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0 15:10
몇십일 기간을 정해놓고 새벽에 일어나 8시간씩 연습하는 연주자 이야기를 듣다가 며칠 전 우연히 본 영상에서 공병호의 말 '열심히 노력해서 더 많은 성취를 만들어내는 삶이 왜 자기착취인가?'가 떠올랐다. 수행정진과 자기계발의 차이를 생각했다. 나를 덮은 온갖 더께를 걷어내고 진짜 나를 찾는 일과 나를 더 바람직한 다른 나로 교체하는 일. 후기 자본주의가 부여하는 고통이란 결국 삶의 결이 어떤 수준에서든 수행정진 지향에서 자기계발 지향으로 바뀌어버린 데 기인하는지도.
2017/04/20 15:10 2017/04/20 15:10
2017/04/19 18:46
민주주의는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한다. 선거에서 어떤 후보를 지지하든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혹은 혐오해 마지않는 후보를 비난할 순 있다. 그러나 그런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에 대한 비난은 내 입 안에 머물러야 한다.
2017/04/19 18:46 2017/04/19 18:46
2017/04/18 14:47
현재의 정치 체제가 현재의 사회 성원의 의식 수준이나 이념 범주를 담기엔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건 대체로 동의하는 사실이다. 60년 이상 정상 우파 행세하던 극우 정치의 괴멸은 변화의 조짐이지만 좌파 정치가 기이하리만치 휑하니 비어 있는 상황은 여전하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선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다음 선거는, 그리고 그 다음 선거는 어떻게 되는 걸까?

부모들과 교육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김없이 서유럽, 특히 북유럽  교육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 말한다. '나도 그런 나라 살면 당연히 그렇게 하죠. 하지만 여긴 한국이니까 어쩔 수 없죠.' 맞는 말이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의 선택, 은 언제나 맞다. 다만 그 말엔 두가지가 빠져 있다. 그 나라들은 원래부터 그랬는가? 주어진 현실은 앞으로도 어쩔 수 없는 건가?

그 나라들도 지금 한국 못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다. 내 아이만 챙기려는 태도도 만연했다. 그러나 모든 아이의 현실을 바꾸어야 내 아이의 현실도 바뀐다고 생각한 부모들이 있었다. 그들은 처음엔 매우 소수였지만 그들이 씨앗이 되어 서서히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고 교육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다음 부모들은 더 수월했고 변화는 가속도가 붙었다. 이제 그들의 교육 현실은 그들에겐 그저 주어진 현실일 뿐이다. 사회 변화는 늘 그렇게 일어난다. 주어진 현실에 머물지 않기로 한 평범한 사람들이 사회 변화의 주역이다. 그들이 없다면 명민하고 헌신적인 활동가도 무력하다.

지나치게 협소한 정치 체제에서 일단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건 이성적 태도의 범주에 석한다. 그러나 그 협소함에 굳이 자신을 꿰어맞추어서 스스로 협소해질 이유는 없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길 소망하는 사람이 고작 문재인/안철수 패거리(지지자 아닌, 제 후보 당락에 인생이 달라지는 이해 당사자들)의 이전투구에 휩쓸리거나, 이른바 사표론에 휘둘리는 건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이 아닐까.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일과, 주어진 현실이 바뀌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은 언제나 함께여야 한다.
2017/04/18 14:47 2017/04/18 14:47
2017/04/17 14:23
언제부턴가 교감능력이 가장 중요한 인간적, 사회적 덕목으로 부각되고 관련한 말들도 넘쳐난다. 꽤 많은 사람에게 세계는 마치 교감능력이 있는 선인과 교감능력이 없는 악인의 대결장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물론 인간은 교감능력 없이 살 수 없다. 교감능력은 인간과 인간의 정서적 차원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냉정한 대면과 실천적 연대를 만들어낸다. 교감능력은 변혁의 동인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에게 교감능력처럼 상투화하기 쉬운 것도 없다. 교감능력은 종종 입에 발린 말, 좋은 사람 행세, 감상적 태도 등으로 대체되며 변혁의 '선한' 방어막으로 돌변한다.
2017/04/17 14:23 2017/04/17 14:23
2017/04/16 11:17
예수의 부활이 단지 육체의 부활이라면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류 최고의 마술사일 뿐이다. 우리는 마술사에 감탄하지만 존경하거나 신앙하진 않는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함께 십자가를 질 것을 요청하면서, 즉 수난과 육체적 죽음까지 불사할 것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온세상을 얻어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말하는 장면이 있다. 예수는 진정한 목숨이란 무엇인가 질문한다. 예수의 질문은 사회가 요구하는 자아상으로 내 자아를 교체하여 살아가고, 그 성공적 교체를 인생의 성공이라 여기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유의미하다. 부활절이 그 질문을 묵상하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날이면 좋을 것이다. '나는 정말 살아 있는가?'
2017/04/16 11:17 2017/04/16 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