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0/15 17:22
올 봄 어느 날 인터뷰하러 찾아왔던 일본 공산당신문 기자가 한반도에 처음 재미를 느낀 사연. 그가 10대 시절 일본 10대들 사이에선 단파 라디오로 외국의 일본어 방송을 듣는 게 유행이었다. 여느 일본 10대들처럼 남북한이 같은 민족이라는 것조차 몰랐던 그는 북한 방송과 남한 방송을 번갈아 들으면서 한반도에 재미를 느꼈다. 같은 민족이라는데 북쪽은 남쪽을 원수라 하고 남쪽은 북쪽을 원수라 하며 온종일 저주를 퍼붓는 것. 그 저주의 결론은 희한하게도 언제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는 것. 다른 민족인 그가 느낀 재미는 지난 5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지옥이었다.

민족. 민족은 불순하지 않지만 민족주의는 대개 불순하다. 민족주의는 인간의 모든 선량한 정신들을 민족 단위로 한정하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비롯,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해로운 정신들은 대개 민족주의와 관련을 맺는다. 민족주의란 실은 민족적 이기심이다. 민족주의가 불순하지 않은 단 한 가지 경우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민족 단위로 일어날 때 피착취 민족의 민족주의다. 그것은 민족적 이기심을 넘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를 타파하는 보편적 인간해방의 가치를 갖는다. 통일. 통일도 마찬가지다. 모든 통일은 다 좋다는 생각은 불순하다. 통일의 전적인 이유로 주장되어온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는 단지 통일의 한 이유일 뿐이다.(따로 살아 더 행복한 가족이 있듯, 같은 민족이라도 따로 사는 편이 낫다면 왜 통일이 필요한가.)

우리에게 통일이 필요한 이유는 한반도 분단체제가 지난 50여 년 동안 전적으로 남북 지배세력의 지배와 착취의 도구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다. 그 기초는 남북 민중들의 한국전쟁 체험이다. 남북 지배세력은 자신들이 자행한 그 참혹한 체험에서 생긴 남북 민중들의 공포를 적대감으로 부풀려 남북 민중들을 지배 착취해왔다. 그들이 감당했던 유일한 고단함이란 남북 민중들이 그 참혹한 체험의 실체를 따져볼 일체의 기회를 차단하는 일뿐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은 한껏 부풀려진 정서적 적대감의 보충물이었다.

근래의 통일 정세(혹은 통일 지향적 정세)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 그러나 그 통일 정세가 전적으로 남북 지배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행복을 불안하게 한다. 그들은 그간의 극우파쇼정권이 분단체제를 사용하는 반통일 정권이었고 김대중 정권은 이른바 민주적 절차에 의해 탄생한 통일 정권이라 말한다. 그 말은 절반만 옳다. 김대중 정권이 이른바 민주적 절차에 의해 탄생한 건 사실이지만 김대중 정권을 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남한의 지배세력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래의 통일 정세가 우리에게 가져다 얼마간의 행복들이 그 통일 정세의 전부라 여기는 일은 김대중씨가 노벨평화상을 타기 위해 통일정세를 만든다는 주장보다 더 아둔하다. 우리는 남북 지배세력이 통일 정세(통일 지향적 정세)를 만드는 실제 이유를 따질 필요가 있다. 지난 50여 년 동안 분단으로 속아온 우리가 또다시 통일로 속지 않으려면 말이다. 상식선에서만 말하자면, 남한 지배세력의 통일 정세는 이른바 남한식 자본주의의 위기 탈출 방책이고 북한 지배세력의 통일 정세는 이른바 북한식 사회주의의 위기 탈출 방책이다. 통일 정세가 이른바 경제협력을 골간으로 진행된다는 것, 그 경제협력을 위해 그토록 강고하던 남한의 반공주의와 북한의 반미주의가 싱거울 만치 쉽게 조정된다는 것에서 보여지듯 말이다.
통일보다 중요한 건 통일이 누구에게 사용되는가다. 이를테면 통일은 정주영 부자에게 사용될 것인가 현대 노동자들에게 사용될 것인가. 통일은 한줌의 남북 지배세력에게 사용될 것인가 전체 남북 민중들에게 사용될 것인가. 분단을 사용해온 세력에게 통일마저 사용하게 한다면 더 이상 민족의 미래는 없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통일만을 지지한다. | 씨네21 2000년_10월
2000/10/15 17:22 2000/10/15 17:22
2000/09/19 17:16
지성이란 그저 기억력의 축적일수도 있고 평범과 분리되는 통찰일 수도 있는데 고종석의 경우 전자는 압도적이고 후자는 상당하다. 나는 그런 고종석과의 대화가 즐겁다. B급 좌파와 지성적 자유주의자의 대화는 언제나 은근한 긴장을 낳는다. 그는 나의 유토피아 지향을 조롱하고 나는 그의 패배적인 세계관을 경멸한다. 그런 긴장 속에서 그와 내가 최소한의 우애를 잃지 않는 건 전적으로 극우 조선일보 덕이다. 서로의 세계관에 대한 조롱과 경멸은 대개 "조선일보는 악이다"는 식의 말로, 조선일보에 대한 적개심으로 행복하게 수습된다.

초창기 한겨레 문학담당 기자 노릇을 할 때부터 집단(이른바 창비네 문지네 하는)보다는 문학 내재적인 판단을 견지했던 아웃사이더적 인간 고종석은 현재 더욱 완전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는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 덕에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아웃사이더가 되었고, 어떤 조직에도 끼지 않는 그의 선택 덕에 아웃사이더 속의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아웃사이더 아웃사이더 하는 김에 내가 관여하는 <아웃사이더>에 대해. 단지 책이름일 뿐이기도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아웃사이더>를 만드는 사람들은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특히 '아웃사이더 편집주간'이라는 그럴싸한 직함을 달고 다니는 나는 <아웃사이더> 덕에 이른바 지식인으로서 허명과 상품성을 높이는 이득을 보았다. 나보다는 정도가 덜하지만 이런 면은 현재 안티 조선 계열의 일군의 지식인들에 대체로 해당된다. 그들은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적 세력이다.)

고종석의 독특한 입지는 그를 아웃사이더 속의 아웃사이더로 만들었지만 이른바 그의 자유주의적 세계관과는 강고한 일관성을 이룬다. 이를테면 복거일, 혹은 영어공용화론과 그의 관련이다. 그는 복거일을 제 스승이라 말했고 복거일이 제기한 영어공용화론에 '진지하게 논의'하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얼핏 모호해 보이는 그 입장 덕에 그는 늘상 곤경에 처하곤 한다.(한 예로, 얼마 전 고종석은 <한겨레21> 지면에서 정과리와 조선일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내용 여부를 떠나 그런 논쟁이 제대로 벌어진 일이 거의 없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유익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이제 인터넷은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 말했다. 안티조선 계열의 어느 웹사이트 게시판에 적힌 "그 대담에 고종석이가 무슨 자격으로 나갔느냐." "고종석은 영어공용화론자"라는 식의 홍위병적 의견에 낙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보면 고종석은 복거일에서 어떤 복거일을 분리하고 영어공용화론에서 어떤 영어공용화론을 끊임없이 분리한다. 고종석은 다만 국가주의 파시즘으로 가득 찬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주장하고, 민족주의라는 전가의 보도로 우민 시스템을 유지해온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 인간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어떤 집단에도 끼지 않으려는, 못하는 일은 당연한 귀결이다.)

가장 올바른 노선을 좇는 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진보적 노력(혹은 운동)의 본능이다. 그러나 그 가장 올바른 노선은 언제나 그 노선에 기본적으로 합의하는 작은 이견들의 도움으로 완성된다. 문제는 그런 작은 이견은 필연적으로 밖에서 느끼기에 회색이고 안에서 느끼기에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경과가 보여주듯, 그런 작은 이견들이 묵살될 때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진보적 노력(혹은 운동)은 찬란한 대의에 담긴 졸렬한 내용으로 남을 뿐이다. 집단주의의 악령에 사로잡힌 우리에겐 더 많은 아웃사이더, 더 많은 고종석이 필요하다. | 씨네21 2000년_9월
2000/09/19 17:16 2000/09/19 17:16
2000/08/11 17:15
영국에서 출판된 많은 책들이 우리보다 문명수준이 낮은 나라에 가면 분명히 해악을 끼칠 것이다. 그런 저자나 출판업자들은 사람의 악한 면에 호소해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려고 한다. 그 악은 심각하고 위험한 것이며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의 인생관에 깊은 해악을 남길 것이다.(드라큘라 작가 브램 스토커, 1895)

나는 부모님이 내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내역을 틈틈이 검색하고, 검토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나를 불신하여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터넷을 좀 더 안전하고 유익하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인터넷 사용 규칙', 2000)

2000년 7월 18일, 한국 판사 김종필은 2년 전 미성년자보호법(현재의 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된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도덕주의자들은 이미 무혐의 처리된 영화 <거짓말>도 재론해야 한다며 기세를 올리고 작가 이현세를 비롯한 만화가들은 비탄에 빠졌다. 한국 사법부가 만화라는 장르를 우습게 보는 건 분명해 보인다. 김종필은 이현세가 한국 만화계를 대표하는 작가라서 유죄 판결한다 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관대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표현의 자유가 무조건적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모양을 한 범죄의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여과장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여과장치의 역할을 공권력이 맡는 건 봉건사회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과장치는 전체 일반인의 의견이 공정하게 반영되는 민간의 것이어야 한다. 김종필은 "음란성은 작가 같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 정서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 했는데 그가 말한 일반인이란 실은 (앞의 인용문을 남긴) 도덕주의자 일반이다.

그런 도덕주의자들이 매우 특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건 그들 스스로 쉴새없이 증명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조리퐁은 여성 성기이고 가수 이정현이 꼽고 나온 비녀는 남성성기이며 테트리스 게임은 삽입성교이고 '거북이알'이라는 과자는 콘돔이다. 그들의 '음란성'은 놀랍지 않은가. 그들의 눈에 온 세상은 성기와 닮은 것들이다. 나는 그들이 총각김치나 조개구이를 먹는지가 정말 궁금하다.

(이견을 존중하는 근대인의 자격을 잃고 싶지 않기에) 나는 온 세상을 성기를 닮았는가로 판단하는 그들의 특별한 생각을 하나의 생각으로 인정한다. 공권력의 힘을 빌지 않는 한 그들이 거북이알 불매운동을 벌이든 테트리스 거부운동을 벌이든 그건 그들의 삶이다. 문제는 그들 도덕주의자들의 이해가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이해와 일없이 성교한다는 점이다. 검찰이 <천국의 신화>에서 처음 문제삼았던 집단성교와 수간 장면이 이번 판결의 대상이 된 청소년본에는 삭제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한국 사법부와 그들 도덕주의자들의 만족스런 성교다.

한 사회의 성인들이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을 염려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염려의 목적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앙상한 인간을 기르는 게 아닌 풍성한 정신을 가진 균형 잡힌 인간을 기르는 일이라 할 때, 청소년을 성인세계의 '나쁜 것들'에서 무조건 차단하는 시도는 어리석다. 완벽한 차단은 완벽한 통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청소년들의 사생활을 완전히 박탈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가능할 뿐더러, 그런 차단은 그런 '나쁜 것들'을 음지로 옮겨놓을 뿐이다.

청소년보호법은 국가보안법의 우량한 자식이다. 국가보안법이 국가보안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당위를 내세웠듯 청소년보호법은 청소년보호라는 거스를 수 없는 당위를 내세운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이적성이라는 칼로 마녀사냥을 일삼았듯 청소년보호법은 유해성이라는 칼로 마녀사냥을 일삼는다.(청소년을 보호하는 데 표현의 자유가 대순가!) 가까스로 정치적 파시즘을 벗어난 한국사회는 바야흐로 문화적 파시즘을 맞고 있다. | 씨네21 2000년_8월
2000/08/11 17:15 2000/08/11 17:15
2000/07/25 17:14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에 시달린 두 살배기 우리 아가를 가슴에 품고도, 분명히 의사들 나름대로의 정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애써 눈물을 참고 있던 저를 드디어는 서럽게 눈물을 터뜨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한없이 여린 존재 앞에서는, 더 고귀한 그 무엇도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독자 편지에서)

의사들에 대한 단상, <돌팔이>에 많은 의사들이 항의했다. 의사들(정확하게, 항의편지를 보낸 의사들)은 하나 같이 나더러 의사들이 처한 현실을 아느냐고 했다. 밝히자면, 나는 의사와 관련한 한국 의료제도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기본적인 분별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안다. 의사폐업을 주제로 한 어느 대담에선 의사들의 입장을 옹호한 일도 있을 만큼 말이다. <돌팔이>는 의사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내 논리적 견해가 아니라, 한국 의사들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정서적 견해였다.

의사들은 <돌팔이>가 정부와 관제 언론의 여론몰이 만큼 악의적이라 했다. 의사들이 악의적인 여론몰이와 여론을 분별하지 못하는 건 딱한 일이다. 이를테면 지하철 파업 노동자들을 '시민의 발을 볼모로'라는 수사로 여론몰이한 세력이 의사 폐업을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라고 비난하는 일과 지하철파업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에 연대하여 기꺼이 불편을 감수한 사람들이 의사폐업을 그렇게 말하는 일을 전혀 다르다.

사회적 억압은 누구에게나(논설위원 김대중이나 국회의원 정형근 같은 막돼먹은 인간들에게도) 있지만 그저 나름의 것일 수도 사회적 연대를 얻을 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근대사회의 성원이라면 특별한 사회적 억압에 처한 다른 성원의 정당한 권리 주장에 사회적 연대를 보낸다. 우리가 지하철 파업 노동자들을 '시민의 발을 볼모로'라 비난하는 일에 반대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하철 파업과 의사들의 폐업은 경우가 다르다. 의사들의 폐업이 사회 성원들로부터 어떤 연대도 얻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처한 사회적 억압에 비해 그들이 선택한 해결 방법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노동자들이 다른 사회 성원들에게 부탁한 건 불편이었지만 의사들이 다른 사회 성원들에게 부탁한 건 목숨이었다.(의사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얘긴 악의적인 과장일 뿐이라 주장한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의사들의 비극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성원들의 정서적 견해를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회성원들의 의사들에 대한 반감은 의사들이 생각하듯 폐업 사태와 관련한 악의적인 여론몰이로 새롭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체험으로 쌓여온 것이다.

폐업에 나선 의사들은 "이럴 바에는 개업할 돈으로 차라리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개업하지 말고 카페나 당구장을 하면 될 것이다.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인간은 의사보다 하등하단 건가. 자신들이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의사들의 이중의식은 그들의 권리주장의 공정성을 손상한다.

간호사들이 교대 근무하며 파업할 때 '환자를 볼모로'라 비난했던 의사들은 폐업을 승리로 끝내고도 목숨을 부탁했던 다른 사회 성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자신들 대신 국민의 정부로부터 분풀이 당한 롯데호텔 노동자들에게도 사과하지 않았다. 90퍼센트가 넘는 의사들이 재파업에 찬성했다.

추신 : 의사들의 항의 속에 '당신 공산주의자냐'라는 말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를 낙심케 했다. 의대에선 사회 교양을 가르치지 않는 건진 모르겠으나 이젠 <조선일보>조차도 주저하는 그런 메카시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그들을 다른 사회 성원들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건 기괴한 코미디다. 의사들의 초라한 사회 교양과 의사들에게 주어진 근거 없는 사회적 권위의 부조화는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에 시달린 두 살배기 우리 아가를 가슴에 품"은 어머니의 가슴을 서럽게 찢는다. | 씨네21 2000년_7월
2000/07/25 17:14 2000/07/25 17:14
2000/07/10 17:12
다섯 살 무렵 아버지는 식솔들을 이끌고 전라북도 옹동 산골로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빈민들에 야산을 불하하여 개간하게 하는 '후생촌'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일 바위를 파내고 땅을 골라 농사 지을 땅을 만들었고, 나는 종일 그들 곁에 쪼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이나 그리며 까맣게 그을렸다. 두 해째 봄이 올 무렵 아버지는 지난가을 수확한 고구마를 묻어 놓은 구덩이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걸 발견했다. 고구마는 모두 썩어 있었다. 낙심한 아버지는 그간의 고생을 뒤로한 채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전주로 떠났다.

후생촌을 기억하는 추억 가운데 하나는 '돌팔이'다. 서른 남짓의 그는 서울 어느 병원에서 어깨 너머로 의료일을 배웠다고 했다. 아픈 사람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연락했고 그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자전거에 왕진가방을 싣고 달려오곤 했다. 내가 마루에서 발을 헛딛고 떨어져 눈두덩이 벌어졌을 때나, 무리한 노동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입과 코로 피를 쏟고 쓰러졌을 때도 말이다.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이 오죽했으랴만 희한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돌팔이의 의료 실력을 못미더워 하는 일은 없었다. 더욱 희한한 일은 노인들조차 그를 하대하지 않을 만큼 마을 사람들이 그를 존대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 덕에 의사를 만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어릴 적 후생촌 사람들이 돌팔이에 보이던 그 희한한 존경, 돌팔이에 의사 선생님 대접을 하던 이유가 친절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친절이야말로 의사가 의사일 첫 번째 조건이다. 의사를 찾는 환자는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 망정 절대적인 불안 상태에 있게 마련이다. 자신이 왜 아픈지 그 아픔과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결부될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환자 앞에 선 의사는 절대적인 권위 상태에 있다. 설사 그가 돌팔이보다 못한 실력을 가진 의사라 해도 환자는 그 권위를 거부할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의 친절은 절대 불안 상태의 환자와 절대 권위 상태의 의사가 인간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돌팔이 이후 내가 만난 의사들이란 늘 불친절했다. 몸에 좋고 나쁜 걸 잘 구별해 먹어선지(이른바 의사답게) 평균보다 뽀얀 외관을 한 그들은 늘 환자에게 불친절했다. 그들이 그 뽀얀 입을 여는 순간이란 자기들(이른바 의료진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할 때뿐이다. 그런 때 그들의 얼굴은 생선 가게 앞에서 생선의 물을 의논하는 아주머니들의 나른한 얼굴과 같다. 답답하다 못한 환자나 보호자가 비굴함을 넘어서는 겸손으로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그들은 그 질문의 비전문성을 사사오입한다. 환자와 보호자는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행여 그들에게 밉보일 새라 끓는 속만 다스린다.

오늘 우리가 의사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가 그들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라서라는 의견은 순진하다 못해 아둔하다. 오늘 우리가 의사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는 단지 절대 불안 상태의 환자들 앞에서조차 불친절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유지하는 그들의 절대 권위 때문이다. 몇몇을 빼고라면 오늘 우리 앞에 선 의사들 가운데 히포크라테스나 허준의 정신과 연관된 어떤 특별한 직업관을 가진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최근에 발견된 그들의 특별한 직업관은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선 사람이 죽어나가도 좋다는 숭고한 신념이다.) 알다시피 그들이 의사가 된 이유는 단지 사회의 상층부에 살기 싶은 욕망에서였고 그들의 모든 관심은 그 욕망의 실현 여부에 있다.

의사라는 직업을 생각하면 나는 어린 시절 돌팔이를 떠올린다. 그는 환자에게 친절했고 의사 자격증은 없었지만 환자가 믿고 몸을 내맡길 만큼의 실력을 가졌으며 가난한 환자에게선 적은 돈만을 받았기에 마을 사람 평균의 살림보다 결코 낫게 살지 않았다. 돌팔이는 의사였고, 나는 돌팔이 이후 돌팔이보다 나은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 | 씨네21 2000년_7월
2000/07/10 17:12 2000/07/10 1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