론 시스템은 우리가 만드는 거다. 우리가 태어날 때 주어지는 게 공기, 물, 음식, 사랑, 네 가지다. 인간은 그 네 가지 가지고 사는 건데 이젠 그 네 가지를 모두 돈으로 사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러시아나 프랑스 혁명 같은 피가 흐르는 혁명은 바라지 않지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는 건 절대적이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이나 편안함을 인정한다. 자본주의적 경쟁이 인류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런데 이젠 자본주의가 우리를 해치고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지나친 자본주의다. 팔기 위해 과잉생산하고 그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쓰러져간다.

그런 생각을 하는 선생의 예술이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 발표할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대중들의 의식은 나아지고 있기도 하다. ‘서해 교전’이라고 들어봤나.

아, 들어봤다.

5년 전만 같았어도 그런 일이면 서울 사람들 모두 라면 사재기하고 도망갈 채비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들 텔레비전 보며 앉아 있었다. 성의식도 많이 변했다. 이른바 0양 비디오 나왔을 때와 백양 비디오 나왔을 때는 사람들 반응이 전혀 달랐다. 0양 비디오 나왔을 때는 ‘처녀가 품행이...’ 어쩌고 했었는데 백양 비디오에 대해선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훨씬 많았다.

남북이 갈라진 상태가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계속 받아 주니까 그런 상황이 유지되고 그런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 득세하게 된다. 비정상적인 건 당연히 정상화시켜야 한다. 섹슈얼한 문제도, 우리 나라의 큰 문제는 포르노 코너가 없다는 것이다. 포르노는 고상한 예술은 아니지만 필요하다. 섹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한국에도 음지엔 포르노가 많다.

양지에 있어야 한다. 어딜 가면 쇼도 볼 수 있고 영화도 비디오도 볼 수 있고 책도 살 수 있고, 인간의 근본을 숨기려 하니까 자꾸 관음증으로 가는 거다.
정치적인 파시즘이 후퇴하면서 그런 도덕적 규제로 정치적 규제를 보완하려 하는 것 같다. 궁금했던 게 있다. 돈이라는 말을 안 쓰고 굳이 화폐라 하는 이유가 뭔가.

어젯밤 뉴스를 보니 20개 사건 중에 19개는 다 돈하고 관계가 있더라. 화폐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돈에 대한 관념을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마누라도 여보 여보 하다가, 오랜만에 이름을 부르면 더 새롭게 와 닿지 않는가.

돈이라는 개념에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얘긴가.

그렇다. 돈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 <행복의 나라>



<행복의 나라>는 제목 그 자체로 화두다. 선생에게 행복의 나라는 무엇인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울타리 속에서 바깥세상 못 보고 살다가 세상에 나가 보니 사람들이 상당히 고통을 받고 살더라. 시타르타가 그랬던 식으로 나도 갑자기 느꼈다. 왜 이럴까. 밥도 못 먹고 옷도 못 입고 왜 이래야 할까. 특히 뉴욕 가고 한국 다시 들어오고 하면서 행복의 나라라는 것이 머리에 들어왔다. 불행한 인생이 워낙 많이 보였다. 나 자신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환경이지만 실은 고아와 다름없었는데 나의 그런 고통이 울타리 밖의 가난의 고통과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행복의 나라를 생각하게 되고, 울고 웃고 싶소 그랬다.

선생은 유토피아를 믿는 편은 아닌 것 같다.

<행복의 나라>를 만든 열 여섯 살 때나 지금이나 그렇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 노래를 만들고 불렀고, 또 아직은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불행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또 그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그 노래가 선생이 발견한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나.

글쎄, 우선 나 자신의 고통을 노래한 것이다. 나는 우선 나 자신을 위해 작곡한다. 히트하고 이런 건 생각 안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면 즐거운 거고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해 <행복의 나라> 작곡한 거고 사회의 분위기와 맞아 들어간 거고. 작곡가는 다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베토벤도 폴 메카트니도. 문제는 그 작곡가가 사회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개인적인 것에 사회적인 것이 반영되는 것 같다.
80년대 민중음악 하는 이들은 선생이 미국으로 간 걸 들어, 한대수는 행복의 나라로 가버렸다고 비아냥거렸다.

미국이 행복의 나란가. 행복의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나는 후배들에게 미국에 꼭 나가 보라 권하고 싶다. 음감을 얻기 위해서. 한국인이 미국음악을 배우면 미국음악에 한국색을 입힐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국제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선생의 노래엔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고, 선생은 예술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댄스 음악 좋다. 이쁜 사람 나와서 춤 잘 추고 패션 맞고 재밌지 않은가. 김현정이나 샤프처럼 노래가 좋다면 더 좋고. 거꾸로 생각해 봐라. 매일 텔레비전에 한대수 같은 사람만 나오는 상황을.

문제는 균형이다.

모든 사람은 나름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택시 기사들은 특별히 많고. 그런데 그 메시지를 정리해서 사회에 제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이 체제에서 돈을 벌기 위해선 무난한 게 제일이기 때문이다. 김부장과 악수하고 이부장과 악수하고, 마누라하고 식구들에게 잘하고, 그게 최고니까.

사회가 변한다는 건 현재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고치려는 노력으로만 가능한데 현재 한국 젊은이들의 예술은 현재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지나치게 없지 않은가.

청년들이 그런 얘길 해야 한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정치, 여성운동이나 인종이나 동성애 문제가 비틀즈니 밥 딜런, 지미 핸드릭스 같은 사람들이 말을 했기 때문에 발전했다. 십대나 이십대에서 그런 메시지가 안나온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나 같은 사람 혼자 아무리 ‘이 좆같은 세상...’ 어쩌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얘기다.
한국 사회는 비관적인가.

그런데 난 그렇게 본다. 우리가 워낙 오랫동안 한 50여 년 동안 너무 힘들게 압박을 받고 살다 보니까 올림픽 이후 허상적으로 선진국이니 뭐니 해서 한동안 잔치를 벌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흑인들이 할렘에서 출세하면 금을 사서 주렁주렁 차고 다닌다. 워낙 못살다 보니 자기가 부자가 되었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게 한 십여 년 되었으니 이제 곧 현실을 다시 바라보는 분위기가 생길 거라 본다. 내가 만난 젊은이들 중엔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참 많았다. 길게 보면 절대 비관적이진 않다.

선생의 낙관주의를 존중한다. 9집을 기다린다.



한대수 연보

1948 3월 12일 부산 출생.
1955 부산 남일국민학교 입학.
1958 뉴욕 할렘의 P.S 125 초등학교로 전학.
1964 부산 경남고등학교 입학. 미국으로 이주.
1965 뉴욕 롱아일랜드의 앨프레드 G. 버너 고등학교로 전학.
1966 뉴햄프셔 대학에서 수의학 전공.
1967 뉴욕 사진학교로 옮겨 사진 공부를 시작.
1968 한국으로 돌아와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데뷔.
1969 이화여대, 서울대, 서강대, 부산대,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
1974 첫 음반 <멀고 먼 길>(신세계) 발표.
1975 두 번째 음반 <고무신>(포시즌)을 발표했으나 모두 압수당함.
1977 미국으로 이주.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활동. 록 밴드 ‘칭기즈칸’을 결성.
1989 김명신과 이혼. <무한대>(신세계) 발표.
1990 <기억상실>(뮤직디자인) 발표.
1991 <천사들의 담화>(삼화> 발표.
1992 옥사나 알페로바와 재혼. 사진집 출간.
1996 시 으로 워싱턴의 국제시인협회가 주는 편집인상 수상.
1997 ‘크로스비트 아시아’의 후원으로 후쿠오카에서 공연. 시집 . 사진•시집 (black book) 출간.
1998 자서전 <물 좀 주소 목 마르요>(가서원) 출간.
1999 <1975 고무신-1997 후쿠오카>(도레미),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감미레코드) 발표. 사진•시집 (blue book) 출간.
2000 <기억상실/천사들의 담화>(도레미) 재발매. <마스터피스>(신세계) 발표.
8집 발표.
2001/02/09 22:22 2001/02/09 22:22
2001/01/27 22:11
한달 전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처가인 전주로 내려보내고 사무실을 겸하는 방을 구해 살게 되었다. 한국춤을 하는 아내는 늘 창작춤에 열중하다 서른 다섯이 되어서야 전통춤의 깊은 맛을 알게 되었다. 창작춤에서 전통춤으로 관심을 바꾸는 일은 적어도 아내의 경우 절대적인 정신적 안식을 가져다 주었다. 아내의 관심은 춤계에서 춤 자체로 바뀌었다. 어떤 경우든 욕심을 버리면 사람은 평화를 얻는다.

몇 달 전 나는 아내에게 1, 2년 예정으로 전주에 내려가 살면서 전라도의 전통춤들을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내가 가질 유익 외에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김단(8살, 지난번 나온 김건의 누나)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지방이 서울의 보조품일 뿐인 세상에서 아이가 일생을 지방에서 살기 어렵다면 어린 시절 한 때라도 지방에서 살기를 바랬다. 그것은 아이의 삶에 분명한 유익을 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 살게 되었는데 희한한 일은 이제 나는 애초 계획에 없던 살림을 하게까지 되었다. 나는 밥을 지어 먹고 빨래를 하며 살고 있다. 애초 살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표면적으론 시간적 효율성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남자라서일 것이다. 알다시피 남자의 경우 살림은 전적으로 여자의 도움을 받는다.

내가 내 살림을 직접 챙기게 된 건 주로 인근에 사는 한 선배 덕이다. 그는 15년 가량 혼자 살고 있는데 내가 한달 전 근처로 이사하자 나를 앉혀놓고 살림의 중요성을 몇시간 동안 피력했다. 그의 말의 골자는 살림이라는 게 효율성으로 따질 수 없는 사람의 근본이라는 것이었다. 혼자 사는 그의 큰 냉장고 두 대엔 온갖 음식 재료들이 알뜰하게 들어 차 있었다.

나는 당시 그의 말을 혼자 사는 요령이나 지혜 쯤으로 받아들였지만 손수 밥을 짓고 빨래하는 일을 거듭하면서 나는 내가 놀랄 만큼 안정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몇해 동안 늘 일에 치어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살아온 나는 급기야 감당할 수 없을만치 고단해져서 몇가지 일들을 어거지로 정리하기까지 이르렀는데,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밥짓고 빨래하는 일에 할애함으로써 외려 편안해진 사실은 참으로 의외였다.

현명한 사람들은 늘 밥이 하늘이고 살림은 사람의 기본이라 말해왔다. 그러나 그런 멋들어진 주장을 하는 건 대개 현명한 남성들이었지만, 손수 밥을 짓고 살림을 하는 일은 어떤 경우든 여성들(현명하든 그렇지 않든)의 몫이었다. 일반적으로 살림은 여성의 일이고, 일반적으로 여성에 비해 남성들의 정신이 허풍선이 같은 주요한 이유 또한 거기 있는 것 같다.

(여성신문)
2001/01/27 22:11 2001/01/27 22:11
2001/01/07 22:09
며칠 전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나를 김건이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빠 뭐해요?" "설거지." "왜 남자가 설거지를 해요?" "남자는 설거지 하면 안 돼?" "설거지는 여자가 하는 건데." "설거지는 남자가 할 수도 있고 여자가 할 수 도 있는거야." "아닌데 여자가 하는 건데..."
김건의 볼을 감싸쥐며 "어휴, 이 마초 자식."하고 웃는데, 보고 있던 아내가 "아빠 닮아 그렇지."하며 또 웃는다. 아내가 나를 마초라 하는 건 그리 나쁜 뜻만은 아니라 믿지만(적어도 내 생각엔) 내가 내 또래의 한국남성 일반보다 좀더 마초 경향을 가진 건 부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특히 남자 후배들과의 관계에서 그런 경향이 지배적인데 녀석들과 대할 때 나는 보통때의 나보다 약간 불량해진다. 녀석들은 나를 "형님"이라 부르곤 한다.
반장난이긴 하지만 책상에 붙어 앉아 어줍잖은 글쪼가리로나 세상과 대화하는 나는 한편으로 그런 유치한 장난을 즐기는 게 틀림없다. 10대의 한 시절을 마초 정신(이른바 사나이 정신)을 숭상하며 보냈고 그 체험은 오늘 내 정신속에 거부할 수 없이 뿌리내려 있다. 여러 말이 필요하지 않은, 모든 복잡한 가치들이 한마디로 판가름하던, 이른바 의리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그 시절과 그 시절의 인간들을 나는 가슴아프게 추억하는 모양이다.
이른바 지식인 노릇을 하고 사는 현재에도 내 그런 경향은 발견되곤 하는 모양이다. 강준만 선생은 얼마 전 나를 다룬 글에서 "김규항은 좋은 말로 사나이다운 의리와 정이 있는데 바로 그 점이 냉철한 판단을 그르치기도 한다"는 지적을 했고, 딴지의 김어준은 어디서든 기회만 있으면 "규항이 형은 실은 마초이며 보통 마초들과 다른 점이라면 조금 섬세하다는 정도"라고 놀리곤 한다.
나는 그런 지적들을 흔쾌히 인정하고 내 정신 속에서 근절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문제는 내 그런 노력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할까. 머리속의 정리는 그럭저럭 되었지만 내 속 깊이 스며든 정서적 흔적들을 정리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마초' 이상을 달성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 설거지와 관련한 김건과의 대화는 좀더 이어진다.
"김건, 설거지를 남자가 하는 건 이상한 게 아냐." "그림책에도 설거지는 다 여자들만 하는데..." "김건, 어제 엄마가 피곤하셔서 김건이 장난감 다 치웠다며." (자랑스런 얼굴로)"히히." "그래, 엄마가 피곤한데 설거지는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 아빠가 안 하면 김건은 좋아?" (주먹을 흔들며)"내가 아빠 때려줄 거요." "어휴, 이 마초 자식."하며 나는 김건을 안고 볼을 비비고 김건은 자지러지며 아내와 김단(김건의 누나)은 두 마초를 바라보며 웃는다.

(여성신문)
2001/01/07 22:09 2001/01/07 22:09
2000/12/30 17:27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과 장이모의 <인생>을 비디오 테이프로 떠놓고 수시로 보는 건달이 올해 본 영화들에 적어 본 건달의 2백자평. 건달은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는 일이 거의 없고(늘 뒤늦게 비디오로 보고) 꼭 봐야 할 영화를 빠트리기 일쑤(올해의 예로는 JSA)이나, 영화는 물론 모든 예술 작품 평가에 객관성이나 권위 따위는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나름의 고집도 있다.

<박하사탕>. 초록물고기를 보며 눈물을 훔쳤던 건달은 이 저명한 영화에 적잖이 실망. 모범생 출신들에게 벅찬 감동을 줄 만한 지점이 세상의 쓴맛을 조금이나마 보아 온 건달에겐 피할 수 없는 거북함으로 다가왔다. 건달 생각에 이창동은 열등한 예술 장르 한국영화를 적어도 한국소설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감독이지만 <박하사탕>을 세상의 상찬만큼은 인정할 순 없다. 이창동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 하는 영화.
<오 수정>. 건달 생각에 홍상수적 리얼리즘은 리얼리즘 너머의 리얼리즘. 홍상수적 리얼리즘이 포획하는 현실은 현실 속의 전형적인 지점을 취해 보다 전형적인 현실로 제시하는 리얼리즘 방법론으로 포획 불가능한 자디잔 현실들이다. 홍상수가 제 영화에 사회를 담지 않으려 하지 않는 건 사회적 손실이고 건달을 약오르게 하지만 <오 수정>은 어떤 사회파 영화보다 건달을 사회적으로 번민하게 한다. 영화에 지고도 즐거운 영화.

<주유소습격사건>. 어떤 자식이 이 영화에 현실성이 없다고 했던가. <주유소습격사건>이라는 우화는 온통 가슴 저린 현실성을 기반으로 한다. 어떤 자식이 그 청년들이 '그냥' 주유소를 습격한다고 비난했던가. 주유소는 한국의 은유이며 그 청년들이 '그냥' 주유소를 습격하는 유일한 이유는 한국이 '그냥' 습격 당할 만한 곳이라서다. 고개를 숙여 한국의 하반신을 보라, 과연 그러하지 않은가. 어른을 위한 정치 동화의 가능성을 지닌 영화.

<반칙왕>. 한국제 예술작품의 최대 결점은 문명비판적 통찰. 김지운은 언젠가 채플린의 페이소스를 한국화하는 데 성공할 지도 모른다. 마스크를 쓴 한 사무직 노동자 청년의 프로레슬링 에피소드를 통해 유례없는 천민 자본주의와 유례없는 전근대 정신에 사로잡힌 한국 사회를 조롱한다. 장항선이라는 최고의 캐릭터 배우와 왕정이었다면 작위를 받았을 신구라는 장인 배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건달을 행복하게 하는 영화.

<하면 된다> 종로에서 만난 후배 건달의 영화나 보자는 제안에 나쁘지 않은 코미디라는 <씨네21> 기사의 기억으로 화답했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긴 영화. 이 영화에 지뢰 표지를 붙이지 않은 걸 보면 <씨네21>은 바야흐로 영화판의 조선일보로 가고 있는지도. 건달 생각에 영화는 90분이 필요한 영화와 90분이 필요하지 않은 영화로 나뉘는 바 이 영화는 후자의 모범이다. 몇몇 배우들의 분투와 선배가 고른 영화에 비위를 맞추려는 후배 건달의 분투만이 눈물겨웠던 용서할 수 없는 졸작 영화.

<다찌마와 리> 건달은 건달을 알아보는 법. 가방끈이 짧다는 류승완의 신분적 장점은 대중의 감성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류승완의 작가적 강점과 직렬한다. 건달 정신은 모범생의 머리통을 통과할 때 키치라 불리는 박제가 되고 건달 청년의 몸을 통과할 때 살아 숨쉬는 예술이 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대한 모범생들의 주제넘은 극성에 쑥떡을 먹이는 류승완의 흐뭇한 소품. 이름하여 한국 근대 건달 박물관 영화.

2백자평 후기.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는 일이 거의 없는 건달이 애니메이션들만큼은 모조리 극장에서 본 이유는 건달의 딸이 그 애니메이션들의 비디오 출시를 기다릴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벅스 라이프> 정도면 비디오로 보긴 아까운 데가 있기도 했거니와, 내년부턴 애니메이션이 아니어도 극장에 자주 나가리라 건달은 결심했다. | 씨네21 2000년_12월
2000/12/30 17:27 2000/12/30 1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