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3/15 16:57
내 친구 석구는 용인의 한 시골 교회 목사다. 지난해 어느 날 카트를 밀며 장 보는 아내 뒤를 좇을 때 울린 전화 속엔 15년만에 듣는 녀석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몇 주 후 나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소박하게 박힌 녀석의 교회를 찾았다. 내가 길을 헤매다 늦게 도착한 탓에 녀석은 이미 설교 중이었고 나는 묵상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광고 시간에 녀석은 나를 불러일으켜 여러분 저의 귀한 옛친구가 찾아왔습니다, 하고 소개했다. 교인들의 평화롭고 따뜻한 박수 소리 때문이었을까. 녀석의 말이 내 귀엔 여러분 여기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하고 들렸다. 탕자는 녀석의 사는 모습에 안도했다. 녀석은 15년을 하루같이 천천히 예수에게 다가가고 있다.

내가 한신에 입학했을 때 녀석은 신입생을 환영하러 나온 2학년들 가운데 하나였다. 녀석은 한신이란 학교가 있는지조차 모른 채 입학한 나와는 달리 일치감치 신학공부를 소망했었다. 내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역동성을 깨닫고 예수라는 사나이를 인생의 기준으로 삼게 된 데는 녀석의 영향이 컸다. 녀석은 대책 없는 건달에서 엉성한 대학생으로 생활을 전이하고 지리멸렬하던 내게 예수에 대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제 소망에 대해 조용히 말하곤 했다. 나는 녀석을 따라 한 걸음씩 예수에게 다가갔다.

언젠가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는 소망을 접은 이유가 교회에 대한 낙심 때문이라고 적었지만 다른, 보다 큰 이유는 예수처럼 살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예수에 대해 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였지만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를 따라 사는 일의 얼개를 파악하게 되었을 때 나는 거스를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검약한 삶을 넘어, 자기 헌신의 기쁨마저 생략한 채 오로지 남을 섬기다가 완전한 고독감 속에 사라져가기엔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았다.

내가 예수의 삶에서 넘어설 수 없었던 지점은, 그가 보여준 삶의 폭이 인간이 이룬 어떤 선한 그룹에서조차 결국 오해받기 십상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예수는 정치범으로 몰려 죽었지만(당시 로마 식민지령에서 십자가 처형은 민족해방 운동가들에게 사용되었다. 물론 전시 효과 때문이었다.) 정치범이 아니었다. 그를 죽이는 일은 로마 식민정권, 유태 괴뢰정권, 유태교 지도자들 같은 압제자들간의 합의였을 뿐 아니라 예수가 자신들의 정치 혹은 영혼의 해방을 이루어 줄거라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민중들의 합의이기도 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정치 지도자로 혹은 영혼의 지도자로 제각기 받아들였지만 그들이 예수를 좀더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정치 지도자라 여겼던 사람들은 그를 영혼의 지도자라 여겼고 그를 영혼의 지도자라 여겼던 사람들은 그를 정치 지도자라 여기게 되었다. 정치적 해방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영혼의 해방을 되새기고 영혼의 해방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정치적 해방을 되새기는 예수의 방식은 사람들의 욕망을 거슬렀다. 완전한 인간 해방이란 그 둘간의 접점 속에 있는 게 분명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 혹은 영혼의 해방 전선이 상할까 두려워했다.

이제 예수가 죽은 지 이천 년이 지나 그는 죽음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사했다는 모호한 신학론의 박제가 된 채 사람들의 욕망의 담보물이 되었다. 예수를 근거로 한다는 기독교 정신이 인류의 주요 부분을 장악한 지 몇 세기가 지났지만 그가 보여준 완전한 인간 해방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천 년 전 그가 죽을 때보다 결코 늘지 않았다. 예수를 배신한 자책감도 이젠 바래어가고, 오늘도 천천히 예수에게 다가가는 내 친구를 바라보는 일로나 추레한 삶을 위무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아무리 둘러봐도 예수의 삶은 대개 헛되었던 것 같다. 예수는 이천 년 전 우리에게 해방을 가르쳤지만 우리는 이천 년째 예수에게 욕망을 요구한다.
2000/03/15 16:57 2000/03/15 16:57
2000/03/07 16:56
종일 아이를 보는 토요일. 내 몸을 짓밟으며 공룡 놀이를 하던 김단과 김건이 잠시 다른 놀잇감을 찾아 물러간 틈을 타 텔레비전을 켠다. 연속극, 스포츠, 쇼, 미국방송, 일본방송, 중국방송... 버릇대로 이리저리 리모콘 서핑을 하다 눈에 밟히는 얻어맞는 고딩의 클로즈업. 쇼트가 바뀌고 HOT가 카메라 앞에 바짝 다가와 팔을 휘젓는다. HOT가 왕따를 노래하고 있다. 언젠가 씨랜드 아이들을 노래하는 걸 본('들은'이 아니다. 이수만은 HOT의 장르가 립싱크라 확인한 바 있다.) 기억이 살아나면서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영혼까지 사고 파는 자본주의라지만 해도 너무 하는군.

한때 통기타를 치며 여린 목소리로 <모든 것 끝난 뒤> 같은 감상적인 노래를 부르던 '트로트 포크' 가수 이수만은 미국 유학에선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단단히 배워왔던 모양이다. 대중음악 상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여느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한 최초의 한국인일 그는 (현진영 정도를 제외하곤) 지나치게 앞선 시도가 불발에 그치곤 하다 결국 HOT라는 히트상품을 만들어냈다. 나는 HOT 공연실황 클립 속에서 천사 날개를 달고 무대에 선 HOT에 환호하는 10대들을 잊을 수 없다. 그 장면을 보며 내 머리통 속에선 HOT에게 천사 날개를 달아준 이수만의 욕망과 고작 그런 우스운 천사에게서나 안식을 얻는 한국 10대들의 가련한 처지가 대립했다.

알다시피 HOT라는 상품이 순항하는 근거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남긴 공백이다. (박노해가 신영복 모델을 선택하듯) 이수만은 서태지 모델을 선택했고 그런 선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중음악 시장을 면밀히 분석해온 이수만으로선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서태지 모델을 선택했다는 것은 단지 서태지의 은퇴로 생긴 남성 댄스그룹의 빈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외에 몇 가지 세부를 갖는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건 이른바 사회비판이다. 추측컨대 서태지 모델을 선택한 이수만이 서태지의 중요한 구성 요소라 공인된 사회비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만은 사회비판이라는 요소를 기꺼이 HOT라는 공산품의 외장재로 채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음악이 상품이 아닐 도리는 없겠지만 그 상품들이 가진 사회비판의 권한은 저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천지인이나 메이데이처럼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상품 시스템을 사용할 뿐인 그룹이나 스스로 음악을 창작하고 집행하는 능력을 갖춘 서태지와, 순수한 공산품인 HOT에게 똑같은 사회비판의 권한이 주어진다면 대체 우리의 삶에 어떤 판단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돈 속에 썩어버린 양심 너의 그런 한심한 모습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 (...) 이젠 제발 돈 때문에 사람 팔지 말고 주위를 둘러봐 너 혼자만 잘살잖아 한편의 허상을 향해 초라한 몸부림에 흐느끼는 영혼들의 울음이 들린다."(Korean pride)

두어 달 전 어느 시사월간지에서 이수만과 대담을 하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우습게도, 갑자기 불어난 유사 지식인 활동에 치어 사는 나로선 선뜻 응할 형편도 못 되었지만, 허탈함에 쓴웃음이 나왔다. 대담 제목이 <문화는 돈이다>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인생의 적이자 신앙의 적으로 여기는 내가 자본주의의 전사 이수만과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 자본주의는 현실의 법이며 내가 아무리 이수만을 마땅치 않아 한들 합법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그를 공식적으로 비난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나는 꿈에라도 이수만이 욕망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의 전사에서 계몽주의를 신봉하는 대중음악 활동가로 탈바꿈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내가 이수만에게 바라는 건 단지 그의 공산품에 사회비판이라는 외장재는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것, 공산품의 길을 걸어달라는 것이다. | 씨네21 2000년_3월
2000/03/07 16:56 2000/03/07 16:56
2000/02/22 16:55
(당사자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쾌도난담은 희한하다. 양심수들이 애독한다는 양식 있는 시사주간지에 지성도 교양도 함량 미달인 두 건달이 별다른 준비도 없이 두세 시간 횡설수설하는 게 매주 멀쩡하게 실려나간다. 한두 번의 해프닝으로나 어울릴 이 믿기 힘든 일은 해를 넘겨 계속되고 있다. 풍문으로는 쾌도난담 덕에 <한겨레21> 웹사이트 조회수가 몇 배 늘었다고도 하고, 이 시궁창 같은 기사를 저주하며 구독 중단을 선언하는 비장한 독자가 나타났다고도 한다. 그런 극단적인 반응은 내 머리통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대로 진지한 얘기들을 무겁지 않게 전한다는 장점(제대로 전하는가는 논외로 두고)도 있지만, 사적 톤으로 발언하고 공적 톤으로 읽히는 쾌도난담의 작동 원리는 나를 늘 불편하게 한다. 쾌도난담은 마치 내가 어느 카페에서 친구와 편하게 나눈 대화를 수많은 사람에게 생중계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쾌도난담을 읽는 사람들은 나를 실제보다 조금 더 경박한 인간으로, 실제보다 조금 더 방자한 인간으로 짐작하는 듯 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나를 실제보다 조금 더 기품 있는 인간으로 실제보다 조금 더 진지한 인간으로 인상 지우고 싶은 내 욕망과 충돌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게 말하곤 한다. "생각보다 점잖은 분이군요." 빌어먹을.

별의별 얘기를 다루다보니 별의별 잡음이 끊이지 않지만 나나 김어준이나 지성의 부족 분을 고집으로 채우고 사는 스타일이라 일일이 개의하진 않는다. 다만 이따금씩 제 말에 제가 후회하고 그러는데, 내가 '율려'라는 걸 들고 나온 김지하 선생을 '애처로운 왕자병 환자에 앵벌이하는 상이군인'이라고 비아냥거린 일은 바로 그런 예다. 내가 오늘의 김지하를 존중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 해도 그 비아냥은 무슨 얘기든 짧게 훑고 지나가는 쾌도난담의 형편과 결합하여 비열한 인신공격이 되었다. 다른 곳에 김지하 선생에 대한 좀더 차분한 비판문을 쓴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내 20대의 치명적인 선생에게 씻을 수 없는 결례를 하고 말았다.

얼마 전 매매춘을 필요악이라고 표현한 일은 쾌도난담의 형식이나 사정으로 변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내게 남겼다. 후배들은 그 발언으로 별 문제는 없는지 조심스레 물어왔고, 평소 내 글에 호의적이었던 한 학자는 무척 실망했다며 내 말이 고도의 반어법이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김강자라는 여성 경찰관의 해프닝과 구성애라는 보수주의자의 맞장구에 내가 가진 이른바 '과학적 매매춘론'을 사용하는 일이 왠지 허망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내 발언은 고도의 반어법은커녕 그저 반동적 매매춘론을 한번 더 강조하는 일이 되었다.

두어 달 전 나는 담당기자에게 쾌도난담을 그만두겠다 말했다. 내가 뒤늦게 글쓰기라는 걸 시작하여 체험수기류의 잡문이나마 열정을 가지고 끼적일 수 있었던 건 내 팍팍한 삶에서 빚어지는 나와 세상의 긴장감 덕이었다. 매주 한번씩 세상의 일들을 연예가 방담 하듯 주절대는 쾌도난담은 그런 내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쾌도난담 덕에 나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내가 그런 허명이 한 인간을 얼마나 가련하게 만드는가 쯤을 모르진 않았다.

그만두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목요일이 다가오면 의례껏 쾌도난담하러 갈 요량을 하는 나를 보면, 내가 쾌도난담을 정말 그만두려 하는 건지 쾌도난담으로 일어나는 내 민망함을 보상하기 위해 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지 나도 헛갈린다. 대견하게도(가증스럽게도) 이젠 공적 톤으로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사적 톤으로 발언하는 일에도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또한 나는 쾌도난담이 스테레오타입화된 공격 대상 이외의 대상을 공격하기엔 몹시 불리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한편으론, 진지한 거라면 질색을 하던 나이 어린 후배가 쾌도난담을 낄낄거리며 읽는 모습을 보며 자못 계몽주의자의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쾌도난담이 내게, 내가 쾌도난담에 차분해진 셈이다. | 씨네21 2000년_2월
2000/02/22 16:55 2000/02/22 16:55
2000/02/07 16:53
“만날 똑같은 소리... 강준만은 이제 지겨워.” 주변에서 이 말이 나오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다. 온 나라가 만날 한 가지 이슈에 휩쓸리고 또 그 이슈는 만날 변하는 사회에서 몇 년째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강준만이 지겹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강준만이 몇 년째 거듭하고 있는 바로 그 소리, 이른바 <조선일보> 문제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건재하며 모든 형태의 사회 개혁에 '할말은 함'으로써 수구세력의 돈궤를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지겨운 건 강준만이 아니다.

강준만이 지겹다는 말은 강준만의 방법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을 둘러싼 그의 방법은 어딘가 저잣거리의 시비 같은 데가 있어 그의 공식적인 적대자들은 물론 그의 주장을 대놓고 적대하기 어려운 좌파 혹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비공식적인 적대자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강준만이 이른바 <조선일보>에 협조적인 지식인들의 명단을 <월간 인물과 사상>에 게시하자 그의 비공식적인 적대자들은 강준만이라는 불한당을 향해 동병상련의 정으로 단결한다. 21세기의 목전에 대대적인 빨갱이사냥을 당하고도 <조선일보>가 극우신문이라는 최소한의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그 못난이들이 말이다.

그들이 공동으로 개발한 논리가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강준만의 말은 옳지만 방법은 틀렸다는 얘기로, 강준만의 주장과 실천을 분리해 강준만을 무력화하려는 노회한 논리다. 내 기억에 그런 말을 처음 사용한 건 이른바 강단좌파들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이후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조선일보>라는 봉건적 신문에 보이는 무색무취한 태도와 강준만에 보이는 단호한 태도가 말이다
.
동병상련의 논리를 애용하는 또 다른 경우가 메이저 시민운동단체의 인사들이다. 최장집 사건 당시 시민운동권에서는 <조선일보> 취재 거부운동이 벌어졌지만 공교롭게도 이른바 3대 메이저 단체인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은 빠졌다. 그 일을 두고 강준만이 그들을 강하게 비판하자 그들은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를 사용했다. 강준만은 그들이 언론플레이에 미쳤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했다. 그들이 <조선일보>와 어떤 내통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강준만의 주장이 객관적인 정황인 건 분명하다.

알다시피 그들은 요즘 낙선운동에 열심이다. 나는 내가 강준만의 방법을 최선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지지하듯 낙선운동의 방법을 최선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지지한다. 민주주의란 본디 작고 많은 비합법성을 모아 큰 변화를 이루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지식인들을 부역자처럼 게시하는 덜 합리적인 방법으로라도 지식인들을 <조선일보>에서 분리해내려 한다. 시민운동단체들은 낙천, 낙선되어야 할 후보들의 명단을 게시하는 덜 민주적인 방법으로라도 정치권의 인적 청산을 이루려 한다.

가상현실게임 동호인들(이른바 강단좌파들)이 그러는 거야 학술영역의 문제라 치더라도, 낙선운동을 하는 시민운동가들이 강준만의 방법을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라 폄하하는 일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 강준만의 운동과 낙선운동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같고, 20세기의 막판까지 빨갱이사냥을 일삼은 극우신문에서 지식인들을 분리해내는 일과 감옥에나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을 국회의사당에서 쓸어내는 일은 차선의 선택을 감수할 만큼 유익하다. 강준만의 운동은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을 청소하는 일이고 낙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대성을 고양하는 일이다.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여 돌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좃선운동과 낙선운동은 서로 존경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상식이다. | 씨네21 2000년_1월
2000/02/07 16:53 2000/02/07 16:53
2000/01/08 16:52
밀레니엄의 의미를 적어 달라는 몇몇 원고 청탁에 밀레니엄이란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는 말로 한몫 잡으려는 장사꾼들이나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는 말로 현실의 문제를 덮으려는 정치꾼들에게나 필요할 거라는 독설을 채워 보냈다. 21세기가 된다고 파시스트의 뇌가 갑자기 민주주의적으로 바뀌는 게 아니고 21세기가 된다고 결식아동에게 갑자기 밥이 생기는 게 아니며 21세기가 된다고 갑자기 예술에 대한 검열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밀레니엄이니 21세기니 하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둘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나 역시 21세기의 도입부는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지난 세기말 내 몸에 침입한 독감균은 여전히 내 몸을 지배하고 있다.

기억의 범주 안에서 몸이 아파 병원에 가본 일이 한번도 없는 나로선 지난 해 독감이 두 번씩이나 내 몸을 점령했다는 사실이 영 개운치 않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식은땀을 흘리며 나는 이제는 사라진 어린 시절의 질병 공포를 떠올린다. 그 시절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필시 무슨 큰 병에 걸려있다는, 나는 이제 곧 죽고 말 거라는 공포에 시달리곤 했다. 그런 공포가 처음 생긴 건 병약했던 어머니 덕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까지 어머니는 늘 위독했다. 다른 조무래기들은 들로 산으로 몰려다니며 그저 무럭무럭 자라기만 하면 되던 시절을 나는 위독한 어머니 옆에서 꼬박 보내야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늘 나를 바라보며 항이 불쌍해서 어쩌나 니 엄마 얼마 못산다, 하곤 했다. 나는 서서히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막연한 공포가 더욱 구체화된 건 4학년 때 옆자리에 앉았던 녀석이 죽고나서부터다. 한동안 자리를 비우던 녀석은 결국 죽었다는 소식으로 돌아왔으며 담임선생은 빈 책상 위에 국화 한 송이를 얹어놓고 디프테리아라는 병을 설명해주었다. 가장 뚜렷한 증세는 목구멍에 하얀 막이 생긴다는 얘기였고 그날부터 나는 틈만 나면 거울 앞에서 입을 벌려 내 목구멍의 이상을 확인하곤 했다. 매일 그 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대체 죽음이란 뭔가라는 의문에 빠져들었다.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따위의 의문은 초등학교 4학년 짜리에게 벅찼지만 해가 바뀌도록 계속되었다.

독감에 점령당한 오늘, 나는 어린 시절의 질병 공포를 떠올리며 과연 내가 암 같은 병에 걸리더라도 현재의 정신세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니 파시즘이니 사회주의니 혁명이니 하는 사회 개념들은 죽음에 직면한 내 머리 속에서도 여전히 긴장감을 유지할 것인가. 내 경험으론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고교 시절에 노장을 읽기 시작했다는 선배 O는 내가 아는 이들을 통틀어 독보적인 정신 세계를 가진 사람이지만 몇 년 전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을 때 그의 지성은 대폭 생략되거나 매우 단순해졌다. 그가 끼고 살던 노장 철학은 그 기간에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인문분야의 교양서를 모조리 챙겨 읽는 습관 때문에 교양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후배 S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항암 치료를 받으러 들어가던 날 녀석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 부질없어 형. 아이하고나 많이 놀아 줘."

지성이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가 말하는 지성이란 안온한 시절에는 사고의 축이다가 절박함 속에선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그런 것인 것 같다. 그 지성 속엔 분명 죽음을 포함한 모든 절박함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 특히 배운 사람들은 아마도 실제 필요한 양보다 터무니없이 많은 지성을 갖고 있거나 꼭 필요하지 않는 종류의 지성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배운 사람들은 언제나 제 머리통 속에 수집해놓은 동서고금의 온갖 지성의 부스러기들을 조금씩 내비치면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구별짓곤 하지만 절박함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지성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말하는 지성이란 대개 우리의 안온함을 장식하는 액세서리에 불과하며, 현명한 사람이라면 죽음에 직면해서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지성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 씨네21 2000년_1월
2000/01/08 16:52 2000/01/08 1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