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1 17:39
근대적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의 권리와 평등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구현한 건 인간의 권리와 평등이 (백인) 부르주아 남성만에게만 주어지는 세상이었다는 것. 나머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권리와 평등을 진전시킨 건 급진적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자유주의에 대한 오랜 투쟁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기억할 것은 자유주의의 그런 기만성이 자유주의의 변함없는 속성이라는 것,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이상은 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으로만 실현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가 본디 자본주의 체제의 이념, 즉 부르주아 남성의 지배에 봉사하는 이념인 이상 그 속성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순 없다. 유럽 사민주의와 곧잘 비견되는, 루즈벨트 이후 형성된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촛불이 만든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 정권도 물론 마찬가지다. 급진적 투쟁과 견제가 없다면, 그저 믿고 맡기기만 한다면  오로지 제 속성대로 나아갈 것이다. 며칠 전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여유로운 얼굴로 맥주 파티를 한, 그 얼마 전엔 청문회장에 곤혹스러운 얼굴로 떼지어 앉아있던 바로 그 부르주아 남성들의 지배에 봉사하기 위해 말이다.
2017/08/01 17:39 2017/08/01 17:39
2017/07/24 23:08
성인이란 혼자일 수 있는 사람이다. 여행이든 공연이든 산책이든 식사든, 함께 할 사람이 있든 없든, 혼자도 할 수 있고 그걸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성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이상하게 보지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은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2017/07/24 23:08 2017/07/24 23:08
2017/07/23 12:34
옛 농촌의 마을 공동체 같은 자연 공동체에 환상을 가진 사람을 간혹 본다. 삭막함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오늘과 달리 가족같은 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환상이 위험한 퇴행인 건 자연 공동체엔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공동체에서 '가족 같은 정'이란 개인성을 말살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 공동체를 벗어나 자율적 개인으로 거듭남으로써 근대라는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자연 공동체 대신 '사회'를 만든다. 자연 공동체는 운명적이고 고정된 것이지만, 사회는 자율적 개인들이 얼마든 고치고 바꿔나갈 수 있다. 오늘 세상이 삭막함과 이기심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자연 공동체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사회가 없기(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왜 사회주의가 되었을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태도와 전망인데 왜 하필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근대는 자본주의의 뼈대 위에 자유, 평등, 우애(연대)를 이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시장 자유와 사적 소유로 자유를 축소하며, 평등과 연대를 파괴하는 속성을 가졌음이 밝혀진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일'이 '사회를 만드는 일'이 된 것이다. 사회주의가 근대의 이상을 부정한다는 생각은 오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덕에 위기에 처한 근대의 이상을 되살리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철폐'라는 한가지 방식으로만 생각하는 것 또한 오해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문제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모든 노력은 사회주의적인 것이다.
2017/07/23 12:34 2017/07/23 12:34
2017/07/19 17:05
사람은 어떤 관점을 갖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노예의 관점과 주인의 관점이 있다. 예컨대 외교부 장관은 남자가 해야 한다느니 밥하는 아줌마가 어쩌니 따위 망언을 일삼는 이언주를 보자. 많은 사람들은 ‘배운 사랍답지 않음’이라는 측면에서 그에게 분노한다. 그런 분노엔 배움에 대한 체제의 관점(체제가 심어준 관점)이 들어 있다. 배움의 가치를 제도 학력이나 학벌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배움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배우는가. 좀더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학력이나 학벌은 과연 배움과 인과관계가 있는가. 노년 세대만 해도 ‘배운 사람은 달라’식의 말을 사용하거나 들은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학력이나 학벌이 배움과 얼마간 인과관계가 있던 시절도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어떤가. 학력이나 학벌은 좀더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제 교환가치를 늘리기 위해, 나아가 다수의 잉여노동을 가로채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쓰인다. 오늘 학력이나 학벌은 배움과 무관하다. 그렇게 볼 때 이언주는 ‘배운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배워먹지 못한’ 사람이다. 두 관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는 이언주를 '나쁜 상전'으로 보고 후자는 '나쁜 인간'으로 본다. 전자는 '착한 상전'을 기대하는 태도로 이어지며 제아무리 분노하고 사회 정의를 외친다 해도 피지배 상태에 머물게 된다. 후자는 사회의 주인으로서 사회를 바꿔나가는 태도로 이어진다.
2017/07/19 17:05 2017/07/19 17:05
2017/07/16 13:43
“모든 사람이 원하는 분야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술이다.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고 사회가 최선의 형태로 조직되면 인간은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에겐 공상적인, 아니 오늘 현실을 생각한다면 쓸모없는 망상에 불과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케인즈는 어떤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인간의 지옥으로 보고 그 붕괴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지만 케인즈는 자본주의를 최선의 체제라 본 사람이다. 다만 자본주의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보이지 않는 손’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적절한 수정과 관리가 필요하다고 봤다. 알다시피 케인즈의 생각은 20세기의 절반 이상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틀이었다.

케인즈는 과학기술 발전과 생산력 혁신으로 다음 세기 초쯤(지금이다) 되면 주 15시간 노동을 하며 살게 될 거라고 낙관했다. 주 15시간이면 주 4일 노동으로 해도 하루 4시간이 채 못 된다. 이 정도면 앞의 마르크스의 망상과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여하튼 최근 무성한 4차 산업이니 AI니 하는 이야기들은 그 설레발이나 저의와 무관하게 생산력 혁신에 관한 케인즈의 예측이 실현되었거나 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케인즈가 말한 주 15시간 노동은 어디로 갔는가. 노동 시간은 줄지 않고 일자리만 줄고 있다. 일자리가 갈수록 더 빠르게 줄 거라는 게 모두의 걱정이다.

케인즈의 낙관은 왜 빗나갔을까. 사회가 잘못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발전과 생산력 혁신이 다수의 삶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의 이윤 추구에만 이용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과 관리가 사라지는 변화와 관련이 있는 건 물론이다. 다수는 그런 사회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즉 일자리 없는 미래를 정당한 상황으로 보면서 근심한다. 암담하고 무력하다. 건물주의 자식이 아님을 한탄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딱히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생산력은 케인즈의 말마따나 주 15시간 노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문제는 생산력 혁신이 자본의 이윤 추구에만 이용되는 사회를 방치하는가 다수의 삶에 기여하는 사회로 바꾸어내는가다. 그 변화에 모두의 미래가 달려있다. 변화가 쉽고 평화롭기만 할 수 있다면 누군들 변화에 참여하지 않을까. 그러나 자본 쪽에서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적어도 상식적이고 선량한 정치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아니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2017/07/16 13:43 2017/07/16 1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