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1 23:06
우리는 부의 추구와 인정 욕구가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 본성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경제적 이득을 취할 때보다 양보할 때, 그리고 그런 사실을 밝혀 상찬받을 때보다 혼자만 알기로 할 때 더 기쁘다. 우리가 그렇다는 사실을 꼭 잊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2019/05/11 23:06 2019/05/11 23:06
2019/05/05 07:53
(이린이 날 아침, 근래 1~20대에서 부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바람이 떠올라 적어 본다.)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두말할 것 없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역사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인 전체’와 ‘조선인 전체’ 간의 일이 아닌 ‘일본 지배계급’과 ‘조선 인민’ 간의 일이었다. 조선 지배계급은 대체로 상황에 영합하여 안락을 유지했다. 일본 인민은 조선 인민에 비해 그리 나을 게 없었다. 제국주의 국가 인민은 식민지 인민에 대한 제국주의 초과 착취의 일부를 제공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본 인민은 지배계급이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고 실제로 일으킴으로써 끝없이 수탈당하고 전쟁에 끌려나가 죽어야 했다. 결국 일본의 식민지 경험이 오늘 일본 사회 전체, 일본인 전체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될 이유는 전혀 없다. 오로지 당시 일본 지배계급과 오늘 일본의 지배계급 중 극우 세력에 대한 분명한 적대여야 한다. 그래서 ‘친일파’라는 말은 틀렸다. ‘일제 부역자’라고 해야 한다. 친일파는 사실 지배 전략으로 기획되고 유포된 말이다. 반민특위를 해체한 이승만도 그렇지만,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사무라이 정신을 신봉한 사람답게 내내 일본 극우세력과 소통하고 지원받았다. 그러나 ‘민족의 이름으로’ 일본 문화를 전면 금지했다. 일본 지배계급에 대한 반감을 일본 사회와 일본인에 대한 무분별한 반감으로 희석하고, 제 실체까지 숨기려는 의도였다. 물론 더 중요한 건 외부의 적으로 내부의 문제를 덮는 고전적 지배 전략이다. 일본 극우 세력은 그에 부응하여 이따금씩 독도 문제 등의 ‘망언’을 제공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런 식의 지배 전략은 워낙 손쉽고 효과는 커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정권을 막론하고 이어져 왔다. 문재인 정권은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보다 오히려 적극적인 편이다. 한국의 주인이 한국 인민이라고 일본의 주인이 일본 인민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두 나라 인민 사이의 반일 감정이나 혐한 감정은 그저 ‘다루기 편한 개돼지’가 되는 일일 뿐이다. 이 이야기를 언젠가 노동자 교육 시간에 이렇게 요약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이건희 씨와 동족입니까, 일본의 평범한 아저씨와 동족입니까?"
2019/05/05 07:53 2019/05/05 07:53
2019/05/04 08:23
어떤 문제로 번민할 때 최선의 방법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문제로 번민할 때 해줄 충고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때론 어리석은 선택으로만 얻을 수 있는 고귀함도 있다.
2019/05/04 08:23 2019/05/04 08:23
2019/05/02 09:14
마르크스가 특별한 인물이긴 하나 그 위대함에 빠지는 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건 마르크스라는 한 인간이 아니라 그가 남긴 사유와 이론적 성과이고 그걸 지금 현실에서 현명하게 사용하는 일이다. 이런 태도는 이제 어지간한 사회에선 지식인의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유독 한국의 진보 진영엔 이런 상식적 태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내가 마르크스주의 해봐서 아는데 마르크스는 폐기되어야 해’라고 말한다. 굳이 그 말을 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한다. 리버럴 천지인 한국의 지식 사회와 제도 미디어, 혹은 기금이나 지원금을 쥔 관료들에게서 그 말은 꽤 호감을 얻는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그들은 다만 한때 멋모르고 스탈린주의에 경도된 적이 있을 뿐이다. 동구 패망으로 그들이 받은 상처와 자괴감을 이해한다. 요컨대 그들의 마르크스 알레르기는 제 상처와 자괴감을 떨쳐내려는 뒤틀린 노력이다. 그러나 중년에 이르고도 여전히 그렇다면, 토론보다는 전문가의 치료를 고려하는 게 좋겠다. 병행하여 권하고 싶은 건 마르크스를 다시 읽는 일이다. 실은 한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이건 내가 해봐서 안다.
2019/05/02 09:14 2019/05/02 09:14
2019/04/29 09:33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정치는 당연히 존재하는 ‘기본값’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근대성의 요체는 자본주의를 반대/견제하는 좌파 정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유럽이든 북유럽이든 좀 낫다는 사회들의 공통점이며, 그 사회들이 ‘좀 나은’ 비결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치적 근대화는 ‘민주화’로 대변되는데 민주화는 곧  ‘독재 타도’였다. 문제는 독재가 해소되고도 정치적 근대성은 독재 타도(‘수구 청산’으로 이름 바뀌어)로 축소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갈수록 정치적 근대성은 퇴행해왔다.(참고로, 민노당의 2004년 의석수는 10명이다.) 독재가 해소된 지 30년이 더 지났지만 한국의 진보 시민들의 가장 큰 정치적 관심은 변함없이 독재 타도이다. 정치는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일이다. 지금 한국에서 현재와 미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주제는 뭘까. ‘자유주의 정치와 수구 정치의 연합으로서 자본 독재’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정치는 ‘과거의 무한 복기’를 의미한다. 정치권과 정치인의 기만과 후진성을 탓하는 건 터무니없다. 이 모든 상황은 전적으로 시민 스스로의 선택이며, 정치권과 정치인은 그 선택을 충직하게 반영할 뿐이다. 노동이나 교육, 집 등 시민들이 제 삶에서 토로하는 거의 모든 사회적 고통이 자본 독재에 기인하는데도 시민들이 자본 독재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기이한 일이긴 하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한국은 “마술에 걸려 왜곡되고 뒤집힌 사회이며, 자본 선생(Monsieur le Capital)과 토지 여사(Madame la Terre)가 사회적인 인물이자 단순한 사물로서 괴상한 춤을 추고 있는 사회”인 셈이다. 그러나 ‘마술에 걸려 왜곡되고 뒤집힌 사회’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엄연히 ‘이성과 합리성이 작동하는 온전한 세계’이다.
2019/04/29 09:33 2019/04/29 09:33