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5/09 17:30
프로라는 말과 관련한 한 가지 추억. 초등학교 5학년 사회시간, 선생이 우리에게 질문했다. 프로와 아마의 차이가 뭐지? 선생은 감정 조절 능력이 부족하다는 결점이 있긴 했지만 이따금 그런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놓곤 매우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정답을 향해 접근해가는 우리를 기다리는 특별한 인내가 있었다. 별의별 답안이 다 제출되었지만 기억나는 건 한 가지다. “프로는 쇼를 하는 거고 아마는 진짜 하는 겁니다.” 당대의 스포츠, 프로레슬링에 근거한 우리의 유력한 답안이었다. 종이 치도록 프로레슬링의 세계를 빠져나오지 못하는 우리를 지켜보던 선생이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뗐다. “프로는 돈을 벌러 하는 거고 아마추어는 돈과 상관없이 하는 거다.” 나(우리)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돈일 줄이야.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프로라는 말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당연한 뜻보다 전문적이라는 뜻으로 쓰이곤 한다. 소수만이 대우받는 어떤 직업 영역에서 그 소수를 가리키는 말 따위로 말이다. 자본주의가 넘치기 시작한, 혹은 이미 넘치는 사회에서 프로는 전문적이라는 뜻을 넘어 어떤 강력한 찬미의 말로, 당대의 사회적 영웅에게 수여하는 작위의 말로 쓰여진다. 한국사회에서 프로라는 말이 그렇게 쓰인 첫 예는 90년대 초반 광고장이들(얕보려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렇게 즐겨 부르더라)에게다. 기억하는가, 카피라이터니 AE니 하는 광고장이들이 진정한 프로의 이름으로 찬미되던 시절을. 광고장이들에게 프로의 작위가 수여된 게 90년대 초반이었다는 사실은 역사가 얼마나 고등한 생명체인가를 보여준다.

그 시점은 이른바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더이상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적인 우경화가 시작된,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 극복을 모색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집으로 돌아간, 자본주의에 투항한 운동만이 살아남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대거 패퇴한 직후다. 한국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꽃, 광고장이들에게 프로의 작위를 수여하는 일을 신호로 그 마지막 구간을 출발했다.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 하던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모든 생산이 사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판매를 위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자본의 일방적인 이익보전을 위해 유지되는 그런 모순은 자연스레 과잉생산과 빈부의 격차를 낳는다. 광고는 그런 모순을 희석하고 포장하는 자본의 강력한 무기다.

광고의 목적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어떤 안내가 아니라 생산과 사용 사이의 모든 현혹이다. 그 현혹을 위해 당대의 문학예술적 성취 가운데 가장 감각적인 부분이 총동원된다. 잘 만들어진 광고는 예술작품인 듯 아름답지만 그 목적이 현혹이라는 사실 앞에서 그 아름다움만큼 추악하다. 그 추악함을 구원이라 믿으며 밤낮없이 뛰는 프로들, 그들이 바로 광고장이들이다. (그들에게 비난이 아닌 연민을. 청년기에 생명처럼 쌓은 문학예술적 재능과 정열을 고작 그런 일을 위해 쏟아부으며 살아가는, 그들을 사용하는 사악한 시스템이 던져주는 몇닢의 개평과 서푼짜리 자부에나 일희일비하며 살아가는 가련한 그들에게.)

짐짓 10년이 흘러, 한국자본주의의 열차가 구제금융이라는 세계자본주의 시스템의 마지막 터널마저 통과한 가장 최근 프로의 작위를 받은 건 그 이름도 노골적인 펀드매니저, 돈놀이 기술자들이다. 돈독 오른 사람들의 모사꾼 노릇이라는, 합법적인 직업 가운데 가장 천박한 직업이라 할, 빛나는 금테 안경에 와이셔츠 깃을 예리하게 세운 돈놀이 기술자들은 오늘 우리 앞에 거만하게 팔짱 낀 모습으로 나타났다.

돈놀이 기술자가 영웅인 세상이라니,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 90년대 초반 광고장이들에게 프로의 작위를 수여하는 일을 신호로 그 마지막 구간을 출발한 한국자본주의의 열차는, 오늘 돈놀이 기술자들에게 프로의 작위를 수여하는 일을 신호로 무사히 종착역에 도착했다. 자본주의가 무사히 도착했다. (씨네21)
2001/05/09 17:30 2001/05/09 17:30
2001/04/26 00:00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어버이들의 긴 싸움을 그린 다큐멘터리, <민들레>의 한 장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건강도 안 좋은데 고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최우혁(87년, 22세의 나이로 강제 징집되어 부대 쓰레기장에서 불에 탄 채 의문사)의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한다.

"우리는 지가 죽였든 누가 죽였든 죽은 것은 알잖아. 의문사 엄마 아버지들을 보면 너무나 불쌍해. 너무 불쌍해 갖고 집에 가야겠다 싶었다가도 저 사람들 놔두고 어떻게 발이 떨어져 집으로 가겠나. 우혁이가 강제징집 가면 나는 죽는다고 피해 다녔어. 그 엄마가 군대 안 가면 안 된다고 세상에 온 동네 사람들 출동해 갖고 잡아다 놓았어. 우혁이가 잡혀가면서 그랬어. 어머니 오늘 못 보면 나는 못 봅니다. 어머니가 원한다면 가서 죽어주지요. 그렇게 강제징집 가서 죽었다고. 그래 그 엄마가 자기가 죽였다고 자기가 죽였다고 하다가 정신이 돌아버려 갖고 물에 빠져 죽었어."

오늘 우리는 흔히들 말한다. "군사독재의 폭압 속에 신음하던 국민들." 그러나 그 말은 낯간지런 거짓말이다. 대개의 우리는 "군부독재의 폭압 속에 신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 대개의 우리에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알다시피, 오늘 우리는 "군사독재의 폭압 속에 신음"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만든 역사에 편승해 살고 있다. 희한한 일은 우리가 그런 ‘편승한 삶’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부끄러워할 줄 모를 뿐 아니라 방자하다.

며칠 전 <조선일보>(정말이지 이 신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만)에 실린 홍사중의 칼럼이 그런 경우다. 내용은 이렇다. 홍사중은 박정희 시절 가요에 금지 조처가 많은 걸 보고 '황성옛터'는 왜 금지하지 않느냐는 글을 썼다.(황성옛터는 박정희의 애창곡이었다.) 홍사중은 남산에 잡혀가 "공포교육"을 받고 "겉으로는 멀쩡해서" 돌아왔다. "그런 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또 몇 해가 지났다. 돌이켜 볼 때 교묘하게 얼굴을 숨기며 불법의 폭력이 다가오는 요즘의 상황보다는 차라리 폭력이 노골적으로 제 얼굴을 보여주던 그때가 견디기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후에 그곳의 '아주 높은 분'으로부터 저녁대접을 받았다. 너털웃음을 짓던 그에게는 적어도 꾸밈만은 없어 보였다."

"교묘하게 얼굴을 숨기며 불법의 폭력이 다가오는 요즘의 상황"이라는 말은 몹시 구리긴 하나, 홍사중에게 스토커라도 나타났을 수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나 "차라리 폭력이 노골적으로 제 얼굴을 보여주던 그때가 견디기 쉬웠을 것"이라는 방자한 말은 도무지 그냥 넘길 도리가 없다. 결론은 간단하다. ("겉으로는 멀쩡해서" 돌아와 "얼마 후 저녁 대접을 받는" 폭력도 홍사중 같은 귀족풍 지식인에겐 심각한 고통일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홍사중이 오늘 그런 방자한 ‘폭력의 미학’을 내뱉을 수 있는 건 단지 홍사중이 당한 폭력이 경미했기 때문이다.

폭력에 미학은 없다. 폭력의 미학이란 폭력을 감상하거나 가상 체험할 뿐인 유한계급의 말장난일 뿐,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그 세기에 정비례하는 구체적인 고통일 뿐이다. 아니 할 말로 물고문이나 전기고문 같은 "노골적으로 제 얼굴을 보여주는" 폭력을 당했어도, 아니 할 말로 제 자식이 그런 몹쓸 일을 당했어도, 홍사중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추정할 것 없이 홍사중에게 묻도록 하자. "선생, 그 얘기 최우혁이 아버지 앞에서 다시 할 수 있습니까?"

(99년 12월 28일 민주화운동 희생자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5년에 걸친 유가협의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 가족들의 죽음으로 만든 역사에 편승해 살고 있다.)(한겨레 2001.4.26)
2001/04/26 00:00 2001/04/26 00:00
2001/04/17 17:32
오삼숙 때문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지만, <아줌마>가 화제의 드라마가 된 건 주로 장진구 덕이었다. 사람들은 장진구인 사람들과 장진구가 아닌 사람들로 나뉘어, 장진구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장진구와 다름을 증명하느라 내내 땀을 흘렸고, 장진구가 아닌 사람들은 그 장진구와 현실 속의 장진구의 유사함을 확인하느라 내내 재미를 봤다. <아줌마>는 막을 내렸고 <아줌마>적 논의는 막을 내리기 않았다.

장진구를 자처하는, 소설가 김영하는 '내가 <아줌마>를 싫어 하는 두세가지 이유'를 제출했다. 나는 <아줌마>가 싫다, 나는 장진구다, 지식인이란 장진구다, 지식인은 본디 노는 사람이며 사회의 잉여다, 소크라테스 만한 장진구가 있었는가, 공자도 유비도 예수도 장진구였다, 우리를 미워 해라, 그러나 우리를 씹으려면 좀더 세련되시라... 김영하의 자기모멸은 얼핏 지성적이지만, 결국 김영하는 <아줌마>를 오독하고 지식인을 모욕했다.

지식인이 먹물이라는 대체어로 즐겨 불리는 데서 보듯, 비지식인들의 지식인 혐오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비지식인들은 지식인들을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생각은 현실 속에서 대체로 근거 있고 사실이지만, 얼마간은 오해다. 지식인에겐 노는 사람이나 사회의 잉여로 오해받을 만한 구석이 있다.

지식인은 여느 노동들처럼 몸을 움직여 분명한 결과물을 생산하는 노동이 아닌, 세상의 정신 부문을 담당하는, 세상을 분별하여 세상에 알리는, 매우 추상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갖는 그런 추상성은 종종 비지식인들로 하여금 지식인들을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오해하게 하며, 종종 지식인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이 본디 노는 사람이자 사회의 잉여라 오해하게 하곤 한다. 김영하의 경우다.
제 노동의 결과를 아카데미즘이니 인문주의니 딱지가 붙은 궤짝 속에 쌓아두기만 하는 부류는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게 중 나은 편이다. 훨씬 많은 지식인들은 백날 천날 놀면서 각종 실물 정치와 각종 실물 경제에만 집착하는 순수한 잉여들이다. 그런 잉여들의 유일한 노동이란 비지식인들로부터 자신을 구별지으려는 끊임 없는 노력이다. "오삼숙의 모델이 된 친구가 그랬다. 자기 남편은 아내가 저 하는 말 절대로 알아 듣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고. 또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말도 유행이 있는 것 같다고..."(<아줌마>의 작가 정성주)

김영하는 소크라테스에 공자에 유비에, 급기야 예수까지 끌어들여 <아줌마>를 공격한다. 그 논리적 해괴함(장진구가 십자가에 달린 까닭은?)은 덮어두고라도, 그런 시공 초월적 지식인론은 <아줌마>라는 과녁과는 거리가 멀다. <아줌마>는 섬뜩할 만치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80년대를 밑천 삼아 90년대에 백가쟁명을 과시하였으되 세상을 바꾸기는 커녕 2천년대 정신적 공황기를 도래케 한 사람들이다."(정성주)

<아줌마>의 그런 분명한 설정은 그런 설정 바깥 또한 분명히 한다. 세상은 분명히 장진구들로 차고 넘치지만 자신의 노동을 기억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는 지식인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김영하는 장진구 같은 지식인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했는데, 김영하는 장진구에 가미된 코미디 장치를 착각했다.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건 장진구가 아니라 장진구에 가미된 코미디 장치다. 그 장치를 걷고라면, 세상은 분명히 장진구들로 차고 넘치지 않는가.) 그들이 바로 2천년대의 정신적 공황기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며, 그들의 성실한 노동 덕에 세상에 차고 넘치는 장진구들의 죄가 사함 받는다.

추신 : 김영하는 '오삼숙과 그의 일당들 같은 순결한 민중들'은 1930년대 소비에트 선동극에나 존재한다고 했다. 2천년대의 소설가는 평균 이하의 교양을 요건으로 하는가. 소비에트 선동극 속의 민중들은 생으로 지어낸 인물들이 아니다. 억압의 상태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순결해진다. 어떤 졸렬한 인간도, 억압의 상태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순간 가장 순결해지는 것. 우리가 사람인 이유이자 역사에 절망하지 않는 이유다.(씨네21)
2001/04/17 17:32 2001/04/17 17:32
2001/04/16 21:55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은 80년대가 준 것이다. 젊은이들의 알록달록한 머리색,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을 권리, 그 대통령을 욕할 자유, 북한군을 인간으로 그린 영화, 민주적인 노동조합...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어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의 9할은 80년대, 그 불의 시대가 준 선물이다. 한국의 80년대는 특별했다.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인텔리 청년들이 일신의 안위를 뒤로 한 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투신하고 스러져간 시대가 있었던가.

80년대 청년들의 땀과 피가 땅에 베어 파시스트들이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될 무렵,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물론 그것은 사회주의의 붕괴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한 졸렬한 시도의 붕괴였지만) 더 이상 왼쪽으로 당기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적인 우경화가 시작되었다. 이 모순된 상황은 일견, 한국은 살 만한 나라가 되었고 사회주의적 가치는 시효를 다 한 것처럼 보였다. 10여 년을 극악한 군사 파시즘과 싸우던 청년들의 긴장은 그 변화한 상황 속에서 혼란에 빠졌고, 정처 없이 흐트러져갔다.

10년이 지났다. 오늘 그들은 대략 셋으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의 내용은 폐기하고 이력만을 팔아 장사에 나선 부류는 접고 가자. 그런 천박함까지 80년대의 이름으로 언급할 순 없으니.)

첫째, 세상이 달라졌다는 의견에 명백하게 반대하며 80년대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이다. 손에 꼽을 만치 적은 그들은 곤란한 처지에 있다. 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변했다고 합의했고, 그런 합의를 기반으로 하는 방식의 운동이 각광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이 지키는 신념은 낡은 것으로 비쳐지기 일쑤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는 의견에 찬성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들은 ‘여전히 남은 문제들’과 싸우는 유일한 세력이다. 그들은 낡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새로운 세상에 접근한 사람들이다.

둘째, 이른바 90년대 이후의 변화한 상황을 근본적인 변화로 규정하고 적응한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90년대 중반 이후 급부상한 부르주아적 시민운동이다. 그런 새로운 방식의 운동은 80년대의 전체운동 중심 운동의 그물에 담지 못했던 중산층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챙기며, 준 정당에 가까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 성과야 지나칠 만큼 충분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런 운동이 오늘의 유일한 운동인 양 주장되는 일이다. 그런 주장들은 바로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을 어리석고 낡았다고 비난하는 일이 된다.

(그들은 여전히 ‘80년대의 연속성’이나 ‘변혁의 전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들의 실제 활동 속에서 그런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지를 위해 많은 것을 타협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언론에 의지하다 보니 언론문제에 불분명한 입장을 보인다든가, 언론에서 다뤄줄 만한 주제에 편중한다든가, 그 번듯한 살림을 꾸리기 위해선 과격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든가 하는 문제들은 그들의 족쇄다.)

셌째, 이력을 팔아 장사에 나설 만큼 간교하지도 변화한 상황에 적응할 만큼 재빠르지도 못했지만, 여전히 신념을 지키며 살기엔 변화한 상황의 혼란과 피로를 이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80년대의 청년들의 가장 많은 부분일 그들은 말 그대로 청년 시절의 노고가 허망해져버린 사람들이다. 남들이 일신의 안위를 준비하느라 열심일 때 거리와 현장을 내달려야 했던 그들은, 꼭 그 만큼 경쟁에 뒤진 삶을 어색하게 꾸려간다. <한겨레>를 구독하고 남들보다 진지한 책을 읽고 선거 때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정당에 투표하기도 하지만, 그런 작은 노력들은 이미 천민자본주의의 정신에 사로잡힌 그들의 주변으로부터 은근한 경멸의 대상일 뿐이다.

오늘 80년대의 청년들은 (변화한 세상에 적응한 사람들을 빼고는) 대개 세상의 경멸에 처해 있다. 희한한 일은, 사람들은 그 청년들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9할을 주었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그 청년들을 마치 어리석은 과거를 가진 사람처럼 경멸하곤 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동의는 그런 경멸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 청년들이 ‘그 80년대에 데모 한번 안 해본 놈들’에게서까지 받는 그런 경멸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하는 말대로, 그들이 80년대의 후반기에 그렇게 열심하던 사상 투쟁이나 사회구성체 논쟁은 분명 과열된 부분이 있었고 그들의 운동엔 편중된 부분이 잇었다. 그들이 90년대의 혼란에 그렇게 무력하게 흐트러진 일 또한 그런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해선 그런 오류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다. 오히려 80년대가 종료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토론이 진행되지 않은 일은 아쉬운 일이다.

문제는, 80년대의 오류에 대한 그런 비판들이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한 생산적인 목적이 아닌 엉뚱한 목적,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80년대의 정신은 ‘지나친 자본주의’로서 신자유주의 정신과 적대적이며, 80년대의 정신이 아무 구분없이 경멸되어야 할 필요가 바로 거기 있다. 오늘의 정신, 신자유주의의 정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는, 모든 경제적 실패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넘겨지는,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대로 신분을 나누는, 일류대학이 부자의 자식들로 채워지는, 오로지 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부모가 자식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올바로 살라고 가르치는 일이 자식과 제자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정신이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희망은 부당한 경멸을 돌려주는 일에서만 출발할 것이다. 80년대, 그 위엄을 되찾아야 할 때다.

(우리교육)
2001/04/16 21:55 2001/04/16 21:55
2001/04/10 22:27
내가 ‘가난’과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건 상계동 철거민들을 만나면서부터이다. 난 상계동 철거현장에서 책으로만 봤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력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포크레인을 앞세워 집을 부수는 빨간 모자를 쓴 철거 깡패들, 그 포크레인 밑으로 몸을 던져 철거를 막으려는 주민들, 겁에 질려 울고있는 아이들... 이런 장면들을 촬영하면서 단지 이사갈 수 없는 세입자란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재개발은 올림픽과 도시미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재벌과 정부의 땅투기, 집투기라는 사실을 별다른 설명 없이도 깨달을 수 있었다. ‘구조나 계급이 문제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안 끼치고 산다’같은 평소 내 지론은 그 상계동 철거현장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당시 난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곳 역시 20년 전 뚝방 동네 사람들이 살던 보금자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의는 아니더라도 결국 나 역시 가해자에 편에 있었던 셈이며 그런 부끄러움이 철거민들을 평생이웃으로 선택하게 했다. 난 상계동 주민들과 함께 머물면서 카메라를 그들의 시선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겉으론 쾌적하게 보이는 아파트들, 순진한 중산층의 욕망 이면에 있는 자본과 권력의 음험한 결탁과 온갖 회유와 협박, 그리고 철거민들의 저항 혹은 굴복의 역사를 나의 카메라로 파헤치고 싶어했다.

‘<또 하나의 세상> 연출 노트’에서

대마초를 길러가며 피웠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도 있고, 선생의 청년 시절 이력과 오늘 삶은 무척 대조적이다.

지금 내 삶은 대학을 졸업하도록 세상물정 모르고 놀았던 퇴폐적인 삶에 대한 당연한 벌이라는 생각도 한다. 80년 6월에 제대해보니 세상은 시끄러운데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고통스러웠고 앞이 보이지 않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자살까지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나도 뚜렷한 인생관을 갖고 싶다,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천주교 쪽에서 빈민운동 하던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도와주었다. 세례를 받으며, 다시 태어났으니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탕자가 돌아오는 건 아니다. 달랐다는 생각은 안 드나.

원래 이렇게 되게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 집안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삐딱한 데가 있었고 언젠가 ‘이터널 마이너리티’라는 말을 듣고 생각을 많이 했다. 소수일 때 오히려 풍요로울 수 있고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다는 생각. 특히 한대수 씨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시절 내 또래는 대개 그랬지만 남과 달랐다면 그런 반항심이 맥을 끊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는 거다.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대한 건 아니었어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은 언제나 품고 있었다.

옛날 생각을 하기도 하나.

이따금 씩. 그러나 미련은 없다. 놀아볼 대로 놀아봤기 때문일 거고 그런 쾌락이 남기는 허무와 불쾌감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거다.

실은 나도 선생처럼 좀 다른 이력이 있다. 얼마 전 어느 웹사이트에 건달 출신인 주제에 세상을 비판할 수 있느냐는 글이 올라 웃었다.

아, 그런가.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방황의 어떤 부분을 분명히 반성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이너의 가치를 익히는 것일 수 있고 무난하게 생활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다큐멘터리 하기 전엔 충무로 생활을 했는데.

대학원 다니면서 조감독 생활을 했는데 학교나 사회 분위기와 영화 조감독 하는 나 사이의 심한 괴리를 느꼈다. 내가 너무 편하게 앞길을 정하고 간다는 죄의식이었다. 상계동에 들어가면서 많이 정리가 됐다. 어떻게 하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유학을 가야 하나 충무로에 남아야 하나 하는 고민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건지 철거민들한테서 배웠다. 극영화를 그만 두고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면서 철거민이라든지 비전향 장기수라든지 노동자라든지 세상의 그늘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의사의 아들이 철거촌이라. 거부감은 없었나.

매료되었다. 내가 본 상계동 철거민들은 아주 용감하게 싸우고 싸움이 끝나면 어린아이들처럼 엉엉 울기도 하고 커다란 솥에다가 밥이나 라면을 끓여 빙 둘러앉아 먹고 술판 벌어지면 정말 노는 것처럼 놀고 그런 모습에 매료되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게 그들에게 있었다. 동시에 내가 존중하던 사람들의 허위나 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중에 낭만적인 기대만 하다 그들의 뒤틀린 외양에 기층 실망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상계동에서 한참 싸움이 절정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을 봤다. 옷가지가 들어오면 같이 모여 나누어야 할텐데 몰래 먼저 좋은 걸 빼간다든지, 라면 들어온 걸 누가 하나 더 가져갔네 해서 싸움이 나고, 그런 다툼으로 회의가 개판이 되고 그랬다. 내가 잘못 판단했나 잘못 믿었나 하는 좌절감이 들었다. 그런 고민을 내가 소속한 천도빈(천주교 도시빈민사목회) 신부님들에게 털어놓으니 그러더라. 그런 모습들이 비굴하고 추악하게 보이겠지만 중산층이나 부자들은 사기를 친다거나 도둑질을 하는 것도 점잖은 방법으로 하기 때문에 안 드러날 뿐이다. 그런 면은 사람한텐 다 있는 거다. 차라리 솔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지식인들은 민중을 개념화하고 개념화한 민중에 실망한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데서 출발하면 된다. 민중에 대한 낭만적 기대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민중에게 있다. 중요한 건 그런 모든 것들을 솜처럼 받아들이는 힘 또한 민중에게 있다는 거다. 어떤 분이 민중을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힘이고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다.

개신교 평균치에 비해 나은 편이긴 하지만 천주교 역시 보수적인 부분도 많다.

말하자면 천주교 좌파인 셈인데 성당에는 잘 안 나간다. 천도빈 모임이나 동네에서 미사 할 때는 꼭 참석하지만 큰 성당이나 이런 데 가면 적응이 안 된다.

기독교든 천주교든 예수의 삶을 따르는 일인데.

무엇보다 가난해야 한다. 강요된 가난은 죄악이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은 바로 예수의 모습이다. 그것에 의심이 없다. 이젠 버리는 게 어렵지 않고 갖지 않는 게 편안하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버틸 수 있다고 믿고 웬만한 건 걱정을 안 한다. 아이들 과외도 못 시키지만 과외를 시키는 게 비정상이고 설사 아이들이 대학을 못 가고 가난한 기층 민중으로 살더라도 전혀 걔들한테 불행한 게 아니라고 믿는다. 도시빈민이나 농민 노동자의 삶 속에는 지식인들이나 중산층들의 삶이 가질 수 없는 게 있다.

선생에게 가난은 자기 절제인가.

편안한 거다. 그러나 무작정 편안한 게 아니라, 가난해야만 가난의 가치를 가질 때만 세상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고 나는 그걸 따라가는 거다. 가난은 이제 내 가치관이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부인은 선생을 지지하나.

아내도 빈민운동을 했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일치한다. 많이 못 벌어가는 건 별 문제가 없는데 최저생계비를 못 지키기는 일이 잦아지면 심각하게 추궁을 받기도 한다. 요새는 좀 낫다. 특강 불려가고 대학 강의도 적지만 고정수입이 되고.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아이들 문제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텔레비전을 멀리해야 할 텐데 꼼꼼하게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잘 못한다.

아이들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나.

직접 물어본 일은 없지만... 아내 말로는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제일 아쉬운 게 시간을 같이 못 보내는 것이다. 새벽에 작업하다 들어가서 애들이 학교간 다음에 일어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모습이 아이들한테 안 좋게 보일 것 같아 고민이다. 아내나 아이들은 일찍 자고 5시에 일어나는데 나는 야행성이라 그 시간에 자니까 잘 안 맞는다. 집안 일이라도 분담하려고 노력을 한다.

<민들레>를 만들던 후배들이 한번은 그랬다. 유가협 어머니들과 오래 지내다 보니 갈등하는 모습이나 꺼려지는 모습도 있는데 작품에 그런 걸 담아야 할 지 빼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나는 보여줘도 충분한 올바름이 있지 않느냐고 했는데 어찌 됐든 <민들레>엔 그런 모습들이 담겼고 그래서 더한 감동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그런 고민은 필연적일 텐데.

늘 부닥치는 고민이다.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 80년대에는 국가 폭력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당시 철거민 내부의 갈등을 드러내는 일은 그야말로 객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젠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최근작인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은 너무 미화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 작품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상계동 철거하면서 꿈꾸었던 공동체가 바로 행당동 공동체다. 협동운동을 하면서 자활을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가난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행당동이 이루어냈다. 물론 그런 모습이 다는 아니지만 나는 그 작품을 일종의 교육용이라 생각했다. 다른 철거민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할까. 내가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면 그들의 갈등하는 모습이 담겨야겠지만 나는 그들의 사업을 그리려 했고 그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강조하려 했다.

다큐멘터리에서 객관성은 존재하는가.

이를테면 10여년 전 텔레비전에서 광주를 다룬 <어머니의 노래>라는 작품을 했다. 당시 그 작품이 객관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희생자들 편에만 서 있다는 방영 반대 논리가 있었다. 물론 그 작품을 낱개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통시적 관점에서 보면 10여 년 동안 텔레비전은 가해자의 논리에 의해서만 광주를 묘사하지 않았나. 그런데 10년이 지나 처음으로 피해자의 시점이 강조된다 해서 객관성을 잃었다고 얘기할 순 없다는 거다. 내가 다루는 소재로 얘길 한다면 80년대에는 도시빈민 문제가 묻혀 있던 역사였다. 그것을 처음 드러낸 작품을 가지고 객관성을 논란하는 건 사치스런 일이지만 이젠 도시빈민운동의 역사도 생겼고 도시빈민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작품도 몇 개 나와 있으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생각한다. 나만의 균형감각인 지 모르겠지만 한 작품을 가지고 객관성을 말하는 건 위험하다. 다른 작품과의 관계라든가 사회 전반의 맥락에서 작품을 봐야 한다.

푸른영상 안에서 그런 입장 차이로 갈등을 빚는 일도 있나.

우리는 세상을 보는 입장 자체가 비슷한 편이라 큰 갈등은 없다. 이미 어느 정도는 걸러진 비슷한 사람들이 푸른영상에 들어오기 때문일 거다. 물론 관심 소재나 주제는 다들 다르고 사람을 전면에 세우느냐 주제를 전면에 세우느냐 하는 방법론도 다들 다르다. 제안한 사람, 먼저 얘기를 꺼낸 사람에게 기본적인 결정 권한을 주는 게 우리의 원칙이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보나.

텔레비전 덕에 다큐멘터리가 양적으로 늘어났다고들 하지만 실은 텔레비전이 다큐멘터리를 말아먹었다. 텔레비전 덕에 다큐멘터리의 모든 형식과 방법이 굳어버린다. 텔레비전에서 요구하는 형식이 있다. 친절해야 하고 뭔가 깔끔해야 하고 시청률 때문에 소재주의나 선정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항상 시간에 쫓기느라 최소한의 예술적 고민이 어렵다. 구조적으로 많은 걸 포기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 방송사 밖에서 만들어지는 다큐라 해도 텔레비전이 거의 유일한 상업적 경로이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요구하는 걸 염두에 두고 작업하게 된다. 텔레비전 이전에도 다큐는 있었다. 우리는 텔레비전 다큐를 다큐의 전부처럼 생각하지만 그건 3, 4십 년밖에 안된 거다. 텔레비전 이전의 다큐들은 자유분방했고 예술적으로도 훌륭했다.

계급적 편향도 문제인 것 같다.

텔레비전 다큐는 PD의 시각, 중산층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런 해석들이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염된다. 다른 시각으로 말하고 다른 방법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텔레비전은 언제나 한가지 시각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선생의 작품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겠다면.

당연히 받아들인다. 물론 우리로선 방영료를 받는 것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작품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한테 보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간섭만 없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90년대 초만 해도 독립 다큐 하는 사람들이 홈비디오 장비를 사용했던 걸로 안다. 6밀리 디지털이 나오면서 그런 장비의 문제가 해결된 셈인데.

6밀리 디지털은 크기도 작고 값이 싸면서도 프로급 성능을 가진 장비라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엔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다. 우리도 97년부터 대부분 6밀리로 작업한다.

좀 달라지고 있지만, 영화 하는 사람들에겐 필름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다. 필름 다큐멘타리를 할 생각은 없나.

전혀,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낀다. 필요하다면 키네코 장치로 비디오 작업을 필름으로 옮기면 된다. 필름카메라는 굉장히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연출을 할 수밖에 없다. 대상이 편안하지 않고 워낙 필름이 비싸기 때문에 인터뷰를 해도 연습을 하고 해야 하니 그걸 무슨 재미로 하겠나.

VJ라는 직업도 디지털 장비와 함께 본격화 했다. 자주적인 다큐 작가일 수도 있고 새로운 형태의 방송 아르바이트로 보이기도 한다.

외국의 경우에는 VJ들이 스스로 아이템을 잡아 촬영하고 나래이션 넣어 우리로 말하면 9시 뉴스 같은 데 팔고 한다. 우리 방송사는 그런 걸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걸 자기네들이 한다는 생각으로 방송사 안으로 흡수하려 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청구조에 머물게 된다. VJ들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다.
근래 한국영화의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모든 가치 기준이
산업 차원으로 흐르는 건 한심해 보인다. 투기업자가 영화판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어떤 평론가는 할리우드에 비하면 한국영화는 다 독립영화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선생은 독립영화협회 대표이고 실제로 독립영화인들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데.

2년 전 스크린쿼터 싸움할 때 독립영화 쪽도 참여했는데 한편에선 독립영화와 스크린쿼터가 무슨 상관이냐는 비판이 있었다. 당시 나는 오락영화나 영화적 환상도 필요하다,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참여했다. 문제는 스크린쿼터를 내세우며 영화가 하나같이 블록버스터를 지향하고 그런 영화만이 살아남게 되는 구조가 되어간다는 거다. 이제 우리는 스크린쿼터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요구할 것은 독립영화 전용관과 문화로서의 영화다. 한국영화 구조가 이젠 완전히 할리우드를 빼 닮아가고 있다. 산업적 외형에서 나아졌다지만 속으론 더 악화되었다. 옛날에는 그나마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재미있는 영화와 재미없는 영화만
있을 뿐이다.

그런 흐름을 견제하기엔 독립영화 쪽의 힘이 부족해 보인다.

아직은 자생력이 없고 그런 실정이 모든 문제의 한 원인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환갑 넘은 사람들도 독립영화를 하는데 그런 전통과 역사가 생길 때 독립영화 쪽에서 영화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선생이 환갑을 넘기면 한국에도 환갑을 넘긴 독립예술가가
존재하게 된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대중 음악 쪽도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독립예술가 생활을 계속한다는 게 아직은 어려운 현실이다. 열심히 하던 사람들도 일정한 시기가 되면 제도권으로 편입되거나 아예 포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독립예술 부분은 제도권 예술계의 예비 인력풀이나 아마추어 부분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독립영화는 결국 독립영화니까 어려운 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다만 외국엔 기금 같은 게 많다. 영화를 찍겠다 하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생활보조비가 나간다. 우리는 이제 그런 게 시작되고 있는데 좀 기형적이다. 현재 상태에서 직접 지원에 치중하는 건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고 미디어센터를 만들어 카메라나 편집장비들을 좀더 쉽게 활용하고 전용관에서 작품을 상영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무조건 돈으로만 풀려 하는 건 박정희 시절부터 길러진 습성이라 바꾸기가 어려운 것 같다.

돈 문제는 좀더 심각한 부분 아닌가.

돈, 물론 좋다. 우리도 운영비가 맨 날 모자라 사전제작 지원금을 받아볼까 생각도 하는데 돈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밥값 없으면 찍는 사람한테 얻어먹고 테이프 없으면 쓴 테이프 또 쓰면 된다. 다른 곳과 비교하면 서울영상집단은 좀 길게 잡고 큰 작품을 하고 노동자뉴스제작단은 반대로 현장성과 속보성을 중요시 하는데 우리는 그 중간 쯤이다. 원맨 시스템으로 제작비를 최소화 하되 대신 시간을 많이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카메라와 편집장비가 있으니 테이프 값이나 진행비 정도 1,2백 만원으로 작품을 할 수 있다. 돈 없어서
제작 못하는 건 아니다.

결혼식 비디오는 요즘도 하는가.

나는 이제 졸업했지만 여전히 많이 한다. 수익사업은 30만원 이하는 개인 아르바이트로, 30만원 이상은 푸른영상의 사업으로 하고 있다.

30만원이 넘는 종목은 뭔가.

요즘 시민단체에 돈이 도니까 가장 많은 게 교육비디오 제작이다. 기업 홍보물도 내용이 건전하면 만들어준다. 중국 투자 중계하는 회사, 쓰레기를 분해해서 거름을 만드는 회사, 영어교재도 했고...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닌데 문제는 없나.

사실 수익사업이라면 포르노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 물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기는 하지만 이걸 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고민에 시간을 뺏기는 건 더 어리석은 일이다. 한나라당 의원 홍보물을 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내부 논쟁이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다 생각한다.

활동비는 얼마나 지급되나.

30만원이 기본이고 결혼을 하면 10만원 붙고 아이가 생기면 또 10만원 붙고 아이가 둘이면 또 10만원 붙는 시스템이다. 처녀 총각들은 30만원을 받는 거고 나는 아이가 셋이니까 70을 받아야 하는데 대개 50% 미만으로 받는다. 이번 달에도 고민스러운데 지난 달에 50% 받았고 지지난 달에는 30% 받았다. 100% 받는 건 수익사업의 잔금을 받았다든지 그럴 때인데 1년에 한두번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10%든 20%든 반드시 활동비를 지급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라는 단편영화는 내용이 파격적이었는데 어디선가 선생이 칭찬한 걸 봤다. 선생 취향은 아닐텐데 그런 노력이 주는 나름의 유익을 평가하는 건가.

아니, 그 자체의 상상력이 신선하지 않은가. 무조건적인 사랑인 모성애를 포르노에 빠진 아들과 비교한다는 건 상당히 신선한 발상이다. 결국은 모성애의 승리로 끝난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하기도 하고. 우리한텐 80년대의 경직된 관성들이 남아 있다. 80년대의 관성이 없어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 시작하는 유연함도 있다.

그런 작품을 직접 해볼 생각도 있나.

해보고 싶은데 이젠 내 상상력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내가 70년대 세대라 오히려 데카당스한 경험을 해봤다는 거다. 80년대에도 나는 중심에 있지 않고 보조자 역할이었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나는 사회과학 서적을 거의 안 읽었고 해방신학이라든지 종교관계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 내가 무식해선지 그쪽이 유연해서 좋았고 오래 간다.

한국 영화의 부흥은 80년대 영화운동 하던 청년들이 대거 충무로로 투신한 결과이기도 하다. 누구도 그들에게 계속 운동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지만 그들의 행태엔 분명 지나친 데가 있다.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모욕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아예 부정한다고 말하면 좋겠다. 부정하는지 안 하는지 말도 안하고 안면을 몰수하는 게 문제다. 영화운동 같이 하던 사람들이 충무로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성공하는 걸 보면 한편으로는 박수치고 싶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의문이 든다. 혼란스러운 건 전혀 다른 작품을 한다는 거다.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 고민하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만 받을 수 있다면 흔쾌하게 박수칠 텐데. 욕하고 싶진 않고 조금 갸우뚱하는데 아직 인간적인 유대는 남아 있다고 믿는다. 4월에 독립영화 회고전을 하는데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옛 동료들하고 토론회를 하기로 했다. 그때 무슨 얘기가 나올지 궁금하긴 한데 얘기가 잘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아까 시민단체에 돈이 돈다고 했는데 뒤집어 말하면 그들이 제도권의 구미에 맞는 운동을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방식의 운동이 각광을 받으면서 좀더 진보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운동은 부당하게 폄하되는 분위기가 있다. 독립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거슬리는 건 누구든 유독 선생에 대해선 다들 칭송 일변도라는 점이다. 그러나 선생 한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그런 칭송은 전체 독립영화인들에 대한 경멸을 전제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좀 꼬인 건가.

아니다. 나 역시 낯간지럽다. 그런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긴 커녕 차라리 너나 똑바로 해라 싶은 생각이 든다. 문제는 나한테 있는데 부닥치지 않는다는 거다. 뭔가 따끔한 게 있었다면 그런 얘기 못 할텐데 두리뭉실 관계를 유지하니까 그런 것 같다. 내 성격이 딱딱 끊지를 못한다. 나는 해도 남한테 강요하기 싫고, 넌 그렇게 가라 나는 나대로 간다라는 적당주의가 있다.
하여튼 선생은 한국 독립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니 그런 뒤집힌 가치들에 한번은 정색을 하고 비판할 필요도 있지 않은가. 분투하는 후배들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지도자 품성이 아닌데 억지 춘향으로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할 자신이 있다. 결정적인 순간이 언제인지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그런 소릴 들으면 정말 화가 난다. 물론 각론으로 들어가면 좋아진 것도 있다. 독립영화도 이젠 검열 걱정 안 하니 좋고 도시빈민들도 임대아파트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나더러 행복해졌냐고 묻는다면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하겠다.

뭐가 문젠가.

달라지지 말아야 하는 것들만 달라지고 달라져야 하는 것들은 안 달라진다. 옛날엔 힘이 들었지만 모이면 힘이 났는데 동지들 다 떠나고 관계가 엷어지고, 만나도 옛날에 우리가 잘못 생각했어 그때 웃겼어 그런 냉소만이 가득하다. 근본적으로는 아직 달라진 게 없는데 민주주의든 삶의 질이든 아직 과정 중에 있는데 포기해 버리면서 피상적인 변화만 가지고 세상이 달라졌다, 사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강변한다.

절망적인가.

종말론적인 어두움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을 믿는다. 내 안에도 우리 사회에도 희망이 있고 그걸 키우고 싶다. 키우는 방법은 결국 희망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자체가 희망인 사람들을 만나는 데서 출발한다. 내 주변에 누가 있는가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내 경우, 산동네 사람들이 여전히 만나서 즐겁고 내게 힘을 주는 사람들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이라기보다는 빈민운동가라는 비판 아닌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나는 빈민운동에서도 아웃사이더다. 빈민운동과 신자유주의 문제를 연결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내고 있다. 빈민운동이 사회운동에 복무하는 흐름이 대세이던 시절 나는 지역에 천착하고 삶에 비중을 두고 싶었다. 당시엔 노동운동이 너무 말이 많고 자기들이 주인공이라 생각해서 달갑지 않았다. 빈민운동은 자기 동네에서 하니 삶과 투쟁이 유리되지 않는 진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오히려 빈민운동이 노동운동과 연대하고 전체 운동의 맥락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운동이 대안으로 주장되기도 하는데.

공동체 운동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거나 지나치게 중산층적으로 갈 위험이 있다. 그리고 빈민운동처럼 분명한 공동체 운동은 없다. 이를테면 아파트공동체 운동 같은 중산층 운동에 빈민운동이 줄 건 있어도
받아올 건 아무 것도 없다. 노동운동은 계급도 같고 이젠 빈민운동도 계급 운동의 정체성을 강화할 때라고 본다. 결국 빈민운동은 노동운동과 함께 가야 한다.

십수년 전 군대 말년휴가 길에 인사동에서 <상계동 올림픽>을 봤다. 이른바 변혁운동의 열기가 한껏 고조될 무렵이었고 관객의 질문에선 카메라가 멀다, 왜 카메라는 싸우지 않느냐는 식의 공격이 있었다.

기억한다. 그런 질문에 나는 엉뚱한 답변을 했고 그런데 부끄러운 걸 몰랐다.
왜 나를 여기에 불러서 자기들의 기준으로 재단하려 하나 하는 불쾌감도 있었고, 한편으론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나저나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누구나 아는 일이기도 하다. 하여튼 그들은 그렇게 사라졌고 선생은 오늘 한국영화에서 가장 정치적인 지점에 서 있다. 나는 선생의 그런 지점이 선생보다 앞장 선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결과라 생각했는데 선생은 당시에 비해 좀더 분명한
정치 의식을 갖게 된 것 같다.

좀 나아졌다. 상계동 만들 땐 계급의식이 아닌 중산층적 영화인적 의식에 머물렀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남들에겐 시류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지만 나로선 너무나 당연하다. 오늘, 어느 시절보다 더 분명한 너무나 분명한 세계적 계급분화 현상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오죽하면 수십년 잠잠하던 미국 대학생들까지 신자유주의 반대를 말하겠는가.

지난해 선생의 다큐멘터리 15주년 특별전을 한 걸로 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뭔가.

아무래도 <상계동 올림픽>. 철거민들과 살게 되고 그 작품을 만들게 된 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엉뚱한 출세작이 되었고 결국 내 삶을 규정했으니 나로선 운명적인 작품인 셈이다.
요즘도 테입이 팔린다던데.

철거민들과 3년 동안 같이 살면서 만들었다는 부가가치가 있는 것 같다. <상계동>은 걸레 같은 화질에 어줍잖은 나래이션에다 3년 동안 찍었는데 27분밖에 못 건진 그런 작품이다. 그때 다큐멘터리가 뭔지 알았다면 그렇게 만들지 않았겠지. 그러나 알았다면 아예 만들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상계동>은 작품이라기보다 기록의 느낌이 강하다.

지난해 특별전(김동원 특별전) 때 상계동 시절 총무하던 분을 초청했다. 당시엔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상계동을 못 봤던 분이다. 현장은 영화보다 치열했다는 비판을 기대하고 초청했는데 내가 고생 했다는 얘기, 영화는 찍지 않고 돌 들고 같이 싸웠다는 얘기만 했다. 사실 <상계동>의 절반은 내가 찍은 게 아니다. 동네 청년들, 천도빈 회원들이 찍었다. 나는 못 찍더라도 같이 돌 던지고 싸우는 게 마음 편했고 지금도 그렇다.

특별전 때 선생은 후배들에게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 평론가는 그 일을 “비판으로 선배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고 적었던데.

그 지적들이 나름대로 정확했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점에서 후배들의 그런 비판은 나에게도 필요했다. 물론 내 작품을 독립영화의 표본으로 놓고 얘기하는 건 무리고 내 작품은 어떤 고리가 되기에 약하지만 후배들의 그런 비판을 나 역시 일종의 헌사로 받아들인다.

새로운 시도란 무엇인가.

독립 다큐가 독립 다큐라는 이유만으로 옹호 받고 지지 받는 단계는 넘어설 때가 되었다. 밖에서 어렵다면 안에서라도 비판해야 할 시점이다. 두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는 운동으로서 다큐라고 했을 때 이젠 내부 갈등도 드러내고 그것을 이슈화 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개인을 다룬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내 가족 이야기, 연애 이야기 같은 개인사들 말이다. 물론 그 목적은 진보여야 한다.

목적이라 했나.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기록하는 예술이고 소재나 대상은 달라진다 해도 언제나 그 목적은 현실이 변화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목적은 진보다.

선생의 가난한 카메라가 이길 것이다.



김동원

푸른영상 대표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영화위원장

1955년생
서강대 신방과 대학원 졸업
1983-86 이장호, 정지영, 장선우 조감독
1988년 <상계동 올림픽>
제39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
1991 야마가타국제기록영화제 초청 상영
1990년 <벼랑에 선 도시빈민>
1991년 <하느님 보시니 참 좋았다>
1991년 푸른영상 설립
1993년 <미디어 숲속의 사람들>
1994년 <행당동 사람들>
1995년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
1997년 <명성, 그 6일의 기록>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독립영화상 수상,
제 48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 초청 상영
1999년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
2001/04/10 22:27 2001/04/10 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