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8 02:58
4월 12일부터 대안공간 루프에서 ‘혁명 노트, 메타노이아’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합니다. 4회에 걸쳐 진행되며 우선 주최측의 안내문을 붙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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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노트, 메타노이아’ 세미나 안내

강연자: 김규항
장소: 대안공간 루프
시간: 19:00 - 21:00
참가비: 무료
참여신청: gallery.loop.seoul@gmail.com

우리는 실은 혁명적 변화가 아니면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동시에 우리는 더 이상 혁명은 가능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끝없는 우울은 그런 모순적 상태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혁명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총체적 면모를 경제적 차원으로 우겨넣는 경박한 유토피아주의, 급진적 사상과 이론들을 만들어지는 족족 말과 글의 감옥에 가두는 지적 힙스터 놀이는 혁명과 무관하다. 혁명은 무엇보다 삶의 비참과 대면하는 일이다. 로봇이 인간 노동을 대신하는 생산력 수준에서도 노예적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비참은 물론, 제 지성과 신념을 알량한 정치적 올바름으로 대체하는 비참, 제 욕망을 체제의 메뉴대로 조정한 대가로 안락을 누리는 비참... 비참은 어디에서 기인하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해방적 전환은 가능한가?

4월 12일 자유로운 노예들
4월 19일 자본주의교의 삼위일체
4월 26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반공주의
5월 3일 메타노이아, 삶의 지속

2018/03/28 02:58 2018/03/28 02:58
2018/03/25 14:10
블랙리스트 1호라는 이윤택부터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 후 ‘문재인의 국민이 되고 싶다’는 말을 남긴 김기덕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 진영의 인사들이 줄줄이 성폭력 가해자로 밝혀지다보니 ‘보수나 진보나 똑같은 놈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똑같다는 내용은 아마도 윤리일 것이다. 그런데 윤리는 무엇일까? 한 인간의 윤리는 대체로 두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그의 고유한 윤리의식이다. 누가 보든말든 뭐라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가 가지고 지키려는 의식이다. 그러나 이건 우리의 윤리에서 생각보다 아주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잘 알듯이, 충분히 더러운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윤리의 더 크고 지배적인 부분은 사회적 관계다. 다른 사람의 이목과 평판, 인정 욕구와 배제의 두려움 따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우리의 윤리는 최종적으로 조정되고 지속된다. 바로 그 윤리의 지배적 부분을 약화시키는 치명적 요인이 있다. 권력이다. 정치나 경제 같은 전통적인 권력만 아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 권력, 상징 권력은 전통적 권력과 경쟁하며 서로 가치를 교환한다. 권력과 윤리적 여백은 비례한다. 자유주의 인사들에게 만연한 성폭력 행각은 민주화 이후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보여준다. 결국 ‘보수나 진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했을 때 그 내용의 실체는 ‘권력’인 것이다. 우리는 독재와 민주, 보수와 진보(극우와 자유주의), 불의와 정의 따위 나꼼수식/유시민식 사회 구분들이 우리 실제 삶과 관련한 의미보다는 지배 계급 내에서 저희들끼리 분파 싸움의 의미가 결정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미투운동을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18/03/25 14:10 2018/03/25 14:10
2018/03/24 12:33
서양 중세에 이르기까지 사적 소유 개념은 없었다. 토지는 신의 것, 즉 어떤 인간의 것도 아니었다. 왕과 귀족은 영토가 있었지만 소유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농노는 안식일을 뺀 6일 가운데 절반은 영주의 땅에서 절반은 제 땅에서 노동했다. 영주의 땅, 제 땅은 실제 경계선이 아니라 비율로서만 존재했다. 사적 소유가 아니라 집단적 소유였다는 말이다. 어림잡아 전체 토지의 3분의 1 가량은 공유지로 존재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짐승을 방목하고 퇴비도 만들었다.

15세기 들어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양목장을 만드는 지주가 출현한다. 토마스 모어가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표현한 인클로저 운동이다. 살 길을 잃은 사람들은 유랑민이 되고 16~18세기 신흥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절대왕정의 폭력적 정책에 따라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를 형성해간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적 소유 개념은 자본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약탈과 폭력, 착취와 함께 창조된 것이다. 사적 소유 개념은 로크 등에 의해 자유주의 이념과 쌍을 이루며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다.

생시몽 오언 푸리에 같은 이상주의적 맥락이든 맑스의 과학적 맥락이든 사회주의 운동이 사적 소유의 철폐를 핵심 내용으로 한 건 당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맑스의 견해를 따라’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모든 걸 국유화한다. 그러나 맑스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맑스가 생각한 사회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함께 ‘사적 소유’(약탈과 착취에 기반한)는 없애되, 각자의 노동과 노력에 따른 ‘개인적 소유’는 인정하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는 결국 전제적 지배계급의 사적 소유 체제로 귀결하고 당연히 인민에 의해 붕괴된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역설적이게도 소유에 관한 자본주의적 관점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게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현정부의 토지 공개념 운운은 좋은 이야기지만 예의 입에 발린 말(그들은 미국 리버럴의 ‘정치적 올바름’을 답습하고 있고, 성공적인 여론을 얻고 있으며 그에 고무되어 있다)에 그칠 운명을 갖는다. 단지 그들 자신이 지대소득자들이라거나 위선자들이라서가 아니라, 앞서 말했듯 자유주의와 사적 소유, 특히 토지의 사적 소유는 애초부터 한몸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 토지만 사적 소유의 틀예서 예외로 두는 일 같은 건 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사회의 구상은 소유의 자유주의적 관점을 벗어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즉 토지를 비롯하여 어떤 인간도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분명히 하고, 사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를 구분하고 교정해가는 혁명적 전환이다.
2018/03/24 12:33 2018/03/24 12:33
2018/03/23 11:43
이명박 구속을 기념하며,
오랜 만에 꺼내 읽어본다.




2018/03/23 11:43 2018/03/23 11:43
2018/03/22 14:58
한국엔 여전히 이런 무식하고 촌스러운 부자가 인생에 대해 떠벌인다. 이 사람의 말마따나 살인적 경쟁이 판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절실함 없이 성공할 순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자본주의 시장에서 성공이란 반드시 다수의 실패를 필요로 전제로 한다는 것, 많은 성공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21세기의 부자들은 더 이상 인생의 의미를 경제적 성공에 두는 걸 자랑하지 않는다. 현재 인류의 생산력은 주 20시간 미만 노동으로도 모두 여유롭게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이다. 문명화한 인간은 그 사실로부터 사고를 하고 사회가 어떻게 새로 디자인되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근래 세계적인 부자들은 그 정도는 알고 있고 부의 증식을 지속하면서도 무식하고 촌스러운 부자로 보이진 않게 하기 위해 온갖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를 구사한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않다느니, 우리 같은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느니, 기후 문제에 연대해야 한다느니 등등 말이다. 누군가 이 사람에게 그런 물정이라도 알려주길.
2018/03/22 14:58 2018/03/22 1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