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9/03 00:14
“이오덕 선생님, 김규항입니다.” “예. 조금 아까도 김선생이 전화하셨습니까.” “예. 30분쯤 전에 제가 했습니다.” “누워서 주사를 맞고 있어서 일어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많이 편찮으십니까.” “좀 그렇습니다.” “잡지가 이제 거의 짜여져서 한번 찾아뵈려고 연락드렸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드릴 이야기도 있고 하니 한번 와주시겠습니까.” “다음주에 언제가 편하십니까.” “화요일은 서울 병원에 가고 다른 날은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찾아뵙는 걸로 하고 시간은 그날 아침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나는 월요일 아침에 전화 드린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전날 폭우를 무릅쓰고 산에 올랐다가 전화기에 물이 들어가 버렸다. 전화번호야 달리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날은 종일 이래저래 경황이 없었다. 전화 드려야 하는데, 드려야 하는데 속으로만 생각하다 하루가 다 지났다. 새벽녘에 사무실에서 깜박 잠이 들 즈음에야 나는 선생이 이미 월요일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찾아뵈었어야 했다는 소용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거의 짜여진 잡지’란 내가 한해 전부터 준비해온 ‘어린이 교양 월간지’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대개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내 글을 제 얼마간의 사회의식을 배설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두 가지 결심을 했었다. 하나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 만큼 급진적인 글을 쓰는 것. 다른 하나는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남은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만드는 것.

첫 번째 결심은 얼기설기 진행 중이고 두 번째 결심은 ‘어린이 교양 월간지’로 이어졌다. ‘만화라는 그릇’을 사용한다는 내 생각을 선생은 손뼉을 치며 반겼다. 선생은 한글 교열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은 당부했다. “아이들에게 어떤 생각을 심어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게 잘 열매 맺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선생의 당부는 내내 기획 작업의 기조가 되었다.

문상은 물론 부조, 화환도 받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문상객들은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담소나 하고 있었다. 어느 거들먹거리는 인사들이 보냈을 몇 개의 화환은 돌려 세워져 있다. 엉덩이를 옮기며 여기 앉아 좀 드시라 부르는 어떤 이의 호의를 나는 목례로 거절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상가라면 굳이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동행한 후배와 감나무에 파란 감이 주렁주렁 달린 선생의 작업실 둘레를 한바퀴 돌아보고 바로 길을 나섰다.

그날 밤 선생의 사진들을 노트북 화면에 띄웠다. 나는 두해 동안 반년 간격으로 선생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 선생은 지난해 초순으로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쇠잔해지고 있다. 그 무렵 선생은 당신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정작 당신의 생각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낙심했다. 선생보다 육체적으로 젊은 누구도 선생보다 정신적으로 젊지 않았다. 그들은 선생의 낙심을 노인의 강퍅함으로 해석하는 듯 했다. 선생은 절대 고독에 침잠해갔다. 제 신념에 제 삶을 완전하게 일치시키는 사람들이 겪곤 하는 숙명적인 절대고독에.

노트북 화면에 뜬 선생의 커다란 눈을 보며 나는 말했다. “선생님을 온전히 이어받을 사람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대신 선생님은 여러 사람들의 정신 속에 나누어 살아 계십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씨네21 2003/09/03)
2003/09/03 00:14 2003/09/03 00:14
2003/08/23 00:13
‘주일 성수’를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라 여기는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아들을 늘 근심한다. 어머니의 근심이 어머니의 신앙 때문이듯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도 내 신앙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개의 한국 교회란 한국인들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인 ‘돈’교의 지회에 불과하며, 적어도 예수와는 별 상관없는 곳들이다. 교회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대리석 첨탑에 네온 십자가를 단 건물이라고 해서 교회가 되지 못할 법은 없지만 나에겐 예수를 팔아먹는 곳에 앉아 예수를 생각할 만큼의 인내심이 없다.

아내가 고창으로 연수를 떠난 일주일 동안 어머니가 살림을 도우러 왔다. 늙은 어머니는 오랜만에 아들 손주 밥을 챙겨주는 일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어머니의 즐거움을 위해 나도 안 먹는 아침을 꼬박꼬박 먹는다. 사흘째 아침엔가 김단과 김건이 제 친구들을 따라 여름성경학교에 가겠다고 나섰다. 어머니는 반색을 하면서도 짐짓 “아빠한테 허락을 받아야지.” 한다. 나는 두말없이 허락한다. 종교적 평화는 다른 이의 신앙을 ‘같은 정상을 향하는 다른 등산로’라 생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차조심하거라.” 신바람이 나서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그들에게 종교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들이 가는 교회가 크게 나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때론 좋은 것보다 나쁜 걸 알아보는 게 더 약이 될 수도 있으니 그저 지켜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오늘부터 제 앞에 나타나는 이런저런 종교적 재료들을 제 삶과 세상의 진실에 반추해가며 제 나름의 것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아이들은 어둑해져서야 돌아왔다. “고래의 전설 0장 0절!” 혼자 성경 구절을 중얼거리던 김건이 외친다. 제가 공룡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의 귀엔 ‘고린도전서’도 그렇게 들린다. 김건이 내 무릎에 앉아 묻는다. “아빠, 일곱 살 중에 교회 데리고 갈 아이가 있을까.” “글쎄, 그건 건이가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친구 데려오면 스티커 주는데 스티커 모으면 상 준대.”

나는 그런 식의 판촉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김건에게 설명할 말을 한참 생각하다가 접는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알아듣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이거나 내가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그 문제를 설명할 능력이 없다. 김단은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 열심히 그린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있고 그 위론 횃불 같은 걸 죽 늘어놓았다. 그런데 예수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다.

“여자니?” “응.” “예수님이야?” “예수님은 아니고...” “단아, 여자 예수를 그려도 되는 거야.” “예수는 남자잖아.” “그래 예수는 남자였지. 그런데 예수는 여자에겐 여자이고 흑인에겐 흑인일 수 있는 거야.” “무슨 말이야, 아빠.” “교회에서 예수 그림 본적 있지.” “응.” “어떻게 생겼지.” “백인. 머리 길고 얼굴 하얗고.” “그건 백인들이 자기 마음 속의 예수를 그린거야. 단이도 단이 마음 속의 예수를 그리면 되는 거야.”

김단은 알아들을 것 같다는 표정이다. 나는 더 할 말을 속으로 떠올려본다. ‘예수는 2천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김새는 우리가 흔히 테러리스트의 얼굴로 떠올리는 평범한 팔레스타인 사람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예수의 실제 얼굴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얼굴이다. 예수는 언제나 억압 받고 슬픔에 빠진 사람의 편이었다. 예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며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며 잘난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내 마음 속의 예수를 김단이 그리게 하기보다는 김단이 제 마음 속의 예수를 그려서 언젠가 그가 그린 예수의 얼굴에 내가 감동받는 쪽을 선택한다.(씨네21 2003/08/23)
2003/08/23 00:13 2003/08/23 00:13
2003/08/06 00:12
나는 텔레비전이 싫다. 보는 거 말고 나가는 게 말이다. 우선 피디라는 신종 왕자들을 만나는 게 싫다. 90년대 들어 군사 파시즘이 물러난 자리를 차지한 신자유주의는 한국인들의 머리통에 돈이면 뭐든 살 수 있다는 믿음과 끊임없이 자기를 선전하고 팔아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놓았다. 한국은 온 국민이 텔레비전 출연을 열망하는 텔레비전 왕국이 되었고 피디들은 그 왕국을 거들먹거리는 왕자가 되었다.

지식인 나부랭이들의 텔레비전 병도 눈뜨고 보기 어렵다. 시사 프로그램 같은 데서 막간 인터뷰라도 걸릴라치면 공부고 연구고 만사를 제쳐 두고 카메라 앞에 제 얼굴을 대령한다. 반시간 넘어 이런저런 지당한 말씀을 늘어놓아봤자 정작 텔레비전엔 나오는 건 몇 초고 그 몇 초도 피디가 멋대로 난도질(방송 용어로는 ‘편집’)한다는 걸 잘 알지만 아랑곳없다. 텔레비전에 나간다면.

이런 소리를 하는 나도 텔레비전에 나간 적이 있다. 몇 해 전에 <백분토론>에 한번 나간 적이 있고, 나와 어떤 이가 공저로 되어 있는 책을 홍보하는 프로그램에 나간 적도 있다. 그 책은 어느 주간지에 일년 쯤 연재한 대담을 묶은 것이다. 나는 그걸 단행본으로 내는 데 반대했지만 인세를 몽땅 베트남 양민학살 기금으로 보내겠다는 말에 승낙했다. 홍보 프로그램에 나간 것도 그래서였다.

<백분토론>에 나간 일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텔레비전을 피하던 내가 그땐 무슨 생각으로 거길 나갔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날 나는 토론보다는 불편한 자리에선 말을 하지 않는 내 습성에 충실했다. 그 일로 나는 한동안 핀잔께나 들어야 했다. 내가 제법 말을 근사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잔뜩 기대하고 백분을 기다렸으나 나는 두 마디만 하고 앉아 있었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나는 싱거운 농으로 그들을 달래곤 했다. “두 마디나 백 마디나 출연료는 같아.”

속으로는 그랬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하는 놈도 있어야지.’ 존중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없으며, 불편하기까지 한 일에 부러 시간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후 텔레비전 출연 요청에 “텔레비전은 안 합니다.” 한마디로 끊곤 했다. 이 판도 연예계의 관성이 지배하는지라 내가 언론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인기 종목을 떠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니 노동자 계급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구린 종목에 매달리는 오늘은 그나마 그런 출연 요청도 잦아들었다.

몇 달 전 나는 내가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텔레비전에 한방 먹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강아지똥> <몽실언니> <한티재 하늘>의 권정생 선생이다. 몇 달 전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선생의 책 <우리들의 하느님>을 선정하고 녹색평론사에 연락했다. “최소 20만부를 준비하고, 표지엔 ‘느낌표 선정도서’라고 박아주고, 어쩌고...” 그러나 녹색평론사에선 “책이 그렇게 팔리길 바라지 않는다며” 그 일을 거부했다. 텔레비전은 다시 권정생 선생에게 연락했다. 결과는 끔찍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행복한 경험 가운데 하나가 책방에서 자기 손으로 책을 고르는 일인데, 왜 그런 행복한 경험을 텔레비전이 없애려는 거냐.”

<우리들의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삶의 길잡이가 될 책이니 그 책이 거기 소개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면 좋은 일이다. 그 책을 팔아 벌 막대한 돈도 녹색평론사와 권정생이라면 더 좋은 책을 내고 더 좋은 글을 쓰는 일에나 쓸 테니 역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유익들을 거리낌 없이 거부했다. 그런 유익들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유익들을 얻기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다른 가치 때문이다. 그 가치는 오늘 인간의 위엄을 스스로 접고 사고 팔리는 물건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씨네21 2003/08/06)
2003/08/06 00:12 2003/08/06 00:12
2003/07/23 00:11
몇 해 전에 강준만이 <조선일보>에 협조적인 지식인들을 매달 게시한 일이 있다. ‘목표가 정당해도 방법이 정당하지 않다면 잘못이다’ 식의 지당한 말씀들(이 나는 종종 역겹다. 이를테면, 어떤 폭력의 위협도 없는 안온함 속에서 주장되는 ‘폭력은 모두 나쁘다’,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보다 귀하다’ 따위 빤질빤질한 말들이) 덕에 그 일은 중단되었는데, 그 후 강준만의 운동은 꾸준히 진행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조선일보>에 협조하는 일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보기 어렵게 되었다.

요즘 들어 다시 그런 말들을 종종 듣게 된다. 특정한 신문을 반대하는 건 자유지만 그런 선택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뭐 그런 말들이다. 그런 말이 다시 불거지는 데 아무런 배경이 없는 건 아니다. <조선일보>와 사이가 나쁜 노무현이라는 이가 대통령이 되면서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것이 그 본래 의미 외에 현 정권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포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준만의 5중대’라 불리던 시절이나 진보적 주제에 집중하는 지금이나 <조선일보>에 한결같은 나지만, 오늘 <조선일보> 반대가 갖는 그런 이중적 의미는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조선일보>는 우리 모두에게 면죄부를 발부해주는 전지전능한 악당이 아니다.”라는 신윤동육의 의견에 찬성한다. 시민의 지위를 확보한 사람들에겐 여전히 <조선일보>가 악이고 <한겨레>가 선일 수 있겠지만, 시민에 이르지 못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겐 <조선일보>가 악이라면 <한겨레>는 차악이다.

나는 특정한 신문에 협조하고 안 하고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말을 존중한다. 그런 말에 걸맞은 신문을 두고,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이 할 때라면 말이다. 특정 ‘신문’이 아니라 특정 ‘범죄조직’인 <조선일보>를 두고 그런 말은 도무지 걸맞지 않는다.(신문이 사실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는가 진보적으로 해석하는가는 해당 신문이 선택할 문제다. 그러나 사실 자체를 아예 날조하거나 진실을 감춘다면 그건 더 이상 신문이 아니라 범죄조직이다. <조선일보>는 줄곧 그래 왔다.)

그리고 그런 말은 적어도 ‘범죄조직에 협조하지 않는 정도’의 양식은 갖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강준만이 등장한 지 한두 해도 아니고 <조선일보>가 어떻다는 건 어지간한 사람이라면(특히 <조선일보>에서 원고를 청탁할 만한 사람이라면) 모르기 어렵게 된 마당에 굳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그저 <조선일보>에 글을 씀으로써 겪어야 하는 이런저런 불편을 덜어보려는 수작일 뿐이다.

나는 누가 <조선일보>에 글을 쓴다 해서 애써 비난할 생각은 없다. 내가 하고많은 일 가운데 하필이면 출판 일을 하다보니(빌어먹을!) 갖은 교양과 지성을 자랑하는 동업자들(쌍팔년의 민주화 운동 이력을 주렁주렁 매단 느끼한 중년남성들의 출판사에서 미래와 생명을 고민하는 신선하고 청량하기 짝이 없는 출판사까지)이 하나같이 술자리에선 <조선일보> 욕을 하면서 하나같이 <조선일보>에 책을 보내고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물리도록 보아온 터다.

써라. 써서 짭짤한 원고료 받아 귀여운 새끼 운동화도 바꿔주고 늙은 어미 맛난 것도 사드려라. 기왕이면 사진도 크게 박아, 옛 애인과 재회도 하고 동네에서 명사 행세도 실컷 해라. 다만 고작 그런 이유로 지식 넝마들을 팔아넘기는 주제에 무슨 대단한 자유주의적 양식이라도 지키는 양 떠들지는 마라. 그 범죄조직에 숨이 넘어간 사람들이 얼마며 그 범죄조직 덕에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인지 잘 알면서, 제발이지 허튼 수작들 부리지 마라.(씨네21 2003/07/23)
2003/07/23 00:11 2003/07/23 00:11
2003/07/09 00:10
“어이, B급!” 박래군은 늘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른다. 작년에 페미니즘 일로 괜스리 시끄러울 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나를 “마초!”라고 부르곤 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내 성격에, 다른 누가 그랬다면 바로 코라도 주저 앉혔을 것이다. 박래군이 그러면 그냥 “저 웬수.”하며 웃고 만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고 그의 그런 장난끼 어린 조롱엔 무슨 대단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나에 대한 속 깊은 염려와 조심스런 지지가 담겨 있다. (설사, 그게 진짜 조롱이라 한들 어떤가. 현역 활동가인 그가 나처럼 입이나 놀리는 얼치기 좌파를 조롱하는 건 눈곱만큼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몇 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를 의심했다. 그가 지나치게 좋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처럼 어디서나 좋은 사람 소리를 듣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옳음과 그름으로 중첩되어 있는데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근거하면,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란 대개 가장 세련된 처세술을 가진 위선자들이다.

박래군과 친해지면서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면서 옳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거니 싶어졌다. 나는 확실히 박래군과 친해졌다. 그러나 내가 박래군과 친해졌다는 건 박래군과 사적으로 친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활동가로서 삶과 친해졌다는 뜻이다. 활동가도 인간인지라 대개 제 신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박래군은 지난 십수 년 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궂은 부위에서, 빛도 이름도 나지 않는 그런 운동을 해왔다.

노동운동을 하던 박래군이 그렇게 된 일이 있다. 박래군은 1988년 ‘광주학살 원흉처단’을 외치며 제 몸을 불사른 박래전 열사의 친형이다. 동생의 주검과 그 주검이 남긴 신념을 수습한 박래군은 잇따르는 수많은 주검들과 그 주검들이 남긴 수많은 신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를 쓴 1991년을 전후로, 박래군이 수습하고 장례를 치룬 죽음은 50여건에 이른다. 그는 ‘장의사’라 불렸다. 박래군은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기 이전에, 비탄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다.

“명동성당이라고? 엊그제 에바다*라며.” “야, 그게 언젠데. 너한테 전화한 다음날 들어왔어. 벌써 9일째야.” “그랬어. 네이스 반대 농성 얘긴 들었는데 박래군이 있는 건 몰랐지. 신부들이 뭐라 안 해.” “나가라 그러지.” “한심한 X들. 예수가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싫어했지.” “요즘 다 그런걸 뭐.” “몸은 어때.” “이번엔 준비를 좀 했어. 괜찮아.” “필요한 건.” “노숙 단식에 뭐가 필요하겠냐. 저녁에 한번 놀러나 와라.” “가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나 같은 놈이 가서 분위기나 흐려지지.” “어유, 겸손할 줄도 알아.” “나야 가진 게 겸손뿐이지. 내 맛난 것 한 보따리 싸가지고 갈게.”

싱거운 농을 주고받으며 전화기를 내려놓지만 속은 끓어오른다. ‘세상이 갈수록 지랄 같아지는구나. 6년 전에 전자주민증인가 하는 것도 여론에 밀려 폐기됐었는데 극우 반동들이 밀린다는 오늘 그보다 더 악랄한 네이스를 두고 하네 마네 난리니 온 나라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걸까. 싸울 수밖에,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불과 몇 분 전 안온하던 내 속은 점점 더 뜨겁게 끓어오른다. 활동가는 분노를 실어 나른다.

* 지난 7년 동안 평택 에바다농아원은 ‘법이 멈추는 공간’이었다. 도둑들은 농아어린이 70여명을 인신매매하고 강제노동, 임금착취에다 국고보조금 및 후원금을 횡령했고, 6명이 변사했다. 지난 5월 28일, 똥물을 뒤집어쓰고 폭행을 당하는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민주이사진이 에바다를 접수했다. 사람들아, 에바다를 기억하자.(씨네21 2003/07/09)
2003/07/09 00:10 2003/07/09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