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1/05 17:24
텔레비전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어머니'(김혜자씨가 분한) 캐릭터의 변화를 보면 그래도 세상은 진보한다는 생각이 든다. 초기 <전원일기>의 어머니 캐릭터는 많이 배우고도 농부의 아내로 사는 '특별한' 농민 여성이었고 오늘 <전원일기>의 어머니 캐릭터는 그다지 배우지 못한 '평범한' 농민 여성이다. 20년이 넘은 장수 드라마고 작가도 여러 번 바뀐 걸로 알지만 어머니 캐릭터의 그런 변화는 세상의 진보에 조응한 것이다.

예술작품 속에서 '고귀하지 않은 계급'의 캐릭터를 그릴 때 '평범한'(전형적인) 캐릭터를 피하고 '특별한' 캐릭터를 사용하는 건 한 인간의 가치를 신분으로 결정하는 전근대적 정신의 반영이다. 그런 전근대적 정신은 예술작품 속에서 '평범한' 농민을 주인공으로 사용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농민여성이되 '원래 신분은 고귀하나 부러 자신을 낮춘' 농민여성이라는 희한한 캐릭터가 사용된다.

'고귀하지 않은 계급'의 캐릭터를 그릴 때 '평범한'(전형적인) 캐릭터를 피하고 '특별한' 캐릭터를 사용하는 건 예술작품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사' 가수, '학사' 권투선수, '학사' 호스티스니 하는 기이한 호칭들을 기억하는가. 전근대적인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가수나 권투선수나 호스티스 같은 '고귀하지 않은 인간'을 공중의 의제로 삼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학사라는 사실이 노래부르거나 권투하거나 술시중 드는 일의 전문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알지만, 가수나 권투선수나 호스티스에서 학사 가수나 학사 권투선수나 학사 호스티스를 달리 보는 일은 가수나 권투선수나 호스티스를 계속 경멸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그런 점에서 <전원일기>에서 '어머니'(김혜자씨가 분한) 캐릭터가 많이 배우고도 농부의 아내로 사는 '특별한' 농민 여성에서 그다지 배우지 못한 '평범한' 농민 여성으로 변한 사실은 작지만 의미심장한 일이다.('전원일기'라는 타이틀마저 '농민일기' 쯤으로 바뀐다면 더욱 좋겠지. '전원'이라니, 그런 돼먹지 못한.) 가장 느리게 진보하는 정신인 공중파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 일어난 그런 변화는 한 인간의 가치를 신분으로 결정하는 전근대적 정신이 청산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문제는 그런 청산이 진정한 인간해방의 방향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신분구조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특히 한국 같은 전례 없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의 신분을 결정하는 전적인 기준은 돈이다. 돈이 신분을 사들이고 돈이 신분을 결정한다. 한국의 일류대학들은 날이 갈수록 부르주아의 자식들로 채워져 간다. 논술이니 수능이니, 대학입시의 방식이 개선될 수록 대학입시는 부르주아의 자식들에게 유리해져만 간다. 대학을 우골탑이라 부르거나 노동자의 자식이 각고의 노력으로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드라마는 이미 지난 시절의 전설이다.

돈은 암세포처럼 한국의 정신세계를 지엽말단까지 잠식해간다. 입시위주의 교육을 혁파한다는 '열린교육'마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어간다. 저명한 열린학교는 부르주아의 자식들로 채워져 간다.(물론 부르주아들이 제 자식을 거기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제 자식이 두들겨 맞지 않고도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보고 때문이다.) 진짜 무공해 먹거리가 부르주아의 식탁으로 직송되듯 진짜 열린교육은 부르주아의 자랑스런 가족사진을 장식하는 일에 봉사한다. 한국의 1세대 부르주아들은 대개 비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부르주아의 자식들은 부자에다 학벌까지 좋으니(혹여 입시에 실패하면 미국 대학으로) 그들은 이제 그 고귀한 신분을 당당히 주장한다.

신분은 철저히 관철되고 철저히 세습된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아파트 평수별로 교우하고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애당초 불가촉 천민이다. 신분은 철저히 관철되고 철저히 세습된다. 부르주아의 인생은 먹거리에서 자식 교육까지 자손만대 '열려' 있고 노동자의 인생은 먹거리에서 자식교육까지 자손만대 '닫혀' 있다. 신분은 철저히 관철되고 철저히 세습된다. | 씨네21 2000년_11월
2000/11/05 17:24 2000/11/05 17:24
2000/10/27 17:23
여섯 살부터 초등학교 4학년초까지 살던 대구의 그 마을은 시내 나갈 때면 "대구 간다"고 하는, 과수원을 가진 한두 집을 빼곤 살림살이가 형편없는 대구의 동쪽 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초 어느 날 담임 선생이 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교단에 서서 자기 소개를 하는 그 아이가 내 가슴에 빛으로 박혔다. 하얀 피부와 조용한 목소리의 그 아이는 아무 데서나 엉덩이를 까고 오줌을 누는, 장난치는 남자아이를 끝내 추적해 반죽음을 만드는, 그 마을 여자아이들과 달랐다. 내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나라 전체가 병영이었던 시절이었고 반장이었던 나는 선생과 급우들 사이에서 얼마간의 권력을 가졌다. 나는 내 자리를 그 아이의 근처로 옮기는 일에 기꺼이 그 얼마간의 권력을 사용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이야기만 해도 급우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던 시절 초등학교 4학년의 사랑이란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수줍게 미소짓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해질 무렵의 들녘을 그 아이와 다섯 걸음쯤 떨어져 걸었다. 낭만적인 날들이 흘러갔다.

4학년 초 어느 날 밤 꿈을 꿨다. 멀리서 그 아이가 나를 향해 달려왔고 나는 그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아이가 내 손끝에 닿을 무렵 그 아이는 슬픈 눈이 되어 갑자기 돌아섰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아이를 좇으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아이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잠에선 깬 나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아침 밥상 앞에서 연신 헛기침을 해대던 아버지가 몹시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항아, 오늘 대전으로 이사간다. 선생님께 인사하고 오너라."

그 아이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담임 선생과 급우들에게 건성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한참을 교문 앞에서 서 있었다.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짐칸에 얹은 독 안에 숨고 나와 동생과 어머니를 운전사 옆에 태운 트럭은 대구를 빠져나와 비오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을 아는가. 와이퍼에 밀려나는 빗물만 쳐다보는 나를 어머니가 흘끔거리며 염려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랬듯 나는 교단에 서서 내 소개를 했고 그 아이가 없는 날이 시작되었다. "머나먼 타국에 계신 것도 아니지만 당신과 나 사이가 너무도 멀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미조의 노래는 열한 살 짜리 소년의 가슴을 수시로 찢었다. 누구에게도 여자아이가 보고 싶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고 나는 5학년이 끝날 무렵까지 거의 밥을 먹지 않았다. 나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 아이를 생각하며 아득해지는 순간이 백번에서 아흔아홉번으로 아흔아홉번이 아흔여덟번으로 그렇게 줄어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해 두해 시간이 흘러갔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비로소 그 아이의 주소를 알아낸 나는 십여 년의 세월을 열 장의 편지에 담았다. "혹시 나를 기억하는지..." 열흘쯤 지난 어느 날 오후 우편함에 그 아이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며칠을 앓고 학교에 가보니 네가 없었어..." 스무 장에 가까운 그 아이의 편지를 가슴에 대고 나는 처음 눈물을 흘렸다. 다음 해 봄 어느 날, 불현듯 그 아이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내 얘기를 전해 들었다며 내 손을 꼭 쥐었다.

그 아이는 이틀 전 신입생 엠티에 갔고 오후 다섯 시쯤 돌아온다 했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 아이의 어머니가 건네 준 사진첩을 펼쳤다. 낯모르는 아름다운 처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그 처녀가 내가 그토록 아프게 추억해온 그 아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조금씩 두려움에 휩싸여갔다. 그 아이가 돌아올 다섯 시를 기다리던 나는 어느새 다섯 시까지 그 아이가 돌아오지 않길 빌고 있었다. 괘종시계가 다섯 시를 알리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집을 빠져 나와 기차에 올랐다. | 씨네21 2000년_10월
2000/10/27 17:23 2000/10/27 17:23
2000/10/16 22:35
모든 것들은 똑같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각각의 것은 좋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어우러짐도 매우 좋다”. 이 말은 인간 권리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차라리 예술가에게 이르는 미학적 담론에 더 가깝다. 특히 예술가에게 인간 개개인은 하나의 세계를 재생시킬 수 있는 믿음과 통찰의 마지막 목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가장 중요하며 그 생명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다양성은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권리인 것이다. 각각의 생명으로서 작은 소우주인 인간은 전체 세계질서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 앞에서 연민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정신이다. 타자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느낌을 함께 한다는 뜻을 갖는 낱말인 ‘연민’은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이며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분노와 증오의 광범위한 영역이기도 하다. 물론 이기주의적인 인간형인 예술가들에게 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나눈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성을 고립, 차단시켜 그 속에서 죽게 하는 것보다는 고통을 나누면서 인간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생명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또다른 역할이기도 하다. 우리들, 적극적으로 ‘연민’하지 않고는 다가오는 21세기도 역시 핏빛에 잠겼던 20세기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
(홍성담, ‘인권-저항과 명상으로부터’에서)

5월 광주의 미술가, 지난 20여년 동안 자신의 예술로 역사와 불화해 온 최고의 리얼리스트, 홍성담을 만났다.

먼저 양해를 구할 건 이 인터뷰 역시 광주 얘기부터 할 거라는 점이다. 선생을 만나면 다들 광주 애길 꺼낼 테니 부담스럽겠지만 여전히 홍성담 하면 광주부터 떠올리게 된다.

내 업보다. 아무래도 거기서 실마리가 풀리니까.

광주를 떠난 건 언젠가.

올라온 지 3년 째다. 광주를 떠나는 건, 내 삶의 한 자락을 묻은 광주를 떠난다는 건 나에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 5월이 고여서 부패하고 타락해가는 걸 보면서 그걸 막는 일은 몇몇 사람들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어찌 보면 그도 역사 발전의 한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내게서 광주를 떼는 일이 필요했고, 덧붙여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가장 극대화된 형태인 서울을 화폭 안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광주를 뗀다는 말은.

멀리서 광주를 바라 볼 기회가 필요했다. 워낙 내가 광주사람이라 광주 5월 이전부터 활동을 해왔고 광주항쟁 때 나는 시민군이었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5월과 관련돼서 한 중심에 내가 놓여 있었는데 이젠 그걸 좀 객관화시켜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그게 오히려 광주에도 도움이 되겠다, 이런 생각들이 서로 얽혔다.

“광주 열흘간의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평생 행복할 수 있다”는 선생의 말을 기억한다.

광주항쟁은 그냥 시위가 아니라 짧은 꼬뮨이이었다. 우리 나름대로 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시민들은 시민군을 우리를 지켜주는 사람들이라 여겼고 시민군은 우리가 총을 들고 광주시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꼬뮨아닌가. 시민군을 위해 시민들이 먹을 것을 해다 나르고 스스로 질서를 지키고 청소하고 병원을 열고 외부하고는 통신이 두절됐지만 내부에서는 통신이 흐르고 그랬으니 꼬뮨 아닌가. 그뿐인가. 버스 번호판을 다시 통일해서 매겨 버스가 다니고. 번호는 내가 뺑기통 들고 다 매겼다.

교통부장관이었다.

당연히. 내가 미술 페인트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 광주사람들은 환각에 빠져서 그랬다 하더라만 그런 환각이라면 나쁠 게 뭔가. 우리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그러지만 요즘은 옷깃만 스쳐도 기분 나쁘잖은가.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조차도 기분이 나빠하지 않나. 그 열흘 동안에는 누가 나를 쳐다보면 인사하기 바빴다. 누구든지. 요즘은 모르는 사람이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저거 돌았구만 그러지. 누구든 인사하면 다 받아주고 스치면 그것이 기쁘고 살냄새가 나니까 안고라도 싶고 마주보는 사람들이 다 기뻐 즐겁고. 자기가 가진 걸 나누어주는 기쁨이 그때 만큼 강했던 적이 없다. 열개를 갖고 있으면 다섯개는 남과 나누어야 한다는 제도는 그런 데서 저절로 생기더라. 자기 걸 주지 못해서 다들 안달이었다. 이런 세상을 우리가 열흘간 살았으니 다 환각이지. 그 열흘간의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평생 행복할 수 있다.

그 열흘이 선생에게 남긴 건 뭔가.

그 열흘간의 경험을 온 세상에 이루는 일이다.
올해 5월은 광주항쟁 20주년이라고 많이들 떠들었지만 따져보면 한국인들의 광주에 대한 분명한 반성은 없었다. 항쟁 당시야 모든 언로가 차단되고 분위기도 엄혹하고 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후의 과정을 본다면 말이다. 대개의 한국인들은 폭도라 하니 폭도라 생각했고 항쟁이라 하니 항쟁이라 생각할 뿐이다.

맞는 얘기다. 결국 지역감정인데 우선 광주를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정권을 잡거나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광주를 말하고 선택한 부분들이 광주를 끊임없이 지역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 하나는 영남사람들의 역사적 컴플렉스다. 영남 사람들이 30여년간의 장기독재 속에서 충분히 수혜를 받았다면 이런 정도의 지역감정은 안 생겼을 거다. 그런데 거기서도 수혜받는 사람은 극소수고 보통사람들은 호남이나 똑같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역사의 앞켠을 이끌어갔다는 자부심과 역사의 뒤안을 끌어갔던 게 광주라는 컴플렉스가 동시에 존재하면서 광주를 끊임없이 지역화시킨다.

광주 5월이 고여서 부패해간다고 했는데.

내부의 문제는 광주가 보상을 받고 명예회복을 하는 과정에서 광주가 폭넓은 자세를 보이며 전국민들과 같이 풀어나갔어야 하는데 광주 혼자의 성과로 강조했다. 광주가 보상을 받은 게 광주의 힘으로만 보상을 받은 건 아니었지 않나. 그 동안 끊임없이 자기몸에 불댕기고 죽었던 사람들, 영남 쪽에서 광주문제로 학생들 데모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 사람들과 명예와 보상을 나누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의 헤게모니를 갖기 위해 싸움을 벌이면서 광주 당사자들이 광주시민들로부터 멀어져버리는 결과까지 왔다 그래서 광주가 시민들을 동원하기 위해서 관변 축제화할 수밖에 없는, 뒤풀이 개념의 축제화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축제의 뒤끝이 결국 386 정치인들이 사고를 내는 결과까지 왔다. 그런 축제라면 그게 당연한 결과인데 특별한 결과처럼 얘기된다. 그런 축제의 뒤끝이란 항상 허무한 거 아닌가. 술에 취했다 다음날 깨어나면 참 허무하지 않은가.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지역문제에서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젠 지역차별의 얼개가 대충 드러났는데 이를테면 부산에서 정형근 같은 사람이 당선되고 하는 일은 참 이해가 안된다. 김대중이 부산 작살낸다고 부추기는 놈들 탓이 크지만 이쯤 되면 부산 시민들에게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그 사람들 탓하기 전에 김대중 정권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지역감정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김대중이라는데, 그럼 그 지역감정이 갖고 있는 허위와 진실을 다 알고 있는 사람 아닌가. 김대중 스스로가 지역감정을 타파할수 있는 탕평책을 거대하게 전민족적 차원에서 제시를 했어야 했는데 그걸 못하고 말았다.

계속 피해갔다.

피해갔다. 정권 후반기 들어서니까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신들을 권력의 정면에 배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미 실기했고 결국 그런 거 하나 해결할 수 없었던 게 DJ였다. 우리 현실정치의 한계다.

그런 무기력을 아쉬워하는 건가 비난하는 건가.

비난받아 마땅하다. DJ뿐 아니라 소위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지역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대안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김대중을 87년부터 비판적으로 지지해왔지만 지역감정조차 해결하지 못했다는 부분에 대해선 DJ가 정권을 유지하는 동안 강한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 그래야 차기 현실정치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가진 사람이 나서게 될 거 아닌가.

여기저기서 많이들 부를 텐데 일하는 데 지장은 없나.

엣날에는 그림을 참 쉽게 그렸다. 모든 게 너무 명료했고 고민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내 스스로 되물어서 계속 생각하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또 그것들을 종합해서 삭혀내고 하려니까 쉽지가 않다. 그러고 있는데 운동단체 같은 데서 일이 있으니 와달라 전화라도 오면 확 신경질을 낸다. 나 좀 제발 가만 놔두라고 광주에서 서울로 도망올 때는 내 그림 그리자고 왔는데 여기서까지 나를 찾냐고 신경질을 내는 거다. 그러고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이럴 일이 아니지 하고 할 수 없이 다시 가는데 가보면 또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요런데 다니냐 놀리기도 하고. 그래도 내가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작업실에 앉아 있을 때와 달리 현실이 확 느껴진다. 현실은 예술가의 가장 큰 스승이다.

80년대는 진보의 시대였고 선생은 예술가로서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80년대의 90년대로의 전환은 개연성이 부족한 청산이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가 진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내부를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현실과 미래를 알 수 있는 건데, 그 당시에 들여다보기는 했는데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당시의 회의 같은 것을 말하는 건가.

내가 88년에 독일에 8개월 정도 초청을 받아서 그림도 그리고 여러 일들을 하면서 소위 잘 나가는 독일 유학생들 면면을 다 만날 기회가 있었다. 아마 독일유학생이라면 최소 5년 이상씩 독일에가 있었을 텐데, 그 당시 동독에서 도망쳐 나온 지식인들 일주일에 얼마씩 동사무소에서 받아서 술 사가지고 아침부터 술 마시는 알콜릭이 된 동독지식인들을 안 만나본 유학생들이 없었을 것이고 베를린 안 가본 유학생들이 없었을 거다. 서독에서 베를린을 가자면 동독의 고속도로를 통과한다. 우리는 동독이 혹 못살더라도 최소한 계획경제이면서 계획도시들이 서있기 때문에 환경문제 정도는 잘 해결돼 있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않았가. 그런데 내가 몇번 동독땅을 지날 때 보면 한눈에 죽은 땅이었다. 공기도 형편 없고 뭔가 까라앉아 있고 여러 풍경들이 한눈에 절대 성공한 사회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몇달 있으면서 그런 걸 느꼈는데 유학생들은 얼마나 그걸 잘 느낄 수 있었겠는가. 특히 학생들이야 동독도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동독텔레비젼 다 개방되어 있고 동독을 손금 들여다보듯 보고 있었을 거 아닌가. 그런데 그 유학생들이 자기 친구들이 한국에서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들을 하고 있으니까 아르바이트로 동독에서 나온 여러가지 거대담론 책들을 번역해서 보내고 그럼 그것이 한국에선 맑시즘에 대한 가장 새로운 해석인 걸로 알고 아는 척 까불어댔다. 내가 그걸 보고도 여기 와서 얘기할 수가 없었다. 몇번 얘기를 꺼냈더니 나보고 다 미친놈이라더라. 니가 동독을 직접 가봤냐고 하는데 내가 가봤더라도 가봤다고 할 순 없잖은가.

우리가 현실사회주의의 실체를 나중에야 알게 된 건 불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청산도 빨랐던 것 같다.

내가 독일을 몇 개월 생활할 때 느꼈던 것. 동구가 무너져가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걸 내가 좀더 강력하게 얘기를 못했던 것 이런것들이 전부 우리 안에 회한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제 21세기를 넘어가는데 또 우리 내부의 그런 감춰진 진실들이 없는지 또 한번 되돌아보고 싶기도 하고.

선생은 예술가로서 운동을 지원했다기보다는 운동가였다. 운동을 위한 예술이라는 게 이른바 전체운동에 복무하고 지도되는 도구인데, 예술가 입장에서 보면 예술적 가능성의 아주 일부만을 사용하게 되고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예술을 풍성하게 수용할 기회가 유보되는 면이 있다. 물론 그런 아쉬움은 80년대 얘기고, 90년대 2000년 들어서선 오히려 지나치게 반대편향으로 가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똥을 싸면 그냥 물을 안 내리고 자기가 싸놓은 걸 한번 되돌아보고 그러지 않는가. 그런데 80년대에 우리쪽 예술을 했던 사람들이 되돌아보기는 커녕 똥구멍을 닦을 새도 없이 새옷 갈아입고 나왔다. 하나의 패션으로만 이어지는 거다. 80년대 내내 개인적으로는 내가 예술을 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항상 있었다. 시간에 쫓겨 일하면서도 늘 내가 궁극적으로 해야될 게 이게 아닌데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가야될지 그런 게 있었다.

운동에서는 쓸데없어 보이는 그런 자기성찰들이 사실은 운동의 생명줄인 것 같다. 그때 선생의 작업을 정치적으로 비판했던 사람들 가운데 오늘 오른쪽으로 간 사람이 많은 걸 봐도 그렇고.

지금 만나면 그 이야기 하면서 웃고 그런다. 에센이나 마야코프스키가 혁명 이후에 자살을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민중미술이라고 말하지만 안락함 속에서 지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선생처럼 실제 활동가로서의 예술가도 있었다. 오늘 민중미술을 모두 한동아리로 보는 경향이 억울하진 않나.

억울하긴 한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94년도 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족미술 15년전이라는 대규모전시회를 했다. 그때 나는 그런 주장을 했다. 지금 현재 협소해진 민중미술뿐만 아니라 당시 현대미술을 했던 젊은이들 가운데 그런 역사적 변혁기 속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소통구조로서 모더니즘을 했던 쪽까지 다 포괄을 해야 한다. 민중미술을 말하기 전에 리얼리즘이라는 스펙트럼을 한없이 넓힐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리얼리즘이라는 스펙트럼은 자연주의에서부터 최첨단의 모더니스트까지가 다 포괄되는 거고, 현실비판의 자기형상성을 갖고 역사에 대한 자기 대안을 제출하는 작업들은 어떤 것이든 우리가 귀하게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나와 뜻을 같이했던 성완경 선생하고 술먹으면서 관 속으로 가는 거다, 민중미술 15년이 왕립현대미술관이라는 관속으로 들어가는거다 하면서 술마시며 웃었는데 결국은 그렇게 됐다. 우리가 새로운 세기를 맞아 끊임없이 민중미술이 형식실험을 해가면서 자기전형을 찾아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주변부의 귀한 결과물들을 우리 스스로 잘라낸 것이다. 그 이후로 민중미술은 쪼그라들고 쪼그라들고 또 쪼그라들어버렸다.

우리 사회에서 50년동안 영화를 누리던 극우세력이 전면적인 파시즘을 포기하기 했지만 그 위세는 여전하다. 극우세력이 모든 개혁과 진보에 최대 장애물이라는 입장에 대해선.

우리가 자꾸 극우세력 극우세력 그러는데 나는 우리 사회에 극우세력은 없다고 본다. 어느 누구도 극우라고 나오는 사람이 없다.

조갑제 정도.
조갑제도 극우라고 안 하고 건강한 우익이라 한다. 우리 사회에 어디 건강한 우익이 있을 수 있나. 나는 상상력을 더 넓혀서 우리 사회에 극우세력은 없다, 그 기운이 우리 안에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이미 만들어진 극우의 유령이 어쩔 때는 진보적인 사람 몸 속에도 들어갔다가 또 어쩔 때는 일반대중한테 들어갔다가 하지 세력으로 존재하지는 않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할 때 자유총연맹인가 어디에서 사상검증이라는 걸 했는데 그때 소위 보수세력이라고 자처하고 나온 면면들 봤나. 그 기막힌 캐릭터들을 봐라. 난 정말 만화가가 아닌 게 한스러웠다.

극우세력이라고 적시해서 한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약한 얘기라는 건가. 극우정신이 사회 전체에 유령처럼 돌아다니는데.

바로 그렇다. 계속 돌아다닌다. 이해관계에 따라 때에 따라 진보세력도 그 유령에 사로잡혀 극우적 발언을 한다. 쉬운 예로 진보적 인사라는 사람이 여자가 말야 어쩌고 여자가 집에서 좀 이러고저러고 해야지 뭐 이런 얘길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 순간 그는 극우의 유령에 사로잡힌 거다. 극우의 실체를 보여준 게 있나. 기껏 있다면 사상검증 코메디 같은 걸 보여줬을 뿐이다. 근대 어떻게 그것들을 우리 진보세력의 카운터 파트너로 극우로 인정을 하느냐 말이다.

오히려 대우하는 꼴이라는 애긴데, 공감한다.

조선일보도 그랬고 또 기타 보수세력들이 DJ가 빨갱이라고 저놈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나라 김정일한테 갔다바칠 거라고 사설에 쓰고 그랫다. 보수냐 진보냐는 신념이다. 신념 있는 보수세력이 있었으면 청와대 앞에서 광화문 앞에서 분신자살을 한 20명은 했어야 한다. 국민들이여, 우리나라는 이제 절단이 됐다. 우리 진보세력들은 불과 20년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백명 넘게 분신자살을 했다. 그럼 백이 아니라 그 십분의 일인 열이라도 분신자살을 했어야된다, 단 한명도 안 했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럼 그걸 어떻게 세력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냐 말이다. 한국에 보수세력이나 극우세력이라는 건 없다. 조선일보를 보라. 아무리 정치적 논리라고 하지만 DJ가 대통령 됐으면 전부 절필을 해야지. 어쩔 때는 칭찬도 해주고 어쩔 때는 까고 이짓거리들을 한다. 그것들이 기회주의자들이지 어떻게 보수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인가.

조선일보가 극우적 해악을 끼치는 건 분명한 사실인데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에 최소한의 상식으로 연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한다. 그리고 조선일보에 관한 한 우리 진보적인 인텔리겐차들이 타격을 주고 승리하는 일은 우리가 과연 미래를 향한 대안을 가질 수 있겠는가 미래가 열리면 그걸 우리 손으로 잡을 수 있겠는가 하는 시험일 수 있다. 조선일보에 관한 한 정말 그렇다.

선생은 바다의 이미지, 물의 이미지는 모성이자 휴식이자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배타고 어디 갔다 올 때 우리 섬이 보이면 “우리나라가 보인다”라고 외칠 만큼 나는 그 섬이 세상의 다인 줄 알았다. 바다는 나의 이상을 키워주고 자유를 가르쳐주고 항상 바다를 건너가면 어딘가 좋은 땅이 있을 것 같은 그러니까 이 땅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르쳐주었는데 그 모든 걸 나한테 가르쳐준 그것이 나를 고문하는 도구가 될 줄은 어떻게 알았겠나.

막말로 고문도 여러가진데 하필이면.
글쎄 말이다. 내가 우리 전통미술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조각작품이 국보 78호인가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옛날 내가 사귀던 여자를 닮기도 했지만 나는 특히 그 고졸미, 오래되고 소박하고 늘 본 듯한 미소가 좋다. 그런데 내가 물고문 당할 때 물고문 하는 사람들이 마치 미륵처럼 보이더라. 그래서 내 안에 내 원한의 대상인 그들과 같은 가증스러운 파시즘의 요소가 없나 하고 나를 자세히 돌아보면 나는 더 지독한 데가 있었다.

‘물속의 스무날’ 연작은 그런 성찰의 결과물인가.

감옥에서 나와 물의 원초적 관련을 내 안에서 극복해내지 못하면 화가로서 끝나는 거라 생각했다. 고문 문제만은 피해가고 싶었지만 이걸 극복하지 못하면 나는 영원히 지는 거다, 예술가로선 끝이라는 생각에 달라붙었다. ‘물속에서의 스무날’ 연작은 물이 갖고 있는 물성을 내 안에서 회복시키기 위해 끝간 데까지 상상력을 발전시켜 놓은 거다.

선생의 사상과 예술에서 동양적인 것이나 민족적인 것은 어떻게 수용되는가.

세계가 크게 세 블록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문화예술 측면에서 보자면 유럽과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로 말이다. 유럽아프리카블록은 알다시피 19세기말 20세기초중반까지에서 구라파의 예술가나 인텔리겐차들이 이미 식민지 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다 뽑아 써버렸다. 아메리카 대륙도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역사가 200년밖에 안 되는 나라가 역사의 근원적 힘을 양쪽에서 가져온다. 하나는 구라파에서 가져오고 다른 하나는 남미에서 가져오는데 남미에서 가져온 것은 그 엑기스를 다 뽑아 썼다. 동아시아블록은 참 묘한 게 한반도 분단 때문에 그랬을까, 아직 문화적으로 불록화되지 않은 상태다. 앞으로 동아시아가 블록화 될 때 동아시아가 갖고 있는 문화적 아이덴티티가 세계문화의 중요한 한 모형을 제시할 것이다.

김지하 선생 얘기와 비슷하게 들리는데.

김지하 선생은 너무 빨리 나갔다고 할까. 얘기를 계속하면, 구라파나 미주 쪽에서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형성을 대개 일본이나 중국에 둔다. 구라파에 가보면 침실에 일본식 종이 외등 하나 걸어놓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프랑스 여자들은 일본 여자들 잠옷 하나 입는 게 소원이고 미국의 부자집 인텔리겐차 집에 가보면 목 떨어진 불상대가리라도 하나 거실에 놓는 걸 최고로 생각한다. 그럼 한반도 코리안패션이라는 게 있나. 미주나 구라파에서 볼 때 없고 그게 우리가 갖는 문화적 비극이다. 이를테면 진도씻김굿을 보자. 스키토시베리아 안의 샤만 문화가 동양을 타고 죽 내려오면서 동해안 별신굿을 만들어냈고 남해안을 타고 뱅 돌면서 진도씻김굿을 만든 건데, 전세계에 산재되어 있는 스키토시베리안 무속문화 가운데 가장 탁월한 전형화를 이루고 있는 게 씻김굿이다. 그런 좋은 것들이 있음에도 우리가 문화적 아키타입을 만들지 못했다. 그런 아키타입이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는 상징도구가 될 거고 80년대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우리 예술가들이 겪었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현실 경험들이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문명사적인 비전의 의미는 인정하지만, 아무래도 거대하고 장기적인 비전일수록 단기적인 현실 조응력은 약하기 마련인데.

현실의 문제는 개인한테 있는데 예술가 개인이라는 게 철저하게 개인이면서도 사회 현실을 그대로 보듬고 있는 개인이다. 그러니까 예술가가 자기 개인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 그걸 진실하게 못 바라보니까 항상 허위가 나온다. 에술가는 자기가 겪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들을 그런 거시적 안목에 담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예술가는 현실사회에서 보여지는 여러가지 상황들에 대해서 다양한 경험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경험 속에 들어가 이바지할 수 있고 대안을 제시해낼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가져야 한다.

다시 80년대를 반추한다면.

나는 80년대처럼 집단적으로 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이해관계랄까 뭐랄까 우리가 더 타내자 더 많이 타내자 이런 데서만 집단화될 따름이다. 예술 창작에서 80년대 우리가 경험했던 집단화의 경험 형식을 반복할 순 없다. 80년대 민중미술이 마치 하나의 유행처럼 패션처럼 흐르지 않았는가. 전혀 민중미술과는 어울리지 않는데 요즘 요렇게 가야 되는가보다라고 흘러들어온 사람들도 부지기수였고 그걸 반복할 순 없다.

선생의 근래의 작업들이 이전에 비해 추상적이다보니까 조금 이해 받기 어려운 구석도 있어 보인다. 현실 조응의 문제를 고의로 피해가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다.

작업에 임할 때 나는 날마다 흔들린다. 특히 현실문제를 어떻게 하면 처절할 정도로 개인화시켜서 내가 내 안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들을 그려내서 모든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가 요즘 내 고민이다.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이 그다지 성공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불만이 많다.

요즘 청년 예술가들은 어떻게 보나. 그들은 이전 세대와 다른 방법으로 제도 시스템에 대해 저항하는 노력들을 한다. 조직적이지 않고 좀 혼란스러워는 보이지만.

일단 혼란스럽다. 그런데 그 혼란스러움에 일정한 자기법칙들이 있더라.

그런 청년들의 약점은 세상의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자기들은 운동이라 불려지는 걸 싫어하고 그저 내 생각을 얘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 있는 작업들이 조직적이지 못하다 보니 사회적으로는 별 힘을 갖지 못하고 있는데 선생 같은 분들이 도움을 줄 방법은 없는가.

앞서 말했듯 민중미술의 전통은 우리세대로 끝나야 한다. 너무 협소해졌기 때문이다. 80년대 민중미술은 우리들 대에서 끝나고 이젠 민중미술의 폭을 넓히는 작업을 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들의 개인화된 여러가지 저항들을 자꾸 민중미술쪽으로 편입시키려 하면 그들 스스로 좁아지니까 지평을 넓혀줘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개인주의가 서구사회 게인주의보다 훨씬 더 질 나쁜 개인주의가 되어버리는 일이다. 이것은 작금의 사이버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서구의 개인주의는 상당히 발전하고 나름대로 튼튼한 미덕을 갖는다. 우리는 그런 개인주의가 발전할 기회가 없었다. 거기다 서양과 똑같이 사이버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 작업들이 허상을 쫓는 작업이 되기 쉽다. 모순이 많이 상존해 있는 사회일수록 개인은 그 사회의 모순들과 더불어 얽혀있는 것 아닌가. 그 얼개를 보지 못하고 사이버 공간 안에서 자기모습을 찾는 건 끊임없는 허상일 뿐이다. 그런 허상이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만연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한다.

온라인, 사이버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가.

부정적인 건 아니고 다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듯이다. 예술가의 직관으로 볼 때 온라인은 그늘이다. 어둠이고 자궁이다. 자궁은 창조를 위한 것이며 창조하지 않으면 죽은 세계가 된다. 온라인이 오프라인과 결합하지 않으면 그것은 허무의 세계고 망상의 세계다. 세계 금융과 정보를 독점한 빅브라더의 혈관 속에 노는 백혈구 노릇일 뿐이다. 이른바 ‘세계화’는 이미 그런 세상이 왔음을 방증한다.

문제는 역시 자본주의인 것 같다. 현재 압도적인 패권을 장악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웬만한 노력들은 하나의 악세사리로 전락하곤 한다. 현대사에서 진보운동은 일단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에 패배했고 우리는 그 패배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자본주의 체제를 기정사실화 하고 더 나은 현실을 모색하는 것과 자본주의를 결국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인데.

나는 통일문제를 그렇게 본다. 통일이 그냥 남과 북이 만나서 가운데 철조망이 거둬지는 게 아니라 양쪽 체제가 같이 공생공존함으로서 제3의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이다. 사회주의라는 것이 어쨌든 현실사회주의를 가지고 얘기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실패했다. 나는 현실 사회주의를 기준으로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나한테 배급 타먹어가면서 국가에서 물감값 받아가면서 그림 그리라면 나는 못그린다. 여기 저기 가는데 증 끊어서 가라면 나는 자살한다. 우리에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인간을 위한 제3의 체제가 한반도 땅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그 기대와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절망이 공존하는데 만약에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얼마나 기분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건가. 세계의 역사와 세계의 철학과 세계의 사상과 세계의 인간상의 실제 모델을 우리가 만들어낸다는 자부심은 삼대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통일은 사회주의의 완성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계획인가.

92년 출소해보니 민미련이 ‘행세’에 빠진 조직으로 전락해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완전히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반발하는 후배들을 설득해 민미련을 해산하고 당시 민미련 청년 역량의 절반을 컴퓨터 미술에 투입했다. ‘퓨처아트’, ‘미메시스’, 그리고 부산의 ‘4DR’이 그 결실이다.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 운동을 벌여나가는 것이다. 온라인 상에선 미술을 중심으로 한 포탈 사이트를 내년 초 오픈 예정으로 구축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링크시키고 인터넷으로 가르치는 미술학교도 들어가고 먹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생산교류 시장도 들어가고 이메일이나 각종 커뮤니티 활동까지 포함한 포탈 사이트다. 오프라인 상에선 음악, 영상, 춤 등을 묶는 기동성 있는 공연팀을 꾸리고 있다. 사회에서 이슈가 생기면 그 팀은 현장으로 달려가 퍼포먼스를 벌이고 그걸 실시간으로 웹상에 중계한다. 우리는 개칠된 세상을 벗겨내는 붓이다.

멋진 계획이다. 부디 크게 열매 맺길 빈다.



홍성담 연보

1955 전남신안출생
1972.2 조선대학교 졸업
1980.7 5월 진혼제를 위한 야외전(나주 남평읍 드들강변)
1980.11 제1회 작품전(광즈 전일 미술관)
1984.8 해방 40주년 역사전(서울, 광주, 대구, 전주)
1987.5 反고문전 (광주 카톨릭 미술관)
1987.6 한국민중판화 독일 순회전
1987.8 통일전(서울 그림마당 “민”)
1988.6 홍성담 판화전(독일-HENKE갤러리)
1989.6 걸개그림-민족해방운동사
1989.7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1990.3 홍성담 판화전 (미국 LA홍성담 구명위원회)
1990.11 홍성담 판화전 (양심수를 위한 독일 HAMBURG재단)
1994.3 민중미술 15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94.5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전 (서울 예술의 전당)
1995.8 전쟁과 미술전 (일본 오사카 국제 평화재단)
1996.7 한국근대인물사전 (서울 노화랑)
1996.7 영국 GLASGOW 국립현대미술관 개관기념전
1996.8 홍성담 판화전 (영국 EDINBURGH)
1998.5 새로운 천년 앞에서전(광주 시립미술관)
세계인권선언 50주년기념, 홍성담 - 도미야마 다에꼬2인전 (광주,부천, 가와사키)
판화로 읽는 우리시대의 詩전(학고재화랑)
1998.9 세계인권선언 50주년기념 홍성담 판화전(엠네스티 영국 런던지부)
1998.12 세계인권 50주년기념 미술관 (예술의 전당)
1999.8 개인전 (가나아트 센터)
2000.3 제3회 광주비엔날레 한국대표작가
2000/10/16 22:35 2000/10/16 22:35
2000/10/15 17:22
올 봄 어느 날 인터뷰하러 찾아왔던 일본 공산당신문 기자가 한반도에 처음 재미를 느낀 사연. 그가 10대 시절 일본 10대들 사이에선 단파 라디오로 외국의 일본어 방송을 듣는 게 유행이었다. 여느 일본 10대들처럼 남북한이 같은 민족이라는 것조차 몰랐던 그는 북한 방송과 남한 방송을 번갈아 들으면서 한반도에 재미를 느꼈다. 같은 민족이라는데 북쪽은 남쪽을 원수라 하고 남쪽은 북쪽을 원수라 하며 온종일 저주를 퍼붓는 것. 그 저주의 결론은 희한하게도 언제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는 것. 다른 민족인 그가 느낀 재미는 지난 5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지옥이었다.

민족. 민족은 불순하지 않지만 민족주의는 대개 불순하다. 민족주의는 인간의 모든 선량한 정신들을 민족 단위로 한정하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비롯,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해로운 정신들은 대개 민족주의와 관련을 맺는다. 민족주의란 실은 민족적 이기심이다. 민족주의가 불순하지 않은 단 한 가지 경우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민족 단위로 일어날 때 피착취 민족의 민족주의다. 그것은 민족적 이기심을 넘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를 타파하는 보편적 인간해방의 가치를 갖는다. 통일. 통일도 마찬가지다. 모든 통일은 다 좋다는 생각은 불순하다. 통일의 전적인 이유로 주장되어온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는 단지 통일의 한 이유일 뿐이다.(따로 살아 더 행복한 가족이 있듯, 같은 민족이라도 따로 사는 편이 낫다면 왜 통일이 필요한가.)

우리에게 통일이 필요한 이유는 한반도 분단체제가 지난 50여 년 동안 전적으로 남북 지배세력의 지배와 착취의 도구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다. 그 기초는 남북 민중들의 한국전쟁 체험이다. 남북 지배세력은 자신들이 자행한 그 참혹한 체험에서 생긴 남북 민중들의 공포를 적대감으로 부풀려 남북 민중들을 지배 착취해왔다. 그들이 감당했던 유일한 고단함이란 남북 민중들이 그 참혹한 체험의 실체를 따져볼 일체의 기회를 차단하는 일뿐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은 한껏 부풀려진 정서적 적대감의 보충물이었다.

근래의 통일 정세(혹은 통일 지향적 정세)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 그러나 그 통일 정세가 전적으로 남북 지배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행복을 불안하게 한다. 그들은 그간의 극우파쇼정권이 분단체제를 사용하는 반통일 정권이었고 김대중 정권은 이른바 민주적 절차에 의해 탄생한 통일 정권이라 말한다. 그 말은 절반만 옳다. 김대중 정권이 이른바 민주적 절차에 의해 탄생한 건 사실이지만 김대중 정권을 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남한의 지배세력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래의 통일 정세가 우리에게 가져다 얼마간의 행복들이 그 통일 정세의 전부라 여기는 일은 김대중씨가 노벨평화상을 타기 위해 통일정세를 만든다는 주장보다 더 아둔하다. 우리는 남북 지배세력이 통일 정세(통일 지향적 정세)를 만드는 실제 이유를 따질 필요가 있다. 지난 50여 년 동안 분단으로 속아온 우리가 또다시 통일로 속지 않으려면 말이다. 상식선에서만 말하자면, 남한 지배세력의 통일 정세는 이른바 남한식 자본주의의 위기 탈출 방책이고 북한 지배세력의 통일 정세는 이른바 북한식 사회주의의 위기 탈출 방책이다. 통일 정세가 이른바 경제협력을 골간으로 진행된다는 것, 그 경제협력을 위해 그토록 강고하던 남한의 반공주의와 북한의 반미주의가 싱거울 만치 쉽게 조정된다는 것에서 보여지듯 말이다.
통일보다 중요한 건 통일이 누구에게 사용되는가다. 이를테면 통일은 정주영 부자에게 사용될 것인가 현대 노동자들에게 사용될 것인가. 통일은 한줌의 남북 지배세력에게 사용될 것인가 전체 남북 민중들에게 사용될 것인가. 분단을 사용해온 세력에게 통일마저 사용하게 한다면 더 이상 민족의 미래는 없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통일만을 지지한다. | 씨네21 2000년_10월
2000/10/15 17:22 2000/10/15 17:22
2000/09/19 17:16
지성이란 그저 기억력의 축적일수도 있고 평범과 분리되는 통찰일 수도 있는데 고종석의 경우 전자는 압도적이고 후자는 상당하다. 나는 그런 고종석과의 대화가 즐겁다. B급 좌파와 지성적 자유주의자의 대화는 언제나 은근한 긴장을 낳는다. 그는 나의 유토피아 지향을 조롱하고 나는 그의 패배적인 세계관을 경멸한다. 그런 긴장 속에서 그와 내가 최소한의 우애를 잃지 않는 건 전적으로 극우 조선일보 덕이다. 서로의 세계관에 대한 조롱과 경멸은 대개 "조선일보는 악이다"는 식의 말로, 조선일보에 대한 적개심으로 행복하게 수습된다.

초창기 한겨레 문학담당 기자 노릇을 할 때부터 집단(이른바 창비네 문지네 하는)보다는 문학 내재적인 판단을 견지했던 아웃사이더적 인간 고종석은 현재 더욱 완전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는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 덕에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아웃사이더가 되었고, 어떤 조직에도 끼지 않는 그의 선택 덕에 아웃사이더 속의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아웃사이더 아웃사이더 하는 김에 내가 관여하는 <아웃사이더>에 대해. 단지 책이름일 뿐이기도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아웃사이더>를 만드는 사람들은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특히 '아웃사이더 편집주간'이라는 그럴싸한 직함을 달고 다니는 나는 <아웃사이더> 덕에 이른바 지식인으로서 허명과 상품성을 높이는 이득을 보았다. 나보다는 정도가 덜하지만 이런 면은 현재 안티 조선 계열의 일군의 지식인들에 대체로 해당된다. 그들은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적 세력이다.)

고종석의 독특한 입지는 그를 아웃사이더 속의 아웃사이더로 만들었지만 이른바 그의 자유주의적 세계관과는 강고한 일관성을 이룬다. 이를테면 복거일, 혹은 영어공용화론과 그의 관련이다. 그는 복거일을 제 스승이라 말했고 복거일이 제기한 영어공용화론에 '진지하게 논의'하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얼핏 모호해 보이는 그 입장 덕에 그는 늘상 곤경에 처하곤 한다.(한 예로, 얼마 전 고종석은 <한겨레21> 지면에서 정과리와 조선일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내용 여부를 떠나 그런 논쟁이 제대로 벌어진 일이 거의 없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유익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이제 인터넷은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 말했다. 안티조선 계열의 어느 웹사이트 게시판에 적힌 "그 대담에 고종석이가 무슨 자격으로 나갔느냐." "고종석은 영어공용화론자"라는 식의 홍위병적 의견에 낙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보면 고종석은 복거일에서 어떤 복거일을 분리하고 영어공용화론에서 어떤 영어공용화론을 끊임없이 분리한다. 고종석은 다만 국가주의 파시즘으로 가득 찬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주장하고, 민족주의라는 전가의 보도로 우민 시스템을 유지해온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 인간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어떤 집단에도 끼지 않으려는, 못하는 일은 당연한 귀결이다.)

가장 올바른 노선을 좇는 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진보적 노력(혹은 운동)의 본능이다. 그러나 그 가장 올바른 노선은 언제나 그 노선에 기본적으로 합의하는 작은 이견들의 도움으로 완성된다. 문제는 그런 작은 이견은 필연적으로 밖에서 느끼기에 회색이고 안에서 느끼기에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경과가 보여주듯, 그런 작은 이견들이 묵살될 때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진보적 노력(혹은 운동)은 찬란한 대의에 담긴 졸렬한 내용으로 남을 뿐이다. 집단주의의 악령에 사로잡힌 우리에겐 더 많은 아웃사이더, 더 많은 고종석이 필요하다. | 씨네21 2000년_9월
2000/09/19 17:16 2000/09/19 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