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3 14:55
우리가 사회적으로 나쁜 놈들에게 늘 당하는 이유는, 모든 나쁜 놈은 ‘활동 중’엔 좋은 놈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나쁜 놈으로 여겨진다면 나쁜 놈에게 당할 이유도 없다. 또한 그건 나쁜 놈이 나쁜 놈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심지어 히틀러 같은 인류 최악의 괴물도 한창일 때는 구세주로 여겨졌으며, 바로 그 덕에 히틀러는 히틀러일 수 있었다. 나쁜 놈을 만드는 건 우리이며 나쁜 놈에 당하는 것도 우리다. 우리는 늘 나쁜 놈을 만들고 나쁜 놈에 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나쁜 놈보다는 지금 활동 중인 나쁜 놈, 즉 좋은 놈으로 여겨지는 나쁜 놈에 좀더 집중해야 한다.
2017/08/03 14:55 2017/08/03 14:55
2017/08/01 17:39
근대적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의 권리와 평등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구현한 건 인간의 권리와 평등이 (백인) 부르주아 남성만에게만 주어지는 세상이었다는 것. 나머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권리와 평등을 진전시킨 건 급진적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자유주의에 대한 오랜 투쟁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기억할 것은 자유주의의 그런 기만성이 자유주의의 변함없는 속성이라는 것,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이상은 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으로만 실현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가 본디 자본주의 체제의 이념, 즉 부르주아 남성의 지배에 봉사하는 이념인 이상 그 속성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순 없다. 유럽 사민주의와 곧잘 비견되는, 루즈벨트 이후 형성된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촛불이 만든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 정권도 물론 마찬가지다. 급진적 투쟁과 견제가 없다면, 그저 믿고 맡기기만 한다면  오로지 제 속성대로 나아갈 것이다. 며칠 전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여유로운 얼굴로 맥주 파티를 한, 그 얼마 전엔 청문회장에 곤혹스러운 얼굴로 떼지어 앉아있던 바로 그 부르주아 남성들의 지배에 봉사하기 위해 말이다.
2017/08/01 17:39 2017/08/01 17:39
2017/07/24 23:08
성인이란 혼자일 수 있는 사람이다. 여행이든 공연이든 산책이든 식사든, 함께 할 사람이 있든 없든, 혼자도 할 수 있고 그걸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성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이상하게 보지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은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2017/07/24 23:08 2017/07/24 23:08
2017/07/23 12:34
옛 농촌의 마을 공동체 같은 자연 공동체에 환상을 가진 사람을 간혹 본다. 삭막함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오늘과 달리 가족같은 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환상이 위험한 퇴행인 건 자연 공동체엔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공동체에서 '가족 같은 정'이란 개인성을 말살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 공동체를 벗어나 자율적 개인으로 거듭남으로써 근대라는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자연 공동체 대신 '사회'를 만든다. 자연 공동체는 운명적이고 고정된 것이지만, 사회는 자율적 개인들이 얼마든 고치고 바꿔나갈 수 있다. 오늘 세상이 삭막함과 이기심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자연 공동체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사회가 없기(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왜 사회주의가 되었을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태도와 전망인데 왜 하필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근대는 자본주의의 뼈대 위에 자유, 평등, 우애(연대)를 이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시장 자유와 사적 소유로 자유를 축소하며, 평등과 연대를 파괴하는 속성을 가졌음이 밝혀진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일'이 '사회를 만드는 일'이 된 것이다. 사회주의가 근대의 이상을 부정한다는 생각은 오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덕에 위기에 처한 근대의 이상을 되살리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철폐'라는 한가지 방식으로만 생각하는 것 또한 오해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문제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모든 노력은 사회주의적인 것이다.
2017/07/23 12:34 2017/07/23 12:34
2017/07/19 17:05
사람은 어떤 관점을 갖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노예의 관점과 주인의 관점이 있다. 예컨대 외교부 장관은 남자가 해야 한다느니 밥하는 아줌마가 어쩌니 따위 망언을 일삼는 이언주를 보자. 많은 사람들은 ‘배운 사랍답지 않음’이라는 측면에서 그에게 분노한다. 그런 분노엔 배움에 대한 체제의 관점(체제가 심어준 관점)이 들어 있다. 배움의 가치를 제도 학력이나 학벌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배움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배우는가. 좀더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학력이나 학벌은 과연 배움과 인과관계가 있는가. 노년 세대만 해도 ‘배운 사람은 달라’식의 말을 사용하거나 들은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학력이나 학벌이 배움과 얼마간 인과관계가 있던 시절도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어떤가. 학력이나 학벌은 좀더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제 교환가치를 늘리기 위해, 나아가 다수의 잉여노동을 가로채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쓰인다. 오늘 학력이나 학벌은 배움과 무관하다. 그렇게 볼 때 이언주는 ‘배운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배워먹지 못한’ 사람이다. 두 관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는 이언주를 '나쁜 상전'으로 보고 후자는 '나쁜 인간'으로 본다. 전자는 '착한 상전'을 기대하는 태도로 이어지며 제아무리 분노하고 사회 정의를 외친다 해도 피지배 상태에 머물게 된다. 후자는 사회의 주인으로서 사회를 바꿔나가는 태도로 이어진다.
2017/07/19 17:05 2017/07/19 1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